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대동강의 고구려 수군 군영에는 갑옷을 입은 군인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훈련과 작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대성왕(大成王) 고건무(高建武)는 자신의 심복 장수들과 더불어 군선의 상태와 무기의 정비를 직접 감찰하고 있었다.
"전하, 결국은 전선(戰線)에 임하실 생각이십니까?"
고건무를 호위하던 장수 고승(高勝)이 물었다.
"내일이면 폐하께서 출정을 하신다고 하네. 그야말로 이대로 있으면 역적이 될 테고... 일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어."
"허나 그렇다고 군사를 움직이신다면 대대로(大對盧) 연자유(淵子遊) 대감의 뜻에 따르게 되시는 것이 아니옵니까?"
"진퇴양난(進退兩難)일세."
"욕살들 모두가 지금 전하의 뜻을 살피고 있사옵니다. 만약에 폐하의 의지를 따르신다면 그 반발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고건무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승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폐하는 이미 수나라와의 전쟁을 선포하셨고, 욕살들도 병력을 내어 이번 전쟁에 참전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네. 만일 욕살들이 폐하의 뜻을 거부한다면, 고구려를 배반하고 이적(利敵)행위를 한다는 백성들의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야."
고건무는 장수들과 함께 막사로 들어가 작전해도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수나라는 중원을 통일했어. 통일된 제후국 중에는 옛날의 오(吳)나 월(越)처럼 바다와 강에 정통한 수로군 병력이 있어. 다시 말한다면 수나라의 수군 또한 육군 못지않게 강하다는 거야. 여기 내주(來州)가 바로 저들의 본거지일세. 저들도 지금 바빠지고 있을 거야."
그때 고건무의 부장인 문걸(文傑)이 막사 안으로 들어와 아뢰었다.
"전하,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군의 전쟁 준비를 살펴보러 왔습니다."
"을지문덕이...? 들라 하라."
잠시 후 을지문덕이 막사 안으로 들어와 고건무에게 예를 취했다.
"허허허, 모두들 바쁘시군요. 전하께서 여기 수군 군영에 나와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뵈었습니다. 연일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고건무는 너털웃음을 짓는 을지문덕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대장군은 내가 어떻게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인지 그걸 감시하러 왔소?"
"허허허, 대장군의 직책을 가진 몸으로써 어찌 특정인의 감시를 목적으로 여기에 왔겠습니까? 다만 이번 전쟁에서 수군의 역할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전투 준비가 어느 정도 되어가고 있는가 살펴보러 왔을 뿐이옵니다."
을지문덕은 처소 안을 둘러보다가 전략지도와 여러 개의 나무로 깎아놓은 모형 군선을 주시했다.
"역시 대성왕 전하이십니다. 왕궁이 아닌 수군 군영에 나와 이렇듯 소임을 다하시려는 모습을 보니 소장은 마음이 든든합니다."
"태왕께서 전쟁을 선포하시고 직접 수나라의 변경으로 출정하시는 마당에 어찌 나 몰라라 할 수 있겠소?"
"결국은 이 모두가 고구려의 번영을 위한 일 아니겠사옵니까? 전하께서는 누구보다 군략에 밝으신 분이니 고구려의 위대한 승리에 큰 역할을 하시게 될 것이옵니다."
"욕살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것이오. 저들은 전쟁을 반대하고 있소이다. 비록 폐하의 명령이 떨어지긴 했지만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군사를 내려 하지 않을 것이외다."
"그렇다면 그들은 항명죄로 엄한 벌을 받게 될 지도 모릅니다."
"허허... 그건 그렇소이다. 그렇지만 저들의 불만이 쌓이면 그 감당을 누가 할 수 있겠소이까?"
"신권(臣權)이 강해지면 왕권(王權)은 약해지는 것입니다. 머리가 약한 용은 이미 용의 위엄을 잃은 것이지요. 전하께서 관장하시는 수군의 모습을 대충 보아하니 소장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사옵니다. 역시 전하께서는 바다에 관한 한 형통하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나이다."
"우리 수군의 전력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저들 수나라의 수군은 우리의 배가 넘소이다. 상대가 될 수 있겠소이까?"
"전쟁이란 결코 숫자나 덩치가 아닙니다."
