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분이 쓰신 기독교의 모순

인간2008.07.13
조회1,307

참고로 전 신은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그대로 신이지 기독교에서 말하는 허무맹랑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교회에서 기도하고 돈쳐내라고는 시키지 않았다고 봅니다...

말그대로 모든걸 만들고 지켜보는자 심판은 각자 했는짓에따라 받는거지 믿어야 천국 이건 뭐하는 짓임? 신이 있다고 믿는사람을  다 기독교라는 편견은 버렸으면 합니다..

참고로 전 흥미로워서 다읽어봤음... 논리정연하게 잘썻네요...

 

by 신비인


 

1. 신의 존재 증명에 대한 7가지 논리적 오류


기독교인들이 가장 자주 범하는 논리의 오류중 하나가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는 소리이다.


이것을 증명의 오류라고 하는데 기초적 논리 오류중 하나이다.


그럼 이해가 안되는 기독교인들을 위해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기독교 유치원에 다니는 6살 철수와 영호의 대화이다.


철수: 내 주머니에는 지금 다섯개의 구슬이 있어 이건 사실이야.
영호: 그럼 니가 가지고 있는 구슬을 보여줘.
철수: 난 너에게 구슬을 보여줄 수는 없는데 있는게 맞아.
영호: 그럼 주머니를 흔들어서 소리라도 들려줘 그럼 믿을께.
철수: 나는 주머니를 흔들어 들려 줄 수도 없지만 내가 있다고 했으니 있는거야.
영호: 그럼 니가 구슬을 가지고 있다는걸 어떻게 알아 ? 증거가 없는데.
철수: 그럼 니가 내 주머니 안에 구슬이 없다는걸 말로 증명해봐.
여기서 구슬이 있다고 처음 주장을 한건 철수였다.
철수가 구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으면 증명을 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철수가 구슬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구슬을 꺼내 보이거나 흔들어 소리를 들려주면 된다.
그런데 철수는 어떤 것도 하지 않고 도리어 영호에게 없다는걸 증명하라 한다.


가장 초보적인 증명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우김질을 하는 기독교인들 역시
6살 철수와 똑같은 땡강을 부리고 있는것이다.


둘째로 우리 경전에 나와 있으니 맞다란 주장 역시 황당한 증명의 오류이다.


여기서 기독교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논리적으로 찾아 보자.


1} 경전에 쓰여 있다니 맞다고 주장하기 위해 선행 되어야 하는 것은 그 경전에 기록 된 것이 사실인가 아닌가이다.
그렇다면 다른 기록들과 맞는가 아닌가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허나 주변 국가들의 기록이나 역사와 맞춰 보면 기독경은 전혀 얼토당토 않다.


즉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2} 이 비교를 통해 우리는 한가지를 더 확인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그 내용이 오리지널인가이다.


허나 역사적 배경이나 시대를 보면 이도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3} 다음으로 경전의 내용이 사실이기 위해서는 기독경만이 유일한 진실이여야 한다.


즉 그와 유사하거나 다른 패턴의 창조 설화가 존재해서는 안된다. 허나 세계에는 수없이 많은 창조 설화들이 존재함을 우리는 안다. 그러므로 절대성 역시 여지 없이 깨지고 만다.


이로써 경전에 나와 있으니 사실이라는 주장 역시 논리적 오류임을 알 수 있다.


세째로 공기 속에 산소가 있어도 보이지 않듯 신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말 역시 증명이 뭔지를 모르는 초보적 논리 오류라는걸 알 수 있다.


이건 보이지 않는다와 증명 되지 않는다의 차이를 몰라 나오는 오류이다.


산소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호흡을 함으로써 증명이 가능하다. 또 산소만 모을 수도 있으며, 불을 피워 봐도 알 수가 있다. 이처럼 산소는 보이지 않아도 증명 가능하지만, 신의 존재는 이런 증명이 불가능하다.


즉 이 또한 기초적 증명의 오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네째로 신은 있다 그러나 믿어야 보인다는 소리도 순환 논리의 오류이다.


간단하게 증명을 해 보고 넘어 가도록 하자.


앞서 말했던 구슬의 비유를 다시 한번 들어 보도록 하자.


철수는 구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보여 줄 수도 들려 줄 수도 없다.


그런데 누구든 철수가 구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으면 구슬이 생긴다고 해보자.


과연 여러분이라면 이런 황당무개한 이야기를 그대로 믿겠는가?


지금 기독교인들이 범하고 있는 순환 논리의 오류도 이와 똑같다. 신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을 믿어야 한다.
그럼 그 신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그건 신을 믿으니까 신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여러분은 신을 믿어야 한다. 계속 같은 말이 꼬리를 무는 순환 논리의 오류이다.


다섯째로 세계적으로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학에서 말하는 일반화의 오류이다.


이도 예를 들어 보자 한 기독교인은 이렇게 말을 한다.


우리나라 인구의 20%가 기독교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믿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럼 같은 논리를 다른 종교나 무종교인에게 그대로 적용을 해보자. 우리나라의 인구중 약 25%는 잠정적이건 적극적이건 불교신자라고 한다.


그럼 도리어 기독교보다 불교가 신도가 많으니 더 우월한 진리가 되는가라 묻는다면, 아마 그렇다고 대답을 하는 기독교인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20%의 기독교인이 있으니 이것이 옳다는건 뭔가? 이게 일반화의 오류이다.


가령 도기일이 나치즘하에 있을 때 많은 수의 독일인들은 나치즘을 신봉하였었다.


그럼 당시에는 옳았던 나치즘이 전쟁에 패했기 때문에 옳지 않은 것이 된 것인가?


이런 것을 논리학에서는 일반화의 오류라고 부른다.


