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일제히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했다. 그곳에느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청년은 포박된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아소친과 말갈인들, 그리고 수나라 병사들 사이로 다가왔다. 청년이 양광 바로 앞까지 걸어오자 양광의 차가운 눈길이 청년을 향해 뻗쳐나갔다.
"너는 말갈의 잡부가 아니군. 어디서 온 자냐?"
맥철장이 양광을 대신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고구려."
짧게 대답한 고구려인이 양광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지금 이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는가?"
"그렇다."
양광은 태연히 대답했다.
"그것은 옳지 않다. 게다가 이들을 해치면 너는 더욱 괴로워질 것이다."
"어째서지?"
"네가 평범한 자가 아닌 까닭이다."
양광은 매마른 웃음을 지었다.
"재미있군, 내가 평범한 자라면 달라지는 것이라도 있는가?"
"그랬다면 이미 너를 죽였을 것이다."
청년의 말에 양광은 툴툴거리며 웃었다. 옆에 있던 부하 장수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들며 나섰다.
"네놈 잡배가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관둬라!"
양광이 휘하 부장들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재미있는 자로구나. 덕분에 조금이나마 내 기분이 나아졌다."
"그렇다면 이제 그만 돌아가라."
"그래, 맞아. 어서 일을 끝내고 돌아가야지. 너도 보아라."
양광이 군사들에게 손을 치켜들자 아소친을 비롯한 말갈인들은 곧 체념했다. 양광이 순순히 청년의 말을 듣는 것 같아 일단의 희망을 가졌으나 역시 양광은 그들을 놓아줄 마음이 없는 듯싶었다. 양광이 손을 내리기 직전, 고구려인의 입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 수나라 황실과 조정에서는 네가 저들을 죽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다소 쌩뚱맞은 청년의 말에 양광은 손을 든 채 궁금한 듯 물었다.
"너는 나를 알고 있는가?"
"물론이다. 너는 네 부모와 형제들에게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자, 조정에 말이라도 난다면 무사하지 못할진저..."
양광의 눈빛이 돌연 날카로워졌다. 고구려인은 이상하리만치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궤뚫고 있는 듯 보였다. 묵묵히 청년을 노려보며 미동도 않던 양광이 감정 없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사람은 죽으면 말하지 못하는 법이지."
"나를 죽여 입을 막겠다는 것인가?"
"그러하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하라."
청년의 얼굴에 오히려 웃음이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양광은 왠지 그를 죽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기품 있는 고구려인을 죽였다가 고구려와 마찰이라도 벌어진다면 자신의 약점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태자 양용(楊勇)과 동생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진(陳)을 무너뜨리기 전에는 그 어떤 주변국과도 마찰을 일으키지 말라는 황제의 엄명이 내려진 터였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도 잠시뿐, 양광의 심지는 다시 엉클어졌다. 온 세상에 피칠갑을 하리라 맹세하지 않았던가. 자신은 지금 무엇을 망설이는가. 그의 정신에 다시 초점이 사라졌다. 죽여야만 한다. 모두 죽어가며 슬픔을 느껴야만 한다. 더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구애(求愛)를 거부하고 무능한 황제 우문찬(宇文瓚) 곁으로 간 주령(珠玲)... 세상은 주령처럼 가식과 위선에 가득 찬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들을 모두 세상에서 없애버려야 한다. 내 한스러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기 위해서는 울부짖으며 죽어가는 자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자는 죽음 앞에서 태연하다. 자신의 명령 한마디에 비참하게 생명을 마쳐야 하건만, 그는 슬퍼하거나 겁내지도 않는다. 죽는다 해도 시원하게 자신의 속을 풀어줄 것 같지 않았다. 이래서는 결코 자신의 한스러운 마음을 달랠 수 없다. 그 생각을 하자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곧 양광의 눈이 붉어지면서 그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아, 너만은 살려주겠다."
"말갈인은 어쩔 생각인가?"
"말갈? 너는 왜 이들을 살리려는 거지?"
"말갈족은 우리 고구려와 피를 나눈 형제이기 때문이다."
청년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직했으나 초원 위로 또렷이 퍼져나갔다.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비참한 상황에 처한 말갈인들에게는 마음에 깊이 울려오는 말이었다. 절망 어린 말갈 젊은이들의 눈에 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평소 고구려인들을 같은 민족이라 여겨본 적이 없는 까닭이었다.
"고구려는 형제를 결코 저버리지 않는다."
'...형제?'
고구려인의 이 묘한 말에, 냉기로 가득 차 있던 말갈의 초원에 서서히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말갈인들은 이 절망의 무저갱 속에서 일말의 희망이 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비록 단 한명의 청년이었으나 그가 무엇인가 말갈에 희망을 가지고 온 듯 느껴졌다.
"고구려인... 말갈... 형제..."
얼굴을 씰룩거리며 내뱉는 양광의 음성은 묘하게 뒤틀렸다. 그는 고구려인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북주(北周), 아니 수(隨)의 대장군 양광이다."
