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승희 사건이 일어난 직후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필자가 본인의 경험지평을 통해 미국 이민 사회의 아픔과 한계를 짚어본 것입니다. 요즘 다시 조승희의 이름이 간간이 거론되는걸 보는데, 여전히 이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만 환원시키는 것 같아, 일년 전에 적었던 글을 올려봅니다.
하루 종일 모든 뉴스 채널들은 버지니아 공대 총살극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평범한 얼굴을한 "조승희"라는 이름을 가진 가엾은 한국 이민 1.5세 녀석은 이제 어떤 한국사람보다도 악명높은 유명인사가 되부렀다. 그리고 이 사건은 잠정적으로 여자친구와의 감정이 얽힌 치정극으로 결론이 난 듯 하다. 여자친구라… 그것도 제대로 사귀지도 않았던 백인 여자애와의 감정싸움이 50명이 넘는 사상자를 발생시킨 주범이란 말이지…
그리고 보도에 의하면, 그 녀석은 어느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한 외톨이였다고 한다. 외톨이… 즉, 아무도 그 녀석에게 정신적, 물리적 위협을 가하지도 않았고, 그럴 기회도 그 녀석은 주지 않았다는 말이지… 그냥 혼자 잘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사귀지도 않았던 여자를 스토킹, 그래 스토킹… 이전에도 여러 여자들을 스토킹 했다고 그러잖아… 그러니 이일도 스토킹 비스무리 한거 하다 사귀어 보지도 못하고 제 분에 못이겨 이런 잔인한 짓을 너무도 말짱하고 차분한 정신으로 쏴질러 버리고 말았단 말이지…ㅋㅋ
암튼 이런 식으로 여론을 몰아가는 언론플레이로 결국은 미국 년놈들은 이 일에 절대! 어떤 책임도 없다는 말을 하고들 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모방범죄, 혹은 자폐적 성향을 지닌 어떤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려고들 한다.
하지만, 내 눈엔 이 문제는 단순한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 일은 한편으로는 미국 이민에 대한 허황된 동경을 품고 무작정 건너오는 한국 사회에 대한 경종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와 평화, 민주주의와 인권”의 수호자로서 전 세계의 안보를 지 혼자 책임지고 있다는 미국 사회가 안고있는 구조적 불평등과 차별을 폭로하는 계시적 사건이다.
먼저 이민사회의 허와 실을 잠시 들여다보자.
적어도 내 눈에 비친 미국 이민사회는 뭔가 모르게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비 정상적인 기분이 들게 하는, 과히 유쾌하지 않은 사회다. 물론 난 여기서 사는 사람들을 일반화하거나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싸잡아서 재단하고 자르기엔 난 이들을 그렇게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이민사회를 접할 수 있었던 통로는 크게 세가지다. 미주 한인 교회, 두어달 아르바이트 했던 일식집, 그리고 유학생 가족들이 거주하는 학교 기숙사가 그곳이다. 암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곳 저곳에서 만난 이민자들의 삶의 질이 생각보다 낮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교육수준이나, 소득 수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삶의 가치와 질을 다양하게 즐겼던 사람들이었을 테지만, 전문직을 가진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한인들이 학력고하를 막론하고 세탁소나 일식집, 혹은 그와 유사한 식당이나 유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한국에서부터 이어진 경제적 빈부격차는 이곳에서도 여전히 이어지는게 대부분이다. 넉넉한 여윳돈을 가지고 온 사람들은 오자마자 좋은 조건의 집을 아예 사거나 렌트하고, 차를 사는 건 기본이거니와, 그 자금으로 약간의 노하우만 전수받은 후 직접 오너로서 가게를 운영할 수 있을테고, 한국에서도 프로 박테리아적 빈곤의 늪을 허덕이다 찬란한 아메리카 드림을 품고 온 사람들은 세탁소 종업원, 쓰시집 서버 혹은 주방보조, 혹 손재주가 있는 아줌마들은 네일가게 종업원으로 취직해서 고된 노동을 통해 생계를 꾸려가야 하니까. 물론 어쩌면 이런 생계형 이민자들의 경우는 한국보다 나은 삶을 산다고 느낄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어지간한 식당에서 주 5일 맞벌이하면, 한달 4000달러 정도는 벌 수 있으니까.
