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의 세월...

풀내음2003.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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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의 세월...

살아가는게 선택의 연속이라고 오류님이 그랬던가?

내 인생을 돌이켜 보니 집착의 연속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초등학교 5학년 여름에 입시 제도가 바뀐다는 바람에 서울로 유학을 온 것이 서울 살이의 시작이였지요.

 

처음 서울살이에 아는 친구가 없으니 당연히 집안에만 박혀 있는 아이가 되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읽을 거리를 찾게 되었는데... 책을 살곳을 몰라서 문방구를 찾아갔던 기억이 새삼스럽습니다.

당시에 문방구에선 동화책은 없었고 잡지책을 팔고 있었지요.

소년세계, 새소년, 6학년 때 나온 소년중앙....

읽을 거리가 없던 사투리 쓰는 촌놈은 그 월간지를 사서 광고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읽었었답니다.

간혹 이웃에 갔다가 표지가 다 떨어진 소설이라도 볼라치면 끝까지 무조건 읽어갔었고요..

그중엔 오 헨리도 있었고, 써머셋 모옴도 있었지요...

그짓이 중학교 졸업까지 이어졌었는데 중3 때 만난 짝궁놈이 똑같이 광고까지 보던 놈이라 지금까지도 가장 친한 친구로 남아있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떼에는 도에서 주최하는 미술대회에 나간 것이 아마도 큰상을 탔었나 봅니다.

당시에 보기 힘들었던 2층짜리 크레파스가 부상으로 나왔다는데 전학을 오는 바람에 받아보지는 못했고 담임선생님이 학급 미화용으로 사용했다는 말을 들었었지요.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중학교 들어가자 마자 미술반에 들어간 것이 지금까지의 미술생활을 하게 만든 근본이 되었답니다.

당시에 미술표현에 푹 빠져 들어서 사물만 보면 어떻게 표현할까를 생각하면서 다녔으니 어지간히 빠졌었나 봅니다.

당시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같은 미술실을 사용하였는데 고등학생들이 오히려 숨어서 그림을 그릴 정도였으니까요^^

 

예고를 가고 싶었으나 아버님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서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을 한 후에 문학에 빠져 들었었지요..

당시에 수첩을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메모를 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모두 글쓰는 소재감이였었지요..

대학노트 다섯권 정도의 시와 007가방에 가득차는 원고지를 소설을 쓰는데 허비한 걸로 기억이 됩니다.

참 일학년 때는 생물반에 푹 빠져서 현미경을 보며 그림을 그리기도 했었지요.

그러던 중 고3 초에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다시 미술에로의 길을 걷기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물론 미술학원엔 다녀본 기억이 없고 아주 추운 겨울에 선배화실을 청소하며 두달간 화실 생활을 한게 전부였지요...

 

대학 때는 오로지 그림밖에 알지 못했었답니다.

교수님과 수위아저씨가 전기세 나간다는 이유로 쫓아내실 때까지 그림을 그렸었고 복학 후에는 아예 실기실에서 잠을 자면서 그림을 그렸었지요..

아마 그 때문에 연애는 하지 못한 걸로 기억됩니다.-.-

친구놈들 연애하면서 양념으로 불려다니며 소주잔은 꽤 축내봤지만....^^

덕분에 경험도 없이 양쪽편의 상담은 많이 해줘봤답니다.

 

졸업 후에 모 대기업에 입사를 하여(교사자리가 궁해서...) 디자인을 하게 되었지요..

당연히 디자인의 세계에 푹 빠져들어서 제품 디자인을 공부했고요...

결국은 엄청난 시장조사를 통해서 전국 판매일위를 여러개 만들어 내었었지요^^

두번째는 공기업에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상업디자인을 하게 되었답니다.

물론 또 공부했었지요...

 

그 와중에 어떤 여인이 절 좋아한다고 선배에게 고백까지 하고 회사로 찾아왔다는데도 전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 참 멍청이였지요...

나중에야 그 선배가 전화를 해서 누구가 널 찾아 간다고 했다고 이야길 했는데 보내고 난 다음이였답니다.

