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달(阿斯達)
개천(開天) 1565년, 무진(戊辰) 원년: 상월 3일(B.C 2333), 쥬신제국(朝鮮帝國)의 시조 단군성조(檀君聖祖)는 5가(五加)의 장관들과 800여명의 측근들을 데리고 와서 밝은땅(檀木) 아사달(阿斯達)에 자리잡고 삼신(三神)께 제사한 후, 하늘의 뜻을 받들어 새나라가 열리었음을 만방에 선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구한(九桓)의 백성들은 모두 천제의 화신(天帝化身)인 새 임검에게 복종을 맹세하였다.
※ 한웅의 신시배달국이 막을 내리고 새로운 아사달시대가 열렸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 시점부터 쥬신[朝鮮]이라는 국명이 시작되었다고 오해하고 있으나 실제의 정황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역사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상황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조 단군이 신시배달국의 정권을 이양 받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여 실질적으로는 새로운 나라를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이름은 아직 배달국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려 1,565년간이나 동아의 종주국으로 영광을 떨쳤던 노 대제국(老大帝國)의 그늘을 벗어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었다.
아사달로 도읍을 정한 시조 단군은 새로이 그의 세력권 안으로 편입된 족속들 중 아직도 반발하고 있던 일부의 반란세력을 완전하게 제압하는데 까지 적어도 23년간의 세월이 더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파격적인 개척정치를 과감하게 실시하여, 결국 신정복지를 비롯한 만백성들의 신임을 무한하게 얻으며 천하통일에 성공하자, 경인년(庚寅年: 檀紀 23年 B.C 2311)에 도읍지를 다시 전국토의 중심지역으로 보이는 송화강(松花江)변 하얼빈(哈爾濱)의 완달산(完達山)쪽으로 천도(遷都)하고 새 도읍지의 이름을 펴라[平壤]로 고친 다음에야 비로소 새 제국(帝國)의 정식 국명을 쥬신[朝鮮]으로 정하여 선포하였던 것이다.
아사달(阿斯達)의 위치
쥬신제국[朝鮮帝國] 최초의 도읍지였던 아사달의 위치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모두 제 나름대로의 굳은 소신들을 가지고 있어서 좀처럼 의견의 일치를 이룰 수가 없었다. 본 저자 역시 그 정확한 위치를 찾는데 엄청난 노력과 정력을 쏟아 부었는데도 그 결과는 참담하게도 오리무중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다만 당시에 있었던 여러가지 사건들을 단서로 하고, 또 한국민의 민족적인 정서 등을 고려하여 볼 때 역시 민족정기의 출발점인 백두산(白頭山)지역권 이도백하(二道白河) 지역쯤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 본 저자는 어떤 근거로 아사달을 백두산으로 보는가? 물론 이 책은 논문집이 아니므로 지나치게 학술적인 설명은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우로 보아 책이 출간되고 나면 이견을 가진 독자나 학자들로부터 수많은 전화논쟁에 시달릴 것이 분명하므로, 아예 최소한도의 추정과정만이라도 덧붙이려고 한다.
우선, 진시황은 수많은 재물을 주고 서불(徐?=徐福)과 방사(方士=도술사)들에게 동남동녀 수천명을 동반시켜 바다(밝해)를 건너 삼신산(三神山)에 가서 불로장생하는 약을 가져오게 한다. 이때의 삼신산은 바로 백두산(白頭山)을 말한다. 또 한무제(漢武帝)도 이소군(李小君), 황추(黃錘), 사관(史觀)들을 삼신산으로 보내 신선술(神仙術)을 배우고 불로초를 구해오게 한다. 이때의 삼신산도 역시 백두산을 가리키고 있다.
제(齊)나라의 위왕(威王) 역시 사람을 시켜 밝해(渤海)를 건너 삼신산으로 보내는데, 중국측에서 바라보는 삼신산(三神山, 白頭山)이 얼마나 신령스러운지 잘 알 수 있는 사건기록들이다.
그런데 시조 단군께서도 아사달로 오신 후 곧바로 삼신제(三神祭)를 올리고 하늘의 위임을 받고 신치(임검)자리에 오르신 것이다. 삼신제는 삼신산(三神山)에서 올리셨을 것이고 삼신산의 지금 이름이 바로 백두산(白頭山)인 것이다. 따라서 아사달도 백두산부근일 것이 분명한데, 본 저자가 그 동안 수십번에 걸쳐 백두산일대를 다 뒤져보았는데 쥬신제국 최초의 도읍지가 될만한 곳은 역시 백두산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면서도, 백강(白河)을 끼고 있는 지금의 이도백하(二道白河)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삼신오제본기 제일(三神五帝本紀第一)에 이르기를 ‘삼신산(三神山)의 삼(三)은 신(新)이 되고 신은 또 백(白)으로 되며, 백은 신(神)과 통하고 신은 고(高)로 그리고 고(高)는 두(頭)와 같은 뜻이 되는 것이다. 고로 삼신산(三神山)을 백두산(白頭山)으로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아사달의 뜻: “아사”를 “처음--새롭게 시작한다”는 뜻의 “아시”로 보고, “달”은 땅이라는 의미이니까 “아시달” 즉 새롭게 시작하는 땅 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또 다른 의견은 “아사”를 일본말의 아침 “아사(あさ)”로 보아 “아침의 땅”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 쥬신의 이두식 표기법 조선(朝鮮-아침이 조용한 땅)과 맞아떨어져 무시할 수 없는 설득력이 있다. 참고로 최근 박병식(朴炳植)씨가 펴낸 한일어원사전(韓日語源辭典)을 보면 “아사”가 아침을 뜻하는 우리의 고어(古語)였음을 알 수 있다.
