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에염

정영섭200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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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변변한 연애는 커녕, 키스 한 번 해보지 못한 스물 일곱살 여자, 은영.
잡지사에서 대량으로 발송하는 DM(Direct Mail) 봉투에 컴퓨터로 출력한 주소를 붙이는
일이 그녀의 직업이었습니다.
1999년 12월 하순의 어느 날-
밀레니엄 축하 이벤트 당첨자에게 상품을 발송하는 과정에서 주소를 바꿔붙이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그녀는 상관으로부터 굴욕에 가까운 폭언을 들었습니다.
그 날 오후, 그녀의 핸드폰으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은영은 넋이 나간 듯이 보였고 퇴근시간까지 말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녀가 다시 사무실에 나타난 건 자정 가까운 시간이었습니다.
만취된 상태로 그녀는 오후 내내 미뤄놓았던 주소 라벨들을 봉투에 붙여나갔습니다.
텅 빈 사무실에서 은영은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나 같은 애가 무슨 연애고 무슨 사랑이야. 누가 나 같은 애를 좋아하겠어.
돈도 없고, 빽도 없고, 못생겼는데…”
은영의 가장 친한 친구가 결혼한다고 걸어온 전화, 친구의 결혼상대는 다름아닌
은영이 지금까지 남몰래 5년 동안 짝사랑해왔던 남자였습니다.
가슴속에만 담아두었던 얘기들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참고 참았던 눈물이 북받치듯
쏟아져내렸습니다. 밀레니엄을 맞이한다고 도심이 축제분위기로 떠들썩하던 시간에
은영은 생애 최악의 날을 맞고 있었습니다. 주소라벨이 붙은 봉투 아무거나 하나 집어들어
자신이 쓴 글을 넣고 풀로 봉하면서 은영의 머리속에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삶에 실패했다면…죽는거야. 죽는 거나 성공해보자’

모든 여자들이 자기한테 관심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스물일곱의 남자, 종헌.
잡지사에서 사진기자로 일하는 그는 하루 종일 메신저로 적어도 4,5명의 여자들과 동시에
얘기를 하거나, 그 틈틈히 문자를 날리는 작업맨이었습니다.
종헌에게 인생은 늘 즐거운 사건사고가 터지는 다이내믹한 것이었고,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자신의 인생이 너무나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는 사무실 반대 끝쪽에 앉은 은영을 보면서 ‘아이구 인간아, 웃으며 살아도 짧은
인생인데 왜 그렇게 사냐…” 한심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표정도 없고 핏기도 없던 은영의 얼굴에 화사한 빛이 돌고 있음을
종헌은 직업적인 본능(사진기자의)으로 간파했습니다.
그 유난벌떡스러운 성격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는데,
“글쎄…저 같은 사람한테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나봐요.”라는 대답과 함께
은영은 자신의 핸드폰에 찍힌 문자를 보여주었습니다.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말하고 싶네요.

그 문자를 본 종헌은 저절로 악!소리를 낼 뻔 했습니다.
그건 바로 좀 전에 자신이 요즘 작업들어가려고 하는 미모의 여성에게 날린 문자였습니다.
하도 많은 여자한테 날리다보니 공사를 착각하여 오류를 범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기가 막히고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한 번도 웃지 않던 은영이 그 날 내내 잔잔하게
미소짓는 모습을 보는 게 그리 싫지 않았습니다. 아니 왠지 편안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며칠 동안 미소를 짓고 있던 은영이 다시 침울한 표정으로 돌아갔을 때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종헌이었습니다.
“내가 싫어졌나봐. 아니 장난이었나봐. 그래…누가 나를 좋아하겠어.
나도 내가 이렇게 싫은데…그치만 누구였을까…”
은영의 얘기를 듣고 나서 종헌은 하루 종일 손에 일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까짓거…어차피 수백통 쓰는 메일이고, 수백개 날리는 문자인데
한 두개 더 날려주자. 저 여자 불쌍하잖아.”

