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어스름이 질 때까지 산을 달려 허기를 느낀 광해가 잠시 계곡 앞에 멈춰 섰다. 연거푸 계곡물을 떠 마신 그가 바위위에 털썩 주저앉아 뒤따라 온 운에게 지친 몸을 쉬게 했다.
“너도 목을 좀 축이 거라. 큰 놈을 포획치는 못했으나 이만하면 오늘 안주꺼리는 된 냥 싶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운이 계곡 속에 손을 담갔다. 10월의 산속이라 해도 수 시간을 산짐승을 몰며 달린 열기로 이마위에 송골송골 땀방울을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을 정겹게 바라보고 있던 광해가 불현듯 계곡물을 떠올려 마시려는 운의 곁으로 다가왔다. 다가선 광해가 자신의 얼굴로 손을 내밀자 놀란 운이 떠 올린 물을 쏟아내며 당혹해 물길에 몸을 휘청였다.
“뭘 그리 놀라느냐. 네가 그러니 내가 무뢰한이 된 듯 하구나.”
운의 머릿결에 붙었던 마른 잎을 때어내던 광해가 얼굴이 붉어진 운이 재미있어 농을 던지며 시원하게 웃었다. 민망해 고개를 들지 못하는 운의 모습이 가을하늘을 담은 계곡에 담겨 더할 나위 없이 깊고 맑은 향취로 광해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송구하옵니다. 저는....”
“너는 어찌 내게 늘 송구하고 죄송한 말 뿐이더냐.”
“마마.... 저는.....”
“그래. 그만하자꾸나. 너는 또 송구하거나 죄송하다 할 것이질 않느냐!”
창검 경합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던 무영이 마을을 들어서다 주모의 손짓에 걸음을 멈추었다. 운이 어느 도령과 덕양산으로 사냥 나섰다는 말을 전해 듣고 잠시 망설이다 다시 훈련소로 가 말 등에 올라탔다. 함께 다니던 사냥 길을 잡았을 것이라 짐작해 그 곳으로 고삐를 당겼다.
계곡의 정취에 취해 한참을 그곳에서 시간을 소비한 광해가 산속으로 먼저 찾아든 저녁 어스름에 몸을 일으켰다.
“벌써 시간이 이리 되었구나. 이제 산을...”
“쉿-”
광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운이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가며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바람결에 바스락거리는 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순간 아주 작고 미세한 짐승을 어르릉 거림이 사각거리는 풀 소리 속에 섞여 들려왔다.
소리 없이 몸을 움직이던 운이 손짓으로 광해에게 말에 탈것을 신호하며 건너편 바위위에 두었던 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짐승의 울음소리가 더 가까이 와 있음을 느낀 운의 심장이 호흡을 방해할 만큼 두근거리고 있었다. 운이 채 활이 있는 바위까지 닿기 전에 긴 풀숲이 갈라지고 푸른 광채를 뿜어내는 근엄한 산의 주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사람의 심장을 녹여낼 듯 번뜩이는 기운이 상대의 기를 가늠하는 듯 천천히 운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구라도 숨소리만 흘려내도 섬광처럼 달려들어 그 크고 날카로운 이빨로 살점을 뜯어내고 뼈를 으스러트릴 듯 살기를 흘려내고 있었다.
운이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허리를 굽혀 활 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때 운의 위험을 염려했던 광해가 먼저 말안장에서 활을 내려 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두려움에 떨리던 손끝이 짐승을 제대로 겨냥하지 못하고 빗나가 순간 성난 짐승이 우레와 같은 울부짖음을 온산에 뿌리며 운을 향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운이 본능적으로 활이 있는 바위 쪽으로 몸을 굴려 팔을 뻗었다. 그러나 뭔가에 머리채가 걸려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게 돼 자신에게 달려드는 짐승에게서 눈을 감았다. 운이 미쳐 몸을 피하지 못하고 달려든 짐승의 앞발에 등을 그대로 낭자 당하자 광해의 입에서 비명이 토해졌다. 순식간에 얇고 마른 운의 등위로 붉은 핏물이 번져 온 등을 적시고 있었다.