여하튼,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생계형이든 수익형이든 이민자들의 삶이 고되고 여유가 없기는 거의 매 일반인 것 같다. 세탁소 일 같은 경우는 새벽같이 일터로 나가서 밤이 되서야 들어오고, 식당 서버들도 출근 시간은 비교적 여유가 있다지만, 퇴근하고 들어오면 자정을 넘기기가 예사니, 이들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그야말로 “니 맘대로 크세요”나 다름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겄다. 거기다 한국 부모들이 갖고 있는 교육열은 그야말로 세계 챔피언 세 번 먹고도 남을 수준이니, 아이들이 받는 압박은 가히 메가톤급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지 않을라나…
결국 부모들과 아이들은 동상이몽을 꾸고 있다고 해야할 듯 싶다. 부모 입장에서는 몸 부서져라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아이들 학비대고 뒷바라지 하는 낙으로 하루 하루의 고된 노동을 이겨내는 것이고, 반면 아이들은 부모들의 보상심리를 채워야 하는 학업에 대한 중압감과 따뜻한 가정에서 부모들의 따스한 배려와 관심, 애정을 꿈꾸는 이중적 모순을 안고 살아가야 하니 말이다.
이번 일의 당사자인 조승희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세탁업을 하시는 아버지와 학교 구내식당에 일을 하시는 어머니… 이웃들의 증언으로는 조승희의 아버지는 조용하고 성실하시며, 눈 오는 날 이웃 차 위의 눈까지 치워주시는 따뜻한 가장이셨다. 그리고 성격적 결함을 가진 아들이 염려되어 학교의 친구들에게까지 잘 보살펴 달라고 당부한 걸 보면, 이들의 자식사랑도 여느 부모 못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환경이다. 위에서도 간단히 언급했듯이 미주 한인들의 성실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성실함은 흑백 양종이 대세를 장악하고 있는 미국에서 살아남고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최선이자 결정적 무기이다.
그러나 부모들의 바램과 현실은 다른 법. 8살에 이민 온 조승희는 한창 관심과 애정을 받아야 할 시기에 누나와 둘이서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야 했을 것이다. 누나 또한 본인의 학업과 생소한 환경에서 받는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웠을 리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각자의 영역이 분명해짐에 따라 이 아이의 자폐적 기질은 점점 더 자신을 안으로 감추고 억압하게 되었을 것이고, 부모의 품에서 재롱을 떨어야 할 나이에 고독을 친구로 삼게 된 어린 조군의 가장 큰 적은 당연히 가난이 되었을 것이다.
어린 그가 다양한 구조적 불평등 중 하나인 경제적 불평등에 자신의 상황을 투사한 건 물론 부모의 부재다. 어쩔 수 없이 맞벌이를 해야 하는 이민사회의 현실 속에서 어린 몸뚱아리를 한없이 움츠리게 만든 사나운 짐승은 바로 돈이었을 것이며, 그런 피해의식은 가진자들에 대한 적개심의 씨앗을 한 뼘만한 가슴에 심고 키우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폐적 기질을 더 부추긴 건 분명 미국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인종차별 이었을 것이다. “성차별, 인종차별, 계급차별, 장애인차별, 나이차별, 그리고 종교차별” 등 갖가지 차별이란 차별은 다 있는 나라가 미국이고 보면 새삼스러운 건 아니지만,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와 인권”을 사수하기 위해선 침략전쟁까지도 마다 않는 세계의 골목대장 미국에, 본인들이 그토록 자부하는 그 가치들이 공공연하게 묵사발되고 있다는 건 아이러니 중에 아이러니자, 빤쓰까지 까놓고 거리를 활보하는 치부 중에 치부다.
물론 이런 종류의 억압은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어느 나라에나 있다. 우리나라도 제 3세계의 근로자들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마 미국넘들보다 더하믄 더했지 덜하진 않을거다.
암튼 요는 위의 다양한 차별들 중 가장 그 정도가 심하고, 사회적 영향력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인종차별이란 것이다. 물론 이것도 피해 당사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상황이 엇갈리기는 하고, 차별이란 것이 항상 복합적이기 때문에 단순화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예를 들어볼까. 나는 올해 만 33(!--^)세인 건장(할라나^^;)한 키 180에 몸무게 대략 72키로 정도 나가며, 이성을 더 좋아라 하는 기독교인인 대한민국 남성이다. 위의 조건들 중 “남자, 33세, 신체건강한 이성애자, 기독교인”은 절대 약자의 요소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사람!이라는 이유와 당연한 결과로 언어(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는 점은 나를 미국 시민권, 혹 영주권을 가진 흑인 무신론자 할머니 보다도 낮은 환경에 처하게 만든다.
