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를 요구하며 천안문광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를 인민해방군이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이다. 1989년 6월 4일에 벌어진 이 사건은 중국정부에게는 도덕적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주었으며 그 상처는 지금까지 아물지 않고 있다. 그해 4월 15일 전 당 총서기인 후야오방胡耀邦이 사망하면서 팡리즈方勵之 등 지식인을 중심으로 후야오방의 명예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베이징대학과 베이징사범대학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모인 학생대표들은 노동자, 지식인들과 함께 천안문광장에서 중국의 민주화를 위한 단식연좌시위를 벌였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덩샤오핑은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단식연좌시위를 난동으로 규정, 베이징 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시위대의 요구에 다소 유연한 대응을 보이던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은 해임설이 떠도는 가운데 행방이 묘연해진 반면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알려진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과 리펑李鵬 국무원 부총리 등 강경파가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6월 3일 밤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은 인민해방군 27군의 탱크를 동원, 무차별 발포와 함께 무력 진압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무력 진압으로 인해 천안문광장의 시위군중을 포함 200여 명이 사망하고 3,00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진압군을 방문하여 그 노고를 치하하였으며 당내 보수파가 다시 전면에 나서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이 사건 이후 중국정부는 반혁명분자에 대한 숙청, 개인숭배 조장, 인민들에 대한 각종 학습 등 체제 수호를 강화하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개방정책 고수를 천명하는 등의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동유럽의 민주화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의도된 정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은 폭발직전의 나라입니다. 그들의 경제성장 무섭다고 하지만
그 경제기반까지 무너뜨리는 인권의 유린은 중국을 망하게 만들것입니다.
천안문 사건
민주화를 요구하며 천안문광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를 인민해방군이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이다. 1989년 6월 4일에 벌어진 이 사건은 중국정부에게는 도덕적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주었으며 그 상처는 지금까지 아물지 않고 있다. 그해 4월 15일 전 당 총서기인 후야오방胡耀邦이 사망하면서 팡리즈方勵之 등 지식인을 중심으로 후야오방의 명예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베이징대학과 베이징사범대학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모인 학생대표들은 노동자, 지식인들과 함께 천안문광장에서 중국의 민주화를 위한 단식연좌시위를 벌였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덩샤오핑은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단식연좌시위를 난동으로 규정, 베이징 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시위대의 요구에 다소 유연한 대응을 보이던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은 해임설이 떠도는 가운데 행방이 묘연해진 반면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알려진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과 리펑李鵬 국무원 부총리 등 강경파가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6월 3일 밤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은 인민해방군 27군의 탱크를 동원, 무차별 발포와 함께 무력 진압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무력 진압으로 인해 천안문광장의 시위군중을 포함 200여 명이 사망하고 3,00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진압군을 방문하여 그 노고를 치하하였으며 당내 보수파가 다시 전면에 나서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이 사건 이후 중국정부는 반혁명분자에 대한 숙청, 개인숭배 조장, 인민들에 대한 각종 학습 등 체제 수호를 강화하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개방정책 고수를 천명하는 등의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동유럽의 민주화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의도된 정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은 폭발직전의 나라입니다. 그들의 경제성장 무섭다고 하지만
그 경제기반까지 무너뜨리는 인권의 유린은 중국을 망하게 만들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