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역 토자이센(東西線). 키바역(木場驛)은 다른 지하철역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열차를 타려면 긴 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야만 했다. 물론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에어컨이나 온풍기가 가동되는 실내에 있을 수 있다는 게 나름대로의 장점이긴 했지만 역시 전차 쪽이 더 편하다는 생각이다.
-귀찮군.
이라는 단순한 느낌 외에는 생각하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 듯 보이는 사나이가 파김치가 되어 개찰구에 들어섰다. 오늘 그는 12시가 훌쩍 넘는 야근으로 인해 매우 지쳐있었다.
사이토 쇼고. 남자의 이름이었다. 175정도 되는 키에 적당하게 근육도 있고 지방도 있는, 그리 특기할만한 점은 없는 사나이였다. 다만 조금 남다르다고 할 것은 핏기없이 하얀 피부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적당히 남자다운 팔뚝과 목, 그리고 간간이 드러나는 가슴팍은 그런대로 그을렸지만, 왠지 모르게 얼굴만은 태어날 때부터 줄곧 창백했다. 그는 그렇게 남자다운 성격은 아니었으나, 또한 여성스럽지도 않았기에 주위 사람들이 그의 새하얀 피부에 대해 어떤 얘기를 하는것에 대해 그다지 좋게 생각하는 편은 아니었다. 왜냐면 하얀 얼굴은 곧 ‘계집애 같다’라는 뜻이라고 그는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호라, 홋카이도 출신이라서 하얀거였군요?!
-홋카이도에는 겨울에 영하 10도까지 내려가기도 하고, 눈이 그렇게 많이 내린다는데..정말인가요? 그곳에서 눈을 맞고 자라면 모두 당신처럼 하얘지는 건가요? 하하하
그들이라고 딱히 그렇게 생각하는건 아니겠지만 사이토와 새로 알게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런 얘기를 했다. 그냥 오늘 날씨가 어떻다는둥, 일본과 독일의 어제 경기가 어땠다는 둥 하는것처럼, 그저 아무 의미없이 오가는 이야기중 하나였던 것이다.
띠링 띠링 띠링-
익숙한 열차 도착음이 울리고 이어서 열차가 도착했다. 금요일의 마지막 지하철. 그랬다. 사이토는 마지막 지하철 시간을 간당간당하게 맞출 때까지 잔업을 한 것이었다. 홋카이도에서 이곳 도쿄로 옮겨와 자신의 첫 직장인 [파와댕키]에 입사한 지 어느덧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사이토가 탄 열차의 칸에는 자신을 제외하고 단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 열차에 단 두사람밖에 없다니 조금 신기한 일이었다.
사이토 외에 이 열차에 몸을 싣고 있는 또 한 사람은 여자였다. 대충 묶은 머리를 숙이고 한창 소설책에 빠져있는 모습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사이토는 문득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을 느꼈을까, 아니면 아무 뜻없이 그런 거였을까. 고개를 들어올린 그녀도 사이토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을 사이토와 그녀는 서로 마주보았다.
-아는 사람인가?
자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피하지 않고 이쪽을 마주 바라보는 그녀를 보며 사이토는 문득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전에 한번 만난 적이 있는 사람 같았다. 잠깐 그렇게 기억을 헤아리는 사이 그녀는 그를 향해 가볍게 웃으며 목례했다. 그것은 그저 모르는 사람들끼리 눈이 마주친 것에 대한 겸연쩍음을 넘기는 일반적인 처세였다. 그제야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이토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왠지 다시 바라보기가 민망했다. 혹시나 다시 봤는데 눈이라도 마주치면 조금 우스운 꼴이 되는 것이라고 사이토는 생각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눈을 감았지만 그는 얼마동안 앞에 앉은 여자가 혹시나 어딘가에서 만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음악에 집중하지 못했다. 혹시 거래처에서 만난 사람일까..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딱히 특징은 없는 여자였지만 책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그녀의 단정한 얼굴을 보면서 그는 확실히 처음 본 여자라고 결론을 내렸다. 왠지 이런 여자를 어딘가에서 만났더라면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잊지않고 기억해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이런저런 생각을 털어낸 사이토는 다시 눈을 감고 음악에 열중했다. 코야나기 류노스케의 ‘영원히 너에게’ 라는 곡이었다. 꽤 감미로우면서도 독특한 코야나기의 음색에 그는 새로이 빠져들고 있는 중이었다.
열차는 두어번 멈추어서 조금 기다렸다가 출발하기를 반복했다. 너무 짧은 배차간격으로 앞차와의 간격이 너무 좁을 경우 이렇게 자주 멈추곤 하는 지하철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지라 사이토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수면상태와 각성상태의 중간에서 나른하게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피슉, 소리와 함께 열차가 네 번째 멈춰섰다. 그제서야 사이토는 이어폰을 빼고 네 번째 반복되었을 안내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 안내방송의 내용은 사이토가 생각한 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현재 이이다바시 역에서 인사사고가 발생했을 가능성으로 인하여 잠시 열차운행이 지체됩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인사사고...! 또 누가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을 한걸까. 아니면..
딱히 다른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안내방송이 조금 이상하다. 인사사고면 인사사고지 ‘발생했을 가능성’ 이라니. 너무 무책임한 말이었다. 확실한 사고의 원인도 모르다니 한심했다. 그리고 거리상으로도 지금 운전이 멈춰진 이곳은 이이다바시 역 바로 전 정거장의 중간 길목이 아닌가. 터무니없이 늦은 대처였다.
그때였다. 몇 번의 깜박거림이 있더니 열차안의 전등과 무음 텔레비전이 갑작스럽게 꺼져버렸다. 불길함을 느낀 사이토가 어둠 속에서 눈을 번쩍 떴다. 삽시간에 전철 안은 죽은 도시처럼 새까맣고 조용해졌다. 알게모르게 소리를 내고 있었던 전철의 시동상태 소음이 없어지고나니 전차내는 무척이나 적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뭐지?
동태를 살피는 사이 이윽고 비상전력에 의해 전철 안은 다시 밝아졌지만, 빛과는 상관없는 공포가 삽시간에 주위를 감쌌다. 그러다가 문득 앞에 앉은 여자에게로 시선이 갔다. 여자는 놀란 얼굴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다시 스피커에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님들께 알립니다. 앞 차에 발생한 화재 문제로 인하여 당분간 열차운행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현재 앞 정거장에서 유출된 열기와 가스로 인해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있는 상황입니다. 다시한번...”
안내방송은 울리다 말고 도중에 끊겼고, 동시에 비상전력도 손실되었는지 열차 안은 또다시 섬짓한 어둠과 고요속에 빠지고 말았다.
사이토 쇼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뭔가를 해보려는 것 보다는 앞에 앉아있는 여자가 핸프폰으로 전화를 걸려 하다가 바닥에 그것을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분명 손을 덜덜 떨었기 때문에 떨어뜨린 거겠지, 라고 생각한 사이토는 일단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생각으로 그녀 앞으로 다가가며 먼저 말을 붙였다.
“괜찮습니까?”
“........”
그녀는 별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사이토가 내민 본인의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그러다가 문득 본의 아니게 상대방의 말을 무시 한 것에 대해 미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급하게 말을 받았다.
“죄송해요.. 아, 전 괜찮아요. 그보다..지금 어떻게 되어 가는 걸까요?”
의외로 목소리는 맑았다.
“글쎄요.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이대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창밖의 검은 기체를 바라보며 사이토가 조용히 말했다. 사이토는 상체를 구부리고 유리창에 이마를 바짝 댄 채로 검은 액체를 눈여겨보았다.
“우린 갇힌 걸까요? 제 생각엔..옆 칸으로 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 사이토를 눈으로 좇으며 그녀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일반적인 남자가 생각할 정도로 가련하고 겁에 질린 모습은 아니었다. 옆칸으로 통하는 문 손잡이를 잡아당여보던 사이토는 조금 긴장된 얼굴로 말을 받았다.
“예. 저도 같은 생각이지만.. 어떻게 된 건지 문이 잠겨있습니다.”
“그런...”
그녀는 불안해하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가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 보였다. 그런 그녀의 담담한 모습과는 별개로 사이토는 왠지 책임감 같은 것을 느꼈다. 책임감이라고 하는게 맞을까. 그건 일종의 중압감이었다. 사이토의 옆에 앉아있는 ‘유일한 지하철사고 동료’ 가 여자인 이상 왠지 자신이 나서서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리저리 차체를 기웃거려보거나, 건전지로 사용되는 비상전등을 찾아내어 작동시키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비상 레버를 젖히고 밖에 나가보는건 어떨까요?”
어느정도의 시간이 지난 걸까, 기나긴 침묵을 깨고 여자가 말했다. 의외로 대담하다는 생각을 하며 사이토가 말을 받았다.
“밖에 나가서 철로를 따라 다음 역으로 간 후 탈출한다...좋은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불가능 할 것 같습니다.”
“왜죠?”
“저기 밖에 검은 연기 보이시죠? 화재로 인한 유독가스가 이곳까지 미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곳 철로는 밀폐되어있는 지하입니다. 아마 문을 여는것과 동시에 가스에 중독되어 당장 조취를 받지 못하면 우리는 죽게 될 겁니다.”
여자쪽에서 아무 말도 없었다. 괜히 불안감만 더 들게 한건 아닌가, 하고 사이토가 조금 걱정스러운 듯이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다행이 그녀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사이토의 설명을 현실적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옆 칸의 사람들이 이쪽 동태를 살펴보고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그쪽 사람들도 문이 열리지 않는것을 알아채고는 더 이상 문을 억지로 열려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문이 혹시라도 열린다고 하더라도 바깥의 유독가스가 스며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사이토와 그녀는 고립된 채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언제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지만 그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 말을 기점으로 또다시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여자쪽 입장에서는 조금은 불편한 상황일 것 같았다. 남자가 자신을 생각해 주고 있다는 게 보이긴 했지만 왠지 말이 없었다. 유일한 동승객은 말이 없고, 주위는 어둡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일회용 건전지로 돌아가는 비상 전등만이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두렵기도 하면서 은근히 마음을 다스리게 하는 오렌지색의 희미한 빛이었다. 불안에 떨고 있을 여자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남자가 짐짓 말문을 열었다.
“전 사이토 쇼고라고 합니다.”
“아, 네, 오가와 마리코에요.”
“이제야 통성명하게되서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말주변이 없어서 어떻게 안심시켜드리지를 못하는군요.”
“아니에요, 두명이서 있어서 다행이지 만약 이런 데 혼자였으면..휴, 경황이 없어서 저도 제대로 인사 할 생각을 못했네요.”
잠시 말을 멈추었던 오가와가 입을 열었다.
“이 전철에 매일 타시는 건가요?”
“에, 키바쪽에 직장이 있어서요, 오늘 또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던지 운이 없게도 방금 전까지 야근을 하다 오던 길이었습니다.”
“아...그러시군요.”
조금이라도 두려움을 떨쳐버리려는 듯, 조심스레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오가와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는지 짐짓 바닥으로 시선을 옮긴 사이토가 궁색해진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쪽 지방에 온지 삼년이 넘었는데 이런 사고는 처음입니다.”
“그런가요?”
“뭐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노선만 타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이런 일은 드물죠. 오가와씨도 이쪽부근에 회사가 있습니까?”
“아니요, 전 원래 홋카이도 사람이에요, 도쿄는 정말 오랜만인걸요.”
“예? 홋카이도? 저도 홋카이도 출신인데.”
“정말이세요? 반갑네요. 홋카이도, 살기 좋은 곳이죠.”
그녀가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이번에 시로이코이비또(일본의 과자이름. 홋카이도 특산과자) 불매운동 일어나서 완전히 회사가 도산이 날 지경이라네요”
“예? 아니, 이유가 뭡니까? 전 시로이코이비또가 일본에서 제일 맛있는 과자라고 생각해 왔는데.. 무슨 일이라도?”
“그게, 과자유통기한이 1년이나 지난걸 대량 유통했다나봐요. 아참 그리고 홋카이도대에서 지금 집회일어나서 조금 시끄러워요.”
“에에? 홋카이도대에서? 무슨 일이죠?”
홋카이도 대학 출신인 사이토는 뜻밖의 소식에 깜짝 놀라며 재빨리 되물었다.
“글쎄 저도 뉴스 본지 오래되서 그것까지는 잘...죄송해요. 역시 고향일이라 궁금하시겠네요. 아무튼 저도 홋카이도에서 건너온 지 벌써 일주일은 되놔서...”
“이쪽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
-뭔가 실수한건가.
대답이 늦어지는 그녀를 보며 일순 사이토는 생각했다. 그녀는 허공을 바라본 채로, 나긋하고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사람을 찾으러 왔어요.”
“사람? 친구?”
그녀는 또다시 뜸을 들었다. 여전히 앞 유리창 쪽을 향해 얼굴을 바로하고 있을 뿐이었다.
“첫사랑이요”
“..첫사랑이라.”
“사이토 씨는 언제예요? 첫사랑.”
“....예?”
“아니, 그냥.. 좀 우습죠? 이 나이에 첫사랑 타령이라니. 근데 저, 실은 소설가예요. 소설 모티브가 생각났는데, 첫사랑이랑 관계 된 거라서 말이죠.”
“소설이라. 저랑 완전히 반대계통이군요. 전 공업쪽이라 소설이나 시에는 재주가 없어서.”
“그래도 읽는 쪽은 좋아하시잖아요. 그렇죠?”
“제가 그렇게 보입니까?”
“그냥 얼굴에 쓰여있어요, 어쩐지 감상적인 구석이 있을 것 같다는.”
“그렇습니까?”
“후음.. 그래도 저, 제법 사람 볼 줄 안다고 자신하고 있으니까요.”
“사람 볼 줄 안다라...그것 참 유용한 능력이군요. 처음 만난 사람을 배려 해 줄 수 있을테니깐 말입니다.”
사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창작시나 소설을 공유하는 클럽에 몇 개 가입해놓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읽고, 감상하고 평판하는걸 좋아했지만 웬만해선 자신의 이런 취향을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이토씨는....단것을 별로 안좋아하는군요, 아니, 싫어하죠. 아닌가요? 그대신 기호식품으로는 아침에 마시는 블랙커피 한 잔...”
이번에 사이토는 대답 대신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오가와의 예측이 정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녜요. 아직 미혼이라 그런건진 모르겠지만 사이토씨의 상체쪽에 지방이 적은걸로 봐서 그저 단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제가 사상체질에 조금 관심이 있어서 한 번 보면 웬만큼 그 사람 체질이 어떤지 알 수 있거든요. 소음인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분들이라면 반드시 커피한잔의 여유를 즐기지 않나요? 어쨌든 죄송해요, 초면에 너무 아는척했네요.”
낭패다, 라는 표정으로 허둥거리며 변명하듯 말하는 오가와의 말이 끝나고 그들 사이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곧 사이토는 무표정을 하고 있는 자신이 오가와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첫사랑을 찾아오셨다고 했죠? 벌써 만났나요?”