숲길을 달리던 무영은 산의 정적을 깨는 짐승의 울음에 심장이 타들어가 말고삐를 잡은 손에 땀이 베어나고 있었다. 광해가 다시 쏟은 두 대의 화살을 맞고도 바위위에서 거친 숨을 토해내며 두 사람을 노려보던 짐승이 다시 한발을 내놓았을 때 계곡 위에서 화살이 날아들어 그 등에 꽂혔다.
계곡으로 뛰어내려온 무영의 시선이 운의 붉은 등에 머물다 다시 조심스럽게 짐승의 거친 호흡 앞으로 옮겨졌다. 하얗게 말라 들어가든 무영의 입에서 감정을 거둔 침착하고 담담한 말이 흘러나왔다.
“마마 말에 올라타시옵소서.”
“운이 많이 다쳤다.”
“마마께서 말에 올라타셔야만 제가 움직일 수 있사옵니다.”
광해가 말 등에 올라타자 무영이 짐승의 거친 숨소리 위에 검을 뽑아들어 분노 섞인 한 획의 그었다. 두려움과 공포로 사색이 된 운을 바라보는 그 눈이 짐승을 내려치던 분노보다 더 뜨겁고 붉게 역류하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걸려 엉킨 운의 머리채를 잘라낸 무영이 거칠게 검을 바위위에 내 던졌다. 놀란 운이 호흡을 멈춘 채 얼음 같은 무영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잠시 두 사람에게 살아있는 시간이 밀려나 서로의 가슴만이 뜨겁게 꿈틀거렸다.
“꽃놀이를 나온 것이냐. 사냥을 나온 호위무사의 차림이 어찌 이런 것이냐.”
광해가 말에서 뛰어내려 운에게 달려가 자신의 도포를 벗어 핏물이 번진 등을 눌러 감쌌다.
“상처가 심하다. 어서 산을 내려가야 한다.”
무영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으나 이내 주먹을 쥐어 그것을 숨겼다.
“너는 네 몸의 위험을 돌아보기 이전에 마마의 안위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 네가 자신의 몸 하나 근사치 못해서야 어찌 모시는 사람을 안전하게 보필하겠느냐?”
시린 질책을 받은 운의 검은 눈동자가 잠시 무영의 흐린 얼굴에 멈추었다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운의 어깨를 부축하던 광해가 무영을 말류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만해라. 이 아이 잘못이 아니다. 내가 그리 두라 했다. 땋아 내린 머리가 잘 어울려 올려 묶겠다는 것을 내가 그냥 두라 했다.”
운을 부축해 말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광해에게 다가선 무영이 말없이 운을 받아냈다. 예를 가춘 말속에 단오하고 뜨거운 감정이 담겨 있었다.
“제가 태우고 가겠사옵니다. 말에 올라타시옵소서.”
광해가 고개를 돌려 그 눈빛을 마주했다. 순간 뜨거운 바람 한 점이 광해의 가슴으로 전해져 왔다. 애써 참아내고 있는 무영의 심장이 운의 붉은 등만큼이나 통증하고 있음을 광해 또한 단번에 알아가질 수 있었다.
“제가 빠른 길을 아옵니다. 지금 곧 사병들이 도착할 것이옵니다. 마마의 하산 길은 그들에게 맡기겠사옵니다.”
무영이 운의 어깨를 건네받아 자신의 말에 태웠다. 그 고요한 눈 속에 가득 한 외침이 광해에게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자신의 가슴으로 운을 지탱하고 앉은 무영은 황급히 말고삐를 당겨 산을 내려왔다. 운의 붉은 등에서 번져 나온 핏물이 무영의 앞섶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단번에 올랐던 그 길이 너무도 길게 느껴져 무영의 목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자신의 귓전으로 느껴지는 무영의 거친 호흡에 마음이 쓰였던 운이 바람 속에 작은 목소리를 흘려냈다.