※ 단군세기(檀君世紀)를 비롯한 몇몇 역사서들은 단군의 치세가 아사달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놓고 또 ‘신시(神市)의 다스림(大始神市之世)’이라고 하여 읽는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본 독자들은 이미 읽어 알고 있듯이 신시(神市)는 커밝한[居發桓]한웅님이 배달국(倍達國)을 개천(開天)하셨던 곳이 아닌가. 본 저자도 한동안 혼란에 빠져있었는데 얼마 전 우연히 접해보았던 한 북한학자의 논문을 보고 명쾌한 답을 얻게 되었다. 단군의 기록에 나타난 신시는 “신치”로 읽어야한다는 것이다. 신치란 “신=큰, 위대한” + “치=왕, 한, 집정관”의 뜻으로 결국 “위대한 통치자”의 뜻인 것이다. 즉 “신시의 다스림”은 곧 “위대한 통치가의 다스림”을 말한 것이다.
※ 단군(檀君)과 임검(壬儉)의 칭호에 대하여....
단군(檀君)의 단(檀)은 박달나무 “단” 자로서, 박달의 의미를 취하여 우리말의 “밝달”을 의미한다. 밝달은 글자가 뜻하는 그대로 “밝”은 밝음을 “달”은 땅의 옛말이어서 “밝은 땅”이라는 뜻이 된다. 단군의 “군(君)”은 임검님이라는 뜻이니 결국 “밝은나라의 임검”이라는 뜻이다.
- 밝달의 “달”은 땅의 옛말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쓰고 있는 양달이나, 응달, 혹은 빗달 등의 말들로 의심할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있다.
- 임검(壬儉)의 “임(壬,任)”자는 우리말의 최대 존칭어로서 크다, 높다의 뜻인 “님”을 뜻하는데 현대어에서도 그대로 쓰고 있으므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 임검의 “금”은 검(儉)의 방언이 현대어로 고착된 경우이다. “검(儉)”은 (神), 곰(熊), 김(金), 감(かみ-가미) 등등의 이두문식(吏讀文式)으로 표기되지만 그 뜻은 지신(地神)으로 하늘의 남성신(神)인 한님(天神)에 대응하는 지상의 여성신 님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말의 “ ”을 뜻글인 한문자를 빌려서 의 발음소리와 가장 가까운 글자를 선택하다보니 검(儉)자나 곰(雄-웅자는 곰을 뜻함)를 쓰게 되었을 것인데, 후세 한문에 미친 사람들이 웅(熊)자에서 그 소리값만 취하고 그 뜻은 으로 풀어야함을 잊고, 글자의 뜻 그대로 짐승 곰으로 풀어 우리의 옛 기록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 흔히들 왕검(王儉)과 임검(壬儉)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직 인쇄기술이 잘 발달되지 못한 옛날에 모든 사서(史書)들을 필사(筆寫)하는 과정에서 임(壬)자가 왕(王)자로 잘못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임검은 중국말 왕과 같은 뜻이므로 별로 의심없이 잘못된 기록이 그대로 전승되지 않았을까? 결국 하느님의 신탁(信託)을 받은 사제처럼 하늘로부터 백성들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군장(君長)이 바로 단군(檀君)인 것이다. 따라서 단군은 신(神)이 아니고 신격화(神格化)된 천황(天皇)인 것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동사강목(東史綱目)의 기록을 보면 ‘단군은 배달국의 임검으로 그 나라의 임검들을 모두 단군이라 한다.’라고 했다. 이로서 우리는 배달쥬신국[倍達朝鮮國]의 임검(壬儉,嗣君)들이 모두가 단군의 지위를 갖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단군사당(檀君祠堂)에 대한 기록들
시조 단군께 제사를 올리던 사당들은 역사적인 기록만으로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그 중 몇 가지만 살펴보면, 백두산에 보본단(報本壇), 묘향산의 단군굴(檀君窟), 강화도 마니산의 제천단, 구월산의 어천대(御天坮) 등을 쉽게 열거할 수가 있다. 고구려 때 평양에 등고신묘(登高神廟)와 단군묘(檀君廟)인 성제사(聖帝祠)가 있었는데, 고려 때엔 임검들이 성제사에서 친히 제사를 올렸고, 또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관리들로 하여금 제사를 모시게 하였다.
