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문집의 이름은 어떻게 지어지나?

clipdm2006.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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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시문집의 이름이 어떻게 지어지는가를 설명하면서, <문집·유고·전서·만필·실기·세고…>등의 뜻도 함께 풀이하겠습니다.

   시문집의 이름은, 글 지은이 또는 엮은이의 '①아호(雅號) 또는 당호(堂號), ②성(姓)과 자(字), ③최고 직명(職名)과 접미사 공(公), ④시호(諡號)와 접미사 공'에다가 '집(集)·고(稿) 등'의 글자가 들어가는 단어가 붙어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지금이라도 족보에서 직계 존속의 해당 사항을 찾아서, 집안에 전래하는 고서적의 책제와 한번 대조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퇴계집(退溪集)>이 진보인 이황(李滉)의, <해좌집(海左集)>이 나주인 정범조(丁範祖)의 아호로써; 그리고 <매월당집(梅月堂集)>이 강릉인 김시습(金時習)의, <난설헌집(蘭雪軒集)>이 양천인 허초희(許楚姬)의 당호로써 시문집의 이름을 삼은 ①의 예가 됩니다. <성근보집(成謹甫集)>은 조선 초기 '사육신'의 한사람인 창녕인 성삼문(成三問)의 시문집 이름인데, '성'은 성씨이고 '근보'는 자로서, ②의 예가 됩니다. <서윤공유고(庶尹公遺稿)>는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인 동래인 정극순(鄭克淳)의 시문집 이름인데, '서윤공'은 ③의 예로서, 정극순이 평양부 '서윤'을 지낸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는 병자호란 때 '삼학사'의 한 사람인 해주인 오달제(吳達濟)의 시문집 이름인데, '충렬공'은 ④의 예로서, '충렬'은 그의 시호입니다.

   시집(詩集) 또는 시고(詩稿) 혹은 시초(詩抄=詩 )는 시만 모은 책을, 문집(文集) 또는 문고(文藁=文稿) 혹은 편록(編錄)은 원칙적으로 시 없이 산문만 모은 책을 말합니다. 그런데, '문'은 때로는 '시문'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시집'의 예로는 강릉인 최문발(崔文潑)의 시집 <취석시집(醉石詩集 :필자 석사학위논문 대상)>을, '시고'의 예로는 인동인 장후상(張后相)의 시집 <석문시고(石門詩稿)>를, 시선집 성격인 '시초'의 예로는 전주인 이명오(李明五)의 시집 <박옹시초(泊翁詩 )>를, '시초' 대신 '집초'라 한 예로는 양주인 조화옥(趙和玉)의 시집 <하산집초(霞山集抄)>를, '문집'의 예로는 전주인 이헌경(李獻慶)의 시문집 <간옹문집(艮翁文集)>을, '문고'의 예로는 광주인(廣州人) 이덕형(李德馨)의 시문집 <한음문고(漢陰文稿)>를, '편록'의 예로는 함종인 어유구(魚有龜)의 문헌집 <긍재편록(兢齋編錄)>을 들까 합니다.

   후손이 선조의 시문집에 붙이는 이름으로는, '죽은 사람이 생전에 써서 남긴 원고'란 뜻으로 유고(遺稿)란 말을 흔히 씁니다. 그런 원고가 정리된 형태로 전할 때는 유집(遺集)이라고도 합니다. 흩어진 유고를 수습했으나 중요한 것은 빠뜨렸다고 생각되는 경우는 일고(逸稿) 또는 일집(逸集), 아주 드물게는 존고(存稿)라 합니다. 오랜 노력 끝에 다 모았다고 판단한 경우는 전서(全書) 또는 전집(全集), 더러는 전고(全藁)라 합니다. 표제에 그런 단어를 쓴 시문집의 예를 차례로 들면, 청풍인 김육(金堉)의 <잠곡유고(潛谷遺稿)>가, 연일인 정사하(鄭師夏)의 <안분당유집(安分堂遺集)>이, 안동인 권재성(權載成)의 <서포일고(西圃逸稿)>가, 의성인 김희삼(金希參)의 <칠봉일집(七峰逸集)>이, 남양인 홍춘경(洪春卿)의 <석벽존고(石壁存稿)>가, 덕수인 이이(李珥)의 <율곡전서(栗谷全書)>가, 울산인 김인후(金麟厚)의 <하서전집(河西全集)>이, 평산인 신위(申緯)의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가 있습니다.

