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년전 써울 가출기

여울과소2008.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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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47살로 현재건설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평소 톡을 읽다가 나도 거기에 보답은 해야 되지 않겠나 하는 고민 끝에 이렇게 31년전의 써울 가출기를 쓰면서 잠시나마 옛일을 회상해 봅니다. 

우리집은 3형제 였는데 나이차이가 많은 형님 두분은 일찍소위 말하는 sky대를 다니고 있었고 나는 논농사나 지으면서 살겠다고 일찍부터 진로 아닌 진로가 결정 되었습니다. 

위의 형님두분들과는 완전히 다른 돌연변이 처럼 초등학교때부터 공부하고는 담을쌓고 일찍부터 농부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러므로 농사일 하나는 천부적으로 잘했습니다. 소꼴(풀)먹이는것도 다른아이들보다 배불리게 먹이고 논에 물대는것도 그어린것이 내논에 먼저 물댈려고 위의 위의 위의 까지도 물다대주고 다른사람이 물꼬 가지고 장난 못치게 논두렁에서 밤을 하얗게 샌적도 몇번 있었고, 특히 소구루마(소달구지) 끄는데는 삼각함수를 배우지 않았던 초등학교 5학년때  그렇게도 좁은 골목길을 자가용운전 하듯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른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볏단쌓기, 마굿간 거름치우기, 소막꺼풀주기(바닥에 짚깔아 주는것)등 농사일에는 정말 머리도 잘돌아 갔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연세가 많으신 아버님은 농사는 앞으로 나에게 맡길려고 마음에 두셨는것 같았습니다.

 위의 형님 두분은 초등학교 때부터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큼 공부를 잘해서(현재 한분은 법조인, 한분은 전문직 박사)일찍 대처로 나가서 두분이서 함께 자취했습니다.  

하기야 그당시 25마지기(약5,000평정도)논농사가 그렇게 작은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중학교 입학하고 나서 생겼는데 새로운 교육환경과 검은교복 특히 생전처음 배우는 꼬부랑글씨인 영어는 나를 미칠정도로 공부를 하기 싫어 했습니다.

 중학교 입학하기전에 큰형님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빨간 기본영어를 나한테 가르쳤는데 내가 공부하기싫어서 화장실 간다는 핑개대고  도망가고 또 공부 가르칠까바, 낙동강에서 얼음타고 청동오리 주워서 구워먹고 밤늦게 집에서 자는걸로 작전을 바꿨습니다. 

나중에 나이가 많으신 형님이 포기를 하면서 마지막 한가지만 배우라고 앞으로 공부 하라는 소리 않하겠다며 영어 사전찾는 법과 발음기호를 자기가 직접써서 가르쳤는데 그 발음기호 30년이 지난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중하교 입학생활이 내한테 적응이 않가던 시기에 또다른 호기심이 나를 자꾸 유혹했습니다.

다름아닌 TV에 나오는 서울의 모습이 무척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친구3명이서 서울로 한번가기로 마음먹었고 우리는 당장 실행에 옮겼죠. 그게 아마1977년 4월초순경인데 나는 집에서 소팔아서 큰형님 하숙비로 30만원 준비해놓은거  장롱위에서 몰래 훔쳐서  동대구에서 당시 그래이 하운드 사자가 커다랗게 그려져 있는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갔습니다.

고속버스 안내양이 있었는데 감색유니폼에 모자에 예쁜 핀을 꼿은 모습이 무척이나 예쁘다는 느낌을 지금도 지울수가 없네요.

지금은 고속버스터미널이 강남에 있지만 그당시에는 서울역 부근에 있었습니다.  지금 그자리가 어딘지 확실하게 모르겠지만  아마 고가도로로 시작 하는 부근이 아니가 생각 되네요.

우리는 서울에 내리자 마자 양아치들 한테 않 잡힐려고 곧장 남대문 시장에 가서 돈넣을 고동색 가방과 옷가지 신발 등을 사싣고 음식도 사먹었는데 정말 사람이 그렇게도 많은것도 처음봤고 물건도 굉장히 다양하게 있었어요. 한마디로 눈알이 빠질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남대문도 보고 지하철도 한번 타보고 이렇게 하루를 보냈는데 밤이 되자 무서움이 엄습해왔습니다.

 잠은 자야 되겠고 해서 TV여로에서 여인숙이 잠자던 곳이라는 사실은 알아서 지금 서울역 왼쪽에 어느 좁은 골목안에 고향 여인숙 이라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잘려고 3명이서 용기를 내어 갔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자꾸 꼬치꼬치 캐묻길래 불안해서 3명이서 눈치로  도망가서 지금 대우빌딩 뒤쪽에 허름한 상가 창고에 숨어서 잠을 잤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고 나니까 막상 할일도 없고 찾아 갈곳도 없고 보이는게 산이라 우리는 지금의 남산에서 무작정 걷다가  다시 짜장면도 사먹고 이렇게 또하루를 보내려고 하니까, 정말 엄마가 너무나도 보고싶고 고향에서 걱정하고 계신 친인척들도 서서히 걱정되고 아버지 몽둥이도 눈앞에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상기 하면서 또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아침에 도저히 않되겠다 싶어서 친구들한테 도로 내려 가자고  제안했더니 한명은 동의 하는데 한명은 동의를 않하길래 재차 내가 다시 물었죠. 돈도 한푼도 없는놈이 너혼자 어쩔려고 하는냐고 하니까 그래도 않간다고 하길래 나는 뒤도 않돌아보고 대구행 기차표를 끊고 내려 왔습니다.

아마 기차요금이 3,000원정도 했는럴로 기억 되네요.