“괜찮아요. 저는 괜찮아요.”
“출혈이 심하다. 정신 놓지 마라. 그래. 무슨 말이라도 해라. 금방 당도할 것이다.”
운의 머리가 힘없이 자신의 어깨 쪽으로 흘러내리자 무영이 떨리는 목소리에 힘을 싫어 다시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라. 운아! 내말 듣고 있느냐. 힘들면 내말이라도 들어라. 내 목소리 놓지 말고 끝까지 듣고 있거라.”
운이 다시 고개를 세워 가물거리는 정신을 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무영은 말고삐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어 말을 재촉했다. 그리고 가슴에 묻어두었던 말들을 두서없이 흘려내기 시작했다.
“어린 그때 사람들에게 너를 누이라 했었다. 자라면서 나는 그 말이 너무도 싫었다. 그러면서도 그리 밖에 말을 하지 못하는 내가 싫었다. 스승님께서 작은 네 손에 검을 들게 했던 그때 처음으로 너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그 후로도....... 늘....... 아팠다. 세월이 흘러 내 몸이 자란만큼....... 또한 네가 이리 여인이 되 버린 만큼 그 아픔도 함께 자라 나를 채웠다. 네 몸에 남은 상처들이 내 가슴을 배고 간 흔적들이다. 내게 지워진 가문의 굴레 또한 내 가슴을 산화시키는 잔인한 형벌이다. 놓을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태어날 때부터의 내 숙명이라는 것이 나를 더 깊이 절망하게 한다. 운아! 하지만 너는 내 사람이다. 단 한 번도 그것을 의심해본 적 없다.”
의원 집 마당에 당도한 무영이 황급히 운을 안아내려 방으로 옮겼다.
“어서 의원을 데려 오시오. 호랑이에게 등을 낭자 당했소. 피를 많이 흘렸소.”
온몸이 피로 물든 운을 본 의녀가 놀라 들고 있던 약사발을 떨어트리고도 치우지도 못한 채 안채로 달려가 의원을 불러왔다. 의원이 들어와 운의 옷을 가위로 찌어내자 무영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덕양산 터주에게 당한 모양이구먼.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네.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니나 출혈이 심했던 것 같으니 일단 지켜 봄새.”
의원이 상처를 소독해내고 처방을 내린 후 별것 아닌 냥 방을 나섰다. 무영은 다급히 의원 앞을 가로막으며 여전히 진정되지 못한 경직된 말을 흘려냈다.
“환자가 혼절해 있질 않습니까. 이리 두고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덕양산 터주를 만났다면 아마도 그 기를 모두 쇠했을 것이네. 웬만한 장정들도 그 자리에서 요를 질금거리며 맥 한번 쓰지 못하고 당했다 들었는데 여인의 몸으로 이리 살아왔으니 혼절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지. 놀란 것은 약을 쓸 것이니 기다려 보는 수밖에.”
잠시 후 기녀가 약과 병자 복을 가지고 들어왔다. 상처에 약을 바르기 위해 덮고 있던 소독 천을 드러내자 선명하게 살점이 패인 운의 환부가 들어났다. 무영은 외면하고 있던 고개를 돌려 그것을 보았다. 몇 겹의 무사 복으로 싸매져있던 하얀 속살위로 잔인하고 처참하게 낭자당한 다섯 갈퀴가 흔적이 그대로 무영에게 옮겨와 타들어가든 가슴을 갈가리 저며 냈다.
