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창대골'이라고 부르던 마을이다. 동네 곳곳에 푸른 산죽(山竹;조릿대)이 많이 자생하기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혹은 안창죽 검룡소 밑에 자리한 서·천·이(徐·千·李) 배판터에 살던 천씨네가 큰 피나무집 터로 옮겨와 크게 번창하며 살 때 집뒤에 대나무를 심어 대나무가 무성하기에 마을 이름을 창죽(蒼竹)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후 천씨네가 미골의 장군석을 깨어버리고 집안이 쇠망하자 창죽마을을 떠나버렸고 무성하던 대나무도 천씨네 가운처럼 죽어 갔다. 그후 이씨네가 창죽에 들어와 천씨네 터에 살게 되어 오늘날까지 창죽의 대성으로 정착하고 있다.
지금부터 70여년 전만해도 그때 그 대나무 뿌리들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창죽은 창죽골[안창죽]과 천의봉동[바깥창죽]의 2개 마을로 이루어진 법정동인데 현재는 행정동인 화전1동에 속해있다.
ㆍ열님이네 뫼깨[열느미네뫼깨] ― 창죽골어귀에서 500m 정도 들어가면 넓은 땅에 예비군 훈련장을 만들어 놓은 곳 이 있는데 이곳이 열님이네 뫼께이다. 훈련장을 만들기 전에는 훈련장 한가운데에 무덤이 하나 있었는데 그 무덤을 '열님이네 뫼' 혹은 '열느미네 뫼'라고 불렀다. 열님이네 뫼가 있는 고로 그 일대를 열님이네 뫼께라고 부르는데 열은 10을 뜻하고 '님이' 혹은 '네미' 또는 '느미'라고 부르는 말은 '딸' 또는 '여인'을 뜻하는 말이며 께는 어디깨 터께 등 으로 쓰이는 장소를 나타내는 말이다. 예전에 이 근방에서 어떤 사람이 살았는데 딸만 10명을 낳아 키우다가 후사 를 이어가지 못하고 죽어 이곳에 장사를 지냈다. 그뒤 사람들은 이 무덤을 '열느미네뫼'라고 불렀고 그 일대를 열느 미네 뫼깨라고 부르게 되었다. 훈련장 한 가운데에는 예전에 큰 늪이 있었다.
ㆍ점말둔덕 ― 안창죽으로 들어가서 열느미네 뫼깨를 지나 한참가면 큰 언덕길이 나온다. 이곳이 점말둔덕이다. 300 여년 전 숙종때 하장면원동리에서 쇳돌[鐵石]을 운반해와 이 언덕 아래의 점터에서 녹여 무쇠[水鐵]를 만드는 수 철점(水鐵店)이 있었다. 그 당시 수철점이 번창할 때 이 언덕의 아래 위에 수철점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의 집이 수 십채 있어서 이 일대를 점말(점마을)이라 하였다. 점말 뒤에 있는 언덕이라 하여 점말둔덕이라 부르게 되었다.
ㆍ싸리덕 ― 점말둔덕에서 산 윗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산 정상 부근에 넓은 땅이 나오는데 농사 짓기에 적당하다. 예 전에 화전민들이 화전을 일궈 먹던 곳인데 싸리나무가 많아서 싸리덕이다. '덕'이란 말은 산중턱이나 산 꼭대기 쯤에 평탄한 땅을 지칭하는 말로 '덕시', '덕이' 혹은 평전(坪田)이란 말로도 불리운다.
ㆍ조자터 ― 점말둔덕을 넘어서면 오른쪽에 넓은 밭이 하나 있는데 이곳이 조자터이다. 예전에 점터에서 쇠를 녹일 때 이곳에 조(趙)씨 성을 가진 대장장이가 살고 있었다. 그는 일류 대장장이로 인근에 소문이 난 기술자였다. 화승총 도 만들고 각종 연장을 떡 주무르듯 잘 만들었다고 한다. 그가 살던 터라고 해서 조대장터라고 불렀다. 그후 조대장 터가 조자터로 변했다.
