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영양태왕(嬰陽太王)은 자신의 호위를 맡은 도성(都城) 수비대장 온준(溫俊), 이번 작전을 총지휘할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 을지문덕(乙支文德), 병마원수(兵馬元帥) 강이식(姜以式), 욕사(褥奢) 연태조(淵太祚)와 함께 개마기사단(蓋馬騎士團) 5천여명을 거느리고 평양성(平壤城)을 떠났다. 북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진군하던 태왕의 친정군(親征軍)이 국내성(國內城) 부근에 이르자 차가운 바람이 불어대면서 하늘에서는 진눈깨비가 흩날리기 시작하였다.
"어허,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구만. 만약 이런 날씨에 저들 수나라의 대군이 우리 고구려를 침범했다면 우리도 상당히 고전했을꺼야."
영양태왕이 손을 들어 얼굴을 때리는 진눈깨비를 휘저으며 말했다. 태왕을 시립하던 온준이 미소를 지었다.
"저들도 우리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려면 치밀한 준비 기간이 있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허나 을지 공의 계략대로 저들이 태풍과 전염병이 창궐하는 더운 계절에 우리 나라에 들어온다면 어쩌면 전황은 우리에게 유리해질 수도 있사옵니다."
"그래, 그래서 짐이 그 말을 믿고 이렇게 친정(親征)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어 태왕이 을지문덕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이곳에서 말갈(靺鞨) 속말부(粟末部)의 군사들과 조의(皁衣)들이 대기하며 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그렇사옵니다. 이번 작전의 의미를 충실히 하기 위해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훈적비(勳積碑)인 영락기공비(永樂紀功碑) 앞에서 사열을 할 것이옵니다."
태왕은 믿음직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정면을 주시했다. 그때 강이식이 손으로 앞을 가리키며 외쳤다.
"폐하, 저기 영락기공비가 보이옵니다. 오! 이 노장은 아직도 저 비만 보면 가슴이 울렁거리옵니다."
"짐도 그러하오. 그야말로 우리 대고구려(大高句麗)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니겠소? 가십시다."
웅장한 영락기공비(永樂紀功碑)를 배경으로 그 앞에 속말말갈족(粟末靺鞨族)의 병사 5천여명과 조의군(皁衣軍) 2천여명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멀리서 삼족오(三族烏)의 그림이 담긴 깃발을 나부끼며 한떼의 군마가 다가오자 조의사범(皁衣師範)인 용수(庸秀)가 말갈족장 아소친(牙素親)에게 소리를 질렀다.
"태왕 폐하께서 오고 계시오!"
"태왕 폐하께서 오신다. 모두 대오를 갖추어 지극한 예로써 뫼시어라!"
아소친은 부하들과 더불어 말을 몰아 영양태왕을 맞으러 나갔다. 두 일행 사이가 가까워지자 영양태왕이 말을 멈추었고, 아소친과 그의 부하들은 일제히 말에서 내려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소신은 말갈 속말부의 족장인 아소친이옵니다. 폐하께 문후 여쭈옵니다."
영양태왕은 아소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 그대가 말갈의 지도자인 아소친인가? 이토록 짐의 명을 잘 따라주니 고맙도다."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소신과 소신의 부족은 오직 대고구려의 신민(臣民)이자 폐하의 보살핌을 받는 백성이옵니다. 더구나 저 서토(西土)의 수(隨) 역시 저희 말갈족에게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이옵니다. 어명(御命)을 받자마자 지체없이 말을 몰아 달려왔사옵니다."
"과연 충용스러운 짐의 형제국이로다. 그대들과 짐은 이제 서토로 가게 될 것이다."
"알고 있사옵니다. 저 건방지고 오만한 수나라를 혼내주러 가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렇다. 서토는 모두가 다 한예족(韓叡族)의 땅이었다. 저 비를 보라, 아소친. 그대는 영락기공비(永樂紀功碑)의 내막을 아는가?"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대고구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왕이시며 불세출(不世出)의 대지존(大至尊)이신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께서 천하를 정벌하시고 나라 안을 평안하게 하신 그 웅후한 업적을 후대에 알리게 위해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옵니까?"