여 섯째로 기독교를 믿는 사람중 똑똑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 사람들이 그럼 바보냐고 묻는건 권위에의 호소 오류라 부른다. 가령 유명한 철학가나 과학자 또는 정치인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이렇게 대단한 사람들도 믿는데 너희가 뭔데라고 하는 것이다. 이 역시 역지사지로 생각을 해보면 아주 간단하게 뒤집힌다. 기독교인들이 범하는 논리의 오류를 반대의 경우에 그대로 적용하여 생각해 보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홉킹은 신을 부정했다.


또 유명한 철학자 프레드리힉 니체, 버트란트 러셀 장 자끄 루소도 기독교를 부정했고, 유명한 심리학자이자 의사인 지그문트 프로이드나 칼 구스타프 융도 유일신을 부정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부정하고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훌륭한 일이다.


그럼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인정할 수가 있는가?


필자는 만약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바보라 말할 것이다.


똑같은 논리를 뒤집어 적용해 보면 기독교의 주장이 얼마나 어이 없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논거가 옳다고 주장한다면 권위에의 호소에나 의존하는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임을 자인하는게 될 것이다. 일곱째로 누가 뭐라건 내가 느끼니 나는 믿는다라고 말을 하는 것은 객관성 결여의 오류라 부르는 오류이다.


이 오류 역시 역지사지로 생각을 해보면 간단하게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 서도 말했듯 세계에는 수 많은 유일신교들이 존재하고 있다. 기독교의 주장대로라면 천리교에서는 오야사마가 절대적인 하나님이라 주장 하고 조르아스터교에서는 아우라 마즈다가 절대적 하나님이라 말하며, 증산도에서는 강증산이가 절대적 하나님이고 상제라고 하며, 영생교에서는 조희성이가 절대자 하나님이라고 말을 하고 있다.


그럼 이들도 모두 그 신도들은 그것을 확신하고 신념하니 이들도 모두 하나님임을 기독교는 인정 할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인정 할 수 없다면 다시 첫번째에 나왔던 증명의 오류로 돌아 간다.


이렇게 조금만 생각을 해도 논리적 오류가 뻔히 보이는 것을 자신들의 잘못 된 신념만이 옳다고 억지를 부리는 종교가 기독교이다.


2. 여호와신 따위가 전지전능,무소부재하다는 기독교의 헛발질

기 독교에서는 여호와 신 따위가 전지전능(全知全能)하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다 말한다. 그러나 필자가 그동안 수차례 증명을 햇듯 웃기는 헛발질이 아닐 수 없다. 남의 신이나 훔쳐 자기 신 만들어 섬기고, 남의 신화나 훔쳐 허접한 경전 만든다고 그 신이 존재 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코메디지만 이미 했던 이야기니 논외로 하고, 여기에서는 전지전능과 무소부재에 대한 기초적 오류에 대한 언급만 해보도록 한다.


먼저 전지전능(全知全能,omniscience and omnipotence)에 대해 생각을 해보자.


전지전능의 한자를 풀어 보면 온전할 전(全) 알지(知) 능할 능(能)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다들 아시고 있듯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 과연 전지전능이란 개념은 성립 될 수 있는가? 한가지씩 쉬운 예를 들어 보자.


먼저 여호와신이 전지(全知)하다면 기독경에 나오는 모든 사건을 미리 알고 있었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말하는 원죄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 될 수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여호와신은 전지하므로 아담 하와가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독교인들이 들고 나오는 자유의지란 것도 허황된 거짓말 밖에는 안된다.


자유의지대로 선택을 해서 여호와신이 몰랐다면 이미 전지란 개념은 깨진다.


또 알고 있었다면 애당초 알면서도 그렇게 되도록 유도 했다는 말 밖에 안된다.


상세한 것은 "선악과의 진실"이란 필자의 이전 글을 참고 바란다. 또 예수의 죽음이나 가롯 유다의 배신도 여호와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기독교 종파들은 예수도 창조 때부터 있었다 주장하므로 가롯 유다는 여호와신과 예수에게 이용만 당하고 토사구팽을 당했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필자의 "가롯 유다 배신자인가? 희생양인가?"란 글을 참조 바란다.


즉 여호와신이 전지하다 말하면 자신들이 신념하는 원죄니 대속이니 심판이니 하는 것이 처음부터 여호와신과 예수에 의해 조작 된 사기극이라고 자인하는 꼴이 되며, 몰랐다고 말하면 여호와신의 전지는 여지 없이 깨지고 마는 것이다.


그럼 이번엔 여호와신이 전능(全能)한가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이 들 수 없는 바위의 예를 다시 소개 하도록 한다.


만약 여호와신이 전능하다면 자신이 들 수 없는 바우리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여호와신이 전능하다면 그 바위를 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앞의 것이 가능하면 뒤의 것은 불가능해지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앞의 것과 뒤의 것은 서로 모순(矛盾)이 된다.


이 예가 너무 난해하다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을 위해 조금 더 일반적인 예를 들어 보자.


보통 어떤 것이 가능하다라고 말을 하려면 그것이 가능함을 보임으로써 증명해야 한다.


그렇다면 가능보다도 훨씬 상위 개념인 전능은 더더욱 증명이 가능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여호와신의 전능은 오직 그들이 신념하는 책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것도 그 내용이란게 모두 허황된 소설 나부랑이라면 이야기는 이미 종 친 것이다.


만약 소설이건 전설이건 무조건 신념하면 가능하다고 말을 한다면, 신을 믿는 세계 모든 종교의 교전은 기독경과 동일선상에 놓이게 된다.


아니라면 그중 기독경에 나오는 히브리 사막신만이 전능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전자도 인정하지 못하고, 후자도 증명 할 수가 없다.


자신들도 전혀 뭔지 모르는 이야기를 남들이 그렇다니 그런가보다 하고 믿는 것이다.


이렇게 여호와신 따위가 전지전능하다는건 상식선에서만 생각을 해봐도 무참하게 깨진다.