종헌이 은영에게 실체를 감추고 보내는 메일과 문자는 그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스스로 심한 열등감에 빠져있던 은영은 메일과 문자를 보내주는 남자를 만난다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누구인지 묻지 않았고, 종헌은 자신이 누군지 밝히지 않아도 되기에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얘기들을 스스럼없이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들은 이런 걸 좋아하리라고 의식해서 보내던 메일들과는 다른 인간적인 내용속에서
은영은 점차 살아야만 하는 이유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생기있는 은영의 모습을 보는 게 종헌은 늘씬쭉쭉빵빵한 여자들과
말초적인 얘기를 나누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하고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2000년 가을, 갑자기 은영이 회사를 나오지 않았고 은영으로부터의 메일도
끊어졌습니다. 종헌은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며칠을 메일을 보내도 답장 한 통
없던 어느 날, 회사 동료로부터 이런 얘기를 듣게 됩니다.
“왜 걔 있잖아. 파리해가지고 봉투에 주소 붙이던 애. 걔가 사표를 냈대.
거 뭐 병명도 되게 어려운데 하여간 죽을 병이래. 그래서 그만뒀다는 거 같지?”

그럴 수가… 적어도 메일을 통해 서로의 진실을 주고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병에 걸렸다는 얘기는 한 마디도 없었는데…
도대체 왜? 왜 한마디 얘기도 없이 사라진 거야.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한바탕 배신감이 훑고 지나갔을 때는 종헌에겐 은영에 대한 걱정만이 남아있었습니다.
어디에 있더라도 무사하기를… 그런 생각만이 간절했습니다.
걱정, 근심으로 일주일 정도 흘렀을 무렵 은영으로부터 이메일이 아닌 편지가 왔습니다.

안녕?
내 소식이 끊겨서 혹시 궁금해했을까? 궁금해했으면 좋겠는데…
나 사실은 그동안 말하지 않은 게 있었어.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거…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도 알게 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거든.
참 이상한 병이야. 부갑상선기능항진증에 의한 각피 석회화증…
온 몸이 점점 굳어져서 결국엔 돌처럼 딱딱해지게 된대.
웃지 않고 매일 딱딱한 표정만 짓고 살아서 벌을 받았나봐
그래도 너랑 얘기할 수 있어서 많이 웃을 수 있었는데, 너무 늦었나 봐.
내 몸이 너무 딱딱해져서 움직일 수 없게 되기 전에
엄마랑 시장에도 가고, 아버지 구두도 닦아드리고, 우리 강아지랑 산책도 하려고
시골집에 내려와 있어. 왜 좀 더 일찍 이렇게 살지 않았을까…
그래도 난 행복해. 너를 만나서 꿈을 꿀 수 있었고, 꿈을 가질 수 있어서 행복했어.
고마워. 그래도 난 너를 만나보고 싶었고, 네 손을 걷고 거리도 걸어보고 싶었는데…
모든 꿈을 다 이룰 수는 없겠지….
이 정도로 만족해. 비록 내 몸은 굳어가도 너를 사랑했기 때문에
내 안은 포근할거 같애.
마지막으로 편지를 쓰고 싶었어. 내 직업이 편지 보내는 일이었잖아.
이 편지를 받을 때쯤이면 나는 아마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닐거야…
내가 엄마한테 나를 묻는 날 부쳐달라고 했거든…

그것이 은영으로부터의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종헌은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습니다.
만날 수 있었고, 손을 잡고 거리를 걸을 수 있었고, 굳어가는 은영의 곁을
보살 펴 줄 수도 있었는데… 은영의 그 작은 꿈을 이뤄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1년 후-
종헌은 꿈을 꿀 수 있어서 행복했던 은영보다,
은영을 꿈꾸게 하는 그 동안 자신이 그 어느 순간보다 행복했음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꿈을 갖게 하는 일, 잃어버린 꿈을 되찾게 하는 일,
그 꿈들을 현실로 이루는 일에 종헌은 남은 인생을 다 바치겠다고 결심하고
그런 직업을 찾기 시작했고,
결국 지금은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꿈을 찾아주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감동스러운 얘기네요.

정말 감동스러운 얘기네요.
위 글의 종헌이라는 남자는 지금제이슨프라임이라는 회사의 회원지원팀에서 일한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