고건무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소? 대대로 대감과 그대의 그런 오산이 바로 오늘 같은 결과를 부른 것이올시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우리 고구려인들이 저들의 발 아래 엎드려 목숨을 비는 따위는 원하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무리한 전쟁이 대답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무릇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도 한번 책을 잡히거나 얕보이게 되면 모든 중심을 송두리째 내어주게 됩니다. 그리되면 나중엔 왕실의 성씨인 고씨(高氏)도 사라지고 추모성왕(鄒牟聖王)의 신전(神殿)도,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훈적비(勳積碑)도 모두 다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어떻게 일만의 군대가 수십만의 군대를 향해 진격할 수 있단 말이오? 우리 수군만 해도 그래요. 배가 넘는 저들을 무엇으로 감당한단 말이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전하께서는 능히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허튼소리... 무엇으로 말이오?"
"전하께서 바다에 대해 두루 통달한 분이라는 것은 고구려인이라면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옵니다. 전하께서는 일찍부터 우리 고구려의 전 해안과 강과 바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져오셨습니다. 고구려가 오늘날 이만큼 부강해질 수 있었던 데에는 대륙으로의 진출보다도 일찌감치 바다 길을 열었기 때문이옵니다."
고건무는 잠시 말을 잊고 을지문덕을 마주보았다. 을지문덕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남송이 중원을 지배할 때, 우리 고구려가 그들과 무역을 하면서 한번에 8백필의 말을 배로 실어 보낸 적도 있사옵니다. 고구려의 앞선 조선술과 항해술에 놀란 중원 사람들이 그때 일을 사서에 자세히 기록해 놓을 것을 전하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어디 무역뿐이겠사옵니까?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께서 백제를 정벌하고 왜(倭)를 다스리신 것도 다 고구려에 강력한 수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전하께서는 누구보다도 그러한 옛 일을 잊지 않으시고 우리의 수군을 더욱 관심 있게 이끌어 오셨사옵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저들은 폐하의 군대를 막기 위해 임유관에서 요하 쪽으로 군사를 보낼 것이고 저들의 후방을 지원하기 위해 바다를 통해 수로군을 비사성 쪽으로 보낼 것이옵니다. 전하께서 하실 일이 크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해도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소. 지금이라도 이 전쟁을 막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고 하고 싶은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오. 전쟁이란 결국 승자나 패자 모두를 파괴시키는 짓이오. 손자(孫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자가 진정한 승자라고 말하지 않았소?"
고건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따라 일어서던 을지문덕은 홀낏 작은 모형 조각선을 하나 들어보았다. 조각선의 선수 중하단 부분에 충돌용 쇠뿔이 나와 있는 것을 유심히 보던 을지문덕은 고건무와 시선을 교환했다.
"이건 마치 삼족오의 날카롭고 뾰족한 부리 같사옵니다. 좋은 생각을 하고 계신 듯 합니다."
"답답해서 많은 생각을 해 보던 것 중에 하나올시다. 나가봅시다."
고건무는 여전히 침통한 표정으로 을지문덕의 말을 받았다.
막사 밖으로 나온 고건무와 을지문덕은 준비되고 있는 군선들 사이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넓은 기지에는 곳곳에서 군선을 수리하는 병사들의 손놀림이 바쁘고 정박해 있는 군선 안에서는 장비를 실어나르는 격군들의 움직임이 매우 부산했다. 한쪽에서는 집단으로 노를 젓거나 훈련하는 모습들도 보였다.
"대장군께서는 수나라의 수로군을 어찌 보시오?"
고건무가 묻자 을지문덕은 조용한 미소를 보내며 답했다.
"덩치만 큰 멍텅구리 배들이옵니다."
"허허... 우리 군선은요?"
"아군의 배는 빠르고 민첩하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낙관적이올시다? 허면 저들이 언제쯤 우리 해역으로 들어올 것 같소이까?"
"대규모의 전쟁은 몇년 혹은 몇달 전에 준비하지 않고는 어려운 것입니다. 폐하께서 요하를 넘으신 이후 족히 서너달은 걸려야 수나라의 수로군이 움직일 것입니다."
고건무는 을지문덕의 답변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저들이 어떤 작전으로 나올 것 같습니까?"
"다 아시면서 물으시니 황망하옵니다."
두 사람은 어느덧 한 군선의 갑판 위에 올랐다. 바닷물이 찰랑거리며 미세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말씀해 보시구려, 대장군. 저들이 어떤 작전으로 나올 것 같소이까?"
"십중팔구 국경의 끝 부분인 비사성(卑沙城)으로 군대를 상륙시켜 동시에 요하를 넘는 군대와 만나려고 할 것입니다."
