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시의 지명 유래, 소도

hanolduol2006.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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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을 소도라고 하는 것은 태백산 꼭대기에 천제단이 있고 그 천제단이 있는 산 아래의 땅으로 신성불가침의 지역이란 뜻이다. 제정일치 시대인 삼한에서는 매년 두 차례 5월과 10월에 각 읍별로 제주(祭主)인 천군(天君)을 선발하여 일 정한 장소에서 하늘에 제사하며 질병과 재앙이 없기를 빌었다.

이 제사하는 장소를 소도(所道)라 하는데 태백시 의 소도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蘇塗'와 '所道'가 글자가 틀리다고 할지 모르나 '소도(蘇塗)'를 '휴도(休屠)'라고 쓴 기록도 있으니 글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리가 중요하다.

이 마을을 성촌(筬村) 또는 '바디'라고 부른 적이 있는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가 전주에서 이곳으로 피난와 살면서 바디[베틀의 부속 품]를 만들어 팔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 '바디'가 한자표기를 위해 '바'는 바 '所'로 '디'는 비슷한 소리가 나는 '도(道)'로 표기하니 '소도(所道)'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동(鄭洞)이라고도 불렀으니 옛날 당골 안쪽 정가터에 정씨 26가구가 집단으로 이주해 와서 살았기에 붙은 이름이다. 음지(陰地), 양지(陽地), 소로(小魯), 초전(草田), 장거(長渠), 상평(上坪), 당골[堂谷] 등 7개 자연 촌락을 합하여 형성된 마을로 시 개청 후 혈리를 합쳐 행정동인 소도동(所道洞)으로 부르고 있다. 당골에 있는 용담(龍潭)은 깊이를 알 수 없고 둘레 50여m로 전설이 깃든 유서 깊은 연못이다. 당골 어귀에 있는 잣밭에는 170여년 전 남석로(南錫老)라는 사람이 태백산록에서 잣나무 100여 그루를 옮겨다 심어 동네 어귀의 방풍(防風)과 유실수로서 이익을 취하게 하였다. 잣밭 아래에 고려때 원터[院址]가 있었다.

 

버들치[버들밭] ― 함태초등학교 아래의 넓은 지역을 버들치라 한다. 옛날 이곳에는 늪지대로 버드나무가 많아서 버들밭이라고 하였다. 그때 버들밭을 지나 문곡으로 통하는 큰 길이 있었으며, 그 큰 길은 버들치재를 넘어가게 되 어 있었다. 그 고개를 버들밭 위에 있다고 해서 버들치[柳峙]라 부르게 되었고 버들치 아래에 있는 버들밭도 아울러 버들치 라고 부르게 되었다.

 

ㆍ잣밭 ― 소도당골 어귀의 왼쪽 산비탈에 있다. 약 170년 전 남석노라는 사람이 태백산에서 잣나무 묘목을 캐다가 100여 본을 심었는데 그 것이 커서 아름드리 잣나무로 자랐다. 처음엔 당골 어귀가 좀 허하다고 하여 방풍을 위해 심을 생각이었는데 기왕이면 유실수로 방풍림을 하자는 생각에서 였다. 나중에 잣나무에서 많은 잣을 수확하여 일 거양득의 효과를 거두었다. 잣나무를 많이 심은 곳이라 하여 잣밭이라 한다. 나무가 많은 태백지역에 170여년 전 이미 이처럼 대량의 식목사업을 벌인 것은 후세에 귀감이 된다고 하겠다.

 

ㆍ원터 ― 소도동사무소 앞쪽 동구서낭 아래에 있었으나 지금은 함태탄광의 폐석더미 속에 묻혀 버렸다. 높이 약 2m, 폭 약 1.5m, 한쪽의 길이가 약 30m 정도되는 장방형돌담이 2개 있었다. 고려때 행려원(行旅院) 터로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오고가는 길손과 관리들이 머물다 가는 휴식처 기능을 하던 곳이었다. 원에는 원주(院主)와 원원(院員)이 있어 이를 관리하였고 부근에 원전(院田)을 두어 원을 운영하게 하였다. 처음 신라때는 태백산 산정으로 통하는 길이 있어서 경상도로 왕래하였으나 너무 힘이 들어 고려때는 혈리에서 천평으로 통하는 새길재[新路嶺]를 새로이 개척하고 소도에 행려원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는 원의 기능이 많이 쇠퇴하여 민영화 되다시피 하였다. 이곳 고로(古老)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원에는 방이 여러 개 있었고 부엌에는 쌀과 반찬, 짚신 등이 준비되어 있는데 길손이 필요한 만큼 쓰고는 방 안에 비치되어 있는 엽전 꼬지에 돈을 꽂아 놓으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밥을 해서 먹었으면 밥값을, 짚신을 가져가면 짚신값을 양심적으로 엽전 꼬지에 꽂아 놓으면 된다는 것이다. 엽전 꼬지는 뾰족한 나무꼬 쟁이로 되어 있고 잠자는 것은 돈을 내지 않는다고 한다.

