왕족 이해승 등 친일파 재산 410억 국가귀속

아놔2007.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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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금 뉴스에서 왕족 이해승 등 친일파 재산 410억 국가귀속 이라는 기사를 보고

 

박수를 치며 기뻐했습니다 ㅋ

 

 기사에 명단도 떠서 대표적인 사람 몇명에 친일 행각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이해승

 

이해승(李海昇, 1890년 ~ ?)은 일제 통치에 협조한 조선 왕실의 종친이다. 아호는 송석(松石)이

며, 청풍군(淸豊君)에 봉해졌다.

 

 대한제국 고종과는 가까운 인척 관계이다. 아버지 이한용이 청안군 이재순(이재순은 철종의 형

영평군에게 입적)에게 입적되어 장조의 손자인 전계대원군의 고손이 되었다.

 

1902년 철종의 예릉 능참봉에 임명되고 1909년 수학원을 졸업한 다음 가선대부를 거쳐 정2품

자헌대부에 올랐다.

 

1910년 10월 16일 21세의 나이에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고, 매국 공채 16만2천원을

사들였다그는 대한제국이 멸망할 무렵 비교적 젊은 나이였던 종친 가운데 일본 귀족원 의원을

지낸 이기용과 함께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의 통치에 적극 협력했다. 태평양 전쟁 기간 중에도

전쟁에 협조하여,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손자인 이우영은 영평군 소유의 누동궁 부지에 지어진 호텔 그랜드 힐튼 서울 회장이다

 

 

 


이지용

 

이지용(李址鎔, 1870년 ~ 1928년)은 을사오적 중 하나이며, 을사 조약 체결 당시 내부대신

이었다. 자는 경천(景天), 호는 향운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1887년 문과에 급제, 경상감찰사, 황해감찰사를 거쳐 궁내부 협판 및 주일 공사를 지내고

1904년 외부대신으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한일의정서를 조인했다. 후에 법부대신,

판돈녕부사 등을 거쳐 1905년 내부대신으로 을사 조약에 찬성, 조인에 서명함으로써 을

사오적의 하나가 되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

고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

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고희경

 

고희경(高羲敬, 1873년 ~ 1934년)은 일제 강점기에 백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 인물이다.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으로 활동한 고영희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개화파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미국인을 초빙하여 영어를 가르친 국내 최초의 근대식 공립

학교 육영공원(育英公院)을 1885년 졸업하고 1891년 진사가 되면서 관직에 나가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뛰어난 외국어 실력으로 외교 업무를, 이후에는 황실 관련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1902년 영국의 에드워드 7세 즉위 축하 사절단(단장 이재각)의 일원으로 영국에 다녀왔다.

 

1906년 예식원 부경(副卿)과 제도국 의정관, 궁내부의 예식과장과 예식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일본 황태자를 맞는 봉영위원(奉迎委員)을 지냈다. 같은해 시강원에서 일하면서 영친왕의 강제

일본 유학 때 배종했다.

 

한일 합방 조약 체결 후에는 황실이 왕실로 격하되었고, 고희경은 이왕직 사무관으로 계속 왕실

관련 업무를 맡았다. 이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순종의 가족 사진에 등장하기도 한다.

 

아버지 고영희가 1916년 사망하자 자작 작위를 물려 받았다가 1920년 백작으로 승급했고, 192

6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고영희와 고희경 부자는 유일하게 2대에 거쳐

중추원 고문을 지낸 인물들이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고영희와 함께 선정되었다. 두 명단에는 1934년 6월 1일 그의 작

위를 습작 받은 고흥겸도 포함되어 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고희경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고 11월 22일 제3차 재산환수 대상자를 결정하면서 친일반민족 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시행 이후 제3자에게 처분한 고희경의 재산까지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다

 


민영휘


명성황후의 여흥 민씨 일족으로서 1877년 별시(別試) 병과(丙科)에 합격한 뒤 승진을 거듭하며

 화려한 관력을 쌓게 되었다. 그는 여흥 민씨의 대표급으로서 백성들의 원성이 많이 집중되어,

임오군란 때는 가옥이 부서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친일 이력 이전에는 청나라와 밀착한 수구파의 거두였다. 갑신정변 때는 청나라 군대를 이용

하여 친일 개화 세력을 몰아냈으며, 위안스카이와 결탁한 뒤 전권을 휘두르다가 청일 전쟁이

발발한 이후 개화파에 의해 유배되었다. 그는 유배지를 탈출하여 청나라 군대로 피신하였고,

흥선대원군 측의 이준용과 교환되어 귀국하였다.

 

이후로는 정치권에서는 밀려나 1906년 휘문의숙(휘문고등학교의 전신)을 설립하고 대한천일

은행 설립에 관계하기도 했다. 그는 상대적으로 명성황후와 촌수가 먼 편이지만 민씨의 수괴가

되는 실력을 선보인 바 있듯이, 경제에 밝아 쉽게 갑부가 되었다. 초기에는 관직을 이용하여 수

탈한 재물이었고 일제 강점기 동안에도 이 재산을 계속 불려서 조선 최고의 갑부 중 한 사람으로

꼽혔다.

