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월의 노래 #1

흑묘2003.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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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가 대부분인 남부지방에는 각 전설마다 전승되어 내려오는 괴상한 노래가 하나 있었다.

 

만월의 밤 광기에 어려, 아이들의 연한 살을 쥐어뜯어 머리에 뒤집어 쓰고, 노래하는 피에 굶주린 광전사의 노래...

 

만월의 밤 베이리얼의 기병을 혼자서 단칼에 무찌르고, 그의 심장을 아낌없이 사악한 사령술사(네크로만서)에게 내준 광전사의 노래

 

만월의 밤 벼리워지지도 않은 화살촉 하나로 달을 쏴 칠흑같은 어둠을 부르고, 드래곤라이더 뒤란달의 목을 한손으로 으스러뜨린 광전사의 노래

 

만월의 밤 대마법사 그란 라뒤쉬의 두개골을 맨손으로 부수고, 그 뇌수를 마신 광전사의 노래

 

만월의 밤 그의 검으로 광룡(狂龍)의 역린을 쥐어뜯고, 용에게 한쪽팔을 뜯어먹힌 광전사의 노래.. 

 

어떤 때는 두려움으로, 어떤 때는 놀라움으로 만월의 노래는 격렬한 류트가락에 맞추어 탬버린과 캐스터네츠의 리듬감으로 심장이 터질듯, 듣는 사람이 광전사라도 되는양, 광기에 젖게 만들었다. 또 이 노래는 푸른들판의 하얀피부의 아트리아인들에게는 무한한 공포를, 그리고 추수철이면, 어김없이 남부의 저 멀리 얼음의 사막에서 모래속에서 나타난듯이 소리없이 말을 타고 약탈을 시작하는 후투족으로 대표되는 검은피부의 프리아인들에게는 묘한 긍지를..   그렇게 만월의 노래는 남부 칼체스터에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1 알폰소 기드랜드

"젠장 만월이군..."

남부의 대도시 칼체스터의 성문은 꽤나 일찍 닫히는 편이었다. 이미 눈이 하얗게 쌓인 겨울이지만, 얼음의 사막에서 말을 타고 며칠이나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으로 들이닥치는 후투족들의 기수들을 도무지 막을수가 없었기 때문에 칼체스터민회는 만장일치로 겨울이나 여름이나 모두 달이 성벽 서쪽종탑에 걸릴때 즈음 문을 닫자고 결정했다. 성문지기 기드는 갈색의 도시문장이 그려진 깃발이 달려 바람에 펄럭거리는 할버드를 어깨에 기대고 장갑을 벗어들고, 손을 호호 불었다. 이미 그의 코끝에 달린 수염까지 바삭바삭 하게 얼어붙었고, 통통하게 살이오른 하얀피부가 대기실에서 성문닫으려고 나온지 얼마안되었는데도, 어느새 추위로 빨갛게되어있었다   그는 손에 입김을 불어넣다 말고, 배가 불룩 튀어나온 혁대사이로 셔츠를 집어넣어 옷매무새를 고치고, 달이 걸려있는 높다란 석벽을 올려다 봤다. 남부의 관문인 칼체스터이지만, 경비인력은 늘 부족했다.겨우 이 튼실한 성벽이 아니었다면, 벌써 칼체스터는무너졌을 것이다. 물론 영주 비슷한 역할의 바레스왕국의 관령이 5년을 주기로, 교체될때마다 생각 보다 많은 근위기사들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들은 칼체스터의 경비에는 무관심했다. 외려 유명한 칼체스터의 남부미녀들에게 지나친 관심을 보였다. 때문에 민회는 관령이 고용하는 고용인들과는 별도로 기드와 같이 칼체스터를 지나가는 어중이떠중이중에 그나마 실력이 좋은 용병따위들을 경비인력으로 쓰고 있었다. 어째 연례행사처럼 되어버린, 투치족의 습격때에는 투치족의 격렬한 초반공격을 막는 방패처럼 쓰이는 것이 바로 이 성벽경비들이었다.물론 반격은 관령휘하의 근위기사들이 담당했지만, 그저 성벽밖으로 내쫒는 일밖에는 하지 않았다.

 

"젠장.. 남부의 상도(商都)인데 바레스놈들은 도무지 생각할줄을 모른다니까.. 조금만 신경좀 쓴다면, 바레스의 젖줄이 될수도 있는 칼체스터인데.."