 

ㆍ용담 ― 소도 당골 청원사 경내에 있는 연못으로 하루 수천톤의 물이 솟아 나오는 곳이다. 용늪이라고도 부르는 이 연못은 인룡(人龍)이 된 어머니의 전설이 있다. 옛날《척주지》에 보면 소도지(所道池)라고 표기되어 있고,《진주 지》에는 활래지(活來池)라고 표기되어 있다. 연못 속에서 말편자가 4개 나왔는데 지금은 석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장승둔지 ― 용담 윗쪽 약 400m 지점의 솔밭 일대를 이르는 말이다. 그 곳에는 두 개의 돌장승이 서 있었는데 태 백산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하였다. 태백산 정상에는 천왕당이 있어 신라 때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그 천왕 당으로 가는 태백산 어귀에 장승을 세워 여기서 부터는 신성한 지역 임을 알리게 하였다. 장승이 서 있는 언덕이라 고 장승둔지라 하였는데 또 다른 이름으로는 미루둔지라고 하였다. 미루는 미륵이라는 말인데 장승을 미륵이라고도 부른다.

 

ㆍ용소(龍沼) ― 소도 당골 만덕사 아랫쪽에 당골에서 흘러오는 개울물이 땅속으로 스며드는 곳이 있다. 지름이 약 1.5m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수직굴이 있는 데, 당골계곡에서 흘러오는 개울물이 이 곳으로 흘러 들어가고 여기에 서 용담까지는 건천(乾川)이 되어 있다. 옛날 비가 오지 않아 몹시 가물때는 용소로 흘러가는 물길을 막아 건천으 로 돌려서 용소로 물이 빠지지 못하게 한 다음 개를 잡아 용소 옆의 바위에 피를 칠하고 제사를 드리면 금방 비가 온다고 한다. 이 곳 용소에서 용담까지는 지하 수로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에 인룡(人龍)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석회암지대로 지하에 석회동굴이 형성되어 당골계곡의 물이 이 석회동굴로 통하여 용담으로 솟아나오는 것인데 동굴 속에 있던 인룡이 물이 들어오지 않으니 비를 오게 하고 용소 어귀의 바위턱에 칠해 놓은 개피를 씻기 위해 비를 내리게 한다고 한다. 기우제를 지내고 용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용소라 한다.

 

ㆍ물바우골 ― 용소에서 좀 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만덕사라는 절이 나오고 그 절 윗쪽에 오른쪽으로 갈라진 골짜 기가 있는데 물바우골이라 한다. 골짜기 안쪽에 물이 솟아 나오는 물바우라는 바위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20여년 전 만해도 두 집이 살았으나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고 토굴이 하나 있으며 골짜기 여러곳에 미개발된 석회동굴이 산재해 있다. 산제

 

ㆍ당골 ― 당골광장에서 왼쪽으로 뻗어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 안쪽에 산제당(山祭堂)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산제당은 약 40년 전 화전정리 사업으로 혈려버렸고 지금은 돌담과 축대만 남아있다. 그러나 아름들이 당산림이 남 아 있고 해마다 태백제 때는 이 곳 터에서 산신제를 올리고 있다. 옛날에는 음력 8월 13일 소 한 마리를 잡아서 제사를 하였다. 흔히 지당골이라 하는 데, 그것은 제당골을 잘못 부르는 말이며 제당골은 곧 산제당골이다.

 

ㆍ넓적바우 ― 당골계곡을 계속 올라가면 문수봉골과 갈라지는 지점에 세평 정도 크기의 넓고 큰 바위가 있는데 넓적 바위라 한다. 넓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태백산을 등산하는 사람들이 꼭 쉬어가는 바위로 수십명이 앉을 수 있 다. 일명 신선바우라고 하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옛날 태백산에 사는 신선들이 장기를 두던 바위라 한다. 바위 아래에는 당골 최대의 폭포가 흐르고 있다.

 

ㆍ장군바우 ― 넓적바우를 지나서 500m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 개울 가에 높이 50여m의 거대한 기암절벽이 솟아 있는데 그 모양이 흡사 장군이 칼을 짚고 서 있는 것 같다. 40여년 전 바위밑에 천지암(天地庵)이란 절이 있었으나 화전정리 때 철거 되었다. 지금도 치성꾼들의 발길이 끊 이지 않는 장군바위는 태백산을 지키는 파수꾼 처럼 서 있다. 옛날 태백산은 하늘로 통하는 성스런 산으로 하늘나라에서 파견된 장군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태백산 주위를 지 키고 있었다. 장군의 임무는 신성한 태백산으로 부정한 사람이나 악한 귀신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어 느때 장군이 연화산 옥녀봉의 옥녀에게 반하여 임무를 게을리 한는 틈을 타서 못된 잡귀가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하늘신인 백두천황(白頭天皇)은 대노하여 급히 돌아오던 장군과 병졸들을 뇌성벽력을 쳐서 돌로 만들어 버렸다. 그 리고 성역으로 들어온 잡귀는 벼락을 쳐서 백산의 신령굴에 가두어 버렸으며 신령산의 신령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 였다는 전설이 있다.