단군의신위(朝鮮始祖檀君之神位)’로 고쳐 달고, 6월 10일(孟冬初吉日)에 왕자를 비롯하여 좌의정 신숙주(申叔舟), 형조판서 박원형(朴元亨), 병조판서 한상희(韓相會), 이조판서 구치관(具致寬) 등 여러 문무 관리들이 평양으로 가서 제사를 올렸다. 또 영조는 성제사를 숭령전(崇靈殿)으로 이름을 고치고 2명의 전참봉(殿參奉) 관리를 두어 단군께 올리는 제사에 조금의 소홀함도 없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
이밖에도 10월 상달에 모시는 함경도의 상산제(上山祭), 평안도의 태백일(太白日, 太白山祭), 만주지방의 밝산제(白山祭, 三十六祭) 등등 한민족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곳은 어느 곳이던 막론하고 시조 단군께 올리는 제(祭)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 1948년 9월 28일에 공포된 “대한민국 법률 제4호 연호(年號)에 관한 법률”에서 ‘대한민국의 공용(公用)연호를 단군기원(檀君紀元)으로 한다.’라고 하여 민족의 높은 긍지를 반영했었는데 1961년 12월 1일, 국제화한다는 명분에 밀려 그만 폐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1949년 10월 1일에 공포된 대한민국 법률 제53호 “국경일(國慶日)에 관한 법률”에 10월 3일을 개천절(開天節)로 정하여 기념해 오고 있다
※ 쥬신제국의 행정집행부는 풍백(風伯)을 총리로 하고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를 행정부의 부총리격으로 임검을 보좌하게 하였는데 차츰 그 국토가 넓어짐에 따라 정부조직을 8부로 나누고 장관 격인 8가(八加)를 두었다.
8가는 총리 격인 호가(虎加:龍加)에 태자 부루(扶婁)를 임명하고 그 아래에,
마가(馬加): 주명관(主命官)-신치(臣智)--문교부로서 새로운 글(文字)을 창조시키고,
우가(牛加): 주곡관(主穀官)-고시(高矢)--농업부로서 농사일을 관장하며,
웅가(熊加): 주병관(主兵官)-치우(蚩尤)--국방부업무로서 군대를 관장
응가(鷹加): 주형관(主刑官)-부소(扶蘇)--법을 집행하는 일을 관장,
노가(鷺加): 주병관(主病官)-부우(扶虞)--보건복지부로 병을 다루는 약의 개발,
학가(鶴加): 주선악관(主善惡官)-주인(朱因)--사법부의 업무를 관장,
구가(狗加): 주홀관(主忽官)-여수기(餘守己) 등이니 가(加)는 장관, 대인을 의미했다.
※ 중국, 갑골문자(甲骨文字)의 최고 권위자인 동작빈(董作賓)은 단군기원(檀君起源)의 연대수(年代數)를 계산하는 방법을 자신의 논문 “단기와 중국 고사 연대표(檀紀和中國古史年代表)”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중국의 기원은 황제헌원(黃帝軒轅)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요(堯)임검 원년이 갑진년(甲辰年)이고 25년이 무진년(戊辰年)으로 B.C 2333년에 해당하여 금년 서기 2002년에 2,333을 더하면 4,335년이 되어 이것이 곧 단기(檀紀)가 되는 것이다.’
※ 만주의 “대련지구 원시문화의 연구”에는 소주산 하층문화를 B.C 4000년부터, 중층문화는 B.C 3000년, 상층문화는 B.C 2000년 전후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4,000년 전에는 벌써 청동기시대로 들어섰음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 제왕운기는 신라, 고례, 부여, 옥저, 예맥 등은 모두 단군의 후예라고 하면서, 신라의 유명한 화가 솔거는 단군의 초상을 1,000매나 그렸다는 사실과 고려시기의 삼남지방은 집집마다 단군의 초상을 모셨다는 등을 전하며 우리민족이 예로부터 단군을 원시조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알게 하고 있다.
대쥬신제국[大朝鮮帝國]의 통치체제
쥬신제국의 단군(檀君)은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하늘로부터 위임을 받고 나라의 임검으로 즉위하여 최고의 제사장, 최고의 재판관, 최고의 입법관, 군의 총사령관 등 절대적인 최고의 통치자로 그 권한은 대대로 세습되었다. 그러나 제국의 영토가 엄청나게 커지면서 나라의 조직을 셋으로 쪼개어 두 명의 부황이나 집정관들을 두고 국정을 집행할 수밖에 없게 되어갔다. 이것은 서양의 경우 동서 로마로 나누어졌던 경우와 비교할 수 있겠는데 로마제국의 경우가 비교적 단명으로 끝난 것에 비하여 쥬신제국은 무려 2,096년간이라는 경이적인 역사를 장식했던 것이다.
