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 있는 도미노 피자 배너 광고가 정말 짜증나게 하는군요 지혼자 커졌다 작아졌다 난리 부르스를 춥니다....... 배너광고 는 정말 싫어욧!!! 일요일인데도 도서관 옆의 컴퓨터실이 문을 열어서 오늘 글을 올립니다. 다시 저의 소시적 이야기를 해볼까요? =============================================================== 우리집은 서양이 중학교를 졸업할때까지 군불을 지피며 살았다 지금은 보일러를 사용하고 있지만........ 군불을 지피는건 남들이 보기에 낭만적이거나 친환경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꽤나 힘들고 긴 시간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다행이도 우리집은 멤버가 넉넉했고(?) 큰딸의 지도하에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다. 아빠가 교통사고로 내가 일곱살때 먼저 먼나라로 여행을 떠나신 후에 막내 13개월 짜리를 업고 엄마는 밖으로 나가 돈을 버시기 시작했다 그당시 우리는 집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아빠 치료비 때문에 빚만 잔뜩 쌓여있었다 그래서 양묘장이라는 곳에 들어가서 살았는데 그곳이 예전에 말했던 넓은 마당에 우물이 있고 뒤로는 도랑이 흐르는 나무가 엄청 많은 집이었다 양묘장..... 그곳을 동네 사람들은 "매포"라고 불렀다 양묘장.. 나무를 키워서 파는 곳이었다 온통 나무 뿐이었고 그 종류도 엄청많았다 어른들 말씀에 2만평 정도의 넓이라고 했으니.. 일곱살 내눈엔 우리집이 궁궐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집에 공짜로 살면서 양묘장 직원 아저씨들이 오실때마다 밥을 차려주기도 했고 일하러 오시는 아줌마들의 전표 정리를 해주기도 했다 우리집은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집 이었는데 (양묘장 자체가 동네에 있을 수 없는 크기였다) 외딴집이다 보니 학교도 혼자 가고 집에 와서도 혼자 놀아야 했다 그래도 그건 나은 편이었다 친구들은 우리집을 귀신 붙은 집이라고 놀려대기도 했으니깐............... 여러종류의 나무에 둘러싸여있는 우리집이..... 이상하게 보일만도 했으니..(이해한다). 여덜살이 되면서 분교를 다녔다. 지금은 폐교 됐지만 분교에서 2학년까지 다니고 3학년때부터 본교에서 다녔었다 내가 분교에서 2학년 졸업하던 해에 (이상하군) 폐교 됐다 지금 그곳은 반딧불이 학교를 세운다고 공사중이다 옛추억의 장소가 사라져 간다는건 슬픈 일이다 아빠에 대한 기억을 나와 내 동생은 거의 가지고 있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거라곤.... 새마을 운동 모자에 자전거를 타셨던 모습과 일하고 오신후 간식으로 나왔던 빵을 나와 동생들에게 건네주던 기억뿐이다 하나 더 말하자면.. 허리를 밟아주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기도 한다. "영미야 아빠 허리 좀 밟아주렴" "싫어 영남이 보고 하라그래" "영남이는 너무 어려서 내 말을 못알아 듣자나 똑똑한 영미가 허리 좀 밟아줘" 그럼 난 허리를 밟아주면서 먹고 싶었던 것을 말하면서 사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난다 내가 본 마지막 아빠 모습은........ 사고 났던 날 밤이다. 그날 밤에도 아빠는 자전거를 타고 어딜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섰는데.. 아빠 : 나 아랫마을에 좀 댕겨오리라 엄마 : 오밤중에 어딜가.. 내일 날 밝으면 가시구랴 아빠 :어참.... 댕겨온다니깐... 금방 올께.. 엄마 : 내일가! 엄마가 그렇게 말리셨는데도 아빠는 구지 달도 안뜸 날밤 자전거를 이끌고 나가셨다 잠시후....... "끼익~~~~~" 쿵.... 설마하는 마음에 우리집 식구들은 밖에 나갔고 아빠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계셨다. 우리집 근처에서............... 