쟌느는 정신을 차렸지만 눈에 씌워진 것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신이 맑아지면서 주위의 것들이 선명하게 그녀의 머릿속에 느껴지기 시작했다. 쟌느는 핵을 찾아 떠나면서 아무도 몰래 호파스의 부름을 받았었다. 한밤중에 부른 이유도 궁금했지만 괴물의 등에 메달려 있으면서 입은 상처를 정성스레 치료해준 노엘박사의 얼굴을 보며 안심했었다. 그날 밤, 그녀는 두 늙은 과학자로부터 간단한 수술을 받았다. 눈에 있는 근육과 신경을 활성화시키는 수술이라는 설명만 들었다. 겨우 10분만에 끝난 수술 후,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주변을 볼 수 있는 이상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 눈동자가 사라지고 눈 전체가 마치 곤충의 그것처럼 변해가면서 자신도 괴물이 되어가는 줄로만 알며 언제 괴물로 변할지 불안하기만 하던 그녀는 당황했지만 노엘박사의 설명을 듣고는 더 이상 불안해 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현재 자신의 몸은 변이를 중단한 상태이고 눈에 생긴 이상근육이 미세한 초음파를 발생시킨다는 것이었다. 그 근육을 움직이게 하고 되돌아오는 파장을 느낄 수 있도록 신경에 약간의 손을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했었다. 아직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아 잘 될때도 있고 전혀 느끼지 못할 때도 있지만 조금씩 그녀의 마음대로 주변의 사물과 움직임을 인식할 수 있는 중이다. 그녀가 아직은 익숙치 못한 능력을 이용해 이곳이 어딘지 알기 위해 신경을 집중하려는데 아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쟌느. 거기 있니?" "아, 아리아. 나 여기 있어." "어딘지 볼 수 있지?" "어? 어떻게 알았어?" "그냥 알게 됐어.......... 가끔 주변의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들어오거든." "뭐? 언제부터?" "예전에 스파키 주변에 있다가 전기에 약간 감전된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그나저나 어떻게 빠져나가지?" "우릴 데려온 사람들이 근처에 있어." "이봐요! 누구 없어요?"
곧 굵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문이 열렸다. 쟌느는 들어오는 사내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제 깨어났나?" "당신들은 누구죠?" "얌전히 따라왔으면 기절까진 시키지 않았을텐데. 어쨌든 미안하오." "여긴 어디죠?" "그건 말할 수 없소." "어쩔 생각이죠?" "조금 있으면 호파스가 돌아올거요. 그때까지 얌전히 있겠다면 좀 더 편한 곳으로 옮겨주겠소."
그때 아리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신 대답했다.
"좋아요. 얌전히 있을테니 이것 좀 풀어주세요. 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하네요." "좋소."
다가온 남자는 쟌느와 아리아를 묶은 줄을 풀어주었지만 눈에 가린 천을 풀지 않았다. 쟌느가 천을 풀려고 하자 남자의 억센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눈은 가리겠소. 얌전히 따라오시오."
남자가 아리아와 쟌느를 앞세우며 천천히 등을 밀었고 그녀들은 남자가 말하는 방향대로 걷기 시작했다. 쟌느는 일부러 남자의 말에 맞추어 걷고 있었지만 앞을 훤히 보고 있었다. 지하는 아닌 듯 벽에 난 구멍에서 바람과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고 얼마 걷지 않아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남자가 멈추라고 하며 문을 열어주었고 문이 닫힌 후에 여자들의 눈을 풀어주었다. 그곳은 마치 손님을 위한 방인 듯 쇼파와 테이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시오."
아리아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실것을 좀 부탁해도 될까요?"
남자는 인질의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요구에 조금은 당황했지만 바로 사람을 시켜 물을 가져다 주었다. 둘만 남게 되자 쟌느가 아리아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저기.... 아리아. 괜찮아?"
날이 갈수록 달라지는 아리아의 분위기에 쟌느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아리아의 대답에 더욱 걱정이 커졌다.
"넌 괜찮니?"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쟌느가 졸던 눈을 비비며 얼른 몸을 일으켰다.
"쟌느. 고생이 많았구나."
쟌느를 보살피던 노엘이 바짝 다가서며 물었지만 쟌느는 그의 손을 밀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죠? 저 사람들은 누구고 여긴 어딘가요?" "지금은 말할 수 없다."
호파스가 끼어들며 말했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내 일을 돕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럼 러시아시티의......." "아니다. 이들은 앞으로 이 지구상에 영원한 평화를 가져올 사람들이다. 지금은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구나. 이해해다오." "제 오빠하고 스파키는요?"
쟌느의 물음에 아리아가 대신 대답하며 일어섰다.
"그는 무사해. 조금 다치긴 한 듯 하지만 괜찮을거야." "그걸 어떻게......" "그냥 느껴질 뿐이야. 아마 죽었다면 그런 느낌이 왔겠지."
