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그림들에 쏟아진 차가운 비판 때문에 깊은 충격을 받아, 세잔은 1877년 이후에는 더 이상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시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료 화가들과의 친분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다. 10년 후 느슨해진 화가 공동체가 와해되기 시작하여 인상주의의 첫 번째 시기가 막을 내렸다. 화가들은 주제는 그대로 유지한 채 새로운 예술적 표현 형식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들은 여러 방향으로 분리되어 새로운 흐름을 형성했다. 쇠라를 비롯한 점묘주의 화가들은 회화 양식의 학문화를 통해 인상주의를 하나의 독단적인 방향으로 이끌었으나, 곧 그들의 '치명적인 단조로움" 때문에 심한 비판에 부딪혀야 했다. 이와 대립되는 길을 걸었던 화가는 세잔과 모네였다. 두 사람 모두 회화의 미래를 제시하기는 했으나, 인상주의를 단호하게 해결한 사람은 세잔이라고 할 수 있다. 모네는 계속해서 빛의 영향을 관찰하는 일에 몰두했고, 색채를 분리하고 형태를 해체시켜 대상을 표현했다. 그러나 세잔은 완전히 달랐다. 그의 노력은 형태를 견고하게 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의 주제는 계절의 주기적 변화에 내맡겨진 변질되기 쉬운 식물의 형상이 아니라, 프로방스를 둘러싸고 있는 산, 바로 생트 빅투아르였다. 모네는 현실을 「순간적인 것」으로 파악했던 반면에 세잔은「지속」의 개념으로 해석했다.
세잔은 자신의 고향인 남 프랑스에 자주 머물렀는데, 1880년대 초부터는 그 횟수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세잔이 생트 빅투아르 산에 대해 집중적으로 열중했던 시기는 크게 둘로 나뉜다. 첫 번째 시기는 1885년부터 1890년까지이고, 두 번째 시기는 1902년 엑상의 북쪽에 위치한 인적이 드문 지역에 그의 아틀리에를 지었을 때부터이다. 그곳에서는 생트 빅투아르 산이 아주 잘 보였다. 위의 그림은 첫 번째 시기의 작품으로 관찰자의 시선이 아르크의 골짜기를 거쳐 배경에 자리잡은 산에 이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밭과 작은 농가들이 기하형태로 정렬된 평야는 늦여름의 고요하고 느긋한 중후함을 발산한다. 풍경과 현저한 대립을 이루는 전경의 소나무를 통해 이제 그들의 전통 「유럽적인」시각의 틀이 상실됐음을 알 수 있다.오른쪽 나무를 그림 속에 끌어들이지 않고 극히 일부만 보임으로써, 그리고 다양한 모양으로 뻗어 있는 나뭇가지들을 통해 긴장을 제시한다. 세잔은 이에 대한 전형을 일본의 판화에서 얻었다.
