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여기 게시판을 알게되어 여러님들의 글을 읽다가 며칠밤을 지새우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조국을 떠나 살기로 결심하고 출국날짜를 기다리고 있는 여성입니다. 이렇게 지난날을 회상하자니 마치 10년이나 지난일들인것처럼 아련하네요. #1 나에게 남자는 한명뿐이다 대학시절 첫사랑의 상처를 가지고 있던 저는, '나의 평생에 남자라는 단어는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말을 되뇌이며 일에만 파묻혀 지냈습니다. 놀줄모르고 무언가를 배우는걸 좋아하던 저는, 외모를 치장하기 위해 돈을 들이기보다는 회사일과 병행할수있는 대학의 강좌를 들으러 다니거나, 운동을 하는등 나름대로 알찬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점을 알아본 주위의 직장동료들로부터 훌륭한 남성분을 몇차례 소개받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는 예의상 그자리에 나갔고 아직 준비가 되지않았다는 말로 정중히 거절할수밖에 없었지요. #2 부모님 이기는 자식없다(?) 어려서부터 넘치는 부모님의 사랑을 불평할정도로 깊고큰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아버님도 어머님도, 외출할때 저와만 데이트(?) 하는것을 좋아하실 정도였으니까요. 대학졸업과 동시에 어머님의 선을보라는 권유가 시작되었지만, 아직은 첫사랑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어머님도 아시고 계신터라 너무 늦지않게 저의 마음에 맞는 사람 찾아서 결혼하라고 하시더군요. 몇년이 흘러 이제 저도 더이상 부모님 걱정하시기전에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주위에서 소개해주는 자리가 만들어졌고, 그사람이 저의 처음이자 마지막 배우자가 되었습니다. #3 꿀맛같은 행복 배우자의 집안환경을 염려하시던 아버님께서는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나는 보내고 싶지 않다'고 하셨지만, 이세상에 굴곡없는 삶이 어디있으며 오히려 그사람의 상처를 감싸주고 싶다는 생각뿐이던 저는 그저 행복했습니다. 둘다 번듯한 직장에,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자했던 저는 경제적으로도 어렵지않게 생활을 해나갈수 있었습니다. 첫아이가 태어나던날, 저는 제가 태어나서 한 일중 가장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정말 행복했습니다. 꿀맛같은 행복이란 말이 실감났으니까요. 자상하고 성실한 신랑과 사랑스러운 아기, 그리고 저를 아껴주는 시댁가족... 그러나 그 행복이 무서운 고통의 전주곡임을 알게되기까지는 오래걸리지 않았습니다. #4 신은 견딜만큼의 고통만 준다 아이를 낳은지 얼마되지않아 그사람이 작은일에도 화를내고 급기야 저를 때리더군요. 결혼 1년만에 저는 말로만 듣던 '매맞는아내'가 되어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약을 사다가 발라주고 미안해하며 다시는 이런일 없을거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런일은 반복되었으며 갈수록 고통은 더해져갔습니다. 여름 한철을 긴소매옷을 입으니 이를 이상히 여기는 동료들에게 산후조리를 잘못해서 늘 몸을 따뜻하게 해줘야한다고 웃으며 말해주었습니다. 말씀드리면 제 걱정으로 밤잠 못이루실 부모님께도 물론 철저히 비밀로 했지요. 아직 말도못하고 벙긋벙긋 웃기만 하는 저의 딸을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래... 이사람이 나한테 뭔가 불만이 있었을거야, 내가 좀더 노력하면 이사람도 착한 사람이니 바뀌리라... 모두들 잠들어있을 깊은밤에 그는 동네사람 듣는다며 집안의 모든 창문을 꼭꼭 닫아걸고 저를 짓밟았습니다. 네에.. 그순간 혹시 내가 짐승이 아닐까 했지요. 그렇게 견디는것도 한계가 있었는지 이렇게 맞다가는 이자리에서 죽겠구나하는 섬뜩한 생각이 전류에 감전되듯 저를 얼어붙게 만들더군요. 생명의 본능이 이성을 밀어내더군요. 이때의 느낌이 지워지지않는 상처가 되어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온몸이 떨려옵니다. 