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의눈으로 북미를 보다 제9일

황소의눈2003.12.03
조회118

2002. 9. 14(토)

  화려한 어제 밤의 여운으로 늦게 일어났다. 아침 식사 후 다시 Chateau Frontenac Hotel 앞 로얄 테라스로 나갔다. 밤 퀘벡과 아침 퀘벡은 다른가? 밤 여인과 아침 여인처럼... 그러나 어젯밤 내게 사랑을 고백 받은 Quebec이란 여인은 아침에도 깔끔하고 아름다웠다. 나도 그녀에 어울리는 색, 연녹빛 티셔츠로 바꾸었다. 여성 단원들의 멋지다는 인사치레를 들으며 버스를 내리니 11:30까지 무려 2시간의 자유관람시간을 준다.

  나홀로 나들이는 뒷골목을 보아야 한다. 구 시가지 거리를 죽 본 다음 뒷골목에 들어 가니 휴일 이른 아침이어선지 사람이 없고 그저 사람 사는 뒷골목이다. 그러나 낙서 같은 것은 없고, 뉴욕에서 본 것처럼 비상계단이 2층 높이에 접혀져 있다. 소방법이 그렇다. 보통 4, 5층인 건물 중 길가는 1층을 가게로 사용하는데 뒷골목에는 그런 건물도 주택으로만 쓰는 것 같다. 회청색 창살문의 연노란 사암 돌집이 짙은 하늘색 또는 연한 녹색 지붕을 이고 있다. ...마치 연노란 치마에 하늘색 또는 연녹색 니트웨어를 입은 파리쟌느를 연상시킨다. 절묘한 콘트라스트, 세련된 코디네이션이다. 뭔가 모르지만 프랑스적이다. Laval 대학이라 표시된 작은 건물은 초기 건물인지 독립 사무실인지? 집집마다 출입문 곁에 프랑스어와 영어로 집의 유래가 붙어 있다.

   ‘GUILLAUME VERRIER(1680-1758) 프랑스에서 태어나 New France의    검찰총장 겸 Quebec 평의회 의원이 되었다. ...많은 책을 기증하여 도서관    건립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Quebec에서 죽었다.’

   ‘James McKenna(1812-1867) Quebec의 아일랜드 위원’   

  사람이 하나 둘 보이는 비탈길을 내려가니 성벽과 대포가 있고,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니 높이가 5m 정도다. 커다란 검은 대포 2문이 강(지금의 요트장)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다. Quebec은 성벽 도시다. 총독 관저를 중심으로 시타델 요새를 둘러싸는 성벽이 강과 아브라함 평원을 내려다 보며 구축되어 있다. 성벽과 대포 그리고 옛 전적지 또한 Quebec의 랜드 마크다. 대포를 못 보았다면... 요새 유행어 한마디 :

                     ‘니들이 Quebec 맛을 알아?’    

  다행히 성벽 아래로 내려가는 나무 계단을 마련해 놓아 정답게 산책하는 어느 노부부와 함께 내려와 요트장으로 갔다. 주말 휴일을 맞아 요트 2척이 요트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주변 작은 공원에는 물 따라 나무 보도를 마련해 놓았는데 자전거족과 조깅족이 아침 운동을 즐기고 있다. 퀘벡 사람들은 보도나 계단을 콘크리트나 철이 아니라 나무로 만들어 놓는 사람들이다. 나무 값이 싸서 그런가? 해양 전시관이라고 쓴 건물이 있는데 닫혀 있고 멀리 거대한 원기둥 같은 것은 아마 공장이나 항만의 보관시설이리라.

  강 쪽을 향해 집 사이를 걸어가니 출입이 통제되며 가로로 긴 거대한 7층의 아파트가 가로막는다. 길을 찾아 돌아서 바로 강가로 나왔더니 앞에는 시원한 St. Lawrence강의 짙푸름 위에 요트들이 떠 있고 거대한 화물선이 유유히 상류로 향한다. St. Lawrence Seaway는 5대호의 서쪽 끝 Superior호까지 이어져 미국과 캐나다 주 공업지대의 젖줄 역할을 한 그 수로다. 천섬에서는 물 위에 줄줄이 띄운 Seaway 부표만 보았는데 여기서 대양 화물선을 봄으로써 Seaway의 실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동쪽을 보니 거대한 유람선이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아까 그 7층의 아파트는 아파트가 아니라 유람선이었단 말인가? 뒤로는 시내 어디에서나 보이는 Chateau Frontenac Hotel이  골목 Peti Champlain과 성벽을 거느리고 도도한 웅자와 빼어난 미모를 뽑낸다. 

