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속 이야기-레오나르도 다 빈치-

sunny2003.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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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속 이야기-레오나르도 다 빈치-
명화속 이야기-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든 학문 분야에서는 하나의 운동에 대한 반 운동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야수파의 색채 폭발에 대해 입체파는 색채 파기와 형태의 우위로서 답례했다. 피카소는 야수파의 회화에 대해 알고 있었다. 피카소가 당시 머물고 있던 1905년경의 파리에서 그것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피카소는 그들의 요란한 색채를 억제했다. 1901년 이후 계속하여 절제된 청색 톤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어둡지도 밝지도 않는 야수파 방식의 그림들은 1907년 여름 에 대한 작업이 끝난 뒤에 비로소 탄생하게 된다. 피카소는 에서 대상을 원통형, 구형, 원뿔형의 기하 형태로 만들었고, 그럼으로써 입체주의보다 앞서서 이미 그러한 양식의 가장 중요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피카소는 몇 개월 동안 이 작품에 몰두하였다. 그는 1907년 7월에 완성한 이 그림을 가까운 친구들에게 공개하기 전에, 800점 이상의 스케치와 서로 분명하게 구분되는 다른 판들을 제작했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대단하고 집요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피카소는 속에 바르셀로나에 있는 유명한 홍등가의 모습을 묘사했다. 1900년 경에 피카소는 그 근처에 하나의 아틀리에를 갖고 있었다. 최초 제목으로 피카소는 '아비뇽의 유곽'이라는 제목을 염두에 두었었는데 이것은 품위와는 거리가 멀었던 관계로 '아비뇽의 아가씨들' 이란 제목으로 명몇되었는데 이것이 피카소를 불쾌하게 했었다고 한다. 1916까지 거의 10년간 피카소는 이라는 비평을 보류했다.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도 미완성의 작품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을 처음 전체적으로 구상한 것은 1907년 3월이었다. 그림에는 일곱 명의 인물, 즉 다섯명의 나체 여인들과 옷을 입고 있는 두 명의 남자가 왼쪽과 중앙에 위치한다. 피카소는 두 남자들 중에서 한 사람은 뱃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대학생을 그리려 했다고 한다. 그 대학생은 손에 두개골을 들고 있다. 분명 피카소는 이 그림에 하나의 우의적인 의미를 부가하려고 했다. 같은 해 6월 두 번째 초안에서는 그림의 구상이 완전히 결정되었다. 여기서는 두 명의 남자와 유곽이 누락되었다. 왼쪽에 있는 여인은 완전히 새롭게 구상되었고, 피카소는 그 옆의 여인을 앉아 있는 자세에서 똑바로 선 자세로 바꾸어, 중앙에 있는 여인과 매우 긴밀하게 결합시켰다. 이 여인과 오른쪽에 있는 두 여인들은 첫 번째 구상에서와 거의 비슷하다. 전경의 중앙에 있는 과일 정물은 그대로 유지했다. 왼쪽에 있는 여인은 갈색 커튼을 옆으로 밀치고 그림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녀는 오른쪽에 있는 똑같이 커튼을 열어 젖히는 자세의 여인과 연결된다. 커텐은 가운데 서 있는 두 명의 다른 여인들의 배경이 된다. 그 여인들은 하나의 커다란 움직임과 이목구비를 통해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오른쪽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형상은 등을 보이고 있지만 그녀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다. 왼쪽의 갈색 커튼이 약간의 양감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앉아 있는 여인의 위에 있는 커튼은 유연성이 없이 각지게 꺾여 있다. 여인들의 신체 윤곽과 내 부 형태 역시 각지게 꺾여 있는데, 그 속에서는 자연스러움과는 달리 전경과 측면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이것은 입체주의의 기본 원칙이다. 