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실 만화경 ⑦ [구 제목: 어떤 놈과 마주치다]

염탐소녀2003.08.20
조회161


"어 어떻게,,"

"으나 맞지? 이것 받아 볼래?"

그가 내민 종이를 꾹 잡고 당겨 자리로 가져왔다. A4 한 장을 길게 말아놓은 쪽지를 펼치면서 나는 새로운 음악을 꺼내 들었다. 맨디무어의 프린세스다이어리.▶▶

  으나.                                                           

  안녕. 놀랬니? 난 진우라고 해,
  몇번 마주쳤지만, 제대로 인사 하진 못했지.
  하지만 네 얘긴 영진이에게 많이 들었어.
  할말 있으니 시간 있으면 11시에 휴게실로 나와줄래? 
  안 나오면 못오는 줄 알고 바로 들어갈게. 

                                                     진우가.


쪽지를 확인하고는 11시가 될때까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그를 만나면 난 무엇부터 물어보아야 할까, 혹시 예전부터 우리를 보고 있었느냐고? 그런데 난 순간, 내 자신이 무척 '예뻤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낡은 거울속의 나의 모습을 들여다 보았다. 나는 조금 더 여위었지만, 여전히 휴화산 같은 붉은 여드름을 잠재우지 못한 채 피부는 거칠어져 있었다. 그를 만나기엔 나는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친구의 남자친구, 그를 만나는 것이 조금은 어색했다.

하지만 난 10 50 분이 되자 손살 같이 휴게실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약간 긴장한 듯한 진우는 오히려 나보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뭐 마실래?”

자판기에서 음료를 꺼내주다가 그가 나를 보더니 오늘은 마치 중요한 이야기라도 할 사람처럼 진지하게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의식하지 않는 것 처럼 음료를 주욱 마셔버렸다.날 만나는 사실을 진하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자리를 바꾸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밖에 잠깐 나갈까?"

그렇게 자리를 옮기려는데,

“으나, 진우 두 사람. 12시 이후엔 퇴실 금지 인거 알지? 빨리 들어와!”

“걱정 마세요. 총무님!! 저희 아무 짓도 안할테니..”

진하 남자 친구였기 때문에 농담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총무실에 걸터 앉아 매일 연필만 잡고 있던 현수는 그 말을 하고는 휴게실 소파에 걸터 앉아 한동안 생각 없이 TV 만을 보고 있었다.그런 그를 멀리하고

진우와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왔다.근처의 놀이터로 자리를 옮겼다. 놀이터는 무척 여유로웠다. 독서실 보다 한산한 듯한 기분, 나무 한그루 서 있어 제법 운치를 더 하고 있었다. 나름의 즐거운 상상들도 해보면서. 그 사이로 달빛이 환히 비추고 있었다.

"사실 널 만나자고 하긴 어려웠지만, 지금 널 보니 마음이 편해진다."
"그냥 어떤 말이든 편하게 해!고민 상담이라도 해줄게."
"너 근데 그 구멍 예전부터 알고 있었니?"
"아니. 오늘 처음.."
"그랬구나"

그가 대체 어떤 말을 할까 대화를 하면서도 정신 없는 느낌에 한참이나 달만 보았다.문득 아무 말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무섭고도 먼 옛날에 -                                    그리고 신촌에 한 복판에
토끼 한 마리가 -                                      그리고 토기를 파는 한 할머니가 
살았는데 -                                          바이더 웨이 옆에서 장사를 하는데
토끼와 경주를 하던 거북이가 -                어디서 토끼를 사가려는 가방 큰 사나이가                  
등이 무거운지 느릿느릿 걸었더래 -         어디서 발바르게 튀어나와 토끼를 잡아채더래
토끼는 날렵하게 돌아다니고 -                     남자는 큰 가방에 토끼를 집어 넣었대
산넘고 물건너 - 바다를 건널 시점에 -         전철을 타고 인파속에 끼어 들어 갔을 때
토끼가 가방에서 튀어나왔대                                  남자는 잠이 들어버린거지
토끼는 멀리멀리 뛰어갔고 거북이는 토끼를 따라잡지 못한거야.
.

