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속의 비명 내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그녀의 어떤 점이 눈에 띈다거나 다른 사람에 비해 크게 이상하다는느낌은 받지 못했다. 얼굴이 핼쓱하니 표정에 생기가 없긴 했지만, 그런 폼새야 여자들한테 흔한거고 해서 별 달리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남에 따라, 차츰 그녀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버린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녀는, 심분미라는 이름에 서른 일곱 해를 살아온 여자이다. 물론 일부러 그녀 의 뒤를 조사한 건 아니었다. 심분미가 입주해 들어온 집 주인의 아들이라는 잇점에서 본 전세계약서 덕분이었다. 나는 부유한 부모를 둔 탓에 제법 큰 집에 살고 있었다. 넓은 집을 활용하기 위해서 우리 부모님은 일층에 세를 주었는데, 우리 가족이 사는 이층에도 방이 한 개 남아 그 방도 세를 준 거였다. 이층은 넓은 거실을 사이에 두고 방 네 개와 두 개의 화장실이 있는데, 우리 가족 세 식구가 살기에는 너무 넓었다. 더욱이 내 부모님은, 누나가 있는 일본에 가 있을 때가 많아서 나 혼자 넓은 집을 지키고 있을 때가 다반사였다. 부모님은 이번에도 여러 달 걸릴 일본행에 앞서, 한 여자에게 이층에 딸린 방 한 칸을 내주었던 것이다. 나는 처음에 여자한테 세를 준다는 얘길 들을 때 솔직히 편치 않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집 주인과 세입자라고 해도, 노총각이 있는 집에 여자가 들어온다는 건 조금은 부자연스러울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긴 뭐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감정도 불필요한 사치 일런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한편으로는 술과 담배 냄새를 풍기는 남자보다는 분내를 흘리는 여자가 더 나을 거라는 생각도 들긴 들었다. 그러고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인가보다...그러나 내가 기거하는 방과 가까이 세들었다고 그녀에게 야릇한 마음을 품는다는지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나보다도 나이가 한참 많은 어엿한 중년이었고, 그런 쓸데없는 감정을 품기에 내 나름대로도 바빴던 탓이다. 그녀가 기거하는 방은 내 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거실을 같이 쓰긴 했지만 그녀가 사용하기에 큰 불편은 없었다. 출입구도 따로 나 있고 욕실이나 씽크대도 별도로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달 전까지 유명기업의 기획실에 근무를 했더랬는데 자의반타의반으로 지금은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쉬는 중이다. 마침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실시하던 중이었고, 내가 그 사항에 적용된 건 아니지만 분위기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나 스스로 사직서를 내버렸다. 나는 곧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새로운 공부를 시작할 계획이었다. 따라서 지금은 일본유학에 대한 준비를 하는 단계였다. 당연히 우리 집에 세든 여자에게 다른 마음을 품을 겨를은 없었다. 그런데 차츰 나는 심분미라는 여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 생각을 두지 않았는데 차츰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에 눈길을 주게 되었다. 그 관심이란 여자에게서 받는 연정이라든가, 호감을 말하는 게 아닌 다른 의미였다. 그녀는 통 말이 없는 편이었다. 어쩌다 거실을 지나다 나와 마주쳐도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기 일쑤였다. 그녀는 서른 일곱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앳된 용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꽤 미인측에 속했다. 하얀 얼굴과 단정한 이목구비 등은 남자를 여럿 후리고도 남을 여자같았다. 그런데 그녀는 하루종일 집에 박혀 있곤 했다. 어쩌다 외출을 하곤 했는데 그런 날이면 외박을 하고 돌아오곤 했다. 나는 그녀가 어떤 경로로 혼자 살고 있는지는 몰라도 어딘가에 남자가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왠지 그런 낌새가 보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에는 늘 수심이 떠나지 않았다. 무언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듯한 얼굴에서 그리 순탄치만은 않은 인생의 힘겨움이 엿 보였다. 그 힘겨움을 내가 엿본 건 어느 날 밤이었다. 때는 8월 하순이라 그리 덥진 않았지만 그래도 뜨거운 여름이 물러나기에는 성이 차지 않는 듯 그날 밤은 열대야와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더웠다. 나는 여러 번 몸을 뒤척이다가 갈증을 느껴 침대에서 일어났고 곧 거실로 나갔다. 냉장고를 열어 차가운 물을 들이키는데 내 귀에 무슨 소린가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그녀의 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 소리를 무시하고 그냥 내 방으로 들어갈려 했다. 그러나 그러기엔 그 소리가 자꾸 날 붙잡는 것만 같았다. 어딘가 억눌린 채 흐느끼는 소리...가슴을 쥐어짜며 슬픔을 토해내는, 그런 소리였다. 그녀는 큰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듯했지만 그녀가 가진 고통의 정도가 심해 흐느낌은 그녀의 방을 타고 거실 쪽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나는 잠시 어떡할까 망설였다. 다른 식구라곤 없는 덩그런 집 안에서 서른 살의 노총각이 혼자 사는 여인네의 방을 엿본다는 건 아무래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 같았다. 그래서 내 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다시 그 소리가 들려왔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듯한 소리. 그리고 무언가에 심하게 억눌리는 듯한 고통이 배인 소리... 내 발 길은 나도 모르게 그녀의 방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 안에 불순한 생각이 없는데 거리낄 건 없을 거 같았다. 내 귀를 어지럽히는 저 소리의 원인을 알고 싶었고, 필요하다면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그녀 방 앞에 이르자, 신기하게도 그 소리는 딱 그치고 말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적막만이 감돌 뿐이었다. 