살고싶다는 단하나의 강렬한 욕구가 저로 하여금 그사람에게 저항하도록 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때 도망도 못가고 바보같이 맞고만 있었는지 이해가 안되지만, 그때는 어떻게든 그사람을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5 모래성을 쌓다 가족들이 모르게 조언을 구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저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여 출산한지 얼마되지않은 동료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심하지 않으면 고쳐서 살고, 안된다면 아이가 조금이라도 어릴때 정리하라는 말을 해주더군요. 1년간 할수있는 모든 노력을 해보고 안되면 그때가서 정리하자. 저의 결론이었습니다. 노력도 해보지않고 무책임하게 가정을 허물수는 없었지요. 그사람이 출근안하는 날은 차려먹기 귀찮아 끼니거를것이 걱정되어 밤새 음식을 만들어두고 새벽에 잠깐 눈붙이고 출근하였습니다. 휴가기간이 맞지않아 혼자서 집에 있을때는 회사에서 급히 집에와서 점심을 차려 같이 먹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주위에서는 저를보고 유별나다고 할정도였지요. 그러나 결과를 보니 저의 노력은 헛된것이더군요. 제발로 법원을 찾아갔으니까요. #6 스님의 회색 옷자락을 스치는 바람을 따라서 저는 이제 아무런 미련이 없습니다. 짦으나마 인간으로서의 고통과 행복을 모두 맛보았고, 이제는 한국에서의 모든 일들을 가슴에 묻고 외국으로 갈준비를 하고있습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이지만, 저만큼 사랑받으며 자란 사람도 드물거라는 생각에 자식된 도리로 나머지의 생을 무의미하게 보낼수는 없으니까요. 전에는 무관심하게 스치던 이웃의 아픔이 가슴으로 느껴지고, 아.. 이래서 인생은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구나 하며 이제서야 조금씩 삶의 의미를 깨우쳐가고 있으니까요. ☞ 클릭, 두번째 오늘의 톡! 억울해서 많이 울었습니다..
여자가 쓰는 이야기
우연히 여기 게시판을 알게되어 여러님들의 글을 읽다가 며칠밤을 지새우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조국을 떠나 살기로 결심하고
출국날짜를 기다리고 있는 여성입니다.
이렇게 지난날을 회상하자니 마치 10년이나 지난일들인것처럼 아련하네요.
#1 나에게 남자는 한명뿐이다
대학시절 첫사랑의 상처를 가지고 있던 저는,
'나의 평생에 남자라는 단어는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말을 되뇌이며
일에만 파묻혀 지냈습니다. 놀줄모르고 무언가를 배우는걸 좋아하던 저는,
외모를 치장하기 위해 돈을 들이기보다는 회사일과 병행할수있는 대학의 강좌를 들으러 다니거나,
운동을 하는등 나름대로 알찬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점을 알아본 주위의 직장동료들로부터 훌륭한 남성분을 몇차례 소개받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는 예의상 그자리에 나갔고 아직 준비가 되지않았다는 말로 정중히 거절할수밖에 없었지요.
#2 부모님 이기는 자식없다(?)
어려서부터 넘치는 부모님의 사랑을 불평할정도로 깊고큰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아버님도 어머님도, 외출할때 저와만 데이트(?) 하는것을 좋아하실 정도였으니까요.
대학졸업과 동시에 어머님의 선을보라는 권유가 시작되었지만,
아직은 첫사랑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어머님도 아시고 계신터라
너무 늦지않게 저의 마음에 맞는 사람 찾아서 결혼하라고 하시더군요.
몇년이 흘러 이제 저도 더이상 부모님 걱정하시기전에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주위에서 소개해주는 자리가 만들어졌고, 그사람이 저의 처음이자 마지막 배우자가 되었습니다.
#3 꿀맛같은 행복
배우자의 집안환경을 염려하시던 아버님께서는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나는 보내고 싶지 않다'고 하셨지만, 이세상에 굴곡없는 삶이 어디있으며
오히려 그사람의 상처를 감싸주고 싶다는 생각뿐이던 저는 그저 행복했습니다.