  강을 따라 상류 쪽으로 걸으니 Quebec 구 시가 안내도판이 서 있고 강을 건너가는 연락선 사무실이 있다. 이 안내도는 유람선과 연락선으로 Quebec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일 것이다. 물론 프랑스어로 되어 있다. 뱃시간이 안 되어선지 대합실이 텅 비어 있다. 그러고 보니 강에는 다리가 안 보인다. 지도를 보면 Quebec시의 상, 하류에는 다리가 있던데.. 그렇다면 전망을 위해 언덕에서 강이 내려다보이는 지점까지 다리를 만들지 않았다는 얘긴가? 화장실을 보고 음료수 자판기에서 동전을 써 보고 Peti Champlain을 거쳐 집합 장소 Chateau Frontenac Hotel 앞으로 올라왔다.

  나무 계단을 올라오는데 색소폰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한 노악사가 연주하는 색소폰 소리가 너무 멋져 한참을 멈춰 듣고 남들 따라 1달러를 모자에 넣었다. 다들 모인 후 거리 악사가 많다는 샹텐 거리로 함께 갔다. 여기에서는 앰프까지 갖춰 놓고 남자는 색소폰, 여자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BONNIE & FRANCOIS라고 앰프에 쓴 이 나이든 혼성 2인조와 사진을 찍고 녹음된 카세트 테이프를 20캐나다 달러에 샀다.

  Quebec시는 센트로렌스강과 낭떨어지로 접해 있고 강폭이 가장 좁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의 길목에다 요새 건설의 적지였으므로 일찍이 성벽을 두르고 요새를 건설했다. Quebec이란 인디언 말로 강폭이 좁은 곳이라는 뜻이다. 17세기 초 영국이 지금의 미국 동해안에 New England 식민지를 건설, 내륙으로 서진하자, 프랑스는 Quebec을 기지로 New France를 건설, St. Lawrence강을 따라 Montreal 등 인디언과의 모피 무역 기지를 서진시키는 한편, 뉴올린안스를 기지로 남쪽 미시시피강을 북상하여 5대호 부근에서 연결함으로써 영국 세력의 서진을 차단하려 했다.

  그런데 New England 식민지는 개신교?카톨릭교 종교 갈등을 피해 자유를 찾아오는 이주민이 급히 늘어난 반면, New France 식민지는 이주민이 적어 양국 간의 대결에서 프랑스가 불리했다. 프랑스는 모피 무역으로 친분을 쌓은 인디언들을 전쟁에 이용하였다. 영국인들은 이 전쟁을 French Indian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은 유럽에서의 7년전쟁과 동시에 전개되었다. 베를린을 중심으로 하는 프로이센의 발전에 반대해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스웨덴 등 9개 국이 공격했다. 예상과 달리 프리드리히 대왕이 잘 버티자 처음에 중립적 태도를 취하던 영국은 식민지 경쟁의 적인 프랑스의 고전을 틈타 프로이센에게 전쟁자금을 지원하면서 함대에 육군을 실어 인도, 북아메리카의 프랑스 식민지를 공격하여 대부분 손에 넣었다.

  결전은 지금 Quebec시의 St. Lawrence강을 절벽 아래로 내려다보는 Abraham 평원에서 벌어졌다. 1759년 7월 Wolfe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은 전함 49척(영국 해군의 1/4)과 수송선 200척의 함대에 8,000의 병력으로 St. Lawrence강을 거슬러 올라, Quebec 동쪽 강가 및 강의 남쪽 건너에 진지를 구축했고 포격 등 공격을 계속 했다.

  전투 중 부상당한 Wolfe는 프랑스군의 포대를 제압하고 그 해 9월 어느 밤 몰래 4,000의 병력을 서쪽 배후인 강가 절벽을 기어오르게 하여 아브라함 평원에 전투배치를 마쳤다. 겨울 추위가 강을 얼게 하여 적의 보급을 차단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려 했던 프랑스군의 Moncalm 장군은 아침에 이것을 발견하고 크게 놀랐으나, 오히려 프랑스군의 보급이 먼저 차단된 객관적 현실을 인정하고, 결연히 성 밖으로 나와 결전에 임했다.

  전투 준비가 덜 된 프랑스군은 병력의 우세를 앞세워 먼저 공세를 취했으나 잘 준비된 영국군 진지를 공격하다가 막심한 병력 손실을 입었다. 이에 Wolfe 장군은 반격을 명령했고 프랑스군은 무너졌으며 소수의 생존자들은 간신히 성 안으로 달아났다. Moncalm 장군은 부상 후 다음 날 사망했고 이어 Quebec시장은 항복했다. 부상 중임에도 앞장서서 전투를 지휘하던 젊은Wolfe 장군 역시 현장에서 전사했다. 1763년 파리 조약으로 뉴 프랑스는 영국 영토가 되었다.   