나는 멋쩍은 얼굴이 되어서는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침대 위에 걸터앉은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혼자 자는 여자 방에 슬금슬금 걸어가는 노총각 꼴이라니...그러나 다음 순간 개운치 않은 기분이 밀려들었다. 분명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그 방 앞에 다가간 순간, 거짓말처럼 소리는 그치고 말았으니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다음 날, 늦게 일어난 나는 욕실에서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거실로 나오고 있었다. 마침 외출복 차림으로 방을 나가는 그녀와 마주쳐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마치 죄라도 지은 것처럼 민망해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조금 숙이고는 현관을 나섰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담배를 피워물면서 간밤의 일을 곰곰 생각해보았다. 조금 전에 마주친 그녀의 표정에서 나는, 심상치 않은 어떤 기운을 느꼈다. 그녀의 표정이야 언제봐도 그리 밝은 편은 아니었지만 아까 내게 보여준 그녀의 얼굴에서는 말로 형언하지 못할 감정의 기류가 서려 있었다. 차마 쉽게 표현하지 못할 고통과 슬픔을 묻어둔 표정이라고나 할까. 나는 뇌리에서 점점 가지치기를 하려드는 그녀에 관한 상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컴퓨터를 작동시켰다. 인터넷에 접속하여 메일이 왔는지를 확인하고 일본어 연습도 조금 했다. 연습이라고 해야 내 컴퓨터에 깔린 일본어 익히기 프로그램을 통한 반복훈련이었지만, 일본어에 유창하지 못한 나에게는 그런대로 적지 않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거실의 소파에 누워 비디오를 보았다. 잠도 오질 않고 몇 시간 동안 전념했던 일본어 연습 탓에 머리도 식힐 겸 보고 있었다. 영화는 막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었는데 현관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술을 마셨는지 술냄새도 풍겨왔다. 그녀는 조금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걷다가 이내 거실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잡아 일으켜 주 었다. 그녀는 나에게 몸을 의지하면서도 자꾸만 까무룩 내려앉을려고만 했다. 나는 힘겹게 그녀를 부축하고는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 위에 그녀를 가만히 눕혔다. 그녀는 인사불성이 된 채 고개만 이리저리 가누고 있었다. 속이 몹시 쓰린지 한손으로는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괴로워하는 얼굴에서 원인 모를 고통을 읽다가 이내 방을 나왔다. 그리고 소파에 누워서는 아까 보던 영화를 주시했다. 그러다 이내 잠에 빠져들고 말았는데 소파에서 몸을 뒤척이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티브이 화면은 계속 지직거려댔고, 나는 비디오를 보다가 소파에서 그냥 잠이 들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티브이와 비디오를 끄고 방으로 가려던 나는, 문득 내 귀를 어지럽히는 소리에 멈칫 하고 멈춰섰다. 어젯밤에 들려오던 바로 그 소리였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듯한 신음소리...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야릇한 소리는 물론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방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녀를 저토록 힘들게 하는 삶의 무게가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보았다. 그러나 내 추측으로는 모든 가늠이 불가능했다. 나는 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녀의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방 앞에 이르러서야, 조금 전에 내가 그 방문을 완전히 닫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열려진 틈 사이로 형광등 불빛이 흘러나왔다. 나는 아까 그녀를 침대에 눕히기는 했지만 조명을 내리는 친절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열려진 틈 사이로 본의아니게 그녀의 방 안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는 방바닥에 잔뜩 웅크리고 앉은 자세로 입으로 낮게 신음을 질러댔는데 그 모양이 아무리 봐도 이상하기만 했다. 내가 볼 때, 분명 방에는 그녀 혼자 뿐인데 그녀는 마치 누군가에게 심하게 휘둘리는 몸짓을 연출하는 거였다. 그녀는 뭔가에 얻어맞듯 얼굴을 이리저리 내돌리는 시늉까지 했다. 그리고 잔뜩 겁먹은 얼굴로 방안 여기저기를 피해다니며 몸부림을 쳐대는 거였다. 나는 깊은 밤, 내 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녀의 방에서 벌어지는 해괴한 풍경을 보며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흔치 않은 질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밤마다 희한한 광경을 연출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였다. 나는 잠시 어쩔까 망설였다. 이대로 내 방에 들어가 잠을 청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의 방을 엿보았다는 오해도 받긴 싫었다. 그러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기에 상황은 그리 여유롭지가 못했다. 그녀는 점점 심하게 소리를 질러댔으며 그에 따라 몸부림도 더욱 심해져갔다. 나는 차마 그런 모습을 더 이상 물끄러미 보고 있을 수가 없어 그녀의 방에 뛰어들고 말았다. "아줌마, 왜 그러세요? 어디 아파요?"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래면서 얼른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눈을 들어 천장 쪽과 나를 번갈아 살피면서 두려운 표정을 했다. 그녀는 파랗게 질린 입술로 소리를 냈다. "총각은 어서 나가요! 어서요!" 그녀는 억지로 나를 그녀의 방에서 몰아내고는 얼른 문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나는 찜찜한 기분을 애써 다스리며 내 방으로 향했다. 