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가운데에 물이 흘러 나오는 커다란 석회동굴이 있기에 굴어구[穴口]라 하던 마을이다. 한자로 '혈구(窟口)', '혈구(穴口)', '혈동(穴洞)' 등으로 쓰고 불렀는데 원래는 살래골[沙川谷, 士來洞]이 본 마을이었다. 굴어구, 살래골[沙來谷], 정거리(程巨里 또는 停車里), 어평(御坪 또는 於坪), 당골[塘谷], 천평(川坪)의 6개 자연촌락을 합하여 혈리(穴里)라고 하였다. 6개 자연 촌락 가운데 천평은 공군부대에서 모형 비행장을 만들어 사격장으로 사용함으로서 모든 주민이 정든 땅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ㆍ혈리굴(穴里窟) ― 혈리초등학교 뒤쪽 산밑에 있다. 입구가 높이 약 3m, 넓이 약 4m되는 거대한 석회동굴로 혈리 마을의 이름이 생기게 한 동굴이다. 정확한 길이를 알 수 없으나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이는 약 1,000m 정도 된다. 동굴 안쪽에는 기기묘묘한 종유석과 호수와 폭포, 광장 등이 있고 가장 안쪽에는 아직도 동굴이 생성되고 있 으며 진흙뻘이 있다. 일제 때 혈리에서 사금(沙金)을 채취하던 사람이 동굴 속에다 황금을 감추어 두었다는 이야기 가 전해지나 아직 찾지를 못하고 있다. 굴 안쪽 진흙뻘 속에 사금이 많이 묻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어평재에서 내려오는 하천물이 지하동굴로 스며들어 이곳 혈리굴로 나오는데 어평재 부근에는 옛날부터 사금을 많이 캐던 곳이 니까 그렇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혈리굴 안쪽에는 지하세계가 있다고 한다. 봄철에는 굴속에서 흘러나오는 물 위에 복사꽃잎 이 떠내려오고 가을이면 배추나 무잎이 떠내려온다고 한다. 사람들은 굴 속에 이상향(理想鄕)이 있다고 한다. 현재 동굴에서 나오는 물은 상수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혈리굴을 또 다른 이름으로 암굴이라 하는데 굴 속에서 물이 나 오기에 붙은 이름이다. 암굴 건너편에 숫굴이 있었는데 그 굴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는다. 숫굴은 도로 개설로 길 밑 에 묻혔다.
ㆍ거북바우 ― 재피골 어귀에 있다. 거북이 형상을 한 바위라서 붙은 이름이다. 이 바위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 다.(제4편 제2절 설화조 참조) 쉰패랭이굴 ― 백단사로 가는 당골을 지나 숫돌적시 아래의 개천 가에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다. 옛날 그곳에 금을 캐던 굴이 있었는데 막장에서 황소만큼 큰 금 노다지가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몰려 들어가 아비규환 속에 금을 캤다. 그때 어린아이 하나가 굴 속에 심부름하러 들어 갔다가 주먹만한 금덩이 하나를 들고 나왔는데 아 이가 나오자 그만 굴은 무너지고 말았다. 지반이 약한 산이 무너져 굴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는데 안쪽에 갇 힌 사람을 구할 길 없었고 몇 명이나 갇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굴 속에 들어갈 때 벗어놓은 패랭이를 세어보 니 오십개나 되었다. 죽은 사람의 패랭이가 쉰 개나 되었다고 해서 쉰패랭이굴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지금도 땅밑 수백m 속에는 50여명의 광부들이 황금을 찾아 들어갔다가 고혼이 되어 울고 있을 것이다.
ㆍ화방재[花房嶺] ― 혈리에서 어평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로 31번 국도가 지나고 있다. 흔히 어평재라고 부르는 이 고개는 해발 936m의 높이이다. 고개마루 부근에 진달래, 철쭉이 무성하기에 화방재[花房峙]라 하였다. 화방재를 정거리재라고도 한다.
ㆍ샛길재 ― 혈리에서 천평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로 해발 1,130m이다. 흔히 새길령으로 부르며 한자로는 '신로치(新 路峙)', '조도령(鳥道嶺)', 사길령('士吉嶺)', 사길치('四吉峙)', '서길령(瑞吉嶺)'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고개길은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통하는 큰 길로서 과거 교통의 요로였다. 신라 때에는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가자면 태백산 정 상으로 이어지는 산마루로 나있는 길로 다녔다.