 

기드는 몇달후면 들이닥칠 후투족의 습격을 생각하며, 몸서리를 쳤다. 그도 작년 가을에 후투족을 처음 봤지만, 그 공포는 생각할수록 두려운 것이었다. 보통말보다 두배정도는 커다란 흑마들이 떼지어 깊게 파놓은 해자를 가뿐히 뛰어넘으며 막 걷어들이는 도개교에 뛰어올라 시내까지 달음박질 치는데, 감히 그 기수들을 막을 엄두도 못내었다. 기드는 기병과의 싸움에 통달한 '니블레스'출신 창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할버드의 낫을 후투족의 기수의목에 걸기는 커녕 후투족의 말발굽소리가 사라질때까지 도개교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도르래 옆에서 죽은척 엎드려 있었다. 나중에 관령의 기사단들이 뭐라고 했지만, 어쩌랴.. 용병은 목숨이 자산인 사업이니 그들도 매몰차게 뭐라 할수는 없었다. 기드는 질린다는듯 몸서리를 치며, 사슴가죽으로 만든 자켓의 주머니에 찔러넣은 담배쌈지를 꺼냈다. 손이 얼어서 미리 말아놓은 종이에 말린 담배잎이 잘 들어가지않아 하얀 눈위로 떨어졌지만, 그래도 한대 맛있게 피울 양을 집어넣고는 옆에서 타고 있는 화롯불에 담배끝을 갔다 대었다.

 

"문좀 열어 주시오."

 

기분나쁜 저음이었다. 후투족이 전투에서 내는 기분나쁜 저음의 함성과 비슷한 목소리였다. 기드는 아차하는 표정으로 아직 도개교를 걷어올리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침입을 막는 마지막 쇠창살 사이로 스며든 음산한 달빛이 쌓인눈을 반짝반짝 빛나게 만들었고, 녹이슨 쇠창살너머에는 도개교위에 영혼을 저승으로 싣고 가는  저승사자의 마차와도 비슷한 낡은 마차한대가 서있었다. 깊게 후드를 눌러쓴 기분나쁜 저음의 주인공은 쇠창살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미안하오. 검은언덕을 넘느라 늦어버렸소, 마차에 달려드는  고블린들을 때려죽이느라, 한참을 길을 헤메다 보니  벌써 달이 떠버리더구려."

기드는 담배를 끌생각을 하지 않고, 뱃살에 손을 얹으면서, 검은 후드를 벗은 사내를 노려 보았다. 슬며시 할버드에 달린 깃발을 떼고, 허리춤에 걸려있는 팔뚝길이의 단검을 언제라도 뺄수 있게 준비해두었다.

 

"아.. 난 후투족이 아니오. 프리아인은 맞지만, 후투족은 아니오. 여기 조르쥬인가 하는 경비하는 분하고 너댓번 봤으니 그분한테 물어보면 내가 누군지 알거요. 내이름은 은카나이오. "

 

후드를 벗은 사내의 피부는 희무끄레한 달빛이지만 분명히 검은색이었다. 이 한겨울에도 웃통을 벗어젖힌듯 후드망토 사이로 탄탄한 근육이 달빛에 촉촉히 빛났다.

 

"어이 죠르쥬!"

 

기드는 성벽위에서 추운바람에도 아랑곳않고 졸고 있는 조르쥬를 불렀다. 까만 성벽위로 마른몸의 그림자가 부스스 일어났다.

 

"먼~~ 일인데?"

 

면화를 기르는 북부대농장에서 들을수 있는 북부사투리가 좀 섞여있는 괴상한 말투였다.

 

"은카나인가 하는 프리아놈을 알아?"

 

기드는 담배연기인지 입김인지 모른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목소리를 돋웠다.

 

"아 금마? 금마 노예상 아이가... 유명놈이제.  걍 들여보내라."

 

귀찮다는듯 하품을 하고 다시 성벽총안에 기대는 실루엣이 보였다. 기드는 아직 단검에 올린손을 내리지 않고, 턱짓으로 마차를 가리켰다. 은카나는 붗임성 좋은 얼굴로, 투레질을 하는 말의 고삐를 잡아서, 마차를 성문 옆으로 돌리고는, 마차의 휘장을 걷었다.

 

"음.."

 

기드는 미간을 씰룩이며, 하얀 담배연기를 훅 뿜어 내었다.기분나쁠정도로 초롱초롱한 눈동자들이 기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검은 피부.. 은카나와 똑같은 검은피부의 조그만 아이들이 옹기종기 비좁은 마차안에 가득 들어 있었다. 손과 팔에는 어김없이 족쇄와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 노예를 전문적으로 옮기는듯, 아예 그런용도로 만들어진 마차같았다. 아이들은 사타구니만 간신히 천조각으로 가린차림으로, 이 추운밤을 서로의 체온으로 버티면서 달려 온것 같았다. 기드는 북부의 항구지방에서 노예상들을 많이 봤어도, 이정도로 비참한 취급을 받는 노예들은 아직 보지 못했다. 막 10살이나 넘겼을까? 그정도의 꼬맹이들이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기드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음.. "

 

기드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은카나는 재빨리 휘장을 다시 덮어버렸다.

 

"호위꾼들은 아직 고블린하고, 마룬족의 추격대에게 쫒기고 있어서, 같이 못왔습니다."

