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은 형식주의로 이어졌고, 그 율법은 자신들의 죄를 감추기 위한 훌륭한 도구로 전락하여,
오히려 부패한 강자들을 보호하는 도구로 이용 되어져 왔다.
율법은 그 정신을 잃었고, 율법의 형식은 종교의 형식주의, 종교의 부패와 권력화로 굳어졌다.
부패한 종교는 부패한 권력자를 필요로하며, 부패한 종교는 부패한 국민의 발원이 된다.
결국 종교가 부패하면 나라는 분열된다.
당시 예수의 이 말씀은 율법의 의미에 대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죄와 심판의 목적이 무엇이며, 대상이 무엇이며, 참회와 용서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아울러 율법주의의 문제점을 강하게 지적한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오늘날 너무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저 말씀의 참 의미를 모른다.
자신들의 죄를 감추고, 덮기 위해서 자주 저 구절을 너무도 편리하게 왜곡해서 사용한다.
마치 자신이 그 말을 한 주님(주체)이 된 것처럼...
참회를 한다..눈물을 흘린다..그러나 삶은 변화가 없다.
이것은 회개가 아니다...그것은 감격일 뿐이다.
자주 또 사용하는 구절이 있다.
네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을 보는 자여.......
이 말씀 역시 1차적으론 주께서 당시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을 향한 말씀이다...
종종 개신교인들은 자기 죄를 무마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저 구절을 들먹이며, 자신의 죄를 애써 보호하려 한다.
신앙인으로서도 선과 악에 대한 자기부정이며, 기만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부터 비상식적인 기독교 폭력성이 발현된다.
죄에 대해서 점점 무감각해지는 것..
회개....용서......
대단히 신앙적 착각과 우월감 속에 빠져있다.
이처럼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지면서 대체 누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죄는 필연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낳는다.
저 구절은 무조건 죄를 용서하고 덮어주라는 것이 아니다.
저 구절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무조건 이해하고 용서해 주라는 것이 아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그러나 사망은 심판과 회개, 용서를 통해 새롭게 거듭니다.
죄를 지은 자에게 공정한 심판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바람직한 삶과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제시한다. 그 안에 소망과 기쁨이 있고 새로운 출발이 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저 구절을 비유로 사용하며 들이대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종교 폭력이다. 종교의 교리를 교묘히 악용하고, 자신들의 죄를 합리화하는 기독교 근본주의 폭력성이다. 종교가 말하는 신앙 양심의 법률 적용은 그 시대, 그 사회속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적용되어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해석해야만 한다.
그 구절들은 비상식적인 용서가 아니라, 상식적인 법률과 상식적인 도덕 안에서, 자신의 신앙양심을 적용시키고, 그 시대에 맞게 재해석해야만 한다. 성경구절은 자신과 누구의 죄를 애써 덮고, 용서하기 위해 사용될 편리한 방패막이 아니다.
오히려 부패한 사회속에서 비상식적인 법규 적용, 비상식적인 권력구조와 정교유착을 실랄하게 비판하는 것이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바람직한 삶의 자세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끼리는 죄 앞에서 "우리가 남이가?" 식으로 서로를 보호하려 애쓰고...세상을 향해선..다른 종교를 향해선...이분법적인 사고와 기준을 들이 댄다면....세상으로부터...불신자들로부터....더욱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자칭 빛과 소금이라고 부르짖으면서도...그 소금이 맛을 잃는다면 다만 밖에 버리워 밟힐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진심으로 회개하자
주께서 말씀 하셨다. 죄없는자가 돌로 치라고...
그러나 이 구절은 너무도 편리하고 왜곡되이 사용되어져 왔다.
기독교는 어느덧 죄 앞에서 감각을 잃어 버리고 있다...
누군가 죄를 지으면....그 분의 죄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대단한 착각...