"그렇다. 짐은 그분의 후손으로서 그 영광의 기록을 재현하기 위하여 길을 나선 것이다. 대고구려의 영광은 아울러 그대들의 것이 될 것이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아소친은 자신의 부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대들은 들었는가? 고구려의 영광은 곧 우리 말갈의 영광이다. 고구려를 위하여 우리는 목숨을 다 내놓아야 할 것이다."
영양태왕은 조의들에게 눈길을 주며 을지문덕에게 물었다.
"음... 우리 조의들도 보이는구먼. 저들도 짐과 함께 서토로 가려고 왔는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저들은 나라를 위한 싸움에 절대 빠지지 않는 일당백의 용사들이옵니다."
을지문덕이 조의사범 용수에게 눈짓을 주자, 용수가 군례를 올리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소인은 조의사범 용수이옵니다. 태왕 폐하와 함께 요하를 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옵니다."
"장하다. 나라를 위해 오직 그 어떤 보답도 원하지 않고 목숨을 내놓으려 하는 그대들의 충정을 짐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로다."
영양태왕은 이번 전투에 참전하는 모든 전사들에게 외쳤다.
"이제, 우리 정벌군에게는 승리만이 있을 뿐이로다. 서토를 정벌하는 것이다. 모두 전선으로 간다. 전군, 진군하라!"
고구려, 말갈 연합군은 서서히 말발굽을 움직이며 서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행군 도중에 아소친은 자신의 딸인 아예신(牙譽申)과 함께 을지문덕과 말을 나란히 하며 입을 열었다.
"수나라를 상대로 싸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렇게 참전하게 됐지만 고구려의 태왕 폐하를 가까이에서 알현하게 되니 긴장이 더욱 고조되는구려. 우리 말갈족이 기대만큼 잘 싸울 수 있을지 걱정도 되고..."
"고구려의 귀족들 가운데 일부는 말갈족을 잡병이라며 비하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말갈족만한 용감무쌍한 전사들은 고구려에도 흔치 않습니다. 이번 작전에서 아소친 족장과 말갈족의 역할이 가장 클 겁니다. 그런데..."
을지문덕은 아소친의 딸인 아예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족장의 따님께서 이번 작전에 참가한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연약한 아녀자의 몸으로 험난하고 살벌한 전장을 견딜 수 있을지..."
"허허허... 이래뵈도 웬만한 장정 못지않은 무예 실력을 갖추었소이다. 우리 말갈족은 어릴 때부터 기마(騎馬)와 창궁(槍弓)을 함께 하며 살아가는데 여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되지는 않소."
"하긴... 그렇군요."
을지문덕은 아예신과 눈빛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아예신은 잠시 얼굴을 붉혔다. 몇달전 박달산에서 비록 자신이 요구한 것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문덕과 했던 방사(房事)가 생각났던 것이다. 그러나 문덕은 그때의 일을 잊었는지, 아니면 내색하지 않으려는 것인지 무덤덤한 표정으로 병사들의 행군을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아흑..."
수나라의 도성인 장안성(長安城)의 황궁.
중원에서 일인자의 위치에 있는 황제(皇帝)의 침전(寢殿)에서는 듣기에도 낯뜨거운 웬 여인의 끈적한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귀에 들리기만 해도 청각적 성욕을 자극하는 목소리...
육감적인 몸매의 젊은 여인이 실오라기 한올도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한 노인의 몸 아래 깔린 채 교성(嬌聲)을 내지르고 있었다. 노인은 보기에도 큼직한 여인의 젖가슴을 붙잡고 유두(乳頭)를 혀로 핥으며 여체(女體)를 달아오르게 하고 있었다.