하지만 또다시 미묘한 표정만 짓고 얼른 대답을 하지 않는 오가와였다. 아무래도 오가와의 첫사랑은 매우 아름답거나, 매우 슬플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의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꿈같은 기억을 더듬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사이토가 자세를 편하게 고치며 느긋하게 말을 시작했다.
“여덟 살 때 였을겁니다 아마. 시작은.”
“네?”
“첫사랑이 언제냐고 물으셨죠. 8살 때였어요.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어느 날 우리 집 옆집으로 이사해 왔는데 얼마나 아름답던지, 그때 막 7살이 된 제가 볼 땐 마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이 생각됐죠.”
“오, 첫사랑이 그런 어린 시절에 찾아오다니, 흥미로운데요?”
“뭐 정식적으로 서로 좋아한 걸 확인하고, 사귀기 시작한 건.. 아마 한참 뒤였을 겁니다. 그땐 저도 정말 쑥맥 꼬마동이일 뿐이라서 그 어린천사한테 감히 말도 제대로 걸어보지 못했으니까요. 아마, 중학교 졸업하고 나서부터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가 된 듯합니다.”
“흐음, 어린소년의 사랑이 이루어지다니, 흔한 일은 아니군요. 그 다음은 어떻게 되나요? 그 여자분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요?”
그녀가 호기심이 일었는지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사이토를 바라보았다. 사이토는 약간 자조적인 웃음을 언뜻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해피앤딩은 아닌 것 같았다. 어쨌든 누구에게나 해피엔딩일 순 없는 게 ‘첫사랑’ 이라는 거니까.
“죽었습니다.”
먼저 하늘나라로 가 버린 첫사랑 얘기는 더더욱 애절하고 아픈 법이었다. 하지만 사이토의 얼굴은 아름다운 과거를 추억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뭔가 그로테스크한 기억이 떠오른 듯한, 아니면 무서운 꿈을 기억해내는 듯한 오묘한 표정이었다. 사이토는 잠시 자신의 세계에 빠져 있다가 문득 오가와 쪽으로 돌아보며 물었다.
“소설가라면 옛날 전설이나 괴담같은것도 잘 알고있지 않습니까? 재밌는 얘기 없나요?”
“글쎄요.. 괴담같은 걸 좋아하긴 하지만..”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고 오가와는 뜬금없이 화제를 돌리는 사이토를 응시했다. 사이토가 말을 이었다.
“일본 전설중에서 ‘센넨타누키’라는 이야기 아십니까? 내가 아는 것 중에 제일 무섭던데.”
“아...그..”
오가와의 표정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센넨타누키’ 전설.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지만 무려 1000년 이상 전해 내려오는 일본의 고대 전설 중에 하나였다.
옛날 옛날에 ‘센넨타누키’라고 불리우는 요괴가 살았다. ‘센넨’은 일본어로 천년 이라는 뜻이었고, ‘타누키’는 너구리를 뜻하는 말이었다. 요괴의 정체는 말 그대로 ‘천년을 사는 너구리’였다. 일본인들의 주술적 염원과 기운을 받고 둔갑술을 가지고 있다는 너구리요괴는, ‘천 년 동안 한 남자에게 계속해서 사랑을 받으면 인간이 될 수 있는’ 저주를 받은 슬픈 운명을 가진 요괴였다. 속세에서는 그 너구리가 둔갑술을 익히고 있어서 어떤 모습으로도 변신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너구리는 실제로 그 모습이 계속해서 변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자기능력이 아닌 일종의 저주일 뿐이었다. 요괴는 스스로 모습을 바꾸는 게 아니라 사실은 ‘저절로 몸이 바뀌는’ 거였다. 따라서 언제 어떻게 변태를 시작할지 요괴들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은 저주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잘만 이용하면 휼륭한 능력이 될 수 도 있었다. 요괴들은 자신의 모습이 계속해서 새로운 여자의 모습으로 바뀐다는 것을 이용해서 한사람의 인간에게 의심을 받지 않고 접근 할 수 있게 된다. 즉, 여자의 모습을 하고 인간남자의 앞에 나타나 그 남자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게 만든 후, 그 사랑이 식기 전에 또다시 새로운 매력을 가진 여자의 얼굴로 변해서 신선한 사랑을 반복한다는 이야기이다. 만약 요괴가 그 사랑을 성공한다면, 한 남자에게 있어서는 열 번도 넘는 죽음과 환생을 거듭하는 사이에 단 한 여자만을(실은 요괴를) 사랑하게 되는 셈이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사랑을 계속한다..그런식으로 두명이 천년의 사랑을 성공하면, 요괴는 드디어 저주에서 풀려나 인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서인지 천년간의 사랑을 끝까지 지켜내는 요괴는 흔치 않다고 한다. 변태를 하는 시기가 운이 좋아 계속해서 남자의 사랑이 시들기 전에 모습이 바뀐다면, 그리고 바뀐 모습에도 남자가 또다시 사랑을 준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만약 남자의 미움을 산 상태에서도 변태가 진행되지 않는다면 요괴는 남자에게서 더 이상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요괴는 인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만약 변태 하는 순간의 모습을 남자가 봐버린다면... 그러고 난 후에도 요괴는 남자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정말 끔찍할 겁니다.” 사이토가 말했다.
“하지만 그건 흔한 전설일 뿐이잖아요.” 오가와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만약, 실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오가와가 조금 놀란 듯이 사이토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것이 사이토는 이런 형이상학적인 일에는 흥미가 없는 철저한 현실주의자 같은 이미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게요.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우리는 눈치채지 못하겠네요. 남자입장에서 보면 전혀 다른 여자들과 연애를 한 거지만, 그게 원래는 한사람이었다는 걸 상상하기 어렵겠죠. 더구나 여자쪽에서 철저하게 숨기려고 작정한 이상.”
“맞습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꽤나 현실적이지 않습니까. 현실적으로 한 육체를 가지고 천년을 사랑하는 건 불가능하죠. 천년을 살 수 있다고 해도 한 얼굴만 계속 사랑하는 건 식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완전히 모습을 바꾸고 사랑을 이어나간다라, 정말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여자 입장에서 보면 정말 공감 가는 이야기라고 이 이야기를 아는 여자들이 얘기했습니다. 남자의 사랑은 변하기 쉬우니.. 화려한 외모를 자꾸 바꾸면서 항상 그 남자의 100퍼센트 사랑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죠.”
그 얘기에 오가와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그렇지 않아요. 얼굴을 바꾸면서 그 사람 겉에서 계속 맴돌 뿐이라니...그거야말로 저주예요.”
의외로 요괴의 고통에 공감하듯 중얼거리며 말하는 오가와를 바라보며 사이토는 조금 의외의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오가와는 작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부부처럼 깊어지는 것도 사랑이에요. 열정이 없어도.. 아무리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꿀 수 없다 해도 열정을 다 한 끝의 부부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요.”
“그게 여자들의 이상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실은 여자들은 말로만 그럴듯한 사랑을 찾을 뿐 실제로는 격정적인 사랑을 받는 쪽을 원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이토를 바라보며 오가와가 조심히 물었다.
“사이토씨는..그럼 그런 요괴를..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나요?”
그 말에 사이토도 오가와를 돌아보았다.
“요괴에 대한 평가는 그렇다 치더라도 남자는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남자의 사랑은 보기보다도 대단한 겁니다. 변하기 쉽지만 사랑에 불타오르는 그 순간부터 애정의 호르몬이 다하는 날까지 여자만 바라보고 여자에게 모든 에너지를 소비하게 되죠. 자신의 심장까지 선뜻 줄 수 있을만큼, 그런 사랑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남자들과 다르게 요괴에게 선택당한 남자들은 그런 소모성 짙은 사랑을 천년동안 계속하게 되어있습니다. 마치 농락당하듯 사랑에 빠지고 홀연히 사라지는 여자를 그리워하면서 안타까워해야 하죠. 남자는 자기가 하는 사랑이 계획되어있는, 반복되는 사랑인지 알지도 못한 채 기뻐하고, 사랑하고, 이별의 안타까움을 겪는 겁니다. 만약 어느 날 여자요괴를 지키다가 대신 죽게 되어도 환생해서 또다시 같은 여자에게 사랑에 빠지게 되겠죠. 남자 입장에선 진상을 알게 된다면 뭔가 화가 나는 일인 것 갔습니다. 계속에서 반복되는 사랑에 속는 거라고나 하면 좋을지. 그러니까, 요괴에게 사랑을 받는 남자 또한 저주받았다고 할 수 있죠.”
“.........”
“하지만 자신이 저주 받았다는 사실은 아마 모르겠죠. 그래서 그 남자는 불행하다고 하기도 뭐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계속해서 사랑 하는 것 밖에... 도리가 없겠죠.”
오가와가 사이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이토는 왠지 아까부터 계속해서 자조적이고 고통을 삼키는 듯한 웃음을 희미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오가와는 조심스럽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만약 사이토씨가 그런 사랑의 주인공이 된다면.. 요괴를 사랑할 수 있나요?”
“......”
“그러니까, 전 요괴가 괴물이긴 하지만,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운명이 그럴 뿐이지 어쨌든 그 남자를 사랑하는 거잖아요.”
그 질문에 사이토는 의외로 오랫동안 신중히 생각했다.
어쩌다가 이런 전설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식으로 이야기를 일단락한 두사람은 조금의 침묵 후에 다시 말을 시작했다. 시작은 사이토가 먼저였다.
“소설가라고 하셨죠? 제가 소설에 영감을 얻을수 있을만한 이야기 하나 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떤 이야기죠?”
“아까 얘기했던 제 첫사랑 얘기입니다. 그리고 센넨타누키와도 어쩌면 관계있는 이야기가 되죠.”
“설마, 첫사랑분이 사실은 요괴였다, 이런 말씀은 아니시죠?”
“그거야 저도 확실히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판단은 오가와씨가 하시는 거니까 말입니다.....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녀는 죽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정도 지난 뒤였습니다. 자살이었죠.”
내려다 보듯이 눈을 뜨고 죽어있었던 스즈키 미카. 그녀는 자신의 방에서 목이 매달린 채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죽을 당시에 그녀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미 대학생이 된 지 1년이나 지난 뒤였는데 왜 교복을 입었을까. 그녀의 방은 제 방 창문 바로 맞은편에 붙어있었기 때문에 그쪽 창문을 통해서 그녀의 방이 훤히 들여다 보였죠. 우린 사귀는 동안 서로 붙어있는 창문을 통해 자주 드나들면서 놀았는데... 그 방안에서 제 방을 향해서 목을 매단 것이었습니다.”
대학교 보란티아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사이토의 집에는 가족들이 모두 외출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집에도 가족들은 없었다. 그렇게 목을 매고 죽어서 얼마동안 그를 기다린걸까. 침대에 가방을 던져놓던 사이토는 문득 창밖의, 그녀의 창 안쪽의 상황을 보고 잠시동안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축 늘어진 몸, 아무 표정없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 그리고 교복과 고등학교 시절 자주 했었던, 그가 예쁘다고 자주 말했던 반묶음 헤어스타일...
그가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 기절해 있었던 것이다. 바깥의 난동에 눈이 떠진 것이었다. 병실 바깥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미치기 일보직전 까지 간 미카의 아버지의 괴성과 함께 주위 사람들의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이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소리도 들렸다. 열아홉 살이었던 사이토는 다시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억지로 차린 뒤부터는 셀 수 없을 정도로 경찰에 붙들려 같은 말을 반복해야만 했고, 유서에 대한 해명을 해야겠다. 유서 곳곳에 쓰여져 있던 자신의 이름. 명백하게 사이토가 죽음의 이유였다. 그는 몇 번이고 진술했고, 그의 생각을 말하고 그녀의 생각을 짐작해야 했다. 8살때부터 빠져든 사랑. 그들은 이웃 친구로서, 소꿉친구로서 가까워졌다. 중학생이 되고, 한바탕 사이토가 미카를 짝사랑 한다는 소문으로 학교 전체가 술렁이던 사건, 고등학생이 된 뒤에 정식적으로 사랑하게 됨을 선언했던 두 사람. 창문이 이어져 있었기에 사이토는 자주 미카의 방에 잠입해서 함께 밤을 보내긴 했지만 쉽게 그녀의 몸에 손대진 못했다. 그렇게 순진하고 조심스러운 사랑을 계속해 나가던 두사람. 그녀도 어느새 사이토를 마음속 깊이 받아들였고, 모두에게 인정받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결과는...그랬다. 미카의 자살. 커다란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미카는 자주 사이토에게 화를 냈다. 왜 화를 내는지 사이토로서는 알수가 없었다. 미카는 버럭 화를 냈다가 어느새 잊은 듯 상냥해졌다가 뜬금없이 눈물을 흘리기 일수였다. 그런 변덕 속에서 그들은 대학생이 되었고, 사이토는 대학생활에 눈코뜰새 없이 바빠졌다. 점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미카였다. 그녀는 사이토에게 “변했다.” 라고 말했다. 그녀의 변덕은 점차 심해졌다. 날이 갈수록 구속하기 시작했다. 헤어지잔 말도 수없이 해댔다. 사이토는 지친 것일까. 계속 붙잡고 잘못했다고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였다.
-잘못했다고? 니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 넌 변했어.. 변했다고
-아니야, 문제는 그게 아니야. 그까지것 까먹었다고 내가 지금 화를 내는 줄 알아? 넌 왜 문제가 뭔지를 몰라?
도저히 알수가 없었다. 벌써 열 번이 넘게..아니 몇 번째인지 모른다. 한 열 세 번째쯤 되는 이별 통보를 받았다.
-넌 옛날의 네가 아니야. 어쩜 그럴수 있어? 나한테 이럴수가 있는거야? 너 옛날엔 나랑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잖아.
옛날엔 눈도 못마주치다가 지금은 잘도 마주쳐서 헤어지게 된걸까. 아무리 이해할수 있게 헤어지는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그런 류의 것들 뿐이었다. 사이토는 어렸다. 그때의 상황에 대해 이해하기엔 부족했다. 그녀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화가 나는 이유를 자신도 말하기 뭐했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의 어떻게 해볼 도리없이 학교다니는 데에 전념했다. 그는 말이 없어졌다. 클럽 활동을 하는 중에도 그는 그렇게 적극적인 편은 되지 못했다.
-사이토?
같은 활동부원 리카코에게 미안했다. 그다지 실력이 좋지도 않고 적극적이지도 못한 자신이 임원급이 되어 같은 임원진인 그녀가 피해를 보는 것 같았다.
“아아, 미안, 미안해. 잠시 딴생각 하느라..”
“괜찮아, 근데 사이토는 자주 딴생각 하는것 같더라.”
얼굴을 붉힌 사이토를 보며 그녀가 웃었다.
“미안..”