문제은 집에와서 더크게 발전 되었습니다. 돈30만원은 집에와서 아버지 한테 쓰고 남은 잔액을 돌려 주었는데 채 2만원도 다못쓴것 같았습니다.

 아버지한테 뒤지게 얻어터졌는데 이상하게도 하나도 않아팠습니다.  어머님은 그저 울기만 했고. 그러나 두고온 친구엄마는 내가 그를 서울에 팔아 먹었다면서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할수없이 가출신고 하고 나는 학교에가서 담임선생님 한테 또 얻어터지고(아마 파출소에서 학교로 사건개요를 연락한듯) 교무실에서 손들고 벌을 섰는데 갓부임한 여선생님은 **야 서울이 어떻디? 하면서 질문을 하는데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할수 있어야지.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그때까지 그여선생님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한번도 구경 않한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네요.

그렇게 해서 사건은 정리되고 나는 내인생의 가장 중대한 싯점을 보내고 친구들은 지금도 나를 만나면 이름은 제쳐두고 "어이 써울왔나" 하면서 내별명이 지금도 "써울"입니다.

그리고 집안환경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길래 더이상 나쁜길로 빠지지 않고 나름데로 열씨미 공부라는것을 했고,  고등학교는 나와야 동네 동장이라도 한다는 아버지 말에 꼬여서 남들 다가는 고등학교가고 그것도 실업계 고등학교를 지원했는데 문제가 엄청쉬워서 합격하겠다는 생각은 있었는데 막상 수석으로 입학해서 입학식날 선서하고  장학금 7만원 받아서  학교밑에 있는 시장에 가서 막걸리마시고 나보다 덩치크고 더농땡이같은 녀석과 어울려서 그농뗑이 질랄병이 또도져서 2년6개월내내 잔잔한 사고와 정학을 반복 하면서 학교생활을 보냈다. 즉 수석으로 입학해서 꼴지로 졸업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3학년 2학때 고교 내신이라는 이상한 제도가 생겨 가지고 내신15등급가지고 2년6개월내내 공부 않하다가 문득 졸업하고 막상 할일이 없길래 남들은 하나둘 취직하는데 난취직도 하기싫고 농사일은 취미를 잃은지 오래 되었고, 마음도 잡을겸 계속해서 이렇게 살수없다고 친구1명과 함께  울산방어진에가서 코가 터지독록 맥주와소주를 짬뽕해서먹고 집에올려고 하느데 돈100원만내면 조그만 거북이로 물위에서 점을 보는게 있는데 ,

그점에서 앞으로  공부하면 살길이요 공부 않하면 인생 조진다는 그런 내용을 읽고 정말 죽어라고 공부 한번 해보고 않되면 군대에 특전서 하사관으로 지원 하기로 맘먹고 대구로 올라 왔습니다. 

 그러니까 할수없이 벼락치기로 공부해서 대학 가기로 맘을 바꿨습니다. 당장 아버지 한테 형님들도 가는 대학 나도 한번 가보겠다고 책사게 돈달라고 하니까 "야가 미쳤나" 하면서 의아하게 쳐다보고 돈을 않주길래 할수없이 지금 대구의 남산동 당시 대한극장앞과 지금 국민은행자리인 대도극장 부근에서 헌책을 사러 갔는데 그때 문과 이과가 있는데 처음부터 방향을 정해서 공부해야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아무생각없이 저는 이과가 의과대학 가는과인 줄 알고 이과 헌책 몇권사고 형님들 공부하던 옛날책과 친구들책 몇권 얻고 해서 공부를 했는데 12과목정도 되었는데 왜그렇게도 공부할것이 많은지 그때부터 담임선생님께 취업나간다고 말씀드리고 시내에 독서실 얻고 그곳에서 숙식해서 겨우지방 4년제대학 공대에 입학해서 지금 노가다 생활을 18년째 하고 있다.

 가끔식 성북구 소재 동덕여대현장, 경동시장 빌딩, 서울대현장, 성남지하철현장, 신도시 분당, 평촌, 일산, 중동, 용인수지, 서여의도본사,  압구정본사,  신내동택지, 가양동시영 현장등을 두루다니면서 지금의1호선 한강철교를 건넌다든가  승용차로 서울역 앞을 지날때면 감회가 새롭고 아이구 내팔자야야 !하면서 저절로 쓴웃음 나옵니다.

그리고 몇년전 인사동에서 직장동료와 술마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그술집 완전히 날라갔습니다.

자기들이 듣기에는 엄청난 감탄과 놀라움 그리고 웃음거리였습니다.(파안대소)

글을 읽은 많은 젊은이들은 나같은 시행착오를 절대로 겪지 말기를 부탁 하면서 그동안 좋은 글을 몇년동안 읽었는 댓가 이글을 습니다

  서울에 남아 있던 친구는 나중에 동네에 보이더군요. 나이 50을 바라보면서 같이 서울로 탈출을 감행했던 친구중 한명은 행불 되었고 한명은 교도소를 자기집 화장실처럼 들락 거리더니  아직까지 결혼도 못하고 시골에서 소주나 마시고 그렇게 살더군요.

요새 나 퇴근후에 도서관에 공부하러 가는데 많은 젊은이들이 공무원 공부에만 열중하는거 보면서 도대체 이나라가 어떻게 될려고 이러는지 정말 걱정 스럽더군. 젊은이 들이 도전적 진취적인 사고를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이고 편안한것만 추구한다는 사실에 정말 기가 찰노릇입니다. 물론 그런공부를하는 젊은분의 탓은 아니고 사회구조가 잘못되었지만, 이나라의 많은 젊은 청춘들아   제발 아까운 시간을 다른곳에 쓰지말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투자하고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하루하루를 보람되게 사시기 바랍니다.

 

긴글 읽어 주셔서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