궁으로 돌아온 광해가 운의 상태를 묻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은밀히 별궁에 들어 광해를 기다리고 있던 개시가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또 다시 숨겨있던 날을 새웠다. 생명에는 지정이 없다는 전갈을 전해 듣고도 쉬 마음을 갈아 앉히지 못한 광해가 개시를 앞에 두고도 타는 속으로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여느 때 같으면 그리 기다리고 있을 개시를 배려해 열일을 젖히고 달려와 그 허리춤을 파고들 것이었다. 그런 그가 개시를 앞에 두고도 홀로 술잔을 비우며 속을 태우고 있었다.
“그리 속이 타시면 직접 다녀오시지 그랬사옵니까?”
술잔을 비워 내리던 광해가 개시의 말에 놀라 그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네가 어찌...?”
“제가 언제 마마의 사소한 근심하나라도 흘려 무심한 적이 있었습니까? 하물며 지금과 같이 마마의 심기가 불편할 때 그 행보 하나하나를 어찌 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다. 사냥을 다녀와 목이 마르구나.”
“마마.”
광해가 개시의 말을 다 듣지 않고 술잔을 비워 내리며 산속에서의 일을 또 다시 눈앞에 가져왔다. 운을 향하던 무영의 눈 속에 차마 태자인 자신조차도 근접할 수 없는 아픈 절규가 일렁이고 있었다. 세상을 하나의 가슴으로 느끼는 냥 두 사람에게서 같은 아픔과 그림자를 보았었다. 그것이 광해를 한층 더 외롭게 하고 있었다.
“내 오늘 천하를 집어삼킬 듯 한 괴수를 보았다. 그 우레와 같은 울부짖음이 과히 산의 주인이 될 만한 늠름함을 가졌더구나. 헌데...... 그 섬뜩한 두려움 앞에서도 나를 지켜내기 위해 몸을 던진 사람이 있었다. 그 아이는 내 무사이기 이전에 또 다른 이의 살과 뼈 같은 사람이더구나.”
광해가 술잔을 비우고 혼잣말처럼 남은 말을 흘려냈다.
“어쩌면 그들을 연결하고 있는 그 끈은 사람이 침범할 수 없는 영계의 사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순간 개시의 눈 속에 날카로운 광채가 번뜩이며 술잔 속에 내려 꽂혔다.
“저는...... 아니 그러하다 여기시옵니까? 저는 어떠할 것 같사옵니까? 마마께 지옥의 유황불과 같은 위험이 온다면 저는 제 살과 뼈를 태워 그것을 막아낼 것이옵니다. 그보다 더한 것이 필요하다면 그것 또한 망설임 없이 할 것이옵니다. 그것이 저이옵니다.”
개시의 가련한 교태가 술기운이 번진 광해의 심장을 흔들어 그를 또 다시 여인의 음염한 향기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애욕과 정사의 즐거움에는 법도를 이탈하려는 충동이 도사리고 있어 아버지가 취해 가진 여인임을 알면서도 그 패륜의 덫조차 피하려하지 않은 채 개시를 곁에 두고 있었다. 또 다시 농염한 그 자태에 몸이 달아올라 살에 닿는 모든 것이 광해를 열기 속으로 이끌고 있었다.
술잔을 받아 치운 개시가 광해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 않았다. 신기한 여체의 힘이 그 발광을 쏟아내며 사내의 몸을 애욕으로 이끌고 있었다. 지친 육신과 술기운으로 혼미한 광해의 영혼이 어린 날의 뜨락을 찾아든 듯 모든 무게를 벗어던지고 그 향취에 취해갔다. 애간장을 녹여내듯 유혹적인 개시의 애무에 광해의 산란함이 먼 산으로 밀려나 사내의 불기둥이 뜨겁게 살아나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체 속으로 파고들던 광해가 거칠게 개시의 속곳을 찢어내고 젖무덤을 탐했다. 갑작스러운 광해의 거친 몸짓에 개시가 짐짓 놀라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이 개시에게 석연찮은 앙금을 남기고 있었다. 어쩌면 그 밤 광해는 진정으로 자신을 품고 싶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겨나고 있었다.
