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대륙의 주인은 천손민족이다.

dkdn2008.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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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대륙의 주인은 천손민족이다.

 1) 해뜨는 동방은 우리나라 천하관의 표현이다.


계해년 단군 고열가가 마침내 위를 버리고 아사달에 들어가셨다. 진조선은 오가와 함께 종정(從政)하니,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종말을 맞았다.(마한세가)


종정(從政)을 혹자는진시왕 정에게 정복됐다고 풀이하지만, 억지해석이다. 동양사 어디에서 성을 놔두고 이름만 표기한단 말인가. 진시왕에게 정복되었으면, 종진(從秦 ; 진나라에 복종했다.)이라 했을 것이다. 굳이 진시왕의 이름(영정)을 쓰고 싶으면, 종영이라 해야 한다.

단군세기, 북부여기를 보더라도 진조선을 차지한 건 북부여다. 조선의 강역이 티벳고원 북부를 제외한 동아시아다. 티벳고원 북부마저 조선의 제후국인데 여정이 무슨 수로 만리장성을 쌓는단 말인가. 대부여가 여정에게 멸망했다면, 삼국이 중국 대륙에서 건국할 수 있는가. 삼국이 중국 대륙에서 일식관측할 수 있는가. 삼국의 일식기록이 있는 한, 중국의 역사가 중국 대륙 전체를 무대로 벌어졌다는 얘기는 날조다.

진시왕. 아주 보잘 것 없는 자다. 중토도 다 통일하지 못한<서쪽에는 서융(예맥, 남흉노)이 있었다.> 여불위의 자식은 단제의 신임을 받고자 하면서도 단제를 직접 찾아뵙지도 못하고 고작 중토에 있는 태산에 가서 제를 올리려다 창해역사 여홍성의 공격을 받고 도망친 자다.

그 해가 계미 22년(B.C. 219년)이니까, 여정이 신임을 받고자 한 단제는 북부여의 해모수다. 북부여는 여전히 중국의 ‘상국의 상국’(중국의 상국은 번한과 마한이다. 하나라, 연나라가 번한에, 주나라가 마한에 사신을 보내 새해인사를 하고, 기후가 번조선왕이 되자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 축하한 것은 번한, 마한이 상국이었기 때문이다.)이었다. 무엇보다 여정이 대부여를 차지했다면 삼국이 중국 대륙에서 건국할 수가 있는가.

政은 무력으로 상대방을 지배하는 것이며 부정(不正)한 것을 바로 잡는 것이라 했다. 따라서 종정(從政)은 무력에 복종했다 혹은 자연스러운 일(고열가 단제가 입산한 뒤 오가가 진조선을 다스렸는데, 그 당시는 군주제만 존재할 때라 여러 명이 협의해서 다스리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을 따랐다는 뜻이다. 요컨대 종정(從政)은 북부여에 복종했다고 풀이해야 한다.

“진조선은 오가와 함께 정에 복종하니,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종말을 맞았다.” 이 말은 해모수가 무력으로 진조선의 오가를 굴복시켰으나, 한 동안은 오가체제를 그대로 두었다가, 북부여에 병합시켰다는 의미다.


중국 대륙의 역사가 동이족과 하화족의 경쟁과 협력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었다. 현재 중화사상을 이끌고 있는 하화족을 중국인들은 화하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본래 황하의 상류 지역에 있는 임분에서 살았다. 동이족에 속하는 소호족은 산동의 곡부를 중심으로 살았고 그 수가 하화보다 월등하게 많았으나 하화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으며 살았다. 동이족의 정신적 중심은 산동의 태산이었고 그 정상에 있는 천제단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살았다.(우리에게 공자는 누구인가. 국민일보, 2001. 01. 27.)


“중국 대륙의 역사가 동이족과 하화족의 경쟁과 협력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중국 대륙의 역사는 오로지 우리민족이 만들어왔다.

“중국 대륙의 역사가 동이족과 하화족의 경쟁과 협력으로 이루어져 온” 것은 티벳고원 북부의 중토다. 태호도, 신농도 그 땅으로 들어갔지만, 본격적으로 우리민족이 그 땅에 진출한 것은 자오지 한웅이 중토를 정복하면서부터다.

날조사에서도 화하족은 황하 상류 지역에 살았다. 황하 상류 지역은 채달목분지와 티벳고원이다. 더 연장해봐야 사막과 초원, 염호 등으로 이루어진 오르도스다. 여기가 임둔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누가 중토의 주인인가. 황하 하류에 산 동이족인가, 채달목분지와 티벳고원에 산 화하족인가. 채달목분지나 티벳고원은 문명이 꽃핀 장소가 아니었다. 채달목분지는 극도로 추워서 고구려 이후 대대로 우리나라가 예맥족이나 살라고 한 땅이다. 예맥족 이성계조차 추위와 기근으로 못 견디고 제 동족들에게 고려에 귀순할 것을 권고한 후 회군했다고 날조한 땅이다.

화하족은 옛 황하인 금사강 상류 너머에 살았다. 티벳고원 북부의 서쪽에 살았던 것이다. 거기에 임둔이 있었다. 중토로 진출한 우리민족은 4대강 상류 즉 티벳고원 북부의 동쪽에 살았다. 거기에 산동이 있었다.

티벳고원 북부를 하화족과 동이족이 나눠 살았던 것이다. 그걸 중국사를 확대시켰듯이 중국 대륙 전체로 확대시킨 것이다.

“중국 대륙의 역사가 동이족과 하화족의 경쟁과 협력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나 “이곳은 동이민족이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운 곳”이나 “이곳은 중국문화의 주요 발상지 중의 하나로 동이족이 건립한 상당히 강성한 옛 중국의 중심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라는 산동성 성자애 박물관의 안내문은 역사날조 차원에서 쓴 글이다. 수적으로 월등히 열세라면서 화하족이 무슨 수로 동이족을 제치고 중국 대륙의 주인으로 행세할 수 있단 말인가.

태호와 신농이 봉토로 받은 땅이 티벳고원이므로 중토의 토착민인 화하족의 식민지사는 실로 오래되었다. 자오지 한웅이 재정복에 나서 중토를 다스리던 신농의 후손을 서쪽으로 밀어내고 치우씨들이 중토 동부를 차지했다. 화하족은 신농의 피지배종족에서 신농과 치우씨의 피지배종족으로 변한 것이다. 기원후까지도 화하족은 중토의 피지배종족으로 살았다.

화하족의 해독은 참으로 커서 그 어떤 우수민족도 오염시켜 미개의 나락으로 끌고 들어가는 힘이 있었다. 중토로 간 치우씨들, 일본의 백제인과 신라인, 중국 대륙의 한민족을 모조리 미개의 나락으로 끌고 갔다. 그러니까 대대로 지배받고 살았으나, 우수 화하족 문화로 미개 유목민족의 문화수준까지 끌어올렸다는 중노의 주장 따위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우수 한민족이 미개 화하족을 지배했을 때조차도 미개의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중토로 간 우리민족이 바닥까지 떨어진 후에야 화하족은 그 땅에서 우리민족과 경쟁할 수 있었다. 그래봐야 우리나라의 속국이었다. 중국은 5천년 내내 우리나라의 속국이었던 것이다.

여정은 옛 황하인 금사강 상류에 살았다. 이미 캐시미르 및 티림분지를 통해 정복민도 들어온 터라, 여정은 티벳고원 북부의 동쪽만을 통일했다. 그런 자가 무슨 수로 황하 하류에다 만리장성을 쌓을 수 있는가. 고작 창해역사의 공격을 받고 부리나케 달아난 여정이 무슨 수로 3년 만(B.C. 215년)에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북부여의 해모수를 축출하고 만리장성 공사를 시작할 수 있는가.

티벳고원 북부의 일부를 통일한 여정이 정말 3년 만에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았다면, 유방은 자오지 한웅이 아니라, 여정을 군신으로 떠받들었다. 자오지 한웅은 헌원과 10년간이나 전투를 벌였으니까. 그러나 사기에도 유방이 전투에 앞서 언제나 치우에게 제를 올렸고 치우 사당까지 세웠다고 했다.

태백산은 장안 서쪽에 있다. 장안이 조선의 중요 도읍지니까, 그 당시도 섬서성에 태백산이 있었다. 화하족은 화산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데, 현재 화산은 장안 바로 동쪽에 있다. 원래는 구월산이었다. 진왕 여정이 태산에 제사드리러 왔다가 창해역사 여홍성에게 공격당한 태산은 중토에 있었다. 중구는 우리나라를 따라서 티벳고원 북부에 있는 산동의 산을 태산이라 불렀던 것이다.

“동순하여 망제를 지내고 마침내 동후를 찾아뵙다.”라는 서경의 기록은 중국의 실체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단군은 여정은 물론, 요순 때부터 중국의 지배자가 직접 보고 예를 올리지도 못하고 멀리서 우러러 보며 제를 올린 후에야 알현할 수 있는 높은 존재였던 것이다. “진국(진한)은 천제의 아들이 다스리는 곳이다. 고로 5년마다 순수하는데 낭야에 한번씩 이르른다. 순의 제후는 때문에 진한에 조근(朝覲)하기를 네 번씩이었다.”(단군세기)

이 땅의 사학자는 중국의 날조사를 보고 단군이 유망집안에서 나왔다는 둥, 누비혼인으로 출생한 외손자를 사위로 맞아들이던 시대라 단군왕검의 아버지 홍제는 단군왕검의 장인이 되고, 단군왕검의 할아버지 태제는 처 할아버지가 된다고 볼 수 있다는 둥 망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상고신화와 역사탐구. http://shamanism.view.co.kr/e-contents/ec2/forum_list/f10.html)

심지어 “단군왕검은 14세 때 갑진년(BC 2357) 웅심국왕의 사위가 된다. 그래서 그를 웅녀군(熊女君)이라고 불렀다. 웅녀군이란 웅녀의 남편이라는 뜻이다. 웅녀란 웅녀라 불리는 모계집단의 족성의 여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단군왕검은 14세 때 족성이 웅인 모계집단에 데릴사위로 장가갔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장인이 전쟁터에서 전사하자 그는 장인의 대를 이어 웅심국의 왕검이 된다.”는 헛소리를 지껄이기를 서슴치 않는다.