 

은카나는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술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마도, 마룬족이라는 곳을 습격해서 아이들을 노예로 데리고 온것이리라. 도중에 마룬족의 어른들이 낌새를 채고 쫒아오자 고블린들이 잔뜩 서식하는 검은언덕을 통과해서 부랴 부랴 온것이다. 기드는 프리아인의 수많은 종족중에서 아는 족속이 얼마 없었지만, 은카나의 설명은 의심할 만한 곳은 별로 없었다. 설사 거짓말이라고 해도, 아이몇십명와 노예상 하나가 뭘 어쩌겠는가? 기드와 성문근처의 경비들은 나름대로 전장에서 한가락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속이고 성에 들어와  성문을 제압하고 급습한다해도, 성벽의 경비병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물론 후투족의 기수들은 무서웠지만.. 기드는 묘한 자만감에 빠져 쇠창살을 올리는 도르래를 돌리기 시작했다. 마차가 걸리지 않을정도로 창살을 올린 다음에, 쇠창살을 쿵하고 내려 버렸다. 은카나는 쿵하는 소리에 움찔하고 뒤를 돌아봤지만 예의 사람좋은 웃음을 짓고는 말을 휙하니 올라타고, 시내의 동쪽에 죽 늘어서있는 여관거리로 말을 몰았다. 기드는 담배를 이끼가 낀 성벽에 비벼끄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할버드를 집어들었다. 

 

"잠깐만.."

 

은카나는 긴장한 얼굴로 말위에서 기드를 내려보았다. 날카로운 할버드의 날이 겨누는 곳은 은카나의 목줄기가 아니라, 마차의 휘장 뒤쪽이었다. 기드는 뽀드득 거리는 눈을 천천히 밟으며, 천천히 마차로 다가왔다. 은카나는 웃음을 지우고 날카로운 눈으로, 기드를 쳐다봤다. 기드는 할버드의 창날끝으로 마차의 휘장끝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검은전사는 노래한다. 베라도의 피를 머금은 자여, 그대는 만월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리라. 검은전사는 노래한다. 시간이여 그대의 응보는 추악하다. 그대역시 만월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리라.검은 전사는 노래한다. 신이여 그대의 추악한 모습을 잊지 않으리라 그대역시 만월안에서 노래하지 못하리라. 시간의 추여, 신의 저울이여 공평하게 만월안에서 춤추라 노래하라.."

 

박자를 맞출만한 악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심장이 뛰는듯한 멜로디였다. 소년의 앳된 목소리 였지만, 기드는 어쩐지 오한이 느껴졌다. 오늘은 원래 추운 날씨였지만, 거기에 더해 추운기분을 흠뻑느꼈다. 기드는 인상을 쓰면서 마차안을 뚤어져라 쳐다봤다. 까만 피부때문에 몸의 형상은 잘보이지 않았지만, 모닥불에 비치는 하얀 눈동자가 도드라져 보였다. 기드는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나는 언저리를 봤을때 주위의 공포에 떠는 눈과는 전혀 다른 눈을 보았다. 그눈은 갓 성인식을 마치고, 북부의 갈대숲을 여행할때 맞닥뜨린 호랑이의 불타는 눈동자 바로 그것이었다. 기드는 순간 움찔해서 할버드의 날을 내릴수 밖에 없었다. 불타는 호랑이의 눈동자를 가진 꼬마는 입술을 조용히 움직이면서 '만월의 노래'를 나지막하게 부르고 있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단검이 기드와 꼬마사이를 파고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조용히 해 이자식아!"

 

은카나는 어느새 말에서 내려, 기드에게 굽신거리다가, 단검을 뽑아들며 노래를 부르는 꼬마의 뺨을 후려쳤다. 꼬마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은카나를 노려봤다.

 

"이 놈은.."

 

"후투족이군.."

 

다시 눈웃음을 치며 설명하는 은카나의 말을 기드는 갑자기 끊었다. 작년가을 후투족의 습격때 얼핏들은 만월의 노래와 거의 비슷한 가사였다. 도르래 옆에 엎드리고, 누워서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마치 메들리와 같은 '만월의 노래'는 악몽그자체였다. 후투족은 프리아인의 한갈래로서 북부아트리아족인 기드와는 전혀 말이 통하지 않지만, 그들은 아트리아족이 만월의 노래를 두려워하는것을 알고, 습격때 아트리아족들이 공용어로 쓰는 '북부어'로 불러대는 경우가 있었다. 때문에 꼬마의 만월의 노래도 가락과 가사가 딱들어맞지 않았다.

 

"마룬족의 아이들을 데려오기전에 한번 허탕을 치고, 이녀석을 잡게 되었지요. 우리 호위꾼몇명이 이놈의 낫질에 당했습니다. 손을 깊게 베여서, 다시 돌려 보냈지요.  이놈.. 조금만 더 컸었더라면, 아마 우리도 당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아시다 시피 후투족의 전사는 무서우니까.. "

 

후투족의 아이는 노래를 그치고, 불타는 듯한 눈빛으로 기드를 쏘아 보았다. 기드는 눈길을 슬며시 피하고는 은카나에게 가도 좋다는 손짓을 해보였다. 은카나는 다시 굽신거리고, 여관거리쪽으로 말을 몰았다. 다시 하얀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기드는 진저리 난다는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담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곧 한밤이 될것이다. 달도 지고.. 그는 다시 삐져나오는 셔츠자락을 옷속에 집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