엄마는 얼른 지갑만 챙기고 병원으로 가셨구 그때부터 엄마는 아빠랑 있었고 큰언니가 학교를 1년 쉬고 남매들 엄마 노릇을 했다 하지만 아빠는 서울의 큰병원까지 갔었는데도 돌아가신거다. 그래서 그 집을 떠나 양묘장이라는 곳에 들어와서 살았는데 우리가 아빠랑 살았던 예전 집은 아빠가 결혼하시기 전에 직접 지으신 집이었다 그 집이 남의 손에 넘어가고 새 주인이 집을 부수고 새집을 짓는 동안에도 우린 그저 모르는척했다 아무도 먼저 아빠와 관련된 말은 꺼내지도 않았고 그집 역시... 어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나의 일곱살은 이렇게 지나갔다............ 죽음이란걸 알기에 너무 어린나이였지만........ 그때 다 알아버렸다. 그리고 8살 난 말 더듬이 었다 언제부턴가 내가 말을 더듬기 시작한거였다...........아빠가 사라진 후 어느 순간부터 학교 가서도.. 그래봤자 1,2학년이 전부인 분교였지만 난 울보였다 누가 치기만 하면 울고 뭐라고 하기만 해도 울었다 내가 말더듬는걸 고치는건 무지 어려운 일이었지만........... 아랫마을 사는 민철(가명)이라는 얘의 한마디에 더이상 울지도 않았고 말도 더듬지 않을려고 노력했다 "아빠 없는 애랑은 놀지 말자" 그말은 나한테 아물지 않은 상처가 되었다................ '아빠가 없으니깐 무시를 당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 울보로 있을수가 없었다. 말도 또박또박 하려고 노력했다.... 받아쓰기를 보면 다른애들보다 더 잘해서 무시를 당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책을 많이 읽어서 선생님한테 똑똑하다고 칭찬 받아야지 그럼 남들이 무시 못하겠지 그 남자아이 땜에 내가 소극적이고 울보였던 모습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던 거였다 부모중 한분만 안계시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몇몇 어른들과 친구들의 놀림만 빼면 나의 어릴적은 무척 행복했다
꿀 묻은 군화와 꽃고무신27(일곱살,다음에 어른)
옆에 있는 도미노 피자 배너 광고가 정말 짜증나게 하는군요 지혼자 커졌다 작아졌다 난리 부르스를 춥니다.......
배너광고 는 정말 싫어욧!!!
일요일인데도 도서관 옆의 컴퓨터실이 문을 열어서 오늘 글을 올립니다.
다시 저의 소시적 이야기를 해볼까요?
===============================================================
우리집은 서양이 중학교를 졸업할때까지 군불을 지피며 살았다
지금은 보일러를 사용하고 있지만........ 군불을 지피는건 남들이 보기에
낭만적이거나 친환경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꽤나 힘들고 긴 시간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다행이도 우리집은 멤버가 넉넉했고(?) 큰딸의 지도하에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다.
아빠가 교통사고로 내가 일곱살때 먼저 먼나라로 여행을 떠나신 후에
막내 13개월 짜리를 업고 엄마는 밖으로 나가 돈을 버시기 시작했다
그당시 우리는 집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아빠 치료비 때문에 빚만 잔뜩 쌓여있었다
그래서 양묘장이라는 곳에 들어가서 살았는데 그곳이 예전에 말했던 넓은 마당에
우물이 있고 뒤로는 도랑이 흐르는 나무가 엄청 많은 집이었다
양묘장..... 그곳을 동네 사람들은 "매포"라고 불렀다
양묘장..
나무를 키워서 파는 곳이었다
온통 나무 뿐이었고 그 종류도 엄청많았다
어른들 말씀에 2만평 정도의 넓이라고 했으니.. 일곱살 내눈엔 우리집이
궁궐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집에 공짜로 살면서 양묘장 직원 아저씨들이 오실때마다 밥을 차려주기도
했고 일하러 오시는 아줌마들의 전표 정리를 해주기도 했다
우리집은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집 이었는데 (양묘장 자체가 동네에 있을 수 없는 크기였다)
외딴집이다 보니 학교도 혼자 가고 집에 와서도 혼자 놀아야 했다
그래도 그건 나은 편이었다
친구들은 우리집을 귀신 붙은 집이라고 놀려대기도 했으니깐...............