잠시 잠잠했던 그녀의 방에서 다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으로 들어온 나는, 쉽게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나를 방에서 내몰던 그녀의 표정은 두려움으로 점철된 그 자체였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잔뜩 겁을 먹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더구나 내가 봤을 때 그녀의 정신상태는 정상궤도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은 거 같았다. 그런데 왜 밤만 되면 깊은 고통을 토해내며 저렇듯 몸부림을 쳐야만 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침대에 누운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몰두하다가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 날 오후, 책을 살 게 있어 서점에 다녀오던 나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커피숍에 심분미와 한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커피숍은 겉으로 환한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밖에서 보아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곳이었다 나는 무심결에 눈을 돌리다 그들을 발견했는데 그들은, 내가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채 얘기에 몰두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그녀에게 남자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저 남자가 틀림없어...라고. 심분미는 남자에게 무언가 하소연을 하듯 간절한 표정을 했고, 마주 앉은 젊은 남자-그녀보다 너댓살은 어려 보였다-의 표정도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다. 나는 잠시 그들의 모습을 보다가 이내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허기를 느껴 냉장고를 열었다. 밥도 해야 하고 찌개도 끓여야 했지만 그 모든 게 귀찮아진 나는, 라면을 끓여 먹기로 했다. 가끔씩 끓여먹는 라면은 정말 내 입맛에 딱 맞았다. 김치 몇 조각하고 파 대충 썰어 넣고 끓이는 라면이었지만, 얼큰하면서도 맵싸한 맛은 어디에 견줄데가 없었다. 나는 일본에 가서도 우리 라면을 애용하겠다는 생각을 짧게 했다. 라면을 먹고 난 그릇을 씻는데, 심분미가 왔다. 그녀는 몹시 피곤한지 나를 쳐다볼 생각은 않고 그대로 방에 들어가 버렸다. 입안이 덥덥하여 커피를 끓여먹는데 그녀가 다시 방에서 나왔다. 속옷 등을 들고 욕실로 향하는 거보니 샤워라도 할 모양같았다. 나는 마시던 커피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이모가 왔다. 이모는, 혼자 지내는 조카의 먹걸이가 걱정되었는지 김치를 비롯한 마른 반찬 몇가지를 손수 해오시는 길이었다. "뭘 먹고 지내는지...반찬 조금 해왔다. 네 입에 맞는지 모르겠네." 평소 수다스러운 편인 이모는, 식탁 앞에 앉자마자 이런저런 얘기들을 늘어놓았 다. 나는 그런 이모를 꽤 따르는 편이었기 때문에 이모와 마주 앉아 그 얘기를 들어주기도 하며, 혹은 사촌들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욕실 문이 열리면서 그녀가 욕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나와 이모 쪽으로는 관심을 주지 않은 채, 고개를 조금 숙이고는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심분미의 얼굴을 본 이모가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나더러 낮게 속삭였다. "세상에, 저 여자가 이 집에 세들어 사는 여자냐?" "네, 왜요?" 나는 그녀에게 비상한 관심을 나타내는 이모의 의도가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이모더러 그녀를 잘 아느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온통 의문투성이인 그녀의 베일을 조금이라도 벗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알다 뿐이냐? 참, 세상 넓고도 좁다더니 옛말 그른 거 하나 없구나. 저 못된여자가 너희 집에 세들어 살다니..." "못된 여자라구요?" 보기에도 참하고 얌전해 보이는 여자에게 못된 여자라니...나는 그녀에게 악담을 퍼붓는 이모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못됐지, 그럼. 자기 남편을 죽인 여자가 그럼 올바른 여자냐?" "남편을 죽여요? 저 여자가요?" 이모가 입술에 손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보니 내 소리가 지나치게 높았던 모양이다. 이모는 내 손을 이끌고는 내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방문을 닫고는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저 여자가 우리 동네에 살던 여자야...근데 남편이 술버릇이 고약해서 술만 마시면 마누라를 두들겨 팼지. 거기다 의처증까지 있어서 여자를 못살게 굴었어." "네에...그래서요?" 나는 그녀에 대한 비밀이 조금씩 벗겨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이모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런데 저 여자한테 어느 날 애인이 생겨서 남편이 그걸 눈치를 챘나봐. 그래서 한 날은 술을 엄청 마시고 들어와서는 여자를 추궁하며 못살게 굴었지. 그 날은 동네 주민들이 잠을 설칠 정도로 꽤 시끄러웠지...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까 그 남자가 죽어 있는 게 아니겠니?" "아니, 어쩌다가요?" 나는 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은 마음에 얼른 이렇게 물었다. "여자의 말로는, 남편이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리다 넘어지면서 정신을 잃었다고 하는 거야. 하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지. 생각해보렴, 술 취한 남편 밀어뜨려서 뇌진탕 일으키게 하는 거 그리 어려운 일 아니잖니?" "...그럼 결국 혐의가 벗겨진 거군요." "그래, 재판도 받고 그랬나보더라. 그런데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게야...우리 동네에서 안 보여 어디 멀리가 버렸나 했더니 세상에, 너희 집에 들어와 살 줄은 미처 몰랐지뭐니?" 이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댔다. 나는 비로소 그녀의 얼굴에 서려 있던 무거운 그림자의 진의를 조금이나마 파악할 것 같았다. 남편을 죽인 혐의를 받은 여자...