   겸손한 태도를 나타낸 시문집 이름으로는, 아무렇게나 썼다는 뜻의 산고(散稿)와, 체계가 없다는 뜻의 잡고(雜稿)와, 변변하지 못하다는 뜻의 영고(零稿)와, 옹졸한 글이란 뜻의 졸고(拙稿)와, 어지러운 글이란 뜻의 난고(亂藁)와, 세상에 내어놓기 부끄러운 사사로운 글이란 뜻의 사고(私稿)·사집(私集)·가장(家藏)과, 남을 속이고 있다는 뜻의 만록( 錄)과, 건방지게 멋대로 쓴 글이란 뜻의 만언(漫言)·만필(漫筆)과, 심심풀이란 뜻의 파적록(破寂錄) 등이 있습니다. 청송인 심낙수(沈樂洙)의 <은파산고(恩坡散稿)>, 반남인 박태관(朴泰觀)의 <응재잡고(凝齋雜稿)>, 전주인 이서(李緖)의 <몽한영고(夢漢零稿)>, 해남인 윤광계(尹光啓)의 <귤옥졸고(橘屋拙稿)>, 경주인 이제현(李齊賢)의 <익재난고(益齋亂藁)>, 경주인 김제덕(金濟德)의 <추수사고(秋水私稿)>, 장흥인 마성린(馬聖麟)의 <안화당사집(安和堂私集)>, 나주인 나경환(羅景煥)의 <성암가장(性庵家藏)>, 함양인 박정규(朴廷奎)의 <야은만록(野隱 錄)>, 예천인 김이만(金履萬)의 <학고만언(鶴皐漫言)>, 해평인 윤흔(尹昕)의 <계음만필(溪陰漫筆)>, 안동인 김시양(金時讓)의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등이 그런 단어가 들어간 시문집 이름의 예가 될 것입니다.

   시문집의 특수한 이름으로는, '주자대전'의 편차 방식을 따랐다고 하는 뜻의 대전(大典), '글과 말'을 모았다고 하는 뜻의 기언(記言), 실제로 있는 일을 적었다고 하는 뜻의 실기(實記), 문중 여러 선인들의 글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뜻의 세고(世稿)…등이 있습니다. 은진인 송시열(宋時烈)의 <송자대전(宋子大典)>, 양천인 허목(許穆)의 <미수기언(眉 記言)>, 영천인 최문병(崔文炳)의 <성재실기(省齋實記)>, 청풍 김씨 문중의 극형(克亨)·징(澄)·구(構) 삼대의 <청풍세고(淸風世稿)>…등이 그 예로 떠오릅니다.

   다음, 시문집이 누구에 의해 편집·간행되었는가 하는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문운과 관운 덕에 유명해진 관료적 문인들은 관아·관원의 힘을 빌어, 비록 초야에 묻혀 있더라도 저명한 학자적 문인들은 나중에 현관(顯官)에 오르는 제자들에 의해, 그 시문은 의례 편집·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반 선비들의 유고는 몇 대에 걸친 후손들의 눈물겨운 노력 끝에 어쩌다가 햇볕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 나온 <성재실기>의 예를 보면, 그 증손이 '편집'하고 7대손이 '간행'한 것을 12대손이 '국역' 개간하였습니다. 풍양인 조필감(趙弼鑑)의 <첨의헌유고(瞻 軒遺稿)>는 아들이, 제주인 양상항(梁相恒)의 <서죽당(瑞竹堂)유고>는 손자가, 앞에 나온 <안분당유집>은 현손이, 동복인 오광운(吳光運)의 <약산만고(藥山漫稿)>는 5대손이, 광주인(廣州人) 이세형(李世珩)의 <서헌문집(恕軒文集)>은 6대손이, 전주인 이문재(李文載)의 <석동(石洞)유고>는 7대손이, 광산인 김성원(金成遠)의 <서하당(棲霞堂)유고>는 8대손이, 진주인 하세희(河世熙)의 <석계(石溪)유고>는 9대손이, 아주인 신흘(申 )의 <성은일고(城隱逸稿)>는 10대손이 편집·간행한 것입니다.

   모선(慕先)의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일반 선비들의 시문집에 특히 관심을 두어야 하는 까닭은, 거기에 그 주인공과 교유하던 다른 선비 즉 문중 선조의 시나 행장·비문 등이 뜻밖에 실려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