여러종류의 나무에 둘러싸여있는 우리집이..... 이상하게 보일만도 했으니..(이해한다).
여덜살이 되면서 분교를 다녔다.
지금은 폐교 됐지만 분교에서 2학년까지 다니고 3학년때부터 본교에서 다녔었다
내가 분교에서 2학년 졸업하던 해에 (이상하군
) 폐교 됐다
지금 그곳은 반딧불이 학교를 세운다고 공사중이다
옛추억의 장소가 사라져 간다는건 슬픈 일이다
아빠에 대한 기억을 나와 내 동생은 거의 가지고 있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거라곤....
새마을 운동 모자에 자전거를 타셨던 모습과 일하고 오신후 간식으로 나왔던 빵을 나와 동생들에게 건네주던 기억뿐이다
하나 더 말하자면.. 허리를 밟아주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기도 한다.
"영미야 아빠 허리 좀 밟아주렴"
"싫어 영남이 보고 하라그래"
"영남이는 너무 어려서 내 말을 못알아 듣자나 똑똑한 영미가 허리 좀 밟아줘"
그럼 난 허리를 밟아주면서 먹고 싶었던 것을 말하면서 사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난다
내가 본 마지막 아빠 모습은........ 사고 났던 날 밤이다.
그날 밤에도 아빠는 자전거를 타고 어딜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섰는데..
아빠 : 나 아랫마을에 좀 댕겨오리라
엄마 : 오밤중에 어딜가.. 내일 날 밝으면 가시구랴
아빠 :어참.... 댕겨온다니깐... 금방 올께..
엄마 : 내일가!
엄마가 그렇게 말리셨는데도 아빠는 구지 달도 안뜸 날밤 자전거를 이끌고 나가셨다
잠시후.......
"끼익~~~~~"
쿵....
설마하는 마음에 우리집 식구들은 밖에 나갔고 아빠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계셨다.
우리집 근처에서...............
엄마는 얼른 지갑만 챙기고 병원으로 가셨구 그때부터 엄마는 아빠랑 있었고
큰언니가 학교를 1년 쉬고 남매들 엄마 노릇을 했다
하지만 아빠는 서울의 큰병원까지 갔었는데도 돌아가신거다.
그래서 그 집을 떠나 양묘장이라는 곳에 들어와서 살았는데
우리가 아빠랑 살았던 예전 집은 아빠가 결혼하시기 전에 직접 지으신 집이었다
그 집이 남의 손에 넘어가고 새 주인이 집을 부수고 새집을 짓는 동안에도
우린 그저 모르는척했다
아무도 먼저 아빠와 관련된 말은 꺼내지도 않았고 그집 역시... 어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나의 일곱살은 이렇게 지나갔다............
죽음이란걸 알기에 너무 어린나이였지만........ 그때 다 알아버렸다.
그리고 8살
난 말 더듬이 었다
언제부턴가 내가 말을 더듬기 시작한거였다...........아빠가 사라진 후 어느 순간부터
학교 가서도.. 그래봤자 1,2학년이 전부인 분교였지만 난 울보였다
누가 치기만 하면 울고 뭐라고 하기만 해도 울었다
내가 말더듬는걸 고치는건 무지 어려운 일이었지만...........
아랫마을 사는 민철(가명)이라는 얘의 한마디에 더이상 울지도 않았고
말도 더듬지 않을려고 노력했다
"아빠 없는 애랑은 놀지 말자"
그말은 나한테 아물지 않은 상처가 되었다................
'아빠가 없으니깐 무시를 당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 울보로 있을수가 없었다.
말도 또박또박 하려고 노력했다....
받아쓰기를 보면 다른애들보다 더 잘해서 무시를 당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책을 많이 읽어서 선생님한테 똑똑하다고 칭찬 받아야지 그럼 남들이 무시 못하겠지
그 남자아이 땜에 내가 소극적이고 울보였던 모습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던 거였다
부모중 한분만 안계시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몇몇 어른들과 친구들의 놀림만 빼면 나의 어릴적은 무척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