그럼 이번엔 여호와신이 무소부재(無所不在)하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자.


무소부재(無所不在) omnipresence;ubiquity —하다라는 말을 풀어 보면 한자로 없을 무(無) 바소(所) 아니불(不) 있을 재(在)라 쓰며
의미는 말 그대로 세상의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이 존재한다는 말이 되겠다.


그럼 이들 주장처럼 여호와신이 무소부재하다면이란 전재하에 이야기를 끌어 가 보자.


만약 여호와신이 무소부재하고 모든 기독교인들을 가호하는게 맞다면, 여호와신을 믿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사고로 죽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어야 한다.


그야말로 "god bless you" 즉 신의 가호가 당신과 함께 하기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과연 그런가? 교회 신도들이 여러 곳에서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들을 우리가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신이 무소부재하지 못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더구나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나, 평생을 여호와신을 믿은 노인들이 끔찍한 일로 사망하는 것은 신의 부재를 더더욱 환실하게 증명하고 있다.


또 여호와신이나 그 수하인 소위 성령인지 잡귀인지 하는 것이 어디나 존재한다면, 여호와신은 모든 신도들의 기도를 듣고 응답이 가능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절실한 기도를 하고도 죽어 가거나 세상에서 무너지는 사람들을 본다.


불치병에 걸려 죽어 가는 사람들중에는 많은 수의 기독교인들도 있을 것이다.


그 신도들이 열심으로 기도를 하지 않아 죽어 갔다고 여러분들은 생각을 하는가?


아니면 여호와신의 무소부재라는게 얼마나 허황하다는 말이라 보여지는가?


특히 불치의 소아병으로 죽어 가는 기독교를 믿던 어린이들은 어떻게 설명 할것인가?


사실 이건 고대인들이 신의 절대 권위를 세우기 위해 설정한 개념에 불과할 뿐임에도 아직도 신은 절대적이고 무소부재하다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며, 우리의 사고를 고대인들의 사고로 돌리려는 전 근대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황당한 전지전능이나 무소부재를 가지고 자신들의 신이 절대적이라고 말하는건 도리어 자신들이 믿는 것이 단순한 자신들만의 신념에 불과함을 증명할 뿐이다.


3. 간략하게 살펴 본 기독경의 역사
기독경이 성령의 감화로 쓰여졌다는게 기독교의 주장이다. 그러나 구약의 경우 가장 오래된 필사본은 BC 2세기 무렵에 불과하며 이전의 원본이나, 사본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기독교인들은 오래 보관이 불가능하여 남길수 없었다고 변명하지만, 과연 그런가?


수메르에서는 BC3000년부터 점토판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BC 2500년에는 필경사가 생겼고 학교도 있었다.


또 고대 바빌론이나 가나안에서도 문자로 기록한 흔적들이 계속 나오고 있으며, 이집트에서도 이미 BC 1500년 이전의 기록들이ㅣ 나오고 있다.


참 고로 고대에는 파피루스는 지금으로 말하면 코팅과 같은 화학처리를 해서 나무통에 넣고 진흙으로 막아 보관하는게 일반적이다. 그래서 지금도 오래된 파피루스들이 발견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또 양피도 글씨를 써서 기름등을 위에 발라 묶어 놓는데, 이 경우는 파피루스보다 훨씬더 견고해서 오래 가게 된다.


그리고 점토판의 경우는 보관하기 나름이지만, 4,5000년전의 것도 발견되고 있다.


자 생각해 보자. 전지전능하다는 신의 거룩한 기록을 보관하는데, 제사장이나 부족장들이 허술하게 했을까? 아니면 신중하게 했을까? 그럼에도 기독경의 사본은 BC 2세기 것이 가장 오래 되었다. 재미 있는 일이다.


신약은 예수 사후 100년이 지난 다음 소위 전승문서라는 것들이 돌아 다니기 시작한다.


이 역시 원본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모두 필사본들이 돌아 다녔었다.


여호와신의 독생자이고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라는 사람의 기록인데 말이다.


이당시는 구약시대보다 더 문명이 발달했던 때이고 로마통치하라는 사실도 기억하자.


기독교인들은 변명을 한다. 로마의 박해로 모두 사라졌다고 과연 그럴까?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 했다는건 기독교측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며, 로마의 행정기록에는 박해를 한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참 이때는 제정 시대라는 특성도 상기해 둘 필요가 있다.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한 것은 고작 네로황제가 재위하던 당시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감추려고 한다면, 로마 이외에도 기록을 숨길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제대로 된 사본 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기독경 신약이다. 자 그럼 이번에는 신약의 편집사를 한번 살펴보자.
예수 사후 흩어진 제자들은 나름대로 비전을 전하며 교파를 형성해 왔었다.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는 신비주의(그누시즘)쪽이 주로 강세였다고 한다.


그러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라는 정치적 비호를 등에 엎은 교부들이 교세를 잡으며 니케아 공의회라는 것을 열어 교리를 만들고, 신비주의자들을 숙청하게 된다.


니케아 공의회 당시 감독관(종교 지도자)은 총 1800명이였었는데, 실제로 공의회에 참석한 인원은 318명이라고 기독교측에서 밝힌바 있다.


그리고는 예수의 삼위일체 성령 강간설, 부활등을 조작하게 된다. 이때에 이집트, 페르시아, 그리스등의 전승들이 많이 참고가 되게 되는데, 특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섬기던 미트라 신앙이 많은 바탕이 되었다.


지금의 크리스마스나 일요일 지키기는 모두 여기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또 이시리스, 디오니소스로 이어지는 부활신앙을 패러디 해서 예수 부활설을 꾸미는데, 지금의 크리스마스는 이집트의 동지이며, 부활절도 그리스 전승설화에서 유래한다.