熊女君이 웅녀의 남편으로 보이나? 웅녀 임금이다. 어째서 웅녀의 아버지, 조상, 스승이라고는 안하나. 단군세기에 나오는 藍國君, 靑邱君, 句麗君은 남국의 남편, 청구의 남편, 구려의 남편인가. 남국의 임금, 청구의 임금, 구려의 임금이다.


“을유 2년 남국의 임금(藍國君) 금달이 청구의 임금(靑邱君), 구려의 임금(句麗君)과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씨를 엄으로, 영고씨를 서 땅에 방고씨를 회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웅녀군은 한웅에게 신덕이 있다 함을 듣고 곧 무리를 이끌고 가서 뵈옵고 말하기를 “바라옵건대 하나의 굴을 내리시어 하나같이 신계의 백성이 되게 하시기를 비옵니다.”라고 하니, 한웅께선 마침내 이를 허락하사 이를 맞아들이시고 아들을 낳게 하였다.(태백일사 신시본기)


아직도 웅녀군이 단군왕검으로 보이나.


한인 뒤에 한웅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 모이는 곳을 천평(하늘의 들)에 마련하고 그곳을 청구로 정했다. 천부의 징표를 지니시고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시며 세상에 계시면서 교화를 베푸시니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였더라. 또 신시에 도읍을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이라 불렀다. 3.7일을 택하여 천신께 제사지내고 밖의 물건을 꺼리고 근신하며, 문을 걸어 잠그사 스스로 주문을 외우며 몸을 닦아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더라. 약을 드시고 신선이 되시니, 팔괘를 그으시고 올 것을 알며 상을 잡으시고 신을 움직였다. 또 여러 영험스러운 이들과 뭇 철인들이 보살피도록 하시더니 웅씨의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으시고 혼인의 예법을 정하매, 짐승 가죽으로써 폐물을 삼았다.(삼성기전 상편)



웅씨의 여인이 바로 웅녀군이다.

사람들은 웅씨 부족이 우리나라에 합류한 것이 배달 마지막 한웅 단웅 때라고 생각하지만, 1세 한웅 거발한 때였다. 단웅은 신인왕검의 부친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이, 그것도 역사학자라는 사람이 제 나라 역사책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하고 무분별하게 날조 중국 역사책만 신용하여 단군왕검의 부친까지 딴 인간으로 바꾸어서 유망의 자손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이고 어머니는 웅씨의 왕녀이며 신묘(B.C. 2370)년 5월 2일 인시에 밝달나무 밑에서 태어났다.(단군세기)


웅씨가 거발한 때부터 우리나라 사람이 되었다는 기사는 많다. 웅씨 사람 소전은 8세 한웅 안부련 때 사람이고, 소전의 후손인 공손을 헌구로 유배 보낸 때는 13세 한웅 사와라 때다.


웅씨가 갈려져 나간 자에 소전이라고 있었는데 안부련 말기의 소전은 명을 받고 강수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게 되었다.(삼한관경본기)


소전의 별고에 공손이라고 있었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였으므로 헌구로 유배시켰다. 헌원의 무리 모두 그의 후손이다. 사와라 한웅 초기의 일이다.(삼한관경본기)


웅녀의 후손으로 최초로 왕검이 된 인물은 배달 12세 한웅 주무신 때의 ‘여’라는 인물이다. 여와 신인왕검의 시차는 460년이다. 거불단의 아들이 신인왕검(神人王儉)이 되는 까닭은 더 이상 웅씨나라의 왕검이 아니요, 우리민족 전체의 중조가 되기 때문이다.


웅녀의 후손으로서 '여'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처음으로 단허에 책봉받아서 왕검이 되매, 덕을 심어 백성을 사랑하고 영토를 차츰 크게 넓히니 여러 곳의 왕검들이 나아와 특산물을 바치며 이로써 귀화하는 자 천여 명을 헤아렸다. 뒤에 460년이 지나 '신인왕검'이라 하는 이가 있었는데 크게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비왕이 되었다. 섭정하신지 24년에 웅씨의 왕은 전쟁하다가 붕어하시니 왕검은 마침내 그 왕위를 대신하여 구한을 통일하고 단군왕검이라 하였다.(삼한관경본기)


웅녀군이 웅녀의 남편이라면, 웅씨군은 웅씨 전체의 남편인가. 웅녀의 후손으로서 '여'라고 했으니, 처음으로 단허에 책봉받아서 왕검이 된 인물도 이름이 웅녀였다. 역시 웅녀군이었던 것이다.


유위자가 묘향산에 숨어 살았으니 그의 학문은 자부선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지나가다가 웅씨군을 알현하니 웅씨군은 '나를 위해서 도를 말하라'고 청했다.(마한세가)


웅씨군. 웅씨의 임금이다.

웅녀군. 처음 우리나라를 찾아온 웅씨의 임금은 여자였다. 그래서 한웅 거불한과 혼인할 수 있었고. 웅녀군과 신인왕검과의 시차는 무려 1500년이다. 아직도 웅녀군이 신인왕검의 배우자라 우기겠는가.

이 땅의 사학자들은 무려 1만년에 이르는 우리나라 역사의 시차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 역사가 전부 같은 시간대에 발생한 것처럼 취급한다. 시차를 무시하기 때문에 후대에 일어나야 할 것이 먼저 일어난 사건이라고 날조해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시차만 파악해도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날조역사임을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이 많다.

신인왕검은 배달의 마지막 한웅인 단웅의 아들로서 조선을 개국한 후 비서갑의 하백녀를 거두어 아내로 삼았다.(삼성기전 상편) 1세 한웅 거발한 역시 웅씨의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으시고 혼인의 예법을 정했다. 왜 혼인의 예법을 정했겠는가. 웅씨의 여인을 맞이한 게 1세 한웅 거발한이라서 그렇다. 18세 한웅 거불단이라면, 전해 내려오는 혼인의 예법에 의해 혼인을 하면 된다.

신인왕검이 어째서 “짐승에게도 짝이 있고 다 해진 신발도 짝이 있나니, 너희 남자, 여자는 서로 화목하여 원망함이 없고 질투함도 없고 음란함도 삼갈 것이다.”(단군세기)고 교화했겠는가. 바로 옆 중토에서는 형제고, 조카고 가리지 않고 서로 탐하니까, 본받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중토가 하도 외설스러우니까, 배울까봐 22세 단군 색불루는 금팔법(혹자는 금팔법을 두고 서슬 퍼런 긴장이 감도는 사회라고 하는데, 정반대다. 조선은 홍익인간하고 경천애인하는 사회로 형벌보다는 교화에 중점을 둔 이상사회였다.

금팔법의 내용은 남을 죽이면 같이 죽여서 다스리고, 남을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케 하고, 남의 것을 도둑질하면 신분을 무시하고 노비가 되게 하고, 소도를 훼손시키는 자는 가두어 두며,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하게 하고, 근면하게 노동하지 않는 자는 부역을 시키며, 음란한 행동을 하는 자는 태형으로 다스리고, 사기치는 자는 훈계 방면하나 스스로 속죄하려 하면 공표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면하여 준다. 결국 살인과 절도가 문제지만, 이거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율이다. 살인을 처형으로 단죄함은 그 당시 전세계의 공통이었다. 금팔법이 있다 하나, 어기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오히려 인간답게 사는 지침을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다 조선의 힘이 약화되고, 대부여, 북부여, 고구려로 이행하면서 우리나라는 극단적인 형벌주의로 나아갔다.)을 만들어 음란한 행동을 하는 자는 태형으로 다스리겠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부녀자들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번한세가) 그럼 남자는 음란했던가. 우리나라에 매춘부가 들어온 것은 1876년 일본과 병자수호늑약을 체결하고 나서다. 정숙한 여자밖에 없는데, 무슨 수로 음란한 남자가 있을 수 있는가.

우리나라는 기원전 7197년에 개천한 한국에서부터 정숙함을 미풍양속으로 삼았다.


한국에 5훈이 있으며 ...... 이른바 5훈이란 이른바 첫째 성실하고 믿음으로써 거짓이 없을 것, 둘째 공경 근면함으로써 게으르지 않고, 셋째 효도 순종하여 어김이 없고, 넷째 염치와 의리 있어 음란치 않으며, 다섯째 겸손 화목하여 다툼이 없는 것 등이다. (한국본기)


웅씨 왕(결국 배달의 제후 여러 왕검 중의 한 명이다.)이 단군왕검을 비왕으로 삼은 것은 단군왕검의 모친 웅녀가 웅씨나라의 왕녀였기 때문이다. 잘난 손자로 하여금 자신을 보좌케 한 것이다. 아마도 웅씨 왕은 아들이 없었을 것이다. 단군왕검이 유망의 자손이라면, 조선을 개국할 수 없었다. 누가 미개하고 난잡한 중국인을 우리나라 임금으로 떠받든단 말인가.