“뭐라고 할려는 거 아니었어,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토 얼굴도 멋있지만, 지금은 이 회의 안건이 더 중요한것 같아서 말이야.”
“아, 응.”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이었다. 그렇게 그는 운명같았던 첫사랑이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새로운 사랑을 맞이해 버리고 말았다. 미카에게 전전긍긍하던 그도 이제 더 이상 그런 것은 진절머리가 났다. 정말 싫었다. 그는 클럽활동에 매진했고, 미카에게는 소홀해졌다. 미카와 다시 사귀게 되었지만 왠지 사이토의 행동은 변했다. 냉정해진 사이토의 변화에 피를 토하며 분노 할 줄 알았던 미카는 왠지 전보다 더 고분고분해졌고, 더 재미없는 여자가 되었다. 화를 내지 않는다면 미카를 영원히 사랑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나 착해진, 아니 두려움에 숨이 막혀있는 미카를 보니 답답했다. 미카는 하루에도 몇 번씩 화를 냈다가 달래다가 했다. 전화를 받지 않는 날이면 한번에 부재중 통화를 서른 번 넘게 넣었다. 그걸 확인하는 사이토는 소름이 돋았다. 죽어버릴 거라는 문자도 와있었다. 한두번이 아니었다. 너무 지쳤다. 천사였던 그녀가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린걸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겨를도 없었다. 사이토는 그저 그런 상황을 모면하고 도망가고만 싶었다.
[그래. 너 이럴거면 차라리 죽어버려]
그 문자는 텔레콤에서 인쇄되어 경찰서로 전송되었고, 사이토는 경찰서에서 자신이 보냈던 그 문자를 내려다 보았다. 눈물이 나왔다.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부모님은 일부러 그런건지 본심이었는지 그렇게 사이가 좋던 미카의 부모님에게 강력하게 맞섰다. 사이토에게 살인당한거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는 미카의 부모. 그리고 전혀 그럴 이유가 없다고 대응하는 사이토의 부모. 사이토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 사건은 비밀이었지만 모두가 알고있는 비밀이었다. 사이토는 다시는 사랑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원래가 숫기없었던 사이토는 이 일로 더욱 고립되었다. 그런 그에게 먼저 다가온 건 쿠로사와 노리코였다. 그런데 그는 아직까지도 그녀의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를 못한다.
아직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노리코. 1년도 채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마음의 상처가 다 치유된 듯 사랑에 두려움이 없는 자신을 만났다. 하지만 그녀는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꿈같은 사랑을 한 것이다. 사라진 다음에야 사이토는 그녀의 집도, 친구들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곧바로 다른 사랑이 찾아왔다. 불안한 마음에 사이토는 그녀의 친구들을 공략했다. 그녀의 가족들에게도 몇 번이고 인사를 하러 갔다. 느닷없이 사랑을 잃은 것에 대한 후유증이었을까, 아니면 첫사랑에 면죄를 하고싶은 마음에서였을까. 그는 세 번째 사랑인 무카이에게 집착아닌 집착을 했다. 언제나 그녀를 그의 시야 안에 두고 싶어했고, 질투를 했고, 언제나 재촉했다. 그래도 무카이는 그런 그를 잘 이해해 주었다. 그녀는 이해심이 깊었고, 아름다웠다. 그녀가 화를 내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사이토의 잘못 때문이었다. 그녀는 평온한 성격으로 웬만해서는 흐트러지지 않았는데, 가끔 알 수 없이 화를 낼 때가 있었다. 사이토가 집착기를 드러내거나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그녀는 화난 눈으로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왠지 모를 눈물이 고여있었던 것 같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건 그의 집착에 대해 진절머리가 나서 내는 화가 아닌 것 같았다. 사이토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뭔가 원망하는듯한... 그녀는 언젠가 사이토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신처럼 질투 많은 남자가 만약 어떤 여자에게는 시큰둥하게 대한다면...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거겠지?"
“무슨 말이야?”
그녀는 어느날 평소때와 같이 데이트를 하다가 순간 얼굴이 노래졌다. 얼굴에는 땀이 맺혔고 불안한 듯 눈을 마구 굴리는 그녀는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왜그래? 어디 안좋아?”
“아...아아...!!”
그녀는 속이 좋지 않은 듯 했다. 화장실 다녀올게, 하고 그녀는 총총히 사라져 갔었다.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비운 그녀는 그날 돌아오지 않았고, 전화기도 연결되지 않았다.
다음날 사이토는 교통사고로 그녀가 즉사했다는 소식을 들어야했다.
어떻게 그렇게 어이없이.. 역시 아파보이는 그녀와 같이 가주는 거였는데. 그녀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화를 내며 완고하게 사이토가 자신을 쫒아오지 못하게 못을 박았었다. 죄책감과 후회로 사이토는 몇 번이고 죽으려는 생각을 했다. 끝까지 자신이 따라오는 걸 저지하던 무카이. 어째서 자신은 그녀를 지키지 못한걸까. 사이토는 차라리 죽고 싶을만큼 괴로워했다.
사이토는 점점 말라갔고, 하얗던 얼굴은 더욱 핏기가 없어졌다. 사랑을 하면 할수록 눈은 더 퀭해졌고 숨소리는 얇아졌다. 사랑을 하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이상하게 초췌해보이는건 사실이었지만, 사랑이 떠나가고 난 후엔 그보다 더 폐인이 되었다. 그는 어쩌면 저주를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리고 꽃피지도 않던 어린 영혼을 죽게 한 것에 대한 벌. 그는 미카를 자주 떠올렸다. 그는 이제 이십대 중반을 넘어서는 나이로, 어느정도 미카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애도의 마음까지 가질 수 있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어느덧 그는 쉽게 사랑을 믿지 않게 되었다. ‘사랑을 하면 떠나버린다.’ 라는 비과학적인 공식이 단 몇 번의 경험으로 성립되었다. 그는 두려웠고 아무리 해도 무카이를 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사랑은 찾아왔다. 와타아베 루미. 루미는 친구처럼, 또는 누나처럼 편안하게 다가왔다. 알게 된 지 5년이나 지나고 나서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 그 사랑이 미지근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와의 이별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찾아왔다. 그들은 동거를 시작했다. 양가 부모님께 인사도 드린 뒤였다.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다. 말도 안되게 복을 타고났다고, 그는 지난 사랑의 모든 것을 잊고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쇼(사이토의 이름), 나 출장이야 일주일도 안걸리긴 하는데 그래도. 밥 잘 챙겨먹고, 나 없어도 잘 할 수 있지?”
출장이라니. 하필이면 그녀의 생일을 끼고 기막힌 로케였다. 그녀는 방송국 작가였다. 원래는 로맨스도 꿈꾸는 드라마 작가였지만 지금은 미스테리를 밝혀내는 탐험쇼프로의 작가다. 그녀는 왠지 이세상에 없을 것 같은 것들을 꿈꿨다. 외계인이라든지 유령같은. 그래서 다른 방송 스탭들은 어느정도 사기성을 인정하고 촬영에 들어가는데 비해 그녀는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하기사, 본인이 믿고 있을 때라야 그럴듯한 글이 나오기 마련이겠지. 그녀의 독특한 감수성과 자기만의 정신세계가 그녀를 유명 작가로 만들어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영원한 사랑에 대해서도 믿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과 사이토가 영원한 사랑을 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그녀는 사랑을 믿었고, 로맥틱한 것들을 사랑했다.
그런 그녀에게 ‘생일날 노동’이라는 것은 비참한 일이었다. 그런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조금은 우울한 듯 사이토에게 키스를 하고 집을 나섰다.
그런 그녀에게 뭔가라도 해주고 싶은 사이토였다. 그는 그녀가 집에 돌아오는 날 놀랄만한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기로 했다. 하지만 일단 평범한 서프라이즈라면 모두 한번씩은 해본 상태였다. 그는 수시로 그녀에게 꽃다발을 안겼고, 풍선을 날렸으며, 아이스크림에서 반지를 찾아주었다. 이번엔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그는 생각했다.
귀신이 산다는 병원터를 둘러보고 온다는 이번 촬영을 생각해낸 사이토는 이번엔 왠지 공포로 컨셉을 잡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곧 지하실 창고를 생각해냈다.
-지하실만큼 으스스한 곳은 없지
사이토는 잠겨져 있는 지하실 문의 열쇠를 망가뜨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혼나더라도 지하실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 집은 루미명의의 집이었다. 그냥 원래 루미의 집에 사이토가 몸만 왔다고 하면 말이 더 쉬웠다. 처음에 사이토는 경제력이 더 낮은 자신이 꽤나 한심하다고 생각했지만 루미가 워낙 잘나가는 방송작가이기도 했고, 사이토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그의 자존심을 절대 건들지 않는 루미의 덕에 지금까지 어떤 문제는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지하창고에까지는 그도 신경쓸 생각을 하지 못했었고 루미도 별다른 말은 없었다.
지하창고의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 사이토가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루미도 지하실의 일은 잊었을것 같았다. 그러니깐 이 자물쇠는 열쇠도 없는 고물이 되어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튼 그렇게 들어간 지하실 안은 의외로 먼지하나 없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있는 책상과 의자, 그리고 책상 주변의 높다란 책꽂이. 일종의 서재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책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책상위의 스탠드를 켜보았다. 틱, 하고 밝게 불이 들어왔다. 책상 위에는 먼지가 없었다.
-평소에 쓰고 있었다는 건가.
하지만 지하실로 내려가는 루미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조금 의아했다. 책상의 스탠드를 켠 상태에서 지하실의 조명까지 켰다. 꽤 밝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곳은 평소에도 계속 사용되고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듯 먼지하나 없고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어째서 이곳을 들락거렸으면서 그동안 나한테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걸까...
근 일 년을 같이 살면서 한 번도 루미의 지하실 출입장면을 본적이 없었던 사이토로서는 의문이 아닐수가 없었다. 일부러 몰래 다니지 않는이상 그렇게 자신이 새까맣게 몰랐을 리가 없었다.
책상 위의 책장에는 같은 모양 같은 크기의 꽤 두툼한 노트가 몇권 나란히 꽂혀져 있었다. 뭘까. 제일 뒤쪽에 있는 노트를 빼보았다.
겉표지에 2008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2008년도?
펼쳐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일기였다. 일기임을 확인하고 일단 덮었으나, 그는 궁금함을 참기가 힘들었다. 안된다는걸 알았지만, 왠지 여기까지 와서 그만둔다는건 말이 안된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일기를 펼쳐보았다.
가장 최근의 일기.
<2008년 6월 2일>
불안한 하루의 연속..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다. 벌써 이 몸으로 산지도 6년째이다. 이렇게 오래도록 살아 본 게 처음이라 점점 더 불안해진다. 어쩌면 저주에서 벗어나 진짜 사람이 되버린 걸지도 모른다는 착각도 해본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2008년 5월 28일>
이토록 오래 그의 곁에 머물 수 있다는 게 기쁘면서도 불안하다. 우린 얼마전에 기념 1주년을 맞았다. 우린 아직 신혼이다. 그는 내게 푹 빠져있는 것 같다. 5년동안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던 고통이 다 보상되는 듯한 하루하루이다.
뭐지... 알수 없는 말들로 가득 찬 가운데 하나 눈에 들어온 건 ‘5년동안 기다려왔다는’ 문구였다. 그녀와 친구사이였던 처음 5년간을 사이토는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친구로서 마음을 트고 5년... 적지않은 우정을 쌓았다. 적어도 사이토에게 그 시간은 그렇게 기억되고 있었다. 그는 노트를 내려놓고 5년 전인 2002년의 일기장을 집어들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게 언제인지 확실히 기억나진 않았지만 친구들과의 송년회 술자리에서 만났던 것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2002년 12월 22일>
애써 만든 이 기회를 놓쳐선 안된다. 어떻게든 그와 인연을 만들기 위해 난 죽을 노력을 기울였다. 우연인것처럼, 인연인것처럼 보이기 위한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가면 모든게 끝이다.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될까봐 불안하다. 저번에 내가 갑자기 사라진 것 때문에 상처받았을 사이토...지금쯤이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여유가 생겼을까. 이번 송년회가 기회다. 어떻게는 그날 내개 반하게 만들겠다....
<2003년 1월 3일>
어떻게 된건지 그는 내게 시큰둥했다. 절망적이었다. 그는 아직도 무카이를 잊지 못하는 걸까. 이렇게 된 이상 작전을 바꿔야겠다. 당분간 사이토와 친구로 지내면서 기회를 엿봐야 할 것 같다.. 그는 무카이를 많이 사랑했던 것 같다. 바보야... 이제 날 보라고, 니 옆에 있는데. 모르겠니?
<2005년 3월 12일>
점점 더 불안해진다. 그는 내 맘을 몰라준다. 날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다른 누구를 사랑하는것도 아니니 아직 내게 희망은 있다. 내 힘도 점점 떨어져 가고있다. 이대로 계속된다면 난 분명 하괴로 전락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방법이 없다... 사이토가 나 말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땐 그 여자를 내손으로 없애는 방법밖에는 없는 걸까. 점점 마음이 급해진다. 왜 사이토는 날 몰라봐주는 걸까.
<2001년 4월8일>
그가 날 사랑하면 사랑 할수록 난 더 불안하다. 그의 사랑이 정점에 이르러 이윽고 꺾이기 전에 난 그의 앞에서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다른 남자와 조금 이야기 했다는 이유로 그가 내게 크게 화를 냈다. 나중에 미안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난 왠지 슬펐다. 이 질투도, 소유욕도 내가 미카였을 시절 겪었던 일들이다. 그 폭풍갔던 숭배가 끝나고 난 후 날 어떻게 내팽개쳤는지도 기억 하고 있다. 같은 사람인데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다니. 왠지 조금 슬프다. 나는 미카에게 애도를 표한다.
<2001년 7월 1일>
위험했다. 그건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난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갑자기 변태하다니. 아직 사랑이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럴 수가 있는거였나? 내 몸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아챘다.
사랑이 시작되고, 끝나는 거와는 상관없이 변태는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것 같다. 항상 긴장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1999년 2월 3일>
애증...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마음... 지금 내가 너에게 가진 마음이다. 너는 날 잊은걸까. 1년 전 널 너무 사랑해서 저주하던 미카라는 여자를 잊어버린 걸까. 그때 내 고통과 외로움따위는 무참히 짓밟고서, 넌 지금 웃고 있는건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우면서도 또한 사랑한다. 노리코라는 여자에게 빠진 너의 행복에 겨운 얼굴을 보면서 어느순간 묻고 싶다. ‘벌써 미카는 잊은거냐’고. 노리코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면 넌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난 지금 매우 행복하다. 너의 끝없는 사랑에... 지난 고통이 잊혀질 정도이다. 하지만 난 아직 아프다. 웃음 뒤에 가려진 내 상처를 넌 보지 못하겠지... 니가 평생을 목매단 미카의 모습을 잊지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치기를 바랬는데... 다시는 행복하게 웃지 않길 바랬는데... 웃는 너를 보며 왜 나도 웃는걸까. 난 행복하면서도 슬프다.