ㆍ장군화장터 ― 조자터 건너편의 산 중턱에 있다. 예전에 조자터에 살던 김장군이란 사람이 범에게 물려 죽어 이 곳 에서 화장을 하였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다.(제4편 제2절 설화조 참조)
ㆍ모바우골[모밭골, 멍우밭골] ― 안창죽으로 들어가며 오른쪽으로 맑은 물이 나오는 골짜기가 있다. 조자터와 서가 터 사이의 골짜기이다. 안창죽에서 사람이 사는 유일한 골짜기이다. 골이 깊어 예전에는 1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 금은 2가구만 살고 있다. 골짜기 안쪽에 습지가 많아 멍우라는 나물이 많이 나기에 멍우밭골이라 불렀다. 멍우밭골 이 머우밭골→머바우골→모바우골, 혹은 모밭골로 부르게 되었다. 골짜기로 계속 올라가면 대덕산 주봉으로 갈 수 있고 원동으로 통하는 고갯길이 있다.
ㆍ갈번지 ― 모바우골을 들어 가다가 오른쪽 갈번지골로 올라가면 진등 윗쪽에 넓고 펀펀한 땅이 있는데 갈번지라 한 다. 갈나무가 많은 펀펀한땅이라서 갈번지라고 한다. . 번지는 번디에서 온 말로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룬 산상평지 (山上坪地)를 뜻하는 말이다. 이곳은 서씨네 집단묘가 있고 예전에 화전을 하던 곳이다.
ㆍ소 늪 ― 갈번지재 아래에 있다. 둘레 30여m로 물이 고여 있다. 장마때는 물에 많아지고 평소에는 물이 적다. 늪 윗쪽에 무덤이 하나 있는데 동네의 소가 풀을 뜯으러 와서 무덤을 언덕 삼아 비비면서 무덤을 파헤치면 그 집안에 소가 한 마리씩 생긴다는 말이 전해진다.
ㆍ점샘[占泉] ― 모바우골 물이 이곳으로부터 나온다. 회굼과 새구녕 사이에 있는 석회동굴인데 꽤 많은 물이 나온다. 20∼30년에 한번씩 이 동굴에서 뿌연물이 나오는데 쌀뜨물이라 한다. 아무리 추워도 얼지 않고 한 겨울에도 김이 무럭무럭 난다. 이 동굴에서 뿌연 물이 나오면 인근 마을에 풍년이 들고 붉은 물이 나오면 흉년이 들고 불길한 일 이 생긴다고 한다. 8·15광복때는 뽀얀 물이 나왔고 한국전쟁때는 붉은 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앞날을 점치 는 샘이라고 점샘이라 한다.
ㆍ두꺼비 바우 ― 옛터 옆에 있는데 흡사 두꺼비와 비슷하게 생겼다. 옛날 옛터에 부자가 살았는데 두꺼비 바위가 집 을 지켜 줘서 부자가 되었다. 윗쪽 절터에는 절이 있었는데 부자는 매일 집 앞을 지나다니는 스님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며 시주 한번 한적이 없었다. 자기 밖에 모르는 구두쇠 노랭이 였다. 하루는 스님이 못된 부자를 징계하기 위 해 두꺼비 바위 아래턱을 망치로 깨어 버렸더니 그 부자는 하루 아침에 망해 버려 어디론가 떠나갔고 윗쪽의 절도 망해 없어 졌다. 아랫턱이 떨어져 나간 두꺼비 바위만 옛터를 지키고 있다.
ㆍ장군석(將軍石) ― 안창죽 들어가서 미골의 오른쪽 산등에 높이 5m 정도되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이름하여 장군석 이라 한다. 천씨네가 미골에 묘를 쓰고 크게 번창하여 강원도 남부는 물론 경상도까지 그 소문이 자자 하였다. 자연 히 집에는 손님들이 붐볐고 오가는 길손들도 찾아들게 되었다. 그집 며느리가 손님치기에 불만을 품고 있는데, 어느 날 도승 한분이 시주하러 왔다. 며느리는 집에 손님이 많아서 손님치기가 힘들어 몸서리 나니 손님이 안오게 하는 수가 없느냐고 했다. 그러면 백미 한 말을 시주하겠다고 했다. 도승은 당신네 조상묘 옆에 큰 바위가 있을 테니 그 것을 깨어내면 손님이 오지 않을 것이라 했다.