주목할 점은 중국이 자국의 5제를 팽개치고, 우리나라의 5제를 제사지냈다는 사실이다. 주원장이 허겁지겁 만든 가짜 5제라서 그렇다. 진나라는 백제를 주신으로 삼고 청제를 보(輔)로 삼고, 황제와 염제(炎帝)를 제사했다. 한나라는 청제, 백제, 황제, 적제를 주신으로 삼았는데, 유방이 “나는 하늘에 오제가 있다고 들었다“(하늘에 오제가 있다면서 중국의 별자리라고 우기는 28수를 보면, 하필 황제가 빠져 있다.)면서 흑제의 사당을 추가로 세웠다. 한나라가 우리나라 제천행사를 따른 것은 우리민족이 세운 나라였기 때문이다.

북부여 단제를 알현하고 싶어도 알현할 수 없었던, 그래서 고작 태산으로 제사 드리러 갔지만, 창해역사의 공격을 받아 내쫓긴 초라한 여정이 과연 황제를 자처했단 말인가. 한나라도 북부여 말에나 잠시잠깐 황제를 자처했을까, 고추모에게 정복된 이후로는 내내 우리나라 속국이었다. 명 이전까지 황제를 자처할 수 없었다. 수, 당은 고구려도 아니고 신라의 속국이었다. 신라왕도 노객(노비)을 자처하며 고구려 황제의 은혜를 구해야 했거늘, 과연 고구려가 수, 당이, 위진남북조의 미개 소국들이 황제를 자처하는 것을 두고 봤을 것인가.(“백제왕이 광개토왕에게 귀의하여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 이후로 영원히 대왕의 노객이 되겠습니다.”는 구절은 거짓이다. 백제 황제가 노객이라 했다면 고구려 황제가 태황, 태열제가 하지 않았다. 백제황제를 왕으로 격하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탁록의 전투도 헌원이 태양의 아들을 자처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우리나라는 왜와 중구의 우두머리를 통틀어 한위노국왕이라고 불렀다.

고려 시대만 해도 미개 중국은 역사날조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북부여기 전편에 걸쳐 한나라 군대를 가리켜 한구(漢寇) 즉 한나라 도적이라 했다. 그러나 이씨조선이 우리나라 상고사를 말살한 뒤에 쓰여진 태백일사에서는 미개 유목민 ‘천하고 작은 생선’이 세운 수, 당이 번듯한 황제국으로 변신한다. “양광은 좌우에게 말하길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몸소 작은 나라를 쳐도 승리하지 못하니 이는 만세의 웃음거리가 아니겠는가?” 천하의 주인은 고구려였다. 수의 천하는 티벳고원 북부였다. 수는 신라의 속국에 불과했다.

명은 한족이 아니라 화하족이 세운 나라다. 문맹자에 밥 빌어먹던 거지(백련교도)가 세운 나라다. 중국은 주원장 같은 문맹자나 거지도, 여정 같은 왕의 혈통을 이어받지 못한 자도 충분히 왕노릇할 수가 있었다. 어차피 저 땅을 지배한 수많은 유목민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테니까.

고려 시대까지 중국은 고작 티벳고원 북부에 있던 나라다. 명 역시 그 땅에서 선 나라지만, 예맥족 이성계는 양자강 이남을 떼어주고, 역사까지 뒤바꿔 명을 대국으로 부르며 성실 근면하게 섬겼던 것이다.


어지러운 천하를 통일한 사람은 장사꾼 여불위의 아들 진시황제였다. 그는 동이족의 신임을 얻기 위해 태산에 제사를 드리려고 나섰다가 동이족 창해역사의 습격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는 동이족 포섭을 단념하고 장안으로 돌아와 3년 후인 B.C. 215년에 만리장성 공사를 시작한다. 처음 장성의 위치는 난하의 서쪽이었다. 이는 동쪽의 조선을 막아 놓고 산동의 동이족을 박해하려는 계략이었다.(우리에게 공자는 누구인가. 국민일보, 2001. 01. 27.)


중국 대륙 전체를 가졌다고 날조한 여정이 대국인가, 동북아를 80개 제후국(78제후국과 마한, 번한.)과 나눠가졌다고 날조당한 조선이 대국인가. 중국 대륙을 가졌다는 여정이 동북아의 나라 북부여 단제의 신임을 받고자 애쓰는 것이 진짜 역사일 수 있는가.

반도사 대로라면, 여정이 통일한 중국은 78제후국의 상국(번한, 마한)의 상국(북부여)의 상국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대제국 진나라가 만리장성은 뭣하러 쌓았단 말인가. 동북아의 81개 소국이 그리도 무서웠단 말인가.

난하의 서쪽을 쌓은 것은 백제다. 난하 유역의 장성은 요즘 따로 떼어내 연나라 장성이라고 우긴다. 그러나 명 때만 해도 왜는 연에 속한다고 날조했다.

요가 회중을 살게 한 땅이 해 뜨는 동방이라는 뜻의 우이(嵎夷)라고? 양곡이 낮은 곳으로부터 태양이 솟아올라 온누리를 밝게 비추는 곳이라는 뜻이라고? 요가 회중에게 우이(양곡)를 주면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동방의 해뜨는 것을 맞이하여 봄 농사를 고르게 하라고 명했다고? 요가 장안성을 차지하고 있었다면, 공경하는 마음으로 중천에 해뜨는 것을 맞이하라고 했을 거다. 요가 살고 회중이 살던 땅은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기 때문에 해뜨는 동방에 있는 천자, 즉 조선의 단제를 공경하라고 했다.

중국은 우리나라 속국이다. 그러니 중국 동부에 위치한 신라 황제 김춘추는 절대 우이도 행군총관이 될 수 없다. 티벳고원 북부의 당왕 이치가 우이도 행군총관이었다. 연합군이라 하기엔 너무나 초라한 당군이 신라의 지원군이었다.

해뜨는 동방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만물이 생하는 해가 뜨는 곳이라서 동방이라 했다. 동방은 우리나라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천하관에서 만든 말이다. 서양에도 해는 뜬다. 그래도 해가 지는 서방이라 했다. 서아시아도 근동이지, 해뜨는 동방이 아니다. 해뜨는 동방은 세계의 지배자 배달의 한웅, 조선의 단군이 계시는 땅이다. 그래서 중국도 5천년이나 공경하는 마음으로 마냥 바라보았던 땅이다.

타고르는 이씨조선을 동방의 등불이라 했지만, 이씨조선은 등불조차 못되는 나라였다.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까지 내내 동방의 등불이 아니라, 세계의 태양이었다. 우리나라의 문화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전세계로 전파되었다. 동방의 등불 운운한 걸 보면 타고르는 우리나라가 동아시아의 천자국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인물이다.

아침 해가 빛나다. 조선이라는 국호 역시 해뜨는 동방(조선이라는 국호가 고작 조수, 선수라는 강에서 비롯됐다는 사기의 기록은 날조다. 사기에는 주무왕에 대한 기록도 있다. 무왕 때 중국에는 한자가 없었다. 사기는 우리나라 역사책을 보고 쓴 책이다. 조수, 선수에서 국명을 땄다는 소리는 명의 날조 기사다. 나중에 한자를 만들었을 때, 같은 의미로 바꾸지, 같은 음으로 고치지는 않는다. 따라서 조선의 국호가 조선이 아닐망정, “아침 해가 빛나다”라는 뜻은 맞다. 조선의 원음은 쥬신이다. 우리나라가 한자를 만들지 않았다면 음까지 비슷할 수가 없다.)이라는 의미다.

아침 해는 환하게, 활기차게 떠오르지, 고요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봐도 고려 시대까지 언제나 활기에 넘친 대제국이었다. 우리나라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도, 은둔의 나라도 아니었다.


2) 소노부, 계루부? 고씨는 천년황통이다.


우리나라 사학자들은 고구려의 황위가 곧잘 형제상속된 걸 두고 왕권이 약했다고 주장하나, 강적 백제와의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에 어린아이를 황제로 삼지 못한 것뿐이다. 전쟁을 어린아이의 의견에 따라 진행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고구려 같은 대제국의 황권이 약하다면, 금방 분열하고 만다.


삼년 내에 성이 무너지면 죄를 내린다. ...... 고구려 사람들은 공사 책임자를 성돌에 새겨놓았다. 고구려의 성돌은 1500여 년 전 고구려 평양성의 축조 과정과 함께 고구려의 힘을 말해준다. 성돌에 새긴 글은 철저하게 주민을 동원하고 노동력을 모을 수 있는 제도가 실시됐음을 보여준다. 당시 고구려의 왕권이 피라미드식으로 백성 개개인에까지 미쳤으며 일원적 체제하에 동원하고 사역하는 고대 국가의 철저한 지배질서를 말해주는 것이다.(역사스페셜 4권)


연인원 400만 명을 동원해 쌓았다는 고구려 평양성으로 날조된 유적은 백제제왕의 왕성에 불과하다. 그러나 고구려 황제 역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우리나라 사학계는 고구려가 처음에는 소노부에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6대 태조왕 때부터 계루부의 고씨가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태조왕도 아니고 고구려 무열제는 2대 유리명제의 손자다. 3대 대무신열제는 유리명제의 아들(3남)이다. 4대 민중제도 유리명제의 아들(4남)이고, 5대 모본제는 대무신열제의 아들이다. 2대 유리명제는 1대 주몽성제(고추모)의 아들이다. 모두가 고추모의 자손이다. 단일혈통이 어떻게 5대까지는 소노부고, 6대부터는 계루부란 말인가.

