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이한 일이로군. 시경(詩經)이라면 천하의 명저인데 어째서 양견이 그러한 시경의 한 편으로 군사를 일으킬 생각을 하게 되었단 말이오?"
대성왕(大成王) 건무(建武)가 어이없다는 투로 되묻자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침착하게 설명했다.
"시경의 한혁편(韓奕篇)이 양견의 자존심을 결정적으로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자초지종을 설명해보시오."
"시경의 한혁편에는 하(夏), 은(殷), 주(周)의 정통을 이은 서주(西周)가 조선과 국경선을 협의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고구려의 모태인 조선이 이미 아득한 시절 중원의 제국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바 양견은 이 구절에 몹시 분노하였습니다. 게다가 한후(韓侯)가 서주를 방문했을 때 서주에서는 국왕의 질녀를 내주어 한후를 융숭히 대접했다는 구절도 있는바, 양견의 자존심이 여기에서 폭발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호오! 그런 내용이 시경의 한혁편에 있단 말이오? 우리 조상님들이 그토록 아득한 옛날에 중원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말이오?"
병마원수(兵馬元帥) 강이식(姜以式)이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허어!"
강이식뿐만 아니라 영양태왕(嬰陽太王)과 도성(都城) 수비대장 온준(溫俊), 욕사(褥奢) 연태조(淵太祚) 등도 감격에 겨운 듯 탄성을 질렀다. 다만 대대로(大對盧) 연자유(淵子遊)만은 이미 시경을 읽어 본 듯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좌중의 분위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짐(朕)이 태자 시절에 많은 서적을 읽어봤지만 중원 사람들이 그토록 귀하게 여기는 시경(詩經)이라는 서적에 그런 내용이 담겨 있을 줄은 정말 모르고 있었소. 짐은 우리의 조상님들을 본받아 중원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부국강병(富國强兵)에 힘쓸 것이오."
영양태왕이 힘찬 목소리로 결의를 내뱉었다. 그때 강이식 장군이 다시 되물었다.
"그렇다면 양견의 분노에 의해 구성된 원정군이 우리를 공격해올 것이란 말인데 이들을 조급하게 만들어 무슨 방법으로 대처할 것인지 을지 공의 말씀을 들어보고 싶소."
"양견은 우리 고구려를 칠 군사를 일으킬 때에 태자인 양용(楊勇)이나 다섯째 아들인 한왕(漢王) 양량(楊諒)을 총사(總使)로 임명할 것입니다. 그동안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인물은 진왕(晉王)인 양광이었지만 양견은 개인적으로 둘째 아들인 양광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있기에 다른 아들에게도 전공을 세울 기회를 준다는 생각으로 그 두사람 가운데 하나를 고구려 원정군의 총지휘관으로 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요?"
"양용은 공을 서두르고 전장에는 겁을 내는 위인이며 양량은 역시 성정이 급하고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지 않는 거만한 인물이니, 누가 고구려로 오든지 이들을 잘만 이용하기만 하면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강이식이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미간을 좁혔다. 문덕의 말은 쉽게 이해가 가는 듯도 하다가 막상 현실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해보면 막혀 버리는 것이었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인지 어려우니 자세히 좀 설명을 해주시겠소?"
"상대가 좋은 기운으로 일을 시작하면 그 기운을 흐뜨리는 것이 길이요, 나쁜 기운으로 생각하면 그 기운을 더욱 돋우는 것이 길인 법, 우리는 수나라의 군주인 양견의 화를 더욱 돋움으로써 병법에 어긋나도록 유인해야 할 것이오."
대성왕 건무가 나서며 문덕을 힐책하듯이 물었다.
"그대는 양견과 그 아들들의 조급한 성격을 이용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꾸 어려운 말만 되풀이하고 있는데, 대체 그대가 생각하는 전략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할 수 없소?"
"수나라가 우리를 치기 위해 동원하는 병력은 최소한 30만 대군일 것입니다. 이들이 만약 9월에 침공해오면 우리로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
"시기를 조정해야 하오."
"시기라면....? 우리가 준비하는 시기 말이오?"
