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 깊도록 무영과 담소를 나누던 광해가 동이 터서야 문을 나섰다. 그가 자신을 찾아와 무엇을 풀어내려 했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권력의 피비린내 나는 단칼 앞에 형제간의 정조차 끊어내야 하는 그의 심정이 달게 마시지 못하는 술잔 속에 드리워져 있었다. 모든 힘을 풀어내고 편히 쉬어질 곳을 찾아든 그였으리라. 그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무영은 침묵으로 자신의 뜻을 보였다. 문을 나서던 광해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무영을 돌아보았다.
“어찌해서 이번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느냐. 나는 오늘 벗으로 너를 찾아왔다. 사심 없이 나를 질타하고 길을 보여줄 사람이 필요해 왔다. 너마저 그런 나를 배척하려 하느냐?”
광해의 시선을 곧게 받은 무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떠한 명분으로도 사람의 도리를 버리고서는 그 뜻이 곧게 세워질 수 없다 여기옵니다.”
광해의 얼굴에서 깊은 시름이 헛웃음으로 새어났다. 아마도 그런 무영을 알았으리라. 상처를 터트려 고름을 짜내지 않고서는 새살을 돋아내게 할 수 없음을 광해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입으로 듣는 말이 무엇보다 깊은 통증이 될 것을 알면서도 차라리 그렇게 확인해 쏟아버리고 싶었다.
“참으로 잔인하고 섬뜩한 일침이구나. 너는 늘 내게 서운함과 또 하나의 길을 열게 하는 구나.”
광해가 돌아가고 무영은 남은 술을 혼자 비웠다. 광해의 깊은 시름보다 운을 보는 그의 시선이 더 무겁게 자신을 괴롭히고 있음을 알아 차라리 가슴에 담은 그것을 토해내 버리고 싶었다. 무영이 늦도록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자 운이 결국 더 보지 못하고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술이 과하듯 해요.”
“앉아라. 아니다 너도 한잔하겠느냐.”
운을 빤히 응시하던 무영이 큰 웃음을 지어보였다. 술을 하지 못하는 운을 알면서도 괜한 농을 던지고 있었다. 마음이 불편하고 무거울 때 습관처럼 내보이는 모습이었다.
“이제 그만하세요. 날이 밝으면 검술 대련이 있을 텐데 그만 눈을 좀 붙이세요.”
무영의 술잔을 치운 운이 술상을 옆으로 밀어냈다. 반다지에서 이부자리를 내려 펼치는 운에게 무영이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입을 열었다.
“왜...... 그리 웃었느냐. 왜 그리 부끄러워했느냐?”
갑작스러운 무영의 말에 운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리 웃지 마라. 다른 사람한테는..... 그리 웃지 마라. 그리 부끄럽게 얼굴 붉히지 마라.”
무영이 이부자리 위로 털썩 쓰러졌다. 그제야 무영의 말뜻을 알아가진 운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단 한 번도 그가 없는 세상을 바라본 적 없었다. 자신이 살아 숨 쉬는 모든 곳에 그가 있었고, 세상의 풍파도 그가 있어 견뎌낼 수 있었다. 무영이 신분을 속이고 사는 지금이 차라리 운에게는 더 다행한 날들이었다. 그런 무영이 운에게 투정을 하며 자신만 봐라보라 말하고 있었다.
‘너무도 아까운 당신께서 제가 투정을 하네요.
제 사람인 듯 서운함 내보이며 아이처럼 싫다 하네요.
이리 살면 좋겠어요.
서로를 세상으로 알아 그 속에서 울고 웃으며 이리 살면 좋겠어요.
자꾸 세상 속에 당신을 내어주기 싫어져요.’
무영이 태어나 여섯 살이 되던 해 당파의 음모에 휘말 혀 집안이 몰락했다. 신분을 숨기고 무사라는 병풍 속에 가려있긴 했으나 광해가 보위를 물려받아 옥좌에 앉게 되면 그 집안의 억울함 또한 구명될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천하기 그지없는 노비의 몸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에겐 짐이 될 일이었다. 자신이 그의 신분을 알고 있다는 것을 숨긴 채 누이인 듯 벗인 듯 그를 대하면서도 근접할 수 없는 그 어떤 경계에 매 순간 운의 가슴이 쓰라렸다.