F1 비자를 소지한 유학생이라는 졸라 허접하고 재수없는 딱지를 하나 달고 있다 보니,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라도 그 잘난 소셜 넘버(Social Security Number, 주민번호 비스무레한--;)가 없는 관계로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가 없다. 혹 알바를 하더라도 쓰시집이나 세탁소에서 알바를 해야 하는데, 차가 없으니 남들 차를 얻어 타고 갈 수 있는 곳이라야 하고, 그것도 업주가 한국 사람이 아니라면 거의 취업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혹 재수가 좋아서 학교 안에서 일자리를 얻는 경우도 있는데, 나처럼 설렁설렁 치열함이 없는 놈에겐 돌아올 일자리도 없는 법이다.
또 하나, 어찌 됐건 미국에서 학업을 계속 하려면 9학점 이상을 들어야 하는데, 10학점을 듣더라도 학부 과목을 하나 들어서 대학원 학점이 6학점인 경우에는 짐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런 엿 같은 경우가 어디 있냐고요...? 바로 미국에 있다. 내가 아무리 신체 건강한 남자청년에 기독교인인들 어디다가 하소연을 하며, 어디서 모가지에 힘을 주겠는가. 뭐 물론 난 모가지에 힘 졸라 주고 다니면서 양넘들 압박하는 취미가 있긴 하다.
또 한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지난 주에 같이 수업을 듣는 한국학생이 수업을 빼먹었던 일이 있었다. 뭐 사실 난 빠졌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 주 수업에 밝혀진 뜨악한 사실. 글쎄 운전 중에 불심 검문을 받았는데, 차 보험 카드가 없다고 체포하고 수갑을 채워서 구치소에 세 시간 동안 수감되는 황당한 경우를 당했다는 것이다. 교통사고를 낸 것도 아니고, 순찰 경찰관 뒷통수를 갈긴 것도 아닌데, 겨우 운전면허도 아닌 차 보험카드가 없다는 이유로 수갑 채워 깜빵행이라니… 미국 아짐씨들도 어이없어 하는 황당한 경우. 이게 미국이다.
예전엔 DWB (driving-while-black)이라는 범죄가 있었단다. 흑인 운전자에 대한 차별적 범죄. 하지만 요즘은 이걸 DWNW (driving-while-not-white), 즉 운전중인 유색인종들에 대한 차별적이고 무조건적 범죄로 확대해야 할 듯 보인다. 암튼 이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어린 사내녀석이 겪었을 고통을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어린넘들일수록 본인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거니와, 영어에 영자도 몰랐을 초딩 1년 시절에 이민을 왔으니, 언어를 습득하고 적응하기까지 그가 겪었을 고통은 내가 겪은 이런 무력감에 비해 훨씬 그 정도가 심했을 것이다. 더구나 덩치 좋은 백인 남자애새끼들이 힘이 좀 좋아야지. 또 여자애들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한국 혹은 아시아계 애들을 남자로 취급도 하지 않았을테고, 그런 환경에서 쌓여진 스트레스는 그의 울타리를 더욱 견고하고 높게 쌓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억압된 욕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변형되고 전이된 형태로 꿈으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응축된 억압이 기형적 형태로 변형되게 되면, 만족시킬 적절한 타이밍을 통해 저런 폭력적 성향으로 분출되기도 하는 것이다.
근본적인 치료는 물론 가정에서 이루어졌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힘과 영어에 대한 사대주의적 동경을 가진 부모의 환상은, 돈을 벌기 위해 모든 걸 바치는 자신들의 여유 없는 생활은 모두 자식들을 뒷바라지를 통해 그들이 성취할 기득권으로 보상받을 것이라는 망상으로 정당화 되어질 것이며, 자신들이 쏟지 못하는 애정과 관심은 돈과 좋은 교육환경이 충분히 메꿔줄 것으로 착각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몸으로 보여주는 교육보다 더 좋은 교육이 어디 있던가. “나는 못하지만 너는 이렇게 해라”라는 말은 아이들에겐 폭력이나 다름없는 괴변이다. 더구나 그 가치가 기득권을 선점할 사회적 성공과 출세에 맞춰져 있는 바에야 어찌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길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나는 한국의 부모님들에게 “니들이 먼저 사람답게들 좀 사세요”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뭐 거창하게 “수신제가 연후에 치국 평천하” 들먹이지 않아도, 내가 먼저 본을 보여야 남에게도 떳떳한 거 아닌가. 하물며 자식들에게야 두말하면 이빨에 땀날 일이다.