"만약 저들이 평양으로 직공해 온다면 어쩌겠소?"
"그럴 수도 있겠으나 쉽지 않은 전략이옵니다. 도성을 허술하게 방비하는 나라가 어디 있겠사옵니까? 저들도 모를 리 없사옵니다. 게다가 적군의 장수가 신통하지 못하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 수나라의 함대를 총지휘하는 장수는 옛 진(陳)의 무관(武官)이었던 주라후(周羅喉)라는 장수요. 과거 크고 작은 강역의 전투에서 이름 깨나 날렸으며 평생 물과 함께 살아온 노련한 장수라고 들었소."
"황하(黃河)와 장강(長江)이 아무리 크다 한들 결국은 강이 아니옵니까? 그 자는 강 위에서의 싸움은 알아도 바다에서의 수전(水戰)은 모르는 자이옵니다. 강은 그저 일정한 형태로 흘러가지만 바다는 복잡하옵니다. 해류와 조류가 있고 계절풍이 있으며 수심의 얕고 깊음에 따라 전투의 향배가 결정되옵니다. 결국 모든 결정은 비사성 근처의 장산군도(長山群島)에서 이루어질 것이옵니다."
고건무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다가 을지문덕을 바라보았다.
"여보시오, 대장군. 태왕 폐하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대를 하늘이 내려준 기인이라고 칭송하지만 내가 볼 때는 그렇지 않은 것 같소이다. 대장군의 말대로라면 저들이 오는 것은 유월이나 늦어도 칠월쯤이 될 게요. 그때는 바람도 우리 쪽인 남동풍으로 불 것이고 해류 또한 남쪽으로 흐릅니다. 모든 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어 있는데, 어찌 이길 수 있다 장담을 하시는 게요?"
그때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깃발들이 세차게 펄럭이며 춤을 추었다. 한참 말이 없던 을지문덕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이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천문(天文)을 보았습니다. 치우천왕(蚩尤天王)께서 신풍(神豊)을 보내주실 것 같사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어떤 일이 있어도 족히 칠월 말까지는 모든 전함을 장산군도에서 묶어놓으셔야 하옵니다. 그리만 된다면 팔월 초에 하늘과 바다를 뒤집는 엄청난 신물이 있을 것이옵니다. 남쪽으로 향하던 해류가 멈추어 역류하고 조류가 그 물살을 빨리 할 것이며, 온 바다를 뒤엎는 신풍이 거꾸로 불어 저들을 집어삼킬 것이옵니다."
"그 무슨 황당한 소리요? 신풍이라니... 날더러 그런 허망한 말을 믿으라는 게요?"
"하늘은 거짓을 말하지 않사옵니다. 만일에 신풍이 불지 않으면 소인의 목을 베셔도 좋습니다. 하오나 칠월 마지막 날까지는 전하께서 하실 몫이 크시옵니다. 유월부터는 우기입니다. 바다에 해무가 자주 끼어 우리 군선이 적더라도 싸우실만 하실 것입니다."
"...?"
"그리고 아까 소인이 본 그 삼족오의 부리 말입니다. 미련하고 덩치만 큰 수나라의 군선 옆구리를 삼족오 부리가 들이받아 구멍을 낸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전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역시 전하는 바다에 관한 한 하늘의 이치를 깨치신 분입니다. 꼭 승전하실 것입니다."
을지문덕은 이제 할 말을 다했다는 듯이 고건무에게 예를 취하고 군선에서 내려갔다. 고건무는 돌아가는 문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외쳤다.
"대장군, 잘 들어두시오. 내가 전투에 나서는 것은 형님이신 폐하 때문이오. 다시는 대대로의 간계에 말려들지 않을 것이며, 그대가 의도한 대로 조정의 정책이 시행되지 않을 것이오. 이를 잘 명심하시오!"
을지문덕은 잠시 멈칫 섰다가 그대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고건무의 표정에서는 분기와 걱정이 함께 묻어나고 있었다.
전쟁역사소설「장군과 제왕」5.요하(遼河)의 싸움 (1)
"전하, 결국은 전선(戰線)에 임하실 생각이십니까?"
고건무를 호위하던 장수 고승(高勝)이 물었다.
"내일이면 폐하께서 출정을 하신다고 하네. 그야말로 이대로 있으면 역적이 될 테고... 일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어."
"허나 그렇다고 군사를 움직이신다면 대대로(大對盧) 연자유(淵子遊) 대감의 뜻에 따르게 되시는 것이 아니옵니까?"