그를 바라보는 가슴이 붉은 백일홍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눌러 참기위해 운은 결코 무사 복을 벗어낼 수 없었다. 차라리 그렇게라도 그의 곁에 머물고 싶은 마지막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
거친 호흡을 내쉬며 잠속에 빠져드는 무영을 바라보는 운의 눈 속에 아픈 사랑이 어른거렸다. 자신의 소신과 광해의 흔들림 앞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그를 보고 있는 것이 아픈 가슴만큼 무게를 더해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자신마저 통증이 된다면 그것은 더 견딜 수 없는 일이 될 것이었다.
운이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서려 하자 취한 정신 속에서도 잠들지 못하고 있던 무영이 운의 손을 붙잡아 끌어 당겼다.
“왜 대답을 않는 것이냐? 그리 웃지 말라 하지 않느냐. 내가 싫다 하지 않느냐. 마마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나는 싫다.”
고개를 돌린 운의 두 볼에 뜨거운 가슴이 녹아내렸다. 졸린 듯 무영의 목소리가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나는 싫다. 운아! 네가 다른 곳을 보는 것도, 다른 이에게 붉은 얼굴을 보이는 것도, 나는 싫다.... 나는 싫다... 나는....'
운을 잡았던 무영의 손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3. 인연의 소용돌이
광해가 무영을 찾아왔던 다음날 어린 영창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있던 선조가 풍으로 자리에 누웠다. 광해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비망기를 내렸던 선조가 돌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광해의 측근들을 잘라내고 급기야 문안을 드리러 간 광해를 문전박대하는 것으로 그 뜻을 내 보였다. 명에 승인을 받지 못한 것을 빌미로 더 이상 세자를 운운하지 말라며 앞으로의 문안도 받지 않겠다는 선조의 말에 광해의 두 눈에 분노의 핏발이 서렸다.
종일토록 식음을 폐하고 누구도 만나지 않던 광해가 불현듯 사냥차비를 해 무영을 찾았다. 광해의 불편한 심기를 알아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고 있던 개시의 가슴이 한순간 싸늘하게 떨려왔다. 가장 두렵고 아픈 순간에 자신을 찾아 그 마음을 풀어놓던 광해였다. 그런 그가 생의 가장 위태로운 바람 앞에 다른 곳으로 발길을 잡은 것이 불안감을 자아내면서도 여인의 묘한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가 무영을 아끼는 것은 이미 모르지 않는 일이었다. 개시 또한 그가 일개 무사의 제목이 아님을 알아 광해가 그와 나누어 가지는 세월의 정을 관여치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무영을 찾는 광해의 시선이 다른 향기를 쫒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무사들의 경합이 있던 날 광활한 대지를 활개 치며 말을 달리는 운에게서 눈을 때지 못하던 광해를 본 이후로는 그 불안감들이 더해가고 있었다.
무영의 집 앞에 선 광해가 마당에서 활을 손보고 있던 운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늘 머리태를 두르고 있던 모습에 익숙해 있던 광해의 시선이 정갈하게 땅아 내린 운의 머리 모양에 넋을 놓은 듯 시선을 때지 못하고 있었다.
전통에서 활을 꺼내던 운이 담 쪽의 말울음 소리에 고개를 돌리다 미소를 머금고 선 광해를 보고 놀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척을 아니 하시고.....”
마당으로 들어선 광해가 사병을 물리고 운이 손보던 활을 들어 시위를 당겨보았다.
“많이 낡았구나. 네가 그 손에 굳은살이 배도록 잡았을 터이니 활 또한 주인을 알아 열심히 제몫을 다한 모양이구나.”
“그래서 편하옵니다. 눈을 감고도 제 것인지 알아볼 수 있어 이것보다 편하고 나를 잘 따르는 것이 없사옵니다.”
“너와 무영이 그러하겠구나.”