아리아의 말에 호파스가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조금씩 효과가 나타나는구나." "저에게도 수술을 하셨지요? 호파스....." "그렇다. 아리아. 네가 잠든 사이 레이져를 이용해 너의 뇌에 약간의 손을 썼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어서 실패한 줄로 생각했는데 이제서야 각성을 하는구나." "별로 좋지 않아요. 감사드리진 않겠어요." "허허허. 다 이해하게 될거다. 그나저나 배가 고플테니 뭐라도 좀 먹도록 하자. 나도 배가 고프구나."
곧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두명이 먹을것과 마실것을 가져왔고 그들은 조용히 식사를 했다. 쟌느는 아직 오빠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조급했고 아리아는 그저 부드러운 시선으로 조용히 식사를 할 뿐이었다. 호파스와 노엘박사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술병을 거의 다 비우더니 바닥에 누워 잠이 들어버렸다. 쟌느가 식기를 치우고는 문을 움직여 봤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자 아리아가 말했다.
"나중에 여길 나갈 기회가 생길거야. 조금 기다리자." "........... 하지만..........." "그는 강해. 절대 죽지 않아. 그리고 캔도 그와 함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
스파키는 오랫동안 죽은 듯이 잠만 잤다. 그러다 갑자기 총알에 뜯겨지는 캔을 구하기 위해 손을 뻗으며 잠에서 깼다.
"캔!" "어이쿠! 요란하게 깨는구만."
가만히 스파키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사내는 갑자기 일어서는 그와 머리를 부딪힐 뻔 했다. 정신이 들자마자 스파키는 옆을 더듬었다. 자신의 옷과 칼이 가지런히 놓여있자 집었던 칼을 다시 놓으며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여긴 어디요?" "타흐만의 방입니다." "..........."
그제서야 스파키는 자신이 캔을 업은 채 기어서 동굴을 지나다가 넓은 공간이 나오면서 의식을 잃은 것이 기억났다. 아니, 의식을 잃었다기보단 갑자기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버린 것이다.
"내 동료는......." "저 쪽에 있잖소."
사내가 가리키는 쪽에 있는 작은 침대에 캔이 온 몸에 붕대를 감고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머리는 아주 짧게 잘려 있었지만 얼굴은 잠이 든 듯 평온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몸엔 수십개의 가느다란 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왜 저런 상태인가?"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날 뻔 했습니다. 빠른 회복을 위해 체내의 모든 혈액을 정화하고 상처회복에 필요한 양분을 몸 구석구석에 직접 공급하는 중이지요. 걱정 마십시오. 저런 상태라면 내일쯤이면 깨어날 겁니다." "............" "곧 두목이 올겁니다."
스파키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흉터가 조금 남았지만 상처는 말끔하게 치유되어 있었다.
"내가 얼마나 오래 누워있었소?" "삼일동안." "큰일이군........" "도시 밖에 있다는 여자들 말입니까?" "어떻게 그걸......" "당신이 기절하기 전에 우리에게 말했소. 여자들을 구해달라고. 사막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이오." "............."
그런 말을 한 사실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자의 말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여자들에 대한 얘기는 타흐만에게 직접 듣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사내의 말에 스파키는 아리아와 쟌느가 이 곳에 없다는 것을 알고는 서둘러 옷을 입기 시작했다. 벌떡 일어서서 옷을 입으려는 순간,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자그마한 아시안 여자 하나가 손에 물병을 들고 들어왔다. 스파키는 동작을 멈추며 그저 쳐다보기만 했지만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물병을 놓치더니 쏜살같이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본 남자가 퍼석 웃으며 말했다.
"다음부턴 속옷을 입고 일어서시오. 허허허허."
잠시 후, 스파키는 타흐만이 보냈다는 꼬마의 안내를 받아 넓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오! 어서 오시오. 스파키." "다시 보는군요." "어쩌다가 그렇게 당했소? 그 정도로 약한 인물은 아닐텐데."
타흐만은 처음부터 스파키가 엄청난 수의 군인들이 쏴대는 총알세례를 뚫고 나왔다는 것을 알면서 일부러 그렇게 물은 것이다. 스파키도 그것을 알고 대답 대신 퍼석 웃었다.
"몸은 어떻소? 아직 밧데리는 좀 남아있소?" "..........." "하하하하. 농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구만. 어쨌든 무사해서 다행이오. 우리 돌팔이 의사가 그러는데 그 캔이라는 친구도 금방 나을거라고 하더구만." "도움, 감사합니다." "인사는 무슨...... 참, 그 여자들은 구하지 못했소." "어딨습니까?"
스파키는 당장이라도 여자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일 기세였다. 하지만 타흐만의 표정을 보니 그러기엔 곤란하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바로 갔지만 이미 다른 자들에 의해 이동중이었소." "어디로 말입니까?" "그걸 알기 위해 미행을 시켰으니까 곧 알 수 있을거요." "무사합니까?" "아마 그럴거요. 보고에 따르면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데려갔다고 하더구만. 놈들이 중화기를 갖고 있어서 우리쪽에선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소. 그건 이해해 주시오. 우린 그저 도둑들이니까."