자신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젊은 여자와의 색사(色事)에 몰입하고 있는 이 노인은 바로 수나라의 초대 황제인 문제(文帝) 양견(楊堅)이었다. 항상 세월이 흐를수록 자신의 늙은 모습을 한탄하고 지내던 양견은 젊은 여인들과의 성교(性交)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자신의 정력은 절대 늙지 않았음을 확인받고 싶어했다. 그래서 오늘도 토욕혼(吐谷渾)에서 바친 공녀(貢女)의 몸을 탐하면서 성욕(性慾)을 채우는 중이었다.
황후 독고씨(獨孤氏)도 남편인 황제가 여색(女色)을 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황제 앞에서 그것을 질책하거나 투기(妬忌)를 부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황제가 나이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색사(色事)에 집착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역대 제왕 가운데 호색한(好色漢)이 특히 많았다는 전례를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그녀를 관대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황제의 색사가 더욱 심해지고 지나칠수록 황후의 관대한 태도도 언제 변할 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허억!"
"아아... 하악!"
문제가 자신의 남근(男根)을 토욕혼 여자의 음문(陰門)에 막 삽입하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문밖에서 당직 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급보이옵니다. 고구려왕 고원(高元)이 발칙하게도 우리 수나라의 국경으로 군대를 이끌고 오고 있다 하옵니다."
"무엇이...!?"
당직 관리의 보고는 이제 막 여인과의 합체(合體)를 시도하려던 문제의 성욕을 일거에 무너뜨려 버렸다. 문제(文帝)는 즉시 옷을 찾아 입고 침전을 나설 채비를 갖추며 내관(內官)에게 일렀다.
"백관 신료들을 당장 집합시켜라!"
대전(大殿)에 모인 신하들을 바라보며 문제는 분기한 눈빛으로 말했다.
"고구려가 우리에게 군사 도발을 했다는 말이 사실이냐?"
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裵構)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고구려왕 고원이 우리 사신을 연금하고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영주로 진격하고 있다 하옵니다."
"고원, 이 자가 실성을 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그런 것 같사옵니다. 변방의 작은 나라에 묻혀 살다보니 어찌 대국의 사정을 알 리가 있겠사옵니까?"
우복야(右僕射) 양소(楊蘇)의 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무지 납득이 안 가지 않은가? 짐이 이 중원을 통일한 이후로 사방 수천 수만리의 제후들이 모두 머리를 숙이고 무릎으로 기어와 짐의 명령을 받들었거늘..."
문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폐하, 결국은 힘으로써 저들의 기를 꺾어야 하옵니다. 미련한 족속들에게는 매가 약이옵니다."
양소의 말에 배구가 잠시 딴죽을 걸고 나왔다.
"하오나 폐하, 폐하께서 어지러운 천하를 수습하시는 동안에 고구려는 나름대로 곡식을 비축해놓고 무기를 생산하여 전쟁 준비를 해 온 것으로 파악되고 있사옵니다. 이를 충분히 감안하시오소서."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저따위 고구려가 무엇이 두려워서 뭘 감안하라는게야? 우리 군대가 가는 곳마다 승리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짐의 이름을 듣고 도망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긴 말 할것 없다. 여봐라, 우복야!"
"예, 폐하."
"지금 고구려로 보낼 군사가 얼마나 되는가?"
"오십만의 정예부병이 있사옵니다. 그 중 십만은 임유관 가까운 곳에 주둔하고 있으니 서두른다면 한 달 안에 출병이 가능할 것으로 보옵니다. 나머지는 전국에 산재해 있어 족히 서너달은 걸려야 전쟁에 임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십만이라...? 뭐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아마도 그럴 것이옵니다. 하오나 폐하, 전쟁이란 적에 대한 충분한 첩보와 능히 오래 싸울 수 있는 후속 준비가 마련된 뒤에야 가능한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호랑이는 한 마리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한다 하였사옵니다."