점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뭐가 뭔지 모르는 와중에 사이토는 일기장 곳곳에서 그녀가 몰라야 마땅한, 그의 전 여자들의 이름이 자꾸 나온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정신병자인 것 같았다. 이상한 망상에 사로잡혀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
루미와의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 그러면서도 5년을 친구인 척 하며 지냈던 것도 소름돋았지만 그 전의 일기 내용들은 사이토로 하여금 가히 경악하게 만들었다.
<2001년 6월13일>
사랑한다..사랑해 나 무카이는 널 정말로 사랑했어, 하지만 또 시간이 되었네. 안녕...우리 다시 만나자. 정말 사랑했어. 놀래켜서 미안해... 너무 많이 울지 마. 옆에서 보는 내가 더 아프잖아. 걱정하지 마...난 다시 너에게로 갈꺼야. 넌 또다른 사랑을 하게 될꺼야. 그때 너의 눈물을 내 손으로 닦아줄게... 사랑해...사랑해...
손이 떨려왔다. 어떠한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한껏 긴장한 손으로 사이토는 제일 처음 일기장을 집어들었다. 시작은, 1997년 11월 14일. 날씨 맑음 이었다.
<1998년 11월 14일>
날씨 맑음... 너무 오래 자고 있었던 듯 하다. 천 년 후에 같이 손을 잡고 이를 보기 위해 나는 이렇게...
여기까지 읽던 사이토는 등뒤에서 칼날같이 서려오는 시선에 자동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랬다. 등 뒤에서, 출장갔을 루미가 소름돋는 눈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한기를 느낀 사이토. 단순한 한기가 아니었다. 사이토는 공포감을 느꼈다. 어두운 빛밖에 없는 지하실. 무서운 여자의 눈. 지금은 무섭지만 죽을만큼 사랑했던 여자, 루미가 사이토의 앞에 서있었다. 두려움과 놀라움, 그리고 반사적으로 남의 일기를 봤다는 죄책감을 동시에 느낀 사이토는 잠시 망설이다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바깥으로 먼저 나갔다.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지만 손발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여러 가지 마음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얼마 후 그녀도 뒤따라 바깥으로 나오는 모습이 사이토의 눈에 비쳤다.
밝은 곳에서 보니 아까의 섬뜩하던 그녀의 눈빛을 사라지고 없었다. 일기장 속의 그녀와 사이토가 아는 그녀 사이의 갭... 그는 선뜻 새로 알게 된 그녀의 또 다른 단면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갑자기 그녀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뜻밖의 행동에 그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해 묻지도 못 한 채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왠만해서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사망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그녀는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날 해기 기울 때까지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저녁이 되었다. 그들은 그때까지 서로 아무 말도 않지 않은 채로 같이 있었다. 그들은, 특히 사이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또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좀처럼 길을 틀 수 없어서 침묵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한 침대에 누워서 한참의 시간을 보냈다.
새벽 3시쯤 되었을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천장만 멀뚱히 보고 있는 사이토에게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무서워?”
“뭐?”
“내가 정신병자라서 경멸스러워 할거냐 하는 말이야...”
“......너 정신병자였어?” 훗 하고 잠깐 웃는 사이토였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딱 하나만 대답해줘.”
“뭔데.”
“나한테 있어서 중요한 문제야.. 그대신, 솔직하게 대답해야 되.”
“알겠어. 그럼 너도 솔직하게 말해줘야되”
“....어. 일단 내가 먼저 물을게.”
“말해봐.”
“.............”
“뭔데...? 말해.”
“혹시 날 생각해준다고 거짓말하거나 하면 안되.”
“알겠어...빨리.”
“지금. 나 사랑해?”
“....뭐?”
“앞으로 어떤 사실을 알게 되도 사랑할거냐구 묻는 게 아니야. 그냥. 지금 이 순간의 느낌만 말해줘.”
“............”
“지금 니 옆에 누워있는 나 와타아베 루미 자체만 봐줘. 날 지금 사랑해?”
“....그래. 사랑해.”
“...........” 한숨 같은 소리 뒤에, 루미의 숨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고마워....”
우는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지만 안도하는듯한 목소리였다. 그녀가 스윽,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화장실.”
상체를 일으키던 그녀가 잠깐 그를 보았다.
그리고 화장실로 가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다음날, 그녀는 신발 하나 신지 않은채로 사라져 버렸다. 그 집에서 사라진 건 그녀와 그녀가 입고 있던 잠옷 뿐이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채로 그녀는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제가 센넨타누키 전설에 대해 알게 된 건 이 모든 일들을 전부 겪고 난 후였습니다.”
사이토가 말했다.
“그 전설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온몸에 소름이 확 끼치더군요. 무서웠습니다. 와타아베 루미가 무서웠고, 그 일기장이, 제 인생이 무서워 졌습니다.”
오가와의 얼굴이 샛노래졌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사이토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뒤로 죽 두려움을 안고 살고 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루미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가시지 않더군요. 어떻게 된 일인지... 그때 그렇게 그녀가 떠나버려서 이렇게 그리운 마음만 남았는지도 모르죠.”
오가와는 나름대로 충격받은 걸까? 표정이 그랬다.
“전 아무에게도 이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당신에게 처음 이야기 하는 겁니다. 물론 이 이야기를 믿고 안믿고는 당신 자유지만, 어쩐지 꽤나 재밌는 소설이 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가와씨, 어디 안좋으신가요?”
그제서야 오가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놀랐다는 게 눈에 보였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 소설가, 이런 미스테리한 이야기를 그냥 그대로 다 믿어버리는 사람일런지도 모른다.
그녀가 돌연 벌떡 일어나서 짐승소리 같기도 한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뭔가를 찾아헤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도 이따금 통증이 오는건지 쭈구려 앉아있다가가, 다시 미친듯이 몸부림치며 전차칸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뭐지, 마치 실성한 것 같은 그녀의 행동에 사이토는 순간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어느순간 자동문 비상 열림장치를 찾아내어 허겁지겁 작동시키려 하는 모습을 본 사이토가 달려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왜 그러십니까? 지금 나가시면 안돼요, 우리 둘 다 죽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어쩔 수 없이 사이토는 무력을 사용해 그녀를 막았다. 그녀가 괴물같은 힘을 발휘해서 발버둥치자, 그는 더 이상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지하철 바닥에 내리꽂았다.
쿵!!! 너무 강력했던지 잠시 꼼짝 않고 있는...괴물이 된 것 같은 여자. 기절한 건 아닐까 걱정이 된 그는 조심스레 다가가 엎드린 채로 있는 그녀를 뒤집어 보았다.
“헉!!!”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었다. 그녀의 두 눈이..안구가 정상적인 위치에서 조금 더 빠져나와있었기에 부릅뜬 것처럼 보인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 눈은 얼마 후 튀어나올 듯이 점점 더 빠져나오고 있었다.
“으아악!!!”
여자를 내팽개친 그가 엉금엉금 기어서 뒤로 물러났다. 여자가 깨어난 것 같았다. 그녀는 바닥을 마구 뒹굴면서 소리를 질렀다.
얼빠진 사람처럼 구석에 앉아있던 사이토의 두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녀의 얼굴은 불어나나 못해 찢어졌고, 피와 고름과 알 수 없는 액체들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것은 온 몸에도 마찬가지였다. 온몸이 그렇게 찢어지면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귀가 찢어질 것 같은, 태어나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던 소리였다. 이상한 냄새도 코를 찔렀다. 그 냄새에 사이토는 벌써 한번 구역질을 했다.
튀어나오기 시작했던 여자의, 아니 괴물의 두 눈이 대롱대롱 굴러서 사이토의 발 아래 떨어졌다.
“으아악!”
사이토는 그 눈알을 피해 다른 구석으로 기어갔다. 눈동자가 정확이 사이토를 향해 있었다.
괴물을 계속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사이토, 보지 마!! 흐으억! 보지...억...마...!!흐억!!”
여자의 살갖이 후두둑, 튿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온몸의 피를 쏟아냈다. 피 뿐만이 아니었다. 지방질들이 흘러내렸고, 분간 할 수 없는 알수없는 것들드리 폭발하듯이 분출됐다. 뭔가가 변화하고 있었다. 구역질 나는 광경에 사이토는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차라리 정신을 잃는 게 더 편할 것 같았다. 괴물은 끊임없이 사이토의 이름을 불렀다. 사이토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또다시 속이 울렁거린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쇳소리 같은 소리와 벌레들이 내는 것 같은... 처음 들어본 소리, 비명, 냄새... 점점 정신이 아득해져왔다....
눈을 떴을때 사이토의 눈에는 지하철 바닥이 보였다. 양 무릎을 곧추세우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 있었던 것이었다. 무서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앞에.. 아까의 그 눈알과 핏자국, 그리고 허물처럼 벗어진 여자의 표피가 있었다. 그 옆에, 아직 핏덩이들로 뒤덮혀있는, 전혀 새로운 여자가 알몸으로 쭈구려 앉아 울고 있었다.
처음의 그런 광경은 빠르게 변해갔고 이내 핏자국도, 엽기적이었던 시체의 난도질된듯한 모습도 조금씩 사라졌다. 울고있는 여자의 몸에 뒤덮혀 있는 피들도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갔다. 그것은 훌쩍거리면서 바닥을 보고있었다. 변태가 종료 된 상황이었다.
“넌....”
“그래, 나야....”
사이토는 망연자실했다. 도저히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눈앞에 고요히 앉아있는 눈부신 여자...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사이토는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스, 스즈키 미카...!”
그녀가 조금씩 훌쩍임을 멈추면서 말했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어버렸어...괴물이 되어버렸어...나쁜놈! 널 저주할꺼야!”
목소리가 크게 울리면서 사이토의 고막을 찢었다. 사이토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나기만 할 뿐이었다. 사이토를 죽일듯 노려보던 여자가 갑자기 말투를 바꾸어 애원했다.
“날 버리지 말아줘, 놀라지 말아줘. 날 사랑해줘... 난 너땜에 이런 몸이 되었어...날 버리지 마 제발!!”
“힉 저리가!”
여자가 엉금엉금 기어서 사이토에게 다가오려 하고 있었다. 사이토가 다시한번 가련하게 비명을 지르자 여자는 멈추어서 눈물을 흘렸다.
“날 사랑해줘.. 날 버리지 마....”
벌써 십년이 넘는 시간을 변태해 온 여자, 스즈키 미카. 아니, 루미. 무카이이면서, 쿠로사와이고 동시에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몇 번이고 그를 스쳐지나간..그를 사랑하는 여자. 여자들. 그녀는 이름이 없었다. 또다시 오가와라는 이름을 가지고 그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아니다. 이제 오가와도 과거가 되어있었다. 그녀는, 천년이 되기 전에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변태하는 모습을 보여버린...센넨타누키였다.
“너에게 상처받았던 나는 그날..죽어버릴려고 결심했었어.”
공포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사이토를 두고 그녀가 포기한 듯 서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제 주위의 모든 핏자국들은 말끔히 사라졌고, 그녀는 긴 생머리를 가진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역시 얼룩한 피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때 앞에 나타났지. 그게 말이야... 더 이상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 할 수 없게 된 괴물이었어. 요괴는 내게 말했지...”
-난 네가 저주하는 그 남자가 죽을 때까지 너만을 사랑하도록 만들어 줄 수 있다.
그 요괴는 스즈키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에 길게 자란 손톱이 보이는 쭈글쭈글한 손을 얹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세 번 반복해서 따라해라. 그러면 너의 소원은 이루어 질 것이다.
-나 스즈키 미카는 당신에게 영혼을 이양한다. 내 영혼을 얻은 당신은 사이토 쇼고를 저주하라. 나 스즈키 미카는 당신에게 영혼을 이양한다. 내 영혼을 얻은 당신은 사이토 쇼고를 저주하라. 나 스즈키 미카는.....
영혼을 팔고 난 다음의 운명에 대해서 그 요괴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세 번의 선언이 끝난 후 미처 어떤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요괴는 그녀 옆에 있는 넥타이 끈으로 그녀를 졸랐다. 그녀가 죽고싶어하던 방법 그대로 그녀는 그렇게 죽어버렸다. 사이토 쇼고. 저주하고 사랑하는 그의 방으로 몸을 향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미 난 이런 몸이었어. 후회했지만, 이미 끝난 일이었어....”
새하얀, 알몸의 여자가 공중에 뜬 것처럼 걸었다. 사이토는 두 무릎을 곧추세운 자세로 얼굴을 파묻고 미동도 없이 굳어있었다. 양 손으로 양쪽 귀를 틀어막듯이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그 상태로 그는 이미 기절한 것 같다...
“그 여자가 말했었는데... 넌 죽을 때 까지 날 사랑 할 거라고...왜 날 사랑하지 못한다는 거야? 왜 날 두려운 얼굴로 보는거지?!”
“내가 더 예뻐지고 감쪽같이 널 속인다면 사랑해 줄 수 있어?? 대답해봐...사이토, 고개만 숙이고 있지 말고...어서 대답해 봐...!!!”
가느다란 손을 뻗쳐 그를 흔들었다. 사이토는 아무런 저항없이 그 자리에 무너져 버렸다. 한참을 말없이 있던 여자가 엷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 괘찮아... 날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괜찮아. 하지만 다음 생애에서라면 달라.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날 용서해 줘. 우리 천년동안 사랑하자.”
여자는 비상문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를 바라보면서 그대로 그녀는 지하철 문을 열었다. 예상했던 대로 검은 연기가 빨려 들어와 사이토와 그녀를 덮쳤다. 사이토는 아마 고통도 느끼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잠시 그렇게 검은 어둠에 휘감기는 그를 내려다보다가 철로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는 그렇게 어딘가로 사라져갔다.
안녕하세요... 제가 요즘 하도 스트레스를 받아서 개인적으로 소설을 쓰고있는데요. 그냥 이걸 보신 분들은 어떤 반응일까...궁굼해서 한 번 올려보았습니다.
지금까지 뭘 써도 누군가에게 보여 준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떨리고 그러네요ㅠㅠ 잘부탁드립니다.. 이상한 부분 지적해주시면 감사^^ 제가 소설 이런걸 잘 몰라서.. 그냥 손가는대로 쓴건데, 소설에대해 아시는 분들 조언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여기 나오는 일본전설은 제가 그냥 지어낸 거구요^^ 참, 일본이 배경인거든..제가 지금 일본유학와서 한참 놀다가
제가 소설란 처음 와봐서...읽어주세요 잘부탁^^
지하철 역 토자이센(東西線). 키바역(木場驛)은 다른 지하철역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열차를 타려면 긴 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야만 했다. 물론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에어컨이나 온풍기가 가동되는 실내에 있을 수 있다는 게 나름대로의 장점이긴 했지만 역시 전차 쪽이 더 편하다는 생각이다.
-귀찮군.