그 두곳의 회사에 근무하던 시절에 빠져 든 것이 낚시였답니다.

그림그릴 시간이 없어서 항상 쫓기면서 없는 시간을 쪼개서 밤샘을 하고 나면 회사에선 졸아야 했고 당시의 회사 내에선 조는 게 용납되질 않는 상황이라 구내 다방에 가서 자야하는 고통스러운 나날이였지요.

당시에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눈앞에 찌가 아른거리고 그러면 영락없이 낚시터를 찾아야 했답니다.

그래도 일년에 열 몇 곳의 전시회에 초대되기도 하고 출품도 했으니 내 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였나 생각됩니다.

 

그림 그릴 시간이 부족하여 엄청난 공력을 들여서 간곳이 학교였지요..

햇볕을 받으며 퇴근하는 그 즐거움이란....

내 생의 가장 많은 작품도 그곳에서 했는데 문제는 결혼과 더불어 모두 사라진 것이였답니다.

무엇이든지 한번 잡으면 놓질 못하는 성미라 결혼식 전날 함받는 토요일 날에도 오후 5시까지 학교에 남아서 환경미화를 했고요...

그 열성이 인정을 받아서 잡지에도 제법 많은 글을 올렸었지요...

 

문제는 결혼을 한 후에 발생을 했답니다.

결혼 첫달에 200만원의 펑크로 시작된 생활이 단 한달도 흑자를 본 적이 없는데다가....

친구와의 의리라면 자다가도 뛰어나가던 제가 사업하는 친구에게 백지수표를 덜컥 끊어주는 사고를 치고 말았지요..

이부분이 나중에 엄청나게 얽히고 설켰지만 결국 당시 집값보다 더 많은 돈이 봉급으로 차압이 들어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결국은 그 상황에서 그림을 그릴 수 없어서 붓을 꺾고 말았답니다.

이리저리 해서 3년 후에 빚은 해결이 되었지만....

내 생애에 가장 암담하던 시절이였고 희망이던 그림을 못그리게 되자 뛰어든 것이 교육 운동이였답니다.

전교조의 전신이던 전교협의 창립맴버로 들어가서 교과운동을 하게 되었지요...

일주일에 세번씩이나 모임이 있었고 가면 11시가 넘어서야 회의가 끝나던 그시절 참으로 많은 공부를 했지요.

운동을 하다보니 정치를 공부하게 되고...

역사를 공부하게 되고...

교육 원론과 심리학을 공부하게 되고...

전공과목의 원리를 공부하게 되고...

그렇게 한세월을 빠져 다녔답니다.

그러다 어느날 지쳐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지요...

아무것도 바라볼게 없는 나의 현실과 함께...

 

그래서 빠져든 것이 야생화였답니다.

어려서부터 항상 산밑에서 자랐고 초등학교 2학년부터 한해도 거름없이 꽃밭을 가꾸어오던 습관이 자연히 야생화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어서 한 때는 그 좁은 집에 종류별로 200가지씩이나 되는 야생화를 키운적도 있었답니다.

그것 자체도 허비라고 생각되어질만큼 경제상황이 악화 되었을 무렵....

난초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었지요..

난초는 나중에 돈이 될 수도 있다는 얄팍한 생각에 그리 되었답니다.

 

한국춘난에 빠져든지 8년이 되는군요...

그 와중에 미술심리치료라는 것도 공부하다가 임상치료를 할 상대를 구하기 어려워 모든 과정을 마친 상태에서 포기하고 말았지요^^

8년중 5년은 거의 매주 산에 올랐다고 봐야할 겁니다.

그러는 중 산삼이라는 것도 캐 보았고 집에서 먹는 물은 항상 약초물이라고 할 정도로 식물의 세계에 깊이 빠져 들었었지요...

또 와중에 디카를 장만하여 포기한 야생화에 대한 보상으로 키우는 대신 사진을 찍으로 몇년을 기웃거리기도 했었지요.

 

그러는 와중에 아내에게서 문제가 발생했는데... 전 그 상황을 참으로 늦게서야 알았답니다.