마침내 며느리는 남편을 꼬득여 인부를 동원시켜 장군바위에 나무로 불을 지핀 다음 바위가 달았을 때 물을 끼얹어 균열이 가게 한 다음 석수쟁이로 하여금 깨어 내게했다. 얼마를 깨 어내는데 천둥번개가 치며 바위에서 붉은 피가 흘러 나왔다. 놀라서 중지하고 말았으나 그때부터 가세는 기울기 시 작했다. 지금도 깨어진 장군석이 좌청룡에 남아있다.
ㆍ덤불아우골 ― 안창죽의 동네 서낭 뒷골이다. 골짜기 어귀에 찔레나무, 다래나무, 칡 등의 덤불이 얼크러져 있기에 덤불아우골이다. 덤불은 칡덤불, 다래덤불, 찔레덤불이며 아우는 어귀의 이 지방 말이다.
ㆍ피나무밑 집터 ― 안창죽에 있다. 300여년 전 영양천씨(潁陽千氏)들이 창죽마을에 들어와 세집모테에 살다가 바로 이 피나무밑 집터로 옮겨와 정착하였다. 그 때 집 뒤에 대나무를 심어 창죽이 무성하므로 창죽이란 마을 이름이 생 겨났다고 한다. 그때 그 집터 뒤쪽에는 큰 피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 큰 피나무 때문에 그집을 '큰 피나무 밑집' 이라고 불렀다. 부자로 살았기 때문에 강원도 남부와 경상도 북부 일원까지 그 이름이 알려졌고 '피나무 밑집'이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나 너무 잘 살고 보니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 그 집 며느리는 손님치기가 너무나 힘들어 불만이 많았다. 하루는 도승이 시주를 청하기에 쌀을 듬뿍 퍼주며 이 집에 손님이 좀 안오게 할 수는 없느 냐고 했다. 도승이 가르쳐 준대로 미골의 장군석을 깨고 집안이 망하게 되었고 천씨네가 떠나가자 집뒤의 피나무도 죽어갔다. 그 터에 이씨네가 들어와 오늘날까지 살고 있는데 이씨네도 이 터에 들어와 꽤나 잘 살았다. 그 큰 피나 무는 둘레가 서발가웃이나 되는 거목이었는데 30여년전에 늙어 저절로 넘어가 죽어버렸다.
ㆍ세집모테[큰터] ― 검룡소 가는 길의 서낭목이를 넘어서면 넓은 밭이 나오는데 한 가운데로 검룡소에서 나오는 물 이 흐르고 있다. 옛날 서씨네가 살다가 천씨네가 살았고 이씨네가 살던 터이다. 그래서 세집모테라고 부른다. 모테 는 모퉁이와 같은 말인데 세집모테는 가마솥처럼 움푹하게 생긴 지형으로 1∼2가구가 살기에 족한 피난처와 같은 땅이다. 세집 모테는 서·천·이씨 모자리터라고 하기도 하며 혹은 서·천·이씨 배판터라고도 한다. 셋 성씨(서· 천·이)가 씨족을 퍼뜨린 곳이라서 배판터 또는 모자리터이며 다른 이름으로 큰 터라 부르기도 한다.
ㆍ검룡소 ― 세집모테 윗쪽에 있는 한강의 발원지이다. 제당굼샘과 고목나무샘, 물골의 물구녕 석간수와 예터굼의 굴 물에서 솟는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검룡소에서 다시 솟아나와 514㎞인 한강 발원지가 되는 곳이다. 지금까지 오대 산 우통수가 한강(남한강)의 발원지라고 알고 있었는데 오대천과 창죽천의 합수지점인 정선군 북면 나전리에서 도 상실측(圖上實側)한 결과 창죽천이 오대천보다 약 32㎞나 더 길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국립지리원에서 한강의 발원은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 기슭이라는 공인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둘 레 20여m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검룡소는 석회암반을 뚫고 올라오는 지하수가 하루 5천톤 가량 용출하고 있으며 솟아나온 물이 곧바로 20여m의 폭포를 이루며 쏟아지는 광경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흐른 물줄기 때문에 깊이 1∼1.5m, 넓이 1∼2m의 암반이 푹 파여서 그리로 물이 흐르는데 흡사 용이 용트림을 하는 것 같다. 검룡소의 물은 사계절 9℃정도이며 주위의 암반에는 물이끼가 푸르게 자라고 있어 신비한 모습을 하고 있다. 검룡 소(儉龍沼)는 검룡 또는 신룡(神龍)이 살고 있다고 해서 검룡소이다. . .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는데, 옛 날 서해바다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고자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가장 먼쪽의 상류 연못을 찾아 헤메다가 이무기는 이곳에 이르러 가장 먼 상류의 연못임을 확인하고 이 연못 속에 들어가 용이 되려고 하였다.
