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와 푸코가 각기 20세기 중반기와 후반기를 대표하는 철학자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유신시대에 스타로 떠오른 한 사회학자의 `지식 기사' 개념이라든가, 참여문학론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한 한 문학 진영은 모두 사르트르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다만 프랑스에서의 사르트르의 영향력이 40-50년대에 절정을 이루고 그 후에 쇠퇴했다면 한국에서는 근 20년의 시차를 두고 70-80년대에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는 차이가 있을뿐이다. 한국에서도 많은 추종자를 둔 사르트르의 지식인론과 문학론은 마르크시즘의 계급 투쟁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계급 투쟁의 타도 대상은 부르주아 계급이다. 문필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고 또 그중의 주도적 문필가들은 예외없이 모두 부르주아에 대한 격렬한 증오나 비판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이 프랑스의 특이한 지적 풍토였다. 17세기 이래 광인이나 부랑자의 대감금, 감시에 의한 규율 사회의 정착, 성의 담론을 부추기는 인문과학의 대두등의 문제를 다룬 푸코의 담론 역시 그 귀결점은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문제에 눈길을 돌리는 것은 20세기적 사유의 결산에 필수적인 토대가 될 것이다. 부르주아 혐오에 있어서 플로베르, 보들레르등 19세기 작가들의 연장 선상에 있던 사르트르가 2차대전 이후부터 그것을 마르크시즘의 주물 속에 집어 넣은것에 반해 푸코는 좀더 니체적인 방식으로 권력 문제에 접근하여 계급 문제의 섬세한 갈피를 역사 속에서 찾았다. 현대 사회에서 부르주아지는 보통명사화 하여 단순히 유복한 특권계급을 뜻하고 있지만, 원래 그것은 유구한 서양 역사 속에서 탄생하고 발전해온 역사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그 역사적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것은 20세기의 지배적 사상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것이다.
남을 지배할 권리
우선 부르주아가 타도 대상 혹은 혐오의 대상이 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물질적 유복함 때문이 아니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경멸하며 그들 위에 군림하려는 오만함 때문이다. 그들은 남보다 돈이 많아서 오만하고, 남보다 지식이 많아서 오만하다. 부(富)나 지식은 가족을 통해 확대 재생산된다. 따라서 부르주아의 모든 자부심은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다. 남을 경멸하는 부르주아적 오만의 원천은 가문이다. 소설 <구토>의 주인공 로깡땡이 부빌시의 시립 박물관에서 관람하는 백50명 명사들의 초상화도 모두 훌륭한 가문의 인사들이다. 그들은 더할수 없이 아름답다. 로깡땡은 특히 빠로땡의 초상 앞에서 경탄을 금치 못한다. 머리는 약간 뒤로 제껴져 있고, 장갑을 낀 손은 진주빛 회색 바지 옆으로 내려져 있으며, 실크햍을 썼다. 흠잡을것 하나 없고 천한 구석이라고는 없다. 작은 발, 부드러운 손, 당당한 넓은 어깨, 신중한 우아함, 그리고 약간의 환상적인 분위기와 주름살 없는 얼굴이 깨끗하기 그지없다.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그의 입가를 감돌고 있다. 그러나 그의 회색 눈은 웃지 않는다. 50은 되었을텐데 30대처럼 젊고 아름답다. 로깡땡은 그에게서 어떤 흠을 찾아내려던 생각을 포기하고 돌아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초상화의 인물이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제서야 로깡땡은 자신이 왜 이 인물에 그토록 거부감을 느끼는지를 알아차린다. 그가 빠로땡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전혀 이 인물에게 타격을 가하지 않는데, 반대로 빠로땡의 평가는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마침내 그의 존재의 권리마저 문제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만한 부르주아의 모습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부르주아가 가증스러운 것은 그들이 폭력을 휘둘러서도 아니고 노동 계급을 착취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시선이 문제이다. 