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와 피카소의 ‘게르니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그림은 실제 거래는 되지 않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을 갖고 다녔던 ‘모나리자’를 아무 조건 없이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후원한 프랑수아 1세에게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 작품을 준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덕분에 모나리자는 프랑스에 남았고, 지금은 루브르 미술관의 보물이 되어 있습니다.
또한,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민주화한 조국에 그림을 돌려주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스페인 국민에게 영구 귀속되어 지금은 에스파냐 마드리드 ‘소피아 왕비 미술관’ 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럼, 실제 거래가 되는 작품들 중 가장 비싼 그림은 무엇일까요?
빈센트 반 고흐의 ‘Dr.Gachet의 초상화’ 입니다. 1990년 뉴욕 경매시장에서 한화기준으로 1천 80억원 정도에 거래되었습니다.
그외의 추정가가 1000억원대 그림에는 가나의 혼인잔치,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 고야의 5월 2일, 램브란트의 야경,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등이 있습니다.
모나리자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인 레오나르도는 화가, 조각가, 건축가, 발명가로서 해부학, 식물학, 토목공학, 물리학 등 수많은 분야에서 재능을 나타낸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후원자였던 이탈리아 피렌체의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죽자, 레오나르도를 좋아했고 존경했던 프랑수와 1세는 레오나르도를 프랑스로 초청하여 조건 없는 후원을 하였다.
레오나르도는 평생을 갖고 다녔던 이 그림 모나리자를 아무 조건 없이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후원한 프랑수아 1세에게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 작품을 준다’는 유언을 남겼다. 덕분에 모나리자는 프랑스에 남았고, 지금은 루브르 미술관의 보물이 되어 있다.
레오나르도는 그림에 미소를 그린 최초의 화가라고 한다. 이 그림에도 화면 가득 상반신을 보이는 모나리자의 그 입가에 띄운 엷은 미소, 저 신비의 미소가 사람들로 하여금 수수께끼 같은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게르니카(1937)
에스파냐 마드리드 소피아 왕비미술센터 349×775cm
게르니카는 에스파냐 바스크지방의 작은 도시로, 1937년 에스파냐내란 중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의 무차별 폭격에 의하여 폐허가 되었다. 마침 그 해에 열리기로 예정된 파리만국박람회의 에스파냐관(館) 벽화제작을 의뢰받고 있던 피카소는 이 조국의 비보에 접하자, 한 달 반만에 대벽화를 완성, 게르니카 라고 이름 붙였다.
이 작품은 파리만국박람회를 비롯하여 구미 여러 나라에서 순회전을 가졌다. 그러나 에스파냐가 프랑코 체제가 되자, 공화파 지지자였던 피카소는 그림반입을 거부하고, 1939년 에스파냐의 민주주의와 자유의 회복 후 반드시 프라도에 전시할 것 등의 조건으로 이 작품을 뉴욕 근대미술관에 무기한 대여형식으로 빌려주었다. 프랑코의 독재가 계속되는 한 조국과 화해할 수 없다고 한 피카소의 신념으로 인해 1981년에야 에스파냐에 반환되어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었다가, 일부 정치인과 예술가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보관상의 문제로 1992년 소피아왕비 미술센터로 옮겼다.
비극성과 상징성에 찬 복잡한 구성 가운데 전쟁의 무서움, 민중의 분노와 슬픔을 격정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상처입은 말, 버티고 선 소는 피카소가 즐겨 다루는 투우의 테마를 연상케 하며, 흰색· 검정색· 황토색으로 압축한 단색화에 가까운 배색이 처절한 비극성을 높이고 있다. 극적인 구도와 흑백의 교묘하고 치밀한 대비효과에 의해 죽음의 테마를 응결시켜 20세기의 기념비적 회화로 평가된다.
닥터 가세(Dr.Gachet)의 초상화
빈센트 반 고흐(1853 ~ 1890)가 화가였던 것은 37년이라는 짧은 생애 가운데 겨우 10년에 불과하다.
네델란트 브라반트 주의 그루트준데르트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화상과 책방 지배인과 전도사가 되려 했으나 모두 실패한 후 1880년 무렵에야 화가가 될 결심을 했다. 그것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흐다운 다채로운 작품들은 파리로 옮긴 이후인 만년의 이삼년 동안인 1888년 아를르에서다.
저 불행한 ‘귀 자른 사건’ 이후 그는 거의 1년동안 생레미의 병원에서 지친 신경을 달랬다.
그리고 1890년 5월, 다시 파리와 가까운 일드 프랑스의 오베르로 옮겨 의사 가세 박사의 집 근처 여인숙에서 살았는데 광기의 악마는 여전히 그에게서 떠나지 않아 그해 7월 새떼가 나는 오베르의 언덕 위에서 권총 자살을 시도했고, 며칠후 여인숙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은 무엇일까요?