"아닙니다. 아무리 준비해도 우리에겐 시간이 없소. 따라서 적이 침공하는 시기를 조정해야 하오."
"그렇다면 많은 선물을 들려 사신을 보내는 방법 밖에는 없겠습니다. 일단 달래놓고 시간을 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사자(大使者) 고소심(高少心)의 말에 신료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사신을 보내 양견을 달래고 그간에 적군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사람들은 문덕의 입에서 나오는 이상한 답변에 놀라고 말았다.
"아니오. 그 반대요. 우리는 적의 침공을 앞당겨야 하오."
"뭣이?"
"사신 대신에 군사를 보내는 거요. 그래서 양견이 화를 있는 대로 돋우어 침공을 앞당겨야 하오."
"허어! 요사스런 변설로 조정의 심기를 흩뜨리는 자로다. 9월이라 하여도 준비할 겨를이 없어 혼비백산하는 마당인데 시간을 벌기는 커녕 오히려 침공을 앞당긴다 하였느냐?"
대성왕 건무가 이치에 맞지 않는 문덕의 말에 당장 시비를 걸고 나섰다.
"그래야만 하오!"
을지문덕의 우렁찬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대성왕이 영양태왕을 향해 아뢰었다.
"소신이 폐하께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지금 저 을지문덕이라는 자가 이상한 말을 하지마는, 소신이 수군원수를 맡으면서 한시도 헛되이 시간을 보낸 적이 없나이다. 하니 소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소서. 수가 올가을에 고구려를 칠 수 없는 이유는 세가지가 있는데, 그 중 첫째는 수 역시 인간의 도의를 아는지라 지금 때가 선왕께서 승하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이요, 둘째는 요즘 들어 저 양견의 건강이 심히 좋지 않음이오이다. 셋째는..."
이때 누군가가 대성왕의 장황한 변설을 가로막았다.
"수는 올가을에 옵니다. 왕제(王弟)께서는 책임지지 못할 장담은 삼가하십시오. 신이 아는 한, 을지문덕 공은 이제껏 한번도 실언한 적이 없습니다."
대대로 연자유였다. 분노로 터질 듯이 벌게진 대성왕의 두 눈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으나 연자유는 고개를 돌려 이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준비할 시간을 벌려고 양견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친다는 것은 고구려의 기상에 맞지도 않거니와 지금 조공을 한다고 해도 물러설 양견이 아닙니다. 아마도 조공을 바치면 먼저 군사의 자존심을 잃고 침공은 침공대로 당할 것입니다."
"대대로는 어찌 그리 자신하시오?"
"왕제께서는 양견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는 도의와는 담을 쌓은 인간입니다. 왕제께서는 정확한 판단력과 신중한 태도로 국가의 대사를 관장하셔야 할 분인데 너무 말씀을 쉽게 하시는 듯 하외다."
"아, 그만하시오!"
영양태왕이 손을 들어 대성왕과 연자유의 말다툼을 말렸다. 그리고 을지문덕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을지 공의 말을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소. 우리가 듣기에는 일견 대성왕의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어째서 공은 수의 화를 돋우어 침공의 시기를 당기자는 거요?"
"전쟁을 치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첫째는 천시요, 둘째는 지리요, 셋째가 인화라 했으니 적군이 9월에 쳐들어옴은 천시를 얻는 것이 됩니다.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라 적군은 사기충천하여 벌판을 가로질러 올 테니 오로지 군사의 기세로만 막아야 하는데 이것이 어찌 좋을 리 있습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영양태왕(嬰陽太王)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런데 시기를 앞당긴다면.....?"
"비는 하염없이 퍼붓고, 무거운 짐을 실은 마차는 질척거리는 진흙구덩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군사들 사이에선 전염병이 창궐하는 계절에 저들이 출병한다면 오히려 우리가 천시를 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을지 공의 말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소만, 저들 역시 병법을 알 터, 어떻게 저들의 침공을 앞당길 수 있을지 모르겠소."
"그래서 마른 장작과 같은 양견의 마음에 불을 놓자는 것입니다. 우선 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그의 마음에 기름을 붓는 공작이 필요합니다. 또 보는 것이 짧고 공을 서두르는 양용이나 다른 형제들에 대한 시기심이 큰 양량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알겠는데 어떤 방법으로...?"