좌복야(左僕射) 고경(高經)의 말에 문제는 오히려 짜증스러운 어투로 답했다.
"그대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지금 고구려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영주로 온다고 하지 않는가? 이번에 고구려왕을 사로잡고 대군을 보내어 고구려 전토를 쓸어 버려야겠다. 우선 임유관에 주둔해 있는 십만 대군의 출병을 서두르도록 하라."
"예, 폐하!"
그때 내관이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황후 마마께서 오셨사옵니다."
독고황후가 시녀들과 함께 대전에 들자 제신들이 예를 표했다.
"여보시오, 우복야. 궁 안이 소란스러운 걸 보니 뭔가 일이 생긴 모양이구려?"
유달리 국사(國事)에 관심이 많고 참견하기를 즐겨하는 황후의 질문에 양소는 고개를 숙이고 간단한 답변만 했다.
"예, 황후 마마."
"그럴 일이 있소이다. 이리 앉으시오. 경들은 물러가오."
문제는 제신들을 물리치고 독고황후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황후는 차를 마시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라가 안정되어 백성들이 태평가를 부른다 하더니만 또 무슨 일이옵니까?"
"들쥐 새끼 한마리가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렸소. 그 일은 조당에서 의논들을 할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 아들들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어야 하겠소."
"그렇다면 둘째 양광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하는 동안 전공(戰功)을 많이 세웠으니 다시 광이를 출전시키십시오."
양광을 출전시키라는 황후의 말에 문제는 잠시 뜸을 들이며 말했다.
"하지만 진왕(晉王) 양광(楊廣)은 너무 많은 공을 세웠소. 한쪽으로만 너무 몰아주면 다른 한쪽은 불만을 갖는 법이거든."
"정 그렇다면 막내밖에 없지 않습니까?"
"음, 한왕(韓王) 말이구려. 아, 황후가 그리 말씀하시면 막내로 해야지요. 허허허..."
전쟁역사소설「장군과 제왕」5.요하(遼河)의 싸움 (2)
"어허,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구만. 만약 이런 날씨에 저들 수나라의 대군이 우리 고구려를 침범했다면 우리도 상당히 고전했을꺼야."
영양태왕이 손을 들어 얼굴을 때리는 진눈깨비를 휘저으며 말했다. 태왕을 시립하던 온준이 미소를 지었다.
"저들도 우리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려면 치밀한 준비 기간이 있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허나 을지 공의 계략대로 저들이 태풍과 전염병이 창궐하는 더운 계절에 우리 나라에 들어온다면 어쩌면 전황은 우리에게 유리해질 수도 있사옵니다."
"그래, 그래서 짐이 그 말을 믿고 이렇게 친정(親征)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어 태왕이 을지문덕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이곳에서 말갈(靺鞨) 속말부(粟末部)의 군사들과 조의(皁衣)들이 대기하며 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그렇사옵니다. 이번 작전의 의미를 충실히 하기 위해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훈적비(勳積碑)인 영락기공비(永樂紀功碑) 앞에서 사열을 할 것이옵니다."
태왕은 믿음직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정면을 주시했다. 그때 강이식이 손으로 앞을 가리키며 외쳤다.
"폐하, 저기 영락기공비가 보이옵니다. 오! 이 노장은 아직도 저 비만 보면 가슴이 울렁거리옵니다."
"짐도 그러하오. 그야말로 우리 대고구려(大高句麗)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니겠소? 가십시다."
웅장한 영락기공비(永樂紀功碑)를 배경으로 그 앞에 속말말갈족(粟末靺鞨族)의 병사 5천여명과 조의군(皁衣軍) 2천여명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멀리서 삼족오(三族烏)의 그림이 담긴 깃발을 나부끼며 한떼의 군마가 다가오자 조의사범(皁衣師範)인 용수(庸秀)가 말갈족장 아소친(牙素親)에게 소리를 질렀다.
"태왕 폐하께서 오고 계시오!"
