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황(隨皇) 문제(文帝) 양견(楊堅)이 고구려에 보낸 사신은 이부상서(吏部尙書) 소적기(疏積起)라는 자였다. 평양에 도착한 소적기는 숙소에 여장을 풀고 고구려를 지배하는 태왕(太王)이 귀족들과 더불어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는 장소인 천의각(天意閣)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양태왕(嬰陽太王)은 수나라의 사신을 접견하기 전에 대성왕(大成王) 고건무(高建武)를 좌측에, 대대로(大對盧) 연자유(淵子遊)를 우측에 각각 세우고 귀족들과 관리들을 좌우에 도열하게 하였다. 천의각 입구와 태왕이 앉은 용상 사이에서는 서역에서 들여온 붉은 양탄자가 길게 깔려 있었다.
호출을 받은 사신 소적기가 봉서(封書)를 허리춤에 끼고 오만한 걸음걸이로 천의각으로 들어섰다. 그 자는 양탄자 앞에 서더니 봉서를 두 손으로 잡아 들고는 거만한 목소리로 외쳤다.
"천자(天子)의 조서(詔書)가 당도하였으니, 고구려의 국왕 고원(高元; 嬰陽太王의 諱)은 예를 다해 받도록 하시오!"
그 순간 태왕 곁에 서 있던 연자유가 벽력같은 호통을 질렀다.
"닥쳐라!"
소적기는 화들짝 놀라며 입을 닫았다. 지금까지 여러 번 사행(使行)을 했는데 이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놀라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연자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니 더욱 사나운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수나라의 사신은 오체복지한 후 이 앞까지 기어와서 국서를 바쳐라!"
"뭐, 뭐요?"
소적기는 하도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전에는 '예를 다해 받으시오!' 하는 소리는 쳐도 사실 예를 먼저 깍듯이 갖추는 것은 사신 쪽이었다. 사신이 소리친 다음에 허리를 굽히고 걸어가서 태왕에게 큰절을 하면 그때야 태왕이 정중히 봉서를 받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예 개처럼 기어서 오라는 것이 아닌가!
"지, 지금... 제 정신이오?"
당황하여 더듬더듬 대꾸하자 재차 호통성이 울렸다.
"여봐라. 저 무례한 사신의 목을 당장 베어라."
“이, 이게 무슨 경우요! 나는 천자(天子)의 대리인(代理人)이오. 천자의 대리인은 제후(諸侯)와 동격이오.”
“뭐하고 있느냐! 당장 끌어내어 목을 베어라!”
“백만대군이 두렵지 않단 말씀이오!”
그때 입구에 서있는 병사 둘이 성큼 소적기의 좌우로 다가오며 칼을 빼어 들었다. 깜짝 놀란 사신 소적기는 털썩 무릎을 꿇은 후 바싹 엎드려 배가 바닥에 닿게 했다. 자존심이고 뭐고 사는 것이 중요했다.
그 자세로 식은땀을 흘리며 두 손에 봉서를 든 채 지렁이처럼 엉기적, 엉기적 기어가노라니 뱃가죽이 벗겨지며 통증이 밀려왔다. 그러나 아픔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설마했던 전쟁이 목전에 다가온 것이다. 사신의 귓가에는 수나라의 성을 공격하는 고구려 병사들의 함성이 당장에라도 들려오는 듯 했다.
용상 삼 장 앞쯤 기어갔을 때 멈추라는 소리가 울렸다. 봉서를 올리자 연자유가 낚아채어 태왕에게 건넸다. 태왕은 봉서를 받아 뜯더니 고건무에게 내밀었다.
"아우가 받아서 낭독하게."
"예, 폐하..."
고건무는 국서를 두 손으로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짐이 천명을 받아 천하를 사랑으로 다스리면서 고구려왕에게 바다 한 구석을 맡겨 다스리노라니···."
고건무는 차마 큰 소리로 읽기가 어색했다. 첫 구절부터 고구려 태왕을 깔아뭉개는 오만한 수나라 황제의 글을 낭랑하게 읽을 수가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왕이 남의 신하가 되었으면 왜 덕을 베풀지 않고 말갈(靺鞨)을 괴롭히고 거란(契丹)을 금고시키는가? 그들이 짐을 사모하여 신하 노릇을 하려는 것이 뭐가 못마땅해서 그토록 방해하는가?"
그때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영양태왕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와하하하하!"