"생각해둔 바가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말할 수 없나이다."
영양태왕은 문덕에게 계책이 있으나 만인이 있는 앞에서 말할 단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였다. 그래서 조신들에게 분부하였다.
"조회를 파하도록 하되, 대대로와 태대사자, 병마원수는 따로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시오. 아무래도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겠소."
"예, 폐하!"
조용히 자리를 잡자 문덕은 태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신이 파악하기에 수나라의 군주인 양견은 분명 우리 고구려를 침공할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隨)가 철저히 준비를 갖추고 좋은 계절을 택해 침공하게 되면 우리에게 불리합니다. 아까 어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적군의 침공 시기를 앞당겨 장마철에 출병하도록 유도한다면 오히려 전세는 유리한 쪽으로 흐를 것입니다."
국왕 앞에 모인 대대로(大對盧) 연자유(淵子遊), 병마원수(兵馬元帥) 강이식(姜以式), 태대사자(太大使者) 대성왕(大成王) 고건무(高建武) 등은 문덕의 한마디 한마디에 잔뜩 긴장했다. 이제껏 문덕처럼 통찰력이 높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덕의 존재는 그들의 뇌리에 너무도 신비하고 신선하게 파고들었다.
"그러면 어떤 방책이 좋은가?"
"우리가 먼저 수의 국경을 침범하는 겁니다."
"뭐라고?"
좌중의 모든 사람이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덕의 생각은 참으로 대담하여 쉽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좌중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꼭 그래야만 하는가?"
침묵을 깬 것은 영양태왕(嬰陽太王)이었다. 문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폐하."
"하긴, 어차피 쳐들어올 적이라면 그 순간을 늦추려고만 해서는 안 되겠지..."
"양견의 화를 최대로 돋우려면 군사를 내되 두가지 더 필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첫째는 폐하께서 직접 출병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다시 한번 좌중의 모든 사람이 놀랐다. 문덕이 아무리 기인이라지만 국왕에게 직접 출병을 권하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친 말이었다.
"짐이 직접 출병을...?"
"그러하옵니다. 양견의 화를 가장 크게 돋우는 방법입니다."
"그건 어째서 그렇소?"
"양견은 천하를 통일하였지만 애석하게도 그 사이 너무나 늙어버렸습니다. 그는 지금에야 비로소 부귀영화를 누리려 하지만 나이가 그를 붙잡고 있어, 눈만 뜨면 자신의 늙음을 한탄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즉, 그의 최대 약점은 나이입니다."
"오! 양견이 유달리 여색(女色)을 탐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군."
태왕은 비로소 이해되는 듯했다.
"그에 반해 폐하께서는 젊습니다. 젊은 고구려의 임금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수의 국경을 침범했다고 하면 양견의 가슴은 터지고 말 것입니다. 아무도 그의 분노를 말릴 수 없을 터이지요."
"자네는 마치 양견을 손바닥 위에 놓고 보는 듯하군."
대대로 연자유가 감탄하며 내뱉은 말이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태왕을 비롯한 좌중의 참석자들은 모두 신들린 듯한 문덕의 계략에 놀라 마지않았다.
"또 하나의 조건은 무엇이오?"
"이번 작전은 수나라 국경의 요새인 영주(營州)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적은 영주를 함락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적을 유인하는 것에 불과하니 태왕께서는 대군을 이끌고 가실 필요 없이 개마기사단(蓋馬騎士團) 수천기와 말갈(靺鞨)의 기병을 거느리고 가심이 좋습니다."
"뭐라? 태왕 폐하께 정예병을 두고 말갈의 잡병을 거느리고 가시라?"
대성왕이 목소리를 높여 문덕을 힐책하려 하자, 영양태왕은 손을 내저어 그를 막으며 조용히 물었다.
"그건 또 왜 그러한가?