차갑고 냉정한 시선 하나로 그들은 앞에 앉은 사람을 돌처럼 얼어 붙게 한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메두사(머리칼이 뱀으로 되어 있어서 그것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돌로 변하는 희랍 신화의 괴물)의 시선이라고 한다. 그 비수 같은 시선 앞에서 가진 것 없는 사회의 약자는 갑자기 자신이 후줄근하게 여겨지고, "내가 과연 살 가치가 있는 인간인가?"라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하면 존재의 권리가 흔들리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강조하는 `존재의 권리'(droit d'exister)라는 말에 모든 수수께끼가 다 들어있다. 무상성(無償性)과 우연성이 특징인 인간 존재는 그 누구도 존재의 권리가 없다.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이 우연히 이 세상에 내던져져 절대적인 자유 속에서 순전히 자신의 선택과 기획 투사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 가는 것이 실존의 존재 양식이다. 인간 존재는 근본적으로 부조리(absurde)한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의 삶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 누구도 이 세상을 당당하게 살 권리는 없다. 그런데 유일하게 부르주아 계급은 마치 자신들이 당당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듯이 생각하고 행동한다. 사르트르가 부르주아를 혐오하는 철학적, 사회학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로깡땡은 직업도, 가족도, 친구도 없고, 현실에 뿌리박을만한 아무런 구체적 생활이 없다. 그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집에서는 남편이며 아버지이고 직장에서는 어떤 부서의 장으로 당당하게 살고 있는데, 그 자신은 마치 돌맹이나 풀 또는 미생물같은 삶을 살고 있다. 하찮은 풀이나 돌맹이가 아무런 필연적인 이유도 없이 제멋대로 이 세상에 생겨나 나딩구는거나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도 아무런 존재 이유 없이 우연히 이 세상에 나와 제멋대로 자라고 있는 듯이 생각되는 것이다. 자신의 심장 소리가 아무 의미없는 소음으로 자각될 때도 있다. 한 마디로 삶에 대한 완벽한 자신감의 결여이다. 그런데 아름답고 냉혹한 빠로땡의 회색눈이 갑자기 그에게 이 엄연한 사실을 깨우쳐 준것이다. 아마도 빠로땡의 인생은 로깡땡과는 전혀 다른것이었을 것이다. 그의 심장의 고동 소리, 다른 신체 기관의 희미한 소음까지도 그에게는 순수한 `권리'의 작은 리듬으로 들렸을 것이다. 평생 그는 한번도 자신이 과연 당당하게 살 권리가 있는지, 남의 존경과 복종을 받을 권리가 있는지, 사치와 안락을 누릴 권리가 있는지 의심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손톱만큼의 흠도 없는 60년의 일생중 그는 그저 당당하게 자신의 `살 권리'를 행사했을것이다. 그리고 평생 불유쾌한 현실이나 타인들의 고통 같은것에는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이 자기 권리만을 생각했을 것이다.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절도있게 살며 과도한 쾌락에 몸을 내맡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장엄한 서재에서 균형있고 절제있는 독서를 통해 세련된 교양을 키웠을것이며, 매일 밤 가벼운 독서 끝에 자신의 권리와 의무에 스스로 만족하며 기분좋게 수면에 빠져 들었을 것이다. 그의 초상화를 보면 그의 몸은 살과 뼈, 그리고 순수 권리 로 되어 있는 듯 하다고 로깡땡은 생각한다. 그렇다. 권리가 문제다. 부르주아는 권리로 무장되어 있다. 살 권리, 일할 권리, 부(富)를 소유할 권리, 남에게 명령할수 있는 권리, 남의 존경을 받을 권리, 그리고 하다못해 영생을 얻을 권리까지도. 지배계급은 백인, 부르주아, 남성이라는 3중의 자격을 갖고 있다는 여권운동가들의 말처럼 이들의 권리 또한 가부장적 남성의 권리이기도 하다. 어려서는 화목한 가정에서 잘 양육될 권리, 흠잡을데 없는 가문과 번창하는 사업의 상속자가 될 권리, 남편이 되어서는 보살핌을 받을 권리, 부드러운 애정에 감싸일 권리, 아버지가 되어서는 존경 받을 권리, 수장(首長)(chef)으로서는 남의 복종을 받을 권리를 그들은 요구한다. 『그게 바로 지도자다 (c' tait un chef)라고 로깡땡은 탄성을 지른다.