단군황조의 통치체제 특징은 신쥬신(辰朝鮮), 말쥬신(馬朝鮮), 불쥬신(卞朝鮮)의 삼쥬신으로 나누어 신쥬신은 대단군이 다스리고 말쥬신, 불쥬신은 부황들이 다스리는 후국제의 실시였다. 일반적으로 전제군주(專制君主)체제 하에서는 군주의 절대적인 권한을 보장하기 위하여 자제종친을 지방관에 임명하는 것이 상식이었으나,
쥬신제국의 경우 세습적인 군장대신 추천된 장수(長帥), 거수(渠帥), 대인(大人) 등에게 군장(君長) 벼슬을 위임 통치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군장들이 백성들의 신임을 잃게 되면 백성들이 새로운 군장을 선임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만한 민주주의 제도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제도가 성공할 수 있는 요소로서 단군황조는 새로이 정복되어 편입된 나라들을 멸망시키는 대신 복속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한 그들을 제후국으로 대우하며 그 자치권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들 위성국들은 본국에 대하여 얼마간의 공납과 중앙정부의 통제를 직접 받는 지방군을 유지하여야하고 맥도(貊道-1/20稅)를 성실히 바치면 더 이상의 요구는 강요되지 않았다.
시조단군(始祖檀君)의 초대 장관들과 그 임무를 살펴보면,
황후 비서갑(菲西岬): 누에치고 베 짜는 일(방직부)을 관장
태자 부루(扶婁): 질그릇 등 토기와 각종 생활필수품의 생산 및 개발을 총관장
제2황자 부소(扶蘇): 각종 질병을 예방 치료하기 위한 약초를 연구 개발
제3황자 부우(扶虞): 짐승들의 주택지 침입을 막고, 맹수들을 사냥하는 일
제4황자 부여(扶餘): 남녀노소 간에 꼭 지켜야할 예절과 좋은 풍속의 표본을 제정
팽우(彭虞): 토지를 개척 개간하여 넓은 농지를 확보하는 국토개발사업,
신치(神誌): 옛글이 불완전하여 기록과 표현이 불편하여 새 문자를 창조,
고시(高矢): 사냥에만 의존하던 습속을 농사경영으로 사람들을 정착시키려함.
개천(開天) 1587년(경인년): B.C 2311, 나라의 서울을 송화강(松花江)가로 옮기고 나라이름을 쥬신[朝鮮], 서울의 이름을 펴라[平壤]로 하였다.
개천(開天) 1597년(경자년): B.C 2301, 요중(遼中)에 12성을 쌓았는데 험독(險瀆), 영지(令支), 탕지(湯地), 통도(桶道), 거용(渠?), 한성(汗城), 개평(蓋平), 대방(帶方), 백제(百濟), 장령(長嶺), 갈산(碣山), 여성(黎城)이다.
개천(開天) 1614년(정사년): B.C 2284, 나라에 큰 홍수가 있었는데 그 동안 국토개간사업을 관리하던 팽우가 그간의 경험을 살려 치수를 잘하여 피해를 막았다. 단제(檀帝)는 이때 팽우의 공적을 기념하여 우수주(牛首州)에 비석을 세웠다.
개천(開天) 1615년(무오년): B.C 2283, 단제께서 배달신(倍達臣) 운사(雲師)에게 명하여 강남(江南)의 장정 8,000명을 동원하여 강화도 정족산에 삼랑성(三郞城)을, 그리고 마리산에 참성단(塹城壇)을 쌓았다.
개천(開天) 1618년(신유년): B.C 2280, 3월에 임검께서 친히 마리산의 참성단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빌었다.
개천(開天) 1631년(갑술년): B.C 2267, 순(舜)나라의 우왕(禹王)이 쥬신제국의 서쪽 영토를 넘어와 유주(幽州), 병주(幷州), 영주(營州)를 접수하여 국경분쟁이 일어났다. 단제(檀帝)께서는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순나라의 우왕을 문책하였다. 우왕이 사죄하고 분쟁이 있던 모든 지역을 쥬신의 영토로 다시 확인하고 물러갔다.
부루 태자는 우왕을 도산(塗山)으로 불러서 우왕의 공손히 복종하는 태도를 치하하고 홍수로 고통받는 순나라를 위하여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가르쳐주었다. 또한 중앙에서 너무 멀어 다스리기에 어려움이 많았던 회대(淮垈)의 제후들을 순나라의 감독을 받도록 새로운 조치를 내렸다. 이로서 쥬신제국과 순나라와의 모든 국경분쟁이 명확하게 해결되었는데 이것을 역사에서는 도산회의(塗山會議)라고 부른다.
개천(開天) 1657년(경자년): B.C 2241, 제국의 건립 초부터 꾸준히 진행시켜온 농경개혁정책이 드디어 결실을 얻고 나라의 살림이 풍요롭게 넘쳐흘러 만백성들이 행복하게 되었고 임검님의 덕이 세상 널리 퍼졌다. 그러나 새로이 편입되는 영토들이 너무 넓어서 중앙의 행정력이 닿지 않는 곳도 있으므로 천하의 땅을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삼한은 오가(五家)와 65족속(族屬)이다.
이 해 3월 15일 시조 단군 임검님께서 붕어(崩御)하셨다. 백성들은 모두가 슬피 울면서 성문 밖 10리 되는 곳에 장사지냈다.