이래 저래 돌아 왔지만, 결국 이번 일은 미국을 왕대장으로 모시는 따까리 일병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극단적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호랑이 잡을람 호랑이 굴로 가야지”라는 말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면, 미국넘들이 독점하고 있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철저히 해부하고 이들을 뛰어 넘기 위해서라도 영어를 잘 하는 건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먼저 가치관의 올바름이 정립되고 난 후의 일이라야 한다. 자주 써먹는 말이지만, 미국 와보니 제길 구걸하는 거지 행님, 언니들도 영어 나보다 겁나게 잘한다. 중요한 건 틀을 보고 꼴을 파악하는 비평적인 눈이다. 미국넘들의 분석적 사고와 학문방법은 충분히 배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이제 우리는 우리말로 충분히 자르고 꿰메고 지지고 볶을 때가 되긴 했다.
암튼 각설하고, 이번 버지니아 공대에서 희생당한 32인과 Cho, Seung Hui는 공히 자본과 인종차별의 희생양이다. 연일 떠들어대는 매스컴의 언론플레이처럼 결코 이 문제가 한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길 바라는 맘에 두서없이 글을 써본다.
인종, 성, 정치, 사회, 경제적 계급, 종교, 나이 등 모든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발목을 부여잡거나 태클을 걸기도 하겄지만, 사람답게 사는 건 일단은 서로 맘 주고받고 따뜻한 정을 나누고자 하는 의지가 90%이상인 건 확실하다. 고로 우리 모두 환경 탓 하지 말고 맘 단단히 먹고 살아야겄다. 누구 날 아는 사람들은 이럴지 모르지…
조승희 - 살인자? 아니 그도 피해자!!
이 글은 조승희 사건이 일어난 직후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필자가 본인의 경험지평을 통해 미국 이민 사회의 아픔과 한계를 짚어본 것입니다. 요즘 다시 조승희의 이름이 간간이 거론되는걸 보는데, 여전히 이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만 환원시키는 것 같아, 일년 전에 적었던 글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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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들었다 놨다.” 미국을...
하루 종일 모든 뉴스 채널들은 버지니아 공대 총살극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평범한 얼굴을한 "조승희"라는 이름을 가진 가엾은 한국 이민 1.5세 녀석은 이제 어떤 한국사람보다도 악명높은 유명인사가 되부렀다. 그리고 이 사건은 잠정적으로 여자친구와의 감정이 얽힌 치정극으로 결론이 난 듯 하다. 여자친구라… 그것도 제대로 사귀지도 않았던 백인 여자애와의 감정싸움이 50명이 넘는 사상자를 발생시킨 주범이란 말이지…
그리고 보도에 의하면, 그 녀석은 어느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한 외톨이였다고 한다. 외톨이… 즉, 아무도 그 녀석에게 정신적, 물리적 위협을 가하지도 않았고, 그럴 기회도 그 녀석은 주지 않았다는 말이지… 그냥 혼자 잘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사귀지도 않았던 여자를 스토킹, 그래 스토킹… 이전에도 여러 여자들을 스토킹 했다고 그러잖아… 그러니 이일도 스토킹 비스무리 한거 하다 사귀어 보지도 못하고 제 분에 못이겨 이런 잔인한 짓을 너무도 말짱하고 차분한 정신으로 쏴질러 버리고 말았단 말이지…ㅋㅋ
암튼 이런 식으로 여론을 몰아가는 언론플레이로 결국은 미국 년놈들은 이 일에 절대! 어떤 책임도 없다는 말을 하고들 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모방범죄, 혹은 자폐적 성향을 지닌 어떤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려고들 한다.
하지만, 내 눈엔 이 문제는 단순한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 일은 한편으로는 미국 이민에 대한 허황된 동경을 품고 무작정 건너오는 한국 사회에 대한 경종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와 평화, 민주주의와 인권”의 수호자로서 전 세계의 안보를 지 혼자 책임지고 있다는 미국 사회가 안고있는 구조적 불평등과 차별을 폭로하는 계시적 사건이다.