"태왕 폐하께서 오신다. 모두 대오를 갖추어 지극한 예로써 뫼시어라!"
아소친은 부하들과 더불어 말을 몰아 영양태왕을 맞으러 나갔다. 두 일행 사이가 가까워지자 영양태왕이 말을 멈추었고, 아소친과 그의 부하들은 일제히 말에서 내려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소신은 말갈 속말부의 족장인 아소친이옵니다. 폐하께 문후 여쭈옵니다."
영양태왕은 아소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 그대가 말갈의 지도자인 아소친인가? 이토록 짐의 명을 잘 따라주니 고맙도다."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소신과 소신의 부족은 오직 대고구려의 신민(臣民)이자 폐하의 보살핌을 받는 백성이옵니다. 더구나 저 서토(西土)의 수(隨) 역시 저희 말갈족에게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이옵니다. 어명(御命)을 받자마자 지체없이 말을 몰아 달려왔사옵니다."
"과연 충용스러운 짐의 형제국이로다. 그대들과 짐은 이제 서토로 가게 될 것이다."
"알고 있사옵니다. 저 건방지고 오만한 수나라를 혼내주러 가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렇다. 서토는 모두가 다 한예족(韓叡族)의 땅이었다. 저 비를 보라, 아소친. 그대는 영락기공비(永樂紀功碑)의 내막을 아는가?"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대고구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왕이시며 불세출(不世出)의 대지존(大至尊)이신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께서 천하를 정벌하시고 나라 안을 평안하게 하신 그 웅후한 업적을 후대에 알리게 위해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옵니까?"
"그렇다. 짐은 그분의 후손으로서 그 영광의 기록을 재현하기 위하여 길을 나선 것이다. 대고구려의 영광은 아울러 그대들의 것이 될 것이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아소친은 자신의 부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대들은 들었는가? 고구려의 영광은 곧 우리 말갈의 영광이다. 고구려를 위하여 우리는 목숨을 다 내놓아야 할 것이다."
영양태왕은 조의들에게 눈길을 주며 을지문덕에게 물었다.
"음... 우리 조의들도 보이는구먼. 저들도 짐과 함께 서토로 가려고 왔는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저들은 나라를 위한 싸움에 절대 빠지지 않는 일당백의 용사들이옵니다."
을지문덕이 조의사범 용수에게 눈짓을 주자, 용수가 군례를 올리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소인은 조의사범 용수이옵니다. 태왕 폐하와 함께 요하를 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옵니다."
"장하다. 나라를 위해 오직 그 어떤 보답도 원하지 않고 목숨을 내놓으려 하는 그대들의 충정을 짐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로다."
영양태왕은 이번 전투에 참전하는 모든 전사들에게 외쳤다.
"이제, 우리 정벌군에게는 승리만이 있을 뿐이로다. 서토를 정벌하는 것이다. 모두 전선으로 간다. 전군, 진군하라!"
고구려, 말갈 연합군은 서서히 말발굽을 움직이며 서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행군 도중에 아소친은 자신의 딸인 아예신(牙譽申)과 함께 을지문덕과 말을 나란히 하며 입을 열었다.
"수나라를 상대로 싸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렇게 참전하게 됐지만 고구려의 태왕 폐하를 가까이에서 알현하게 되니 긴장이 더욱 고조되는구려. 우리 말갈족이 기대만큼 잘 싸울 수 있을지 걱정도 되고..."
"고구려의 귀족들 가운데 일부는 말갈족을 잡병이라며 비하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말갈족만한 용감무쌍한 전사들은 고구려에도 흔치 않습니다. 이번 작전에서 아소친 족장과 말갈족의 역할이 가장 클 겁니다. 그런데..."
을지문덕은 아소친의 딸인 아예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족장의 따님께서 이번 작전에 참가한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연약한 아녀자의 몸으로 험난하고 살벌한 전장을 견딜 수 있을지..."