"진퇴양난(進退兩難)일세."
"욕살들 모두가 지금 전하의 뜻을 살피고 있사옵니다. 만약에 폐하의 의지를 따르신다면 그 반발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고건무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승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폐하는 이미 수나라와의 전쟁을 선포하셨고, 욕살들도 병력을 내어 이번 전쟁에 참전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네. 만일 욕살들이 폐하의 뜻을 거부한다면, 고구려를 배반하고 이적(利敵)행위를 한다는 백성들의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야."
고건무는 장수들과 함께 막사로 들어가 작전해도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수나라는 중원을 통일했어. 통일된 제후국 중에는 옛날의 오(吳)나 월(越)처럼 바다와 강에 정통한 수로군 병력이 있어. 다시 말한다면 수나라의 수군 또한 육군 못지않게 강하다는 거야. 여기 내주(來州)가 바로 저들의 본거지일세. 저들도 지금 바빠지고 있을 거야."
그때 고건무의 부장인 문걸(文傑)이 막사 안으로 들어와 아뢰었다.
"전하,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군의 전쟁 준비를 살펴보러 왔습니다."
"을지문덕이...? 들라 하라."
잠시 후 을지문덕이 막사 안으로 들어와 고건무에게 예를 취했다.
"허허허, 모두들 바쁘시군요. 전하께서 여기 수군 군영에 나와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뵈었습니다. 연일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고건무는 너털웃음을 짓는 을지문덕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대장군은 내가 어떻게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인지 그걸 감시하러 왔소?"
"허허허, 대장군의 직책을 가진 몸으로써 어찌 특정인의 감시를 목적으로 여기에 왔겠습니까? 다만 이번 전쟁에서 수군의 역할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전투 준비가 어느 정도 되어가고 있는가 살펴보러 왔을 뿐이옵니다."
을지문덕은 처소 안을 둘러보다가 전략지도와 여러 개의 나무로 깎아놓은 모형 군선을 주시했다.
"역시 대성왕 전하이십니다. 왕궁이 아닌 수군 군영에 나와 이렇듯 소임을 다하시려는 모습을 보니 소장은 마음이 든든합니다."
"태왕께서 전쟁을 선포하시고 직접 수나라의 변경으로 출정하시는 마당에 어찌 나 몰라라 할 수 있겠소?"
"결국은 이 모두가 고구려의 번영을 위한 일 아니겠사옵니까? 전하께서는 누구보다 군략에 밝으신 분이니 고구려의 위대한 승리에 큰 역할을 하시게 될 것이옵니다."
"욕살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것이오. 저들은 전쟁을 반대하고 있소이다. 비록 폐하의 명령이 떨어지긴 했지만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군사를 내려 하지 않을 것이외다."
"그렇다면 그들은 항명죄로 엄한 벌을 받게 될 지도 모릅니다."
"허허... 그건 그렇소이다. 그렇지만 저들의 불만이 쌓이면 그 감당을 누가 할 수 있겠소이까?"
"신권(臣權)이 강해지면 왕권(王權)은 약해지는 것입니다. 머리가 약한 용은 이미 용의 위엄을 잃은 것이지요. 전하께서 관장하시는 수군의 모습을 대충 보아하니 소장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사옵니다. 역시 전하께서는 바다에 관한 한 형통하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나이다."
"우리 수군의 전력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저들 수나라의 수군은 우리의 배가 넘소이다. 상대가 될 수 있겠소이까?"
"전쟁이란 결코 숫자나 덩치가 아닙니다."
고건무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소? 대대로 대감과 그대의 그런 오산이 바로 오늘 같은 결과를 부른 것이올시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우리 고구려인들이 저들의 발 아래 엎드려 목숨을 비는 따위는 원하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무리한 전쟁이 대답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무릇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도 한번 책을 잡히거나 얕보이게 되면 모든 중심을 송두리째 내어주게 됩니다. 그리되면 나중엔 왕실의 성씨인 고씨(高氏)도 사라지고 추모성왕(鄒牟聖王)의 신전(神殿)도,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훈적비(勳積碑)도 모두 다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어떻게 일만의 군대가 수십만의 군대를 향해 진격할 수 있단 말이오? 우리 수군만 해도 그래요. 배가 넘는 저들을 무엇으로 감당한단 말이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전하께서는 능히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허튼소리... 무엇으로 말이오?"