대쥬신제국 시조 단군
[大朝鮮帝國]
아사달(阿斯達)
개천(開天) 1565년, 무진(戊辰) 원년: 상월 3일(B.C 2333), 쥬신제국(朝鮮帝國)의 시조 단군성조(檀君聖祖)는 5가(五加)의 장관들과 800여명의 측근들을 데리고 와서 밝은땅(檀木) 아사달(阿斯達)에 자리잡고 삼신(三神)께 제사한 후, 하늘의 뜻을 받들어 새나라가 열리었음을 만방에 선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구한(九桓)의 백성들은 모두 천제의 화신(天帝化身)인 새 임검에게 복종을 맹세하였다.
※ 한웅의 신시배달국이 막을 내리고 새로운 아사달시대가 열렸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 시점부터 쥬신[朝鮮]이라는 국명이 시작되었다고 오해하고 있으나 실제의 정황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역사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상황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조 단군이 신시배달국의 정권을 이양 받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여 실질적으로는 새로운 나라를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이름은 아직 배달국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려 1,565년간이나 동아의 종주국으로 영광을 떨쳤던 노 대제국(老大帝國)의 그늘을 벗어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었다.
아사달로 도읍을 정한 시조 단군은 새로이 그의 세력권 안으로 편입된 족속들 중 아직도 반발하고 있던 일부의 반란세력을 완전하게 제압하는데 까지 적어도 23년간의 세월이 더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파격적인 개척정치를 과감하게 실시하여, 결국 신정복지를 비롯한 만백성들의 신임을 무한하게 얻으며 천하통일에 성공하자, 경인년(庚寅年: 檀紀 23年 B.C 2311)에 도읍지를 다시 전국토의 중심지역으로 보이는 송화강(松花江)변 하얼빈(哈爾濱)의 완달산(完達山)쪽으로 천도(遷都)하고 새 도읍지의 이름을 펴라[平壤]로 고친 다음에야 비로소 새 제국(帝國)의 정식 국명을 쥬신[朝鮮]으로 정하여 선포하였던 것이다.
아사달(阿斯達)의 위치
쥬신제국[朝鮮帝國] 최초의 도읍지였던 아사달의 위치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모두 제 나름대로의 굳은 소신들을 가지고 있어서 좀처럼 의견의 일치를 이룰 수가 없었다. 본 저자 역시 그 정확한 위치를 찾는데 엄청난 노력과 정력을 쏟아 부었는데도 그 결과는 참담하게도 오리무중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다만 당시에 있었던 여러가지 사건들을 단서로 하고, 또 한국민의 민족적인 정서 등을 고려하여 볼 때 역시 민족정기의 출발점인 백두산(白頭山)지역권 이도백하(二道白河) 지역쯤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 본 저자는 어떤 근거로 아사달을 백두산으로 보는가? 물론 이 책은 논문집이 아니므로 지나치게 학술적인 설명은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우로 보아 책이 출간되고 나면 이견을 가진 독자나 학자들로부터 수많은 전화논쟁에 시달릴 것이 분명하므로, 아예 최소한도의 추정과정만이라도 덧붙이려고 한다.
우선, 진시황은 수많은 재물을 주고 서불(徐?=徐福)과 방사(方士=도술사)들에게 동남동녀 수천명을 동반시켜 바다(밝해)를 건너 삼신산(三神山)에 가서 불로장생하는 약을 가져오게 한다. 이때의 삼신산은 바로 백두산(白頭山)을 말한다. 또 한무제(漢武帝)도 이소군(李小君), 황추(黃錘), 사관(史觀)들을 삼신산으로 보내 신선술(神仙術)을 배우고 불로초를 구해오게 한다. 이때의 삼신산도 역시 백두산을 가리키고 있다.
제(齊)나라의 위왕(威王) 역시 사람을 시켜 밝해(渤海)를 건너 삼신산으로 보내는데, 중국측에서 바라보는 삼신산(三神山, 白頭山)이 얼마나 신령스러운지 잘 알 수 있는 사건기록들이다.
그런데 시조 단군께서도 아사달로 오신 후 곧바로 삼신제(三神祭)를 올리고 하늘의 위임을 받고 신치(임검)자리에 오르신 것이다. 삼신제는 삼신산(三神山)에서 올리셨을 것이고 삼신산의 지금 이름이 바로 백두산(白頭山)인 것이다. 따라서 아사달도 백두산부근일 것이 분명한데, 본 저자가 그 동안 수십번에 걸쳐 백두산일대를 다 뒤져보았는데 쥬신제국 최초의 도읍지가 될만한 곳은 역시 백두산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면서도, 백강(白河)을 끼고 있는 지금의 이도백하(二道白河)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삼신오제본기 제일(三神五帝本紀第一)에 이르기를 ‘삼신산(三神山)의 삼(三)은 신(新)이 되고 신은 또 백(白)으로 되며, 백은 신(神)과 통하고 신은 고(高)로 그리고 고(高)는 두(頭)와 같은 뜻이 되는 것이다. 고로 삼신산(三神山)을 백두산(白頭山)으로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아사달의 뜻: “아사”를 “처음--새롭게 시작한다”는 뜻의 “아시”로 보고, “달”은 땅이라는 의미이니까 “아시달” 즉 새롭게 시작하는 땅 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또 다른 의견은 “아사”를 일본말의 아침 “아사(あさ)”로 보아 “아침의 땅”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 쥬신의 이두식 표기법 조선(朝鮮-아침이 조용한 땅)과 맞아떨어져 무시할 수 없는 설득력이 있다. 참고로 최근 박병식(朴炳植)씨가 펴낸 한일어원사전(韓日語源辭典)을 보면 “아사”가 아침을 뜻하는 우리의 고어(古語)였음을 알 수 있다.