고건무는 흠칫하며 낭독을 멈추었다. 태왕은 듣는 이의 귀가 먹을 정도의 커다란 웃음을 거침없이 터뜨리다가 거짓말처럼 갑자기 뚝 멎었다. 태왕은 활활 타는 시선으로 수나라 사신의 얼굴을 정시하며 물었다.
"대답하거라. 고구려가 수(隨)의 신하 국가냐?"
"아, 아닙니다."
"말갈과 거란이 고구려를 섬기는 부족이냐, 수나라를 섬기는 부족이냐?"
"고, 고구려를 섬기는 부족입니다."
소적기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고구려를 섬기는 부족을 자신의 신하라고 우기는 수왕(隨王) 양견(楊堅)의 속셈은 도둑놈의 심보가 아니고 무엇이냐?"
".....!"
"왜 대답이 없느냐?"
"도, 도둑놈의 심보가 맞사옵니다."
"그렇다. 너의 주군인 양견은 일개 도둑일 뿐이다."
태왕의 단호한 말에 소적기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전쟁을 결의한 나라가 적국 사신의 목을 베어 돌려보내는 것은 고금의 전통. 이제 자신의 목숨은 황천에 한 발 내딛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태왕 폐하! 모, 목숨만 살려주소서. 소인은 시, 심부름만 했을 뿐이옵니다."
사색이 된 수나라의 사신 소적기는 사지를 벌벌 떨며 애원했다. 영양태왕은 다시 아우인 대성왕 고건무에게 일렀다.
"아우는 계속 국서를 읽어보도록 하게."
"·····그대가 만약 병기를 만드는 기술자가 필요하다면 짐에게 주청함이 마땅하다. 그런데 사사로이 노수(弩手; 다연발 화살 발사 장치인 쇠뇌를 만드는 기술자)를 빼어갔다."
이 대목에서 태왕은 손을 들어 고건무의 낭독을 제지하며 입을 열었다.
"수나라의 사신은 들으라. 현재 수나라의 영토에는 수많은 고구려계 백성이 있다. 어디 그뿐이냐? 백제계, 신라계도 있다. 이들은 모두 단군조선에 속했고 전에는 배달국에 속했던 무리들이다. 바로 그들 중에서 노수들을 데려온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우리 백성이 뿌리를 찾아 돌아온 것이란 말이다."
태왕은 쩌렁쩌렁한 육성으로 소리친 후 고건무에게 낭독을 계속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건무는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읽어나갔다.
"왕은 짐의 사자를 지나치게 호위하여 사방을 살피지 못하게 하고 객관에 가둬놓고 눈과 귀를 억압하였다. 무슨 음흉한 모계가 있기에 짐의 관원이 살피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이 대목에서 태왕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스쳐갔다.
"짐은 왕에게 땅을 내리고 벼슬을 주어 깊은 사랑과 특별한 혜택을 드러내려 했지만 왕은 오로지 불신감에 젖어 시기하고 의심하여 사신을 보낼 때마다 정보를 밀탐해가니 이 어찌 신하의 도리라 하겠는가?"
사실 문제는 첫 사신을 고구려로 보냈을 때 사신이 극진한 대접을 받고 온 것으로만 알았다. 가마에 태워 엄중 호위를 해주고 객관에 투숙한 후에는 연일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니 대국의 사신에 걸맞는 예를 취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사신을 보낼 때마다 대접은 융숭하게 받지만 고구려의 내부 사정에 관해 알아온 것이 거의 없었다. 이에 비해 고구려 사신은 수에 왔다가 돌아가면 나중에 은밀한 망명 행렬이 잇따르니 부아가 치밀 만도 했던 것이다.
문제의 국서를 나지막이 읽어 내려가던 고건무가 흠칫하고는 더 이상 읽지 못했다. 너무도 모욕적인 문장이 이어짐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영양태왕이 재촉했다.
"아우는 마저 읽지 않고 무얼 하는가?"
"예..."
고건무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소리를 낮추어 읽어나갔다.
"··· 이제 왕은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니 만약 그대를 내쫓는다면 그 자리를 비워둘 수 없으므로 짐의 친자(親子)를 보내어 그곳의 백성들을 살펴서 다스리게 할 것이다. 그러나 왕이 개과천선하여 짐의 뜻에 충실히 따른다면 무엇 때문에 짐의 아들을 보내는 수고를 하겠는가? 왕은 요수와 장강이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자, 이제 개과천선할 기회를 주노니 마땅히 짐의 뜻을 알아서 스스로 복을 구하기 바라노라."