달의 그림자5 (여인 그리고 갈증)
저녁 어스름이 질 때까지 산을 달려 허기를 느낀 광해가 잠시 계곡 앞에 멈춰 섰다. 연거푸 계곡물을 떠 마신 그가 바위위에 털썩 주저앉아 뒤따라 온 운에게 지친 몸을 쉬게 했다.
“너도 목을 좀 축이 거라. 큰 놈을 포획치는 못했으나 이만하면 오늘 안주꺼리는 된 냥 싶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운이 계곡 속에 손을 담갔다. 10월의 산속이라 해도 수 시간을 산짐승을 몰며 달린 열기로 이마위에 송골송골 땀방울을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을 정겹게 바라보고 있던 광해가 불현듯 계곡물을 떠올려 마시려는 운의 곁으로 다가왔다. 다가선 광해가 자신의 얼굴로 손을 내밀자 놀란 운이 떠 올린 물을 쏟아내며 당혹해 물길에 몸을 휘청였다.
“뭘 그리 놀라느냐. 네가 그러니 내가 무뢰한이 된 듯 하구나.”
운의 머릿결에 붙었던 마른 잎을 때어내던 광해가 얼굴이 붉어진 운이 재미있어 농을 던지며 시원하게 웃었다. 민망해 고개를 들지 못하는 운의 모습이 가을하늘을 담은 계곡에 담겨 더할 나위 없이 깊고 맑은 향취로 광해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송구하옵니다. 저는....”
“너는 어찌 내게 늘 송구하고 죄송한 말 뿐이더냐.”
“마마.... 저는.....”
“그래. 그만하자꾸나. 너는 또 송구하거나 죄송하다 할 것이질 않느냐!”
창검 경합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던 무영이 마을을 들어서다 주모의 손짓에 걸음을 멈추었다. 운이 어느 도령과 덕양산으로 사냥 나섰다는 말을 전해 듣고 잠시 망설이다 다시 훈련소로 가 말 등에 올라탔다. 함께 다니던 사냥 길을 잡았을 것이라 짐작해 그 곳으로 고삐를 당겼다.
계곡의 정취에 취해 한참을 그곳에서 시간을 소비한 광해가 산속으로 먼저 찾아든 저녁 어스름에 몸을 일으켰다.
“벌써 시간이 이리 되었구나. 이제 산을...”
“쉿-”
광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운이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가며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바람결에 바스락거리는 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순간 아주 작고 미세한 짐승을 어르릉 거림이 사각거리는 풀 소리 속에 섞여 들려왔다.
소리 없이 몸을 움직이던 운이 손짓으로 광해에게 말에 탈것을 신호하며 건너편 바위위에 두었던 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짐승의 울음소리가 더 가까이 와 있음을 느낀 운의 심장이 호흡을 방해할 만큼 두근거리고 있었다. 운이 채 활이 있는 바위까지 닿기 전에 긴 풀숲이 갈라지고 푸른 광채를 뿜어내는 근엄한 산의 주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사람의 심장을 녹여낼 듯 번뜩이는 기운이 상대의 기를 가늠하는 듯 천천히 운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구라도 숨소리만 흘려내도 섬광처럼 달려들어 그 크고 날카로운 이빨로 살점을 뜯어내고 뼈를 으스러트릴 듯 살기를 흘려내고 있었다.
운이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허리를 굽혀 활 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때 운의 위험을 염려했던 광해가 먼저 말안장에서 활을 내려 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두려움에 떨리던 손끝이 짐승을 제대로 겨냥하지 못하고 빗나가 순간 성난 짐승이 우레와 같은 울부짖음을 온산에 뿌리며 운을 향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운이 본능적으로 활이 있는 바위 쪽으로 몸을 굴려 팔을 뻗었다. 그러나 뭔가에 머리채가 걸려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게 돼 자신에게 달려드는 짐승에게서 눈을 감았다. 운이 미쳐 몸을 피하지 못하고 달려든 짐승의 앞발에 등을 그대로 낭자 당하자 광해의 입에서 비명이 토해졌다. 순식간에 얇고 마른 운의 등위로 붉은 핏물이 번져 온 등을 적시고 있었다.