그녀는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모가 돌아가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어 내 방에 앉아서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아까 집 근처 커피숍에서 본 남자가 그녀의 정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얼굴에서는 둘만이 갖는 은밀함과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여하튼 나는, 가급적 그녀에 관한 상념은 접어두기로 하고 일본어연습에 전념하기로 하고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날 밤, 나는 새벽 2시가 다 되도록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일본어 연습을 어느 정도 하고나서 잠도 안 오고 하던 차에 게임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모 통신사에서 다운받은 게임프로그램이었는데 이따금 무료하다 싶으면 곧잘 하는 게임이었다. 점수를 잃어서 속상해하고 있는데 나는, 또 다시 그 소리를 듣고는 멈칫 동작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밤만 되면 들려오던 그 소리가 한층 높아졌으며 그녀의 비명소리는 내가 있는 방에까지 들려오는 거였다. 왠지 다른 날과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으며,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리나지않게 방문을 열고는 거실로 나갔다. 그녀의 호소하는 듯한 애절한 절규가 계속 들려왔다. 나는 그녀의 방에까지 조심조심 걸어가서는 방문에 귀를 갖다대었다. 그녀의 울부짖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트리고 있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 제발 때리지 마세요...이렇게 용서를 빌게요, 제발... 흐흐흑..." 나는 아무래도 이 의문의 사건의 진상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문고리를 살짝 비틀어보았다. 문이 잠겨있지 않은 탓에 문은 스르르 소리없이 열렸다. 그녀는 내게 등을 보인 자세로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두 손을 싹싹 빌고 있었다.나는 그녀가 보고 있는 허공을 보았지만 그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뭔가를 보는 듯 시선을 한 곳에 고정을 시키고는 애원을 했다. "제발...저 좀 살려주세요! 용서를 빌겠어요...세상 사람들한테 다털어놓겠어요..." 난 내 귀를 의심하며 숨을 죽였다. 세상 사람들한테 털어놓겠다면...혹시? 내가 다른 추측을 하기도 전에 그녀의 다음 말이 들려왔다. 그녀는 이제 바닥에 얼굴을 엎드리고는 마구 흐느끼며 호소를 했다. "당신이 밤마다 날 찾아와 못살게 구는데 내가 어떻게 견딜 수가 있냐구요... 그래요, 내일 아침에 다 밝히겠어요. 나랑 그이가 짜서 당신을 죽였다고 밝히겠 어요...흐으윽!..." 나는 순간 턱, 하니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이런...이모의 말을 들을 때는 그래도 설마했는데 저 렇게 본인의 입으로 살인을 시인하는걸 보니,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충격이 밀려듬을 느꼈다. 얼른 내 방으로 들어온 나는, 그녀의 방 쪽으로 귀를 기울여보았다. 왠일인지 그 뒤로는 잠잠하니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밤마다 그녀를 찾아온 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남편의 혼령이 아니었을 까...왠지 기분이 오싹해지면서 성질을 알 수 없는 두려움도 밀려들었다. 살아 생전에 아내를 개 패듯 패던 남편이, 아내와 그 정부에 의해 살해당하고 나서 그 원한이 사그 러들지 않아 밤마다 아내를 찾아와 구타를 했다?... 그러고보니 모든 얘기가 들어맞는 거 같았다. 마치도 여지껏 이가 맞지 않던 퍼즐이 한 순간에 제자리를 찾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허공을 보며 두려움에 떨던 표정하며, 뭔가에 휘둘리는 몸부림하며...나는 여느 사람의 눈에 는 쉽게 보이지 않는 초현실적인 존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품으며 긴 밤을 지새야만 했다. 다음 날, 나는 해가 중천에 올라서야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간밤의 일이 생각나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는데 거실에서 어수선한 소리가 났다. 대충 옷을 걸치고 거실로 나가보니까, 심분미가 몇 명의 남자와 함께 그녀의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남자들은 한 눈에 봐도 어깨가 떠억 벌어진 게 수사계통에 근무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게 해주었다. "저, 무슨 일입니까?" 나는 무슨 일인지 영문을 확실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체격이 조금 작아 보이는 남자한테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나를 보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우물거리다가는 이내 이렇게 말했다. "곧 알게될 겁니다. 이 여자가 자백한 사실을요..." 심분미는 남자들과 함께 현관을 나서기 전에 잠시 몸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숙 이고는 힘없이 현관을 나섰다. 나는 현관을 나서던 그녀의 뒷모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남편의 구타를 이기지 못해 그를 살해한 죄를 지은 여자...그 범행을 은폐하려다 남편의 혼령에 시 달리다못해 실토해버린 한 가련한 여인의 고달픈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뒷모습을... 혼자 덩그러니 남은 집에서 씁쓸한 담배를 꺼내 물며, 나는 문득 일본에 계시는 부모님이 그리워졌다. 예정보다 일찍 일본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이 서울에서 한시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옮긴이: smile*at*me [출처] 공포 [고양이의 복수]|작성자 혜안1
공포특급 제 36 화 (어둠속의 비명)
어둠속의 비명
내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그녀의 어떤 점이 눈에 띈다거나 다른 사람에 비해 크게 이상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얼굴이 핼쓱하니 표정에 생기가 없긴 했지만, 그런 폼새야 여자들한테 흔한거고 해서 별 달리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남에 따라, 차츰 그녀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버린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녀는, 심분미라는 이름에 서른 일곱 해를 살아온 여자이다. 물론 일부러 그녀
의 뒤를 조사한 건 아니었다.
