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살아간다는 것은 비극이다

김명수200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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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살아간다는 것은 비극이다.


 

수백 년 동안  마을 지킴이로 신령스럽게 굳건히 서있던 동구 앞 느티나무가 지난 태풍 매미앞에 어이없이 쓰러진 모습을 보고 자연의 위력에 보이지 않는 전율을 느꼈다. 수백 년 동안 불어온 태풍이 어디 매미뿐이었을까 만 모진 풍상 견디며 지난한 세월을 지킨 뿌리 깊은 우람한 느티나무가 힘없이 쓰러져 논바닥에 누운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애잔한 마음이 가슴속 깊이 깊은 시름을 안겨 주었다.


 

간혹 버스를 타고 마을 입구 정류장에 내리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우리 집 쪽을 쳐다 본다.바라보이는 곳에 기운차고 그늘 풍성한 느티나무는 어김없이 눈에 들어오게 마련이었다. 집 앞까지 시냇가 둑길은 한 점 구부러짐이 없는 올 곧은 길이 1km 길이다. 그 1km 길 사이에 동구나무가 세 그루 있다. 한 그루는 낙랑장송이고 두 그루는 거대한 느티나무였다. 그 중 한 그루가 우리 집으로 가는 길에 있다. 푸짐한 그늘은 마을사람 열명이던 스무 명이던 모두 그늘로 감싸 더위를 식혀 주었고 보릿고개 시절 서울공장가는 누이를 배웅하던 이별의 장소였다.


 

들일 없는 한가한 날엔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한담을 나누거나 장기를 두기도 하고 장년들이 술추렴을 하거나 아낙네들이 푸성귀를 다듬는 모습을 정겹게 보았던 고마운 나무였다. 그 의연한 자태를 뽐내며 수백 년 마을의 애환을 지켜보며 언제나 싱싱한 푸름을 뽐내며 쇠락한 기미는 찾아볼 수도 없었고 앞으로 또 수백 년은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던 신령스러운 동구 밖 느티나무가 쓰러진 날 우리 집 마당의 감나무도, 자두나무도, 소나무도 가지가 찢어지거나 뿌리 채 뽑혔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지대한 존경을 받던 인물이 세상을 떠났을 때 “거목이 쓰러졌다”라는 말들로 표현하여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 그것은 역으로 거목은 쓰러질 수 없다는 불사(不死)의 의식이 내면에 깔려있는 함의 이기도 하다. 애기나무에서 만고풍상을 겪으며 거목이 되었다는 것은 그 나무의 품에 안기면 풍성한 나뭇잎으로 인해 하늘이 보이지 않으니 보이지 않는 하늘만큼의 뿌리가 땅속에 그물처럼 펼쳐져 있어서 결코 쓰러질 수가 없다는 무한생각이 관념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에 뿌리 깊은 나무는 무한생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집 마당에는 벚나무가 네 그루 있었다. 그중 한 그루는 처음 이사 왔을 때 누군가의 해코지로 고사하였고 지금은 세 그루가 싱싱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보기 좋게 자라고 있다. 그중 햇살 잘 드는 곳에 터를 잡은 한 그루가 시절도 모르고 요염하게도 꽃이 활짝 피었다. 봄에 핀 벚꽃을 볼 때면 푸지다는 생각밖에 없었는데 계절을 거스르며 봄꽃이 가을에 피어나니 얼핏 요염하다는 느낌을 먼저 받았다. 울타리 삼아 심어놓은 개나리도 듬성듬성 노란 꽃을 피웠다. 개나리야 가끔 추운 날씨 계속되다가 따스한 바람불고 햇살 좋은날이면 가끔 꽃피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가을도 얼마 남지 않는 날에 벚꽃이 한두 송이도 아니고 나무 전체가 활짝 핀 모습은 처음 보는 경이다. 하기야 더 남쪽엔 목련과 아카시아도 피었다 하더라만.....