"허허허... 이래뵈도 웬만한 장정 못지않은 무예 실력을 갖추었소이다. 우리 말갈족은 어릴 때부터 기마(騎馬)와 창궁(槍弓)을 함께 하며 살아가는데 여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되지는 않소."
"하긴... 그렇군요."
을지문덕은 아예신과 눈빛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아예신은 잠시 얼굴을 붉혔다. 몇달전 박달산에서 비록 자신이 요구한 것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문덕과 했던 방사(房事)가 생각났던 것이다. 그러나 문덕은 그때의 일을 잊었는지, 아니면 내색하지 않으려는 것인지 무덤덤한 표정으로 병사들의 행군을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아흑..."
수나라의 도성인 장안성(長安城)의 황궁.
중원에서 일인자의 위치에 있는 황제(皇帝)의 침전(寢殿)에서는 듣기에도 낯뜨거운 웬 여인의 끈적한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귀에 들리기만 해도 청각적 성욕을 자극하는 목소리...
육감적인 몸매의 젊은 여인이 실오라기 한올도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한 노인의 몸 아래 깔린 채 교성(嬌聲)을 내지르고 있었다. 노인은 보기에도 큼직한 여인의 젖가슴을 붙잡고 유두(乳頭)를 혀로 핥으며 여체(女體)를 달아오르게 하고 있었다.
자신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젊은 여자와의 색사(色事)에 몰입하고 있는 이 노인은 바로 수나라의 초대 황제인 문제(文帝) 양견(楊堅)이었다. 항상 세월이 흐를수록 자신의 늙은 모습을 한탄하고 지내던 양견은 젊은 여인들과의 성교(性交)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자신의 정력은 절대 늙지 않았음을 확인받고 싶어했다. 그래서 오늘도 토욕혼(吐谷渾)에서 바친 공녀(貢女)의 몸을 탐하면서 성욕(性慾)을 채우는 중이었다.
황후 독고씨(獨孤氏)도 남편인 황제가 여색(女色)을 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황제 앞에서 그것을 질책하거나 투기(妬忌)를 부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황제가 나이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색사(色事)에 집착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역대 제왕 가운데 호색한(好色漢)이 특히 많았다는 전례를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그녀를 관대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황제의 색사가 더욱 심해지고 지나칠수록 황후의 관대한 태도도 언제 변할 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허억!"
"아아... 하악!"
문제가 자신의 남근(男根)을 토욕혼 여자의 음문(陰門)에 막 삽입하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문밖에서 당직 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급보이옵니다. 고구려왕 고원(高元)이 발칙하게도 우리 수나라의 국경으로 군대를 이끌고 오고 있다 하옵니다."
"무엇이...!?"
당직 관리의 보고는 이제 막 여인과의 합체(合體)를 시도하려던 문제의 성욕을 일거에 무너뜨려 버렸다. 문제(文帝)는 즉시 옷을 찾아 입고 침전을 나설 채비를 갖추며 내관(內官)에게 일렀다.
"백관 신료들을 당장 집합시켜라!"
대전(大殿)에 모인 신하들을 바라보며 문제는 분기한 눈빛으로 말했다.
"고구려가 우리에게 군사 도발을 했다는 말이 사실이냐?"
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裵構)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고구려왕 고원이 우리 사신을 연금하고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영주로 진격하고 있다 하옵니다."
"고원, 이 자가 실성을 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그런 것 같사옵니다. 변방의 작은 나라에 묻혀 살다보니 어찌 대국의 사정을 알 리가 있겠사옵니까?"
우복야(右僕射) 양소(楊蘇)의 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무지 납득이 안 가지 않은가? 짐이 이 중원을 통일한 이후로 사방 수천 수만리의 제후들이 모두 머리를 숙이고 무릎으로 기어와 짐의 명령을 받들었거늘..."
문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폐하, 결국은 힘으로써 저들의 기를 꺾어야 하옵니다. 미련한 족속들에게는 매가 약이옵니다."