 

1910년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고 매국 공채 5만원을 사들였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에 선정되었다.

 


손병준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함경남도 장진군에서 출생했다.

 

서울에 왔다가 민태호의 눈에 띄어, 민태호의 애첩 홍씨 집에서 일하게 되었고, 1871년 무과에

합격하여 수문장청에 배속되었고, 1873년에는 도총문 도사·사헌부 감찰 등을 지냈다[2]. 188

4년 갑신정변 후 밀명을 받고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도리어 설득되어

그의 동지가 되었다.

 

귀국하여 그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태호의 양 아들인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 흥해군수·양지

현감 등을 역임하다가 체포령이 내려져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 통역으로 귀국한 후부터 완전히 친일파로 변신하여, 일진회를 조직하였다.

 

1907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내부대신을 지내면서 한일합방 상주문, 청원서를

 제출하고 이론에까지 건너가 합방 후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으며 다시 백작에 올랐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

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에 자신의 작위를 습작 받은 아들 송종헌과 함께

선정되었다.

 

2007년 5월 2일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송병준과 송종헌의 재산을 국

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

 

 

한창수


서울 출신이다. 대제학을 지낸 한장석의 아들로 태어나 한윤석에게 입적되었다.

 

1888년 과거에 급제하여 승정원에서 주로 벼슬을 하였으며, 1895년에는 한성재판소의 판사를

맡기도 했다. 외국어에 능통하여 한성외국어학교, 한성사범학교의 교장직과 함께 유럽 지역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바도 있었다.

 

외교 관계 쪽 관직을 맡으며 일본에 드나들면서 친일 세력과 가까워진 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었다.

일제의 신임을 받아 고종과 순종 등 왕실을 전담하는 이왕직 장관도 역임했다.

 

그는 친일로 얻은 권세를 이용한 치부, 거침 없는 친일적 언행에 더하여, 이왕직 장관을 지내

면서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를 어린 나이에 일본에 유학 보내고 일본인과 강제로 결혼하게

하여 결국 정신병을 앓게 한 일로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한창수가 이왕직 장시국장 재직 중

고종이 사망했는데, 고종 독살설에 이완용, 이기용, 윤덕영, 한상학, 그리고 어의 안상호 등과

함께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한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공개된 민

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에 자신의 작위를 물려받은 아들 한상기

와 함께 선정되었다.

 

2007년 5월 2일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한창수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

기로 결정했고, 11월 22일에는 친일반민족 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시행

이후 제3자에게 처분한 재산에 대해서도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다

 

2007년 5월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민영휘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고, 11월 22일 제3차 재산환수 대상자를 선정하면서 친일반민족 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 시행 이후 제3자에게 처분한 민영휘의 재산까지 국가에 귀속시킨다는 결

정을 내렸다

 

 

 

민병석


민병석(閔丙奭, 1858년 ~ 1940년)은 구한말의 정치인으로 일제 강점기에 일제 통치에 적극 협

조했다. 이완용은 그의 처내종으로 사돈간이 되며, 절친한 친구 사이이기도 했다.

 

충청남도 회덕군(현 대전) 출생으로 1879년(고종 16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합격하

였다.명성황후의 지원 아래 집권한 여흥 민씨 가문의 한 사람이었기에 출세 가도를 달렸다.

특히,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호위하여 이후 총애를 받았다.

 

1984년 성균관의 대사성과 도승지를 겸하는 요직에 임명되었고, 갑신정변 때는 일본으로 달

아난 김옥균 암살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명성황후와 정적인 흥선대원군의 대결을 이용

하려는 각국의 음모가 진행되는 동안 잠시 피해 있다가, 1888년 예조참판에 임명된 것을 시

작으로 또다시 고위직에 머물렀다. 특히 1889년부터 5년간 평안감사를 지내면서 백성들의

원망이 높았고 조병세의 탄핵을 받을만큼 악정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여흥 민씨 세력이 그랬듯이 그도 처음부터 친일파였던 것은 아니다. 1894년 청일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청나라와 내통하여 일본을 몰아내려다가 실패하여 유배된 바 있고, 삼

국간섭 이후 풀려났다가 아관파천으로 친러파가 집권했을 때는 친러파의 거두였던 이완용

과의 친분으로 내각에 기용되었다. 이후 일본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이완용과 함께 친일파

로 전향, 1905년 이토 히로부미 초빙 작업을 위해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1909년 자신과 밀착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저격당하자 장례식에 조문 사절로 다녀

왔다.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경술국적의 한 사람으로서 적극 협력하여 일본 정부로부

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1년에는 이왕직 장관이 되어 의민태자와 이방자의 정략결혼에

깊이 개입하였다 1925년부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5회 중임하였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자작 작위를 습작 받은 아들 민홍기와 함께 선정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목록에는 다른 아들인 민복기도 법조 부문 친일 행위자로 포함되어 있다.

 

2007년 5월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민병석 소유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

 

 

 

 

 

너무 많아서 스크롤에 압박이.....

 

 인물정보 이외에 친일 행각을 붉은 색으로 해보았는데... 눈이 빠질지경입니다

 

 

 인물 정보는 ko.wikipedia.org 참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