 

ㆍ반재[반쟁이] ― 소도당골에서 태백산 정상까지 가는데 절반 가량되는 지점에 있는 낮은 산등이다. 혈리에서 태백 산으로 가는 길로도 절반 가량되는 지점인데 소도와 혈리의 경계지점이다. 반재까지 가면 태백산까지 절반 가량 갔 다고 생각하면 된다. 원래 반재는 '반등이' 혹은 '반뎅이', '반쟁이', '반정'이라 하였는데 '반'은 절반의 반이며 '등이'는 태백산으로 가는 산등의 등이며 '뎅이'와 '쟁이', '정'은 정(亭)으로 '쉬어가는 곳'의 의미가 있다. '반재'의 '재'는 고개 를 의미하는데 당골 계곡으로 길이 난 이후 훨씬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는 반재는 고개가 아니라 물바우 골 산등으로 올라오는 산허리에 지나지 않았다

 

ㆍ천제단 ― 태백산 영봉 꼭대기에 있다. 높이 3m, 둘레 27.5m, 폭 8.26m의 타원형으로 된 천제단은 녹니편마암 의 자연석으로 쌓여져 있다.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에 있던 부족국가인 구령국(九靈國)과 소라국(召羅國)에서 천 제를 지내던 곳이라고 하며 신라에선 일성왕이 처음 천제를 지냈다. 그후 기림왕이 망제를 지냈고, 고려와 조선시대 를 거치는 동안 방백수령과 백성들이 천제를 지냈으며 한말에는 의병장 신돌석 장군이 백마를 잡아 천제를 지냈고 일제때는 독립군들이 천제를 지냈다. 태백산에는 세 개의 천제단이 있는데 그 첫째는 수두머리의 천제단이요, 둘째는 장군단, 셋째는 영봉 아래의 있는 제단터에 있는 구을단이다.

 

ㆍ천령 ― 옛날 신라시대부터 태백산 꼭대기로 길이 있었으니 그것을 천령(天嶺)이라 하였다. 두머리를 거쳐 부쇠봉 을 지나 산등을 타고 각화산으로 내려가는 길을 천령이라 하니 하늘. 고개라는 뜻이다. 천제단이 있는 산봉우리를 거쳐 하늘에 닿을 듯 높은 고개라고 천령인 것이다. 고려이후 신로령[새길재]이 생기면서 사람들의 왕래가 적어졌다.

 

ㆍ용정 ― 망경사(望鏡寺) 옆에 있는 우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 샘이다. 물이 솟아 나오는 지점은 1,470미터 정도의 고지대로 우리나라 100대 명수 중에서 가장 차고 물맛이 좋고 가장 높은 곳에서 솟은 샘이다. 샘에다 용왕각을 짓고 용신에 제사를 올리기에 용정이라 한다. 일설에는 이 샘물이 용왕국과 통하여 있다고 한다. 옛날부터 이 샘물을 천제지낼 때 제수(祭水)로 사용하였다.

 

ㆍ소로골[少魯谷 또는 小櫓谷] ― 함백산 동남쪽에 있는 넓고 큰 골짜기이다. 골짜기 안쪽에 동해탄광과 동해초등학 교가 있었고 옛날 심원사(深源寺)이라는 절이 있었다. 소로라는 말의 어원은 확실히 알길이 없으나 소도골이 변하 여 소로가 되지 않았나 생각되며, 또 한 가지는 소로골 안쪽에 심원사라는 오래된 절이 있었는 데, 그 절의 구조가 소로수장(小櫓修粧) 집으로 되어 있어서 소로장(小櫓粧) 절골이었던 것이 소로(小櫓 또는 小魯)골로 부르게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ㆍ부도골 ― 소로골 안쪽 심원사가 있던 골짜기이다. 골짜기 중간지점에 심원사의 부도(浮屠)가 있었기에 부도골이라 한다. 그 부도의 좌대는 아직도 현장에 남아 있고 부도의 윗부분인 석종(石鐘)은 소로골 어귀의 암자에 가져다 놓 았다. 장걸(長渠) ― 소로골 어귀에서 혈리까지의 개천을 장걸 또는 장거리라고 한다. 그곳의 개울이 곧고 길게 굴어귀까 지 이어져 있기에 진거랑[長渠]이라는 뜻의 장거라고 하다가 그 말이 장결로 나중에는 장거리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