또 이때 여기 저기 돌아 다니는 문서와 구약의 사본이라는 것들을 모아 경전을 만드는데, 이 과정에서 예수 신격화를 위해 전승되던 신비주의가 모두 배제 되게 된다.


도마복음과 같은 것들이 이때에 빠진 유명한 문서중 하나이다.


이렇게 짜여진 문서들과 소위 니케아신조라는 것이 합쳐져 근본주의 교리가 생기고 현재 많은 기독교 종파들이 사용하고 있는 교리의 원전이 되는 것이다.


이후 유세비오스 아퀴나스등의 사상이 첨가 되면서 더욱 기반이 다져지게 된다.


이처럼 이것 저것 짜집기 해서 만들어낸 허접한 교전이 바로 지금의 기독경이다.


4. 구약 신 엘로힘의 진실


기독교의 구약을 보면 자신들의 신을 엘로힘이라고 부르는걸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엘이 뭐냐고 물으면 신을 나타내는 보통 명사이거나,
아니면 절대적인 큰 신을 말하는 보통 명사라고 기도교인들은 답을 한다.


그러나 엘은 히브리와는 무관한 가나안의 부족신의 이름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나오는 "가나안"에 대한 설명을 인용해 보자.


(인용 네이버 백과사전)


가나안 [Canaan]
최 근에는 요르단의 팔레스타인 서쪽 전역의 명칭으로 밝혀졌다. 구약성서에서는 요르단 서쪽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언어는 셈어족의 북서쪽 방언에 속한다. 아마르나 문서(이집트의 고문서)에 따르면, BC 3000년 무렵 셈족이 여기에 거주했고, BC 2200〜BC 2000년 이집트인이 이 지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였으며, BC 15세기에는 이집트의 지배력이 약화되어 그 지배하에 있던 팔레스타인과 시리아가 혼란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BC 11세기에는 이집트 세력이 가나안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곧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와 지배하였다. 이 지역은 문명의 교차로로 자리잡고 있어 이집트 ·미케네 ·크레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요소가 혼합되어 있으며, 주신 옐을 비롯하여 비와 풍요의 신 바알, 옐의 아내 아세라, 풍요를 주관하는 아스타르테 등이 있다. 고대 셈족에는 카리스마적인 형태와 정치적 형태라는 두 지배체제가 있었는데, 전자는 신적인 영력(靈力)을 받은 권위로써 민중을 지도하고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성서의 판관(判官)이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가지를 주목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 악신의 대명사로 나오는 바알도 가나안의 주신이였으며, 엘 역시 같은 가나안의 주신이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가나안이 부족 국가가 형성 된 것은 BC 3,000년전이고,
히브리족이 유입 된 것은 BC 1,100년경이라는 것이다.


그럼 그 전까지 히브리 부족은 어디에 있었는가? 구약에도 나오듯 그들은 떠돌이였다.


그리고 가나안은 정착민들이 살던 농경 국가였으며 이스라엘이 들어 오기 전에 이미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역사는 말하고 있다.


종교학적으로 볼 때 종교의 발달은 유목민보다 정착민들에게서 안정적으로 발전 한다.


종교학 개론들을 찾아 보면 고대 히브리의 종교는 다신 사상이였다고 한다.


이는 떠돌이 부족들이 주변 부족의 영향을 받아 흔하게 나타내는 특징이다.


이 렇게 다신을 섬기던 히브리족이 가나안으로 들어 가 주신 개념을 받아 들이게 되고, 가나안의 주신인 엘을 받아 들이게 되는데, 초기에는 이것도 다신적인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독경에는 엘로힘이라는 복수형으로 신을 표기 하고 있는데, 이것은 히브리 부족의 신관이 다신 사상이였음을 반증한다. 일부 신학자들은 이것이 신을 경외하는 장엄 복수라고 말을 하지만 틀린 이야기이다.


만약 이게 장엄 복수가 맞다면 구약에는 단 한개의 단수형도 나와서는 안된다.


그러나 사사기 이후 엘로힘의 단수형인 엘로하가 등장하는걸 볼 수 있다.


즉 시대의 변화에 따라 히브리 종교가 다신에서 유일신관으로 변모 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여타 유일신 종교들도 비슷한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 엘로힘이 여호와 또는 야훼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고, 히브리어 경전에는 YHWH라고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종교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히브리의 신이자 구약의 신인 엘로힘은 다신에서 타 부족의 주신을 받아 들여 만들어진 유일신관으로써, 히브리 고유의 사상이 아니란걸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신이 창조신이며 절대적 유일신이라 우기는 종교들이 바로 기독교이다.


예수는 단 한번도 여호와신이 자기 아버지라고 말을 한 바가 없음에도, 자기들이 히브리의 변형된 신관을 믿으며 그게 예수의 말이라 속고 있는게, 지금 기독교와 그 아류 종교들이 신앙하는 신관인 것이다.


 


5. 선악과의 진실


얼마전 개봉한 "빨간 모자의 진실"이란 영화가 있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화 빨간 모자 이야기를 시각을 바꿔 본 애니매이션 영화였는데, 필자도 무척 흥미 있게 본 영화였다.


그럼 기독경에 나오는 선악과 사건을 이처럼 시각을 바꿔 보면 어떻게 될까?


선악과의 진실은 의심 많은 심술 영감 여호와가 아담과 하와를 의심하여 자기 똘마니 사탄을 시켜 테스트를 하고 그 테스트에 통과 못했다고 멋대로 에덴이라는 아담 하와의 보금자리에서 내 쫏은 사건이 선악과 사건이다.