둘다 번듯한 직장에,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자했던 저는
경제적으로도 어렵지않게 생활을 해나갈수 있었습니다.
첫아이가 태어나던날, 저는 제가 태어나서 한 일중 가장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정말 행복했습니다. 꿀맛같은 행복이란 말이 실감났으니까요.
자상하고 성실한 신랑과 사랑스러운 아기, 그리고 저를 아껴주는 시댁가족...
그러나 그 행복이 무서운 고통의 전주곡임을 알게되기까지는 오래걸리지 않았습니다.
#4 신은 견딜만큼의 고통만 준다
아이를 낳은지 얼마되지않아 그사람이 작은일에도 화를내고 급기야 저를 때리더군요.
결혼 1년만에 저는 말로만 듣던 '매맞는아내'가 되어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약을 사다가 발라주고 미안해하며 다시는 이런일 없을거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런일은 반복되었으며 갈수록 고통은 더해져갔습니다.
여름 한철을 긴소매옷을 입으니 이를 이상히 여기는 동료들에게 산후조리를 잘못해서
늘 몸을 따뜻하게 해줘야한다고 웃으며 말해주었습니다.
말씀드리면 제 걱정으로 밤잠 못이루실 부모님께도 물론 철저히 비밀로 했지요.
아직 말도못하고 벙긋벙긋 웃기만 하는 저의 딸을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래... 이사람이 나한테 뭔가 불만이 있었을거야,
내가 좀더 노력하면 이사람도 착한 사람이니 바뀌리라...
모두들 잠들어있을 깊은밤에 그는 동네사람 듣는다며 집안의 모든 창문을 꼭꼭 닫아걸고
저를 짓밟았습니다.
네에.. 그순간 혹시 내가 짐승이 아닐까 했지요.
그렇게 견디는것도 한계가 있었는지 이렇게 맞다가는 이자리에서 죽겠구나하는
섬뜩한 생각이 전류에 감전되듯 저를 얼어붙게 만들더군요.
생명의 본능이 이성을 밀어내더군요.
이때의 느낌이 지워지지않는 상처가 되어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온몸이 떨려옵니다.
살고싶다는 단하나의 강렬한 욕구가 저로 하여금 그사람에게 저항하도록 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때 도망도 못가고 바보같이 맞고만 있었는지 이해가 안되지만,
그때는 어떻게든 그사람을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5 모래성을 쌓다
가족들이 모르게 조언을 구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저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여 출산한지 얼마되지않은 동료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심하지 않으면 고쳐서 살고, 안된다면 아이가 조금이라도 어릴때 정리하라는 말을 해주더군요.
1년간 할수있는 모든 노력을 해보고 안되면 그때가서 정리하자.
저의 결론이었습니다. 노력도 해보지않고 무책임하게 가정을 허물수는 없었지요.
그사람이 출근안하는 날은 차려먹기 귀찮아 끼니거를것이 걱정되어
밤새 음식을 만들어두고 새벽에 잠깐 눈붙이고 출근하였습니다.
휴가기간이 맞지않아 혼자서 집에 있을때는 회사에서 급히 집에와서
점심을 차려 같이 먹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주위에서는 저를보고 유별나다고 할정도였지요.
그러나 결과를 보니 저의 노력은 헛된것이더군요.
제발로 법원을 찾아갔으니까요.
#6 스님의 회색 옷자락을 스치는 바람을 따라서
저는 이제 아무런 미련이 없습니다.
짦으나마 인간으로서의 고통과 행복을 모두 맛보았고,
이제는 한국에서의 모든 일들을 가슴에 묻고 외국으로 갈준비를 하고있습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이지만,
저만큼 사랑받으며 자란 사람도 드물거라는 생각에
자식된 도리로 나머지의 생을 무의미하게 보낼수는 없으니까요.
전에는 무관심하게 스치던 이웃의 아픔이 가슴으로 느껴지고,
아.. 이래서 인생은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구나 하며
이제서야 조금씩 삶의 의미를 깨우쳐가고 있으니까요.
☞ 클릭, 두번째 오늘의 톡! 억울해서 많이 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