. 그 길이 불편하여 고려때 새로이 길을 뚫었는데 지금의 새길재이다. 소도 당골 어귀에 원(院)을 설치하고 새길재를 넘어 온 사람들이 쉬어가게 하였다. 옛길[태백산 산등의 길]대신 새 로이 길을 뚫었기에 새길이라 하였고 그 고개를 새길재라 하였던 것이다. 한자로 '조도령(鳥道嶺)'이라 한 것도 새 (鳥) 길(道)을 뜻하는 것이고 '신로치'는 말할 것도 없이 새길이며 '사길(士吉)', '사길(四吉)', '서길(瑞吉)'도 모두 새로운 길인 새길을 소리나는대로 표기한 것일 뿐이다.
ㆍ살래골 ― 혈리의 굴어귀 마을에서 오른쪽으로 갈라져 들어간 깊은 골짜기 전체를 말하며 20∼30가구가 흩어져 살 고 있다. 살래골[寺內谷, 沙川洞, 士來洞, 薩川谷] 등으로 불리고 쓰여지는 이 골짜기는 혈리마을에서 가장 깊은 골 짜기이다. 석회암 지대라서 곳곳에 건천이 있으며 골짜기 안쪽은 함백산이 된다. 옛날 골짜기 안쪽 사태골[沙汰谷]에서 장마때 큰 사태(沙汰)가 나서 골짜기 전체를 휩쓸어 버린 적이 있다. 그래서 사태골이라 하다가 사태골, 사천동, 살래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살래골 사람들이 자식 교육열이 높아 멀리서 선비를 모셔다가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쳤기에 사래동(士來 洞)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살래[살내]는 활천(活川)으로 사람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승 지와 같은 골짜기라는 것이다. 살천이라고도 표기한 문헌이 있는데 '살'은 신성한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 다.
ㆍ가장골 ― 살래골 안쪽 솔밭굼을 지나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서 오른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옛날 골짜기 안에 범에 물려가 죽은 사람이 있어서 그 곳에 다가 화장을 하였다. 화장골이 변해 가장골이 되었다. 일설에는 어린아이 의 무덤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ㆍ사태골[沙汰谷] ― 살래골로 들어가 가장골 다음에 있는 깊은 골짜기이다. 골짜기 앞에 십여호의 농가가 있고 골짜 기 어귀에 큰 바위가 있다. 옛날 골짜기 안에서 사태가 나서 돌과 나무와 흙과 자갈, 모래 등이 쏟아져 나와 살래골 하상(河床)을 높여 놓은 적이 있다. 사태가 난 골짜기라서 사태골이라 하는데 살래골의 명칭이 이곳에서 유래됐다 는 이야기가 있다.
ㆍ솟대배기 ― 사태골 건너편에 있는 볼록한 산봉우리이다. 산이 불끈 솟아 있다고 솟대배기라한다고 하는데 고노(古 老)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소태백(小太白)'이라 한다고 한다. 이 산봉우리에 올라서서 태백산을 바라보며 망제를 올 린 곳이라고 하는 데, 나무로 시렁처럼 만들어 제물을 그 위에 놓고 망제를 지냈으며 높은 장대를 세웠다고 한다.
ㆍ수댕이골[수뢰이골] ― 서낭당에서 살내골 오른쪽으로 갈라진 깊고 큰 골짜기로 골짜기 끝이 함백산이 된다. 70여 년 전 함경도 사람들이 정감록을 믿고 이곳을 찾아 와 살았다.《정감록》의 양백지간(兩白之間)이 이곳이라 믿고 살다가 해방되자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 사람들은 머리를 길러 땋고 상투를 치고 살았기에 살래골 사람들은 그들을 수댕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살던 골짜기라고 수댕이골이라 하였다.
ㆍ망낭골[망녕골] ― 수댕이골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나 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옛날 범이 수댕이골 어귀에 있는 농가 의 딸을 물고 이 골짜기 안에서 잡아 먹었다. 망낭딸(막내딸)을 잡아먹은 골짜기라고 망낭골이라 한다.
ㆍ늦은목이 ― 수댕이 꼭대기에 있다. 태백시에서 정선군고한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해발 1,341m의 높은 고개이다. 함백산 남쪽의 낮은 산등으로 사람들이 넘어 다니는 고개라 해서 늦은목이라 부른다. 한자으로 표기하여 만항재 [晩項嶺]라 하는데 부근에 탄광이 많이 있었다.
ㆍ혈지른등 ― 수댕이골의 제당굼을 지나 올라가면 함백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열십자형으로 생긴곳이 있다. 산등의 윗쪽은 함백산으로 이어져 있고 오른쪽 산줄기는 백운산으로 뻗어있고 가운데 산줄기는 장산으로 뻗어있고 왼쪽 산줄 기는 태백산으로 뻗어 있는 곳이다.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 산천의 정기를 끊으려고 이곳 십자형의 산줄기에 혈을 질 렀다는 것이다. 산줄기 네곳에다 큰 구덩이를 파고 무쇠와 사기를 녹여 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을혈지른등이라한다.