전문가들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와 피카소의 ‘게르니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그림은 실제 거래는 되지 않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을 갖고 다녔던 ‘모나리자’를 아무 조건 없이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후원한 프랑수아 1세에게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 작품을 준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덕분에 모나리자는 프랑스에 남았고, 지금은 루브르 미술관의 보물이 되어 있습니다.
또한,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민주화한 조국에 그림을 돌려주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스페인 국민에게 영구 귀속되어 지금은 에스파냐 마드리드 ‘소피아 왕비 미술관’ 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럼, 실제 거래가 되는 작품들 중 가장 비싼 그림은 무엇일까요?
빈센트 반 고흐의 ‘Dr.Gachet의 초상화’ 입니다. 1990년 뉴욕 경매시장에서 한화기준으로 1천 80억원 정도에 거래되었습니다.
그외의 추정가가 1000억원대 그림에는 가나의 혼인잔치,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 고야의 5월 2일, 램브란트의 야경,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등이 있습니다.
모나리자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인 레오나르도는 화가, 조각가, 건축가, 발명가로서 해부학, 식물학, 토목공학, 물리학 등 수많은 분야에서 재능을 나타낸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후원자였던 이탈리아 피렌체의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죽자, 레오나르도를 좋아했고 존경했던 프랑수와 1세는 레오나르도를 프랑스로 초청하여 조건 없는 후원을 하였다.
레오나르도는 평생을 갖고 다녔던 이 그림 모나리자를 아무 조건 없이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후원한 프랑수아 1세에게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 작품을 준다’는 유언을 남겼다. 덕분에 모나리자는 프랑스에 남았고, 지금은 루브르 미술관의 보물이 되어 있다.
레오나르도는 그림에 미소를 그린 최초의 화가라고 한다. 이 그림에도 화면 가득 상반신을 보이는 모나리자의 그 입가에 띄운 엷은 미소, 저 신비의 미소가 사람들로 하여금 수수께끼 같은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게르니카(1937)
에스파냐 마드리드 소피아 왕비미술센터 349×775cm
게르니카는 에스파냐 바스크지방의 작은 도시로, 1937년 에스파냐내란 중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의 무차별 폭격에 의하여 폐허가 되었다. 마침 그 해에 열리기로 예정된 파리만국박람회의 에스파냐관(館) 벽화제작을 의뢰받고 있던 피카소는 이 조국의 비보에 접하자, 한 달 반만에 대벽화를 완성, 게르니카 라고 이름 붙였다.
이 작품은 파리만국박람회를 비롯하여 구미 여러 나라에서 순회전을 가졌다. 그러나 에스파냐가 프랑코 체제가 되자, 공화파 지지자였던 피카소는 그림반입을 거부하고, 1939년 에스파냐의 민주주의와 자유의 회복 후 반드시 프라도에 전시할 것 등의 조건으로 이 작품을 뉴욕 근대미술관에 무기한 대여형식으로 빌려주었다. 프랑코의 독재가 계속되는 한 조국과 화해할 수 없다고 한 피카소의 신념으로 인해 1981년에야 에스파냐에 반환되어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었다가, 일부 정치인과 예술가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보관상의 문제로 1992년 소피아왕비 미술센터로 옮겼다.
비극성과 상징성에 찬 복잡한 구성 가운데 전쟁의 무서움, 민중의 분노와 슬픔을 격정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상처입은 말, 버티고 선 소는 피카소가 즐겨 다루는 투우의 테마를 연상케 하며, 흰색· 검정색· 황토색으로 압축한 단색화에 가까운 배색이 처절한 비극성을 높이고 있다. 극적인 구도와 흑백의 교묘하고 치밀한 대비효과에 의해 죽음의 테마를 응결시켜 20세기의 기념비적 회화로 평가된다.
닥터 가세(Dr.Gachet)의 초상화
빈센트 반 고흐(1853 ~ 1890)가 화가였던 것은 37년이라는 짧은 생애 가운데 겨우 10년에 불과하다.
네델란트 브라반트 주의 그루트준데르트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화상과 책방 지배인과 전도사가 되려 했으나 모두 실패한 후 1880년 무렵에야 화가가 될 결심을 했다. 그것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흐다운 다채로운 작품들은 파리로 옮긴 이후인 만년의 이삼년 동안인 1888년 아를르에서다.
저 불행한 ‘귀 자른 사건’ 이후 그는 거의 1년동안 생레미의 병원에서 지친 신경을 달랬다.
그리고 1890년 5월, 다시 파리와 가까운 일드 프랑스의 오베르로 옮겨 의사 가세 박사의 집 근처 여인숙에서 살았는데 광기의 악마는 여전히 그에게서 떠나지 않아 그해 7월 새떼가 나는 오베르의 언덕 위에서 권총 자살을 시도했고, 며칠후 여인숙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