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의 으뜸은 행복이다. 무릇 성공한 자가 되기보다는 행복한 자가 되고 싶다. 행복은 주관적이며 개인적이다. 그러나 모든 가치는 개인을 출발점으로 한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며 사랑할 줄 모른다면 타인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렇게 대할 것이다. 그렇다면 거지도 행복할까, 행복이 성공의 최정상에 서 있다면 거지도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늘을 나는 새들도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데, 하물며 너희들이야...... 나 자신이 예수쟁이가 아니면서도 이러한 성경구절이 떠오르는 이유는, 황당하게까지 느껴지는 너무도 담대한 예수의 단언이기 때문이다. 창고에 곡식을 잔뜩 쌓아놓지도 않았던 예수가 어찌 이런 말을 함부로 했단 말인가,
물질은 육체다. 모든 물질은 육체의 안락으로 이어지며, 그 선을 넘는 물질은 욕망의 테두리에서 비만의 몸짓으로 허우적거린다. 그러므로 육신이 세상을 떠나는 날에는 모든 물질은 거리에 버려진 쓰레기처럼 느껴질 것이다.
죽은 자의 가슴에 놓인 저금통장과 다문 입. 캄캄한 부엌을 돌아다니는 바퀴벌레의 신속함으로 그토록 많은 돈을 모았건만, 풀어진 손은 어찌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며, 총명함으로 필명을 날리던 사람은 어찌 늙어서 망령된 소리만 하다가 입을 다무는 것인가, 안타까움으로 평생을 지탱하던 집념의 결과가 혼이 쑥 빠져나간 고깃덩어리로 끝을 맺으니, 욕심 없이 보는 옆 사람의 마음마저도 심란할 수밖에 없다.
한 번의 웃음이라도 더 터뜨리고, 한 번의 손길이라도 옆으로 뻗어 다정함을 내밀어 보자. 모든 것은 살아생전에 다 이루어질 일이다. 오늘 참았다가 내일 웃겠다는 말은 공허할 뿐이다. 오늘 주지 않고 내일을 기약하는 사랑은 믿을 수 없다. 현명한 인생장사꾼은 항상 현찰거래만 한다. 웃음과 사랑에는 외상이 없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단호한 계산이었다.
한 끼니의 밥그릇에 웃는 여자를 얻은 남자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지금 노동판에 나가서 일을 한다고 해도 최소한도 세 끼니의 밥그릇은 마련할 돈을 벌 수 있다. 한 끼니로 배를 부르게 만들고 나머지 두 끼니로 잉여행복을 늘어놓는다. 그 앞에서 여자는 환하게 웃는다. 그것이 행복이다. 달러로 환산해도 그다지 많은 돈이 필요하지는 않다.
예수쟁이가 아닌 내가 또 예수의 말을 해야겠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은 물질이 아닌데, 어찌하여 물질을 표상하는 가난이란 용어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에 갖다 붙이는가, 도대체 무엇이 마음이고 무엇이 가난하단 말인가, 여기서 마음의 대가인 석가모니의 팔만대장경을 떠올려야만 한다. 마음이란......
문자에 묻힌 불교에서는 마음을 갈고 닦아서 명경지수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피안의 깨달음을 향하는 지름길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아로서 절에 흘러들어 장작을 패고 잔일이나 하던 머슴은 문맹의 눈으로 마음을 말했다. 갈고 닦을 마음조차 없도다......
항상 마음이 화두의 출발점이고, 끝이었다. 수없는 색으로 세상을 투영하여, 아메바처럼 수만 가지의 모습으로 그 형태를 바꾸는 가슴속의 괴물, 그 괴물은 욕망의 근원지인 것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경계하여 갈고 닦으며, 기어이 그 형체마저도 사라져야할 대상이었다.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않는 어린아이의 번잡스런 손발과 같은 모양이다.
그래서 옛 성인은 마음을 달래고 도닥거려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며, 행여나 오감으로 그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여, 보고, 듣고, 먹고, 입고, 냄새조차 맡는 일을 가려서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현대문명은 진리를 바꾸었다. 욕망이란 수레바퀴를 돌려라. 그것만이 생존의 법칙에 순응하는 길이며, 행복을 향하는 지름길이다. 네가 바라는 행복한 자가 되려면 목표를 세우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그 행복을 쟁취하라. 입 벌리지 않는 새끼에게 어미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
나는 밀레니엄시대에 길을 잃었다. 어쩌면 그렇게 성현의 말과 반대되는 욕망의 현실이 더욱 우월하게 보이는지 알 수가 없다. 태어나면서 자신의 그릇은 분명히 정해져 있다고 명심보감은 설파했다. 자신의 분에 넘치는 행동이나 욕심은 불행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찌 욕망의 시대에 반기를 들어 저항할 수 있단 말인가,
욕망은 욕망을 낳는다. 욕망의 고개를 넘어서니 더 높은 욕망의 고개가 보인다. 그래서 욕망의 귀신에 홀린 눈으로 욕망을 추구하며 욕망을 실현하려고 욕망을 부린다. 그것이 현대문명이 나에게 가르쳐준 인생지도였다.