그때 이무기가 연못으 로 들어가기 위해 몸부림 친 자국이 지금 검룡소에서 쏟아지는 폭포인 것이다. 이무기는 심심하면 인근에서 풀을 뜯다가 물 먹으러 오는 소를 잡아 먹기도 해 동네 사람들이 연못을 메워 버렸는데 1986년 준설을 하여 현재에 이 르고 있다.
ㆍ예터 ― 검룡소 위쪽에 올라가면 넓은 밭이 있는데 예터라 한다. 옛날 작은 암자가 있었다해서 예터이다. 예터에는 서도사의 전설이 있다.
ㆍ장자터(長者基) ― 창죽분교장 뒷편 산등을 올라서면 제법 펀펀한 땅이 수만평 펼쳐져 있는 곳이다. 옛날 이곳에 장자(부자)가 살던 터라 해서 장자터이다. 몇 년 전 이곳에 살던 사람이 밭 가운데의 돌무더기를 치우다가 무쇠로 된 마차 모형의 물건과 푸른빛이 나는 접시를 발견한 적이 있다.
ㆍ천장군터 ― 매봉산 북쪽 고사리밭골 윗쪽 산 중턱에 있다. 우묵하고 펀펀한 땅이 수만평 정도 펼쳐져 있는 곳으로 옛날에 화전민이 화전을 많이 일궈먹던 곳이다. 300여년 전 천씨성을 가진 힘이 장사인 사람이 이곳에서 살았다고 하여 천장군 터이다. 그러나 그는 범에게 잡혀 먹혔다고 한다. 그 일대를 개간하면 10여가구는 충분히 자급자족할 수 있는 곳이다. 맑은 샘물도 나오고 있다.
창죽의 지명 유래
옛날 '창대골'이라고 부르던 마을이다. 동네 곳곳에 푸른 산죽(山竹;조릿대)이 많이 자생하기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혹은 안창죽 검룡소 밑에 자리한 서·천·이(徐·千·李) 배판터에 살던 천씨네가 큰 피나무집 터로 옮겨와 크게 번창하며 살 때 집뒤에 대나무를 심어 대나무가 무성하기에 마을 이름을 창죽(蒼竹)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후 천씨네가 미골의 장군석을 깨어버리고 집안이 쇠망하자 창죽마을을 떠나버렸고 무성하던 대나무도 천씨네 가운처럼 죽어 갔다. 그후 이씨네가 창죽에 들어와 천씨네 터에 살게 되어 오늘날까지 창죽의 대성으로 정착하고 있다.
지금부터 70여년 전만해도 그때 그 대나무 뿌리들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창죽은 창죽골[안창죽]과 천의봉동[바깥창죽]의 2개 마을로 이루어진 법정동인데 현재는 행정동인 화전1동에 속해있다.
ㆍ열님이네 뫼깨[열느미네뫼깨] ― 창죽골어귀에서 500m 정도 들어가면 넓은 땅에 예비군 훈련장을 만들어 놓은 곳 이 있는데 이곳이 열님이네 뫼께이다. 훈련장을 만들기 전에는 훈련장 한가운데에 무덤이 하나 있었는데 그 무덤을 '열님이네 뫼' 혹은 '열느미네 뫼'라고 불렀다. 열님이네 뫼가 있는 고로 그 일대를 열님이네 뫼께라고 부르는데 열은 10을 뜻하고 '님이' 혹은 '네미' 또는 '느미'라고 부르는 말은 '딸' 또는 '여인'을 뜻하는 말이며 께는 어디깨 터께 등 으로 쓰이는 장소를 나타내는 말이다.
예전에 이 근방에서 어떤 사람이 살았는데 딸만 10명을 낳아 키우다가 후사 를 이어가지 못하고 죽어 이곳에 장사를 지냈다. 그뒤 사람들은 이 무덤을 '열느미네뫼'라고 불렀고 그 일대를 열느 미네 뫼깨라고 부르게 되었다. 훈련장 한 가운데에는 예전에 큰 늪이 있었다.