먼저 이민사회의 허와 실을 잠시 들여다보자.
적어도 내 눈에 비친 미국 이민사회는 뭔가 모르게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비 정상적인 기분이 들게 하는, 과히 유쾌하지 않은 사회다. 물론 난 여기서 사는 사람들을 일반화하거나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싸잡아서 재단하고 자르기엔 난 이들을 그렇게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이민사회를 접할 수 있었던 통로는 크게 세가지다. 미주 한인 교회, 두어달 아르바이트 했던 일식집, 그리고 유학생 가족들이 거주하는 학교 기숙사가 그곳이다. 암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곳 저곳에서 만난 이민자들의 삶의 질이 생각보다 낮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교육수준이나, 소득 수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삶의 가치와 질을 다양하게 즐겼던 사람들이었을 테지만, 전문직을 가진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한인들이 학력고하를 막론하고 세탁소나 일식집, 혹은 그와 유사한 식당이나 유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한국에서부터 이어진 경제적 빈부격차는 이곳에서도 여전히 이어지는게 대부분이다. 넉넉한 여윳돈을 가지고 온 사람들은 오자마자 좋은 조건의 집을 아예 사거나 렌트하고, 차를 사는 건 기본이거니와, 그 자금으로 약간의 노하우만 전수받은 후 직접 오너로서 가게를 운영할 수 있을테고, 한국에서도 프로 박테리아적 빈곤의 늪을 허덕이다 찬란한 아메리카 드림을 품고 온 사람들은 세탁소 종업원, 쓰시집 서버 혹은 주방보조, 혹 손재주가 있는 아줌마들은 네일가게 종업원으로 취직해서 고된 노동을 통해 생계를 꾸려가야 하니까. 물론 어쩌면 이런 생계형 이민자들의 경우는 한국보다 나은 삶을 산다고 느낄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어지간한 식당에서 주 5일 맞벌이하면, 한달 4000달러 정도는 벌 수 있으니까.
여하튼,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생계형이든 수익형이든 이민자들의 삶이 고되고 여유가 없기는 거의 매 일반인 것 같다. 세탁소 일 같은 경우는 새벽같이 일터로 나가서 밤이 되서야 들어오고, 식당 서버들도 출근 시간은 비교적 여유가 있다지만, 퇴근하고 들어오면 자정을 넘기기가 예사니, 이들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그야말로 “니 맘대로 크세요”나 다름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겄다. 거기다 한국 부모들이 갖고 있는 교육열은 그야말로 세계 챔피언 세 번 먹고도 남을 수준이니, 아이들이 받는 압박은 가히 메가톤급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지 않을라나…
결국 부모들과 아이들은 동상이몽을 꾸고 있다고 해야할 듯 싶다. 부모 입장에서는 몸 부서져라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아이들 학비대고 뒷바라지 하는 낙으로 하루 하루의 고된 노동을 이겨내는 것이고, 반면 아이들은 부모들의 보상심리를 채워야 하는 학업에 대한 중압감과 따뜻한 가정에서 부모들의 따스한 배려와 관심, 애정을 꿈꾸는 이중적 모순을 안고 살아가야 하니 말이다.
이번 일의 당사자인 조승희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세탁업을 하시는 아버지와 학교 구내식당에 일을 하시는 어머니… 이웃들의 증언으로는 조승희의 아버지는 조용하고 성실하시며, 눈 오는 날 이웃 차 위의 눈까지 치워주시는 따뜻한 가장이셨다. 그리고 성격적 결함을 가진 아들이 염려되어 학교의 친구들에게까지 잘 보살펴 달라고 당부한 걸 보면, 이들의 자식사랑도 여느 부모 못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환경이다. 위에서도 간단히 언급했듯이 미주 한인들의 성실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성실함은 흑백 양종이 대세를 장악하고 있는 미국에서 살아남고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최선이자 결정적 무기이다.