세잔이 자신의 아틀리에를 지으면서 생트 빅투아르 산을 아틀리에에서 직접 그릴 수 있었고, 나무들과 바위도 그림 속에 도입하지 않게 되었고 대조적인 배치 또한 하지 않게 되었다. 1902년의 에서는 수평으로 세 개의 층이 나 있음을 볼 수 잇다. 산이라는 소재는 직접적으로 포착되었다. 그림 구조는 본질적인 엄격함을 지니게 되었고 수없이 겹칠되어 있다. 자기도 모르게 초원과 집, 산, 하늘로 이름 붙여지는 색채의 얼룩들이 하나의 양탄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생트 빅투아르 후기 그림들의 경우 색채가 형태로서 파악된다는 것이며, 이 때 「단지 인접해 있는 형태들을 통해서만 형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색과 형태가 한곳에서 동시에 발견된다. 세잔은「형태의 윤곽」을 통해 황각색의 얼룩을 입방체로 만들고 그림 구조에서 얼룩을 입방체로 만든다. 이와 같은 그의 후기 작품들을 통해서 야수파와 큐비즘으로 대표되는 20세기 초의 회화 변혁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명화속 이야기
자신의 그림들에 쏟아진 차가운 비판 때문에 깊은 충격을 받아, 세잔은 1877년 이후에는 더 이상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시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료 화가들과의 친분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다. 10년 후 느슨해진 화가 공동체가 와해되기 시작하여 인상주의의 첫 번째 시기가 막을 내렸다. 화가들은 주제는 그대로 유지한 채 새로운 예술적 표현 형식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들은 여러 방향으로 분리되어 새로운 흐름을 형성했다. 쇠라를 비롯한 점묘주의 화가들은 회화 양식의 학문화를 통해 인상주의를 하나의 독단적인 방향으로 이끌었으나, 곧 그들의 '치명적인 단조로움" 때문에 심한 비판에 부딪혀야 했다. 이와 대립되는 길을 걸었던 화가는 세잔과 모네였다. 두 사람 모두 회화의 미래를 제시하기는 했으나, 인상주의를 단호하게 해결한 사람은 세잔이라고 할 수 있다. 모네는 계속해서 빛의 영향을 관찰하는 일에 몰두했고, 색채를 분리하고 형태를 해체시켜 대상을 표현했다. 그러나 세잔은 완전히 달랐다. 그의 노력은 형태를 견고하게 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의 주제는 계절의 주기적 변화에 내맡겨진 변질되기 쉬운 식물의 형상이 아니라, 프로방스를 둘러싸고 있는 산, 바로 생트 빅투아르였다. 모네는 현실을 「순간적인 것」으로 파악했던 반면에 세잔은「지속」의 개념으로 해석했다. 세잔은 자신의 고향인 남 프랑스에 자주 머물렀는데, 1880년대 초부터는 그 횟수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세잔이 생트 빅투아르 산에 대해 집중적으로 열중했던 시기는 크게 둘로 나뉜다. 첫 번째 시기는 1885년부터 1890년까지이고, 두 번째 시기는 1902년 엑상의 북쪽에 위치한 인적이 드문 지역에 그의 아틀리에를 지었을 때부터이다. 그곳에서는 생트 빅투아르 산이 아주 잘 보였다. 위의 그림은 첫 번째 시기의 작품으로 관찰자의 시선이 아르크의 골짜기를 거쳐 배경에 자리잡은 산에 이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밭과 작은 농가들이 기하형태로 정렬된 평야는 늦여름의 고요하고 느긋한 중후함을 발산한다. 풍경과 현저한 대립을 이루는 전경의 소나무를 통해 이제 그들의 전통 「유럽적인」시각의 틀이 상실됐음을 알 수 있다.오른쪽 나무를 그림 속에 끌어들이지 않고 극히 일부만 보임으로써, 그리고 다양한 모양으로 뻗어 있는 나뭇가지들을 통해 긴장을 제시한다. 세잔은 이에 대한 전형을 일본의 판화에서 얻었다. 세잔이 자신의 아틀리에를 지으면서 생트 빅투아르 산을 아틀리에에서 직접 그릴 수 있었고, 나무들과 바위도 그림 속에 도입하지 않게 되었고 대조적인 배치 또한 하지 않게 되었다. 1902년의 에서는 수평으로 세 개의 층이 나 있음을 볼 수 잇다. 산이라는 소재는 직접적으로 포착되었다. 그림 구조는 본질적인 엄격함을 지니게 되었고 수없이 겹칠되어 있다. 자기도 모르게 초원과 집, 산, 하늘로 이름 붙여지는 색채의 얼룩들이 하나의 양탄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생트 빅투아르 후기 그림들의 경우 색채가 형태로서 파악된다는 것이며, 이 때 「단지 인접해 있는 형태들을 통해서만 형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색과 형태가 한곳에서 동시에 발견된다. 세잔은「형태의 윤곽」을 통해 황각색의 얼룩을 입방체로 만들고 그림 구조에서 얼룩을 입방체로 만든다. 이와 같은 그의 후기 작품들을 통해서 야수파와 큐비즘으로 대표되는 20세기 초의 회화 변혁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