단편 소설 <지도자의 어린시절>(L'Enfance d'un chef)에서 우리는 `지도자'(chef)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수 있다. 4대째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플뢰리에가의 어린 외아들 뤼시앵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앞에서 굽신거리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chef가 무엇인지를 배운다. 그것은 한 마디로 남을 지배하는 권리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권리가 세습적이라는 점이다. 나도 어른이 되면 사장(chef)이 될까요? 물론이지. 내가 너를 낳은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란다. 권리의 세습은 출발부터 불평등이라는 점에서 사회 정의에 어긋나는 것은 물론, 존재론적으로도 문제가 된다. 매순간 직전의 자기 존재를 무화(無化)해 가며 새로운 기획을 앞으로 투사함으로써 자기 인생을 형성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 양식일진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출발점에서부터 인생의 종착역이 정해진 이런 인생이 진정한 실존일수는 없다. 태어나기 9개월 전에 이미 나의 이름과 직책과 성격과 운명이 정해졌다 고 한탄하는 프란츠(희곡 <알토나의 유폐자들>의 주인공)가 폐인이 된것이나, 작가 플로베르의 형 아실 플로베르(<집안의 백치>)가 아버지의 복사판으로 개성 없는 인생을 살았던 것이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대를 물려가며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이 사람들을 사르트르는 chef라고 지칭한다. 우리가 위에서 `지도자', `수장(首長)', 또는 `사장'이라고 번역한 chef(셰프)는 레스토랑 주방장에서 국가 원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관과 단체의 장을 지시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어휘 영역에서 이것은 단순한 사전적 의미를 넘어 그의 계급관 전체를 함의하고 있다. <유물론과 혁명>의 다음 구절은 그의 문학 작품과 철학적 담론 사이의 텍스트 상호성을 잘 보여준다. 지배계급의 모든 구성원들은 마치 자기들의 권리를 신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chef들의 한 가운데에서 태어난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가 남을 지배하기 위해 이 세상에 나왔다는 생각을 주입 받는다 . 그들은 자신들이 온갖 권리를 다 갖고 있으며, 특히 남의 웃사람이 될 권리와 남을 지배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사르트르는 salauds(살로)(`치사한 놈들'이라는 비속어)라고 부른다. 살로와 함께 chef는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부르주아와 동의어이고, 지배자이며, 남을 지배할 권리가 믿는 뻔뻔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과연 누가 그들에게 이런 권리를 주었는가? 그들의 권리는 정당한 것인가? 부르주아 역사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권리로 그토록 당당하게 이 체제의 수혜자를 자처하는가? 대부분의 가정의 역사를 1-2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거기엔 벼락부자가 있지 않은가? 라고 말했을 때 사르트르도 이 부르주아적 권리의 역사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기원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기원 - 사르트르와 푸코 -
들어가면서
사르트르와 푸코가 각기 20세기 중반기와 후반기를 대표하는 철학자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유신시대에 스타로 떠오른 한 사회학자의 `지식 기사' 개념이라든가, 참여문학론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한 한 문학 진영은 모두 사르트르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다만 프랑스에서의 사르트르의 영향력이 40-50년대에 절정을 이루고 그 후에 쇠퇴했다면 한국에서는 근 20년의 시차를 두고 70-80년대에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는 차이가 있을뿐이다. 한국에서도 많은 추종자를 둔 사르트르의 지식인론과 문학론은 마르크시즘의 계급 투쟁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계급 투쟁의 타도 대상은 부르주아 계급이다. 문필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고 또 그중의 주도적 문필가들은 예외없이 모두 부르주아에 대한 격렬한 증오나 비판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이 프랑스의 특이한 지적 풍토였다. 17세기 이래 광인이나 부랑자의 대감금, 감시에 의한 규율 사회의 정착, 성의 담론을 부추기는 인문과학의 대두등의 문제를 다룬 푸코의 담론 역시 그 귀결점은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문제에 눈길을 돌리는 것은 20세기적 사유의 결산에 필수적인 토대가 될 것이다. 부르주아 혐오에 있어서 플로베르, 보들레르등 19세기 작가들의 연장 선상에 있던 사르트르가 2차대전 이후부터 그것을 마르크시즘의 주물 속에 집어 넣은것에 반해 푸코는 좀더 니체적인 방식으로 권력 문제에 접근하여 계급 문제의 섬세한 갈피를 역사 속에서 찾았다. 현대 사회에서 부르주아지는 보통명사화 하여 단순히 유복한 특권계급을 뜻하고 있지만, 원래 그것은 유구한 서양 역사 속에서 탄생하고 발전해온 역사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그 역사적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것은 20세기의 지배적 사상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것이다.