숲길을 달리던 무영은 산의 정적을 깨는 짐승의 울음에 심장이 타들어가 말고삐를 잡은 손에 땀이 베어나고 있었다. 광해가 다시 쏟은 두 대의 화살을 맞고도 바위위에서 거친 숨을 토해내며 두 사람을 노려보던 짐승이 다시 한발을 내놓았을 때 계곡 위에서 화살이 날아들어 그 등에 꽂혔다.
계곡으로 뛰어내려온 무영의 시선이 운의 붉은 등에 머물다 다시 조심스럽게 짐승의 거친 호흡 앞으로 옮겨졌다. 하얗게 말라 들어가든 무영의 입에서 감정을 거둔 침착하고 담담한 말이 흘러나왔다.
“마마 말에 올라타시옵소서.”
“운이 많이 다쳤다.”
“마마께서 말에 올라타셔야만 제가 움직일 수 있사옵니다.”
광해가 말 등에 올라타자 무영이 짐승의 거친 숨소리 위에 검을 뽑아들어 분노 섞인 한 획의 그었다. 두려움과 공포로 사색이 된 운을 바라보는 그 눈이 짐승을 내려치던 분노보다 더 뜨겁고 붉게 역류하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걸려 엉킨 운의 머리채를 잘라낸 무영이 거칠게 검을 바위위에 내 던졌다. 놀란 운이 호흡을 멈춘 채 얼음 같은 무영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잠시 두 사람에게 살아있는 시간이 밀려나 서로의 가슴만이 뜨겁게 꿈틀거렸다.
“꽃놀이를 나온 것이냐. 사냥을 나온 호위무사의 차림이 어찌 이런 것이냐.”
광해가 말에서 뛰어내려 운에게 달려가 자신의 도포를 벗어 핏물이 번진 등을 눌러 감쌌다.
“상처가 심하다. 어서 산을 내려가야 한다.”
무영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으나 이내 주먹을 쥐어 그것을 숨겼다.
“너는 네 몸의 위험을 돌아보기 이전에 마마의 안위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 네가 자신의 몸 하나 근사치 못해서야 어찌 모시는 사람을 안전하게 보필하겠느냐?”
시린 질책을 받은 운의 검은 눈동자가 잠시 무영의 흐린 얼굴에 멈추었다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운의 어깨를 부축하던 광해가 무영을 말류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만해라. 이 아이 잘못이 아니다. 내가 그리 두라 했다. 땋아 내린 머리가 잘 어울려 올려 묶겠다는 것을 내가 그냥 두라 했다.”
운을 부축해 말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광해에게 다가선 무영이 말없이 운을 받아냈다. 예를 가춘 말속에 단오하고 뜨거운 감정이 담겨 있었다.
“제가 태우고 가겠사옵니다. 말에 올라타시옵소서.”
광해가 고개를 돌려 그 눈빛을 마주했다. 순간 뜨거운 바람 한 점이 광해의 가슴으로 전해져 왔다. 애써 참아내고 있는 무영의 심장이 운의 붉은 등만큼이나 통증하고 있음을 광해 또한 단번에 알아가질 수 있었다.
“제가 빠른 길을 아옵니다. 지금 곧 사병들이 도착할 것이옵니다. 마마의 하산 길은 그들에게 맡기겠사옵니다.”
무영이 운의 어깨를 건네받아 자신의 말에 태웠다. 그 고요한 눈 속에 가득 한 외침이 광해에게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자신의 가슴으로 운을 지탱하고 앉은 무영은 황급히 말고삐를 당겨 산을 내려왔다. 운의 붉은 등에서 번져 나온 핏물이 무영의 앞섶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단번에 올랐던 그 길이 너무도 길게 느껴져 무영의 목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자신의 귓전으로 느껴지는 무영의 거친 호흡에 마음이 쓰였던 운이 바람 속에 작은 목소리를 흘려냈다.