  지금의 Abraham 평원은 전망대와 잔디밭, 시타델 요새, 롤러 스케이트장으로 National Battlefield Park of Abraham Plains라는 잔디가 고운 관광, 휴식 공간이지만, 당시에는 들풀이 우거져 있었단다. 지금 같은 9월, 이 아름다운 공원이 북소리, 포소리, 총소리, 함성소리, 번뜩이는 총검으로 뒤덮이고 수천의 시체가 뒹글었다니...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강물은 시린 듯 짙푸르고 하늘은 한없이 푸른 블루... 전망이 무한대다. Quebec 전투 후 16년 후인 1775년  New England 식민지의 미국 독립군이 Monreal과 Quebec에 침입하였다. 이 요새를 감싼 성벽은 전후 리도 운하와 함께 영국이 구축하였는데 그 후 한번도 총포 세례를 받지 않아 성벽과 총독 관저, 요새가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다.

  19세기 중반 Canada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무력 진압보다는 협력관계 유지가 현명하다는 걸 미국 독립 전쟁에서 깨달은 영국은 캐나다를 자치령으로 하고 형식상 대영제국의 총독을 국가원수로 임명하였다. 이에 대해 Quebec주 주민의 85%인 프랑스계 주민은 의견이 갈라졌다. 즉, 영국계 주와 연합하여 캐나다 연방 속에서 자치권을 누리자는 의견과, 이 기회에 영국 및 영국계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Quebec 국가를 건설하자는 의견이 그것이다. 오타와 의사당 옆에 동상이 서 있는 연설에 뛰어난 한 신부의 노력으로 Canada 연방에 일단 합류하였다. 그러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건 아니었다. 

  Quebec은 제2차세계대전 중 유럽 전선으로 출정하는 캐나다군의 출발지로서 총사령부가 있기도 했고, 미?영 두 정상이 Chateau Frontenac Hotel에서 회담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 ‘프랑스의 영광’을 외치며 콧대를 세우던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Quebec을 방문, 시청 앞 광장에 운집한 시민들을 향해 느닷없이 외쳤다 :

                      ‘자유 Quebec이여! 영원하라!’

이 사건으로 불씨가 다시 활활 타올라, 국가 간의 외교 갈등은 물론, Quebec 내부에서도 분리독립갈등이 증폭되었다. 결국 1970년대 중반 주민투표를 하기에 이르렀는데 근소한 차로 분리독립이 부결되고 말았다.

  Buffet Continents에서 현지식 식사 후 강을 따라 잠시 달려 큰 다리 부근에 있는 Montmorency 폭포 앞에서 버스를 세웠다. 꽤 큰 폭포가 거품과 굉음을 뿜고 있으나 나이아가라 탓에 잠시 눈요기만 하고 약간 누런 빛 물에 의아해하며 주차장에서 운전사와 사진을 찍었다. 이 운전사는 Tentway Wagor 회사 소속 50대 남자로 전직이 사무원 같은 단정한 차림에 순진한 미소가 매력 포인트인데, 버스 출입문 아래 땅바닥에 보조 발판을 놓을 뿐 아니라 그 발판을 자기 발로 살짝 눌러 움직이지 않게 함으로써 손님들의 승하차를 돕는 서비스까지 한다. 나 같은 한국인에게는 황송(?) 아니면 과잉 친절(?). 그는 정차할 때마다 주행상황을 기록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미국 운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이드에 의하면 주행상황기록은 미국, 캐나다에서 법이란다. Niagara에서 여기에 이르는 800km 단풍길 Maple Road는 9월 말부터 장관을 이룬다는데 지금은 살짝 물만 들었다.

  폭포 부근의 큰 다리로 St. Lawrence강을 건너 Montreal로 향해 한참을 달렸다. 오던 길에서 보다 훨씬 넓은 옥수수 밭이 자주 보인다. 휴게소에서  쉬는 동안 옥수수 밭에 들어가 사진을 찍었다. ㅈㅇ이 옥수수 그루마다 옥수수가 한 두 개 밖에 달려 있지 않았다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한참 후 강과 건너편 시가지가 보이더니 다리를 건너 Montreal로 진입했다. 왕복 길을 달리 한 것도 운전사의 배려란다. ‘ㅈ씨 아저씨’란 애칭을 선물 받은 ㅈㅇ은 한번 기억한 것을 잊지 않아 오랜만에 만난 상대방, 특히 제자들을 깜작 놀라게 할 만큼 대단한 기억력을 지닌 인간 컴퓨터다. 이번 나들이의 기획자인 그에게 영어 한마디 : Thank you!