남을 지배할 권리
우선 부르주아가 타도 대상 혹은 혐오의 대상이 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물질적 유복함 때문이 아니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경멸하며 그들 위에 군림하려는 오만함 때문이다. 그들은 남보다 돈이 많아서 오만하고, 남보다 지식이 많아서 오만하다. 부(富)나 지식은 가족을 통해 확대 재생산된다. 따라서 부르주아의 모든 자부심은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다. 남을 경멸하는 부르주아적 오만의 원천은 가문이다. 소설 <구토>의 주인공 로깡땡이 부빌시의 시립 박물관에서 관람하는 백50명 명사들의 초상화도 모두 훌륭한 가문의 인사들이다. 그들은 더할수 없이 아름답다. 로깡땡은 특히 빠로땡의 초상 앞에서 경탄을 금치 못한다. 머리는 약간 뒤로 제껴져 있고, 장갑을 낀 손은 진주빛 회색 바지 옆으로 내려져 있으며, 실크햍을 썼다. 흠잡을것 하나 없고 천한 구석이라고는 없다. 작은 발, 부드러운 손, 당당한 넓은 어깨, 신중한 우아함, 그리고 약간의 환상적인 분위기와 주름살 없는 얼굴이 깨끗하기 그지없다.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그의 입가를 감돌고 있다. 그러나 그의 회색 눈은 웃지 않는다. 50은 되었을텐데 30대처럼 젊고 아름답다. 로깡땡은 그에게서 어떤 흠을 찾아내려던 생각을 포기하고 돌아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초상화의 인물이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제서야 로깡땡은 자신이 왜 이 인물에 그토록 거부감을 느끼는지를 알아차린다. 그가 빠로땡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전혀 이 인물에게 타격을 가하지 않는데, 반대로 빠로땡의 평가는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마침내 그의 존재의 권리마저 문제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만한 부르주아의 모습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부르주아가 가증스러운 것은 그들이 폭력을 휘둘러서도 아니고 노동 계급을 착취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시선이 문제이다. 차갑고 냉정한 시선 하나로 그들은 앞에 앉은 사람을 돌처럼 얼어 붙게 한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메두사(머리칼이 뱀으로 되어 있어서 그것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돌로 변하는 희랍 신화의 괴물)의 시선이라고 한다. 그 비수 같은 시선 앞에서 가진 것 없는 사회의 약자는 갑자기 자신이 후줄근하게 여겨지고, "내가 과연 살 가치가 있는 인간인가?"라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하면 존재의 권리가 흔들리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강조하는 `존재의 권리'(droit d'exister)라는 말에 모든 수수께끼가 다 들어있다. 무상성(無償性)과 우연성이 특징인 인간 존재는 그 누구도 존재의 권리가 없다.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이 우연히 이 세상에 내던져져 절대적인 자유 속에서 순전히 자신의 선택과 기획 투사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 가는 것이 실존의 존재 양식이다. 인간 존재는 근본적으로 부조리(absurde)한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의 삶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 누구도 이 세상을 당당하게 살 권리는 없다. 그런데 유일하게 부르주아 계급은 마치 자신들이 당당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듯이 생각하고 행동한다. 사르트르가 부르주아를 혐오하는 철학적, 사회학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로깡땡은 직업도, 가족도, 친구도 없고, 현실에 뿌리박을만한 아무런 구체적 생활이 없다. 그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집에서는 남편이며 아버지이고 직장에서는 어떤 부서의 장으로 당당하게 살고 있는데, 그 자신은 마치 돌맹이나 풀 또는 미생물같은 삶을 살고 있다. 하찮은 풀이나 돌맹이가 아무런 필연적인 이유도 없이 제멋대로 이 세상에 생겨나 나딩구는거나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도 아무런 존재 이유 없이 우연히 이 세상에 나와 제멋대로 자라고 있는 듯이 생각되는 것이다. 자신의 심장 소리가 아무 의미없는 소음으로 자각될 때도 있다. 한 마디로 삶에 대한 완벽한 자신감의 결여이다. 그런데 아름답고 냉혹한 빠로땡의 회색눈이 갑자기 그에게 이 엄연한 사실을 깨우쳐 준것이다. 아마도 빠로땡의 인생은 로깡땡과는 전혀 다른것이었을 것이다. 그의 심장의 고동 소리, 다른 신체 기관의 희미한 소음까지도 그에게는 순수한 `권리'의 작은 리듬으로 들렸을 것이다. 평생 그는 한번도 자신이 과연 당당하게 살 권리가 있는지, 남의 존경과 복종을 받을 권리가 있는지, 사치와 안락을 누릴 권리가 있는지 의심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손톱만큼의 흠도 없는 60년의 일생중 그는 그저 당당하게 자신의 `살 권리'를 행사했을것이다. 