ㆍ점말둔덕 ― 안창죽으로 들어가서 열느미네 뫼깨를 지나 한참가면 큰 언덕길이 나온다. 이곳이 점말둔덕이다. 300 여년 전 숙종때 하장면 원동리에서 쇳돌[鐵石]을 운반해와 이 언덕 아래의 점터에서 녹여 무쇠[水鐵]를 만드는 수 철점(水鐵店)이 있었다. 그 당시 수철점이 번창할 때 이 언덕의 아래 위에 수철점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의 집이 수 십채 있어서 이 일대를 점말(점마을)이라 하였다. 점말 뒤에 있는 언덕이라 하여 점말둔덕이라 부르게 되었다.
ㆍ싸리덕 ― 점말둔덕에서 산 윗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산 정상 부근에 넓은 땅이 나오는데 농사 짓기에 적당하다. 예 전에 화전민들이 화전을 일궈 먹던 곳인데 싸리나무가 많아서 싸리덕이다. '덕'이란 말은 산중턱이나 산 꼭대기 쯤에 평탄한 땅을 지칭하는 말로 '덕시', '덕이' 혹은 평전(坪田)이란 말로도 불리운다.
ㆍ조자터 ― 점말둔덕을 넘어서면 오른쪽에 넓은 밭이 하나 있는데 이곳이 조자터이다. 예전에 점터에서 쇠를 녹일 때 이곳에 조(趙)씨 성을 가진 대장장이가 살고 있었다. 그는 일류 대장장이로 인근에 소문이 난 기술자였다. 화승총 도 만들고 각종 연장을 떡 주무르듯 잘 만들었다고 한다. 그가 살던 터라고 해서 조대장터라고 불렀다. 그후 조대장 터가 조자터로 변했다.
ㆍ장군화장터 ― 조자터 건너편의 산 중턱에 있다. 예전에 조자터에 살던 김장군이란 사람이 범에게 물려 죽어 이 곳 에서 화장을 하였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다.(제4편 제2절 설화조 참조)
ㆍ모바우골[모밭골, 멍우밭골] ― 안창죽으로 들어가며 오른쪽으로 맑은 물이 나오는 골짜기가 있다. 조자터와 서가 터 사이의 골짜기이다. 안창죽에서 사람이 사는 유일한 골짜기이다. 골이 깊어 예전에는 1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 금은 2가구만 살고 있다. 골짜기 안쪽에 습지가 많아 멍우라는 나물이 많이 나기에 멍우밭골이라 불렀다. 멍우밭골 이 머우밭골→머바우골→모바우골, 혹은 모밭골로 부르게 되었다. 골짜기로 계속 올라가면 대덕산 주봉으로 갈 수 있고 원동으로 통하는 고갯길이 있다.
ㆍ갈번지 ― 모바우골을 들어 가다가 오른쪽 갈번지골로 올라가면 진등 윗쪽에 넓고 펀펀한 땅이 있는데 갈번지라 한 다. 갈나무가 많은 펀펀한땅이라서 갈번지라고 한다.
. 번지는 번디에서 온 말로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룬 산상평지 (山上坪地)를 뜻하는 말이다. 이곳은 서씨네 집단묘가 있고 예전에 화전을 하던 곳이다.
ㆍ소 늪 ― 갈번지재 아래에 있다. 둘레 30여m로 물이 고여 있다. 장마때는 물에 많아지고 평소에는 물이 적다. 늪 윗쪽에 무덤이 하나 있는데 동네의 소가 풀을 뜯으러 와서 무덤을 언덕 삼아 비비면서 무덤을 파헤치면 그 집안에 소가 한 마리씩 생긴다는 말이 전해진다.
ㆍ점샘[占泉] ― 모바우골 물이 이곳으로부터 나온다. 회굼과 새구녕 사이에 있는 석회동굴인데 꽤 많은 물이 나온다. 20∼30년에 한번씩 이 동굴에서 뿌연물이 나오는데 쌀뜨물이라 한다. 아무리 추워도 얼지 않고 한 겨울에도 김이 무럭무럭 난다.