"역시 수로 하여금 최대한 당황하게 하는 것입니다. 수는 유독 우리 고구려만 조공을 하지 않고 맞서는 데 대해 괘씸한 생각과 더불어 잔뜩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다른 변방의 나라들도 고구려를 닮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말갈의 군사를 이끌고 수의 영주 땅을 침범하면 수의 이러한 불안에 불을 지르는 격이 됩니다. 그들은 시간이 좀 더 지나 많은 변방의 나라들이 수나라에 대항하는 진영에 가담하기 전에 고구려라는 싹을 잘라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역시 수의 조급함을 불러 일으키는 계략입니다."
"너무나 신통한 계략인지라 놀라지 않을 수 없구려. 허나 어떻게 말갈의 기병을 동원할 수 있단 말이오?"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말갈의 족장 아소친(牙素親)은 수나라에 원한을 품고 있는 자입니다. 제가 이미 이러한 계략을 그에게 말하고 준비토록 했으니 폐하께서는 성신(聖身)만 움직이시면 됩니다."
"진정 기인이로다. 하늘이 우리 고구려를 위해 이런 기인을 내려보내 주셨구나."
태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대성왕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대성왕은 을지문덕(乙支文德)이라는 생소한 사내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모두들 이상한 사기꾼에게 말려들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폐하, 영주에는 수나라의 군사가 10만이나 지키고 있다고 들었나이다. 그런 곳을 개마기사단과 말갈병 수천기를 거느리고 침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옵니다. 저 을지문덕이란 자의 말을 믿지 마시옵소서."
그러자 대대로 연자유가 을지문덕을 변론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폐하, 지금 대성왕 전하께서는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시고 의심부터 하고 계시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을지문덕의 방대한 계략을 듣고 깊이 감탄하였사옵니다. 그런 을지문덕이 어찌 영주의 수비군 10만을 깨뜨릴 비책을 마련하지 않았겠나이까? 을지문덕의 전략이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들어보시옵소서."
전쟁역사소설「장군과 제왕」4.다가오는 전쟁 (5)
대성왕(大成王) 건무(建武)가 어이없다는 투로 되묻자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침착하게 설명했다.
"시경의 한혁편(韓奕篇)이 양견의 자존심을 결정적으로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자초지종을 설명해보시오."
"시경의 한혁편에는 하(夏), 은(殷), 주(周)의 정통을 이은 서주(西周)가 조선과 국경선을 협의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고구려의 모태인 조선이 이미 아득한 시절 중원의 제국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바 양견은 이 구절에 몹시 분노하였습니다. 게다가 한후(韓侯)가 서주를 방문했을 때 서주에서는 국왕의 질녀를 내주어 한후를 융숭히 대접했다는 구절도 있는바, 양견의 자존심이 여기에서 폭발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호오! 그런 내용이 시경의 한혁편에 있단 말이오? 우리 조상님들이 그토록 아득한 옛날에 중원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말이오?"
병마원수(兵馬元帥) 강이식(姜以式)이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허어!"
강이식뿐만 아니라 영양태왕(嬰陽太王)과 도성(都城) 수비대장 온준(溫俊), 욕사(褥奢) 연태조(淵太祚) 등도 감격에 겨운 듯 탄성을 질렀다. 다만 대대로(大對盧) 연자유(淵子遊)만은 이미 시경을 읽어 본 듯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좌중의 분위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짐(朕)이 태자 시절에 많은 서적을 읽어봤지만 중원 사람들이 그토록 귀하게 여기는 시경(詩經)이라는 서적에 그런 내용이 담겨 있을 줄은 정말 모르고 있었소. 짐은 우리의 조상님들을 본받아 중원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부국강병(富國强兵)에 힘쓸 것이오."
영양태왕이 힘찬 목소리로 결의를 내뱉었다. 그때 강이식 장군이 다시 되물었다.
"그렇다면 양견의 분노에 의해 구성된 원정군이 우리를 공격해올 것이란 말인데 이들을 조급하게 만들어 무슨 방법으로 대처할 것인지 을지 공의 말씀을 들어보고 싶소."