도대체 상식과 영적 분별력과 영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
이 말씀은 당시 간음한 여인을 향하여 돌로 치는 유대인들의 관습 속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한 여인을 돌로 침으로, 그 죄 값을 힘 없는 자에게 전가시켜 버리고,
당시대 강자였던 남성의 죄는 무마시키는 악법으로 전락하게 된다.
율법은 형식주의로 이어졌고, 그 율법은 자신들의 죄를 감추기 위한 훌륭한 도구로 전락하여,
오히려 부패한 강자들을 보호하는 도구로 이용 되어져 왔다.
율법은 그 정신을 잃었고, 율법의 형식은 종교의 형식주의, 종교의 부패와 권력화로 굳어졌다.
부패한 종교는 부패한 권력자를 필요로하며, 부패한 종교는 부패한 국민의 발원이 된다.
결국 종교가 부패하면 나라는 분열된다.
당시 예수의 이 말씀은 율법의 의미에 대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죄와 심판의 목적이 무엇이며, 대상이 무엇이며, 참회와 용서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아울러 율법주의의 문제점을 강하게 지적한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오늘날 너무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저 말씀의 참 의미를 모른다.
자신들의 죄를 감추고, 덮기 위해서 자주 저 구절을 너무도 편리하게 왜곡해서 사용한다.
마치 자신이 그 말을 한 주님(주체)이 된 것처럼...
참회를 한다..눈물을 흘린다..그러나 삶은 변화가 없다.
이것은 회개가 아니다...그것은 감격일 뿐이다.
자주 또 사용하는 구절이 있다.
네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을 보는 자여.......
이 말씀 역시 1차적으론 주께서 당시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을 향한 말씀이다...
종종 개신교인들은 자기 죄를 무마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저 구절을 들먹이며, 자신의 죄를 애써 보호하려 한다.
신앙인으로서도 선과 악에 대한 자기부정이며, 기만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부터 비상식적인 기독교 폭력성이 발현된다.
죄에 대해서 점점 무감각해지는 것..
회개....용서......
대단히 신앙적 착각과 우월감 속에 빠져있다.
이처럼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지면서 대체 누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죄는 필연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낳는다.
저 구절은 무조건 죄를 용서하고 덮어주라는 것이 아니다.
저 구절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무조건 이해하고 용서해 주라는 것이 아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그러나 사망은 심판과 회개, 용서를 통해 새롭게 거듭니다.
죄를 지은 자에게 공정한 심판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바람직한 삶과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제시한다. 그 안에 소망과 기쁨이 있고 새로운 출발이 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저 구절을 비유로 사용하며 들이대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종교 폭력이다. 종교의 교리를 교묘히 악용하고, 자신들의 죄를 합리화하는 기독교 근본주의 폭력성이다. 종교가 말하는 신앙 양심의 법률 적용은 그 시대, 그 사회속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적용되어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해석해야만 한다.
그 구절들은 비상식적인 용서가 아니라, 상식적인 법률과 상식적인 도덕 안에서, 자신의 신앙양심을 적용시키고, 그 시대에 맞게 재해석해야만 한다. 성경구절은 자신과 누구의 죄를 애써 덮고, 용서하기 위해 사용될 편리한 방패막이 아니다.
오히려 부패한 사회속에서 비상식적인 법규 적용, 비상식적인 권력구조와 정교유착을 실랄하게 비판하는 것이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바람직한 삶의 자세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끼리는 죄 앞에서 "우리가 남이가?" 식으로 서로를 보호하려 애쓰고...세상을 향해선..다른 종교를 향해선...이분법적인 사고와 기준을 들이 댄다면....세상으로부터...불신자들로부터....더욱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자칭 빛과 소금이라고 부르짖으면서도...그 소금이 맛을 잃는다면 다만 밖에 버리워 밟힐 뿐이다.
(본글에서 잘못된 용어 )
하나님 => 기독인들이 지멋대로 만든 용어 야훼, 여호와가 바른 표현입니다.
불신자 => 기독의 신 야훼를 안믿으면 불신자란 말인가? 안티들은 모두가 불신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