스파키와 타흐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의 대부분이 타흐만이 거느리고 있는 도적길드에 대한 이야기였다. 도둑질을 해서 살아가곤 있지만 주로 부유층을 겨냥하고 이 도시로 들어오는 물건 중 마약같은 물건들을 찾아서 없애버리는 일도 하고 있다고 했다. 나름대로 강한 긍지를 갖고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도중 스파키가 물었다.
"작은 비행선을 구할 수 있습니까?" "훔치면 되지. 지금 가려고 하오?" "여자들을 구해야 합니다." "그 늙은 과학자는 누구요?" "............."
스파키의 인상이 굳어지자 타흐만이 퍼석 웃었다.
"사실은 그때 만난 이후로 당신을 계속 미행해왔소. 꽤 먼 곳까지 가더구만. 거기서 늙은 남자 두명이 비행선을 버리고 대신 다가온 소형 비행선에 옮겨타는 것을 보았소. 군인들까지 있던데...... 그들이 배신을 한 모양이더구만." ".........."
스파키는 이제까지 누군가에 의해 미행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노인들이 어디로 갔는지도 알고 있습니까?" "현재까지는 여자들이 잡여간 곳과 그 늙은이들이 간 곳의 방향이 일치한다는 것밖엔 모르오. 하지만 부하들이 돌아오면 곧 알게 되겠지."
스파키는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마음을 가라앉혔다. 만일 이 자의 말대로 호파스가 접촉한 인물들과 여자들을 데려간 인물들이 동일인이라면 적어도 여자들의 안전에 대한 걱정은 다소 접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을 아는 듯 타흐만이 말했다.
"그 등이 굽은 노인이 젊은 남자들의 머리통을 갈기는 걸 봤다고 하니 위험한 상황은 아닌 것 같소만....." "왜 미행했습니까?"
스파키의 뜬금없는 질문에 타흐만이 한숨을 쉬었다.
"급하군. 실은 당신에게 부탁이 있소." "..........." "당신이 죽인 내 아들의 복수를 하고 싶소."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스파키는 조금씩 손에 전력을 올리다가 캔이 생각나면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내 목숨이 필요합니까?" "아, 그런 얘기가 아니오." ".........." "사실 난 아메리카 시티의 군인이었소. 장교였지."
스파키는 타흐만으로부터 풍겨오는 강한 기운의 정체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거친 군인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게서나 풍기던 바로 그 냄새였던 것이다.
"그런데 왜 도둑들의 우두머리가 된 겁니까?" "우리 가족이 그들의 실험대상이 되고 말았소.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아내가 실험대상이 된 것이지." "............." "아메리카 시티는 이곳보다 훨씬 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소. 그래서 러시아 시티는 평화의 댓가로 불평등한 교역을 하며 지내오고 있지. 그리고 우린 러시아 시티에 힘을 과시하기 위해 가끔 이유없는 공격을 하곤 했소. 당신에게서도 군인의 냄새가 나는데......." "맞습니다." "역시 그랬군...... 묻지는 않겠소. 어쨌든 잘 알겠지만 우린 상부의 명령에 따라 가끔 이곳의 농장들을 습격하거나 억지 이유를 붙여 공격을 감행하곤 했소. 그러다가 내가 거느리는 부대에게 이상한 명령이 내려왔소."
타흐만은 길게 한숨을 쉬며 과거의 일을 회상하듯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그저 가끔 농장의 시설이나 군부대로 보이는 건물을 부수는 일만 했는데 한 번은 농장의 인부들까지 몰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소. 난 거부했지. 덕분에 난 명령 불복종의 죄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소. 죽는 날만 기다리던 차에 부하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지. 바로 내 아내가 전투용 괴물을 만드는 실험에 이용되기 위해 끌려왔다는 얘기였소. 그리고 그때 아내는 임신중이었소. 그 아이가 바로 당신이 죽인 녀석이지." "............" "난 죽어도 상관 없었지만 아내와 자식은 살리고 싶었소. 그래서 내 부하였던 녀석에게 사정해서 탈출을 시도했지. 다행히 아내가 있는 곳을 알아내고 탈출에 성공했소. 하지만 아낸 이미......" "실험이 끝난 상태였군요." "그렇소. 뱃속의 아이는 이미 길트에 감염된 상태였고 실험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소. 바로 죽기 직전에 구출했지. 어쨌든 그 이후로 우린 여기 저기 도망다니며 살다가 겨우 아이를 낳았고. 하지만 이상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소." "돌연변이들이 모였군요." "그렇소. 그 아이가 깨어있는 동안엔 언제나 돌연변이들이 모여들었소. 그리고 아이가 잠들면 모였던 괴물들이 우릴 공격했지. 그래서. 우린 하는 수 없이......" "............"