북부여의 단제가 고추모의 혈족이 아닌가. 2대 모수리, 3대 고해사, 4대 고우루, 5대 고두막, 6대 고무서 모두 고씨다. 고두막은 조선 47세 단군 고열가의 후손이다. 1대만 해모수인데, 원래 이름은 고모수다. 고모수 역시 고열가의 혈족(종실)이다. 해(解)는 존칭의 표시로 붙여준 게 분명하다. 고추모의 부도 고모수라고 불렸는데, 본명은 불리지다. 태백일사에는“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나왔다”라고 했다. 고추모의 부친 불리지는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진의 손자다.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의 손자다.”(태백일사) 부가 고진이라 소개했으니까, 성을 빼고 불리지라 한 것이다. 그러므로 북부여의 제위를 이어받은 고구려의 시조 고추모는 해모수의 고손이다.

“본래 소노부에서 왕을 삼았으나 점차 미약해져 지금은 계루부가 왕이 되었다”는 삼국지의 기사는 성립할 여지가 없다. 우리나라에 천년도읍은 없어도 천년황통은 있었다. 바로 조선의 47세 단군 고열가에서 고구려 28세 보장제에 이르기까지의 고씨 혈통이다. 근데 고열가 단군은 43세 단군 물리의 후손이고, 29세 단군 마휴부터는 32세(아들 추밀 즉위; 맏아들이 아니라는 의미)만 제외하고 모두 태자가 즉위했다. 혈족이라는 거다. 다 합하면, 1611년이다. 부여를 성씨로 삼은 백제 황제 역시 고구려의 주몽성제에게서 나온 고씨다. 부친 주몽성제의 장자 유리가 황위를 넘겨받자, 온조가 영토를 분할하면서 성씨까지 바꾸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5부는 실은 중토를 지배한 유목민족 중 하나의 사회구성이었던 것이다. 티벳고원 북부를 정복한 유목민족 가운데 5부로 구성된 종족이 있었고, 소노부에서 추장을 뽑다가 계루부에서 추장을 뽑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혈통(성씨)을 가리지 않고 처음에는 소노부에 속하는 사람에게서 추장을 뽑고 나중에는 계루부 사람 중에서 추장을 뽑았다.

흉노, 선비, 몽고...... 유목민족들을 보면 하나같이 국가를 세우기 전에 부족 통합부터 먼저 했다. 모용·걸복·독발·탁발은 선비의 부족이다. 5부는 고구려를 유목민족으로 둔갑시키기 위한 술책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고씨만이, 그것도 선제의 최근친자만이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고구려가 소노부와 계루부에서 왕을 선출할 수가 있는가.

발기가 소노부 3만호와 요동으로 달아나 후한의 요동 태수에게 군대를 빌렸다고? 다 헛소리다. 요동은 건국 당시부터 고구려 땅이다. 요동은 고구려 이전부터 조선의 영토고, 북부여의 영토였다. 요서조차 후한의 영토가 아니었다. 요서도 대무신열제 때 낙랑을 멸망시키고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

그 후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다. 백제는 진나라(265년~ 316년) 이전에, 후한 때부터 요서에 있었던 것이다. 발기는 요동이 아니라, 요서의 백제 태수에게 군대를 빌렸다.

연나부가 대대로 왕비를 배출했다고? 절대 권력을 가진 고구려 황제가 과연 한 집단에 국한해서 자신과 아들의 배우자를 골랐겠는가.

중토의 역대 정복민들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어서 강력한 왕권도 없었고, 왕권이 피라미드식으로 백성 개개인에까지 미칠 수도, 일원적 체제하에 동원할 수도 없었다. 고대 국가의 철저한 지배질서도 없었다. 그 결과, 유목민족들은 성 하나 없이 천막생활을 하며 제대로 된 문명 하나 보유하지 못한 채 떠돌 수밖에 없었다.

중국사를 대대적으로 날조한 것은 화하족 명이다. 명은 날조 역사 속에서 문명대국이었다. 우리나라가 문명대국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바꾸었기 때문에 오랑캐는 우리나라가 되어야 했다.

무엇보다 오랑캐로는 변변한 사회조직조차 없는 유목민이 적격이었다. 그래서 고구려는 수백 개의 성을 축조하고도 유목민족이 되어야 했다. 성 쌓는 유목민이 있을 수 있는가. 이리저리 이동하는 게 유목민이다.

중노가 어째서 역대 고구려 황제의 상상도를 그렸겠는가. 고구려를 유목민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유목민을 모델로 그린 게 분명한데, 그림 속의 인물들이 어찌나 못생겼는지 그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못생긴 것은 차치하고 그 쪼글쪼글하고 깊게 패인 주름하며. 그보다 많은 주름이 있는 사람들은 보지 못할 것이다. 도저히 그 그림에서 그린 자(성병예)의 애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고구려가 중국의 변방 민족? 제 민족으로 생각한다면 결코 그렇게 그리지는 못했다.

화하족은 농경민족이라고 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지난 2천년간 유목민족한테 정복당해왔다. (우리민족도 유목민이라니까, 5300년 내내 유목민에게 정복당한 셈이다.) 어떻게 한, 두 번도 아니고 2천년간 내리 우월한 농경민이 열등한 유목민족의 지배를 받고 살았을까. 우리나라 역사로 덧칠해서 농경민으로 둔갑했을 뿐이지, 실은 중노도 유목민이었다. 지금도 원중토에는 절대다수가 유목생활을 한다. 무엇보다 그 땅은 연간강수량이 450mm밖에 안되는 건조기후대다. 농경을 하려면 적어도 연간강수량이 600mm는 돼야 한다.

중토는 대대로 유목민에게 정복되었다. 그래서 문명대국 중국을 정복한 유목민은 중국에 동화되어 우수 문화민족으로 거듭나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날조 역사 속에서 고구려, 백제를 비롯한 우리나라는 중토를 정복한 미개 유목민족에게 문화를 전수받는 처지로까지 떨어져야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를 유목민족으로 둔갑시켰다는 사실은 유목민족의 문화적 수준이 극히 낮다는 것을 중국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화하족도 문화적 수준이 극히 낮았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조상 섬기기를 중시해서 조선 당시부터 고분을 만들어왔다. 배달시대에는 고인돌을 만들었다. 혜민국, 동·서대비원, 제위보, 구제도감은 서민을 위한 의료기관이었다. 혜민국은 고려가 서민의 질병 치료를 위하여 설치한 의료기관이고, 동·서대비원은 나라에서 운영한 의료구제기관, 제위보는 빈민, 행려의 구호와 치료를 맡아보던 기관이었다. 빈민의 구제와 질병의 치료하는 구제도감, 진제도감, 진제색 외에도 비상시에 설치해서 구빈과 구료사업을 하는 기관들이 있었다.

절대 창작은 없다고 했다. 고려도경의 자식이 병이 들었어도 돌보거나 약을 먹이지 않고 염(殮)을 할 때도 관에 넣지 않으며 시체를 들 가운데 버려 땅강아지, 까마귀와 솔개가 파먹는 대로 내버려둔 것은 지지리도 가난하고 미개한 중토의 풍습이었던 것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우글대고 살았던 저 땅에 무덤이나 만들 공간이 있었냐는 거다. 사람 살 집조차 지을 공간이 부족했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 저 땅은 다수의 여자와 다수의 남자가 한 집에서 뒤엉켜 살았다. 그러니 그 자식들 하며 얼마나 복작대고 살았을지 상상해보라. 늙은 부모를 갖다 버렸다는 고려장의 실체 역시 송장이다.

고려 사람들은 병이 나도 약을 먹지 않으며 귀신만을 섬겼다. 고려 문종이 처음으로 의술을 구하여 알게 되었다. 죄인들도 금만 바치면 죄를 면할 수 있었다.(고려도경)?

중국이 의료의 신으로 떠받드는 신농이 우리나라 배달 출신이었다. 신농 저 혼자 잘나서 미개 땅 중토의 의료를 개척한 게 아니다. 배달은 기원전 3898년 개천 당시부터 의료를 포함한 관직을 만들었다. 여기서 배달이 단순히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이행하여 형성된 나라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배달은 시베리아에 세워진 한국에서 유래하는 나라다.

5세기 초에 이미 의학 수준이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음은 일본의 의약품을 구수리라 부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인교 후왕(신라 식민지의 후왕이었다.)이 병들었을 때, 신라의 김파진이 건너가 완치시키자, 뛰어난 의술의 스승이라 해서 구수리(이건 일본어가 한국어에서 떨어져나간 10세기 이후에 바꾼 말이다.)라 불렀다. 지금도 일본에는 구수리라는 제약회사가 있다.

그리고 ‘귀신을 섬긴 건 주나라였다’고 중국 문헌에도 분명히 나온다. 우리나라가 귀신을 섬겼다면, 은, 주 말고도 진, 한도 귀신 섬기기를 행했다. 진은 우리나라 5제 중 3제를 제사지내고, 한은 우리나라 5제를 다 섬겼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경천애인은 한국 이래로 우리나라의 기본사상이지, 고작 5, 6세기에 살았다는 공구 사상의 기본이 아니다. 우리나라를 본받아 경천애인을 외쳤다는 공구도 귀신을 섬겼던가?