불현듯 흘려내는 광해의 말에 운이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선조와의 일이 이미 조정 내부와 궁 밖으로까지 번져 그를 두고 끈이 끊어져버린 연의 형상이라며 허울뿐인 세자자리에서 언제 쫓겨나 어느 바람에 몸이 찢길지 모를 일이라며 입을 모으고 있었다. 광해의 미소 뒤로 내려깔린 무게를 알았기에 운의 마음에 연민과 애잔함이 밀려들었다.
“오라버니께서는 오늘 창검 경합이 있는 날이라 아미산 수련 터에 올랐사옵니다.”
“그랬느냐. 너는 어찌해서 가지 않았느냐?”
“........”
운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 연유를 짐작했던지 광해가 넘겨 물었다.
“혹여 아직도 네가 여인이라 하여 불편하게 구는 자들이 있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알았다. 불편하면 더 이상 묻지 않으마.”
마루에 올라앉은 광해가 빙긋이 웃으며 운을 건너다보았다.
“여인이구나. 그리하니 청상 여인이구나.”
그 말에 또 다시 얼굴이 붉어지려던 운이 지난밤의 무영을 떠올려 고개를 돌렸다.
“그럼 오늘은 너와 가야겠구나. 내 오늘 산야를 다 뒤져서라도 큼직한 놈으로 한 마리 잡아올 요량이다. 그것으로 밤새 안주삼아 술을 할 요량이다. 함께 가주겠느냐?”
“들어가 차비를 하고 나오겠사옵니다.”
“이미 활도 손을 다 보아두었고 무엇을 더 차비한단 말이냐. 이 길로 나서면 될 것을...”
“........머리를 내려 사냥에 불편할 듯 해서..”
“아니다. 네게는 훨씬 잘 어울리는 모양이다.”
광해와 길을 나서던 운이 마을을 빠져나오다 주막에 들러 무영에게 말을 남겼다. 사병들을 모두 물리고 운과 나란히 길을 잡은 광해의 어깨가 처음보다 편해보였다. 들판에 이르자 광해가 운에게 앞길을 열어주었다. 몸을 낮추어 말과 하나인 듯 바람처럼 가볍게 말을 달리는 운의 모습이 잠시나마 그 마음을 풀어주고 있었다.
달의 그림자4 (인연의 소용돌이)
새벽이 깊도록 무영과 담소를 나누던 광해가 동이 터서야 문을 나섰다. 그가 자신을 찾아와 무엇을 풀어내려 했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권력의 피비린내 나는 단칼 앞에 형제간의 정조차 끊어내야 하는 그의 심정이 달게 마시지 못하는 술잔 속에 드리워져 있었다. 모든 힘을 풀어내고 편히 쉬어질 곳을 찾아든 그였으리라. 그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무영은 침묵으로 자신의 뜻을 보였다. 문을 나서던 광해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무영을 돌아보았다.
“어찌해서 이번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느냐. 나는 오늘 벗으로 너를 찾아왔다. 사심 없이 나를 질타하고 길을 보여줄 사람이 필요해 왔다. 너마저 그런 나를 배척하려 하느냐?”
광해의 시선을 곧게 받은 무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떠한 명분으로도 사람의 도리를 버리고서는 그 뜻이 곧게 세워질 수 없다 여기옵니다.”
광해의 얼굴에서 깊은 시름이 헛웃음으로 새어났다. 아마도 그런 무영을 알았으리라. 상처를 터트려 고름을 짜내지 않고서는 새살을 돋아내게 할 수 없음을 광해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입으로 듣는 말이 무엇보다 깊은 통증이 될 것을 알면서도 차라리 그렇게 확인해 쏟아버리고 싶었다.
“참으로 잔인하고 섬뜩한 일침이구나. 너는 늘 내게 서운함과 또 하나의 길을 열게 하는 구나.”
광해가 돌아가고 무영은 남은 술을 혼자 비웠다. 광해의 깊은 시름보다 운을 보는 그의 시선이 더 무겁게 자신을 괴롭히고 있음을 알아 차라리 가슴에 담은 그것을 토해내 버리고 싶었다. 무영이 늦도록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자 운이 결국 더 보지 못하고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술이 과하듯 해요.”
“앉아라. 아니다 너도 한잔하겠느냐.”