심분미가 입주해 들어온 집 주인의 아들이라는 잇점에서 본 전세계약서 덕분이었다.
나는 부유한 부모를 둔 탓에 제법 큰 집에 살고 있었다.
넓은 집을 활용하기 위해서 우리 부모님은 일층에 세를 주었는데, 우리 가족이 사는 이층에도
방이 한 개 남아 그 방도 세를 준 거였다.
이층은 넓은 거실을 사이에 두고 방 네 개와 두 개의 화장실이 있는데, 우리 가족 세 식구가
살기에는 너무 넓었다.
더욱이 내 부모님은, 누나가 있는 일본에 가 있을 때가 많아서 나 혼자 넓은 집을 지키고
있을 때가 다반사였다.
부모님은 이번에도 여러 달 걸릴 일본행에 앞서, 한 여자에게 이층에 딸린 방 한 칸을
내주었던 것이다.
나는 처음에 여자한테 세를 준다는 얘길 들을 때 솔직히 편치 않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집 주인과 세입자라고 해도, 노총각이 있는 집에 여자가 들어온다는 건 조금은
부자연스러울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긴 뭐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감정도 불필요한 사치 일런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한편으로는
술과 담배 냄새를 풍기는 남자보다는 분내를 흘리는 여자가 더 나을 거라는 생각도 들긴 들었다.
그러고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인가보다...그러나 내가 기거하는 방과 가까이 세들었다고
그녀에게 야릇한 마음을 품는다는지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나보다도 나이가 한참 많은 어엿한 중년이었고, 그런 쓸데없는 감정을 품기에
내 나름대로도 바빴던 탓이다.
그녀가 기거하는 방은 내 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거실을 같이 쓰긴 했지만 그녀가
사용하기에 큰 불편은 없었다.
출입구도 따로 나 있고 욕실이나 씽크대도 별도로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달 전까지 유명기업의 기획실에 근무를 했더랬는데 자의반타의반으로 지금은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쉬는 중이다.
마침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실시하던 중이었고, 내가 그 사항에 적용된 건 아니지만 분위기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나 스스로 사직서를 내버렸다.
나는 곧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새로운 공부를 시작할 계획이었다. 따라서 지금은 일본유학에
대한 준비를 하는 단계였다.
당연히 우리 집에 세든 여자에게 다른 마음을 품을 겨를은 없었다. 그런데 차츰 나는 심분미라는
여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 생각을 두지 않았는데 차츰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에 눈길을 주게 되었다.
그 관심이란 여자에게서 받는 연정이라든가, 호감을 말하는 게 아닌 다른 의미였다.
그녀는 통 말이 없는 편이었다. 어쩌다 거실을 지나다 나와 마주쳐도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기 일쑤였다.
그녀는 서른 일곱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앳된 용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꽤 미인측에 속했다.
하얀 얼굴과 단정한 이목구비 등은 남자를 여럿 후리고도 남을 여자같았다. 그런데 그녀는
하루종일 집에 박혀 있곤 했다.
어쩌다 외출을 하곤 했는데 그런 날이면 외박을 하고 돌아오곤 했다. 나는 그녀가 어떤 경로로
혼자 살고 있는지는 몰라도 어딘가에 남자가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왠지 그런 낌새가 보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에는 늘 수심이 떠나지 않았다. 무언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듯한 얼굴에서 그리 순탄치만은 않은 인생의 힘겨움이 엿 보였다.
그 힘겨움을 내가 엿본 건 어느 날 밤이었다. 때는 8월 하순이라 그리 덥진 않았지만 그래도
뜨거운 여름이 물러나기에는 성이 차지 않는 듯 그날 밤은 열대야와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더웠다.
나는 여러 번 몸을 뒤척이다가 갈증을 느껴 침대에서 일어났고 곧 거실로 나갔다. 냉장고를
열어 차가운 물을 들이키는데 내 귀에 무슨 소린가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그녀의 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 소리를 무시하고 그냥 내 방으로 들어갈려 했다. 그러나 그러기엔 그 소리가
자꾸 날 붙잡는 것만 같았다.
어딘가 억눌린 채 흐느끼는 소리...가슴을 쥐어짜며 슬픔을 토해내는, 그런 소리였다.
그녀는 큰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듯했지만 그녀가 가진 고통의 정도가 심해
흐느낌은 그녀의 방을 타고 거실 쪽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나는 잠시 어떡할까 망설였다.
다른 식구라곤 없는 덩그런 집 안에서 서른 살의 노총각이 혼자 사는 여인네의 방을 엿본다는
건 아무래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 같았다.
그래서 내 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다시 그 소리가 들려왔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듯한 소리. 그리고 무언가에 심하게 억눌리는 듯한 고통이 배인 소리...