스파키도 타흐만을 따라 한숨을 쉬었다.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던 이 자의 결정은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는 것이다.
"난 아이를 버리기로 결심했소. 실험에 의해 망가진 아이를 그 애비가 버린 것이오. 아내는 끝까지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고 했지만 아내가 잠든 사이 내가 숲에 버렸소. 그리고 혹시 살아남을 경우 알아보기 위해 칼을 같이 둔 것이지. 하지만 아낸 그 이후 많은 시간을 괴로움에 지냈소. 계속 아들을 찾았지. 결국 내가 잠든 사이 아이를 찾기 위해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소." ".........." "주변을 샅샅이 뒤져서 결국 아내의 처참한 시체만 찾았을 뿐이오." "유감입니다."
스파키는 앞에 있는 슬픈 자에게 다른 할 말이 없었다.
"그 복수를 원하시는 겁니까?" "그런 이유가 있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소." "뭡니까?" "지금도 놈들은 죄없는 군인들에게 있지도 않은 죄를 덮어씌우고는 실험에 사용하고 있소. 그래도 식구들을 잘 먹이기 위해 군인이 되겠다는 사람은 많으니까. 그리고....." "또 있습니까?" "놈들은 오래전부터 주 병력을 크리쳐라는 바이오솔져로 전환하고 있소. 그 놈들을 조종하는 스켈이라는 작자가 있는데 그 놈이 바로 우리 아이가 당했던 실험의 성공작이오. 뇌파로 괴물들을 맘대로 조종하지. 내 아들은 그 뇌파의 파장이 약하다는 이유로 실패작으로 분류된 것이오."
스파키는 마치 얼굴에 얇은 껍질을 둘렀다가 한꺼번에 벗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을 이렇게 만들고 지구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지금도 살아남아 그런 무지막지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인내심의 끈을 벌써부터 끊어놓고 있는 중이다.
"난 내 조국을 사랑했소. 하지만 그 헤밍스라는 작자와 일당들이 살아있는 한 조국의 국민들은 계속 속아가며 놈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희생물이 될 뿐이오. 난 그걸 막고 싶소." "내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놈을 죽이고 싶소."
스파키는 타흐만의 바램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한 국가의 원수를 죽인다는 것은 몇십년 이상 친분을 유지해 온 측근을 매수한다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단지 특수한 능력이 있다고 해서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물론 나도 그 친구를 만나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말처럼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닐텐데요."
스파키의 말에 타흐만이 활짝 웃었다.
"그건 우리도 알고 있소. 물론 당신의 능력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그런 일이 쉽지는 않을거요. 그럴려면 아메리카 시티의 군인들을 거의 다 죽여야 할테니까." "무슨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반란이오." "반란?"
스파키가 눈을 크게 뜨자 타흐만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 동료였던 녀석들도 현재 자신들의 원수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갖고 있소. 놈은 벌써 몇백년 동안 죽지도 않는 괴물일 뿐더러 그 주변의 인물들도 같은 놈들이지. 장기집권은 강대한 나라일수록 위험한거요." "어떤 식으로 반란을 일으킬 계획입니까? 군인들은 명분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을텐데요." "러시아 시티에선 실험체를 확보하기 위해 용병을 계속적으로 모집하고 있소. 훈련중 죽었다고 하거나 이런 저런 이유를 둘러대서 실험실로 보내지고 있지. 당신은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 용병부대에 잠입한 후 헤밍스라는 자가 저지르는 만행의 증거를 잡아주시오." "그정도의 일은 당신이 해도 충분할텐데요." "우린 도둑이오. 도둑은 도둑일뿐 그런 큰 일을 할만한 심장이 없소. 하지만 당신은 다르지. 더군다나 당신의 능력이라면 실험실로 끌려간다고 해도 죽지 않을거요." "실패한다면?" "당신이 실패해도 당신의 동료들을 구하는데 힘을 쓰겠소. 그건 내 죽은 아들놈을 두고 맹세하지."
지크의 일을 들먹이는 것으로 보아 스파키가 절대 거절하지 못하게 하려는 절박한 마음은 알겠지만 스파키는 그 무엇보다 동료들을 먼저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제의를 거절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목숨을 구원받은 이상 그 몫은 해야 한다.
"좋습니다. 대신 불가능해진다면 바로 빠져나오겠습니다." "물론이오. 목숨은 소중하니까." "내 친구의 상처가 회복되는 대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를 데려갈 생각이오?" "우선 나가는 길을 알려주십시오. 찾아야 할 물건이 있습니다." "아, 그 쇳덩이 말이오? 그건 여기 있소만...... " ".............." "도데체 그게 뭐요? 이 도시의 대통령이 그걸 가지려고 애를 쓴 것 같던데........"
스파키의 전설 - 제6화 - 죽지 못한 자들의 희망 #9
쟌느는 정신을 차렸지만 눈에 씌워진 것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신이 맑아지면서 주위의 것들이 선명하게 그녀의 머릿속에 느껴지기 시작했다.