죄인들이 뇌물 바치고 빠져나오는 건 중국 역사책의 단골 소재가 아니던가. 한나라의 유방 역시 흉노의 왕비에게 뇌물을 안기고 간신히 빠져나왔다. 흉노에게 뇌물 바치다 망한 나라가 바로 한나라다. 한나라 왕도 수나라 왕도 제 딸을 뇌물로 주었다. 사자를 뇌물로 농락하는 일에 능해서 당 현왕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었던 안녹산도 있다. 그 때문에 당현왕은 왕성에서 쫓겨나 티벳고원 북부를 헤매는 신세가 되었다. 안녹산의 난 이후 정치적 동요와 경제적 혼란을 거듭하다 결국 망한 나라가 당이다.

“고려의 서민이나 백성들은 흙 침상에서 자며 토굴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에 눕는다.”(고려도경) 중노는 창작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토굴이 전통가옥이었던 것은 중노다.

티벳고원은 일교차가 극심한 지역이다. 겨울엔 춥고 여름에는 서늘하다는데, 그건 낮 얘기고, 밤에는 대부분 영하까지 떨어진다. 통상의 난방으로는 겨울밤의 혹한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니 가난한 대다수 송의 주민들은 토굴을 파고 그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생여진이 “방이 없고 땅을 파서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어 그 속에서 살며 수초를 찾아다녔으므로 언제나 정처없이 옮겨 살았”다는데 주목하자. 숙여진과 생여진이 분리되기 전, 다시 말해 중토에 살 때는 모든 예맥족이 그렇게 살았다. 예맥족이 혈거생활한 것도 추위를 막기 위해서였다. 중토에서는 다들 땅 파고 그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현재 티벳고원의 인구는 262만 명이다.(2000년 현재) 어째서 13억 중국 인구 가운데 고작 260만 명만 현중토의 8%를 차지하는 티벳고원에 살고 있는가. 기후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티벳고원이 부양할 수 있는 인구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수 때는 69호(혹은 76만호)가 있었다. 69만호라 해도 모계사회라서 천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토굴이 집단적으로 모여 마을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에는 아직도 그 당시의 토굴이 다수 남아 있다. 매몰된 지역이라 해도 건물이 들어선 적이 없는 땅은 지하에 아궁이와 흙침상이 보존되어 있다.

“임신 31년(B.C. 209) 진승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지러웠다. 이에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번조선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북부여기) 직후에 위만이 번조선을 가로챘으므로 티벳고원 북부만이 아니라, 남부에도 2백 년쯤 토굴 속에 아궁이와 흙침상을 만들고 살았다.

명이 건국하고도 20년이 지나도록 티벳고원 북부에서 그 거대인구가 복작댔다. 인간다운 삶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영토를 가로채고 그 위에 세워진 장안성, 5경, 5소경, 3경 등 장대한 궁궐과 수많은 호화 저택들을 다 차지했으니 망정이지, 오늘날까지도 집도 절도 없이 “흙 침상에서 자며 토굴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에 누워” 살 뻔한 한위노가 아닌가.

이 땅의 사학자들조차 고구려가 유목민이라고 주장하는 실정인데, 우리나라는 배달 개천 당시부터 농경민족이다. 배달, 조선을 계승한 고구려 역시 농경민족이다. 우리나라 영토가 동아시아다 보니까, 자연히 초원지대와 사막지대도 획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수많은 성을 쌓고, 정착생활을 하며 최고의 철기문화를 소유한 고구려가 유목민족으로 둔갑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 땅의 사학자들의 용한 재주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고구려가 영토에 대한 애착이 특별했다고? 동아시아 제1의 대국 백제에 의해 삼면(서압록강 이서, 황산강, 패수)과 2분의 1(한수 중류)이 에워싸여 있었던 고구려가 영토 확보에 사활을 걸었음은 당연하지 않은가. 고구려와 백제가 영토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것은 동아시아의 지배자 배달, 조선의 계승국으로서 동아시아를 지배해야 한다는 의식 혹은 사명 때문이었다. 옛날에는 지배자의 전제조건이 거대 영토를 갖는 것이었다.

옥저에 왕이 없어? 옥저는 왕국이다. “을묘 29년(B.C. 1806) 서옥저의 욕살인 고사침을 봉하여 왕으로 삼으셨다.”(단군세기)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의 손자다.”(태백일사)

옥저는 조선의 제후국이다. 제후국은 제후를 전제로 한다. 제후국은 제후에게 봉토를 주기 위해 만든 나라지, 나라를 관리할 사람이 필요해서 제후를 봉한 것은 아니다. 조선의 땅을 나누어 제후국으로 만들었는데, 조선과 풍속이 달라질 수 있는가. 신라만 해도 조선시대부터 면면히 계승되어온 화백과 화랑제도를 그대로 계승했다. 조선의 전통과 문화와 동일성을 유지했기에 한족이 될 수 있었다.


구한은 모두 삼신을 한 뿌리의 조상으로 삼고, 소도를 관리하고 관경을 관리하며 벌을 다스리는 것 등을 모두 다른 무리와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하나로 뭉쳐 화백을 하였다.(삼성기전 하편)


우리가 우리나라 역사라고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실은 화하족과 중토를 정복한 유목민의 역사였던 것이다. 이성계와 주원장의 거래에 따라 하나 남김없이 다 바꾼 것이다.


3) 신라는 고시씨의 후예다.


번조선이 민강(1차 서압록강) 이서에 있었기 때문에 무한 일대에서 건국한 신라가 번한의 후예라는 구당서의 기록은 사실이 아니다.

조선(진한, 진조선)이 대부여, 북부여, 고구려로 이어졌는데, 또 진한이 등장하고 사로국이 건국됐다고 한다. 이 진한은 진조선의 진한이 아니다. 후삼한의 진한도 아니다. 후삼한은 기준이 위만에게 속아 떠난 뒤, 오가의 무리들이 대장군 탁을 받들고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개마국(웅심국)은 북개마대령 즉 음산산맥의 북쪽에 있으며 구다국(독로국)은 북개마대령의 서쪽에 있는 나라다. 월지국은 구다국의 북쪽 500리에 있다.

후삼한의 변한, 진한은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고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북부여기)던 반면, 신라, 백제, 가야가 일어난 삼한은 “서로 다투고 싸워 왔고 세월이 오래되도록 서로 적대감을 풀지 못하였”(태백일사)다. 신라가 일어난 땅은 삼가라를 두고 싸운 3차 삼한의 진한이다.(태백일사) 진한 6부가 사로국이 되고, 신라로 국호를 변경했다.

신라는 황산강(양자강) 유역에서 건국했다. 일식기록으로 찾은 신라의 초기 도성은 무한이다. 신라는 3차 진한에서 출발한 나라고, 가야로 발전한 변한도 황산강 유역에 있었다. 진한과 변한이 양자강 하류에서 동서로 나란히 위치했던 것이다. 진한이 서쪽, 변한이 동쪽이다. 가야는 현남경을 수도로 했다. 마한은 진한과 변한 위쪽에 있었다.

황산벌 전투는 양자강 유역(황산강)에서 있었다. 백제가 한수 유역을 상실했다고 하지만 일부를 상실한 데 지나지 않는다. 고구려에 이어서 신라가 한수(황하) 유역을 차지했으므로 백제의 영토는 중국 동해안을 따라서 황산강(양자강) 유역까지 내려왔다. 삼국사기에도 삼국의 영토가 개의 이빨처럼 얽혀 있다고 했다. 중국 동해안은 마지막까지 백제 영토였다. 그래서 신라가 그대로 발해만으로 진격한다면, 배후공격의 위험에 놓이게 되므로 황산벌(중국 동해안)에서 전투를 벌여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흑치상지가 중국 대륙 동해안에서 활약했다. 임존성은 중국 대륙 동해안에 있었던 것이다. 백강 전투는 발해만에서 있었다. 군대를 파병하기에 너무나 멀어서 백제가 멸망하고 3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서 사이메이 여왕이 암살되는 우여곡절 끝에 왜는 지원군을 파병할 수 있었다. 백제 식민지 왜(倭)가 중국 남부에 있었다면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략했을 때, 왜(倭)는 백제와 함께 싸웠어야 한다. 3년이라는 시차가 절대 발생할 수 없다. 백제부흥 운동은 중국 동부와 발해만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삼국지 왜인조의 “대방에서 마한, 가야를 거쳐 왜에 이르는” 길은 해로가 아니라 수로다. 대방은 민강 이서에, 가야는 양자강 하류에, 왜는 가야 아래에 있었다. 마한은 가야와 신라 이북에 있었다. 마한은 동부여 및 백제의 땅이 되었다. 중토의 사람들은 금사강과 양자강을 따라서 이들 나라를 들락거린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의 후손이어서 성을 김씨로 하였다? 신라 노인들이 말하길 진나라가 망하여 그 유민들이 마한의 동쪽에 와서 살았다고 진한이라 했다는 이 엉뚱한 소리는 진한이 단제의 직접 통치지역임을 부정하기 위해 쓴 후한서 진한편의 날조기사를 그대로 베낀 헛소리다.

어째서 백제본기에 신라의 조상에 대한 기록이 있는가. 신라본기 맨 첫머리에 나와야 할 기사가 백제본기 맨 마지막 왕편에 기록됐다는 것부터가 정상이 아니다. 중국의 역사책을 보면, 날조사(의 일부)를 아무 데나 집어넣는다. 과연 김부식이 스스로 나눈 항목까지 무시할 정도로 여기저기 어지럽게 아무데나 썼겠는가. 김부식의 평론이 아니다.