※ 단군세기(檀君世紀)를 비롯한 몇몇 역사서들은 단군의 치세가 아사달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놓고 또 ‘신시(神市)의 다스림(大始神市之世)’이라고 하여 읽는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본 독자들은 이미 읽어 알고 있듯이 신시(神市)는 커밝한[居發桓]한웅님이 배달국(倍達國)을 개천(開天)하셨던 곳이 아닌가. 본 저자도 한동안 혼란에 빠져있었는데 얼마 전 우연히 접해보았던 한 북한학자의 논문을 보고 명쾌한 답을 얻게 되었다. 단군의 기록에 나타난 신시는 “신치”로 읽어야한다는 것이다. 신치란 “신=큰, 위대한” + “치=왕, 한, 집정관”의 뜻으로 결국 “위대한 통치자”의 뜻인 것이다. 즉 “신시의 다스림”은 곧 “위대한 통치가의 다스림”을 말한 것이다.
※ 단군(檀君)과 임검(壬儉)의 칭호에 대하여....
단군(檀君)의 단(檀)은 박달나무 “단” 자로서, 박달의 의미를 취하여 우리말의 “밝달”을 의미한다. 밝달은 글자가 뜻하는 그대로 “밝”은 밝음을 “달”은 땅의 옛말이어서 “밝은 땅”이라는 뜻이 된다. 단군의 “군(君)”은 임검님이라는 뜻이니 결국 “밝은나라의 임검”이라는 뜻이다.
- 밝달의 “달”은 땅의 옛말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쓰고 있는 양달이나, 응달, 혹은 빗달 등의 말들로 의심할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있다.
- 임검(壬儉)의 “임(壬,任)”자는 우리말의 최대 존칭어로서 크다, 높다의 뜻인 “님”을 뜻하는데 현대어에서도 그대로 쓰고 있으므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 임검의 “금”은 검(儉)의 방언이 현대어로 고착된 경우이다. “검(儉)”은 (神), 곰(熊), 김(金), 감(かみ-가미) 등등의 이두문식(吏讀文式)으로 표기되지만 그 뜻은 지신(地神)으로 하늘의 남성신(神)인 한님(天神)에 대응하는 지상의 여성신 님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말의 “ ”을 뜻글인 한문자를 빌려서 의 발음소리와 가장 가까운 글자를 선택하다보니 검(儉)자나 곰(雄-웅자는 곰을 뜻함)를 쓰게 되었을 것인데, 후세 한문에 미친 사람들이 웅(熊)자에서 그 소리값만 취하고 그 뜻은 으로 풀어야함을 잊고, 글자의 뜻 그대로 짐승 곰으로 풀어 우리의 옛 기록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 흔히들 왕검(王儉)과 임검(壬儉)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직 인쇄기술이 잘 발달되지 못한 옛날에 모든 사서(史書)들을 필사(筆寫)하는 과정에서 임(壬)자가 왕(王)자로 잘못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임검은 중국말 왕과 같은 뜻이므로 별로 의심없이 잘못된 기록이 그대로 전승되지 않았을까? 결국 하느님의 신탁(信託)을 받은 사제처럼 하늘로부터 백성들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군장(君長)이 바로 단군(檀君)인 것이다. 따라서 단군은 신(神)이 아니고 신격화(神格化)된 천황(天皇)인 것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동사강목(東史綱目)의 기록을 보면 ‘단군은 배달국의 임검으로 그 나라의 임검들을 모두 단군이라 한다.’라고 했다. 이로서 우리는 배달쥬신국[倍達朝鮮國]의 임검(壬儉,嗣君)들이 모두가 단군의 지위를 갖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단군사당(檀君祠堂)에 대한 기록들
시조 단군께 제사를 올리던 사당들은 역사적인 기록만으로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그 중 몇 가지만 살펴보면, 백두산에 보본단(報本壇), 묘향산의 단군굴(檀君窟), 강화도 마니산의 제천단, 구월산의 어천대(御天坮) 등을 쉽게 열거할 수가 있다. 고구려 때 평양에 등고신묘(登高神廟)와 단군묘(檀君廟)인 성제사(聖帝祠)가 있었는데, 고려 때엔 임검들이 성제사에서 친히 제사를 올렸고, 또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관리들로 하여금 제사를 모시게 하였다.
