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광소녀 관찰기 #2 - 온기

제이드2008.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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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온기

 

 

★ 발광소녀 관찰기 #2 - 온기

 

쿵 쿵 쿵

또각 또각 또각

 

쿵 쿵 쿵 쿵

또각 또각 또각 또각

 

검은 구두가 만들어내는 무거운 발소리와 하얀 하이힐이 만들어내는 경쾌한 발소리가 베이스와 소프라노의 이중창을 들려주고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난 - 내 생명의 은인이라 주장하는 - 여자를 내 방으로 데리고 올라가는 중이다.

 

날도 추운데 밖에 서서 얘기하기도 싫고, 무엇보다 밤새 길바닥에 누어있었던 이 몰골을 다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 빨리 집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같이 집에 가서 얘기를 하자고 했더니 덜컥 좋다고 따라온다.

처음 만난 여자에게 대뜸 집으로 가자고 말하는 나도 이상하지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 오히려 기뻐하며 따라오는 이 여자는 더 이상하다. 하긴 이 여자에게서는 이상하지 않은 부분을 찾기가 더 힘들 것 같다.

 

오늘따라 올라가는 계단이 길고 높다. 머릿속은 멍하고 온몸이 뻐근해 바닥만 보며 터벅터벅 올라가는데 이 여자는 소풍이라도 가는 냥 발걸음이 가볍다.

 

끼이익

 

5층 계단을 마치 50층 계단이라도 되는 듯 힘겹게 올라가 녹슨 문을 열고 나가니 반가운 나의 집이 나타났다. 5층 건물의 맨 꼭대기에서 온 동네를 내려다보고 있는 옥탑방. 이 옥탑방 덕분에 지난 1년간 허벅지가 꽤나 탄탄해졌다. 그래봤자 드러내놓고 자랑할 만한 부위는 아니지만.

 

하루 만에 찾아온 집은 간밤에 내린 눈으로 옥상과 지붕이 모두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 우아 너 네 집 진짜 멋있다!! 꼭 이글루 같아!!

 

이글루는 무슨...

 

옥탑방을 보고 멋있다고 이렇게 환호하는 건 이 여자 밖에 없을 것이다. 하긴, 눈이 하얗게 쌓여서 인지 옥탑방 특유의 누추함이 조금은 가려지는 것 같기도 하다. 새하얀 눈이 마치 새하얀 소금 같다. 밋밋한 음식에 소금이 들어가면 맛있어 지듯이, 매일 보는 풍경이라도 눈이 뿌려지니 사뭇 다른 볼거리가 되어 버렸다.

 

- 우리 눈싸움하자!!

 

눈 쌓인 옥탑방을 본 이후로 더욱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녀가 소리치듯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이미 양손에 커다란 눈덩이를 하나씩 움켜쥐고 있었다.

 

- 나 지금 눈싸움 할 기분 아니...

 

퍽!

 

차다. 미쳐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그녀가 던진 눈덩이가 코를 강타했다. 차가운 것도 차가운 거지만 굉장히 아프다. 저 깡마른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머리가 다 띵하다.

 

- 지금 뭐하는...

 

퍽!

 

그녀는 내 말엔 아랑곳 않고 기어이 나머지 눈덩이 하나를 던져 이번엔 내 왼쪽 눈에 명중시켰다.

 

이 여자 정말 뭐람

 

순간 짜증이 솟구쳐 뒤도 안돌아보고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 어? 야 왜 들어가?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야!

 

세상에, 그게 시작도 안한 거였단 말인가. 제대로 시작했다가는 (자칭)생명의 은인에게 눈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

 

- 치, 사랑하는 사람이 눈싸움 좀 하자는데 그게 그렇게 힘들어?

 

그녀가 입을 삐죽 내밀고 투덜대며 따라 들어온다. 내 기분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잠깐, 그런데 방금 뭐라고 그랬지?

 

- 사...사랑하는 사람이요? 누가요? 누가 누굴 사랑해요?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으며 되물었다.

 

- 누군 누구야 너지, 네가 나 사랑해 주기로 했잖아

 

그녀는 그 엄청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일 더하기 일은 이가 되는 게 당연하잖아, 라는 식으로 태연히 대답하고 있었다.

 

- 누가 사랑해 준댔어요! 그 쪽이 일방적으로 사랑해달라고 했으면서!

 

- 칫! 목숨을 살려준 생명의 은인한테 그것 하나 못해줘? 오래도 아니고 100일 동안만 사랑해 달라는 건데?

 

그녀가 정색을 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목소리가 커짐에 따라 눈도 더 크게 떠졌다. 안 그래도 큰 눈인데 더 커지니 무서울 정도였다. 순간 움찔 했지만 이내 화가 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억지소리를 하고 있으면서 오히려 나한테 큰소리라니.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어디있는가.