도데체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냐 묻는 기독교인들이 있다면, 욥기 1장 6절을 보면 사탄이 누구의 부하인지가 분명하게 나와 있다. 살펴 보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개역판)


하루는 하늘의 영들이 야훼 앞에 모여 왔다. 사탄이 그들 가운데 끼어 있는 것을 보시고 (공동 번역판)


Now there was a day when the sons of God came to present themselves before the LORD, and Satan came also among them.(KJV)


One day the angels came to present themselves before the LORD, and Satan also came with them.(NIV)


quadam autem die cum venissent filii Dei ut adsisterent
coram Domino adfuit inter eos etiam Satan(Latin)


지면 사정상 가장 대표적인 5개 버젼의 기독경만을 제시하였다. 분명 욥기에는 사탄이 여호와신의 부하 또는 아들이라고 나오고 있다.


자 그럼 이것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하나씩 추리해 가 보자.


1. 여호와신이 전지전능한 창조신이라면 사탄의 꼬임이 있을 것과 아담 하와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알았어야 한다.


여기서 기독교인들이 자주 들고 나오는게 자유의지라는 말인데, 전지전능이라면 당연히 자유의지로 선택할 결과까지 알았어야 맞다.


그러므로 이것은 애당초 여호와신이 고의로 만든 사건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2. 여호와신이 인간을 그토록 사랑하는 신이라면 애당초 선악과를 만들지 않거나, 아담 하와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놓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빤히 보이는데 놓고 자기 부하를 시켜 유혹을 하였다.


이는 분명한 여호와신의 조작극이며 엄밀히 말하면 사기인 것이다.


3. 여호와신은 아담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말했다.(창세기 2:17)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아담 하와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내려진 벌이란게 아담은 땀 흘려 농사를 짓는 일이고, 하와는 출산의 고통을 받는 일이며, 유혹을 한 당사자인 뱀은 땅을 기어 다니게 되는게 전부였다.


허나 일 안해도 먹고 살 에덴에서 추방 되면 땀 흘려 일하는게 당연하고, 여자가 성장하여 출산을 하면 고통을 받는 것도 당연하며, 뱀은 원래 다리가 없이 만들어진 동물이였다.


아담 하와의 경우 성인이 되면 그렇다는걸 가지고 여호와신이 뻥을 친 것이고, 뱀이 원래는 다리가 있었는데 이 때부터 땅을 기어 다녔다면 모든게 창조 된 그대로라는 창조주의는 여지 없이 깨지게 된다.


여기서 결국 아담, 하와는 늙어 죽었다고 기독교인들은 마하기도 한다.


늙어 죽는 것은 여호와신 따위와는 전혀 무관한 자연의 섭리이다. 결국 여호와신이 내린 벌이란건 잘 살고 있는 애들을 에덴에서 몰아낸게 전부이다.


이 또한 여호와신이 창조주도 절대자도 아니라는 결정적인 근거가 될 것이다.


4. 결론적으로 이 이야기를 텍스트대로 따라간다고 할지라도, 원죄니 구원이니 심판이니 하는 것들은 애당초 거짓말이였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가 있다.


물론 설화를 말 그대로 믿는거 자체가 넌센스가 아닐 수 없지만, 이게 사실이라고 우기는 기독교인들의 주장대로 스토리를 따라 움직여도 이 내용에서 여호와신이 창조주이고 조물주가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게 드러난다.


그럼에도 아직도 이런 황당한 내용을 사실이라며 진리라 우기는 것이, 바로 창조주의자들을 비롯한 근본주의 기독교 신자들이다.


6. 신약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구약뿐 아니라 신약도 역사적 사실이라 믿지요.
그러나 기독경에 기록 된 예수는 역사적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물론 저 개인적으로 예수란 한 개인이 존재 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예수는 기독경에 기록 된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건 확실하지요.


자 그렇다면 예수의 출생을 중심으로 그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기독경에 의하면 예수의 탄생을 안 헤롯왕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학살하는 장면이 아죽 드라마틱하게 나옵니다. 그러나 헤롯왕은 AD 1세기 사람이 아니였습니다.


결국 헤롯왕이라 기록된건 왕의 이름이 틀리거나 아니면 시대가 틀리다는 말이지요.


또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이 당시에 전국적으로 아이들이 학살 당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만약 있다면 공식 기록은 아니더라도 개인적인 기록이라도 남아 있음이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사렛에서 자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나사렛 예수라고들 많이 말을 하지요.


그런데 고문헌 어디에도 나사렛이란 지명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즉 유령 도시거나 아니면 어디 하늘 한구석에 있는 나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출생 연도 역시 정확한 근거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뭐 12월 25일이 예수의 출생일이 아닌건 너무 유명한 이야기지요. 12월 25일은 이집트의 동지절이고, 미트라의 축일입니다.


후대에 기독교가 기독교를 공인하는 과정에서 슬쩍 끼워 넣은 것이지요.


그뿐 아니라 예수의 출생 시기가 기독교가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몇십년 전이니 몇십년 후니 신학자들간에도 의견이 분분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는 언제 태어나서 어떻게 자랐는지가 전혀 불분명한 인물이라는거지요.


예수의 성장과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을 보면 예수의 어린 시절(12살까지)는 간단하게 언급 되고, 12살 이후의 기록은 아에 건너 뛰고 있습니다.


즉 이 부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전혀 기록이 없다는거지요. 일부 학자들은 예수가 실크로드를 타고 인도와 티벳에 가서 불교의 제자로 수행을 했다.


그래서 문헌학적으로 경전을 비교해보면 유사점이 많다고들 주장합니다.


사실 비교 경전학적으로 보면 유사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역시 문헌학적으로 완전히 증명 된 것은 아니니 여기서는 차제합니다.


자 그럼 이번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살펴봅시다.


며칠 전에 다른 글에서 이야기를 했었던 것이니 여기서는 간단히 집고 갑니다.


예수의 죽음은 로마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큰 사건일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의 어느 행정문서에도 이 재판과 처형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건 AD 2세기쯤 쓰여진 보고서에서 기독교인들이라는 자들이 있는데, 이렇게 처리할까 한다는 보고서에서였습니다.