단군의신위(朝鮮始祖檀君之神位)’로 고쳐 달고, 6월 10일(孟冬初吉日)에 왕자를 비롯하여 좌의정 신숙주(申叔舟), 형조판서 박원형(朴元亨), 병조판서 한상희(韓相會), 이조판서 구치관(具致寬) 등 여러 문무 관리들이 평양으로 가서 제사를 올렸다. 또 영조는 성제사를 숭령전(崇靈殿)으로 이름을 고치고 2명의 전참봉(殿參奉) 관리를 두어 단군께 올리는 제사에 조금의 소홀함도 없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
이밖에도 10월 상달에 모시는 함경도의 상산제(上山祭), 평안도의 태백일(太白日, 太白山祭), 만주지방의 밝산제(白山祭, 三十六祭) 등등 한민족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곳은 어느 곳이던 막론하고 시조 단군께 올리는 제(祭)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 1948년 9월 28일에 공포된 “대한민국 법률 제4호 연호(年號)에 관한 법률”에서 ‘대한민국의 공용(公用)연호를 단군기원(檀君紀元)으로 한다.’라고 하여 민족의 높은 긍지를 반영했었는데 1961년 12월 1일, 국제화한다는 명분에 밀려 그만 폐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1949년 10월 1일에 공포된 대한민국 법률 제53호 “국경일(國慶日)에 관한 법률”에 10월 3일을 개천절(開天節)로 정하여 기념해 오고 있다
※ 쥬신제국의 행정집행부는 풍백(風伯)을 총리로 하고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를 행정부의 부총리격으로 임검을 보좌하게 하였는데 차츰 그 국토가 넓어짐에 따라 정부조직을 8부로 나누고 장관 격인 8가(八加)를 두었다.
8가는 총리 격인 호가(虎加:龍加)에 태자 부루(扶婁)를 임명하고 그 아래에,
마가(馬加): 주명관(主命官)-신치(臣智)--문교부로서 새로운 글(文字)을 창조시키고,
우가(牛加): 주곡관(主穀官)-고시(高矢)--농업부로서 농사일을 관장하며,
웅가(熊加): 주병관(主兵官)-치우(蚩尤)--국방부업무로서 군대를 관장
응가(鷹加): 주형관(主刑官)-부소(扶蘇)--법을 집행하는 일을 관장,
노가(鷺加): 주병관(主病官)-부우(扶虞)--보건복지부로 병을 다루는 약의 개발,
학가(鶴加): 주선악관(主善惡官)-주인(朱因)--사법부의 업무를 관장,
구가(狗加): 주홀관(主忽官)-여수기(餘守己) 등이니 가(加)는 장관, 대인을 의미했다.
※ 중국, 갑골문자(甲骨文字)의 최고 권위자인 동작빈(董作賓)은 단군기원(檀君起源)의 연대수(年代數)를 계산하는 방법을 자신의 논문 “단기와 중국 고사 연대표(檀紀和中國古史年代表)”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중국의 기원은 황제헌원(黃帝軒轅)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요(堯)임검 원년이 갑진년(甲辰年)이고 25년이 무진년(戊辰年)으로 B.C 2333년에 해당하여 금년 서기 2002년에 2,333을 더하면 4,335년이 되어 이것이 곧 단기(檀紀)가 되는 것이다.’
※ 만주의 “대련지구 원시문화의 연구”에는 소주산 하층문화를 B.C 4000년부터, 중층문화는 B.C 3000년, 상층문화는 B.C 2000년 전후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4,000년 전에는 벌써 청동기시대로 들어섰음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 제왕운기는 신라, 고례, 부여, 옥저, 예맥 등은 모두 단군의 후예라고 하면서, 신라의 유명한 화가 솔거는 단군의 초상을 1,000매나 그렸다는 사실과 고려시기의 삼남지방은 집집마다 단군의 초상을 모셨다는 등을 전하며 우리민족이 예로부터 단군을 원시조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알게 하고 있다.
대쥬신제국[大朝鮮帝國]의 통치체제
쥬신제국의 단군(檀君)은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하늘로부터 위임을 받고 나라의 임검으로 즉위하여 최고의 제사장, 최고의 재판관, 최고의 입법관, 군의 총사령관 등 절대적인 최고의 통치자로 그 권한은 대대로 세습되었다. 그러나 제국의 영토가 엄청나게 커지면서 나라의 조직을 셋으로 쪼개어 두 명의 부황이나 집정관들을 두고 국정을 집행할 수밖에 없게 되어갔다. 이것은 서양의 경우 동서 로마로 나누어졌던 경우와 비교할 수 있겠는데 로마제국의 경우가 비교적 단명으로 끝난 것에 비하여 쥬신제국은 무려 2,096년간이라는 경이적인 역사를 장식했던 것이다.