이라는 단순한 느낌 외에는 생각하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 듯 보이는 사나이가 파김치가 되어 개찰구에 들어섰다. 오늘 그는 12시가 훌쩍 넘는 야근으로 인해 매우 지쳐있었다.
사이토 쇼고. 남자의 이름이었다. 175정도 되는 키에 적당하게 근육도 있고 지방도 있는, 그리 특기할만한 점은 없는 사나이였다. 다만 조금 남다르다고 할 것은 핏기없이 하얀 피부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적당히 남자다운 팔뚝과 목, 그리고 간간이 드러나는 가슴팍은 그런대로 그을렸지만, 왠지 모르게 얼굴만은 태어날 때부터 줄곧 창백했다. 그는 그렇게 남자다운 성격은 아니었으나, 또한 여성스럽지도 않았기에 주위 사람들이 그의 새하얀 피부에 대해 어떤 얘기를 하는것에 대해 그다지 좋게 생각하는 편은 아니었다. 왜냐면 하얀 얼굴은 곧 ‘계집애 같다’라는 뜻이라고 그는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호라, 홋카이도 출신이라서 하얀거였군요?!
-홋카이도에는 겨울에 영하 10도까지 내려가기도 하고, 눈이 그렇게 많이 내린다는데..정말인가요? 그곳에서 눈을 맞고 자라면 모두 당신처럼 하얘지는 건가요? 하하하
그들이라고 딱히 그렇게 생각하는건 아니겠지만 사이토와 새로 알게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런 얘기를 했다. 그냥 오늘 날씨가 어떻다는둥, 일본과 독일의 어제 경기가 어땠다는 둥 하는것처럼, 그저 아무 의미없이 오가는 이야기중 하나였던 것이다.
띠링 띠링 띠링-
익숙한 열차 도착음이 울리고 이어서 열차가 도착했다. 금요일의 마지막 지하철. 그랬다. 사이토는 마지막 지하철 시간을 간당간당하게 맞출 때까지 잔업을 한 것이었다. 홋카이도에서 이곳 도쿄로 옮겨와 자신의 첫 직장인 [파와댕키]에 입사한 지 어느덧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사이토가 탄 열차의 칸에는 자신을 제외하고 단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 열차에 단 두사람밖에 없다니 조금 신기한 일이었다.
사이토 외에 이 열차에 몸을 싣고 있는 또 한 사람은 여자였다. 대충 묶은 머리를 숙이고 한창 소설책에 빠져있는 모습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사이토는 문득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을 느꼈을까, 아니면 아무 뜻없이 그런 거였을까. 고개를 들어올린 그녀도 사이토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을 사이토와 그녀는 서로 마주보았다.
-아는 사람인가?
자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피하지 않고 이쪽을 마주 바라보는 그녀를 보며 사이토는 문득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전에 한번 만난 적이 있는 사람 같았다. 잠깐 그렇게 기억을 헤아리는 사이 그녀는 그를 향해 가볍게 웃으며 목례했다. 그것은 그저 모르는 사람들끼리 눈이 마주친 것에 대한 겸연쩍음을 넘기는 일반적인 처세였다. 그제야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이토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왠지 다시 바라보기가 민망했다. 혹시나 다시 봤는데 눈이라도 마주치면 조금 우스운 꼴이 되는 것이라고 사이토는 생각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눈을 감았지만 그는 얼마동안 앞에 앉은 여자가 혹시나 어딘가에서 만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음악에 집중하지 못했다. 혹시 거래처에서 만난 사람일까..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딱히 특징은 없는 여자였지만 책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그녀의 단정한 얼굴을 보면서 그는 확실히 처음 본 여자라고 결론을 내렸다. 왠지 이런 여자를 어딘가에서 만났더라면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잊지않고 기억해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이런저런 생각을 털어낸 사이토는 다시 눈을 감고 음악에 열중했다. 코야나기 류노스케의 ‘영원히 너에게’ 라는 곡이었다. 꽤 감미로우면서도 독특한 코야나기의 음색에 그는 새로이 빠져들고 있는 중이었다.
열차는 두어번 멈추어서 조금 기다렸다가 출발하기를 반복했다. 너무 짧은 배차간격으로 앞차와의 간격이 너무 좁을 경우 이렇게 자주 멈추곤 하는 지하철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지라 사이토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수면상태와 각성상태의 중간에서 나른하게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피슉, 소리와 함께 열차가 네 번째 멈춰섰다. 그제서야 사이토는 이어폰을 빼고 네 번째 반복되었을 안내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 안내방송의 내용은 사이토가 생각한 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현재 이이다바시 역에서 인사사고가 발생했을 가능성으로 인하여 잠시 열차운행이 지체됩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인사사고...! 또 누가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을 한걸까. 아니면..
딱히 다른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안내방송이 조금 이상하다. 인사사고면 인사사고지 ‘발생했을 가능성’ 이라니. 너무 무책임한 말이었다. 확실한 사고의 원인도 모르다니 한심했다. 그리고 거리상으로도 지금 운전이 멈춰진 이곳은 이이다바시 역 바로 전 정거장의 중간 길목이 아닌가. 터무니없이 늦은 대처였다.
그때였다. 몇 번의 깜박거림이 있더니 열차안의 전등과 무음 텔레비전이 갑작스럽게 꺼져버렸다. 불길함을 느낀 사이토가 어둠 속에서 눈을 번쩍 떴다. 삽시간에 전철 안은 죽은 도시처럼 새까맣고 조용해졌다. 알게모르게 소리를 내고 있었던 전철의 시동상태 소음이 없어지고나니 전차내는 무척이나 적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뭐지?
동태를 살피는 사이 이윽고 비상전력에 의해 전철 안은 다시 밝아졌지만, 빛과는 상관없는 공포가 삽시간에 주위를 감쌌다. 그러다가 문득 앞에 앉은 여자에게로 시선이 갔다. 여자는 놀란 얼굴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다시 스피커에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님들께 알립니다. 앞 차에 발생한 화재 문제로 인하여 당분간 열차운행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현재 앞 정거장에서 유출된 열기와 가스로 인해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있는 상황입니다. 다시한번...”
안내방송은 울리다 말고 도중에 끊겼고, 동시에 비상전력도 손실되었는지 열차 안은 또다시 섬짓한 어둠과 고요속에 빠지고 말았다.
사이토 쇼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뭔가를 해보려는 것 보다는 앞에 앉아있는 여자가 핸프폰으로 전화를 걸려 하다가 바닥에 그것을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분명 손을 덜덜 떨었기 때문에 떨어뜨린 거겠지, 라고 생각한 사이토는 일단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생각으로 그녀 앞으로 다가가며 먼저 말을 붙였다.
“괜찮습니까?”
“........”
그녀는 별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사이토가 내민 본인의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그러다가 문득 본의 아니게 상대방의 말을 무시 한 것에 대해 미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급하게 말을 받았다.
“죄송해요.. 아, 전 괜찮아요. 그보다..지금 어떻게 되어 가는 걸까요?”
의외로 목소리는 맑았다.
“글쎄요.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이대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창밖의 검은 기체를 바라보며 사이토가 조용히 말했다. 사이토는 상체를 구부리고 유리창에 이마를 바짝 댄 채로 검은 액체를 눈여겨보았다.
“우린 갇힌 걸까요? 제 생각엔..옆 칸으로 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 사이토를 눈으로 좇으며 그녀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일반적인 남자가 생각할 정도로 가련하고 겁에 질린 모습은 아니었다. 옆칸으로 통하는 문 손잡이를 잡아당여보던 사이토는 조금 긴장된 얼굴로 말을 받았다.
“예. 저도 같은 생각이지만.. 어떻게 된 건지 문이 잠겨있습니다.”
“그런...”
그녀는 불안해하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가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 보였다. 그런 그녀의 담담한 모습과는 별개로 사이토는 왠지 책임감 같은 것을 느꼈다. 책임감이라고 하는게 맞을까. 그건 일종의 중압감이었다. 사이토의 옆에 앉아있는 ‘유일한 지하철사고 동료’ 가 여자인 이상 왠지 자신이 나서서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리저리 차체를 기웃거려보거나, 건전지로 사용되는 비상전등을 찾아내어 작동시키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비상 레버를 젖히고 밖에 나가보는건 어떨까요?”
어느정도의 시간이 지난 걸까, 기나긴 침묵을 깨고 여자가 말했다. 의외로 대담하다는 생각을 하며 사이토가 말을 받았다.
“밖에 나가서 철로를 따라 다음 역으로 간 후 탈출한다...좋은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불가능 할 것 같습니다.”
“왜죠?”
“저기 밖에 검은 연기 보이시죠? 화재로 인한 유독가스가 이곳까지 미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곳 철로는 밀폐되어있는 지하입니다. 아마 문을 여는것과 동시에 가스에 중독되어 당장 조취를 받지 못하면 우리는 죽게 될 겁니다.”
여자쪽에서 아무 말도 없었다. 괜히 불안감만 더 들게 한건 아닌가, 하고 사이토가 조금 걱정스러운 듯이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다행이 그녀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사이토의 설명을 현실적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옆 칸의 사람들이 이쪽 동태를 살펴보고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그쪽 사람들도 문이 열리지 않는것을 알아채고는 더 이상 문을 억지로 열려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문이 혹시라도 열린다고 하더라도 바깥의 유독가스가 스며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사이토와 그녀는 고립된 채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언제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지만 그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 말을 기점으로 또다시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여자쪽 입장에서는 조금은 불편한 상황일 것 같았다. 남자가 자신을 생각해 주고 있다는 게 보이긴 했지만 왠지 말이 없었다. 유일한 동승객은 말이 없고, 주위는 어둡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일회용 건전지로 돌아가는 비상 전등만이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두렵기도 하면서 은근히 마음을 다스리게 하는 오렌지색의 희미한 빛이었다. 불안에 떨고 있을 여자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남자가 짐짓 말문을 열었다.
“전 사이토 쇼고라고 합니다.”
“아, 네, 오가와 마리코에요.”
“이제야 통성명하게되서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말주변이 없어서 어떻게 안심시켜드리지를 못하는군요.”
“아니에요, 두명이서 있어서 다행이지 만약 이런 데 혼자였으면..휴, 경황이 없어서 저도 제대로 인사 할 생각을 못했네요.”
잠시 말을 멈추었던 오가와가 입을 열었다.
“이 전철에 매일 타시는 건가요?”
“에, 키바쪽에 직장이 있어서요, 오늘 또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던지 운이 없게도 방금 전까지 야근을 하다 오던 길이었습니다.”
“아...그러시군요.”
조금이라도 두려움을 떨쳐버리려는 듯, 조심스레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오가와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는지 짐짓 바닥으로 시선을 옮긴 사이토가 궁색해진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쪽 지방에 온지 삼년이 넘었는데 이런 사고는 처음입니다.”
“그런가요?”
“뭐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노선만 타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이런 일은 드물죠. 오가와씨도 이쪽부근에 회사가 있습니까?”
“아니요, 전 원래 홋카이도 사람이에요, 도쿄는 정말 오랜만인걸요.”
“예? 홋카이도? 저도 홋카이도 출신인데.”
“정말이세요? 반갑네요. 홋카이도, 살기 좋은 곳이죠.”
그녀가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이번에 시로이코이비또(일본의 과자이름. 홋카이도 특산과자) 불매운동 일어나서 완전히 회사가 도산이 날 지경이라네요”
“예? 아니, 이유가 뭡니까? 전 시로이코이비또가 일본에서 제일 맛있는 과자라고 생각해 왔는데.. 무슨 일이라도?”
“그게, 과자유통기한이 1년이나 지난걸 대량 유통했다나봐요. 아참 그리고 홋카이도대에서 지금 집회일어나서 조금 시끄러워요.”
“에에? 홋카이도대에서? 무슨 일이죠?”
홋카이도 대학 출신인 사이토는 뜻밖의 소식에 깜짝 놀라며 재빨리 되물었다.
“글쎄 저도 뉴스 본지 오래되서 그것까지는 잘...죄송해요. 역시 고향일이라 궁금하시겠네요. 아무튼 저도 홋카이도에서 건너온 지 벌써 일주일은 되놔서...”
“이쪽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
-뭔가 실수한건가.
대답이 늦어지는 그녀를 보며 일순 사이토는 생각했다. 그녀는 허공을 바라본 채로, 나긋하고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사람을 찾으러 왔어요.”
“사람? 친구?”
그녀는 또다시 뜸을 들었다. 여전히 앞 유리창 쪽을 향해 얼굴을 바로하고 있을 뿐이었다.
“첫사랑이요”
“..첫사랑이라.”
“사이토 씨는 언제예요? 첫사랑.”
“....예?”
“아니, 그냥.. 좀 우습죠? 이 나이에 첫사랑 타령이라니. 근데 저, 실은 소설가예요. 소설 모티브가 생각났는데, 첫사랑이랑 관계 된 거라서 말이죠.”
“소설이라. 저랑 완전히 반대계통이군요. 전 공업쪽이라 소설이나 시에는 재주가 없어서.”
“그래도 읽는 쪽은 좋아하시잖아요. 그렇죠?”
“제가 그렇게 보입니까?”
“그냥 얼굴에 쓰여있어요, 어쩐지 감상적인 구석이 있을 것 같다는.”
“그렇습니까?”
“후음.. 그래도 저, 제법 사람 볼 줄 안다고 자신하고 있으니까요.”
“사람 볼 줄 안다라...그것 참 유용한 능력이군요. 처음 만난 사람을 배려 해 줄 수 있을테니깐 말입니다.”
사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창작시나 소설을 공유하는 클럽에 몇 개 가입해놓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읽고, 감상하고 평판하는걸 좋아했지만 웬만해선 자신의 이런 취향을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이토씨는....단것을 별로 안좋아하는군요, 아니, 싫어하죠. 아닌가요? 그대신 기호식품으로는 아침에 마시는 블랙커피 한 잔...”
이번에 사이토는 대답 대신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오가와의 예측이 정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녜요. 아직 미혼이라 그런건진 모르겠지만 사이토씨의 상체쪽에 지방이 적은걸로 봐서 그저 단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제가 사상체질에 조금 관심이 있어서 한 번 보면 웬만큼 그 사람 체질이 어떤지 알 수 있거든요. 소음인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분들이라면 반드시 커피한잔의 여유를 즐기지 않나요? 어쨌든 죄송해요, 초면에 너무 아는척했네요.”
낭패다, 라는 표정으로 허둥거리며 변명하듯 말하는 오가와의 말이 끝나고 그들 사이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곧 사이토는 무표정을 하고 있는 자신이 오가와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첫사랑을 찾아오셨다고 했죠? 벌써 만났나요?”
하지만 또다시 미묘한 표정만 짓고 얼른 대답을 하지 않는 오가와였다. 아무래도 오가와의 첫사랑은 매우 아름답거나, 매우 슬플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의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꿈같은 기억을 더듬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사이토가 자세를 편하게 고치며 느긋하게 말을 시작했다.