운을 빤히 응시하던 무영이 큰 웃음을 지어보였다. 술을 하지 못하는 운을 알면서도 괜한 농을 던지고 있었다. 마음이 불편하고 무거울 때 습관처럼 내보이는 모습이었다.
“이제 그만하세요. 날이 밝으면 검술 대련이 있을 텐데 그만 눈을 좀 붙이세요.”
무영의 술잔을 치운 운이 술상을 옆으로 밀어냈다. 반다지에서 이부자리를 내려 펼치는 운에게 무영이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입을 열었다.
“왜...... 그리 웃었느냐. 왜 그리 부끄러워했느냐?”
갑작스러운 무영의 말에 운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리 웃지 마라. 다른 사람한테는..... 그리 웃지 마라. 그리 부끄럽게 얼굴 붉히지 마라.”
무영이 이부자리 위로 털썩 쓰러졌다. 그제야 무영의 말뜻을 알아가진 운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단 한 번도 그가 없는 세상을 바라본 적 없었다. 자신이 살아 숨 쉬는 모든 곳에 그가 있었고, 세상의 풍파도 그가 있어 견뎌낼 수 있었다. 무영이 신분을 속이고 사는 지금이 차라리 운에게는 더 다행한 날들이었다. 그런 무영이 운에게 투정을 하며 자신만 봐라보라 말하고 있었다.
‘너무도 아까운 당신께서 제가 투정을 하네요.
제 사람인 듯 서운함 내보이며 아이처럼 싫다 하네요.
이리 살면 좋겠어요.
서로를 세상으로 알아 그 속에서 울고 웃으며 이리 살면 좋겠어요.
자꾸 세상 속에 당신을 내어주기 싫어져요.’
무영이 태어나 여섯 살이 되던 해 당파의 음모에 휘말 혀 집안이 몰락했다. 신분을 숨기고 무사라는 병풍 속에 가려있긴 했으나 광해가 보위를 물려받아 옥좌에 앉게 되면 그 집안의 억울함 또한 구명될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천하기 그지없는 노비의 몸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에겐 짐이 될 일이었다. 자신이 그의 신분을 알고 있다는 것을 숨긴 채 누이인 듯 벗인 듯 그를 대하면서도 근접할 수 없는 그 어떤 경계에 매 순간 운의 가슴이 쓰라렸다.
그를 바라보는 가슴이 붉은 백일홍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눌러 참기위해 운은 결코 무사 복을 벗어낼 수 없었다. 차라리 그렇게라도 그의 곁에 머물고 싶은 마지막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
거친 호흡을 내쉬며 잠속에 빠져드는 무영을 바라보는 운의 눈 속에 아픈 사랑이 어른거렸다. 자신의 소신과 광해의 흔들림 앞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그를 보고 있는 것이 아픈 가슴만큼 무게를 더해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자신마저 통증이 된다면 그것은 더 견딜 수 없는 일이 될 것이었다.
운이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서려 하자 취한 정신 속에서도 잠들지 못하고 있던 무영이 운의 손을 붙잡아 끌어 당겼다.
“왜 대답을 않는 것이냐? 그리 웃지 말라 하지 않느냐. 내가 싫다 하지 않느냐. 마마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나는 싫다.”
고개를 돌린 운의 두 볼에 뜨거운 가슴이 녹아내렸다. 졸린 듯 무영의 목소리가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나는 싫다. 운아! 네가 다른 곳을 보는 것도, 다른 이에게 붉은 얼굴을 보이는 것도, 나는 싫다.... 나는 싫다... 나는....'
운을 잡았던 무영의 손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3. 인연의 소용돌이
광해가 무영을 찾아왔던 다음날 어린 영창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있던 선조가 풍으로 자리에 누웠다. 광해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비망기를 내렸던 선조가 돌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광해의 측근들을 잘라내고 급기야 문안을 드리러 간 광해를 문전박대하는 것으로 그 뜻을 내 보였다. 명에 승인을 받지 못한 것을 빌미로 더 이상 세자를 운운하지 말라며 앞으로의 문안도 받지 않겠다는 선조의 말에 광해의 두 눈에 분노의 핏발이 서렸다.