"양견은 우리 고구려를 칠 군사를 일으킬 때에 태자인 양용(楊勇)이나 다섯째 아들인 한왕(漢王) 양량(楊諒)을 총사(總使)로 임명할 것입니다. 그동안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인물은 진왕(晉王)인 양광이었지만 양견은 개인적으로 둘째 아들인 양광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있기에 다른 아들에게도 전공을 세울 기회를 준다는 생각으로 그 두사람 가운데 하나를 고구려 원정군의 총지휘관으로 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요?"
"양용은 공을 서두르고 전장에는 겁을 내는 위인이며 양량은 역시 성정이 급하고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지 않는 거만한 인물이니, 누가 고구려로 오든지 이들을 잘만 이용하기만 하면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강이식이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미간을 좁혔다. 문덕의 말은 쉽게 이해가 가는 듯도 하다가 막상 현실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해보면 막혀 버리는 것이었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인지 어려우니 자세히 좀 설명을 해주시겠소?"
"상대가 좋은 기운으로 일을 시작하면 그 기운을 흐뜨리는 것이 길이요, 나쁜 기운으로 생각하면 그 기운을 더욱 돋우는 것이 길인 법, 우리는 수나라의 군주인 양견의 화를 더욱 돋움으로써 병법에 어긋나도록 유인해야 할 것이오."
대성왕 건무가 나서며 문덕을 힐책하듯이 물었다.
"그대는 양견과 그 아들들의 조급한 성격을 이용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꾸 어려운 말만 되풀이하고 있는데, 대체 그대가 생각하는 전략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할 수 없소?"
"수나라가 우리를 치기 위해 동원하는 병력은 최소한 30만 대군일 것입니다. 이들이 만약 9월에 침공해오면 우리로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
"시기를 조정해야 하오."
"시기라면....? 우리가 준비하는 시기 말이오?"
"아닙니다. 아무리 준비해도 우리에겐 시간이 없소. 따라서 적이 침공하는 시기를 조정해야 하오."
"그렇다면 많은 선물을 들려 사신을 보내는 방법 밖에는 없겠습니다. 일단 달래놓고 시간을 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사자(大使者) 고소심(高少心)의 말에 신료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사신을 보내 양견을 달래고 그간에 적군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사람들은 문덕의 입에서 나오는 이상한 답변에 놀라고 말았다.
"아니오. 그 반대요. 우리는 적의 침공을 앞당겨야 하오."
"뭣이?"
"사신 대신에 군사를 보내는 거요. 그래서 양견이 화를 있는 대로 돋우어 침공을 앞당겨야 하오."
"허어! 요사스런 변설로 조정의 심기를 흩뜨리는 자로다. 9월이라 하여도 준비할 겨를이 없어 혼비백산하는 마당인데 시간을 벌기는 커녕 오히려 침공을 앞당긴다 하였느냐?"
대성왕 건무가 이치에 맞지 않는 문덕의 말에 당장 시비를 걸고 나섰다.
"그래야만 하오!"
을지문덕의 우렁찬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대성왕이 영양태왕을 향해 아뢰었다.
"소신이 폐하께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지금 저 을지문덕이라는 자가 이상한 말을 하지마는, 소신이 수군원수를 맡으면서 한시도 헛되이 시간을 보낸 적이 없나이다. 하니 소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소서. 수가 올가을에 고구려를 칠 수 없는 이유는 세가지가 있는데, 그 중 첫째는 수 역시 인간의 도의를 아는지라 지금 때가 선왕께서 승하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이요, 둘째는 요즘 들어 저 양견의 건강이 심히 좋지 않음이오이다. 셋째는..."
이때 누군가가 대성왕의 장황한 변설을 가로막았다.
"수는 올가을에 옵니다. 왕제(王弟)께서는 책임지지 못할 장담은 삼가하십시오. 신이 아는 한, 을지문덕 공은 이제껏 한번도 실언한 적이 없습니다."
대대로 연자유였다. 분노로 터질 듯이 벌게진 대성왕의 두 눈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으나 연자유는 고개를 돌려 이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준비할 시간을 벌려고 양견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친다는 것은 고구려의 기상에 맞지도 않거니와 지금 조공을 한다고 해도 물러설 양견이 아닙니다. 아마도 조공을 바치면 먼저 군사의 자존심을 잃고 침공은 침공대로 당할 것입니다."