여기서 기독교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주장 로마가 일부러 없ㅤㅇㅔㅆ을 것이다, 천만에요.


설사 공식 행정문서를 없ㅤㅇㅔㅆ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로 큰 사건이라면 당시 로마인들의 개인적인 기록들(회고록이나 편지등)에서라도 나타나야만 정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처형과 부활에 대한 기록은 아무데에도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가 주장하는만큼 큰 사건이 아니였거나, 아니면 아에 이런 사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 역시 마찬가지이겠지요.


죽었던 사람이 살아 나는 센세이션한 사건이 일어 났다면 이 역시 뭔가 개인적인 기록들에라도 그 흔적들이 남아 있어야 할 것입니다.


허나 이 역시 기독경 이외에는 아무데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는 단순히 히브리에 있던 한 청년 사상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주장하는 것처럼 신의 아들도 아니였으며,수많은 민중들을 이끌고 다니던 그런 인물도 아니였다고 보여집니다.


그저 히브리 지방을 중심으로 자신의 사상을 펼치다 유태인들에게 미움을 사서 죽은 불행한 젊은 한 사상가에 불과하다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신약이 역사적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은 모두 구라입니다.


또 예수를 이처럼 신격화 하고, 과대 포장하는 것은 예수가 바라던 바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를 팔아 사기치던 바울 그리고 교부들의 찌거지들 가지고 밥벌이 하며 사람을 맹신으로 몰고 가는 한낱 종교의 벌이 수단일 뿐입니다.


7. 황당한 예수의 족보 비교


신약 마태복음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하는 소위 예수의 장황한 족보가 첫머리에 나오고 있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같은 족보가 누가복음 3장에 다시 나오는데, 이 두 족보는 서로 젼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참고로 누가복음에 나오는 또 하나의 족보를 여기 소개해 보기로 하자.


 

누가복음에는 예수부터 거슬러 나오지만, 독자분들이 비교를 편하게 하기 위해 여기서는 아브라함부터 내려 가면서 정리를 해본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
베레스
헤스론
아니
아미나답
나손
살몬
보아스
오벳
이새
다윗
나단
맛다다
멘나
멜레아
엘리아김
요남
요셉
유다
시므온
레위
맛닷
요림
엘리에서
예수
에르
엘마담
고삼
앗디
멜기
네리
스알디엘
스룹바벨
레사
요아난
요다
요섹
서머인
맛다디아
마앗
낙개
에슬
나훔
아모스
맛다디아
요셉
얀나
멜기
레위
맛닷
헬리
요셉
예수


이 족보의 가장 큰 특징은 댓수이다.


마태복음의 기자는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가 14대요, 바빌론으로 이주할때까지가 14대 다시 예수까지가 14대라 말하고 있다.(마태복음 1장 17절)


그런데 세어 보라 누가 복음의 댓수는 무려 56대로 마태복음과 14대나 차이가 난다.


즉 마태복음식으로 끊는다면 한 첵터가 더 있는 셈이 된다. 더구나 이 족보를 마태복음과 비교를 해보면 같은 댓수의 동일인은 3/1도 되지 않는다.


즉 두 족보중 하나는 분명 틀렸거나 아니면 둘다 엉터리라는 말 밖에 안된다.


또 기독교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솔로몬은 나오지도 않는다.


기독교의 궁색한 변명중 하나가 이건 예수의 모계 족보라는 황당한 거짓말인데 먼저 고대 히브리는 부계사회였고, 장자 계승 사회였다는 점을 밝혀 두자.


그리고 만약 기독교의 말대로 이게 예수의 모계 족보라고 가정을 하고 살펴 보자.


아브라함부터 헤스론까지 첫 6대는 양쪽 족보의 이름이 동일하다.


그런데 7대로 가면 마태복음은 람 누가복음은 아니로 달라졌다가
다시 14대 다윗까지는 양쪽의 기록이 일치한다.


그리곤 15대에 가서 마태는 솔로몬 누가는 나단으로 다시 갈라지기 시작하여, 다시 예수의 아버지인 요셉에 와서 동일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슨 모계 조보가 부계 족보와 겹쳤다 떨어졌다 하는가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그 뿐 아니라 14대면 그 해수의 차이가 몇백년은 될 것이다.


같은 조상에서 시작하여 중간에 겹치다 갈라지다 하며 내려 온 족보가 같은 사람에서 끝이 나는데 몇백년의 차이가 난다는게 말이 되는가?


또 한가지 재미 있는 것은 양쪽에 나오는 예수 할아버지의 이름이 다르다는건데, 마태복음에서는 야곱으로, 누가복음에서는 헬리라고 나오고 있다.


성령의 감화로 쓰여진 인류의 메시아의 족보가 이렇게 엉망이란건 정말 웃기는 일이다.


물론 예수는 여호와신이 보낸 성령이 잉태를 시켰다니 아브라함 다윗의 자손이란 것도 여호와신이 예수의 아버지라는 황당한 거짓말을 뒤집는 것이 되겠지만, 이런 엉터리 족보가 인간 예수의 조상이란 것도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는 이렇게 차이가 나는가를 고찰해 보자.


콘 스탄티누스 황제와 정치적 야합을 한 교부들이 교권을 장악하고 니케아 공의회 이후 기독경을 첨삭하기 전까지 초기 기독교에는 지금과는 다른 여러 학파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예수의 전승을 이었다고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복음서를 자신들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 니케아 공의회 이후 합쳐지며 두 복음서에 나타나는 이 모순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묻고는 한다.


그 럼 왜 첨삭을 하는 과정에서 수정을 하지 않았느냐고, 이는 두가지 이유가 있는데, 교권을 잡은 교부들의 무리도 한 학파의 출신들이 아니였고 그들의 입맛을 맞추려다 보니 여러 학파의 주장을 조금씩 넣을 수 밖에 없었던 것과, 실제로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사제 이외에는 경전을 볼 수 조차 없었으므로 기왕에 편집된 것을 다시 수정을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이다.