고건무는 조심스럽게 낭독을 끝내고 영양태왕의 표정을 살폈다. 귀족들은 모두 태왕이 불같은 분노를 터뜨릴 것으로 생각하고 숨을 죽였다. 다른 때 같으면 연자유가 먼저 노성을 터뜨릴 수도 있겠지만 이번만은 그 역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태왕의 검미는 푸르르 떨렸고 이마에 솟은 굵은 힘줄도 경련을 했다. 수나라 사신 소적기는 식은 땀을 어찌나 흘렀는지 절인 배추 꼴이 되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태왕의 숨결이 점점 더 거칠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조용히 가라앉았다. 마음의 평정을 회복한 듯 그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마저 걸려 있었다.
"사신을 객관으로 돌려보내서 연금하라."
목을 베라는 명이 아니라 연금 지시가 떨어지자 소적기는 죽은 조상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듯 졸지에 안색이 밝아졌다.
“폐, 폐하! 성은이 백골난망이옵니다.”
수나라의 사신이 물러간 후 태왕은 도열한 귀족들을 빙 둘러보며 물었다.
"자, 어떻게 생각하시오?"
병마원수(兵馬元帥) 강이식(姜以式)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무례한 내용의 국서에는 붓이 아닌 칼로 화답해야 하옵니다."
대대로 연자유가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비한 전략을 충분히 세워 두었습니다. 이제 그것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습니다."
영양태왕이 자리를 함께 한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전쟁역사소설「장군과 제왕」4.다가오는 전쟁 (7)
수황(隨皇) 문제(文帝) 양견(楊堅)이 고구려에 보낸 사신은 이부상서(吏部尙書) 소적기(疏積起)라는 자였다. 평양에 도착한 소적기는 숙소에 여장을 풀고 고구려를 지배하는 태왕(太王)이 귀족들과 더불어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는 장소인 천의각(天意閣)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양태왕(嬰陽太王)은 수나라의 사신을 접견하기 전에 대성왕(大成王) 고건무(高建武)를 좌측에, 대대로(大對盧) 연자유(淵子遊)를 우측에 각각 세우고 귀족들과 관리들을 좌우에 도열하게 하였다. 천의각 입구와 태왕이 앉은 용상 사이에서는 서역에서 들여온 붉은 양탄자가 길게 깔려 있었다.
호출을 받은 사신 소적기가 봉서(封書)를 허리춤에 끼고 오만한 걸음걸이로 천의각으로 들어섰다. 그 자는 양탄자 앞에 서더니 봉서를 두 손으로 잡아 들고는 거만한 목소리로 외쳤다.
"천자(天子)의 조서(詔書)가 당도하였으니, 고구려의 국왕 고원(高元; 嬰陽太王의 諱)은 예를 다해 받도록 하시오!"
그 순간 태왕 곁에 서 있던 연자유가 벽력같은 호통을 질렀다.
"닥쳐라!"
소적기는 화들짝 놀라며 입을 닫았다. 지금까지 여러 번 사행(使行)을 했는데 이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놀라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연자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니 더욱 사나운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수나라의 사신은 오체복지한 후 이 앞까지 기어와서 국서를 바쳐라!"
"뭐, 뭐요?"
소적기는 하도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전에는 '예를 다해 받으시오!' 하는 소리는 쳐도 사실 예를 먼저 깍듯이 갖추는 것은 사신 쪽이었다. 사신이 소리친 다음에 허리를 굽히고 걸어가서 태왕에게 큰절을 하면 그때야 태왕이 정중히 봉서를 받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예 개처럼 기어서 오라는 것이 아닌가!
"지, 지금... 제 정신이오?"
당황하여 더듬더듬 대꾸하자 재차 호통성이 울렸다.
"여봐라. 저 무례한 사신의 목을 당장 베어라."
“이, 이게 무슨 경우요! 나는 천자(天子)의 대리인(代理人)이오. 천자의 대리인은 제후(諸侯)와 동격이오.”
“뭐하고 있느냐! 당장 끌어내어 목을 베어라!”
“백만대군이 두렵지 않단 말씀이오!”
그때 입구에 서있는 병사 둘이 성큼 소적기의 좌우로 다가오며 칼을 빼어 들었다. 깜짝 놀란 사신 소적기는 털썩 무릎을 꿇은 후 바싹 엎드려 배가 바닥에 닿게 했다. 자존심이고 뭐고 사는 것이 중요했다.