위의 날조기사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진한은 마한 동쪽에 있다. 그 나라의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스스로 일컬어 말하기를 진나라의 부역을 피하여 한나라로 오자, 마한은 그 나라의 동쪽 경계지점을 할애하여 그들에게 주었다. 그들은 성책이 있으며, 그들의 언어는 마한과 달랐다.”로 바뀌었다. 후한서, 삼국사기에서는 진나라 유민이 왔고, 삼국지에서는 진나라를 피해 도망쳐 왔다.

땅을 나누어 같이 살아? 어느 세상에 제 땅을 스스럼없이 나누어주던가. 그 한 치의 땅 때문에 중토에서는 끝도 없이 싸우지 않았던가. 그래서 춘추시대에는 백 개 넘는 나라가 있었고 5호 16국도, 5대 10국도 있었다.

소호금천의 후손이라는 진나라 사람들은 진한이 아니라 중국 남부로 가서 왜가 되었다. 온몸에 문신하고 옷이라곤 “큰 천에 구멍을 뚫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쓰고 있”는 게 전부였다. 화하족의 전통복식이다. 성책은 무슨? 성책은 방어하는데 사용하는 거지, 왜노처럼 약탈로 살아가는 자들한테는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이다. 마한이 땅을 할애해주자, 진나라의 부역을 피해온 자들은 마한 사람보고 오지 말라고 성책을 쌓았다고?

이전에도 중토에서 도망쳐 나온 자들이 있었다. 진나라에 통일된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의 사람들이 마한 땅도, 진한 땅도 아닌, 번조선(번한) 땅으로 도망쳐왔다. 나라를 세운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호의에 기대어 번조선의 한 구석에서 살았을 뿐이다.



임진 31년(B.C. 209), 진승(진나라 말기의 농민 반란 지도자)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려웠다. 이에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의 백성(진나라에 병합된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땅의 사람들)들이 도망해서 번조선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의 운장에 갈라 살게 하고 장군을 파견하여 감독케 하였다.(단군세기)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의 백성들이 어째서 막조선도 아닌, 번조선으로 갔는가. 거리상으로 가깝다는 점도 있지만,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번조선이 진조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진조선은 단군이 다스리는 우리나라 중심지이라서 오랑캐를 들여놓아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한의 동쪽 땅을 떼어 진나라인에게 주고 진한이라 했다는 후한서, 삼국지의 날조기사를 본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 대륙에 우리나라와 중토가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국경선은 명확하다. 서로 뒤섞일 수가 없다. 중노는 한 치의 땅을 두고 백 개가 넘는 나라가 싸운 적도 있었다. 중국 대륙에 우리나라와 중토가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면, 삼국이 전투를 벌일 때마다 중국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다. 이 경우, 삼국이 서로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중토부터 정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국 대륙에는 삼국만 있은 게 아니라, 동부여, 낙랑, 가야, 옥저, 등 다수의 나라가 존재했었다. 중토는 우리나라에 비집고 들어올 수가 없었다.

진한의 남해안 살수 이남은 단군이 제후들에게 봉토로 주었다. 신라가 일어난 3차 진한은 단군왕검이 제후들에게 준 땅의 일부다.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남동쪽의 땅에 봉하니, 산하가 빼어나게 수려하며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이라 이름하고 낙랑홀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규원사화 단군기)


이 당시는 아직 열수 이남이 정복되지 않아서 남동쪽이라 함은 양자강 이북을 가리켰다. 회수 유역이 청구국이었던 것이다.


고시씨는 청구국으로 나아가 산천을 둘러보고 토지의 형세를 관찰하고 밭과 들녘을 개간하여 농업과 잠업을 일으켰다. 바람의 기운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오곡은 풍성하게 살찌니 백성들은 모두 가볍고도 따뜻한 옷을 입고 기름지고 훌륭한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모자를 쓰고 띠를 두르며 옷을 갖춰 입고 신을 차려 신는 등 자못 천하의 풍채가 있었기에 문무(文武)가 아울러 일어나게 되었다.


이 당시도 고시씨는 양자강 이북을 다스렸다. 앞의 말을 부연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군왕검에 복종치 않았던 양자강 이남은 얼마 뒤 부여가 평정했다. 설유의 난을 평정하고 나서, 그 전에 확보한 양자강 이남을 합쳐 제후들의 봉토를 조정했다. 봉토를 부여에게 준 부소에게는 고시씨의 봉토인 낙랑홀을 다스리게 하고, 고시씨에게는 양자강 이남을 주었던 것이다.


부여가 남이를 평정하니 열수의 남쪽은 완전히 천왕의 교화에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 까닭에 청구의 백성들이 점차 옮겨가서 살게 되었고, 홍수가 완전히 다스려진 뒤로는 남쪽으로 넘어가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이로서 남이의 사람들도 함께 신인의 교화에 물들어 마침내 그 풍속이 변화하였으니, 후의 진·변의 뭇 부족들이 모두 그들이다.


여기서의 진·변은 3차 진한, 변한이라고 했다. 고작 양자강 하류 유역을 가리킨다. 남이는 양자강 이남의 사람들로 남이가 진·변의 뭇 부족이라는 것은 좁은 한반도 남부에 삼한을 우겨넣을 때나 가능한 말이다.

“고시씨의 후예들만이 동남쪽에 넓게 거처하다가 더욱더 이동하여 변진의 뭇 부족들이 되었으니, 후에 삼한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규원사화) 고시씨의 후예들이 거처한 동남쪽은 양자강 하류 이북이고, 더욱더 이동한 곳은 양자강 이남이다. 남이가 곧 후대에 진·변의 뭇 부족들이 아니라 해도 신라가 고시씨의 후예인 것만은 틀림없다. 나중에 한나라 유민까지 가세한 진나라 유민들은 진, 변의 동남쪽을 파고들어와 중국왜가 되었던 것이다.

소호금천의 후예는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다. 사기에 보면, 소호금천의 후예라던 진나라가 전욱고양을 선조로 한다고 변신한다. 소호금천은 헌원의 아들이 아니고, 전욱고양은 헌원의 외손자가 아니라고 전술했다. 소호금천, 전욱고양은 헌원보다 앞서 살았다.

진나라가 모계혈통이라면서, 그 모계의 부(父)가 소호금천이 되고, 전욱고양이 될 수 있는가. 모계사회에서는 한 여자가 여러 남자를 거느리기 때문에 부를 확정할 수 없다. 중국의 모계사회에서는 다수의 여자와 다수의 남자간의 결합이라고 한다. 성씨 확정이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같이 유전자 검사라도 하지 않는 한, 절대 누구를 부(父)로 하는지 알아낼 수 없다. 누구 자식인지 모르니까, 소호금천의 자식도 되고, 전욱고양의 자식도 된다고 한 모양이다.

신라가 진나라 유민이 세운 나라면, 어떻게 삼국사기가 되는가. 이국사기지.

금성(무한)은 천년고도가 아니다. 신라는 고구려의 남진으로 중국 남부로 밀려나야 했다. 평로치청이 금성 근처까지 장악하자 신라 황제가 피난간 적도 있고, 신라 말기에는 후백제, 후고구려의 건국으로 또 다시 수도를 옮겨야 했다. 우리나라를 한반도로 축소하자, 신라의 수도를 옮길 만한 장소가 없었다. 낙동강을 신라와 가야가 분할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라는 가야 지역으로 천도한 적이 없다. 그래서 천년고도라고 날조한 것이다.

신라가 장안을 차지한 동안에는 장안에 도읍한 게 분명하다. 장안성은 동아시아의 지배자가 거주하는 제1 황성이었다. 당연히 신라도 동아시아의 지배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삼국유사에 “신라 전성시대 서울 안에 호수가 17만 8천 9백 36호”가 있다고 했다. 장안이 신라의 수도였다면, 몇 배는 더 많은 인구가 수도에 살았을 것이다.

신라로 간 연남생이 현낙양에 묻힌 것은 대진국이 장안성을 차지하기 전이었다. 의자제와 보장제를 꾸짖던 인물도 신라 황제 신문제다. 중국은 우리나라 역사책을 베껴 써도 너무도 철저히 베껴 온갖 것을 다 썼다. 하긴 우리나라 3황 5제도 베껴 3황 5제라 하고 제천의식까지 따라한 미개국이니.

고수, 고당 전쟁의 양 당사국은 고구려와 신라였다. 신라는 당에 구원을 요청한 게 아니라, 주력군이었다. 신라는 멸망의 위기에 처한 나라가 아니라, 고구려를 대신하는 대제국을 꿈꾸던 나라다. 이건 고구려 멸망 당시 신라가 한수(황하) 하류를 차지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당의 국력으로 7년간 전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고구려인, 백제인의 부흥운동으로 신라의 군사력이 분산되었기 때문에 그나마 당은 신라를 상대로 7년이나 싸울 수 있었던가. 그러나 속국 당이 감히 상국 신라에게 대들 수 있는가. “대책은 없고 단지 대국의 처분만 바랄 뿐이다”는 당이 신라에게 한 소리다. 신라는 7년이나 대든 나라에 이후 2백 년이나 지원할 그런 나라가 아니다. 같은 민족 고구려, 백제도 멸망시킨 나라가 아닌가.

백제부흥군한테도 연전연패하면서 인육을 먹으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당나라 군대를 신라가 구해주었다. “진지에 머물고 있는 주린 군사(당군)들이 아이를 바꿔 서로 먹는 일이 없게 하였다.”(삼국사기) 간신히 기아에서 빠져나온 소정방은 뒤도 안돌아보고 당으로 도망쳤다. “대군(소정방의 군대)이 철수한 후에 적신 복신이 강서에서 일어났다.”(삼국사기) 우리나라 사람들은 강서라는 지명을 우리나라에서 찾지 못하자, 강의 서쪽이라 풀이한다. 그러면 신라군은 강의 동쪽에 있었다는 말인가. 이 경우 강 반대편에서 일어났다고 하지 않나. 강서는 지명이다.