 

- 이봐요, 사람 감정이라는 게 무슨 TV인줄 알아요? 켜고 싶을 때 켜고 끄고 싶을 때 끄는? 아니 그리고 자꾸 생명의 은인이라고 그러는데 절 어떻게 살려줬다는 거예요? 어떻게 믿으라는 거예요? 절 살려줬다는 증거라도 있어요? 아님 증인이라도?

 

오기가 올라 참고 있던 말들을 단숨에 내뱉어 버렸다. 속이 다 후련하다. 이 정도 쏘아 붙였으니 슬슬 본심을 드러내리라 생각하며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 ......

 

없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반응은커녕 내 얘긴 듣지도 않은 듯하다. 그녀는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방 곳곳을 관찰하듯 두리번거린다.

 

- 이봐요! 사람이 말을 하면 좀...

 

- 저기 있잖아...

 

속이 터져 한마디 하려는 찰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래 어디한번 들어보자 뭐라고 할런지

 

조금만 허튼소리 하면 혼구멍을 내주리라 작정을 하고 있는데 그녀의 다음 한마디가 기운을 쪽 빠지게 만든다.

 

- 커피 한잔 할 수 있을까? 나 커피 진짜 좋아하거든.

 

그녀는 나는 아예 보지도 않은 채 찬장위에 놓인 인스턴트커피 박스를 가리키며 졸라대듯 말했다. 이제는 밉살스럽게 보이기만 하는 예의 그 미소를 가득 띤 채로.

 

휴...

 

이거 뭔가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전자에 물을 담고 가스렌지로 향했다.

 

- 난 두개 한꺼번에 타줘. 진한거 아니면 맛없어.

 

네 알아 뫼시겠습니다, 공주님

 

속으로 한껏 비꼬아 대답하며 가스렌지의 레버를 비틀었다.

 

철컥!

 

레버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끝까지 비틀자 특유의 ‘철컥’하는 소리가 난다. 이제 곧 ‘확’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올라오겠지.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불이 붙지 않는다.

 

철컥! 철컥!

 

아무리 계속 레버를 돌려도 마찬가지 이다. ‘철컥’ 다음엔 ‘확’, 그리고 불이 올라와야 하는데 ‘철컥’에서 더 이상 진전이 되지 않는다.

 

왜 이러지? 하며 노란색의 가스밸브를 바라보는 순간, 엊그제 문 앞에 붙어있던 노란 경고장이 떠올랐다. 세 달째 도시 가스요금을 미납하여 조만간 공급이 중단 된다는 내용이었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추어 매일 같이 보일러를 틀어둔 덕에 요금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나왔었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던 것이 세 달이나 되었는데, 그렇다고 진짜로 가스를 끊어버리다니. 이 추운 한겨울에 말이다.

 

망연자실하여 멍하니 서있는데 어느새 그녀가 내 옆에 다가와 있었다.

 

- 뭐하고 있는 거야? 커피 안줘?

 

- 지금 커피가 문제에요? 이제 얼어 죽게 생겼는데!

 

사람 속도 모르고 커피타령만 하고 있는 이 여자가 정말 싫어지기 시작했다.

 

- 얼어 죽어? 걱정하지 마 얼어 죽을 것 같으면 내가 또 녹여줄게.

 

저 녹여준다는 소리, 이제 지겹다. 지가 무슨 슈퍼맨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슈퍼맨은 눈에서 광선을 쏴서 쇠도 녹였지 아마.

 

- 무슨 수로 녹여준다는 거예요? 가스가 끊겨서 불도 안 들어오는데. 전기난로라도 들고 오려구요? 그랬다가는 전기도 곧 끊기겠네요.

 

- 걱정하지 말라니까. 일단 커피부터 마시자. 빨리 마시고 싶어.

 

또 커피 타령이다. 이젠 아예 주전자를 두 손에 받쳐 든 채 졸라댄다. 나는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이 여자를 집에 들인 내가 미친놈이지. 어서 쫓아내 버리자

 

욕이라도 한바탕 퍼부어 주려고 하는 찰나, 어디서 물끊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보글보글

 

무언가 잘못 들었는가 싶었지만 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하얀 김까지 뭉게 뭉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 여자가 손바닥으로 들고 있는 주전자에서 말이다.

 

보글보글 보글보글

 

소리가 점점 커짐에 따라 김도 점점 많이 올라와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주전자는 여전히 그녀의 손위에 올려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가스렌지는 분명 불이 안 들어 왔는데. 그보다 저 여자 뜨겁지 않은가?

 

불 없이 끓는 물. 물이 끓고 있는 주전자바닥을 아무렇지 않게 맨손으로 받쳐 들고 있는 여자. 둘 중 뭐가 더 말이 안 되는 일인지 판단조차 되지 않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가장 내 눈을 의심케 만드는 것은 그녀의 손이었다. 그녀의 손에서는 분명히, 희미하지만 확실히 ‘빛’이 나고 있었다. 흰색에 가까운 황색의 빛. 어젯밤 꿈에서 보았던 태양이 내게 비추어 주었던 그 빛이 그녀의 손바닥에 머물고 있었다.

 

출처 : http://blog.naver.com/mysunnygi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