그 자세로 식은땀을 흘리며 두 손에 봉서를 든 채 지렁이처럼 엉기적, 엉기적 기어가노라니 뱃가죽이 벗겨지며 통증이 밀려왔다. 그러나 아픔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설마했던 전쟁이 목전에 다가온 것이다. 사신의 귓가에는 수나라의 성을 공격하는 고구려 병사들의 함성이 당장에라도 들려오는 듯 했다.
용상 삼 장 앞쯤 기어갔을 때 멈추라는 소리가 울렸다. 봉서를 올리자 연자유가 낚아채어 태왕에게 건넸다. 태왕은 봉서를 받아 뜯더니 고건무에게 내밀었다.
"아우가 받아서 낭독하게."
"예, 폐하..."
고건무는 국서를 두 손으로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짐이 천명을 받아 천하를 사랑으로 다스리면서 고구려왕에게 바다 한 구석을 맡겨 다스리노라니···."
고건무는 차마 큰 소리로 읽기가 어색했다. 첫 구절부터 고구려 태왕을 깔아뭉개는 오만한 수나라 황제의 글을 낭랑하게 읽을 수가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왕이 남의 신하가 되었으면 왜 덕을 베풀지 않고 말갈(靺鞨)을 괴롭히고 거란(契丹)을 금고시키는가? 그들이 짐을 사모하여 신하 노릇을 하려는 것이 뭐가 못마땅해서 그토록 방해하는가?"
그때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영양태왕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와하하하하!"
고건무는 흠칫하며 낭독을 멈추었다. 태왕은 듣는 이의 귀가 먹을 정도의 커다란 웃음을 거침없이 터뜨리다가 거짓말처럼 갑자기 뚝 멎었다. 태왕은 활활 타는 시선으로 수나라 사신의 얼굴을 정시하며 물었다.
"대답하거라. 고구려가 수(隨)의 신하 국가냐?"
"아, 아닙니다."
"말갈과 거란이 고구려를 섬기는 부족이냐, 수나라를 섬기는 부족이냐?"
"고, 고구려를 섬기는 부족입니다."
소적기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고구려를 섬기는 부족을 자신의 신하라고 우기는 수왕(隨王) 양견(楊堅)의 속셈은 도둑놈의 심보가 아니고 무엇이냐?"
".....!"
"왜 대답이 없느냐?"
"도, 도둑놈의 심보가 맞사옵니다."
"그렇다. 너의 주군인 양견은 일개 도둑일 뿐이다."
태왕의 단호한 말에 소적기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전쟁을 결의한 나라가 적국 사신의 목을 베어 돌려보내는 것은 고금의 전통. 이제 자신의 목숨은 황천에 한 발 내딛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태왕 폐하! 모, 목숨만 살려주소서. 소인은 시, 심부름만 했을 뿐이옵니다."
사색이 된 수나라의 사신 소적기는 사지를 벌벌 떨며 애원했다. 영양태왕은 다시 아우인 대성왕 고건무에게 일렀다.
"아우는 계속 국서를 읽어보도록 하게."
"·····그대가 만약 병기를 만드는 기술자가 필요하다면 짐에게 주청함이 마땅하다. 그런데 사사로이 노수(弩手; 다연발 화살 발사 장치인 쇠뇌를 만드는 기술자)를 빼어갔다."
이 대목에서 태왕은 손을 들어 고건무의 낭독을 제지하며 입을 열었다.
"수나라의 사신은 들으라. 현재 수나라의 영토에는 수많은 고구려계 백성이 있다. 어디 그뿐이냐? 백제계, 신라계도 있다. 이들은 모두 단군조선에 속했고 전에는 배달국에 속했던 무리들이다. 바로 그들 중에서 노수들을 데려온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우리 백성이 뿌리를 찾아 돌아온 것이란 말이다."
태왕은 쩌렁쩌렁한 육성으로 소리친 후 고건무에게 낭독을 계속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건무는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읽어나갔다.
"왕은 짐의 사자를 지나치게 호위하여 사방을 살피지 못하게 하고 객관에 가둬놓고 눈과 귀를 억압하였다. 무슨 음흉한 모계가 있기에 짐의 관원이 살피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이 대목에서 태왕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스쳐갔다.
"짐은 왕에게 땅을 내리고 벼슬을 주어 깊은 사랑과 특별한 혜택을 드러내려 했지만 왕은 오로지 불신감에 젖어 시기하고 의심하여 사신을 보낼 때마다 정보를 밀탐해가니 이 어찌 신하의 도리라 하겠는가?"