"고구려의 조의(皁衣) 을지문덕(乙支文德)이다."
청년이 담담히 받았다.
한동안 고구려인 을지문덕을 응시하던 양광은 사인검(四寅劍)을 뽑아 서서히 그의 목에 겨누었다. 주위의 가라앉은 적막감 속에 칼날의 떨림이 스산하게 퍼져나갔다.
"너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이곳에 나타난 데에는 필시 연유가 있을 것, 그게 무엇이냐?"
을지문덕은 대답하지 않았다. 양광의 검이 그의 목 앞에서 정확하게 멈추어 섰다.
"천하의 누구도 이 검 앞에서 이렇듯 태연할 수는 없는 법."
양광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칼날이 을지문덕의 목을 슬쩍 찌르자 몇방울 피가 맺혔다. 그러나 문덕은 담담한 얼굴로 양광에게 몇마디 던졌다.
"너는 실성했지만 영웅의 기색이 있는 자,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면 천하를 가질 것이다. 그때 나를 죽이라."
문덕의 말에 양광은 돌연 크게 웃었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주워담는 문덕의 말이 우습기도 하면서 신기하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그만은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지금은 때가 아니지."
양광은 한참 생각하다 검을 거두고 돌아섰다. 순간 주위는 시간이 멈춘 듯 완전히 가라앉았다. 무서운 기세가 양광의 주위로 뻗어나와 사방을 강하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양광은 몸을 돌려 병사들을 향해 걸어갔다.
"대장군, 범상치 않은 놈입니다. 지금..."
맥철장이 앞으로 나서면서 양광의 팔을 잡았다.
'짜악~!'
양광은 매몰차게 맥철장의 뺨을 올려붙이고 그를 그냥 지나쳐갔다. 맥철장은 거구의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장군..."
"전군, 돌아간다."
양광은 병사들을 향해 짧게 내뱉고는 문덕을 향해 돌아섰다.
"꼭 기억해두지. 을지문덕."
양광이 말에 오르자 수나라 군사들이 그를 호위했다. 멀어져가는 수나라 군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말갈의 족장 아소친의 눈에 고구려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고구려인은 묵묵히 중얼거렸다.
전쟁역사소설「장군과 제왕」2.운명적인 조우(遭遇) (3)
"너는 말갈의 잡부가 아니군. 어디서 온 자냐?"
맥철장이 양광을 대신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고구려."
짧게 대답한 고구려인이 양광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지금 이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는가?"
"그렇다."
양광은 태연히 대답했다.
"그것은 옳지 않다. 게다가 이들을 해치면 너는 더욱 괴로워질 것이다."
"어째서지?"
"네가 평범한 자가 아닌 까닭이다."
양광은 매마른 웃음을 지었다.
"재미있군, 내가 평범한 자라면 달라지는 것이라도 있는가?"
"그랬다면 이미 너를 죽였을 것이다."
청년의 말에 양광은 툴툴거리며 웃었다. 옆에 있던 부하 장수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들며 나섰다.
"네놈 잡배가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관둬라!"
양광이 휘하 부장들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재미있는 자로구나. 덕분에 조금이나마 내 기분이 나아졌다."
"그렇다면 이제 그만 돌아가라."
"그래, 맞아. 어서 일을 끝내고 돌아가야지. 너도 보아라."
양광이 군사들에게 손을 치켜들자 아소친을 비롯한 말갈인들은 곧 체념했다. 양광이 순순히 청년의 말을 듣는 것 같아 일단의 희망을 가졌으나 역시 양광은 그들을 놓아줄 마음이 없는 듯싶었다. 양광이 손을 내리기 직전, 고구려인의 입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 수나라 황실과 조정에서는 네가 저들을 죽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다소 쌩뚱맞은 청년의 말에 양광은 손을 든 채 궁금한 듯 물었다.
"너는 나를 알고 있는가?"
"물론이다. 너는 네 부모와 형제들에게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자, 조정에 말이라도 난다면 무사하지 못할진저..."
양광의 눈빛이 돌연 날카로워졌다. 고구려인은 이상하리만치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궤뚫고 있는 듯 보였다. 묵묵히 청년을 노려보며 미동도 않던 양광이 감정 없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사람은 죽으면 말하지 못하는 법이지."
"나를 죽여 입을 막겠다는 것인가?"
"그러하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하라."
