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고맙지만 그건 정말 오해예요... ㅠㅠ

어떡하죠2007.12.13
조회416

가끔 시간 날때면 들러보던 톡 게시판에 처음으로 글을 남겨보네요.

 

안녕하세요. 내일 모레면 계란 한 판 채우는 솔로 회사원입니다.

이거... 너무 황당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적어야 할지 두서가 없습니다만;

무사히 하루가 가고 퇴근시간이 다가오니 기뻐야 당연할진데... 정말 좌불안석입니다.

어떻게든, 오늘, 엄마께 해명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하나 있거든요. 

 

사건은 지난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근로복지공단 주관인가요? 일정인원 이상 사업장에서는 매년 의무적으로 시행하는 

성희롱 예방 교육이 있다는 건 다들 아실겁니다.

불미스럽지만, 회사에서도 몇 년 사이에 이런 저런 안 좋은 사건들이 연이었던 터라,

카운슬링 관련 민간자격을 가지고 있던 저도 우연히 사내강사로 선발되었습니다.

교안과 자료를 준비하면서 난생 처음 실제로 보게 되었네요.

그.... 뭐랄까. 음. 주로 고무재질로 된 풍선 같은;;; 남성용 1회용 피임용품 말입니다. -///-

(죄송합니다. 너무 늦되게 살아서;;; 제 청춘이 좀 많이 우중충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그, 세간에서 말하는 오크녀라서 그런가 봅니다.)

겉으로야 "교육용 자료니까요. 뭐." 라고 태연한척 이야기 하면서도 사실 흥미진진한거죠. -_-;;

'와, 놀이동산에서 푸들 만들어주는 풍선같이 생겼어;;' 등등 온갖 주접-_-;을 떨며 교안을

정리하고  금요일 저녁 발걸음도 가볍게 귀가했습니다.

 

월요일 아침. 그만 늦잠을 잤습니다.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눈썹이 휘날려라 가방을 둘러메고 달려서

간신히 지각은 면했지만 아침부터 눈코뜰새 없이 바쁘더니 결국 야근 신세.

너무 졸립고 진이 빠져 집까지 가기도 귀찮아서, 회사 기숙사의 선배(...물론 여선뱁니다-_-;) 

방에서 자고 다음날 귀가하겠노라고 집에 전화를 드렸지요.

 

그리고 화요일 저녁, 귀가하여 아수라장 같을 제 방 문을 열어보니

평소 꼼꼼하신 엄마의 손길이 닿은듯, 단정히 정리된 방 안,

그리고 차곡차곡 쌓인 책더미 위에 다소곳이 놓여있는 그것.

 

네. 그거요. ㅠㅠ

서두르다가 두고 갔나봐요, 글쎄.

 

머릿속에 폭풍우가 휘몰아 치는겁니다.

아, 이걸 어떻게 해명해야 돼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물론  사실대로 말하는게 제일이겠지만.

차마 도저히 입이 안 떨어지는 트라우마가 있는겁니다.

 

초등학교 때(물론 저는 국민학교 시절 사람입니다만)

사촌언니가 준 연예인 사진을 가지고 그림조각 맞추기를 만들겠다고 

조각조각 자른 것을 책상 서랍에 넣어놓고 갔었는데

질풍노도의 사춘기 무렵, 제 두 손을 꼬옥 잡아주며, 진지해지신 울 엄마

"엄마 아빠가 그동안 너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장녀라고 항상 엄하게만 대해서인지

힘든 일이 있어도 꾹 참고 말을 않는 너지만, 그만큼 마음 속에는 분노가 쌓여있는거겠지.

예전에 네가 어린 시절 어떤 사람의 사진을 산산조각으로 찢어 놓은 것을 봤다.

그걸 보고 엄마는, 네 속의 분노를 다독여주지 못한게 너무 죄스러웠단다."

 

...엄마. 내가 아무리 몸치라 기역니은 춤을 못 춘들, 

설마하니 당시 초딩인 내가 박*정씨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겠수 ㅜㅜ;;;;

 

함께 놀았던 동생까지 열심히 해명을 거들어줬지만

결국 그 해프닝은 '분노의 사진 난도질 사건;'으로 명명된채,

저는 '기슴 속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를 지닌 장녀'-_-로 울 엄마의 기억에 남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두렵게도, 모녀는 지금도 그 사건에 대한 견해는 합의를 보지 못했음;;;;) 

 

그것으로 끝난게 아니었습니다.

 

고교시절, 한창 미술에 빠져있을 때 인체뎃생 참고삼아 미술선생님께 빌려온 누드화집을,

그래도 제 딴엔 눈에 띄지 말라고 장롱 위에 숨겨놓았다가 반납한 적이 있는데. 

(공부 안하고 헛짓한다고 노여워 하실까봐 -_-;;) 

정말 뜬금없이 3년 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일겁니다, 

함께 한가로이 빨래를 널다 말고,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엄마 말씀하시기를,

"**아. 엄마한테 숨기는 거 없이 솔직히 얘기하는거다?"

"응?"(수건 터느라 여념이 없었음)

"너... 혹시. 아니 그러니까 정말 그냥 물어보는거니까. 솔직하게 말해."

"?"

"혹시... 남자 말고, 그.. 뭐랄까 연애대상으로 여자가 좋으니?"

"...뭐?"

"아니, 예전에 너 고등학교 때 장롱 위에 여자들 누드화집 숨겨놓고 있었잖아."

"엑? 아냐! 그거 그림 그리려고 그때 미술선생님한테 빌려온거야!"

"괜찮으니까 솔직히 말해."

"아, 글쎄 아니라니까!!!"

"엄마도 이해하려고 그래."

"아냐! 정말 정말 나 그렇지 않아 엄마... 오해라고...ㅠㅠㅠㅠㅠㅠㅠㅠ"

 

....말은 차마 못했지만, 그 여름,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가뜩이나 상심해있던 제 마음에

그렇게 무심쉬크하게 3년간 갈고닦은 말뚝을 때려박으시던 울 엄마 -_-

털던 수건으로 눈물콧물 훔치며, 정말정말 진짜로 그게 아니라고 저녁 내내 해명했지만

그 말씀을 믿어주셨는지 아닌지는 저 너머의 그 누군가만 알겠죠.

 

 

그 '성적 정체성으로 갈등하는 장녀'사건 이후로, 7년만에 대재앙의 재현인 겁니다. -_-; 

 

 

아. 애써 희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럼 '갈등하는 장녀' 건은 이걸로 해명되겠구나. (이건 좀 좋을지도...;) 

 

그런데, 이러다가 3개월 뒤에 급진지해지신 울 엄마,

"젊으니까 자유롭게 연애를 하는건 좋아. 엄마는 너를 믿어.

근데 엄마는 이모처럼 혼수 베이비 같은 걸로 놀래고 싶진 않구나. 솔직히 말해봐. 누구냐?"

...라고 하실지도 몰라요.

 

...안돼. 진짜 억울해. 아냐. 그건 정말 정말 아냐. 엄마.

 부끄럽고 창피해서 죽어도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요, 엄마. 낼 모레 계란 한 판 임에도 불구하고

나 아직 결혼이고 연애고 뭐고 첫 키스도 안해봤다고요.... ㅠㅠ

(대학2학년때 그 친구와는 결국 손만 잡고 돌아다녔던 유아원생 연애-_-)

그런 오해만은 정말정말 받고싶지 않아요, 엄마... 아, 좀 믿어주세요. 엄마!!!

 

 

이거 정말...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무서워서 퇴근 못 하겠어요;

혹시 좋은 방법 없을까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