"전하께서 바다에 대해 두루 통달한 분이라는 것은 고구려인이라면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옵니다. 전하께서는 일찍부터 우리 고구려의 전 해안과 강과 바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져오셨습니다. 고구려가 오늘날 이만큼 부강해질 수 있었던 데에는 대륙으로의 진출보다도 일찌감치 바다 길을 열었기 때문이옵니다."
고건무는 잠시 말을 잊고 을지문덕을 마주보았다. 을지문덕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남송이 중원을 지배할 때, 우리 고구려가 그들과 무역을 하면서 한번에 8백필의 말을 배로 실어 보낸 적도 있사옵니다. 고구려의 앞선 조선술과 항해술에 놀란 중원 사람들이 그때 일을 사서에 자세히 기록해 놓을 것을 전하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어디 무역뿐이겠사옵니까?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께서 백제를 정벌하고 왜(倭)를 다스리신 것도 다 고구려에 강력한 수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전하께서는 누구보다도 그러한 옛 일을 잊지 않으시고 우리의 수군을 더욱 관심 있게 이끌어 오셨사옵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저들은 폐하의 군대를 막기 위해 임유관에서 요하 쪽으로 군사를 보낼 것이고 저들의 후방을 지원하기 위해 바다를 통해 수로군을 비사성 쪽으로 보낼 것이옵니다. 전하께서 하실 일이 크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해도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소. 지금이라도 이 전쟁을 막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고 하고 싶은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오. 전쟁이란 결국 승자나 패자 모두를 파괴시키는 짓이오. 손자(孫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자가 진정한 승자라고 말하지 않았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습니다."
"그렇소. 그대를 대장군으로 천거한 대대로(大對盧) 연자유(淵子遊) 대감의 뜻대로 말이오."
"이제부터는 이길 계책만을 생각하시오소서."
고건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긴다? 과연 그럴 수 있겠소? 배가 넘는 수나라의 수군을 우리가 이길 수 있겠소?"
"그렇게 되실 것이옵니다."
"허, 그대는 허풍이 너무 심하구려."
"소인의 말이 너무 길었사옵니다. 우리의 전함들을 보여주시겠사옵니까?"
"나가봅시다."
고건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따라 일어서던 을지문덕은 홀낏 작은 모형 조각선을 하나 들어보았다. 조각선의 선수 중하단 부분에 충돌용 쇠뿔이 나와 있는 것을 유심히 보던 을지문덕은 고건무와 시선을 교환했다.
"이건 마치 삼족오의 날카롭고 뾰족한 부리 같사옵니다. 좋은 생각을 하고 계신 듯 합니다."
"답답해서 많은 생각을 해 보던 것 중에 하나올시다. 나가봅시다."
고건무는 여전히 침통한 표정으로 을지문덕의 말을 받았다.
막사 밖으로 나온 고건무와 을지문덕은 준비되고 있는 군선들 사이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넓은 기지에는 곳곳에서 군선을 수리하는 병사들의 손놀림이 바쁘고 정박해 있는 군선 안에서는 장비를 실어나르는 격군들의 움직임이 매우 부산했다. 한쪽에서는 집단으로 노를 젓거나 훈련하는 모습들도 보였다.
"대장군께서는 수나라의 수로군을 어찌 보시오?"
고건무가 묻자 을지문덕은 조용한 미소를 보내며 답했다.
"덩치만 큰 멍텅구리 배들이옵니다."
"허허... 우리 군선은요?"
"아군의 배는 빠르고 민첩하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낙관적이올시다? 허면 저들이 언제쯤 우리 해역으로 들어올 것 같소이까?"
"대규모의 전쟁은 몇년 혹은 몇달 전에 준비하지 않고는 어려운 것입니다. 폐하께서 요하를 넘으신 이후 족히 서너달은 걸려야 수나라의 수로군이 움직일 것입니다."
고건무는 을지문덕의 답변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저들이 어떤 작전으로 나올 것 같습니까?"
"다 아시면서 물으시니 황망하옵니다."
두 사람은 어느덧 한 군선의 갑판 위에 올랐다. 바닷물이 찰랑거리며 미세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말씀해 보시구려, 대장군. 저들이 어떤 작전으로 나올 것 같소이까?"
"십중팔구 국경의 끝 부분인 비사성(卑沙城)으로 군대를 상륙시켜 동시에 요하를 넘는 군대와 만나려고 할 것입니다."
"만약 저들이 평양으로 직공해 온다면 어쩌겠소?"