내 발 길은 나도 모르게 그녀의 방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 안에 불순한 생각이 없는데 거리낄 건 없을 거 같았다. 내 귀를 어지럽히는 저 소리의
원인을 알고 싶었고, 필요하다면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그녀 방 앞에 이르자, 신기하게도 그 소리는 딱 그치고 말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적막만이 감돌 뿐이었다.
나는 멋쩍은 얼굴이 되어서는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침대 위에 걸터앉은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혼자 자는 여자 방에 슬금슬금 걸어가는 노총각 꼴이라니...그러나 다음 순간 개운치
않은 기분이 밀려들었다. 분명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그 방 앞에 다가간 순간, 거짓말처럼 소리는 그치고 말았으니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다음 날, 늦게 일어난 나는 욕실에서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거실로 나오고 있었다.
마침 외출복 차림으로 방을 나가는 그녀와 마주쳐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마치 죄라도 지은 것처럼 민망해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조금 숙이고는 현관을 나섰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담배를 피워물면서 간밤의 일을 곰곰 생각해보았다.
조금 전에 마주친 그녀의 표정에서 나는, 심상치 않은 어떤 기운을 느꼈다. 그녀의 표정이야
언제봐도 그리 밝은 편은 아니었지만 아까 내게 보여준 그녀의 얼굴에서는 말로 형언하지
못할 감정의 기류가 서려 있었다.
차마 쉽게 표현하지 못할 고통과 슬픔을 묻어둔 표정이라고나 할까.
나는 뇌리에서 점점 가지치기를 하려드는 그녀에 관한 상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컴퓨터를
작동시켰다.
인터넷에 접속하여 메일이 왔는지를 확인하고 일본어 연습도 조금 했다.
연습이라고 해야 내 컴퓨터에 깔린 일본어 익히기 프로그램을 통한 반복훈련이었지만,
일본어에 유창하지 못한 나에게는 그런대로 적지 않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거실의 소파에 누워 비디오를 보았다.
잠도 오질 않고 몇 시간 동안 전념했던 일본어 연습 탓에 머리도 식힐 겸 보고 있었다.
영화는 막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었는데 현관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술을 마셨는지 술냄새도 풍겨왔다.
그녀는 조금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걷다가 이내 거실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잡아 일으켜 주 었다. 그녀는 나에게 몸을 의지하면서도 자꾸만 까무룩
내려앉을려고만 했다.
나는 힘겹게 그녀를 부축하고는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 위에 그녀를
가만히 눕혔다.
그녀는 인사불성이 된 채 고개만 이리저리 가누고 있었다. 속이 몹시 쓰린지 한손으로는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괴로워하는 얼굴에서 원인 모를 고통을 읽다가 이내 방을 나왔다.
그리고 소파에 누워서는 아까 보던 영화를 주시했다. 그러다 이내 잠에 빠져들고 말았는데
소파에서 몸을 뒤척이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티브이 화면은 계속 지직거려댔고, 나는 비디오를 보다가 소파에서 그냥 잠이 들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티브이와 비디오를 끄고 방으로 가려던 나는, 문득 내 귀를 어지럽히는 소리에 멈칫 하고
멈춰섰다.
어젯밤에 들려오던 바로 그 소리였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듯한 신음소리...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야릇한 소리는 물론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방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녀를 저토록 힘들게 하는 삶의
무게가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보았다.
그러나 내 추측으로는 모든 가늠이 불가능했다. 나는 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녀의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방 앞에 이르러서야, 조금 전에 내가
그 방문을 완전히 닫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열려진 틈 사이로 형광등 불빛이 흘러나왔다. 나는 아까 그녀를 침대에 눕히기는 했지만
조명을 내리는 친절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열려진 틈 사이로 본의아니게 그녀의 방 안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는 방바닥에 잔뜩
웅크리고 앉은 자세로 입으로 낮게 신음을 질러댔는데 그 모양이 아무리 봐도 이상하기만 했다.
내가 볼 때, 분명 방에는 그녀 혼자 뿐인데 그녀는 마치 누군가에게 심하게 휘둘리는 몸짓을
연출하는 거였다.
그녀는 뭔가에 얻어맞듯 얼굴을 이리저리 내돌리는 시늉까지 했다. 그리고 잔뜩 겁먹은
얼굴로 방안 여기저기를 피해다니며 몸부림을 쳐대는 거였다.
나는 깊은 밤, 내 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녀의 방에서 벌어지는 해괴한 풍경을 보며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흔치 않은 질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밤마다 희한한 광경을 연출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였다.
나는 잠시 어쩔까 망설였다. 이대로 내 방에 들어가 잠을 청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의 방을 엿보았다는 오해도 받긴 싫었다. 그러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기에 상황은 그리
여유롭지가 못했다.
그녀는 점점 심하게 소리를 질러댔으며 그에 따라 몸부림도 더욱 심해져갔다. 나는 차마 그런
모습을 더 이상 물끄러미 보고 있을 수가 없어 그녀의 방에 뛰어들고 말았다.
"아줌마, 왜 그러세요? 어디 아파요?"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래면서 얼른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눈을 들어 천장
쪽과 나를 번갈아 살피면서 두려운 표정을 했다. 그녀는 파랗게 질린 입술로 소리를 냈다.
"총각은 어서 나가요! 어서요!"