그러나 부모들의 바램과 현실은 다른 법. 8살에 이민 온 조승희는 한창 관심과 애정을 받아야 할 시기에 누나와 둘이서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야 했을 것이다. 누나 또한 본인의 학업과 생소한 환경에서 받는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웠을 리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각자의 영역이 분명해짐에 따라 이 아이의 자폐적 기질은 점점 더 자신을 안으로 감추고 억압하게 되었을 것이고, 부모의 품에서 재롱을 떨어야 할 나이에 고독을 친구로 삼게 된 어린 조군의 가장 큰 적은 당연히 가난이 되었을 것이다.
어린 그가 다양한 구조적 불평등 중 하나인 경제적 불평등에 자신의 상황을 투사한 건 물론 부모의 부재다. 어쩔 수 없이 맞벌이를 해야 하는 이민사회의 현실 속에서 어린 몸뚱아리를 한없이 움츠리게 만든 사나운 짐승은 바로 돈이었을 것이며, 그런 피해의식은 가진자들에 대한 적개심의 씨앗을 한 뼘만한 가슴에 심고 키우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폐적 기질을 더 부추긴 건 분명 미국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인종차별 이었을 것이다. “성차별, 인종차별, 계급차별, 장애인차별, 나이차별, 그리고 종교차별” 등 갖가지 차별이란 차별은 다 있는 나라가 미국이고 보면 새삼스러운 건 아니지만,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와 인권”을 사수하기 위해선 침략전쟁까지도 마다 않는 세계의 골목대장 미국에, 본인들이 그토록 자부하는 그 가치들이 공공연하게 묵사발되고 있다는 건 아이러니 중에 아이러니자, 빤쓰까지 까놓고 거리를 활보하는 치부 중에 치부다.
물론 이런 종류의 억압은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어느 나라에나 있다. 우리나라도 제 3세계의 근로자들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마 미국넘들보다 더하믄 더했지 덜하진 않을거다.
암튼 요는 위의 다양한 차별들 중 가장 그 정도가 심하고, 사회적 영향력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인종차별이란 것이다. 물론 이것도 피해 당사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상황이 엇갈리기는 하고, 차별이란 것이 항상 복합적이기 때문에 단순화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예를 들어볼까. 나는 올해 만 33(!--^)세인 건장(할라나^^;)한 키 180에 몸무게 대략 72키로 정도 나가며, 이성을 더 좋아라 하는 기독교인인 대한민국 남성이다. 위의 조건들 중 “남자, 33세, 신체건강한 이성애자, 기독교인”은 절대 약자의 요소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사람!이라는 이유와 당연한 결과로 언어(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는 점은 나를 미국 시민권, 혹 영주권을 가진 흑인 무신론자 할머니 보다도 낮은 환경에 처하게 만든다.
F1 비자를 소지한 유학생이라는 졸라 허접하고 재수없는 딱지를 하나 달고 있다 보니,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라도 그 잘난 소셜 넘버(Social Security Number, 주민번호 비스무레한--;)가 없는 관계로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가 없다. 혹 알바를 하더라도 쓰시집이나 세탁소에서 알바를 해야 하는데, 차가 없으니 남들 차를 얻어 타고 갈 수 있는 곳이라야 하고, 그것도 업주가 한국 사람이 아니라면 거의 취업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혹 재수가 좋아서 학교 안에서 일자리를 얻는 경우도 있는데, 나처럼 설렁설렁 치열함이 없는 놈에겐 돌아올 일자리도 없는 법이다.
또 하나, 어찌 됐건 미국에서 학업을 계속 하려면 9학점 이상을 들어야 하는데, 10학점을 듣더라도 학부 과목을 하나 들어서 대학원 학점이 6학점인 경우에는 짐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런 엿 같은 경우가 어디 있냐고요...? 바로 미국에 있다. 내가 아무리 신체 건강한 남자청년에 기독교인인들 어디다가 하소연을 하며, 어디서 모가지에 힘을 주겠는가. 뭐 물론 난 모가지에 힘 졸라 주고 다니면서 양넘들 압박하는 취미가 있긴 하다.
또 한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지난 주에 같이 수업을 듣는 한국학생이 수업을 빼먹었던 일이 있었다. 뭐 사실 난 빠졌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 주 수업에 밝혀진 뜨악한 사실. 글쎄 운전 중에 불심 검문을 받았는데, 차 보험 카드가 없다고 체포하고 수갑을 채워서 구치소에 세 시간 동안 수감되는 황당한 경우를 당했다는 것이다. 교통사고를 낸 것도 아니고, 순찰 경찰관 뒷통수를 갈긴 것도 아닌데, 겨우 운전면허도 아닌 차 보험카드가 없다는 이유로 수갑 채워 깜빵행이라니… 미국 아짐씨들도 어이없어 하는 황당한 경우. 이게 미국이다.