쟌느는 핵을 찾아 떠나면서 아무도 몰래 호파스의 부름을 받았었다.
한밤중에 부른 이유도 궁금했지만 괴물의 등에 메달려 있으면서 입은 상처를 정성스레 치료해준 노엘박사의 얼굴을 보며 안심했었다.
그날 밤, 그녀는 두 늙은 과학자로부터 간단한 수술을 받았다.
눈에 있는 근육과 신경을 활성화시키는 수술이라는 설명만 들었다.
겨우 10분만에 끝난 수술 후,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주변을 볼 수 있는 이상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
눈동자가 사라지고 눈 전체가 마치 곤충의 그것처럼 변해가면서 자신도 괴물이 되어가는 줄로만 알며 언제 괴물로 변할지 불안하기만 하던 그녀는 당황했지만 노엘박사의 설명을 듣고는 더 이상 불안해 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현재 자신의 몸은 변이를 중단한 상태이고 눈에 생긴 이상근육이 미세한 초음파를 발생시킨다는 것이었다.
그 근육을 움직이게 하고 되돌아오는 파장을 느낄 수 있도록 신경에 약간의 손을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했었다.
아직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아 잘 될때도 있고 전혀 느끼지 못할 때도 있지만 조금씩 그녀의 마음대로 주변의 사물과 움직임을 인식할 수 있는 중이다.
그녀가 아직은 익숙치 못한 능력을 이용해 이곳이 어딘지 알기 위해 신경을 집중하려는데 아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쟌느. 거기 있니?"
"아, 아리아. 나 여기 있어."
"어딘지 볼 수 있지?"
"어? 어떻게 알았어?"
"그냥 알게 됐어.......... 가끔 주변의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들어오거든."
"뭐? 언제부터?"
"예전에 스파키 주변에 있다가 전기에 약간 감전된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그나저나 어떻게 빠져나가지?"
"우릴 데려온 사람들이 근처에 있어."
"이봐요! 누구 없어요?"
곧 굵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문이 열렸다.
쟌느는 들어오는 사내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제 깨어났나?"
"당신들은 누구죠?"
"얌전히 따라왔으면 기절까진 시키지 않았을텐데. 어쨌든 미안하오."
"여긴 어디죠?"
"그건 말할 수 없소."
"어쩔 생각이죠?"
"조금 있으면 호파스가 돌아올거요. 그때까지 얌전히 있겠다면 좀 더 편한 곳으로 옮겨주겠소."
그때 아리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신 대답했다.
"좋아요. 얌전히 있을테니 이것 좀 풀어주세요. 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하네요."
"좋소."
다가온 남자는 쟌느와 아리아를 묶은 줄을 풀어주었지만 눈에 가린 천을 풀지 않았다.
쟌느가 천을 풀려고 하자 남자의 억센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눈은 가리겠소. 얌전히 따라오시오."
남자가 아리아와 쟌느를 앞세우며 천천히 등을 밀었고 그녀들은 남자가 말하는 방향대로 걷기 시작했다.
쟌느는 일부러 남자의 말에 맞추어 걷고 있었지만 앞을 훤히 보고 있었다.
지하는 아닌 듯 벽에 난 구멍에서 바람과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고 얼마 걷지 않아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남자가 멈추라고 하며 문을 열어주었고 문이 닫힌 후에 여자들의 눈을 풀어주었다.
그곳은 마치 손님을 위한 방인 듯 쇼파와 테이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시오."
아리아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실것을 좀 부탁해도 될까요?"
남자는 인질의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요구에 조금은 당황했지만 바로 사람을 시켜 물을 가져다 주었다.
둘만 남게 되자 쟌느가 아리아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저기.... 아리아. 괜찮아?"
날이 갈수록 달라지는 아리아의 분위기에 쟌느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아리아의 대답에 더욱 걱정이 커졌다.
"넌 괜찮니?"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쟌느가 졸던 눈을 비비며 얼른 몸을 일으켰다.
"쟌느. 고생이 많았구나."
쟌느를 보살피던 노엘이 바짝 다가서며 물었지만 쟌느는 그의 손을 밀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죠? 저 사람들은 누구고 여긴 어딘가요?"
"지금은 말할 수 없다."
호파스가 끼어들며 말했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내 일을 돕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럼 러시아시티의......."
"아니다. 이들은 앞으로 이 지구상에 영원한 평화를 가져올 사람들이다. 지금은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구나. 이해해다오."
"제 오빠하고 스파키는요?"
쟌느의 물음에 아리아가 대신 대답하며 일어섰다.
"그는 무사해. 조금 다치긴 한 듯 하지만 괜찮을거야."
"그걸 어떻게......"
"그냥 느껴질 뿐이야. 아마 죽었다면 그런 느낌이 왔겠지."
아리아의 말에 호파스가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조금씩 효과가 나타나는구나."