내가 아내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부분일 거랍니다.

내가 너무 한곳에 집착하여 빠지는 바람에 애틋한 사랑을 주지 못했다는...

한 때는 개선되지 않는 경제 상황 때문에 죽으러 가본 적도 있었습니다만...

지내놓고 보니 잘못한 내가 분명히 있더군요...

그래서 지금 제가 빠져 든 것이 바로 인간 관계랍니다.

그중에서도 사랑이라는 부분이지요.

 

지금 저는 인간 관계... 그것도 사랑이라는 데에 흠뻑 빠져 있답니다.

물론 지금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처음에 아내가 집을 나갔을 때엔 허탈감과 배신감 때문에 아무나 여자라는 존재가 내 곁에 있길 바라게 되더군요...

그래서 이곳저곳 쑤시러 다니게 되더군요...

이부분 어느님의 글에서 아주 가슴아프게 지적이 되어있더군요...

싸이트의 인물과 실존의 인물... 확인하고 싶어서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엄청난 실망을 하게 되었지요..

고향 동네의 아주 먼 옛날의 어린 소꼽친구를 찾아가 보기도 했고... 옛사랑을 찾아가 보기도 했답니다.

이 모두가 징검다리 역할을 해 주더군요..

 

아내를 잃어 버리고 난 다음에 막연하게 보지 않고 동경했던 한여인이 실체를 보니 아니기에 가슴에 담았다 지우게 되었고...

혼자된 소꼽친구에게 정중한 거부를 받으며 두번째 징검다리를 건너게 되었고...

혼자된 옛사랑을 찾아나섰다가 시기가 아니란 소리를 들으며 또한번의 징검다리를 건넜답니다.

지금 쓰고 있는 최근의 일년간의 이야기는 아직 체화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또하나의 징검다리가 필요함을 느끼게 되더군요...

그 징검다리는...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만 있고 싶은... 그런 징검다리더군요...

화려하고 예쁜 것이 아니라 가슴 속에 고이 간직하며 언젠가는 실체의 사랑에 자리를 내주어야할 그런 징검다리가 필요하더군요...

 

나이 많은 놈이 이런 상처를 뻔뻔하게 드러내고 다닌다고 욕하시는 분들도 있으실줄 안답니다.

아무도 모르는 단지 서로 어루만져주는 상처로만 맺어진 이 혼사방이 저는 그래서 좋더군요...

그러나 저는 지금 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공부에 아주 전념하고 있답니다.

청춘을 다 보내고 나서 불혹을 넘긴 나이에 이제와서 사랑을 공부한다면 참으로 우습겠지요?

 

처음 이곳을 올 때에는 눈에 물을 켜고 왔었답니다.

그래서 불로방과 40방에 가서 어떤 인간들이 제비족일까를 생각하면서 눈에 불을켜고 째려 보기도 했었답니다.

그들의 실체를 폭로시킬 요량으로...

그러나 부질없는 생각이더군요...

결국은 내가 몬난 놈이였다는 단 한마디로 귀착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지요...

 

혼사방 식구들께 정중하게 부탁드리고 싶답니다.

티 안나게 표현도 않하고 혼자만의 징검다리를 갖고 싶다고...

그리고 누군지도 모를 대상이 생겨 나더라도 절대 티를 내지 않을 것이며....

그냥 저 혼자 조용히 생각하는 거 욕하지 말아달라는.....

사람이 허탈해지니 무언가 대신 메꾸어야할 대상이 필요하더이다...

퍼낸 자리가 너무 아파서...

 

이 늦은 시간에...

해야할 일이 산더미인데도 하질 못하고 이밤에 이러고 있는 이 풀내음 욕하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린답니다.

참 이곳에 와서 저 엄청 상황이 좋아진거라는 거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래도 아직은 더 필요한 게 많아서...

이렇게 주책을 부리며 떠들고 있답니다.....

 

혼사방 모든 식구 여러분들도 좋은 사랑 찾으셔서 이곳을 떠날 수 있길...

그리고 추억으로 간직하실 수 있기를 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