나는 지쳤다. 노숙자가 밤새마신 소주병 굴러다니는 공원에 들어서서 벤치에 누웠다. 조그만 것으로 큰 것을 헤아리면 끝이 없다. 백년도 못사는 인생으로 영원의 생명을 탐하면 위태롭다. 종점을 알 수 없는 욕망의 정거장은 계속 이어진다. 창가에 스치는 주마등을 바라보는 내 콧등에 노안의 안경이 걸쳐졌다.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살아왔다는 말인가,
기회는 많았었다. 웃을 수 있는 기회, 사랑할 수 있었던 기회, 친구를 다정하게 대할 수 있는 기회, 남이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할 수 있었던 기회...... 욕망의 수레바퀴에 짓눌리지만 않았으면 그토록 많은 기회가 다 살아남았을 것이다. 어찌하여 이렇게 어리석은가, 청아한 소리를 내는 퉁소를 도끼로 사용하려는 우를 범하다니,
도끼가 퉁소자리를 넘보고, 퉁소가 도끼를 몰아내려는 으르렁거림은 아름답게 지내도 모자랄 세월을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웃기에도 모자라는 세월, 사랑만 하기에도 짧기만 한 세월...... 이렇게 나는 가난하게만 살았다. 옆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던 행복을 놓치고 말았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 복은 행복일 것이다. 갈고 닦을 마음조차 없다고 했으니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함이 있을 것이다. 아무쪼록 현대문명에 현혹되지 않는 마음으로 그 마음을 버릴지어다.
한 가지 결론을 내려야겠다. 거지도 행복할 수 있다. 거지도 성공의 정상에 우뚝 설 수가 있다. 그것이 현자의 인생이다. 즐기라 너에게 허락된 시간을......
욕망과 행복
욕망과 행복
성공의 으뜸은 행복이다. 무릇 성공한 자가 되기보다는 행복한 자가 되고 싶다. 행복은 주관적이며 개인적이다. 그러나 모든 가치는 개인을 출발점으로 한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며 사랑할 줄 모른다면 타인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렇게 대할 것이다.
그렇다면 거지도 행복할까, 행복이 성공의 최정상에 서 있다면 거지도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늘을 나는 새들도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데, 하물며 너희들이야......
나 자신이 예수쟁이가 아니면서도 이러한 성경구절이 떠오르는 이유는, 황당하게까지 느껴지는 너무도 담대한 예수의 단언이기 때문이다. 창고에 곡식을 잔뜩 쌓아놓지도 않았던 예수가 어찌 이런 말을 함부로 했단 말인가,
물질은 육체다. 모든 물질은 육체의 안락으로 이어지며, 그 선을 넘는 물질은 욕망의 테두리에서 비만의 몸짓으로 허우적거린다. 그러므로 육신이 세상을 떠나는 날에는 모든 물질은 거리에 버려진 쓰레기처럼 느껴질 것이다.
죽은 자의 가슴에 놓인 저금통장과 다문 입.
캄캄한 부엌을 돌아다니는 바퀴벌레의 신속함으로 그토록 많은 돈을 모았건만, 풀어진 손은 어찌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며, 총명함으로 필명을 날리던 사람은 어찌 늙어서 망령된 소리만 하다가 입을 다무는 것인가, 안타까움으로 평생을 지탱하던 집념의 결과가 혼이 쑥 빠져나간 고깃덩어리로 끝을 맺으니, 욕심 없이 보는 옆 사람의 마음마저도 심란할 수밖에 없다.
한 번의 웃음이라도 더 터뜨리고, 한 번의 손길이라도 옆으로 뻗어 다정함을 내밀어 보자. 모든 것은 살아생전에 다 이루어질 일이다. 오늘 참았다가 내일 웃겠다는 말은 공허할 뿐이다. 오늘 주지 않고 내일을 기약하는 사랑은 믿을 수 없다. 현명한 인생장사꾼은 항상 현찰거래만 한다. 웃음과 사랑에는 외상이 없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단호한 계산이었다.