청년의 얼굴에 오히려 웃음이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양광은 왠지 그를 죽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기품 있는 고구려인을 죽였다가 고구려와 마찰이라도 벌어진다면 자신의 약점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태자 양용(楊勇)과 동생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진(陳)을 무너뜨리기 전에는 그 어떤 주변국과도 마찰을 일으키지 말라는 황제의 엄명이 내려진 터였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도 잠시뿐, 양광의 심지는 다시 엉클어졌다. 온 세상에 피칠갑을 하리라 맹세하지 않았던가. 자신은 지금 무엇을 망설이는가. 그의 정신에 다시 초점이 사라졌다. 죽여야만 한다. 모두 죽어가며 슬픔을 느껴야만 한다. 더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구애(求愛)를 거부하고 무능한 황제 우문찬(宇文瓚) 곁으로 간 주령(珠玲)... 세상은 주령처럼 가식과 위선에 가득 찬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들을 모두 세상에서 없애버려야 한다. 내 한스러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기 위해서는 울부짖으며 죽어가는 자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자는 죽음 앞에서 태연하다. 자신의 명령 한마디에 비참하게 생명을 마쳐야 하건만, 그는 슬퍼하거나 겁내지도 않는다. 죽는다 해도 시원하게 자신의 속을 풀어줄 것 같지 않았다. 이래서는 결코 자신의 한스러운 마음을 달랠 수 없다. 그 생각을 하자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곧 양광의 눈이 붉어지면서 그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아, 너만은 살려주겠다."
"말갈인은 어쩔 생각인가?"
"말갈? 너는 왜 이들을 살리려는 거지?"
"말갈족은 우리 고구려와 피를 나눈 형제이기 때문이다."
청년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직했으나 초원 위로 또렷이 퍼져나갔다.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비참한 상황에 처한 말갈인들에게는 마음에 깊이 울려오는 말이었다. 절망 어린 말갈 젊은이들의 눈에 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평소 고구려인들을 같은 민족이라 여겨본 적이 없는 까닭이었다.
"고구려는 형제를 결코 저버리지 않는다."
'...형제?'
고구려인의 이 묘한 말에, 냉기로 가득 차 있던 말갈의 초원에 서서히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말갈인들은 이 절망의 무저갱 속에서 일말의 희망이 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비록 단 한명의 청년이었으나 그가 무엇인가 말갈에 희망을 가지고 온 듯 느껴졌다.
"고구려인... 말갈... 형제..."
얼굴을 씰룩거리며 내뱉는 양광의 음성은 묘하게 뒤틀렸다. 그는 고구려인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북주(北周), 아니 수(隨)의 대장군 양광이다."
"고구려의 조의(皁衣) 을지문덕(乙支文德)이다."
청년이 담담히 받았다.
한동안 고구려인 을지문덕을 응시하던 양광은 사인검(四寅劍)을 뽑아 서서히 그의 목에 겨누었다. 주위의 가라앉은 적막감 속에 칼날의 떨림이 스산하게 퍼져나갔다.
"너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이곳에 나타난 데에는 필시 연유가 있을 것, 그게 무엇이냐?"
을지문덕은 대답하지 않았다. 양광의 검이 그의 목 앞에서 정확하게 멈추어 섰다.
"천하의 누구도 이 검 앞에서 이렇듯 태연할 수는 없는 법."
양광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칼날이 을지문덕의 목을 슬쩍 찌르자 몇방울 피가 맺혔다. 그러나 문덕은 담담한 얼굴로 양광에게 몇마디 던졌다.
"너는 실성했지만 영웅의 기색이 있는 자,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면 천하를 가질 것이다. 그때 나를 죽이라."
문덕의 말에 양광은 돌연 크게 웃었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주워담는 문덕의 말이 우습기도 하면서 신기하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그만은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지금은 때가 아니지."
양광은 한참 생각하다 검을 거두고 돌아섰다. 순간 주위는 시간이 멈춘 듯 완전히 가라앉았다. 무서운 기세가 양광의 주위로 뻗어나와 사방을 강하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양광은 몸을 돌려 병사들을 향해 걸어갔다.
"대장군, 범상치 않은 놈입니다. 지금..."
맥철장이 앞으로 나서면서 양광의 팔을 잡았다.
'짜악~!'
양광은 매몰차게 맥철장의 뺨을 올려붙이고 그를 그냥 지나쳐갔다. 맥철장은 거구의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장군..."
"전군, 돌아간다."
양광은 병사들을 향해 짧게 내뱉고는 문덕을 향해 돌아섰다.
"꼭 기억해두지. 을지문덕."
양광이 말에 오르자 수나라 군사들이 그를 호위했다. 멀어져가는 수나라 군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말갈의 족장 아소친의 눈에 고구려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고구려인은 묵묵히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編作對象原書
유현종 著「대제국 고구려」아침나라編(2001년版)
정수인 著「우리 민족의 자부심 고구려의 역사」새움編(2005년版)
김진명 著「살수대첩」랜덤하우스중앙編(2005년版)
정호일 著「천손왕국 대고구려」우리겨레編(2001년版)
이일우 著「영광, 대고구려」정신문화사編(2004년版)
이언호 著「연개소문」큰방編(2006년版)
서길수 著「동아시아 문명의 중심 고구려」사계절출판사編(1999년版)
한종호 著「마지막 영웅」지문사編(1999년版)
오재성 著「만주는 과거 우리의 역사 무대였다!」국사광복국민운동본부編(2002년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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