그녀는 억지로 나를 그녀의 방에서 몰아내고는 얼른 문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나는 찜찜한
기분을 애써 다스리며 내 방으로 향했다.
잠시 잠잠했던 그녀의 방에서 다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으로 들어온 나는, 쉽게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나를 방에서 내몰던 그녀의 표정은 두려움으로 점철된 그 자체였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잔뜩 겁을 먹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더구나 내가 봤을 때 그녀의
정신상태는 정상궤도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은 거 같았다.
그런데 왜 밤만 되면 깊은 고통을 토해내며 저렇듯 몸부림을 쳐야만 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침대에 누운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몰두하다가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 날 오후, 책을 살 게 있어 서점에 다녀오던 나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커피숍에
심분미와 한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커피숍은 겉으로 환한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밖에서 보아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곳이었다
나는 무심결에 눈을 돌리다 그들을 발견했는데 그들은, 내가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채
얘기에 몰두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그녀에게 남자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저 남자가 틀림없어...라고. 심분미는 남자에게 무언가 하소연을 하듯 간절한 표정을 했고,
마주 앉은 젊은 남자-그녀보다 너댓살은 어려 보였다-의 표정도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다.
나는 잠시 그들의 모습을 보다가 이내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허기를 느껴
냉장고를 열었다.
밥도 해야 하고 찌개도 끓여야 했지만 그 모든 게 귀찮아진 나는, 라면을 끓여 먹기로 했다.
가끔씩 끓여먹는 라면은 정말 내 입맛에 딱 맞았다.
김치 몇 조각하고 파 대충 썰어 넣고 끓이는 라면이었지만, 얼큰하면서도 맵싸한 맛은 어디에
견줄데가 없었다.
나는 일본에 가서도 우리 라면을 애용하겠다는 생각을 짧게 했다. 라면을 먹고 난 그릇을 씻는데,
심분미가 왔다. 그녀는 몹시 피곤한지 나를 쳐다볼 생각은 않고 그대로 방에 들어가 버렸다.
입안이 덥덥하여 커피를 끓여먹는데 그녀가 다시 방에서 나왔다. 속옷 등을 들고 욕실로
향하는 거보니 샤워라도 할 모양같았다.
나는 마시던 커피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이모가 왔다. 이모는, 혼자 지내는 조카의
먹걸이가 걱정되었는지 김치를 비롯한 마른 반찬 몇가지를 손수 해오시는 길이었다.
"뭘 먹고 지내는지...반찬 조금 해왔다. 네 입에 맞는지 모르겠네."
평소 수다스러운 편인 이모는, 식탁 앞에 앉자마자 이런저런 얘기들을 늘어놓았 다. 나는 그런
이모를 꽤 따르는 편이었기 때문에 이모와 마주 앉아 그 얘기를 들어주기도 하며,
혹은 사촌들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욕실 문이 열리면서 그녀가 욕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나와 이모
쪽으로는 관심을 주지 않은 채, 고개를 조금 숙이고는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심분미의 얼굴을 본 이모가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나더러 낮게 속삭였다.
"세상에, 저 여자가 이 집에 세들어 사는 여자냐?"
"네, 왜요?"
나는 그녀에게 비상한 관심을 나타내는 이모의 의도가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이모더러 그녀를 잘 아느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온통 의문투성이인 그녀의 베일을
조금이라도 벗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알다 뿐이냐? 참, 세상 넓고도 좁다더니 옛말 그른 거 하나 없구나. 저 못된여자가
너희 집에 세들어 살다니..."
"못된 여자라구요?"
보기에도 참하고 얌전해 보이는 여자에게 못된 여자라니...나는 그녀에게 악담을 퍼붓는
이모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못됐지, 그럼. 자기 남편을 죽인 여자가 그럼 올바른 여자냐?"
"남편을 죽여요? 저 여자가요?"
이모가 입술에 손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보니 내 소리가 지나치게
높았던 모양이다. 이모는 내 손을 이끌고는 내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방문을 닫고는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저 여자가 우리 동네에 살던 여자야...근데 남편이 술버릇이 고약해서 술만 마시면 마누라를
두들겨 팼지. 거기다 의처증까지 있어서 여자를 못살게 굴었어."
"네에...그래서요?"
나는 그녀에 대한 비밀이 조금씩 벗겨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이모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런데 저 여자한테 어느 날 애인이 생겨서 남편이 그걸 눈치를 챘나봐. 그래서 한 날은 술을
엄청 마시고 들어와서는 여자를 추궁하며 못살게 굴었지. 그 날은 동네 주민들이 잠을 설칠
정도로 꽤 시끄러웠지...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까 그 남자가 죽어 있는 게 아니겠니?"
"아니, 어쩌다가요?"
나는 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은 마음에 얼른 이렇게 물었다.
"여자의 말로는, 남편이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리다 넘어지면서 정신을 잃었다고 하는 거야.
하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지. 생각해보렴, 술 취한 남편 밀어뜨려서
뇌진탕 일으키게 하는 거 그리 어려운 일 아니잖니?"
"...그럼 결국 혐의가 벗겨진 거군요."
"그래, 재판도 받고 그랬나보더라. 그런데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게야...우리 동네에서
안 보여 어디 멀리가 버렸나 했더니 세상에, 너희 집에 들어와 살 줄은 미처 몰랐지뭐니?"