“여덟 살 때 였을겁니다 아마. 시작은.”
“네?”
“첫사랑이 언제냐고 물으셨죠. 8살 때였어요.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어느 날 우리 집 옆집으로 이사해 왔는데 얼마나 아름답던지, 그때 막 7살이 된 제가 볼 땐 마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이 생각됐죠.”
“오, 첫사랑이 그런 어린 시절에 찾아오다니, 흥미로운데요?”
“뭐 정식적으로 서로 좋아한 걸 확인하고, 사귀기 시작한 건.. 아마 한참 뒤였을 겁니다. 그땐 저도 정말 쑥맥 꼬마동이일 뿐이라서 그 어린천사한테 감히 말도 제대로 걸어보지 못했으니까요. 아마, 중학교 졸업하고 나서부터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가 된 듯합니다.”
“흐음, 어린소년의 사랑이 이루어지다니, 흔한 일은 아니군요. 그 다음은 어떻게 되나요? 그 여자분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요?”
그녀가 호기심이 일었는지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사이토를 바라보았다. 사이토는 약간 자조적인 웃음을 언뜻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해피앤딩은 아닌 것 같았다. 어쨌든 누구에게나 해피엔딩일 순 없는 게 ‘첫사랑’ 이라는 거니까.
“죽었습니다.”
먼저 하늘나라로 가 버린 첫사랑 얘기는 더더욱 애절하고 아픈 법이었다. 하지만 사이토의 얼굴은 아름다운 과거를 추억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뭔가 그로테스크한 기억이 떠오른 듯한, 아니면 무서운 꿈을 기억해내는 듯한 오묘한 표정이었다. 사이토는 잠시 자신의 세계에 빠져 있다가 문득 오가와 쪽으로 돌아보며 물었다.
“소설가라면 옛날 전설이나 괴담같은것도 잘 알고있지 않습니까? 재밌는 얘기 없나요?”
“글쎄요.. 괴담같은 걸 좋아하긴 하지만..”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고 오가와는 뜬금없이 화제를 돌리는 사이토를 응시했다. 사이토가 말을 이었다.
“일본 전설중에서 ‘센넨타누키’라는 이야기 아십니까? 내가 아는 것 중에 제일 무섭던데.”
“아...그..”
오가와의 표정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센넨타누키’ 전설.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지만 무려 1000년 이상 전해 내려오는 일본의 고대 전설 중에 하나였다.
옛날 옛날에 ‘센넨타누키’라고 불리우는 요괴가 살았다. ‘센넨’은 일본어로 천년 이라는 뜻이었고, ‘타누키’는 너구리를 뜻하는 말이었다. 요괴의 정체는 말 그대로 ‘천년을 사는 너구리’였다. 일본인들의 주술적 염원과 기운을 받고 둔갑술을 가지고 있다는 너구리요괴는, ‘천 년 동안 한 남자에게 계속해서 사랑을 받으면 인간이 될 수 있는’ 저주를 받은 슬픈 운명을 가진 요괴였다. 속세에서는 그 너구리가 둔갑술을 익히고 있어서 어떤 모습으로도 변신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너구리는 실제로 그 모습이 계속해서 변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자기능력이 아닌 일종의 저주일 뿐이었다. 요괴는 스스로 모습을 바꾸는 게 아니라 사실은 ‘저절로 몸이 바뀌는’ 거였다. 따라서 언제 어떻게 변태를 시작할지 요괴들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은 저주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잘만 이용하면 휼륭한 능력이 될 수 도 있었다. 요괴들은 자신의 모습이 계속해서 새로운 여자의 모습으로 바뀐다는 것을 이용해서 한사람의 인간에게 의심을 받지 않고 접근 할 수 있게 된다. 즉, 여자의 모습을 하고 인간남자의 앞에 나타나 그 남자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게 만든 후, 그 사랑이 식기 전에 또다시 새로운 매력을 가진 여자의 얼굴로 변해서 신선한 사랑을 반복한다는 이야기이다. 만약 요괴가 그 사랑을 성공한다면, 한 남자에게 있어서는 열 번도 넘는 죽음과 환생을 거듭하는 사이에 단 한 여자만을(실은 요괴를) 사랑하게 되는 셈이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사랑을 계속한다..그런식으로 두명이 천년의 사랑을 성공하면, 요괴는 드디어 저주에서 풀려나 인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서인지 천년간의 사랑을 끝까지 지켜내는 요괴는 흔치 않다고 한다. 변태를 하는 시기가 운이 좋아 계속해서 남자의 사랑이 시들기 전에 모습이 바뀐다면, 그리고 바뀐 모습에도 남자가 또다시 사랑을 준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만약 남자의 미움을 산 상태에서도 변태가 진행되지 않는다면 요괴는 남자에게서 더 이상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요괴는 인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만약 변태 하는 순간의 모습을 남자가 봐버린다면... 그러고 난 후에도 요괴는 남자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정말 끔찍할 겁니다.” 사이토가 말했다.
“하지만 그건 흔한 전설일 뿐이잖아요.” 오가와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만약, 실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오가와가 조금 놀란 듯이 사이토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것이 사이토는 이런 형이상학적인 일에는 흥미가 없는 철저한 현실주의자 같은 이미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게요.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우리는 눈치채지 못하겠네요. 남자입장에서 보면 전혀 다른 여자들과 연애를 한 거지만, 그게 원래는 한사람이었다는 걸 상상하기 어렵겠죠. 더구나 여자쪽에서 철저하게 숨기려고 작정한 이상.”
“맞습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꽤나 현실적이지 않습니까. 현실적으로 한 육체를 가지고 천년을 사랑하는 건 불가능하죠. 천년을 살 수 있다고 해도 한 얼굴만 계속 사랑하는 건 식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완전히 모습을 바꾸고 사랑을 이어나간다라, 정말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여자 입장에서 보면 정말 공감 가는 이야기라고 이 이야기를 아는 여자들이 얘기했습니다. 남자의 사랑은 변하기 쉬우니.. 화려한 외모를 자꾸 바꾸면서 항상 그 남자의 100퍼센트 사랑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죠.”
그 얘기에 오가와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그렇지 않아요. 얼굴을 바꾸면서 그 사람 겉에서 계속 맴돌 뿐이라니...그거야말로 저주예요.”
의외로 요괴의 고통에 공감하듯 중얼거리며 말하는 오가와를 바라보며 사이토는 조금 의외의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오가와는 작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부부처럼 깊어지는 것도 사랑이에요. 열정이 없어도.. 아무리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꿀 수 없다 해도 열정을 다 한 끝의 부부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요.”
“그게 여자들의 이상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실은 여자들은 말로만 그럴듯한 사랑을 찾을 뿐 실제로는 격정적인 사랑을 받는 쪽을 원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이토를 바라보며 오가와가 조심히 물었다.
“사이토씨는..그럼 그런 요괴를..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나요?”
그 말에 사이토도 오가와를 돌아보았다.
“요괴에 대한 평가는 그렇다 치더라도 남자는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남자의 사랑은 보기보다도 대단한 겁니다. 변하기 쉽지만 사랑에 불타오르는 그 순간부터 애정의 호르몬이 다하는 날까지 여자만 바라보고 여자에게 모든 에너지를 소비하게 되죠. 자신의 심장까지 선뜻 줄 수 있을만큼, 그런 사랑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남자들과 다르게 요괴에게 선택당한 남자들은 그런 소모성 짙은 사랑을 천년동안 계속하게 되어있습니다. 마치 농락당하듯 사랑에 빠지고 홀연히 사라지는 여자를 그리워하면서 안타까워해야 하죠. 남자는 자기가 하는 사랑이 계획되어있는, 반복되는 사랑인지 알지도 못한 채 기뻐하고, 사랑하고, 이별의 안타까움을 겪는 겁니다. 만약 어느 날 여자요괴를 지키다가 대신 죽게 되어도 환생해서 또다시 같은 여자에게 사랑에 빠지게 되겠죠. 남자 입장에선 진상을 알게 된다면 뭔가 화가 나는 일인 것 갔습니다. 계속에서 반복되는 사랑에 속는 거라고나 하면 좋을지. 그러니까, 요괴에게 사랑을 받는 남자 또한 저주받았다고 할 수 있죠.”
“.........”
“하지만 자신이 저주 받았다는 사실은 아마 모르겠죠. 그래서 그 남자는 불행하다고 하기도 뭐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계속해서 사랑 하는 것 밖에... 도리가 없겠죠.”
오가와가 사이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이토는 왠지 아까부터 계속해서 자조적이고 고통을 삼키는 듯한 웃음을 희미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오가와는 조심스럽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만약 사이토씨가 그런 사랑의 주인공이 된다면.. 요괴를 사랑할 수 있나요?”
“......”
“그러니까, 전 요괴가 괴물이긴 하지만,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운명이 그럴 뿐이지 어쨌든 그 남자를 사랑하는 거잖아요.”
그 질문에 사이토는 의외로 오랫동안 신중히 생각했다.
어쩌다가 이런 전설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식으로 이야기를 일단락한 두사람은 조금의 침묵 후에 다시 말을 시작했다. 시작은 사이토가 먼저였다.
“소설가라고 하셨죠? 제가 소설에 영감을 얻을수 있을만한 이야기 하나 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떤 이야기죠?”
“아까 얘기했던 제 첫사랑 얘기입니다. 그리고 센넨타누키와도 어쩌면 관계있는 이야기가 되죠.”
“설마, 첫사랑분이 사실은 요괴였다, 이런 말씀은 아니시죠?”
“그거야 저도 확실히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판단은 오가와씨가 하시는 거니까 말입니다.....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녀는 죽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정도 지난 뒤였습니다. 자살이었죠.”
내려다 보듯이 눈을 뜨고 죽어있었던 스즈키 미카. 그녀는 자신의 방에서 목이 매달린 채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죽을 당시에 그녀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미 대학생이 된 지 1년이나 지난 뒤였는데 왜 교복을 입었을까. 그녀의 방은 제 방 창문 바로 맞은편에 붙어있었기 때문에 그쪽 창문을 통해서 그녀의 방이 훤히 들여다 보였죠. 우린 사귀는 동안 서로 붙어있는 창문을 통해 자주 드나들면서 놀았는데... 그 방안에서 제 방을 향해서 목을 매단 것이었습니다.”
대학교 보란티아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사이토의 집에는 가족들이 모두 외출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집에도 가족들은 없었다. 그렇게 목을 매고 죽어서 얼마동안 그를 기다린걸까. 침대에 가방을 던져놓던 사이토는 문득 창밖의, 그녀의 창 안쪽의 상황을 보고 잠시동안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축 늘어진 몸, 아무 표정없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 그리고 교복과 고등학교 시절 자주 했었던, 그가 예쁘다고 자주 말했던 반묶음 헤어스타일...
그가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 기절해 있었던 것이다. 바깥의 난동에 눈이 떠진 것이었다. 병실 바깥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미치기 일보직전 까지 간 미카의 아버지의 괴성과 함께 주위 사람들의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이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소리도 들렸다. 열아홉 살이었던 사이토는 다시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억지로 차린 뒤부터는 셀 수 없을 정도로 경찰에 붙들려 같은 말을 반복해야만 했고, 유서에 대한 해명을 해야겠다. 유서 곳곳에 쓰여져 있던 자신의 이름. 명백하게 사이토가 죽음의 이유였다. 그는 몇 번이고 진술했고, 그의 생각을 말하고 그녀의 생각을 짐작해야 했다. 8살때부터 빠져든 사랑. 그들은 이웃 친구로서, 소꿉친구로서 가까워졌다. 중학생이 되고, 한바탕 사이토가 미카를 짝사랑 한다는 소문으로 학교 전체가 술렁이던 사건, 고등학생이 된 뒤에 정식적으로 사랑하게 됨을 선언했던 두 사람. 창문이 이어져 있었기에 사이토는 자주 미카의 방에 잠입해서 함께 밤을 보내긴 했지만 쉽게 그녀의 몸에 손대진 못했다. 그렇게 순진하고 조심스러운 사랑을 계속해 나가던 두사람. 그녀도 어느새 사이토를 마음속 깊이 받아들였고, 모두에게 인정받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결과는...그랬다. 미카의 자살. 커다란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미카는 자주 사이토에게 화를 냈다. 왜 화를 내는지 사이토로서는 알수가 없었다. 미카는 버럭 화를 냈다가 어느새 잊은 듯 상냥해졌다가 뜬금없이 눈물을 흘리기 일수였다. 그런 변덕 속에서 그들은 대학생이 되었고, 사이토는 대학생활에 눈코뜰새 없이 바빠졌다. 점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미카였다. 그녀는 사이토에게 “변했다.” 라고 말했다. 그녀의 변덕은 점차 심해졌다. 날이 갈수록 구속하기 시작했다. 헤어지잔 말도 수없이 해댔다. 사이토는 지친 것일까. 계속 붙잡고 잘못했다고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였다.
-잘못했다고? 니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 넌 변했어.. 변했다고
-아니야, 문제는 그게 아니야. 그까지것 까먹었다고 내가 지금 화를 내는 줄 알아? 넌 왜 문제가 뭔지를 몰라?
도저히 알수가 없었다. 벌써 열 번이 넘게..아니 몇 번째인지 모른다. 한 열 세 번째쯤 되는 이별 통보를 받았다.
-넌 옛날의 네가 아니야. 어쩜 그럴수 있어? 나한테 이럴수가 있는거야? 너 옛날엔 나랑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잖아.
옛날엔 눈도 못마주치다가 지금은 잘도 마주쳐서 헤어지게 된걸까. 아무리 이해할수 있게 헤어지는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그런 류의 것들 뿐이었다. 사이토는 어렸다. 그때의 상황에 대해 이해하기엔 부족했다. 그녀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화가 나는 이유를 자신도 말하기 뭐했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의 어떻게 해볼 도리없이 학교다니는 데에 전념했다. 그는 말이 없어졌다. 클럽 활동을 하는 중에도 그는 그렇게 적극적인 편은 되지 못했다.
-사이토?
같은 활동부원 리카코에게 미안했다. 그다지 실력이 좋지도 않고 적극적이지도 못한 자신이 임원급이 되어 같은 임원진인 그녀가 피해를 보는 것 같았다.
“아아, 미안, 미안해. 잠시 딴생각 하느라..”
“괜찮아, 근데 사이토는 자주 딴생각 하는것 같더라.”
얼굴을 붉힌 사이토를 보며 그녀가 웃었다.
“미안..”
“뭐라고 할려는 거 아니었어,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토 얼굴도 멋있지만, 지금은 이 회의 안건이 더 중요한것 같아서 말이야.”