태백시의 지명 유래 - 혈리
마을 가운데에 물이 흘러 나오는 커다란 석회동굴이 있기에 굴어구[穴口]라 하던 마을이다. 한자로 '혈구(窟口)', '혈구(穴口)', '혈동(穴洞)' 등으로 쓰고 불렀는데 원래는 살래골[沙川谷, 士來洞]이 본 마을이었다. 굴어구, 살래골[沙來谷], 정거리(程巨里 또는 停車里), 어평(御坪 또는 於坪), 당골[塘谷], 천평(川坪)의 6개 자연촌락을 합하여 혈리(穴里)라고 하였다.
6개 자연 촌락 가운데 천평은 공군부대에서 모형 비행장을 만들어 사격장으로 사용함으로서 모든 주민이 정든 땅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ㆍ혈리굴(穴里窟) ― 혈리초등학교 뒤쪽 산밑에 있다. 입구가 높이 약 3m, 넓이 약 4m되는 거대한 석회동굴로 혈리 마을의 이름이 생기게 한 동굴이다. 정확한 길이를 알 수 없으나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이는 약 1,000m 정도 된다. 동굴 안쪽에는 기기묘묘한 종유석과 호수와 폭포, 광장 등이 있고 가장 안쪽에는 아직도 동굴이 생성되고 있 으며 진흙뻘이 있다. 일제 때 혈리에서 사금(沙金)을 채취하던 사람이 동굴 속에다 황금을 감추어 두었다는 이야기 가 전해지나 아직 찾지를 못하고 있다. 굴 안쪽 진흙뻘 속에 사금이 많이 묻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어평재에서 내려오는 하천물이 지하동굴로 스며들어 이곳 혈리굴로 나오는데 어평재 부근에는 옛날부터 사금을 많이 캐던 곳이 니까 그렇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혈리굴 안쪽에는 지하세계가 있다고 한다. 봄철에는 굴속에서 흘러나오는 물 위에 복사꽃잎 이 떠내려오고 가을이면 배추나 무잎이 떠내려온다고 한다. 사람들은 굴 속에 이상향(理想鄕)이 있다고 한다. 현재 동굴에서 나오는 물은 상수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혈리굴을 또 다른 이름으로 암굴이라 하는데 굴 속에서 물이 나 오기에 붙은 이름이다. 암굴 건너편에 숫굴이 있었는데 그 굴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는다. 숫굴은 도로 개설로 길 밑 에 묻혔다.
ㆍ거북바우 ― 재피골 어귀에 있다. 거북이 형상을 한 바위라서 붙은 이름이다. 이 바위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 다.(제4편 제2절 설화조 참조) 쉰패랭이굴 ― 백단사로 가는 당골을 지나 숫돌적시 아래의 개천 가에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다. 옛날 그곳에 금을 캐던 굴이 있었는데 막장에서 황소만큼 큰 금 노다지가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몰려 들어가 아비규환 속에 금을 캤다. 그때 어린아이 하나가 굴 속에 심부름하러 들어 갔다가 주먹만한 금덩이 하나를 들고 나왔는데 아 이가 나오자 그만 굴은 무너지고 말았다. 지반이 약한 산이 무너져 굴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는데 안쪽에 갇 힌 사람을 구할 길 없었고 몇 명이나 갇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굴 속에 들어갈 때 벗어놓은 패랭이를 세어보 니 오십개나 되었다. 죽은 사람의 패랭이가 쉰 개나 되었다고 해서 쉰패랭이굴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지금도 땅밑 수백m 속에는 50여명의 광부들이 황금을 찾아 들어갔다가 고혼이 되어 울고 있을 것이다.
ㆍ화방재[花房嶺] ― 혈리에서 어평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로 31번 국도가 지나고 있다. 흔히 어평재라고 부르는 이 고개는 해발 936m의 높이이다. 고개마루 부근에 진달래, 철쭉이 무성하기에 화방재[花房峙]라 하였다. 화방재를 정거리재라고도 한다.
ㆍ샛길재 ― 혈리에서 천평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로 해발 1,130m이다. 흔히 새길령으로 부르며 한자로는 '신로치(新 路峙)', '조도령(鳥道嶺)', 사길령('士吉嶺)', 사길치('四吉峙)', '서길령(瑞吉嶺)'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고개길은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통하는 큰 길로서 과거 교통의 요로였다. 신라 때에는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가자면 태백산 정 상으로 이어지는 산마루로 나있는 길로 다녔다.