중국 동남부에 강서성이 있다. 그거 아니다. 지금의 행정구역이기 때문이다. 옛날에 강서라는 지명이 있었던 거다. 근데 남동부에는 없었다. 지명이 계속해서 밀렸기 때문이다. 강서는 발해만에 위치했다. 대군이라는 것도 당이 중국 내륙부에 웅크리고 있던 구질구질한 소국임을 김부식이 몰랐던 게 아니고, 주원장이 왜곡한 것이다. 또 백제부흥군이 200여성에서 일어난 걸 두고 한반도에는 200여성이 들어가지 않는다며 20여성으로 줄이는 사람까지 있다. 발해만과 중국 동부에는 다 들어간다.

당이 백제부흥군을 신라에게 떠넘긴 게 아니라, 신라가 당에 떠넘겼다. 백제부흥군이 결사항전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고구려는 연남생이 배신한 걸 알고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있었다. 백제부흥군을 그대로 두면 고구려로 진격하는 신라군이 배후공격의 위협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속국 당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해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이 어떤 나란가.

백제부흥군에 꼼짝없이 포위되어 어린아이를 잡아먹던 군대가 당나라 군대다. 그런 형편없는 군대이니만치 군기 빠진 군대를 당나라 군대라고 1300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까지 줄곧 불러오고 있다. 당군은 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해, 신라군은 고구려를 침공하는 동시에 백제부흥군까지 상대해야만 했었다.

그런 당이 고구려인을 끌고 가는 데는 잽쌌단 말이지? 상국 신라가 있는데, 속국이 고구려인을 끌고 갈 수 있는가. 고구려 유민 2만 8000여 호를 강제이주시킨 것은 신라였다.

후당 명종 때 권지강주사 왕봉규가 임언을 보내 조공했다고? 비록 신라 말기에 후삼국이 경쟁하고 있다고는 하나 한때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속국 당이 분해되어 생긴 후당에 조공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후당의 명종이 왕봉규를 회화대장군으로 삼았다고? 속국이 분해되어 생긴 나라가 상국 신라의 신하를 제 신하로 임명할 수 있는가. 후당 명왕이 왕봉규였다, 이사원이 아니라. 왕봉규는 장왕 이존욱의 양자라는데, 성이 갈렸는지 이극용(후당 태왕)부터 이름을 바꾼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신라는 멸망하기 직전에도 후당 왕을 회하대장군으로 임명한 것이다. 물론 중토에 들어선 나라들은 신라에 조공하는 한편으로 대진국에도 조공해야 했다.

신라 문무왕을 임해군공으로 봉했다고? 신라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대제국의 황제였다. 실제로는 신라 문무제가 당왕 이치를 군공에 봉했다. 고구려, 백제 멸망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당이 고구려, 백제 멸망 전쟁에 지원(?)하고 받은 대가는 이치가 신라의 군공으로 봉해진 게 전부였을 걸.

최치원이 관리로 있던 양주는 신라 땅이다. 최치원은 신라의 관리였다. 신라관, 신라방? 한반도에서 온 신라인이 머물던 곳이다. 물론 신라관, 신라방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중노가 역사날조하면서 바꾼 말이다. 현양주에 있는 고려관도 한반도에서 온 고려인들이 머물던 곳이다. 물론 고려관이라 부르지 않았다.

계림은 백제 땅이었다가 신라 땅(한반도의 계림은 이씨조선이 붙였다. 이씨조선은 가짜 단군릉에 가짜 기자묘까지 만든 나라다.)이 되었다. 그런 계림을 보고 “강은 푸른 비단띠를 두른 듯하고, 산은 벽옥으로 만든 비녀 같다”고 한 게 당인이겠는가, 신라인이겠는가.

새삼스럽게 밝힐 필요도 없겠지만, 고구려의 주 정복대상국은 티벳고원 북부에 사는 오랑캐들이 아니라, 백제와 신라를 비롯한 우리나라였다.

중국은 벌써 정복되었다. 조선상고사도 중노가 광개토경대훈적비의 문자를 깎아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시조 주몽성제 부분에 중국의 왕조로 날조한 한나라가 정복된 사실이 나와 있던 것이다. 전한 말부터 중국은 내내 우리나라의 속국으로 살았다. 물론 조선, 배달의 속국이기도 하다.

중국은 처음에 고구려의 속국이었다가, 백제의 속국(오, 월, 연, 제, 노)으로, 또 다시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다가 신라의 속국(수, 당)이 되어 고구려와 싸워야 했다. 수, 당이 신라편에 붙어 고구려 침공에 나선 것은 신라의 국력이 고구려와 버금갈 정도로 신장됐음을 말해준다. 신라가 여전히 소국이라면, 신라에 붙은 수, 당은 고구려에 의해 망할 각오를 해야 한다.

백제도, 고구려도 정복했다던 당이 약소국 신라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웠다? 누구라도 최약체국 신라부터 정복할 것이다. 수의 양광은 제 아비까지 죽이고 왕위에 오른 자다. 당의 이세민은 제 형제와 조카 수십 명을 죽이고 제 아비를 위협해서 왕위에 오른 자다. 그런 자들이 신라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울 수 있는가.

고구려 땅 500리가 뭐가 대단해서 반환을 거부한 신라가 “대책은 없고 단지 대국의 처분만 바랄 뿐이다”라며 전국토를 당에 내놓겠다며 매달리는 건 모순 아닌가. 누구나 500리를 반환하고 당당하게 사는 길을 택할 것이다. 500리를 반환하지 않아도 될 만한 대등한 국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반환을 거부했다. 당의 부당한 요구마다 거부하지 않고 다 들어주겠다는 신라의 대답에 이세민은 어째서 기뻐 날뛰지 않고 탄식했단 말인가. 신라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할 수 없어서 탄식한 거다. 고구려의 상대가 되지 못함에도 끝없이 파병할 수밖에 없었던 당의 신세(당은 신라에서 떨어져나가면 그 즉시 고구려에 정복될 수밖에 없었다.)를 한탄한 것이다.

무측천은 효소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애도하기 위하여, 2일간 조회를 하지 않았다. 일개 제후국의 왕이 죽었다고 정치를 이틀씩이나 중단하는가. 상국의 황제가 붕어했으니까, 조회를 중단한 거다. 수나라, 특히 당나라는 신라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살아간 비참한 속국이었다. 이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대등한 국력을 자랑했다. 그래서 수, 당은 기꺼이 신라의 속국이 되기로 자청한 것이다. 당현종의 이름이 흥광으로 성덕제와 같아서 융기로 고쳤던 것이다.

“그대 나라는 부인을 임금으로 삼아 이웃나라의 업신여김을 받으니 이는 임금을 잃고 적을 받아들이는 격이라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 신라는 선덕여왕 때 고구려에 버금가는 강국이었다. 여왕이라서 주변국들이 업신여겼다면 연달아 여왕이 등극할 수도 없다. 부인을 임금으로 삼은 것은 당이었다.

무측천은 이세민의 후궁으로 그 아들 이치의 부인이 된 여자였다. 당나라 내에서는 이치 대신 실권을 장악했지만, 수시로 거란과 말갈의 침입을 받았다. 자신의 친척을 한 명 보내 임금으로 삼겠다고 한 것은 고구려였을 것이다. 신라였다면 이치와 무측천이 신라에 붙지는 않았겠지.

황룡사 9층탑을 세우면서 같은 얘기가 또 나온다. 당나라 도인이 지장율사한테 “신라는 여자가 임금 자리에 올라 위엄이 없어 인접국가에서 가볍게 보고 침략이 빈번하니,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가 항복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역사를 뒤바꾸면서 날조자가 틀려 이세민의 대사로 배당했다는 걸 모르고 두 번이나 써먹은 것이다.

정말 신라가 타국에 기대 산 나라였다면, 절대 천년왕국을 건설하지 못했다. 건국되자마자 망했어야 한다. 한없이 당당하게 살았다고 날조한 수도 37년밖에, 당도 290년밖에 존속하지 못했다.

당이 신라보다 28년 먼저 망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신라에 의지해서 살던 당은 신라의 국력이 약해지자 더 이상 지원을 받지 못해 망한 것이다. 신라는 우리나라 왕조에서 세 번째로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조선, 배달 다음으로 긴 역사를 가진 왕조가 신라다.(고구려는 북부여까지 포함해서 9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다.)

신라는 동중국해와 황해를 건너서 한반도를 개척하고 왜열도까지 개척한 나라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일본열도(669년 왜열도에서 바뀐 이름)까지 식민지로 삼은 나라다. 이 땅의 사학자들이 폄하하는 것 같은 약소국이 절대 아니었다. 신라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으로 바뀐 것은 이씨조선에 들어와서였다. 이 말은 고려 시대까지 신라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근거가 없었다는 의미다.

어째서 신라를 당에 빌붙어 사는 약소국으로 날조했는가. 물론 당이 신라에 빌붙어 살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신라가 당에 의지해서 삼국을 통일한 약소국이어야 우리나라 영토가 축소되기 때문이다. 날조사는 창작이 아니라, 기존 역사를 바꾸고 축소한 것에 불과하므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 외에 마땅히 우리나라 영토가 줄어들었다고 손쉽게 날조할 수 있는 왕조가 없었다.