“아, 응.”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이었다. 그렇게 그는 운명같았던 첫사랑이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새로운 사랑을 맞이해 버리고 말았다. 미카에게 전전긍긍하던 그도 이제 더 이상 그런 것은 진절머리가 났다. 정말 싫었다. 그는 클럽활동에 매진했고, 미카에게는 소홀해졌다. 미카와 다시 사귀게 되었지만 왠지 사이토의 행동은 변했다. 냉정해진 사이토의 변화에 피를 토하며 분노 할 줄 알았던 미카는 왠지 전보다 더 고분고분해졌고, 더 재미없는 여자가 되었다. 화를 내지 않는다면 미카를 영원히 사랑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나 착해진, 아니 두려움에 숨이 막혀있는 미카를 보니 답답했다. 미카는 하루에도 몇 번씩 화를 냈다가 달래다가 했다. 전화를 받지 않는 날이면 한번에 부재중 통화를 서른 번 넘게 넣었다. 그걸 확인하는 사이토는 소름이 돋았다. 죽어버릴 거라는 문자도 와있었다. 한두번이 아니었다. 너무 지쳤다. 천사였던 그녀가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린걸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겨를도 없었다. 사이토는 그저 그런 상황을 모면하고 도망가고만 싶었다.
[그래. 너 이럴거면 차라리 죽어버려]
그 문자는 텔레콤에서 인쇄되어 경찰서로 전송되었고, 사이토는 경찰서에서 자신이 보냈던 그 문자를 내려다 보았다. 눈물이 나왔다.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부모님은 일부러 그런건지 본심이었는지 그렇게 사이가 좋던 미카의 부모님에게 강력하게 맞섰다. 사이토에게 살인당한거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는 미카의 부모. 그리고 전혀 그럴 이유가 없다고 대응하는 사이토의 부모. 사이토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 사건은 비밀이었지만 모두가 알고있는 비밀이었다. 사이토는 다시는 사랑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원래가 숫기없었던 사이토는 이 일로 더욱 고립되었다. 그런 그에게 먼저 다가온 건 쿠로사와 노리코였다. 그런데 그는 아직까지도 그녀의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를 못한다.
아직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노리코. 1년도 채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마음의 상처가 다 치유된 듯 사랑에 두려움이 없는 자신을 만났다. 하지만 그녀는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꿈같은 사랑을 한 것이다. 사라진 다음에야 사이토는 그녀의 집도, 친구들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곧바로 다른 사랑이 찾아왔다. 불안한 마음에 사이토는 그녀의 친구들을 공략했다. 그녀의 가족들에게도 몇 번이고 인사를 하러 갔다. 느닷없이 사랑을 잃은 것에 대한 후유증이었을까, 아니면 첫사랑에 면죄를 하고싶은 마음에서였을까. 그는 세 번째 사랑인 무카이에게 집착아닌 집착을 했다. 언제나 그녀를 그의 시야 안에 두고 싶어했고, 질투를 했고, 언제나 재촉했다. 그래도 무카이는 그런 그를 잘 이해해 주었다. 그녀는 이해심이 깊었고, 아름다웠다. 그녀가 화를 내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사이토의 잘못 때문이었다. 그녀는 평온한 성격으로 웬만해서는 흐트러지지 않았는데, 가끔 알 수 없이 화를 낼 때가 있었다. 사이토가 집착기를 드러내거나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그녀는 화난 눈으로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왠지 모를 눈물이 고여있었던 것 같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건 그의 집착에 대해 진절머리가 나서 내는 화가 아닌 것 같았다. 사이토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뭔가 원망하는듯한... 그녀는 언젠가 사이토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신처럼 질투 많은 남자가 만약 어떤 여자에게는 시큰둥하게 대한다면...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거겠지?"
“무슨 말이야?”
그녀는 어느날 평소때와 같이 데이트를 하다가 순간 얼굴이 노래졌다. 얼굴에는 땀이 맺혔고 불안한 듯 눈을 마구 굴리는 그녀는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왜그래? 어디 안좋아?”
“아...아아...!!”
그녀는 속이 좋지 않은 듯 했다. 화장실 다녀올게, 하고 그녀는 총총히 사라져 갔었다.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비운 그녀는 그날 돌아오지 않았고, 전화기도 연결되지 않았다.
다음날 사이토는 교통사고로 그녀가 즉사했다는 소식을 들어야했다.
어떻게 그렇게 어이없이.. 역시 아파보이는 그녀와 같이 가주는 거였는데. 그녀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화를 내며 완고하게 사이토가 자신을 쫒아오지 못하게 못을 박았었다. 죄책감과 후회로 사이토는 몇 번이고 죽으려는 생각을 했다. 끝까지 자신이 따라오는 걸 저지하던 무카이. 어째서 자신은 그녀를 지키지 못한걸까. 사이토는 차라리 죽고 싶을만큼 괴로워했다.
사이토는 점점 말라갔고, 하얗던 얼굴은 더욱 핏기가 없어졌다. 사랑을 하면 할수록 눈은 더 퀭해졌고 숨소리는 얇아졌다. 사랑을 하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이상하게 초췌해보이는건 사실이었지만, 사랑이 떠나가고 난 후엔 그보다 더 폐인이 되었다. 그는 어쩌면 저주를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리고 꽃피지도 않던 어린 영혼을 죽게 한 것에 대한 벌. 그는 미카를 자주 떠올렸다. 그는 이제 이십대 중반을 넘어서는 나이로, 어느정도 미카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애도의 마음까지 가질 수 있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어느덧 그는 쉽게 사랑을 믿지 않게 되었다. ‘사랑을 하면 떠나버린다.’ 라는 비과학적인 공식이 단 몇 번의 경험으로 성립되었다. 그는 두려웠고 아무리 해도 무카이를 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사랑은 찾아왔다. 와타아베 루미. 루미는 친구처럼, 또는 누나처럼 편안하게 다가왔다. 알게 된 지 5년이나 지나고 나서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 그 사랑이 미지근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와의 이별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찾아왔다. 그들은 동거를 시작했다. 양가 부모님께 인사도 드린 뒤였다.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다. 말도 안되게 복을 타고났다고, 그는 지난 사랑의 모든 것을 잊고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쇼(사이토의 이름), 나 출장이야 일주일도 안걸리긴 하는데 그래도. 밥 잘 챙겨먹고, 나 없어도 잘 할 수 있지?”
출장이라니. 하필이면 그녀의 생일을 끼고 기막힌 로케였다. 그녀는 방송국 작가였다. 원래는 로맨스도 꿈꾸는 드라마 작가였지만 지금은 미스테리를 밝혀내는 탐험쇼프로의 작가다. 그녀는 왠지 이세상에 없을 것 같은 것들을 꿈꿨다. 외계인이라든지 유령같은. 그래서 다른 방송 스탭들은 어느정도 사기성을 인정하고 촬영에 들어가는데 비해 그녀는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하기사, 본인이 믿고 있을 때라야 그럴듯한 글이 나오기 마련이겠지. 그녀의 독특한 감수성과 자기만의 정신세계가 그녀를 유명 작가로 만들어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영원한 사랑에 대해서도 믿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과 사이토가 영원한 사랑을 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그녀는 사랑을 믿었고, 로맥틱한 것들을 사랑했다.
그런 그녀에게 ‘생일날 노동’이라는 것은 비참한 일이었다. 그런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조금은 우울한 듯 사이토에게 키스를 하고 집을 나섰다.
그런 그녀에게 뭔가라도 해주고 싶은 사이토였다. 그는 그녀가 집에 돌아오는 날 놀랄만한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기로 했다. 하지만 일단 평범한 서프라이즈라면 모두 한번씩은 해본 상태였다. 그는 수시로 그녀에게 꽃다발을 안겼고, 풍선을 날렸으며, 아이스크림에서 반지를 찾아주었다. 이번엔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그는 생각했다.
귀신이 산다는 병원터를 둘러보고 온다는 이번 촬영을 생각해낸 사이토는 이번엔 왠지 공포로 컨셉을 잡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곧 지하실 창고를 생각해냈다.
-지하실만큼 으스스한 곳은 없지
사이토는 잠겨져 있는 지하실 문의 열쇠를 망가뜨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혼나더라도 지하실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 집은 루미명의의 집이었다. 그냥 원래 루미의 집에 사이토가 몸만 왔다고 하면 말이 더 쉬웠다. 처음에 사이토는 경제력이 더 낮은 자신이 꽤나 한심하다고 생각했지만 루미가 워낙 잘나가는 방송작가이기도 했고, 사이토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그의 자존심을 절대 건들지 않는 루미의 덕에 지금까지 어떤 문제는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지하창고에까지는 그도 신경쓸 생각을 하지 못했었고 루미도 별다른 말은 없었다.
지하창고의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 사이토가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루미도 지하실의 일은 잊었을것 같았다. 그러니깐 이 자물쇠는 열쇠도 없는 고물이 되어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튼 그렇게 들어간 지하실 안은 의외로 먼지하나 없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있는 책상과 의자, 그리고 책상 주변의 높다란 책꽂이. 일종의 서재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책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책상위의 스탠드를 켜보았다. 틱, 하고 밝게 불이 들어왔다. 책상 위에는 먼지가 없었다.
-평소에 쓰고 있었다는 건가.
하지만 지하실로 내려가는 루미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조금 의아했다. 책상의 스탠드를 켠 상태에서 지하실의 조명까지 켰다. 꽤 밝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곳은 평소에도 계속 사용되고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듯 먼지하나 없고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어째서 이곳을 들락거렸으면서 그동안 나한테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걸까...
근 일 년을 같이 살면서 한 번도 루미의 지하실 출입장면을 본적이 없었던 사이토로서는 의문이 아닐수가 없었다. 일부러 몰래 다니지 않는이상 그렇게 자신이 새까맣게 몰랐을 리가 없었다.
책상 위의 책장에는 같은 모양 같은 크기의 꽤 두툼한 노트가 몇권 나란히 꽂혀져 있었다. 뭘까. 제일 뒤쪽에 있는 노트를 빼보았다.
겉표지에 2008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2008년도?
펼쳐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일기였다. 일기임을 확인하고 일단 덮었으나, 그는 궁금함을 참기가 힘들었다. 안된다는걸 알았지만, 왠지 여기까지 와서 그만둔다는건 말이 안된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일기를 펼쳐보았다.
가장 최근의 일기.
<2008년 6월 2일>
불안한 하루의 연속..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다. 벌써 이 몸으로 산지도 6년째이다. 이렇게 오래도록 살아 본 게 처음이라 점점 더 불안해진다. 어쩌면 저주에서 벗어나 진짜 사람이 되버린 걸지도 모른다는 착각도 해본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2008년 5월 28일>
이토록 오래 그의 곁에 머물 수 있다는 게 기쁘면서도 불안하다. 우린 얼마전에 기념 1주년을 맞았다. 우린 아직 신혼이다. 그는 내게 푹 빠져있는 것 같다. 5년동안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던 고통이 다 보상되는 듯한 하루하루이다.
뭐지... 알수 없는 말들로 가득 찬 가운데 하나 눈에 들어온 건 ‘5년동안 기다려왔다는’ 문구였다. 그녀와 친구사이였던 처음 5년간을 사이토는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친구로서 마음을 트고 5년... 적지않은 우정을 쌓았다. 적어도 사이토에게 그 시간은 그렇게 기억되고 있었다. 그는 노트를 내려놓고 5년 전인 2002년의 일기장을 집어들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게 언제인지 확실히 기억나진 않았지만 친구들과의 송년회 술자리에서 만났던 것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2002년 12월 22일>
애써 만든 이 기회를 놓쳐선 안된다. 어떻게든 그와 인연을 만들기 위해 난 죽을 노력을 기울였다. 우연인것처럼, 인연인것처럼 보이기 위한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가면 모든게 끝이다.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될까봐 불안하다. 저번에 내가 갑자기 사라진 것 때문에 상처받았을 사이토...지금쯤이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여유가 생겼을까. 이번 송년회가 기회다. 어떻게는 그날 내개 반하게 만들겠다....
<2003년 1월 3일>
어떻게 된건지 그는 내게 시큰둥했다. 절망적이었다. 그는 아직도 무카이를 잊지 못하는 걸까. 이렇게 된 이상 작전을 바꿔야겠다. 당분간 사이토와 친구로 지내면서 기회를 엿봐야 할 것 같다.. 그는 무카이를 많이 사랑했던 것 같다. 바보야... 이제 날 보라고, 니 옆에 있는데. 모르겠니?
<2005년 3월 12일>
점점 더 불안해진다. 그는 내 맘을 몰라준다. 날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다른 누구를 사랑하는것도 아니니 아직 내게 희망은 있다. 내 힘도 점점 떨어져 가고있다. 이대로 계속된다면 난 분명 하괴로 전락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방법이 없다... 사이토가 나 말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땐 그 여자를 내손으로 없애는 방법밖에는 없는 걸까. 점점 마음이 급해진다. 왜 사이토는 날 몰라봐주는 걸까.
<2001년 4월8일>
그가 날 사랑하면 사랑 할수록 난 더 불안하다. 그의 사랑이 정점에 이르러 이윽고 꺾이기 전에 난 그의 앞에서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다른 남자와 조금 이야기 했다는 이유로 그가 내게 크게 화를 냈다. 나중에 미안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난 왠지 슬펐다. 이 질투도, 소유욕도 내가 미카였을 시절 겪었던 일들이다. 그 폭풍갔던 숭배가 끝나고 난 후 날 어떻게 내팽개쳤는지도 기억 하고 있다. 같은 사람인데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다니. 왠지 조금 슬프다. 나는 미카에게 애도를 표한다.
<2001년 7월 1일>
위험했다. 그건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난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갑자기 변태하다니. 아직 사랑이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럴 수가 있는거였나? 내 몸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아챘다.
사랑이 시작되고, 끝나는 거와는 상관없이 변태는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것 같다. 항상 긴장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1999년 2월 3일>
애증...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마음... 지금 내가 너에게 가진 마음이다. 너는 날 잊은걸까. 1년 전 널 너무 사랑해서 저주하던 미카라는 여자를 잊어버린 걸까. 그때 내 고통과 외로움따위는 무참히 짓밟고서, 넌 지금 웃고 있는건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우면서도 또한 사랑한다. 노리코라는 여자에게 빠진 너의 행복에 겨운 얼굴을 보면서 어느순간 묻고 싶다. ‘벌써 미카는 잊은거냐’고. 노리코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면 넌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난 지금 매우 행복하다. 너의 끝없는 사랑에... 지난 고통이 잊혀질 정도이다. 하지만 난 아직 아프다. 웃음 뒤에 가려진 내 상처를 넌 보지 못하겠지... 니가 평생을 목매단 미카의 모습을 잊지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치기를 바랬는데... 다시는 행복하게 웃지 않길 바랬는데... 웃는 너를 보며 왜 나도 웃는걸까. 난 행복하면서도 슬프다.
점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뭐가 뭔지 모르는 와중에 사이토는 일기장 곳곳에서 그녀가 몰라야 마땅한, 그의 전 여자들의 이름이 자꾸 나온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정신병자인 것 같았다. 이상한 망상에 사로잡혀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
루미와의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 그러면서도 5년을 친구인 척 하며 지냈던 것도 소름돋았지만 그 전의 일기 내용들은 사이토로 하여금 가히 경악하게 만들었다.