한 끼니의 밥그릇에 웃는 여자를 얻은 남자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지금 노동판에 나가서 일을 한다고 해도 최소한도 세 끼니의 밥그릇은 마련할 돈을 벌 수 있다. 한 끼니로 배를 부르게 만들고 나머지 두 끼니로 잉여행복을 늘어놓는다. 그 앞에서 여자는 환하게 웃는다. 그것이 행복이다. 달러로 환산해도 그다지 많은 돈이 필요하지는 않다.
예수쟁이가 아닌 내가 또 예수의 말을 해야겠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은 물질이 아닌데, 어찌하여 물질을 표상하는 가난이란 용어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에 갖다 붙이는가, 도대체 무엇이 마음이고 무엇이 가난하단 말인가,
여기서 마음의 대가인 석가모니의 팔만대장경을 떠올려야만 한다. 마음이란......
문자에 묻힌 불교에서는 마음을 갈고 닦아서 명경지수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피안의 깨달음을 향하는 지름길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아로서 절에 흘러들어 장작을 패고 잔일이나 하던 머슴은 문맹의 눈으로 마음을 말했다.
갈고 닦을 마음조차 없도다......
항상 마음이 화두의 출발점이고, 끝이었다.
수없는 색으로 세상을 투영하여, 아메바처럼 수만 가지의 모습으로 그 형태를 바꾸는 가슴속의 괴물, 그 괴물은 욕망의 근원지인 것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경계하여 갈고 닦으며, 기어이 그 형체마저도 사라져야할 대상이었다.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않는 어린아이의 번잡스런 손발과 같은 모양이다.
그래서 옛 성인은 마음을 달래고 도닥거려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며, 행여나 오감으로 그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여, 보고, 듣고, 먹고, 입고, 냄새조차 맡는 일을 가려서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현대문명은 진리를 바꾸었다. 욕망이란 수레바퀴를 돌려라. 그것만이 생존의 법칙에 순응하는 길이며, 행복을 향하는 지름길이다. 네가 바라는 행복한 자가 되려면 목표를 세우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그 행복을 쟁취하라. 입 벌리지 않는 새끼에게 어미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
나는 밀레니엄시대에 길을 잃었다. 어쩌면 그렇게 성현의 말과 반대되는 욕망의 현실이 더욱 우월하게 보이는지 알 수가 없다. 태어나면서 자신의 그릇은 분명히 정해져 있다고 명심보감은 설파했다. 자신의 분에 넘치는 행동이나 욕심은 불행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찌 욕망의 시대에 반기를 들어 저항할 수 있단 말인가,
욕망은 욕망을 낳는다. 욕망의 고개를 넘어서니 더 높은 욕망의 고개가 보인다. 그래서 욕망의 귀신에 홀린 눈으로 욕망을 추구하며 욕망을 실현하려고 욕망을 부린다. 그것이 현대문명이 나에게 가르쳐준 인생지도였다.
나는 지쳤다.
노숙자가 밤새마신 소주병 굴러다니는 공원에 들어서서 벤치에 누웠다. 조그만 것으로 큰 것을 헤아리면 끝이 없다. 백년도 못사는 인생으로 영원의 생명을 탐하면 위태롭다. 종점을 알 수 없는 욕망의 정거장은 계속 이어진다. 창가에 스치는 주마등을 바라보는 내 콧등에 노안의 안경이 걸쳐졌다.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살아왔다는 말인가,
기회는 많았었다.
웃을 수 있는 기회, 사랑할 수 있었던 기회, 친구를 다정하게 대할 수 있는 기회, 남이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할 수 있었던 기회......
욕망의 수레바퀴에 짓눌리지만 않았으면 그토록 많은 기회가 다 살아남았을 것이다. 어찌하여 이렇게 어리석은가, 청아한 소리를 내는 퉁소를 도끼로 사용하려는 우를 범하다니,
도끼가 퉁소자리를 넘보고, 퉁소가 도끼를 몰아내려는 으르렁거림은 아름답게 지내도 모자랄 세월을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웃기에도 모자라는 세월, 사랑만 하기에도 짧기만 한 세월...... 이렇게 나는 가난하게만 살았다. 옆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던 행복을 놓치고 말았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 복은 행복일 것이다. 갈고 닦을 마음조차 없다고 했으니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함이 있을 것이다. 아무쪼록 현대문명에 현혹되지 않는 마음으로 그 마음을 버릴지어다.
한 가지 결론을 내려야겠다. 거지도 행복할 수 있다. 거지도 성공의 정상에 우뚝 설 수가 있다. 그것이 현자의 인생이다. 즐기라 너에게 허락된 시간을......
푸드득~
먹이를 쪼던 비둘기가 내 무릎위로 뛰어 오른다.
글 / 은하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