"저에게도 수술을 하셨지요? 호파스....."
"그렇다. 아리아. 네가 잠든 사이 레이져를 이용해 너의 뇌에 약간의 손을 썼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어서 실패한 줄로 생각했는데 이제서야 각성을 하는구나."
"별로 좋지 않아요. 감사드리진 않겠어요."
"허허허. 다 이해하게 될거다. 그나저나 배가 고플테니 뭐라도 좀 먹도록 하자. 나도 배가 고프구나."
곧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두명이 먹을것과 마실것을 가져왔고 그들은 조용히 식사를 했다.
쟌느는 아직 오빠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조급했고 아리아는 그저 부드러운 시선으로 조용히 식사를 할 뿐이었다.
호파스와 노엘박사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술병을 거의 다 비우더니 바닥에 누워 잠이 들어버렸다.
쟌느가 식기를 치우고는 문을 움직여 봤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자 아리아가 말했다.
"나중에 여길 나갈 기회가 생길거야. 조금 기다리자."
"........... 하지만..........."
"그는 강해. 절대 죽지 않아. 그리고 캔도 그와 함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
스파키는 오랫동안 죽은 듯이 잠만 잤다.
그러다 갑자기 총알에 뜯겨지는 캔을 구하기 위해 손을 뻗으며 잠에서 깼다.
"캔!"
"어이쿠! 요란하게 깨는구만."
가만히 스파키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사내는 갑자기 일어서는 그와 머리를 부딪힐 뻔 했다.
정신이 들자마자 스파키는 옆을 더듬었다.
자신의 옷과 칼이 가지런히 놓여있자 집었던 칼을 다시 놓으며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여긴 어디요?"
"타흐만의 방입니다."
"..........."
그제서야 스파키는 자신이 캔을 업은 채 기어서 동굴을 지나다가 넓은 공간이 나오면서 의식을 잃은 것이 기억났다.
아니, 의식을 잃었다기보단 갑자기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버린 것이다.
"내 동료는......."
"저 쪽에 있잖소."
사내가 가리키는 쪽에 있는 작은 침대에 캔이 온 몸에 붕대를 감고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머리는 아주 짧게 잘려 있었지만 얼굴은 잠이 든 듯 평온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몸엔 수십개의 가느다란 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왜 저런 상태인가?"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날 뻔 했습니다. 빠른 회복을 위해 체내의 모든 혈액을 정화하고 상처회복에 필요한 양분을 몸 구석구석에 직접 공급하는 중이지요. 걱정 마십시오. 저런 상태라면 내일쯤이면 깨어날 겁니다."
"............"
"곧 두목이 올겁니다."
스파키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흉터가 조금 남았지만 상처는 말끔하게 치유되어 있었다.
"내가 얼마나 오래 누워있었소?"
"삼일동안."
"큰일이군........"
"도시 밖에 있다는 여자들 말입니까?"
"어떻게 그걸......"
"당신이 기절하기 전에 우리에게 말했소. 여자들을 구해달라고. 사막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이오."
"............."
그런 말을 한 사실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자의 말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여자들에 대한 얘기는 타흐만에게 직접 듣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사내의 말에 스파키는 아리아와 쟌느가 이 곳에 없다는 것을 알고는 서둘러 옷을 입기 시작했다.
벌떡 일어서서 옷을 입으려는 순간,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자그마한 아시안 여자 하나가 손에 물병을 들고 들어왔다.
스파키는 동작을 멈추며 그저 쳐다보기만 했지만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물병을 놓치더니 쏜살같이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본 남자가 퍼석 웃으며 말했다.
"다음부턴 속옷을 입고 일어서시오. 허허허허."
잠시 후, 스파키는 타흐만이 보냈다는 꼬마의 안내를 받아 넓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오! 어서 오시오. 스파키."
"다시 보는군요."
"어쩌다가 그렇게 당했소? 그 정도로 약한 인물은 아닐텐데."
타흐만은 처음부터 스파키가 엄청난 수의 군인들이 쏴대는 총알세례를 뚫고 나왔다는 것을 알면서 일부러 그렇게 물은 것이다.
스파키도 그것을 알고 대답 대신 퍼석 웃었다.
"몸은 어떻소? 아직 밧데리는 좀 남아있소?"
"..........."
"하하하하. 농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구만. 어쨌든 무사해서 다행이오. 우리 돌팔이 의사가 그러는데 그 캔이라는 친구도 금방 나을거라고 하더구만."
"도움, 감사합니다."
"인사는 무슨...... 참, 그 여자들은 구하지 못했소."
"어딨습니까?"
스파키는 당장이라도 여자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일 기세였다.
하지만 타흐만의 표정을 보니 그러기엔 곤란하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바로 갔지만 이미 다른 자들에 의해 이동중이었소."
"어디로 말입니까?"
"그걸 알기 위해 미행을 시켰으니까 곧 알 수 있을거요."