이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댔다.
나는 비로소 그녀의 얼굴에 서려 있던 무거운 그림자의 진의를 조금이나마 파악할 것 같았다.
남편을 죽인 혐의를 받은 여자...그녀는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모가 돌아가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어 내 방에 앉아서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아까 집 근처 커피숍에서 본 남자가 그녀의 정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얼굴에서는 둘만이 갖는 은밀함과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여하튼 나는, 가급적 그녀에 관한 상념은 접어두기로 하고 일본어연습에 전념하기로
하고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날 밤, 나는 새벽 2시가 다 되도록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일본어 연습을 어느 정도
하고나서 잠도 안 오고 하던 차에 게임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모 통신사에서 다운받은 게임프로그램이었는데 이따금 무료하다 싶으면 곧잘 하는 게임이었다.
점수를 잃어서 속상해하고 있는데 나는, 또 다시 그 소리를 듣고는 멈칫 동작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밤만 되면 들려오던 그 소리가 한층 높아졌으며 그녀의 비명소리는 내가 있는 방에까지
들려오는 거였다.
왠지 다른 날과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으며,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리나지않게 방문을 열고는 거실로 나갔다.
그녀의 호소하는 듯한 애절한 절규가 계속 들려왔다. 나는 그녀의 방에까지 조심조심 걸어가서는
방문에 귀를 갖다대었다. 그녀의 울부짖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트리고 있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 제발 때리지 마세요...이렇게 용서를 빌게요, 제발... 흐흐흑..."
나는 아무래도 이 의문의 사건의 진상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문고리를 살짝 비틀어보았다.
문이 잠겨있지 않은 탓에 문은 스르르 소리없이 열렸다.
그녀는 내게 등을 보인 자세로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두 손을 싹싹 빌고 있었다.나는 그녀가 보고
있는 허공을 보았지만 그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뭔가를 보는 듯 시선을 한 곳에 고정을 시키고는 애원을 했다.
"제발...저 좀 살려주세요! 용서를 빌겠어요...세상 사람들한테 다털어놓겠어요..."
난 내 귀를 의심하며 숨을 죽였다. 세상 사람들한테 털어놓겠다면...혹시? 내가 다른 추측을 하기도
전에 그녀의 다음 말이 들려왔다.
그녀는 이제 바닥에 얼굴을 엎드리고는 마구 흐느끼며 호소를 했다.
"당신이 밤마다 날 찾아와 못살게 구는데 내가 어떻게 견딜 수가 있냐구요... 그래요, 내일 아침에
다 밝히겠어요. 나랑 그이가 짜서 당신을 죽였다고 밝히겠 어요...흐으윽!..."
나는 순간 턱, 하니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이런...이모의 말을 들을 때는 그래도 설마했는데 저
렇게 본인의 입으로 살인을 시인하는걸 보니,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충격이 밀려듬을 느꼈다.
얼른 내 방으로 들어온 나는, 그녀의 방 쪽으로 귀를 기울여보았다. 왠일인지 그 뒤로는 잠잠하니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밤마다 그녀를 찾아온 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남편의 혼령이 아니었을
까...왠지 기분이 오싹해지면서 성질을 알 수 없는 두려움도 밀려들었다.
살아 생전에 아내를 개 패듯 패던 남편이, 아내와 그 정부에 의해 살해당하고 나서 그 원한이 사그
러들지 않아 밤마다 아내를 찾아와 구타를 했다?...
그러고보니 모든 얘기가 들어맞는 거 같았다. 마치도 여지껏 이가 맞지 않던 퍼즐이 한 순간에
제자리를 찾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허공을 보며 두려움에 떨던 표정하며, 뭔가에 휘둘리는 몸부림하며...나는 여느 사람의 눈에
는 쉽게 보이지 않는 초현실적인 존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품으며 긴 밤을 지새야만 했다.
다음 날, 나는 해가 중천에 올라서야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간밤의 일이 생각나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는데 거실에서 어수선한 소리가 났다.
대충 옷을 걸치고 거실로 나가보니까, 심분미가 몇 명의 남자와 함께 그녀의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남자들은 한 눈에 봐도 어깨가 떠억 벌어진 게 수사계통에 근무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게 해주었다.
"저, 무슨 일입니까?"
나는 무슨 일인지 영문을 확실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체격이 조금 작아 보이는 남자한테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나를 보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우물거리다가는 이내 이렇게 말했다.
"곧 알게될 겁니다. 이 여자가 자백한 사실을요..."
심분미는 남자들과 함께 현관을 나서기 전에 잠시 몸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숙
이고는 힘없이 현관을 나섰다. 나는 현관을 나서던 그녀의 뒷모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남편의 구타를 이기지 못해 그를 살해한 죄를 지은 여자...그 범행을 은폐하려다 남편의 혼령에 시
달리다못해 실토해버린 한 가련한 여인의 고달픈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뒷모습을...
혼자 덩그러니 남은 집에서 씁쓸한 담배를 꺼내 물며, 나는 문득 일본에 계시는 부모님이
그리워졌다.
예정보다 일찍 일본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이 서울에서 한시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옮긴이: smile*at*me
[출처] 공포 [고양이의 복수]|작성자 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