. 그 길이 불편하여 고려때 새로이 길을 뚫었는데 지금의 새길재이다. 소도 당골 어귀에 원(院)을 설치하고 새길재를 넘어 온 사람들이 쉬어가게 하였다. 옛길[태백산 산등의 길]대신 새 로이 길을 뚫었기에 새길이라 하였고 그 고개를 새길재라 하였던 것이다. 한자로 '조도령(鳥道嶺)'이라 한 것도 새 (鳥) 길(道)을 뜻하는 것이고 '신로치'는 말할 것도 없이 새길이며 '사길(士吉)', '사길(四吉)', '서길(瑞吉)'도 모두 새로운 길인 새길을 소리나는대로 표기한 것일 뿐이다.
ㆍ살래골 ― 혈리의 굴어귀 마을에서 오른쪽으로 갈라져 들어간 깊은 골짜기 전체를 말하며 20∼30가구가 흩어져 살 고 있다. 살래골[寺內谷, 沙川洞, 士來洞, 薩川谷] 등으로 불리고 쓰여지는 이 골짜기는 혈리마을에서 가장 깊은 골 짜기이다. 석회암 지대라서 곳곳에 건천이 있으며 골짜기 안쪽은 함백산이 된다. 옛날 골짜기 안쪽 사태골[沙汰谷]에서 장마때 큰 사태(沙汰)가 나서 골짜기 전체를 휩쓸어 버린 적이 있다. 그래서 사태골이라 하다가 사태골, 사천동, 살래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살래골 사람들이 자식 교육열이 높아 멀리서 선비를 모셔다가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쳤기에 사래동(士來 洞)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살래[살내]는 활천(活川)으로 사람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승 지와 같은 골짜기라는 것이다. 살천이라고도 표기한 문헌이 있는데 '살'은 신성한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 다.
ㆍ가장골 ― 살래골 안쪽 솔밭굼을 지나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서 오른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옛날 골짜기 안에 범에 물려가 죽은 사람이 있어서 그 곳에 다가 화장을 하였다. 화장골이 변해 가장골이 되었다. 일설에는 어린아이 의 무덤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ㆍ사태골[沙汰谷] ― 살래골로 들어가 가장골 다음에 있는 깊은 골짜기이다. 골짜기 앞에 십여호의 농가가 있고 골짜 기 어귀에 큰 바위가 있다. 옛날 골짜기 안에서 사태가 나서 돌과 나무와 흙과 자갈, 모래 등이 쏟아져 나와 살래골 하상(河床)을 높여 놓은 적이 있다. 사태가 난 골짜기라서 사태골이라 하는데 살래골의 명칭이 이곳에서 유래됐다 는 이야기가 있다.
ㆍ솟대배기 ― 사태골 건너편에 있는 볼록한 산봉우리이다. 산이 불끈 솟아 있다고 솟대배기라한다고 하는데 고노(古 老)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소태백(小太白)'이라 한다고 한다. 이 산봉우리에 올라서서 태백산을 바라보며 망제를 올 린 곳이라고 하는 데, 나무로 시렁처럼 만들어 제물을 그 위에 놓고 망제를 지냈으며 높은 장대를 세웠다고 한다.
ㆍ수댕이골[수뢰이골] ― 서낭당에서 살내골 오른쪽으로 갈라진 깊고 큰 골짜기로 골짜기 끝이 함백산이 된다. 70여 년 전 함경도 사람들이 정감록을 믿고 이곳을 찾아 와 살았다.《정감록》의 양백지간(兩白之間)이 이곳이라 믿고 살다가 해방되자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 사람들은 머리를 길러 땋고 상투를 치고 살았기에 살래골 사람들은 그들을 수댕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살던 골짜기라고 수댕이골이라 하였다.
ㆍ망낭골[망녕골] ― 수댕이골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나 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옛날 범이 수댕이골 어귀에 있는 농가 의 딸을 물고 이 골짜기 안에서 잡아 먹었다. 망낭딸(막내딸)을 잡아먹은 골짜기라고 망낭골이라 한다.
ㆍ늦은목이 ― 수댕이 꼭대기에 있다. 태백시에서 정선군 고한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해발 1,341m의 높은 고개이다. 함백산 남쪽의 낮은 산등으로 사람들이 넘어 다니는 고개라 해서 늦은목이라 부른다. 한자으로 표기하여 만항재 [晩項嶺]라 하는데 부근에 탄광이 많이 있었다.
ㆍ혈지른등 ― 수댕이골의 제당굼을 지나 올라가면 함백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열십자형으로 생긴곳이 있다. 산등의 윗쪽은 함백산으로 이어져 있고 오른쪽 산줄기는 백운산으로 뻗어있고 가운데 산줄기는 장산으로 뻗어있고 왼쪽 산줄 기는 태백산으로 뻗어 있는 곳이다.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 산천의 정기를 끊으려고 이곳 십자형의 산줄기에 혈을 질 렀다는 것이다. 산줄기 네곳에다 큰 구덩이를 파고 무쇠와 사기를 녹여 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을혈지른등이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