"무사합니까?"
"아마 그럴거요. 보고에 따르면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데려갔다고 하더구만. 놈들이 중화기를 갖고 있어서 우리쪽에선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소. 그건 이해해 주시오. 우린 그저 도둑들이니까."
스파키와 타흐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의 대부분이 타흐만이 거느리고 있는 도적길드에 대한 이야기였다.
도둑질을 해서 살아가곤 있지만 주로 부유층을 겨냥하고 이 도시로 들어오는 물건 중 마약같은 물건들을 찾아서 없애버리는 일도 하고 있다고 했다.
나름대로 강한 긍지를 갖고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도중 스파키가 물었다.
"작은 비행선을 구할 수 있습니까?"
"훔치면 되지. 지금 가려고 하오?"
"여자들을 구해야 합니다."
"그 늙은 과학자는 누구요?"
"............."
스파키의 인상이 굳어지자 타흐만이 퍼석 웃었다.
"사실은 그때 만난 이후로 당신을 계속 미행해왔소. 꽤 먼 곳까지 가더구만. 거기서 늙은 남자 두명이 비행선을 버리고 대신 다가온 소형 비행선에 옮겨타는 것을 보았소. 군인들까지 있던데...... 그들이 배신을 한 모양이더구만."
".........."
스파키는 이제까지 누군가에 의해 미행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노인들이 어디로 갔는지도 알고 있습니까?"
"현재까지는 여자들이 잡여간 곳과 그 늙은이들이 간 곳의 방향이 일치한다는 것밖엔 모르오. 하지만 부하들이 돌아오면 곧 알게 되겠지."
스파키는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마음을 가라앉혔다.
만일 이 자의 말대로 호파스가 접촉한 인물들과 여자들을 데려간 인물들이 동일인이라면 적어도 여자들의 안전에 대한 걱정은 다소 접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을 아는 듯 타흐만이 말했다.
"그 등이 굽은 노인이 젊은 남자들의 머리통을 갈기는 걸 봤다고 하니 위험한 상황은 아닌 것 같소만....."
"왜 미행했습니까?"
스파키의 뜬금없는 질문에 타흐만이 한숨을 쉬었다.
"급하군. 실은 당신에게 부탁이 있소."
"..........."
"당신이 죽인 내 아들의 복수를 하고 싶소."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스파키는 조금씩 손에 전력을 올리다가 캔이 생각나면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내 목숨이 필요합니까?"
"아, 그런 얘기가 아니오."
".........."
"사실 난 아메리카 시티의 군인이었소. 장교였지."
스파키는 타흐만으로부터 풍겨오는 강한 기운의 정체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거친 군인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게서나 풍기던 바로 그 냄새였던 것이다.
"그런데 왜 도둑들의 우두머리가 된 겁니까?"
"우리 가족이 그들의 실험대상이 되고 말았소.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아내가 실험대상이 된 것이지."
"............."
"아메리카 시티는 이곳보다 훨씬 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소. 그래서 러시아 시티는 평화의 댓가로 불평등한 교역을 하며 지내오고 있지. 그리고 우린 러시아 시티에 힘을 과시하기 위해 가끔 이유없는 공격을 하곤 했소. 당신에게서도 군인의 냄새가 나는데......."
"맞습니다."
"역시 그랬군...... 묻지는 않겠소. 어쨌든 잘 알겠지만 우린 상부의 명령에 따라 가끔 이곳의 농장들을 습격하거나 억지 이유를 붙여 공격을 감행하곤 했소. 그러다가 내가 거느리는 부대에게 이상한 명령이 내려왔소."
타흐만은 길게 한숨을 쉬며 과거의 일을 회상하듯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그저 가끔 농장의 시설이나 군부대로 보이는 건물을 부수는 일만 했는데 한 번은 농장의 인부들까지 몰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소. 난 거부했지. 덕분에 난 명령 불복종의 죄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소. 죽는 날만 기다리던 차에 부하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지. 바로 내 아내가 전투용 괴물을 만드는 실험에 이용되기 위해 끌려왔다는 얘기였소. 그리고 그때 아내는 임신중이었소. 그 아이가 바로 당신이 죽인 녀석이지."
"............"
"난 죽어도 상관 없었지만 아내와 자식은 살리고 싶었소. 그래서 내 부하였던 녀석에게 사정해서 탈출을 시도했지. 다행히 아내가 있는 곳을 알아내고 탈출에 성공했소. 하지만 아낸 이미......"
"실험이 끝난 상태였군요."
"그렇소. 뱃속의 아이는 이미 길트에 감염된 상태였고 실험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소. 바로 죽기 직전에 구출했지. 어쨌든 그 이후로 우린 여기 저기 도망다니며 살다가 겨우 아이를 낳았고. 하지만 이상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소."
"돌연변이들이 모였군요."