종일토록 식음을 폐하고 누구도 만나지 않던 광해가 불현듯 사냥차비를 해 무영을 찾았다. 광해의 불편한 심기를 알아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고 있던 개시의 가슴이 한순간 싸늘하게 떨려왔다. 가장 두렵고 아픈 순간에 자신을 찾아 그 마음을 풀어놓던 광해였다. 그런 그가 생의 가장 위태로운 바람 앞에 다른 곳으로 발길을 잡은 것이 불안감을 자아내면서도 여인의 묘한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가 무영을 아끼는 것은 이미 모르지 않는 일이었다. 개시 또한 그가 일개 무사의 제목이 아님을 알아 광해가 그와 나누어 가지는 세월의 정을 관여치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무영을 찾는 광해의 시선이 다른 향기를 쫒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무사들의 경합이 있던 날 광활한 대지를 활개 치며 말을 달리는 운에게서 눈을 때지 못하던 광해를 본 이후로는 그 불안감들이 더해가고 있었다.
무영의 집 앞에 선 광해가 마당에서 활을 손보고 있던 운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늘 머리태를 두르고 있던 모습에 익숙해 있던 광해의 시선이 정갈하게 땅아 내린 운의 머리 모양에 넋을 놓은 듯 시선을 때지 못하고 있었다.
전통에서 활을 꺼내던 운이 담 쪽의 말울음 소리에 고개를 돌리다 미소를 머금고 선 광해를 보고 놀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척을 아니 하시고.....”
마당으로 들어선 광해가 사병을 물리고 운이 손보던 활을 들어 시위를 당겨보았다.
“많이 낡았구나. 네가 그 손에 굳은살이 배도록 잡았을 터이니 활 또한 주인을 알아 열심히 제몫을 다한 모양이구나.”
“그래서 편하옵니다. 눈을 감고도 제 것인지 알아볼 수 있어 이것보다 편하고 나를 잘 따르는 것이 없사옵니다.”
“너와 무영이 그러하겠구나.”
불현듯 흘려내는 광해의 말에 운이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선조와의 일이 이미 조정 내부와 궁 밖으로까지 번져 그를 두고 끈이 끊어져버린 연의 형상이라며 허울뿐인 세자자리에서 언제 쫓겨나 어느 바람에 몸이 찢길지 모를 일이라며 입을 모으고 있었다. 광해의 미소 뒤로 내려깔린 무게를 알았기에 운의 마음에 연민과 애잔함이 밀려들었다.
“오라버니께서는 오늘 창검 경합이 있는 날이라 아미산 수련 터에 올랐사옵니다.”
“그랬느냐. 너는 어찌해서 가지 않았느냐?”
“........”
운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 연유를 짐작했던지 광해가 넘겨 물었다.
“혹여 아직도 네가 여인이라 하여 불편하게 구는 자들이 있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알았다. 불편하면 더 이상 묻지 않으마.”
마루에 올라앉은 광해가 빙긋이 웃으며 운을 건너다보았다.
“여인이구나. 그리하니 청상 여인이구나.”
그 말에 또 다시 얼굴이 붉어지려던 운이 지난밤의 무영을 떠올려 고개를 돌렸다.
“그럼 오늘은 너와 가야겠구나. 내 오늘 산야를 다 뒤져서라도 큼직한 놈으로 한 마리 잡아올 요량이다. 그것으로 밤새 안주삼아 술을 할 요량이다. 함께 가주겠느냐?”
“들어가 차비를 하고 나오겠사옵니다.”
“이미 활도 손을 다 보아두었고 무엇을 더 차비한단 말이냐. 이 길로 나서면 될 것을...”
“........머리를 내려 사냥에 불편할 듯 해서..”
“아니다. 네게는 훨씬 잘 어울리는 모양이다.”
광해와 길을 나서던 운이 마을을 빠져나오다 주막에 들러 무영에게 말을 남겼다. 사병들을 모두 물리고 운과 나란히 길을 잡은 광해의 어깨가 처음보다 편해보였다. 들판에 이르자 광해가 운에게 앞길을 열어주었다. 몸을 낮추어 말과 하나인 듯 바람처럼 가볍게 말을 달리는 운의 모습이 잠시나마 그 마음을 풀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