<2001년 6월13일>
사랑한다..사랑해 나 무카이는 널 정말로 사랑했어, 하지만 또 시간이 되었네. 안녕...우리 다시 만나자. 정말 사랑했어. 놀래켜서 미안해... 너무 많이 울지 마. 옆에서 보는 내가 더 아프잖아. 걱정하지 마...난 다시 너에게로 갈꺼야. 넌 또다른 사랑을 하게 될꺼야. 그때 너의 눈물을 내 손으로 닦아줄게... 사랑해...사랑해...
손이 떨려왔다. 어떠한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한껏 긴장한 손으로 사이토는 제일 처음 일기장을 집어들었다. 시작은, 1997년 11월 14일. 날씨 맑음 이었다.
<1998년 11월 14일>
날씨 맑음... 너무 오래 자고 있었던 듯 하다. 천 년 후에 같이 손을 잡고 이를 보기 위해 나는 이렇게...
여기까지 읽던 사이토는 등뒤에서 칼날같이 서려오는 시선에 자동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랬다. 등 뒤에서, 출장갔을 루미가 소름돋는 눈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한기를 느낀 사이토. 단순한 한기가 아니었다. 사이토는 공포감을 느꼈다. 어두운 빛밖에 없는 지하실. 무서운 여자의 눈. 지금은 무섭지만 죽을만큼 사랑했던 여자, 루미가 사이토의 앞에 서있었다. 두려움과 놀라움, 그리고 반사적으로 남의 일기를 봤다는 죄책감을 동시에 느낀 사이토는 잠시 망설이다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바깥으로 먼저 나갔다.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지만 손발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여러 가지 마음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얼마 후 그녀도 뒤따라 바깥으로 나오는 모습이 사이토의 눈에 비쳤다.
밝은 곳에서 보니 아까의 섬뜩하던 그녀의 눈빛을 사라지고 없었다. 일기장 속의 그녀와 사이토가 아는 그녀 사이의 갭... 그는 선뜻 새로 알게 된 그녀의 또 다른 단면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갑자기 그녀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뜻밖의 행동에 그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해 묻지도 못 한 채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왠만해서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사망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그녀는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날 해기 기울 때까지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저녁이 되었다. 그들은 그때까지 서로 아무 말도 않지 않은 채로 같이 있었다. 그들은, 특히 사이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또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좀처럼 길을 틀 수 없어서 침묵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한 침대에 누워서 한참의 시간을 보냈다.
새벽 3시쯤 되었을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천장만 멀뚱히 보고 있는 사이토에게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무서워?”
“뭐?”
“내가 정신병자라서 경멸스러워 할거냐 하는 말이야...”
“......너 정신병자였어?” 훗 하고 잠깐 웃는 사이토였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딱 하나만 대답해줘.”
“뭔데.”
“나한테 있어서 중요한 문제야.. 그대신, 솔직하게 대답해야 되.”
“알겠어. 그럼 너도 솔직하게 말해줘야되”
“....어. 일단 내가 먼저 물을게.”
“말해봐.”
“.............”
“뭔데...? 말해.”
“혹시 날 생각해준다고 거짓말하거나 하면 안되.”
“알겠어...빨리.”
“지금. 나 사랑해?”
“....뭐?”
“앞으로 어떤 사실을 알게 되도 사랑할거냐구 묻는 게 아니야. 그냥. 지금 이 순간의 느낌만 말해줘.”
“............”
“지금 니 옆에 누워있는 나 와타아베 루미 자체만 봐줘. 날 지금 사랑해?”
“....그래. 사랑해.”
“...........” 한숨 같은 소리 뒤에, 루미의 숨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고마워....”
우는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지만 안도하는듯한 목소리였다. 그녀가 스윽,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화장실.”
상체를 일으키던 그녀가 잠깐 그를 보았다.
그리고 화장실로 가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다음날, 그녀는 신발 하나 신지 않은채로 사라져 버렸다. 그 집에서 사라진 건 그녀와 그녀가 입고 있던 잠옷 뿐이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채로 그녀는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제가 센넨타누키 전설에 대해 알게 된 건 이 모든 일들을 전부 겪고 난 후였습니다.”
사이토가 말했다.
“그 전설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온몸에 소름이 확 끼치더군요. 무서웠습니다. 와타아베 루미가 무서웠고, 그 일기장이, 제 인생이 무서워 졌습니다.”
오가와의 얼굴이 샛노래졌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사이토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뒤로 죽 두려움을 안고 살고 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루미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가시지 않더군요. 어떻게 된 일인지... 그때 그렇게 그녀가 떠나버려서 이렇게 그리운 마음만 남았는지도 모르죠.”
오가와는 나름대로 충격받은 걸까? 표정이 그랬다.
“전 아무에게도 이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당신에게 처음 이야기 하는 겁니다. 물론 이 이야기를 믿고 안믿고는 당신 자유지만, 어쩐지 꽤나 재밌는 소설이 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가와씨, 어디 안좋으신가요?”
그제서야 오가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놀랐다는 게 눈에 보였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 소설가, 이런 미스테리한 이야기를 그냥 그대로 다 믿어버리는 사람일런지도 모른다.
그녀는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죄송합니다. 지금 상황도 그런데 괜히 으스스한 얘기만 한 것 같습니다.”
“아...아아..!!”
“죄송합니다. 진정하세요.” 사이토가 오가와의 얼굴을 살폈다. “아니면...정말로 어디가 불편하신 건가요? 혹시 두통이라든가.....아니!”
사이토는 오가와의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남지 않은걸 보고 심각하다는 것을 파악했다.
“저....”
“으으...으으으...으으...”
그녀가 돌연 벌떡 일어나서 짐승소리 같기도 한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뭔가를 찾아헤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도 이따금 통증이 오는건지 쭈구려 앉아있다가가, 다시 미친듯이 몸부림치며 전차칸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뭐지, 마치 실성한 것 같은 그녀의 행동에 사이토는 순간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어느순간 자동문 비상 열림장치를 찾아내어 허겁지겁 작동시키려 하는 모습을 본 사이토가 달려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왜 그러십니까? 지금 나가시면 안돼요, 우리 둘 다 죽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어쩔 수 없이 사이토는 무력을 사용해 그녀를 막았다. 그녀가 괴물같은 힘을 발휘해서 발버둥치자, 그는 더 이상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지하철 바닥에 내리꽂았다.
쿵!!! 너무 강력했던지 잠시 꼼짝 않고 있는...괴물이 된 것 같은 여자. 기절한 건 아닐까 걱정이 된 그는 조심스레 다가가 엎드린 채로 있는 그녀를 뒤집어 보았다.
“헉!!!”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었다. 그녀의 두 눈이..안구가 정상적인 위치에서 조금 더 빠져나와있었기에 부릅뜬 것처럼 보인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 눈은 얼마 후 튀어나올 듯이 점점 더 빠져나오고 있었다.
“으아악!!!”
여자를 내팽개친 그가 엉금엉금 기어서 뒤로 물러났다. 여자가 깨어난 것 같았다. 그녀는 바닥을 마구 뒹굴면서 소리를 질렀다.
“으아악!! 으아악!!! 안돼, 안돼!!! 안돼!!! 지금은.....안돼!!! 안돼...안돼!! 보지마!! 보지마!!”
“너..넌...!!!”
얼빠진 사람처럼 구석에 앉아있던 사이토의 두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녀의 얼굴은 불어나나 못해 찢어졌고, 피와 고름과 알 수 없는 액체들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것은 온 몸에도 마찬가지였다. 온몸이 그렇게 찢어지면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귀가 찢어질 것 같은, 태어나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던 소리였다. 이상한 냄새도 코를 찔렀다. 그 냄새에 사이토는 벌써 한번 구역질을 했다.
튀어나오기 시작했던 여자의, 아니 괴물의 두 눈이 대롱대롱 굴러서 사이토의 발 아래 떨어졌다.
“으아악!”
사이토는 그 눈알을 피해 다른 구석으로 기어갔다. 눈동자가 정확이 사이토를 향해 있었다.
괴물을 계속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사이토, 보지 마!! 흐으억! 보지...억...마...!!흐억!!”
여자의 살갖이 후두둑, 튿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온몸의 피를 쏟아냈다. 피 뿐만이 아니었다. 지방질들이 흘러내렸고, 분간 할 수 없는 알수없는 것들드리 폭발하듯이 분출됐다. 뭔가가 변화하고 있었다. 구역질 나는 광경에 사이토는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차라리 정신을 잃는 게 더 편할 것 같았다. 괴물은 끊임없이 사이토의 이름을 불렀다. 사이토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또다시 속이 울렁거린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쇳소리 같은 소리와 벌레들이 내는 것 같은... 처음 들어본 소리, 비명, 냄새... 점점 정신이 아득해져왔다....
눈을 떴을때 사이토의 눈에는 지하철 바닥이 보였다. 양 무릎을 곧추세우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 있었던 것이었다. 무서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앞에.. 아까의 그 눈알과 핏자국, 그리고 허물처럼 벗어진 여자의 표피가 있었다. 그 옆에, 아직 핏덩이들로 뒤덮혀있는, 전혀 새로운 여자가 알몸으로 쭈구려 앉아 울고 있었다.
처음의 그런 광경은 빠르게 변해갔고 이내 핏자국도, 엽기적이었던 시체의 난도질된듯한 모습도 조금씩 사라졌다. 울고있는 여자의 몸에 뒤덮혀 있는 피들도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갔다. 그것은 훌쩍거리면서 바닥을 보고있었다. 변태가 종료 된 상황이었다.
“넌....”
“그래, 나야....”
사이토는 망연자실했다. 도저히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눈앞에 고요히 앉아있는 눈부신 여자...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사이토는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스, 스즈키 미카...!”
그녀가 조금씩 훌쩍임을 멈추면서 말했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어버렸어...괴물이 되어버렸어...나쁜놈! 널 저주할꺼야!”
목소리가 크게 울리면서 사이토의 고막을 찢었다. 사이토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나기만 할 뿐이었다. 사이토를 죽일듯 노려보던 여자가 갑자기 말투를 바꾸어 애원했다.
“날 버리지 말아줘, 놀라지 말아줘. 날 사랑해줘... 난 너땜에 이런 몸이 되었어...날 버리지 마 제발!!”
“힉 저리가!”
여자가 엉금엉금 기어서 사이토에게 다가오려 하고 있었다. 사이토가 다시한번 가련하게 비명을 지르자 여자는 멈추어서 눈물을 흘렸다.
“날 사랑해줘.. 날 버리지 마....”
벌써 십년이 넘는 시간을 변태해 온 여자, 스즈키 미카. 아니, 루미. 무카이이면서, 쿠로사와이고 동시에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몇 번이고 그를 스쳐지나간..그를 사랑하는 여자. 여자들. 그녀는 이름이 없었다. 또다시 오가와라는 이름을 가지고 그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아니다. 이제 오가와도 과거가 되어있었다. 그녀는, 천년이 되기 전에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변태하는 모습을 보여버린...센넨타누키였다.
“너에게 상처받았던 나는 그날..죽어버릴려고 결심했었어.”
공포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사이토를 두고 그녀가 포기한 듯 서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제 주위의 모든 핏자국들은 말끔히 사라졌고, 그녀는 긴 생머리를 가진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역시 얼룩한 피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때 앞에 나타났지. 그게 말이야... 더 이상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 할 수 없게 된 괴물이었어. 요괴는 내게 말했지...”
-난 네가 저주하는 그 남자가 죽을 때까지 너만을 사랑하도록 만들어 줄 수 있다.
그 요괴는 스즈키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에 길게 자란 손톱이 보이는 쭈글쭈글한 손을 얹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세 번 반복해서 따라해라. 그러면 너의 소원은 이루어 질 것이다.
-나 스즈키 미카는 당신에게 영혼을 이양한다. 내 영혼을 얻은 당신은 사이토 쇼고를 저주하라. 나 스즈키 미카는 당신에게 영혼을 이양한다. 내 영혼을 얻은 당신은 사이토 쇼고를 저주하라. 나 스즈키 미카는.....
영혼을 팔고 난 다음의 운명에 대해서 그 요괴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세 번의 선언이 끝난 후 미처 어떤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요괴는 그녀 옆에 있는 넥타이 끈으로 그녀를 졸랐다. 그녀가 죽고싶어하던 방법 그대로 그녀는 그렇게 죽어버렸다. 사이토 쇼고. 저주하고 사랑하는 그의 방으로 몸을 향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미 난 이런 몸이었어. 후회했지만, 이미 끝난 일이었어....”
새하얀, 알몸의 여자가 공중에 뜬 것처럼 걸었다. 사이토는 두 무릎을 곧추세운 자세로 얼굴을 파묻고 미동도 없이 굳어있었다. 양 손으로 양쪽 귀를 틀어막듯이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그 상태로 그는 이미 기절한 것 같다...
“그 여자가 말했었는데... 넌 죽을 때 까지 날 사랑 할 거라고...왜 날 사랑하지 못한다는 거야? 왜 날 두려운 얼굴로 보는거지?!”
“내가 더 예뻐지고 감쪽같이 널 속인다면 사랑해 줄 수 있어?? 대답해봐...사이토, 고개만 숙이고 있지 말고...어서 대답해 봐...!!!”
가느다란 손을 뻗쳐 그를 흔들었다. 사이토는 아무런 저항없이 그 자리에 무너져 버렸다. 한참을 말없이 있던 여자가 엷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 괘찮아... 날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괜찮아. 하지만 다음 생애에서라면 달라.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날 용서해 줘. 우리 천년동안 사랑하자.”
여자는 비상문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를 바라보면서 그대로 그녀는 지하철 문을 열었다. 예상했던 대로 검은 연기가 빨려 들어와 사이토와 그녀를 덮쳤다. 사이토는 아마 고통도 느끼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잠시 그렇게 검은 어둠에 휘감기는 그를 내려다보다가 철로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는 그렇게 어딘가로 사라져갔다.
안녕하세요... 제가 요즘 하도 스트레스를 받아서 개인적으로 소설을 쓰고있는데요. 그냥 이걸 보신 분들은 어떤 반응일까...궁굼해서 한 번 올려보았습니다.
지금까지 뭘 써도 누군가에게 보여 준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떨리고 그러네요ㅠㅠ 잘부탁드립니다.. 이상한 부분 지적해주시면 감사^^ 제가 소설 이런걸 잘 몰라서.. 그냥 손가는대로 쓴건데, 소설에대해 아시는 분들 조언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여기 나오는 일본전설은 제가 그냥 지어낸 거구요^^ 참, 일본이 배경인거든..제가 지금 일본유학와서 한참 놀다가
이제 막 열공에 빠진지 두달가량 됐거든요...정말 공부만 하니깐 괜히 답답하고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