예전엔 DWB (driving-while-black)이라는 범죄가 있었단다. 흑인 운전자에 대한 차별적 범죄. 하지만 요즘은 이걸 DWNW (driving-while-not-white), 즉 운전중인 유색인종들에 대한 차별적이고 무조건적 범죄로 확대해야 할 듯 보인다. 암튼 이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어린 사내녀석이 겪었을 고통을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어린넘들일수록 본인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거니와, 영어에 영자도 몰랐을 초딩 1년 시절에 이민을 왔으니, 언어를 습득하고 적응하기까지 그가 겪었을 고통은 내가 겪은 이런 무력감에 비해 훨씬 그 정도가 심했을 것이다. 더구나 덩치 좋은 백인 남자애새끼들이 힘이 좀 좋아야지. 또 여자애들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한국 혹은 아시아계 애들을 남자로 취급도 하지 않았을테고, 그런 환경에서 쌓여진 스트레스는 그의 울타리를 더욱 견고하고 높게 쌓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억압된 욕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변형되고 전이된 형태로 꿈으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응축된 억압이 기형적 형태로 변형되게 되면, 만족시킬 적절한 타이밍을 통해 저런 폭력적 성향으로 분출되기도 하는 것이다.
근본적인 치료는 물론 가정에서 이루어졌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힘과 영어에 대한 사대주의적 동경을 가진 부모의 환상은, 돈을 벌기 위해 모든 걸 바치는 자신들의 여유 없는 생활은 모두 자식들을 뒷바라지를 통해 그들이 성취할 기득권으로 보상받을 것이라는 망상으로 정당화 되어질 것이며, 자신들이 쏟지 못하는 애정과 관심은 돈과 좋은 교육환경이 충분히 메꿔줄 것으로 착각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몸으로 보여주는 교육보다 더 좋은 교육이 어디 있던가. “나는 못하지만 너는 이렇게 해라”라는 말은 아이들에겐 폭력이나 다름없는 괴변이다. 더구나 그 가치가 기득권을 선점할 사회적 성공과 출세에 맞춰져 있는 바에야 어찌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길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나는 한국의 부모님들에게 “니들이 먼저 사람답게들 좀 사세요”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뭐 거창하게 “수신제가 연후에 치국 평천하” 들먹이지 않아도, 내가 먼저 본을 보여야 남에게도 떳떳한 거 아닌가. 하물며 자식들에게야 두말하면 이빨에 땀날 일이다.
이래 저래 돌아 왔지만, 결국 이번 일은 미국을 왕대장으로 모시는 따까리 일병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극단적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호랑이 잡을람 호랑이 굴로 가야지”라는 말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면, 미국넘들이 독점하고 있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철저히 해부하고 이들을 뛰어 넘기 위해서라도 영어를 잘 하는 건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먼저 가치관의 올바름이 정립되고 난 후의 일이라야 한다. 자주 써먹는 말이지만, 미국 와보니 제길 구걸하는 거지 행님, 언니들도 영어 나보다 겁나게 잘한다. 중요한 건 틀을 보고 꼴을 파악하는 비평적인 눈이다. 미국넘들의 분석적 사고와 학문방법은 충분히 배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이제 우리는 우리말로 충분히 자르고 꿰메고 지지고 볶을 때가 되긴 했다.
암튼 각설하고, 이번 버지니아 공대에서 희생당한 32인과 Cho, Seung Hui는 공히 자본과 인종차별의 희생양이다. 연일 떠들어대는 매스컴의 언론플레이처럼 결코 이 문제가 한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길 바라는 맘에 두서없이 글을 써본다.
인종, 성, 정치, 사회, 경제적 계급, 종교, 나이 등 모든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발목을 부여잡거나 태클을 걸기도 하겄지만, 사람답게 사는 건 일단은 서로 맘 주고받고 따뜻한 정을 나누고자 하는 의지가 90%이상인 건 확실하다. 고로 우리 모두 환경 탓 하지 말고 맘 단단히 먹고 살아야겄다. 누구 날 아는 사람들은 이럴지 모르지…
“니부터 사람답게 좀 살아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