그리고 평생 불유쾌한 현실이나 타인들의 고통 같은것에는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이 자기 권리만을 생각했을 것이다.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절도있게 살며 과도한 쾌락에 몸을 내맡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장엄한 서재에서 균형있고 절제있는 독서를 통해 세련된 교양을 키웠을것이며, 매일 밤 가벼운 독서 끝에 자신의 권리와 의무에 스스로 만족하며 기분좋게 수면에 빠져 들었을 것이다. 그의 초상화를 보면 그의 몸은 살과 뼈, 그리고 순수 권리 로 되어 있는 듯 하다고 로깡땡은 생각한다. 그렇다. 권리가 문제다. 부르주아는 권리로 무장되어 있다. 살 권리, 일할 권리, 부(富)를 소유할 권리, 남에게 명령할수 있는 권리, 남의 존경을 받을 권리, 그리고 하다못해 영생을 얻을 권리까지도. 지배계급은 백인, 부르주아, 남성이라는 3중의 자격을 갖고 있다는 여권운동가들의 말처럼 이들의 권리 또한 가부장적 남성의 권리이기도 하다. 어려서는 화목한 가정에서 잘 양육될 권리, 흠잡을데 없는 가문과 번창하는 사업의 상속자가 될 권리, 남편이 되어서는 보살핌을 받을 권리, 부드러운 애정에 감싸일 권리, 아버지가 되어서는 존경 받을 권리, 수장(首長)(chef)으로서는 남의 복종을 받을 권리를 그들은 요구한다. 『그게 바로 지도자다 (c' tait un chef)라고 로깡땡은 탄성을 지른다.
단편 소설 <지도자의 어린시절>(L'Enfance d'un chef)에서 우리는 `지도자'(chef)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수 있다. 4대째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플뢰리에가의 어린 외아들 뤼시앵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앞에서 굽신거리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chef가 무엇인지를 배운다. 그것은 한 마디로 남을 지배하는 권리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권리가 세습적이라는 점이다. 나도 어른이 되면 사장(chef)이 될까요? 물론이지. 내가 너를 낳은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란다. 권리의 세습은 출발부터 불평등이라는 점에서 사회 정의에 어긋나는 것은 물론, 존재론적으로도 문제가 된다. 매순간 직전의 자기 존재를 무화(無化)해 가며 새로운 기획을 앞으로 투사함으로써 자기 인생을 형성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 양식일진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출발점에서부터 인생의 종착역이 정해진 이런 인생이 진정한 실존일수는 없다. 태어나기 9개월 전에 이미 나의 이름과 직책과 성격과 운명이 정해졌다 고 한탄하는 프란츠(희곡 <알토나의 유폐자들>의 주인공)가 폐인이 된것이나, 작가 플로베르의 형 아실 플로베르(<집안의 백치>)가 아버지의 복사판으로 개성 없는 인생을 살았던 것이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대를 물려가며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이 사람들을 사르트르는 chef라고 지칭한다. 우리가 위에서 `지도자', `수장(首長)', 또는 `사장'이라고 번역한 chef(셰프)는 레스토랑 주방장에서 국가 원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관과 단체의 장을 지시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어휘 영역에서 이것은 단순한 사전적 의미를 넘어 그의 계급관 전체를 함의하고 있다. <유물론과 혁명>의 다음 구절은 그의 문학 작품과 철학적 담론 사이의 텍스트 상호성을 잘 보여준다. 지배계급의 모든 구성원들은 마치 자기들의 권리를 신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chef들의 한 가운데에서 태어난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가 남을 지배하기 위해 이 세상에 나왔다는 생각을 주입 받는다 . 그들은 자신들이 온갖 권리를 다 갖고 있으며, 특히 남의 웃사람이 될 권리와 남을 지배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사르트르는 salauds(살로)(`치사한 놈들'이라는 비속어)라고 부른다. 살로와 함께 chef는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부르주아와 동의어이고, 지배자이며, 남을 지배할 권리가 믿는 뻔뻔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과연 누가 그들에게 이런 권리를 주었는가? 그들의 권리는 정당한 것인가? 부르주아 역사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권리로 그토록 당당하게 이 체제의 수혜자를 자처하는가? 대부분의 가정의 역사를 1-2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거기엔 벼락부자가 있지 않은가? 라고 말했을 때 사르트르도 이 부르주아적 권리의 역사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