전철에서 내린 남자는 토끼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 왔는데
대문앞에 저만한 보름달을 보았어.

그리고 '내일 다시 토끼를 사야지' 하며 집으로 들어 갔대.


사실, 오늘 내가 말하려는 건 영진이 이야기야, 라고 그가 말을 꺼냈다.어떤? 이라고 묻기도 전에 난 그 말을 한참을 뒤집어 생각 해 보아야 했다. 어떤 것일까, 디케일하게? 흐릿하게?

"아무래도 영진이가 진하를 좋아하는 것 같아!"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난 순간, 머릿속으로 추궁아닌 추궁을 하고 있었다.

"걔가 직접 얘기 했니?"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느낌이야,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고, 몇 번 영진이가 진하를 넋놓고 바라 보는 것을 봤어,그리고 몇 번이나 나에게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다 말았어, 괜히 네 얘기를 들먹거리면서
라고 그가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난 순간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가 그런 이야기를 꺼내자 마자, 난 이어폰을 끼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과자를 먹던 나를 생각 했다. 졸리움에 허덕이며 침흘리던 나, 열람실에 인기척이 없을 때, 은밀한 소리를 내면서 이상한 상상의 나래를 펴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 그랬을까.

그랬구나. 영진이도 바로 나처럼 진하를 생각하고 있었구나.어두어지려고 하는 분위기를 애써 우스꽝스런 나의 몸짓으로 커버를 하려는 순간 나는 자꾸 머릿속에 먹고 싶은 것들이 가득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치킨. 피자, 햄버거, 잘 익힌 양념 소갈비가 나의 허기를 자극 하고 있었다.

"아 배고파!!"

진우는 나의 살들을 갑자기 꺼리낌 없이 턱 만지면서 배시시 웃어 보였다.

"살 많이 쪘네?우리 같이 운동이나 할까? "

그의 말이 참 신선하게 들렸다. 오히려 기분이 나쁘지 않았고 속시원히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그가 도리어 고마웠다!

"그럴까? 젠장, 이 남아나는 살들을 확 다! 버리고 싶다니까!"

"검도 배워볼래?" 내가 가르쳐 줄게."

"정말?"

"응. 아참, 아까 영진이가,너 만난다고 내려온다니까, 너 소개팅 하라고 전해주라고 하더라!"

"소대팅!!?"

갑자기 긴장한 배가 불룩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너랑 잘 어울릴 만한 애 소개 시켜 주고 싶다고, 전부터 말했었거든."

문득 영진이에게 나온 그 말이 눈물처럼 가슴에 떨어지는 듯 했다.

"그래! 한다, 해! 까짓껏, 내가!  뭐, 꿀려! 만나, 만나! 어디야,언제!"

"이번주 토요일 오렌지 3시 30분, 오렌지 빠, 라는 호프집이래. 늦지 말고 나가!"


그렇게 현수가 엄포한 12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 진우와 헤어지기 전까지 내 표정은 애써 애잔함, 평화로움 이었다.

총무실의 현수는 내려갈 때와 달리 올라올 땐 따라 날 쳐다도 안보고 휴게실 쪽에서 여전히  TV를 보고 있었다. EBS 역사 스페셜을 넋나간 채 보고 있었다.그런 그의 이면이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쟤는 왜 이런 순간 태클도 안걸지? 그냥 장난이나 치고 싶은데...'

열람실에 들어와 다시 진하를 찾았다. 자랑하고 싶었다. '나 소개팅 제의 받았다'고,하지만 그녀는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자고 있었다. 그녀의 옆모습을 자세히 보았다. 역시 그녀는 예뻤다. 난 덜퍼덕 독서실 바닥에 엎드려 푸샵을 10번 했다.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다음날.

구멍속에서 다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으나야!”
 "응?"

제법 익숙해진 몸짓으로 난 구멍으로 향해 다가갔다. 그는 아마도 소개팅에 대해서 할말이 있는 듯 했다. 난 막아 놓은 구멍속의 종이를 열심히 빼고 있었다.진하인 듯한 사람하나가 갑자기 내 배를 확 껴안고 있었다.