"대대로는 어찌 그리 자신하시오?"
"왕제께서는 양견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는 도의와는 담을 쌓은 인간입니다. 왕제께서는 정확한 판단력과 신중한 태도로 국가의 대사를 관장하셔야 할 분인데 너무 말씀을 쉽게 하시는 듯 하외다."
"아, 그만하시오!"
영양태왕이 손을 들어 대성왕과 연자유의 말다툼을 말렸다. 그리고 을지문덕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을지 공의 말을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소. 우리가 듣기에는 일견 대성왕의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어째서 공은 수의 화를 돋우어 침공의 시기를 당기자는 거요?"
"전쟁을 치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첫째는 천시요, 둘째는 지리요, 셋째가 인화라 했으니 적군이 9월에 쳐들어옴은 천시를 얻는 것이 됩니다.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라 적군은 사기충천하여 벌판을 가로질러 올 테니 오로지 군사의 기세로만 막아야 하는데 이것이 어찌 좋을 리 있습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영양태왕(嬰陽太王)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런데 시기를 앞당긴다면.....?"
"비는 하염없이 퍼붓고, 무거운 짐을 실은 마차는 질척거리는 진흙구덩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군사들 사이에선 전염병이 창궐하는 계절에 저들이 출병한다면 오히려 우리가 천시를 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을지 공의 말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소만, 저들 역시 병법을 알 터, 어떻게 저들의 침공을 앞당길 수 있을지 모르겠소."
"그래서 마른 장작과 같은 양견의 마음에 불을 놓자는 것입니다. 우선 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그의 마음에 기름을 붓는 공작이 필요합니다. 또 보는 것이 짧고 공을 서두르는 양용이나 다른 형제들에 대한 시기심이 큰 양량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알겠는데 어떤 방법으로...?"
"생각해둔 바가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말할 수 없나이다."
영양태왕은 문덕에게 계책이 있으나 만인이 있는 앞에서 말할 단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였다. 그래서 조신들에게 분부하였다.
"조회를 파하도록 하되, 대대로와 태대사자, 병마원수는 따로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시오. 아무래도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겠소."
"예, 폐하!"
조용히 자리를 잡자 문덕은 태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신이 파악하기에 수나라의 군주인 양견은 분명 우리 고구려를 침공할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隨)가 철저히 준비를 갖추고 좋은 계절을 택해 침공하게 되면 우리에게 불리합니다. 아까 어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적군의 침공 시기를 앞당겨 장마철에 출병하도록 유도한다면 오히려 전세는 유리한 쪽으로 흐를 것입니다."
국왕 앞에 모인 대대로(大對盧) 연자유(淵子遊), 병마원수(兵馬元帥) 강이식(姜以式), 태대사자(太大使者) 대성왕(大成王) 고건무(高建武) 등은 문덕의 한마디 한마디에 잔뜩 긴장했다. 이제껏 문덕처럼 통찰력이 높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덕의 존재는 그들의 뇌리에 너무도 신비하고 신선하게 파고들었다.
"그러면 어떤 방책이 좋은가?"
"우리가 먼저 수의 국경을 침범하는 겁니다."
"뭐라고?"
좌중의 모든 사람이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덕의 생각은 참으로 대담하여 쉽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좌중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꼭 그래야만 하는가?"
침묵을 깬 것은 영양태왕(嬰陽太王)이었다. 문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폐하."
"하긴, 어차피 쳐들어올 적이라면 그 순간을 늦추려고만 해서는 안 되겠지..."
"양견의 화를 최대로 돋우려면 군사를 내되 두가지 더 필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첫째는 폐하께서 직접 출병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다시 한번 좌중의 모든 사람이 놀랐다. 문덕이 아무리 기인이라지만 국왕에게 직접 출병을 권하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친 말이었다.
"짐이 직접 출병을...?"
"그러하옵니다. 양견의 화를 가장 크게 돋우는 방법입니다."
"그건 어째서 그렇소?"
"양견은 천하를 통일하였지만 애석하게도 그 사이 너무나 늙어버렸습니다. 그는 지금에야 비로소 부귀영화를 누리려 하지만 나이가 그를 붙잡고 있어, 눈만 뜨면 자신의 늙음을 한탄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즉, 그의 최대 약점은 나이입니다."