 

사람도 날려갈 만한 강한 바람에 나뭇잎이 머금고 있던 수분을 바람이 앗아가고 강풍과 폭우에 시달린 이파리들은 시들시들 말라가더니 한 순간에 잎이 져 며칠사이에 앙상한 나목으로 변했던 벚나무가 볼그스름한 연약한 새잎들과 함께 볼수록 요염한 교태를 부리는 하얀 꽃이 아름답게 활짝 피었다. 아내는 가을에 벚꽃놀이를 한다며 “나도 다시 한번 꽃피워 봤으면....”하고  언발에 오줌누는 소리를 한다. 그러고 보니 바다를 끼고 남으로 달리는 31번국도변의 나무들이 다시금 신록으로 줄이어 달리고 있는 화사한 맵시들이 경이롭고 아름답다. 길을 달리며 찬찬히 살펴보니 어느 집 마당엔 매화가 불쑥 피어있고 도로변 소공원의 복사꽃도 색깔 곱게 피어있다.


 

나무들이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겨울 오기 전 아직 햇살 좋으니 부지런히 이파리 빨리 올려 한 방울의 물기라도 더 올리기 위한 본능의 소산일 것이다. 연초록 보드랍고 살핏한 연약한 이파리가 붉게 익어가는 단풍과 하얀 햇살에 반짝여 시심(詩心)을 일으키는 억새의 군무, 그리고 활짝 핀 연초록 신록의 푸름과 만개한 벚꽃, 또한 지천으로 피어나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의 교태는 어찌 저리도 아름다운가.  계절의 앞뒤가 엇갈리는 보기 드문 기이하고도 귀한 볼거리다.


 

시름지고 짜증나고 눈살 찌푸리게 하는 정치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혼돈의 소용돌이에 발목이 잡혀있고, 거물 간첩이 민주인사로 그를듯하게 포장하여 공영방송이 앞장서 금의환향시키려 덤비는 볼썽사나운 오늘, 경제는 언제 깨어날지 모를 암울함에 한창 뜨거운 열정으로 일에 매달릴 젊은 노숙자가 늘어만 간다는 암울함속에 나무들의 새순 돋는 신록의 오묘함이 내게 주는 메시지는 가없는 신선한 충격이다.


 

나무들은 그들의 삶을 위하여 우주적인 질서의 패러다임을 스스로 바꾸었다. 위기의 순간에 생존을 위해 계절을 바꾸는 무한한 역발상의 슬기에 나는 고개를 숙이며 나 역시 남은 생에 최선을 다해 살리라 하는 다짐을 계절을 거슬러 피어난 꽃과 신록에서 배운다.  남은 가을동안 서리 내리기 전 잎은 자라겠지만 나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몸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신록의 저 여린 이파리도 가을서리 내리면 생명을 다 하겠지만 최후의 순간까지 지극정성으로 생명을 일으키려는 저 추상(秋霜)같은 존재의 경이…….

나는 배운다. 단순히 살아간다는 것은 비극이다.


 

추상은 가을서리다. 내륙 산간지역을 중심으로 서리가 내렸다는 것은 나무에게는 이제는 동면하라는 지엄한 자연의 경고이자 한해의 성장을 멈추어야만 하는 절대 분부다. 대청봉엔 첫눈이 내렸다. 대관령 아침 최저기운이 평년보다 더 떨어진 2.3도라 한다. 올 들어 가장 쌀쌀한 날씨를 보인 오늘이다. 뿌리를 가진 존재만이 하늘로 상승한다는 이치를 만산홍엽 붉어가는 가을에 깨달았다. 생명, 존재를 위해 꿈틀거리는 진동을 끝없이 하는 나무의 기상이여 무한한 슬기가 아름답다.

아름답다! 

하늘만큼 땅만큼 아름답구나!


 

                                                                                                

2003, 10, 15  

김 명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