“괜찮아요. 저는 괜찮아요.”
“출혈이 심하다. 정신 놓지 마라. 그래. 무슨 말이라도 해라. 금방 당도할 것이다.”
운의 머리가 힘없이 자신의 어깨 쪽으로 흘러내리자 무영이 떨리는 목소리에 힘을 싫어 다시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라. 운아! 내말 듣고 있느냐. 힘들면 내말이라도 들어라. 내 목소리 놓지 말고 끝까지 듣고 있거라.”
운이 다시 고개를 세워 가물거리는 정신을 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무영은 말고삐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어 말을 재촉했다. 그리고 가슴에 묻어두었던 말들을 두서없이 흘려내기 시작했다.
“어린 그때 사람들에게 너를 누이라 했었다. 자라면서 나는 그 말이 너무도 싫었다. 그러면서도 그리 밖에 말을 하지 못하는 내가 싫었다. 스승님께서 작은 네 손에 검을 들게 했던 그때 처음으로 너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그 후로도....... 늘....... 아팠다. 세월이 흘러 내 몸이 자란만큼....... 또한 네가 이리 여인이 되 버린 만큼 그 아픔도 함께 자라 나를 채웠다. 네 몸에 남은 상처들이 내 가슴을 배고 간 흔적들이다. 내게 지워진 가문의 굴레 또한 내 가슴을 산화시키는 잔인한 형벌이다. 놓을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태어날 때부터의 내 숙명이라는 것이 나를 더 깊이 절망하게 한다. 운아! 하지만 너는 내 사람이다. 단 한 번도 그것을 의심해본 적 없다.”
의원 집 마당에 당도한 무영이 황급히 운을 안아내려 방으로 옮겼다.
“어서 의원을 데려 오시오. 호랑이에게 등을 낭자 당했소. 피를 많이 흘렸소.”
온몸이 피로 물든 운을 본 의녀가 놀라 들고 있던 약사발을 떨어트리고도 치우지도 못한 채 안채로 달려가 의원을 불러왔다. 의원이 들어와 운의 옷을 가위로 찌어내자 무영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덕양산 터주에게 당한 모양이구먼.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네.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니나 출혈이 심했던 것 같으니 일단 지켜 봄새.”
의원이 상처를 소독해내고 처방을 내린 후 별것 아닌 냥 방을 나섰다. 무영은 다급히 의원 앞을 가로막으며 여전히 진정되지 못한 경직된 말을 흘려냈다.
“환자가 혼절해 있질 않습니까. 이리 두고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덕양산 터주를 만났다면 아마도 그 기를 모두 쇠했을 것이네. 웬만한 장정들도 그 자리에서 요를 질금거리며 맥 한번 쓰지 못하고 당했다 들었는데 여인의 몸으로 이리 살아왔으니 혼절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지. 놀란 것은 약을 쓸 것이니 기다려 보는 수밖에.”
잠시 후 기녀가 약과 병자 복을 가지고 들어왔다. 상처에 약을 바르기 위해 덮고 있던 소독 천을 드러내자 선명하게 살점이 패인 운의 환부가 들어났다. 무영은 외면하고 있던 고개를 돌려 그것을 보았다. 몇 겹의 무사 복으로 싸매져있던 하얀 속살위로 잔인하고 처참하게 낭자당한 다섯 갈퀴가 흔적이 그대로 무영에게 옮겨와 타들어가든 가슴을 갈가리 저며 냈다.