단군황조의 통치체제 특징은 신쥬신(辰朝鮮), 말쥬신(馬朝鮮), 불쥬신(卞朝鮮)의 삼쥬신으로 나누어 신쥬신은 대단군이 다스리고 말쥬신, 불쥬신은 부황들이 다스리는 후국제의 실시였다. 일반적으로 전제군주(專制君主)체제 하에서는 군주의 절대적인 권한을 보장하기 위하여 자제종친을 지방관에 임명하는 것이 상식이었으나,
쥬신제국의 경우 세습적인 군장대신 추천된 장수(長帥), 거수(渠帥), 대인(大人) 등에게 군장(君長) 벼슬을 위임 통치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군장들이 백성들의 신임을 잃게 되면 백성들이 새로운 군장을 선임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만한 민주주의 제도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제도가 성공할 수 있는 요소로서 단군황조는 새로이 정복되어 편입된 나라들을 멸망시키는 대신 복속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한 그들을 제후국으로 대우하며 그 자치권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들 위성국들은 본국에 대하여 얼마간의 공납과 중앙정부의 통제를 직접 받는 지방군을 유지하여야하고 맥도(貊道-1/20稅)를 성실히 바치면 더 이상의 요구는 강요되지 않았다.
시조단군(始祖檀君)의 초대 장관들과 그 임무를 살펴보면,
황후 비서갑(菲西岬): 누에치고 베 짜는 일(방직부)을 관장
태자 부루(扶婁): 질그릇 등 토기와 각종 생활필수품의 생산 및 개발을 총관장
제2황자 부소(扶蘇): 각종 질병을 예방 치료하기 위한 약초를 연구 개발
제3황자 부우(扶虞): 짐승들의 주택지 침입을 막고, 맹수들을 사냥하는 일
제4황자 부여(扶餘): 남녀노소 간에 꼭 지켜야할 예절과 좋은 풍속의 표본을 제정
팽우(彭虞): 토지를 개척 개간하여 넓은 농지를 확보하는 국토개발사업,
신치(神誌): 옛글이 불완전하여 기록과 표현이 불편하여 새 문자를 창조,
고시(高矢): 사냥에만 의존하던 습속을 농사경영으로 사람들을 정착시키려함.
개천(開天) 1587년(경인년): B.C 2311, 나라의 서울을 송화강(松花江)가로 옮기고 나라이름을 쥬신[朝鮮], 서울의 이름을 펴라[平壤]로 하였다.
개천(開天) 1597년(경자년): B.C 2301, 요중(遼中)에 12성을 쌓았는데 험독(險瀆), 영지(令支), 탕지(湯地), 통도(桶道), 거용(渠?), 한성(汗城), 개평(蓋平), 대방(帶方), 백제(百濟), 장령(長嶺), 갈산(碣山), 여성(黎城)이다.
개천(開天) 1614년(정사년): B.C 2284, 나라에 큰 홍수가 있었는데 그 동안 국토개간사업을 관리하던 팽우가 그간의 경험을 살려 치수를 잘하여 피해를 막았다. 단제(檀帝)는 이때 팽우의 공적을 기념하여 우수주(牛首州)에 비석을 세웠다.
개천(開天) 1615년(무오년): B.C 2283, 단제께서 배달신(倍達臣) 운사(雲師)에게 명하여 강남(江南)의 장정 8,000명을 동원하여 강화도 정족산에 삼랑성(三郞城)을, 그리고 마리산에 참성단(塹城壇)을 쌓았다.
개천(開天) 1618년(신유년): B.C 2280, 3월에 임검께서 친히 마리산의 참성단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빌었다.
개천(開天) 1631년(갑술년): B.C 2267, 순(舜)나라의 우왕(禹王)이 쥬신제국의 서쪽 영토를 넘어와 유주(幽州), 병주(幷州), 영주(營州)를 접수하여 국경분쟁이 일어났다. 단제(檀帝)께서는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순나라의 우왕을 문책하였다. 우왕이 사죄하고 분쟁이 있던 모든 지역을 쥬신의 영토로 다시 확인하고 물러갔다.
부루 태자는 우왕을 도산(塗山)으로 불러서 우왕의 공손히 복종하는 태도를 치하하고 홍수로 고통받는 순나라를 위하여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가르쳐주었다. 또한 중앙에서 너무 멀어 다스리기에 어려움이 많았던 회대(淮垈)의 제후들을 순나라의 감독을 받도록 새로운 조치를 내렸다. 이로서 쥬신제국과 순나라와의 모든 국경분쟁이 명확하게 해결되었는데 이것을 역사에서는 도산회의(塗山會議)라고 부른다.
개천(開天) 1657년(경자년): B.C 2241, 제국의 건립 초부터 꾸준히 진행시켜온 농경개혁정책이 드디어 결실을 얻고 나라의 살림이 풍요롭게 넘쳐흘러 만백성들이 행복하게 되었고 임검님의 덕이 세상 널리 퍼졌다. 그러나 새로이 편입되는 영토들이 너무 넓어서 중앙의 행정력이 닿지 않는 곳도 있으므로 천하의 땅을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삼한은 오가(五家)와 65족속(族屬)이다.
이 해 3월 15일 시조 단군 임검님께서 붕어(崩御)하셨다. 백성들은 모두가 슬피 울면서 성문 밖 10리 되는 곳에 장사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