"그렇소. 그 아이가 깨어있는 동안엔 언제나 돌연변이들이 모여들었소. 그리고 아이가 잠들면 모였던 괴물들이 우릴 공격했지. 그래서. 우린 하는 수 없이......"
"............"
스파키도 타흐만을 따라 한숨을 쉬었다.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던 이 자의 결정은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는 것이다.
"난 아이를 버리기로 결심했소. 실험에 의해 망가진 아이를 그 애비가 버린 것이오. 아내는 끝까지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고 했지만 아내가 잠든 사이 내가 숲에 버렸소. 그리고 혹시 살아남을 경우 알아보기 위해 칼을 같이 둔 것이지. 하지만 아낸 그 이후 많은 시간을 괴로움에 지냈소. 계속 아들을 찾았지. 결국 내가 잠든 사이 아이를 찾기 위해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소."
".........."
"주변을 샅샅이 뒤져서 결국 아내의 처참한 시체만 찾았을 뿐이오."
"유감입니다."
스파키는 앞에 있는 슬픈 자에게 다른 할 말이 없었다.
"그 복수를 원하시는 겁니까?"
"그런 이유가 있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소."
"뭡니까?"
"지금도 놈들은 죄없는 군인들에게 있지도 않은 죄를 덮어씌우고는 실험에 사용하고 있소. 그래도 식구들을 잘 먹이기 위해 군인이 되겠다는 사람은 많으니까. 그리고....."
"또 있습니까?"
"놈들은 오래전부터 주 병력을 크리쳐라는 바이오솔져로 전환하고 있소. 그 놈들을 조종하는 스켈이라는 작자가 있는데 그 놈이 바로 우리 아이가 당했던 실험의 성공작이오. 뇌파로 괴물들을 맘대로 조종하지. 내 아들은 그 뇌파의 파장이 약하다는 이유로 실패작으로 분류된 것이오."
스파키는 마치 얼굴에 얇은 껍질을 둘렀다가 한꺼번에 벗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을 이렇게 만들고 지구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지금도 살아남아 그런 무지막지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인내심의 끈을 벌써부터 끊어놓고 있는 중이다.
"난 내 조국을 사랑했소. 하지만 그 헤밍스라는 작자와 일당들이 살아있는 한 조국의 국민들은 계속 속아가며 놈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희생물이 될 뿐이오. 난 그걸 막고 싶소."
"내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놈을 죽이고 싶소."
스파키는 타흐만의 바램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한 국가의 원수를 죽인다는 것은 몇십년 이상 친분을 유지해 온 측근을 매수한다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단지 특수한 능력이 있다고 해서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물론 나도 그 친구를 만나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말처럼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닐텐데요."
스파키의 말에 타흐만이 활짝 웃었다.
"그건 우리도 알고 있소. 물론 당신의 능력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그런 일이 쉽지는 않을거요. 그럴려면 아메리카 시티의 군인들을 거의 다 죽여야 할테니까."
"무슨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반란이오."
"반란?"
스파키가 눈을 크게 뜨자 타흐만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 동료였던 녀석들도 현재 자신들의 원수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갖고 있소. 놈은 벌써 몇백년 동안 죽지도 않는 괴물일 뿐더러 그 주변의 인물들도 같은 놈들이지. 장기집권은 강대한 나라일수록 위험한거요."
"어떤 식으로 반란을 일으킬 계획입니까? 군인들은 명분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을텐데요."
"러시아 시티에선 실험체를 확보하기 위해 용병을 계속적으로 모집하고 있소. 훈련중 죽었다고 하거나 이런 저런 이유를 둘러대서 실험실로 보내지고 있지. 당신은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 용병부대에 잠입한 후 헤밍스라는 자가 저지르는 만행의 증거를 잡아주시오."
"그정도의 일은 당신이 해도 충분할텐데요."
"우린 도둑이오. 도둑은 도둑일뿐 그런 큰 일을 할만한 심장이 없소. 하지만 당신은 다르지. 더군다나 당신의 능력이라면 실험실로 끌려간다고 해도 죽지 않을거요."
"실패한다면?"
"당신이 실패해도 당신의 동료들을 구하는데 힘을 쓰겠소. 그건 내 죽은 아들놈을 두고 맹세하지."
지크의 일을 들먹이는 것으로 보아 스파키가 절대 거절하지 못하게 하려는 절박한 마음은 알겠지만 스파키는 그 무엇보다 동료들을 먼저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제의를 거절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목숨을 구원받은 이상 그 몫은 해야 한다.
"좋습니다. 대신 불가능해진다면 바로 빠져나오겠습니다."
"물론이오. 목숨은 소중하니까."
"내 친구의 상처가 회복되는 대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를 데려갈 생각이오?"
"우선 나가는 길을 알려주십시오. 찾아야 할 물건이 있습니다."
"아, 그 쇳덩이 말이오? 그건 여기 있소만...... "
".............."
"도데체 그게 뭐요? 이 도시의 대통령이 그걸 가지려고 애를 쓴 것 같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