게다가 피카소는 신체 내부에도 작은 추상적인 칸들을 만드는데, 특히 오른쪽에 서 있는 여인의 가슴 부분과 겨드랑이 부분에서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있다. ============================================================================ 마지막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시회가 열린 1886년 고흐는 파리의 몽마르트르에서 작은 화랑을 운영하고 있던 동생 테오를 느닷없이 방문했다. 이때부터 2년동안 이 예술의 도시에 머물었는데 그곳은 그에게 촉매와 같은 영향을 미쳤다. 이 무렵 초기의 어두운 색조와 사실주의적인 요소는 사라졌고, 작품이 급격하게 밝아지기 시작한다. 반 고흐는 인상주의나 점묘주의 화가들처럼 그리기 시작했다. 후에 남 프랑스의 아를에서 완성하게 되는 그의 표현이 풍부하고 매우 독특한 양식의 그림풍를 그는 이곳에서 발견했다. 물론 어려운 재정상황 탓도 있었지만 고흐의 소원은 아를에서 화가 공동체를 이루어 작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그는 1888년 5월에 아를에 있는 '노란집'에 네 개의 방을 빌렸고, 6월 말에 폴 고갱을 초대했다. 고갱은 고흐의 계속되는 초대에 마지못해 그곳으로 왔다. 그러나 고갱은 고흐를 예술적으로는 높이 평가했지만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는 괴팍한 녀석'이라고 여겼다. 고흐는 1888년 9월에 노란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는 자신과 고갱을 위해 각각 방 하나씩을 마련해 두었던 그 노란 집을 직접 그리기로 하고 고갱이 도착하기 일주일 전에 자신의 침실을 화폭에 담았다. 그림을 그린 동기는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이번에 그리는 내 침실은 아주 단순해. 이 그림에서는 단지 색깔만이 그것을 만들어 내지. 나는 단순화를 통해 그 사물들이 보다 큰 표현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서, 이 그 림을 보면서 「휴식」이나 「완전한 수면」을 떠오르게 할 거야. 간단히 말하면, 누구 나 이 그림을 보면 머리를,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상상력을 쉴 수 있게 만드는 거 지." 고갱의 방문에 대해 긴장하고 기대하던 시간이 지난 얼마 후, 고흐는 휴식과 상상력의 안정과 수면만을 원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그의 바램이 그림 속에도 표현되어 있다. 방에 가구들은 호화스럽지 않다. 침대, 책상, 두 개의 의자, 거울, 벽에 걸린 그림들, 그 어떤 것도 자극적이지 않다. 방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침대를 아주 강하게, 의자들을 너무 작게 보이게 만드는 일그러진 시각이 표현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게다가 친구 블로크와 밀리에의 초상화가 위협적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테오에게 보내던 편지에는 이 그림을 아늑하고 친근한 것으로 묘사했다면, 다음날 그림이 완성된 후에 고갱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마치 스타카토처럼 더듬거리듯 묘사한다. 밤이 지나면서 색들은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이다. 1888년 10월 23일 고갱이 아를에 도착한 후 몇 주 동안은 아주 순조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 해 12월 23일에 고흐는 면도칼을 들고 고갱에게 달려들고, 자신의 오른쪽 귀의 아랫부분을 자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고흐는 환각 증세 때문에 1889년 2월 병원으로 옮겨지지만 5월에 퇴원해 동생을 방문한다. 그를 담당했던 의사는 1890년 6월 그의 병이 치유 되었다는 진단을 내렸지만 몇 주 후 고흐는 자살한다. 고흐의 그림들은 고흐 생전 당시에는 거의 팔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상자에 넣어 동생 테오에게 보내고 테오는 형의 모든 유품을 넘겨받게 된다. 하지만 1891년 테오마저 세상을 떠난다. 테오의 아내는 재혼을 했고 화가이자 비평가인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은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서 고흐의 작품을 공개하여 고흐의 이름을 널리 알린다. 반 고흐는 평생 동안 단 한 점의 작품만을 적당한 값에 팔았다고 한다. 그러나 1987년 연작 가운데 한 점은 미술 시장에서 최고의 기록을 갱신하며 4, 900만 파운드에 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