"오! 양견이 유달리 여색(女色)을 탐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군."
태왕은 비로소 이해되는 듯했다.
"그에 반해 폐하께서는 젊습니다. 젊은 고구려의 임금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수의 국경을 침범했다고 하면 양견의 가슴은 터지고 말 것입니다. 아무도 그의 분노를 말릴 수 없을 터이지요."
"자네는 마치 양견을 손바닥 위에 놓고 보는 듯하군."
대대로 연자유가 감탄하며 내뱉은 말이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태왕을 비롯한 좌중의 참석자들은 모두 신들린 듯한 문덕의 계략에 놀라 마지않았다.
"또 하나의 조건은 무엇이오?"
"이번 작전은 수나라 국경의 요새인 영주(營州)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적은 영주를 함락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적을 유인하는 것에 불과하니 태왕께서는 대군을 이끌고 가실 필요 없이 개마기사단(蓋馬騎士團) 수천기와 말갈(靺鞨)의 기병을 거느리고 가심이 좋습니다."
"뭐라? 태왕 폐하께 정예병을 두고 말갈의 잡병을 거느리고 가시라?"
대성왕이 목소리를 높여 문덕을 힐책하려 하자, 영양태왕은 손을 내저어 그를 막으며 조용히 물었다.
"그건 또 왜 그러한가?
"역시 수로 하여금 최대한 당황하게 하는 것입니다. 수는 유독 우리 고구려만 조공을 하지 않고 맞서는 데 대해 괘씸한 생각과 더불어 잔뜩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다른 변방의 나라들도 고구려를 닮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말갈의 군사를 이끌고 수의 영주 땅을 침범하면 수의 이러한 불안에 불을 지르는 격이 됩니다. 그들은 시간이 좀 더 지나 많은 변방의 나라들이 수나라에 대항하는 진영에 가담하기 전에 고구려라는 싹을 잘라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역시 수의 조급함을 불러 일으키는 계략입니다."
"너무나 신통한 계략인지라 놀라지 않을 수 없구려. 허나 어떻게 말갈의 기병을 동원할 수 있단 말이오?"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말갈의 족장 아소친(牙素親)은 수나라에 원한을 품고 있는 자입니다. 제가 이미 이러한 계략을 그에게 말하고 준비토록 했으니 폐하께서는 성신(聖身)만 움직이시면 됩니다."
"진정 기인이로다. 하늘이 우리 고구려를 위해 이런 기인을 내려보내 주셨구나."
태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대성왕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대성왕은 을지문덕(乙支文德)이라는 생소한 사내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모두들 이상한 사기꾼에게 말려들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폐하, 영주에는 수나라의 군사가 10만이나 지키고 있다고 들었나이다. 그런 곳을 개마기사단과 말갈병 수천기를 거느리고 침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옵니다. 저 을지문덕이란 자의 말을 믿지 마시옵소서."
그러자 대대로 연자유가 을지문덕을 변론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폐하, 지금 대성왕 전하께서는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시고 의심부터 하고 계시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을지문덕의 방대한 계략을 듣고 깊이 감탄하였사옵니다. 그런 을지문덕이 어찌 영주의 수비군 10만을 깨뜨릴 비책을 마련하지 않았겠나이까? 을지문덕의 전략이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들어보시옵소서."
編作對象原書
유현종 著「대제국 고구려」아침나라編(2001년版)
정수인 著「우리 민족의 자부심 고구려의 역사」새움編(2005년版)
김진명 著「살수대첩」랜덤하우스중앙編(2005년版)
정호일 著「천손왕국 대고구려」우리겨레編(2001년版)
이일우 著「영광, 대고구려」정신문화사編(2004년版)
이언호 著「연개소문」큰방編(2006년版)
서길수 著「동아시아 문명의 중심 고구려」사계절출판사編(1999년版)
한종호 著「마지막 영웅」지문사編(1999년版)
오재성 著「만주는 과거 우리의 역사 무대였다!」국사광복국민운동본부編(2002년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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