이 동굴에서 뿌연 물이 나오면 인근 마을에 풍년이 들고 붉은 물이 나오면 흉년이 들고 불길한 일 이 생긴다고 한다. 8·15광복때는 뽀얀 물이 나왔고 한국전쟁때는 붉은 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앞날을 점치 는 샘이라고 점샘이라 한다.
ㆍ두꺼비 바우 ― 옛터 옆에 있는데 흡사 두꺼비와 비슷하게 생겼다. 옛날 옛터에 부자가 살았는데 두꺼비 바위가 집 을 지켜 줘서 부자가 되었다. 윗쪽 절터에는 절이 있었는데 부자는 매일 집 앞을 지나다니는 스님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며 시주 한번 한적이 없었다.
자기 밖에 모르는 구두쇠 노랭이 였다. 하루는 스님이 못된 부자를 징계하기 위 해 두꺼비 바위 아래턱을 망치로 깨어 버렸더니 그 부자는 하루 아침에 망해 버려 어디론가 떠나갔고 윗쪽의 절도 망해 없어 졌다. 아랫턱이 떨어져 나간 두꺼비 바위만 옛터를 지키고 있다.
ㆍ장군석(將軍石) ― 안창죽 들어가서 미골의 오른쪽 산등에 높이 5m 정도되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이름하여 장군석 이라 한다.
천씨네가 미골에 묘를 쓰고 크게 번창하여 강원도 남부는 물론 경상도까지 그 소문이 자자 하였다. 자연 히 집에는 손님들이 붐볐고 오가는 길손들도 찾아들게 되었다. 그집 며느리가 손님치기에 불만을 품고 있는데, 어느 날 도승 한분이 시주하러 왔다. 며느리는 집에 손님이 많아서 손님치기가 힘들어 몸서리 나니 손님이 안오게 하는 수가 없느냐고 했다. 그러면 백미 한 말을 시주하겠다고 했다. 도승은 당신네 조상묘 옆에 큰 바위가 있을 테니 그 것을 깨어내면 손님이 오지 않을 것이라 했다.
마침내 며느리는 남편을 꼬득여 인부를 동원시켜 장군바위에 나무로 불을 지핀 다음 바위가 달았을 때 물을 끼얹어 균열이 가게 한 다음 석수쟁이로 하여금 깨어 내게했다. 얼마를 깨 어내는데 천둥번개가 치며 바위에서 붉은 피가 흘러 나왔다. 놀라서 중지하고 말았으나 그때부터 가세는 기울기 시 작했다. 지금도 깨어진 장군석이 좌청룡에 남아있다.
ㆍ덤불아우골 ― 안창죽의 동네 서낭 뒷골이다. 골짜기 어귀에 찔레나무, 다래나무, 칡 등의 덤불이 얼크러져 있기에 덤불아우골이다. 덤불은 칡덤불, 다래덤불, 찔레덤불이며 아우는 어귀의 이 지방 말이다.
ㆍ피나무밑 집터 ― 안창죽에 있다. 300여년 전 영양천씨(潁陽千氏)들이 창죽마을에 들어와 세집모테에 살다가 바로 이 피나무밑 집터로 옮겨와 정착하였다. 그 때 집 뒤에 대나무를 심어 창죽이 무성하므로 창죽이란 마을 이름이 생 겨났다고 한다.
그때 그 집터 뒤쪽에는 큰 피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 큰 피나무 때문에 그집을 '큰 피나무 밑집' 이라고 불렀다. 부자로 살았기 때문에 강원도 남부와 경상도 북부 일원까지 그 이름이 알려졌고 '피나무 밑집'이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나 너무 잘 살고 보니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 그 집 며느리는 손님치기가 너무나 힘들어 불만이 많았다. 하루는 도승이 시주를 청하기에 쌀을 듬뿍 퍼주며 이 집에 손님이 좀 안오게 할 수는 없느 냐고 했다. 도승이 가르쳐 준대로 미골의 장군석을 깨고 집안이 망하게 되었고 천씨네가 떠나가자 집뒤의 피나무도 죽어갔다. 그 터에 이씨네가 들어와 오늘날까지 살고 있는데 이씨네도 이 터에 들어와 꽤나 잘 살았다. 그 큰 피나 무는 둘레가 서발가웃이나 되는 거목이었는데 30여년전에 늙어 저절로 넘어가 죽어버렸다.