궁으로 돌아온 광해가 운의 상태를 묻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은밀히 별궁에 들어 광해를 기다리고 있던 개시가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또 다시 숨겨있던 날을 새웠다. 생명에는 지정이 없다는 전갈을 전해 듣고도 쉬 마음을 갈아 앉히지 못한 광해가 개시를 앞에 두고도 타는 속으로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여느 때 같으면 그리 기다리고 있을 개시를 배려해 열일을 젖히고 달려와 그 허리춤을 파고들 것이었다. 그런 그가 개시를 앞에 두고도 홀로 술잔을 비우며 속을 태우고 있었다.
“그리 속이 타시면 직접 다녀오시지 그랬사옵니까?”
술잔을 비워 내리던 광해가 개시의 말에 놀라 그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네가 어찌...?”
“제가 언제 마마의 사소한 근심하나라도 흘려 무심한 적이 있었습니까? 하물며 지금과 같이 마마의 심기가 불편할 때 그 행보 하나하나를 어찌 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다. 사냥을 다녀와 목이 마르구나.”
“마마.”
광해가 개시의 말을 다 듣지 않고 술잔을 비워 내리며 산속에서의 일을 또 다시 눈앞에 가져왔다. 운을 향하던 무영의 눈 속에 차마 태자인 자신조차도 근접할 수 없는 아픈 절규가 일렁이고 있었다. 세상을 하나의 가슴으로 느끼는 냥 두 사람에게서 같은 아픔과 그림자를 보았었다. 그것이 광해를 한층 더 외롭게 하고 있었다.
“내 오늘 천하를 집어삼킬 듯 한 괴수를 보았다. 그 우레와 같은 울부짖음이 과히 산의 주인이 될 만한 늠름함을 가졌더구나. 헌데...... 그 섬뜩한 두려움 앞에서도 나를 지켜내기 위해 몸을 던진 사람이 있었다. 그 아이는 내 무사이기 이전에 또 다른 이의 살과 뼈 같은 사람이더구나.”
광해가 술잔을 비우고 혼잣말처럼 남은 말을 흘려냈다.
“어쩌면 그들을 연결하고 있는 그 끈은 사람이 침범할 수 없는 영계의 사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순간 개시의 눈 속에 날카로운 광채가 번뜩이며 술잔 속에 내려 꽂혔다.
“저는...... 아니 그러하다 여기시옵니까? 저는 어떠할 것 같사옵니까? 마마께 지옥의 유황불과 같은 위험이 온다면 저는 제 살과 뼈를 태워 그것을 막아낼 것이옵니다. 그보다 더한 것이 필요하다면 그것 또한 망설임 없이 할 것이옵니다. 그것이 저이옵니다.”
개시의 가련한 교태가 술기운이 번진 광해의 심장을 흔들어 그를 또 다시 여인의 음염한 향기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애욕과 정사의 즐거움에는 법도를 이탈하려는 충동이 도사리고 있어 아버지가 취해 가진 여인임을 알면서도 그 패륜의 덫조차 피하려하지 않은 채 개시를 곁에 두고 있었다. 또 다시 농염한 그 자태에 몸이 달아올라 살에 닿는 모든 것이 광해를 열기 속으로 이끌고 있었다.
술잔을 받아 치운 개시가 광해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 않았다. 신기한 여체의 힘이 그 발광을 쏟아내며 사내의 몸을 애욕으로 이끌고 있었다. 지친 육신과 술기운으로 혼미한 광해의 영혼이 어린 날의 뜨락을 찾아든 듯 모든 무게를 벗어던지고 그 향취에 취해갔다. 애간장을 녹여내듯 유혹적인 개시의 애무에 광해의 산란함이 먼 산으로 밀려나 사내의 불기둥이 뜨겁게 살아나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체 속으로 파고들던 광해가 거칠게 개시의 속곳을 찢어내고 젖무덤을 탐했다. 갑작스러운 광해의 거친 몸짓에 개시가 짐짓 놀라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이 개시에게 석연찮은 앙금을 남기고 있었다. 어쩌면 그 밤 광해는 진정으로 자신을 품고 싶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겨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