그러다 기독경이 독일어등으로 번역 출간 되어 일반인들이 볼 수 있게 되자.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고 수정이 불가능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어느쪽이건 경전에 손질을 한다면, 바로 자신들이 명분을 잃게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였다.


이처럼 얼토당토 않는 예수의 족보는 지금까지 회자 되고 있지만, 대부분 기독교인들은 이런 족보의 차이 조차 모르고 있다는건 정말 개탄스러운 일이다.


기독교인들이여 부탁건데 자신들의 경전만이라도 제발 좀 숙독하기를 바란다.


8. 창조론이 허구라는 몇개의 근거들

기독경은 수많은 모순점들을 안고 있다.그중 가장 대표적인 창조주의에 관한 것들 몇가지를 같이 살펴 보고자 한다.


1.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조상이고 아들이 둘 있었다. 그중 카인에 의해 아벨은 죽었다. 그럼 카인은 누가 해칠려고 했으며, 누구랑 결혼 했을까?


2. 천번 만번 양보해서 거기서 인류가 시작 됐다고 가정하자.
그럼 바벨탑 사건 당시에 나오는 수 많은 사람들은 어디서 나왔을까?
참고로 거기에는 도시와 탑(city& tower)이라는 말이 나온다.


3. 여호와신은 지 안믿는다고 성질 나서 홍수로 싹 죽이고 노아 식구만 남겼다한다.


그렇다면 노아와 마누라의 피부색은 무슨 색이였을까?
참고로 두 사람에게서 세개 이상의 피부색은 유전학이나 우성학상 나오지 않는다.
또 이게 나오려면 현재의 인류에 모든 피부색의 유전정보가 모두 있어야만 한다.


5. 어느 인류학자의 계산에 의하면 노아의 8 식구가 지금 인류만큼 불어 나려면 한쌍당 180명의 자녀를 낳아야 가능하단다. 노아가 쥐나 토끼도 아닐진데 가능할까?


6.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한반도에 사람이 정착한게 기원전 3000년이라고 한다.


그리고 말레시계인 드라비다족이 인도로 들어 간 것도 그정도 되고,
황 하 문명과 나일문명이 발생한 시기도 이정도쯤 되며, 페르시아 근처에 아리안족이 모인 것도 그때쯤이라고 한다. 또 수메르 문명은 위의 것들 보다도 앞선다. 지구 역사가 6000년이고, 노아의 홍수가 4300년전쯤이라면 이건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가?
자 이제부터는 창조 진화에 대한 질문들을 던지고자 한다.


1. 기독경에 의하면 하와는 아담의 갈빗뼈를 빼서 만들었고, 그 부분은 흙으로 채워 넣었다고 나와 있다 그럼 기독교인들의 갈빗뼈는 모두 몇개일까?


2. 모든 동물은 창조 될 당시 그 모습 그대로라고 기독교인들은 말한다. 그럼 고래의 지느러미뼈에는 왜 발가락뼈와 발가락 관절이 있을까? 참고로 고래와 덩치가 비슷한 고래상어를 비롯한 다른 수중 생물들은 모두 지느러미가 근육으로 되어 있다. 이는 수중에서의 움직임을 원활히 하기 위함이다.


3. 기독경에 의하면, 토끼, 오소리는 되새김질을 하고, 악어는 아가미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토끼와 육식동물인 오소리가 정말로 되새김질을 할거라 생각 하는가?또 악어는 폐로 호흡하는데, 아가미 소리를 하는 이유는 뭘까?


4. 기독경에는 네피림이라는 거인이 나온다. 그럼 네피림은 어디로 갔으며, 네피림은 노아홍수 당시에 방주에 탔다는 말인가 안 탔다는 말인가?


5. 이번에는 광물에 대한 질문을 하나 해보자. 모두들 아시듯 다이야몬드는 탄소가 변해 이루어지는 광물이다. 탄소 덩어리가 다이야몬드가 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수억년이란데 대해 기독교 창조주의자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을 할까?


6. 석유와 석탄은 식물의 화석이 변해서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살아 있는 식물에서 석유가 되는데까지는 수천만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 렇다면 과연 6000년에 이것이 어떻게 형성 될수 있다고 기독교인들은 생각 하는걸까? 만약 기독교의 주장대로라면 지금도 여기 저기에서 석유, 석탄도 계속 형성돼야 하고, 다이아몬드도 송진이 변해 만들어진 호박도 계속 생성 되어야 맞다. 왜냐하면 6000년이라는 시간이 지구 역사가 맞다면 지금도 충분히 형성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창세기의 몇 몇 부분들만 집어도 지구 6000년설은 사기임이 자명해진다. 그럼에도 아직도 지구가 6000년 되엇고, 태양이 20000년 되었다고 거짓말을 하며, 이것이 과학적이라고 우기는 웃기는 자들이 창조주의자들이다.


9. 과학의 패러다임과 기독교

과거 기독교는 많은 부분 과학의 업적을 부정해 왔던게 주지의 사실이다. 지금도 자신들의 교리에 어긋나는 과학적 업적에 대해서 기독교는 거짓으로 일관하며 기만과 부정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면서 가증스럽게도 과학이 여호와 신의 섭리라는데는 고소를 금할 수 없다. 과학이 발달되며, 기독교의 많은 교리가 부정되는 현실에 맞닥드리자, 기독교는 부정만으로는 더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고, 과학에 편승하려 하고 있다.


언제나 남에게 편승하여 살아 남는 추잡한 단면을 다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합리적이고, 논증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과, 관념적이고, 주관적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신학이 양립함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기독경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 창조의 이야기를 보자. 기독경은 여호와신이 흙으로 사람을 빚어 숨을 불어 넣으니 살아 난게 아담이고, 그 갈비뼈를 뽑아 그것으로 하와를 만들었다고 지금도 가르친다.