ㆍ세집모테[큰터] ― 검룡소 가는 길의 서낭목이를 넘어서면 넓은 밭이 나오는데 한 가운데로 검룡소에서 나오는 물 이 흐르고 있다. 옛날 서씨네가 살다가 천씨네가 살았고 이씨네가 살던 터이다. 그래서 세집모테라고 부른다. 모테 는 모퉁이와 같은 말인데 세집모테는 가마솥처럼 움푹하게 생긴 지형으로 1∼2가구가 살기에 족한 피난처와 같은 땅이다.
세집 모테는 서·천·이씨 모자리터라고 하기도 하며 혹은 서·천·이씨 배판터라고도 한다. 셋 성씨(서· 천·이)가 씨족을 퍼뜨린 곳이라서 배판터 또는 모자리터이며 다른 이름으로 큰 터라 부르기도 한다.
ㆍ검룡소 ― 세집모테 윗쪽에 있는 한강의 발원지이다. 제당굼샘과 고목나무샘, 물골의 물구녕 석간수와 예터굼의 굴 물에서 솟는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검룡소에서 다시 솟아나와 514㎞인 한강 발원지가 되는 곳이다.
지금까지 오대 산 우통수가 한강(남한강)의 발원지라고 알고 있었는데 오대천과 창죽천의 합수지점인 정선군 북면 나전리에서 도 상실측(圖上實側)한 결과 창죽천이 오대천보다 약 32㎞나 더 길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국립지리원에서 한강의 발원은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 기슭이라는 공인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둘 레 20여m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검룡소는 석회암반을 뚫고 올라오는 지하수가 하루 5천톤 가량 용출하고 있으며 솟아나온 물이 곧바로 20여m의 폭포를 이루며 쏟아지는 광경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흐른 물줄기 때문에 깊이 1∼1.5m, 넓이 1∼2m의 암반이 푹 파여서 그리로 물이 흐르는데 흡사 용이 용트림을 하는 것 같다. 검룡소의 물은 사계절 9℃정도이며 주위의 암반에는 물이끼가 푸르게 자라고 있어 신비한 모습을 하고 있다. 검룡 소(儉龍沼)는 검룡 또는 신룡(神龍)이 살고 있다고 해서 검룡소이다. . .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는데, 옛 날 서해바다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고자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가장 먼쪽의 상류 연못을 찾아 헤메다가 이무기는 이곳에 이르러 가장 먼 상류의 연못임을 확인하고 이 연못 속에 들어가 용이 되려고 하였다.
그때 이무기가 연못으 로 들어가기 위해 몸부림 친 자국이 지금 검룡소에서 쏟아지는 폭포인 것이다. 이무기는 심심하면 인근에서 풀을 뜯다가 물 먹으러 오는 소를 잡아 먹기도 해 동네 사람들이 연못을 메워 버렸는데 1986년 준설을 하여 현재에 이 르고 있다.
ㆍ예터 ― 검룡소 위쪽에 올라가면 넓은 밭이 있는데 예터라 한다. 옛날 작은 암자가 있었다해서 예터이다. 예터에는 서도사의 전설이 있다.
ㆍ장자터(長者基) ― 창죽분교장 뒷편 산등을 올라서면 제법 펀펀한 땅이 수만평 펼쳐져 있는 곳이다. 옛날 이곳에 장자(부자)가 살던 터라 해서 장자터이다. 몇 년 전 이곳에 살던 사람이 밭 가운데의 돌무더기를 치우다가 무쇠로 된 마차 모형의 물건과 푸른빛이 나는 접시를 발견한 적이 있다.
ㆍ천장군터 ― 매봉산 북쪽 고사리밭골 윗쪽 산 중턱에 있다. 우묵하고 펀펀한 땅이 수만평 정도 펼쳐져 있는 곳으로 옛날에 화전민이 화전을 많이 일궈먹던 곳이다. 300여년 전 천씨성을 가진 힘이 장사인 사람이 이곳에서 살았다고 하여 천장군 터이다. 그러나 그는 범에게 잡혀 먹혔다고 한다. 그 일대를 개간하면 10여가구는 충분히 자급자족할 수 있는 곳이다. 맑은 샘물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