사실 문제는 첫 사신을 고구려로 보냈을 때 사신이 극진한 대접을 받고 온 것으로만 알았다. 가마에 태워 엄중 호위를 해주고 객관에 투숙한 후에는 연일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니 대국의 사신에 걸맞는 예를 취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사신을 보낼 때마다 대접은 융숭하게 받지만 고구려의 내부 사정에 관해 알아온 것이 거의 없었다. 이에 비해 고구려 사신은 수에 왔다가 돌아가면 나중에 은밀한 망명 행렬이 잇따르니 부아가 치밀 만도 했던 것이다.
문제의 국서를 나지막이 읽어 내려가던 고건무가 흠칫하고는 더 이상 읽지 못했다. 너무도 모욕적인 문장이 이어짐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영양태왕이 재촉했다.
"아우는 마저 읽지 않고 무얼 하는가?"
"예..."
고건무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소리를 낮추어 읽어나갔다.
"··· 이제 왕은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니 만약 그대를 내쫓는다면 그 자리를 비워둘 수 없으므로 짐의 친자(親子)를 보내어 그곳의 백성들을 살펴서 다스리게 할 것이다. 그러나 왕이 개과천선하여 짐의 뜻에 충실히 따른다면 무엇 때문에 짐의 아들을 보내는 수고를 하겠는가? 왕은 요수와 장강이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자, 이제 개과천선할 기회를 주노니 마땅히 짐의 뜻을 알아서 스스로 복을 구하기 바라노라."
고건무는 조심스럽게 낭독을 끝내고 영양태왕의 표정을 살폈다. 귀족들은 모두 태왕이 불같은 분노를 터뜨릴 것으로 생각하고 숨을 죽였다. 다른 때 같으면 연자유가 먼저 노성을 터뜨릴 수도 있겠지만 이번만은 그 역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태왕의 검미는 푸르르 떨렸고 이마에 솟은 굵은 힘줄도 경련을 했다. 수나라 사신 소적기는 식은 땀을 어찌나 흘렀는지 절인 배추 꼴이 되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태왕의 숨결이 점점 더 거칠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조용히 가라앉았다. 마음의 평정을 회복한 듯 그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마저 걸려 있었다.
"사신을 객관으로 돌려보내서 연금하라."
목을 베라는 명이 아니라 연금 지시가 떨어지자 소적기는 죽은 조상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듯 졸지에 안색이 밝아졌다.
“폐, 폐하! 성은이 백골난망이옵니다.”
수나라의 사신이 물러간 후 태왕은 도열한 귀족들을 빙 둘러보며 물었다.
"자, 어떻게 생각하시오?"
병마원수(兵馬元帥) 강이식(姜以式)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무례한 내용의 국서에는 붓이 아닌 칼로 화답해야 하옵니다."
대대로 연자유가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비한 전략을 충분히 세워 두었습니다. 이제 그것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습니다."
영양태왕이 자리를 함께 한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장군, 말갈 부락에는 짐의 뜻을 전하였소?"
"그렇사옵니다. 폐하께서 친솔하시는 개마기사단(蓋馬騎士團)이 당도하면 말갈의 용사들이 폐하를 따를 것입니다."
을지문덕이 고개를 숙이며 아뢰자, 태왕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부 국경의 욕살들에게 파발을 보내어 강병을 대기시키라는 명령을 전하고 중앙군을 모두 소집하도록 하라. 그리고 대성왕은 장산군도(長山群島)로 가서 수군을 지휘하라."
드디어 시작이었다. 안하무인격인 수나라를 상대로 고구려가 선제공격으로 전쟁의 서막을 열려는 것이었다. 한 산에 호랑이는 한 마리로 족한 법. 동방의 패자 고구려와 중원을 석권한 수나라가 마침내 자웅을 결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編作對象原書
유현종 著「대제국 고구려」아침나라編(2001년版)
정수인 著「우리 민족의 자부심 고구려의 역사」새움編(2005년版)
김진명 著「살수대첩」랜덤하우스중앙編(2005년版)
정호일 著「천손왕국 대고구려」우리겨레編(2001년版)
이일우 著「영광, 대고구려」정신문화사編(2004년版)
이언호 著「연개소문」큰방編(2006년版)
서길수 著「동아시아 문명의 중심 고구려」사계절출판사編(1999년版)
한종호 著「마지막 영웅」지문사編(1999년版)
오재성 著「만주는 과거 우리의 역사 무대였다!」국사광복국민운동본부編(2002년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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