아담의 경우는 많은 신화들이 가지는 창조설화중 하나의 형태라 보여진다. 그러나 설화는 설화일 뿐이지 그것이 증명 될 수 없다. 아니라면 누구라도 흙으로 인간을 만들어 살아나는 경우를 증명해 보기 바란다.


하 와의 창조설화가 진리라는 말은 더욱 웃기기 짝이 없다. 인간의 갈빗뼈는 남,녀 모두 12쌍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창세기에 나온대로 아담의 갈빗뼈를 하나 뽑아 하와를 만들고 흙으로 채워 넣다면 아담이나 하와 둘중의 하나는 갈비뼈가 홀수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간혹 차라리 피노키오를 믿지라고 말을 하고는 한다. 코젯트 할아버지가 만든 목각 피노키오가 살아 났다는 이야기와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동화 수준의 이야기가 절대 진리라고 우기는 것이 기독교이다.


기독교인들이 진화론을 부정하며 자연 발생설을 부정할때 확률을 자주 들먹인다.


필자는 기독교인들에게 묻곤 한다 그렇다면 여호와신이 흙으로 사람을 빚어 숨을 불어 넣으면 살아날 확률은 몇 %라고 생각하느냐고 말이다.


만약 이에 대해 50대 50이라고 답을 한다면 수학 공부 다시 하기 바란다.


확률이 뭔지 기본적인 개념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위의 경우는 확률적으로 0%라고 말을 해야 맞는 답이 될 것이다. 그럼 기독교인들은 말할 것이다 그래서 과학은 부정확한거라고. 자 앞서 말했듯 과학이 여호와신의 섭리라고 기독교인들은 말을 하고는 한다.


그리고 여호와신의 섭리는 절대 틀리지 않는다고 말을 한다, 그런데 과학은 부정확하다고 말을 하면 무엇을 부정하게 되는가? 자신이 하는 말을 스스로 뒤집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실 제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과학에 무지하다 보여진다. 일부 창조가 과학이라고 우기는 자들중 많은 수도 과학자가 아니며, 설사 그런 소리를 하는 과학자들이라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가 억측과 궤변으로 그저 말 장난을 하는데 치중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앞서 자연 발생설 이야기가 나왔으니 다시 이것으로 예를 들어 보자. 기독교는 말한다 자연 발생이 일어날 확률은 0%이다라고 그러나 이것은 확률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조차 부족한 무지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의 이러한 주장은 한번에 단 한번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자연 발생은 여러가지 요인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며 그 안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동시 다발을 일체 무시하고 한번에 하나씩 충돌하는 경우를 가지고 그 가능성이 적으니 0%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것이 소위 창조과학자라 말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기초적인 것을 거짓으로 가정하고 결과를 억지로 부정하면서 교리를 지키려고 온갖 궤변과 거짓말들을 너저분하게 늘어 놓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기독교인들과 천지창조나 노아 홍수에 대해 여러차례 토론을 벌이면서 이들이 역사와 과학에 너무 무지함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기독교인들을 이러한 무지함으로 일관하게 한데는 소위 말하는 창조주의가 큰 몫을 했음은 누구나 알 것이다.


이런 창조주의가 과학이라는 패러다임에 의해 하나씩 실체가 벗겨지자, 이제 과학이 여호와신의 섭리라는 또 다른 거짓말로 사람들을 기만하려 하고 있다.


과연 이들의 한심한 거짓말이 언제까지 계속 될 것인지, 그리고 이런 거짓말을 언제까지 방관해야 할 것인지 필자는 자못 궁금할 따름이다.


10. 기독교 원죄와 대속의 허구성

선악과와 원죄 문제는 기독교를 비판함에 있어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원죄뿐 아니라 예수의 대속이라는 교리까지 깨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선 악과 사건에 있어 여호와신은 과연 이것을 미리 알았을까? 아니면 몰랐을까? 알았다면 애당초 전지전능하다고 우기는 신이 지 피조물조차 믿지를 못해 이런 유치한 시험이나 했다는 말이 되므로 졸렬한 짓일뿐 아니라, 원죄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모순을 안게 된다. 몰랐다면 만물의 창조주라 우기는 여호와신의 전지전능성이 깨지게 된다.


그러므로 어느 쪽을 선택한다고 해도 기독교는 여기서 빠져 나갈 구멍을 찾을 수 없다. 또한 이로 인해 원죄라는 것이 부정될 경우 예수의 대속이라는 것도 깨지게 된다.


애당초 원죄가 없었으므로 예수가 대속을 위해 죽었다는 것도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는 아담이 저지른 원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으로 왔다는게 기독교의 주장이다.


그런데 원죄 자체가 부정 된다면 이 역시 거짓이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수 있다. 더구나 기독교는 삼위일체라는 후대에 만들어진 교리를 정당화 하기 위해 예수가 태초부터 여호와신과 함께 있었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그 렇다면 예수 역시 선악과 사건을 알았음에도 방관 했거나, 아니면 몰랐다는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도 찾을 수가 있다. 또 예수가 마지막에 남긴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을 통해서도 예수는 원죄 사건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예수가 이것을 알고 왔으며, 자신이 이로 인해 죽고 부활함을 알았다면 예수는 무엇 때문에 하늘을 향해 자신을 버렸다고 말을 했겠는가?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이 여호와신도 아니며, 원죄로 인해 죽는 것도 아님을 말한다.


아니면 기독교의 교리는 서로가 마구 모순 되는 결정적인 흠에서 결코 벗어 날수 업다.


이처럼 자기들 교리조차 앞뒤가 다른 소리를 하는 것이 기독교의 원죄와 대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