“더 조여라, 내 뱃살들이 압사를 한번 당해야 해! 윽!!”

묵직한 손의 느낌이 내 뱃속까지 느껴졌다. 살이 접힌다는 느낌을 나 스스로 받는 터였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종이를 휘익 앞으로 당지만 생각보다 종이가 뻑뻑해서 빠지지 않았다.
퍽! 종이가 빠짐과 동시에 뒤로 나는 나를 잡고 있던 손과 함께 뒤로 벌러덩 넘어지고 말았다. 뒤에서 당기고 있어 힘은 2배나 더 했다.

“..........악..죽을 것 같아. 이젠 풀어 줘!!”
 "끙!"

배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아서 난 일어날 수 조차 없이 바닥에서 반바퀴나 굴러야 했다.
댕굴댕굴.

“팔 빼라니까, 이년아. 퍽퍽 ” 하고 등을 확 밀쳐 내려는데

“으읍....” 뒤에서 꼭 안고 있는 손이 어느새 나를 일으키고 있었다.

“힘이 장사네 날 일으키고! ”
 
하고 뒤를 휙 돌려보는데, 까만 그림자, 그건 진하가 아니었다. 허리를 꾹 잡고서 벌렁 넘어지던 그 사람은 진하가 아닌.

현수였다.

"헉....."

숨이 탁 막히는 듯 했다.

순간 너무나 놀라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현수도 놀랐는지 엉겁결에 나의 입을 손으로 꽉 막고 있었다.

"으나야! 노래 들어 볼래?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하나 있는데.잠시만, 자리에서 가져올게." 진우가 말을 했다.

"읍!"

당황해서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린 나를 현수는 구멍이 안보이는 외벽으로 몰아 부쳤다. . 그는 놀란 나를 한참이나 또렷히 바라보더니 그는 귀에다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웁”

그리고 그는 꼼짝 달싹 못하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진우의 그 목소리를 들은 현수의 눈빛이 너무 예사롭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씩 다가오다 그의 코가 내 코에 닿았다. 그리고 나의 입술 가까이, 아니 입술로 그를 느낄 수 있었다.

 


"읍"

"자 받아, 얼마전에 알게 된 노랜데. 너무 좋다.가을 동화 OST 피아노 연주곡이야."

이어폰 하나를 구멍 틈으로 전해주고 있던 진우.

난 현수의 발 뒤쿰치를 눌러 자리를 움직이며 구멍쪽으로 손을 뻗치고 있었다.
쓸쓸하지도, 부드럽지도, 편안하지도 않은 음악이 되어 현수가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윽... 놔."

그를 뿌리쳤다. 머릿속이 텅 빈 마네킹 처럼 하얗게 변한 듯 했다.그냥 엷은 입술을 비집고 들리는 그런 그의 손길을 난 거부한 채 구멍속으로 다가갔다.

"................."

그도 그런 자신이 조금 답답했는지 이내 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한발 물러섰다.
".......?"

그는 어깨에 올린 손으로 미안하다고 말을 하는 듯 했다. 그는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됐다. 방금의 난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나는 잠깐 생각을 밖으로 빼 담고 공중에 공기처럼 멈추어 있었을 뿐이었다. 음악을 듣기 전에 조금 힘들었던 것 뿐이었다.

그가 떠난 열람실은 여전히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그래서 약간은 쓸쓸한 정적들로 가득 찼다. 내 입술에 묻어 있는 그의 체취들이 음악과 함께 나에게 전해졌다.

"좋지?"
"응??..................응"

입김들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아직 나는 나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외모와 체형을, 그리고 나의 정리 되지 않은 꿈들을 컴플렉스라 여기기 때문에, 그래서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난 그를, 음악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도 나와 비슷하게 그 자신을 정리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 해버리기로 했다.

나의 딱딱한 몸이 음악과 함께 달라지고 있었다. 나의 정신 세계, 영영 날아가서 돌아올 것 같지 않던 그 영혼의 세계가 그렇게 저편에 진우와 닿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