  Montreal은 파리에 이어 제2위의 프랑스어 사용 도시다. 고색의 프랑스풍건물이 많은데 Notre Dam 성당에서 벌어지는 빛의 쇼 관람권을 예약한 다음 공연시간인 19:00까지 올림픽 경기장과  St. Joseph 성당을 보기로 했다.  Montreal 올림픽은 1976년 경기 활성화를 통해 시 재정을 개선해보고자 막대한 돈들여 개최했으나 선수촌 아파트가 현재까지 미분양되는 등 적자 올림픽으로 큰 후유증을 남겼다. 또, 삼각형의 특이한 첨탑은 강선들로 스타디움 지붕과 연결되어 지붕을 여닫도록 하는 등 독특한 외관과 창의적 기능으로 건축 교과서에 실리는 등 명예를 얻었으나, 후에 여닫는 동작이 첨탑에 무리를 가져오는 것으로 밝혀져 지붕을 닫아두게 됨으로써 부실의 불명예가 교과서에 첨가되었다. 외관을 중시하다 태풍에 찢겨나간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의 지붕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경기장 벽에는 당시 올림픽 금메달 입상자 명단이 새겨져 있는데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레슬링 선수 양정모의 이름도 찾을 수 있다 :

                         ‘JUNG MO, YANG'

  연녹빛 둥근 지붕을 머리에 이고 언덕 위에 웅장하게 솟아 있는 St. Joseph 성당은  유서 깊은 이 곳에서 아주 새롭게 20세기 초에 완성된 것으로, 북아메리카 제2위의 크기에, 제1위의 파이프 오르간을 품고 있다. 설립자는 처음에는 신부도 아니었던 앙드레로서 그는 병 치료의 기적을 행하여 사람들이 구름 같이 몰려들었고 그 헌금으로 성당을 세웠는데 자금 고갈로 마지막 지붕을 완성하지 못한 채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러나 기도의 기적을 믿은 그와 신도들에게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다. 교황이 자금을 보내준 것이다.    그의 병 치유 능력으로 소아마비 등을 완치 받은 환자들이 놓고 간 수많은 목발이 벽에 걸려 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앙드레 신부의 심장이 일반인에게 보이도록 유리상자 속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카톨릭교의 관습이란다. 한편 그의 시신은 교회 지하에 안장되어 있다. 유리상자 아래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  

                             ‘HERE

                             RESTS

                     IN THE PEACE OF GOD

              THE HEART OF BROTHER ANDRE, C.S.C.

              FOUNDER OF THE ORATORY 1845-1937' 

  다음 방을 가니 수없이 많은 빨간 초의 촛불이 환하다. 각자 촛불을 밝히고 기도를 하는데 보통 1달러의 기부를 한다고. 나도 촛불을 밝히며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큰 딸을 위해 한번 더 기도했다. 나 같이 어정쩡한 미등록 신자의 기도도 들어주시는가?

  어둠 속에 불을 밝히기 시작하는 시가지를 지나 Notre Dam 성당에 닿았다. 캐나다에서 가장 유서 깊은 이 성당은 이름과 모양을 파리에서 따 왔는데, 듣는 사람의 표정은 아랑곳 하지 않는 열심 설명가 ㄱㅈ에 의하면 Our Lady란 의미란다. 빛의 쇼 구경을 위해 입구에서 헤드폰을 받고 지정석에 앉으니 음악이 나오면서 컴퓨터 영상이 정면, 측면, 천정의 여러 화면을 채운다. 내용은 Montreal 개척부터 이 성당 건립에 이르는 역정을 환상적 영상과 영어 설명으로 제시했는데 무척 감동적이었다는 게 영어를 아는 분의

말씀이다. 나 같이 그림만 본 사람은 그냥 ‘괜찮았어’라고 말한다.        

  해외에 나올 때마다 영어 짧음이 탄식거린데 돌아오면 잊으니 난 평균인가, 그 미만인가?  가게에서 10달러씩 하는 코닥 필름 3통과 Quebec 화보집을 산 후 Korea Garden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밤길을 달리며 전철을 타고 갔으면 하는 아쉬움을 혼자 씹는 동안 Doval Montreal International Airport  부근의 호텔에 닿았다. 로비에는 의외로 일본풍의 그림과 분수가 있고 인도 장식도 놓여있어 나름대로 멋을 부린 이그조틱한 오리엔털 스타일이나, 그런 멋을 부린 마담에게는 난 매력을 못 느끼는 것처럼 어설픈 동양 흉내는 나에게 역겨울 뿐이다.

            관광이란 좋건 싫컨 현지식대로 한다 <필자 방식>

  어느 덧 22:00가 가깝다. 지하철이 있는 Montreal에서 지하철 승차의 꿈을 이루려 하였으나 호텔 밖은 차량만 쌩쌩 거릴 뿐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버스도 나타나지를 않아 어둠과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 15분을 헤매며 두어 정거장 거리만큼 걷다가 용기를 접고 돌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