양소의 말에 배구가 잠시 딴죽을 걸고 나왔다.
"하오나 폐하, 폐하께서 어지러운 천하를 수습하시는 동안에 고구려는 나름대로 곡식을 비축해놓고 무기를 생산하여 전쟁 준비를 해 온 것으로 파악되고 있사옵니다. 이를 충분히 감안하시오소서."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저따위 고구려가 무엇이 두려워서 뭘 감안하라는게야? 우리 군대가 가는 곳마다 승리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짐의 이름을 듣고 도망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긴 말 할것 없다. 여봐라, 우복야!"
"예, 폐하."
"지금 고구려로 보낼 군사가 얼마나 되는가?"
"오십만의 정예부병이 있사옵니다. 그 중 십만은 임유관 가까운 곳에 주둔하고 있으니 서두른다면 한 달 안에 출병이 가능할 것으로 보옵니다. 나머지는 전국에 산재해 있어 족히 서너달은 걸려야 전쟁에 임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십만이라...? 뭐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아마도 그럴 것이옵니다. 하오나 폐하, 전쟁이란 적에 대한 충분한 첩보와 능히 오래 싸울 수 있는 후속 준비가 마련된 뒤에야 가능한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호랑이는 한 마리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한다 하였사옵니다."
좌복야(左僕射) 고경(高經)의 말에 문제는 오히려 짜증스러운 어투로 답했다.
"그대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지금 고구려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영주로 온다고 하지 않는가? 이번에 고구려왕을 사로잡고 대군을 보내어 고구려 전토를 쓸어 버려야겠다. 우선 임유관에 주둔해 있는 십만 대군의 출병을 서두르도록 하라."
"예, 폐하!"
그때 내관이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황후 마마께서 오셨사옵니다."
독고황후가 시녀들과 함께 대전에 들자 제신들이 예를 표했다.
"여보시오, 우복야. 궁 안이 소란스러운 걸 보니 뭔가 일이 생긴 모양이구려?"
유달리 국사(國事)에 관심이 많고 참견하기를 즐겨하는 황후의 질문에 양소는 고개를 숙이고 간단한 답변만 했다.
"예, 황후 마마."
"그럴 일이 있소이다. 이리 앉으시오. 경들은 물러가오."
문제는 제신들을 물리치고 독고황후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황후는 차를 마시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라가 안정되어 백성들이 태평가를 부른다 하더니만 또 무슨 일이옵니까?"
"들쥐 새끼 한마리가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렸소. 그 일은 조당에서 의논들을 할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 아들들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어야 하겠소."
"그렇다면 둘째 양광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하는 동안 전공(戰功)을 많이 세웠으니 다시 광이를 출전시키십시오."
양광을 출전시키라는 황후의 말에 문제는 잠시 뜸을 들이며 말했다.
"하지만 진왕(晉王) 양광(楊廣)은 너무 많은 공을 세웠소. 한쪽으로만 너무 몰아주면 다른 한쪽은 불만을 갖는 법이거든."
"정 그렇다면 막내밖에 없지 않습니까?"
"음, 한왕(韓王) 말이구려. 아, 황후가 그리 말씀하시면 막내로 해야지요. 허허허..."
문제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독고황후의 눈길을 피했다.
編作對象原書
유현종 著「대제국 고구려」아침나라編(2001년版)
정수인 著「우리 민족의 자부심 고구려의 역사」새움編(2005년版)
김진명 著「살수대첩」랜덤하우스중앙編(2005년版)
정호일 著「천손왕국 대고구려」우리겨레編(2001년版)
이일우 著「영광, 대고구려」정신문화사編(2004년版)
이언호 著「연개소문」큰방編(2006년版)
서길수 著「동아시아 문명의 중심 고구려」사계절출판사編(1999년版)
한종호 著「마지막 영웅」지문사編(1999년版)
오재성 著「만주는 과거 우리의 역사 무대였다!」국사광복국민운동본부編(2002년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