"그럴 수도 있겠으나 쉽지 않은 전략이옵니다. 도성을 허술하게 방비하는 나라가 어디 있겠사옵니까? 저들도 모를 리 없사옵니다. 게다가 적군의 장수가 신통하지 못하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 수나라의 함대를 총지휘하는 장수는 옛 진(陳)의 무관(武官)이었던 주라후(周羅喉)라는 장수요. 과거 크고 작은 강역의 전투에서 이름 깨나 날렸으며 평생 물과 함께 살아온 노련한 장수라고 들었소."
"황하(黃河)와 장강(長江)이 아무리 크다 한들 결국은 강이 아니옵니까? 그 자는 강 위에서의 싸움은 알아도 바다에서의 수전(水戰)은 모르는 자이옵니다. 강은 그저 일정한 형태로 흘러가지만 바다는 복잡하옵니다. 해류와 조류가 있고 계절풍이 있으며 수심의 얕고 깊음에 따라 전투의 향배가 결정되옵니다. 결국 모든 결정은 비사성 근처의 장산군도(長山群島)에서 이루어질 것이옵니다."
고건무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다가 을지문덕을 바라보았다.
"여보시오, 대장군. 태왕 폐하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대를 하늘이 내려준 기인이라고 칭송하지만 내가 볼 때는 그렇지 않은 것 같소이다. 대장군의 말대로라면 저들이 오는 것은 유월이나 늦어도 칠월쯤이 될 게요. 그때는 바람도 우리 쪽인 남동풍으로 불 것이고 해류 또한 남쪽으로 흐릅니다. 모든 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어 있는데, 어찌 이길 수 있다 장담을 하시는 게요?"
그때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깃발들이 세차게 펄럭이며 춤을 추었다. 한참 말이 없던 을지문덕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이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천문(天文)을 보았습니다. 치우천왕(蚩尤天王)께서 신풍(神豊)을 보내주실 것 같사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어떤 일이 있어도 족히 칠월 말까지는 모든 전함을 장산군도에서 묶어놓으셔야 하옵니다. 그리만 된다면 팔월 초에 하늘과 바다를 뒤집는 엄청난 신물이 있을 것이옵니다. 남쪽으로 향하던 해류가 멈추어 역류하고 조류가 그 물살을 빨리 할 것이며, 온 바다를 뒤엎는 신풍이 거꾸로 불어 저들을 집어삼킬 것이옵니다."
"그 무슨 황당한 소리요? 신풍이라니... 날더러 그런 허망한 말을 믿으라는 게요?"
"하늘은 거짓을 말하지 않사옵니다. 만일에 신풍이 불지 않으면 소인의 목을 베셔도 좋습니다. 하오나 칠월 마지막 날까지는 전하께서 하실 몫이 크시옵니다. 유월부터는 우기입니다. 바다에 해무가 자주 끼어 우리 군선이 적더라도 싸우실만 하실 것입니다."
"...?"
"그리고 아까 소인이 본 그 삼족오의 부리 말입니다. 미련하고 덩치만 큰 수나라의 군선 옆구리를 삼족오 부리가 들이받아 구멍을 낸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전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역시 전하는 바다에 관한 한 하늘의 이치를 깨치신 분입니다. 꼭 승전하실 것입니다."
을지문덕은 이제 할 말을 다했다는 듯이 고건무에게 예를 취하고 군선에서 내려갔다. 고건무는 돌아가는 문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외쳤다.
"대장군, 잘 들어두시오. 내가 전투에 나서는 것은 형님이신 폐하 때문이오. 다시는 대대로의 간계에 말려들지 않을 것이며, 그대가 의도한 대로 조정의 정책이 시행되지 않을 것이오. 이를 잘 명심하시오!"
을지문덕은 잠시 멈칫 섰다가 그대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고건무의 표정에서는 분기와 걱정이 함께 묻어나고 있었다.
編作對象原書
유현종 著「대제국 고구려」아침나라編(2001년版)
정수인 著「우리 민족의 자부심 고구려의 역사」새움編(2005년版)
김진명 著「살수대첩」랜덤하우스중앙編(2005년版)
정호일 著「천손왕국 대고구려」우리겨레編(2001년版)
이일우 著「영광, 대고구려」정신문화사編(2004년版)
이언호 著「연개소문」큰방編(2006년版)
서길수 著「동아시아 문명의 중심 고구려」사계절출판사編(1999년版)
한종호 著「마지막 영웅」지문사編(1999년版)
오재성 著「만주는 과거 우리의 역사 무대였다!」국사광복국민운동본부編(2002년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