  4) 중국대륙의 유적은 그 땅에 있던 우리나라가      만들었다.


돈황석불은 고구려의 작품이다. 4∼6세기 경에 조성된 초기 굴의 본존불이 걸친 의복은 중국이 아니라 고구려 복식이다. 돈황석굴에 다양한 민족의 문화가 혼융되어 있는 것은 무역이 활발했던 탓에 서역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돈황석불이 있는 감숙성은 고구려와 대진국, 고려의 중심지였다. 고려의 영토 또한 천산산맥에서 흑룡강 너머에 이르렀다. 고려는 장안을 도읍으로 한 나라다.

돈황석굴에서 소조불상과 벽화 등의 불교미술품 외에 많은 고문서류가 발견되어 동서문화교류사나 중국 중부를 차지한 나라의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중국 중부를 차지한 나라가 어느 나란가. 고구려고, 신라고, 대진국고, 고려다. 티벳고원 북부의 한위노국이 아니다. 중국이 돈황석불을 제작하고 벽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고구려, 신라, 대진국, 고려에 제발 그림을 그리게 해달라고 사정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중국이 그럴 만한 시간이나 여유가 있었던가.

정말 티벳고원 북부를 나누어 차지한 5호 16국(실제로는 16국이 넘는다.) 중의 하나인 전진(351∼394) 따위가 돈황석굴을 제작할 수 있었겠는가. 43년 존속한 나라다. 그런 전진도 5호시대 왕조 중 가장 융성했다니, 중국이 어떤 나라인지 알 거다. 더구나 전진은 중토 서부에 있었다.

정말 위, 수, 송이 벽화를 제작할 수 있었겠는가.

티벳고원 북부를 촉, 오와 함께 분할한 위는 고작 40년간 존속한 나라다. 그 40년마저도 몇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던 나라다. 사마씨 세력이 커지면서 왕을 폐립하다가 결국 265년 사마염에게 왕위를 빼앗겨 멸망한 나라다. 고작 40년 동안 존속하면서 극도로 혼란한 와중에 22굴에 벽화를 그릴 시간은 언제 있었나.

고구려에게 망한, 우리나라 피지배종족 선비족이 세운 수는 581년에서 618년까지 겨우 37년간 존속했다. 그러나 이 수도 중국의 역사왜곡에는 여러 모로 쓸모가 있었다. 뻥 튀기 한 313만 3800명을 동원해 내리 3년 동안 고구려와 전쟁을 하고 그 때문에 양광이 살해되어 망한 나라다. 그뿐인가 신라 땅에다 대운하도 건설해야지, 고구려 땅에다 만리장성도 증축해야 했다. 그런 나라가 90굴에 벽화나 그리고 있을 수 있는가. 중노의 상상 속에서는 무지 바빴던 나라다.

송은 언제나 거란, 서하에게 격파당하느라 바빴다. 금한한테 수도가 함락된 것도, 상왕(휘왕)이고 왕(흠왕)이 납치된 것도 다 송이다. 휘왕·흠왕 뿐만 아니라 송 왕실에서만 3000여 명의 포로(실제로는 30명쯤 되겠지. 얼마나 대국이 되고 싶었으면, 창피한 것도 모르고 포로 수까지 뻥튀기하는 희한한 나라다.)를 잡아갔다. 그래서 북송이 종말을 고하고 남송이 시작된 게 아니라, 그냥 영토가 축소되었을 뿐이다. 수도 개봉을 빼앗겼으니까, 노강(양자강) 상류를 너머 북으로 갔다고 해야 하나. 송은 원래부터 중토 동쪽에 있던 나라로 끝까지 중토 동쪽에 있었다. 북송, 남송은 명이 역사날조하면서 붙인 이름이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남송(?)의 왕은 신하의 예를 갖추어 금나라 왕을 대하며, 은 25만 냥과 견포 25만 필을 세폐(세폐 역시 뻥튀기했다.)로 바친다는 조건으로 화의를 체결해야 했다. 그뿐이 아니다. 몽고의 침입 앞에 멸망당한 것도 송이었다. 과연 이런 나라가 103굴에다 벽화나 한가하게 그리고 있었겠는가. “흙 침상에서 자며 토굴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눕고, 신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던 나라가 송이다.

용문석굴의 주요 부분이 어째서 5세기 말에서 7세기 후반에 이르는 불교미술의 전성기에 조영되었겠는가. 고구려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대진국과 고려가 이어받아 만들었다.

당연히 그 지역을 지배한 나라가 만들지, 중노가 삼국의 영토에 석불을 만들어주었겠는가. 그럴 능력이 있으면, 티벳고원 북부 내에다 만들었다. 그나마 티벳고원 북부에는 문명이 없었다.

위서의 석로지에 따르면, 운강석굴이 사문통(종교장관) 담요가 당시 문성왕에게 석굴 조영을 주청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이른바 '담요 오굴'이라고 불리는 제16동에서 제20동까지가 460년대 초에 조영된 것이고?

북위가 대체 어떤 나라인가. 고구려인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기꺼이 왕비로 맞이한 나라다.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고구려인 실권자 고조를 죽이면서도 다른 고구려인에게는 손 댈 수 없던 무력한 나라다. 고조의 아들조차 출세에 지장이 없었다. 그런 북위가 중국 대륙 중심지를 떡하니 차지하고 거대한 석불을 제작할 수 있단 말인가. 그처럼 빌빌대던 북위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서북 인도·중앙아시아와의 문화적 교류 및 한국과 일본의 고대문화(일본의 고대문화는 바로 백제와 신라가 다 만들었다. 일본이 만든 건 하나도 없다.)를 만들어낸 아시아 문화 생성의 자취를 증명해 주는 중요한 유구”의 제작 주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운강석굴은 백제가 만들었다.

중노는 이성계가 한반도로 내뺀 1388년도 아니고, 고려의 지배층이 뒤따라 한반도로 이주한 1389년까지 티벳고원 북부도 벗어나지 못했다. 북위에 역사서 따위는 없다. 우리나라 역사를 분해해 중국의 왕조라고 부르는 진나라,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등에 열심히 배분한 거다.

경주 석굴암, 일본 법륭사 4불 정토도, 운강석불이라는 동양 3대 예술품이 모두 우리나라 작품이다. 1908년 잉글랜드의 스타인이 중국 돈황석실에서 발견하여 당시 세계 최고의 인쇄물로 평가되던 ‘금강반야바라밀경’도 중노가 아니라, 고구려의 계승국 대진국이 만들었다. 868년경, 중국 중부를 차지한 나라는 대진국(668∼926년)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 건국한 대진국(건국 당시는 후고구려)이 31년 뒤 평양성을, 결국 시베리아까지 차지하자, 신라의 영토는 중국 동부 및 남부, 동북아 남부로 축소됐다.

하남성에 있는 용문석굴은 신라의 작품이다. 675년경 제작했다니까, 백제도, 고구려도 멸망하고, 당과의 7년 전쟁(?)에서도 승리하고, 대진국은 아직 요서의 소국이었다.

일식관측지로 본 고구려 영토 천산산맥의 지맥인 극자리아(커즈리야)산의 한 협곡에 있는 고차(쿠처)의 석굴이 고구려 작품인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이 벽화 속에 묵으로 내리쓴 다량의 한문기록에 나오는 성씨도 우리나라 사람의 성씨다.

삼국도, 대진국도 멸망하고 명과 청이 우리나라 역사와 영토까지 다 가로챘는데, 중노가 삼국과 대진국의 유적과 예술품을 삼국과 대진국의 것이라 실토하겠는가, 제 것이라 우기겠는가. 고려의 문화재마저 제 것이라 우겼다. 중국의 3대 석불이라 우기는 돈황석불, 운강석불, 용문석불이 다 우리나라 작품임에도 우리나라가 미개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영향을 받았단 소리는 우리나라 아니면 세계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얘기다.


5) 고구려에 이르러서 능묘의 규격과 제도가 천하      의 으뜸이 되었다.


고구려에 이르러서 능묘의 규격과 제도가 천하의 으뜸이 되었다.(태백일사 신시본기)


이전 시대에는 우리나라 능묘의 규격과 제도가 천하의 으뜸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고구려의 능묘의 규격과 제도가 조선시대를 능가한다는 말이다. 물론 당대에도 같은 한민족인 백제, 신라를 능가했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정유 24년(B.C. 24년) 유화 부인이 돌아가셨다. 고구려는 호위병 수만으로 졸본으로 모셔와 장사지냈는데 황태후의 예로써 억지로 산 같은 능을 만들고는 곁에 묘사를 짓게 하였다.”(가섭원 부여기) 산 같은 천하 으뜸의 능묘는 우리나라가 만들었지, 중국이 만들지 않았다. 하긴 티벳고원 북부에서 산 같은 거대 무덤을 만들면, 사람들은 어디서 산단 말인가.

중국 문헌에 고구려가 돌을 잘 다룬다는 뜻이라고? 누가 돌을 잘 다룬다는 뜻으로 국호를 짓는가. 구려는 기원전 1236년에도 있었다.


을유 2년(B.C. 1236) 남국의 임금 금달이 청구의 임금, 구려(句麗)의 임금과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씨를 엄으로, 영고씨를 서 땅에 방고씨를 회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한반도에 고구려는 없었다. 고구려 고분으로 알려진 것은 전부 백제 고분이다. 배달시대부터 이미 4천년의 건축기술이 축적되어 있었기에 고분 제작 기술이 뛰어났던 것이다.

한서지리지에 “치우천왕의 능이 산동성의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 가운데에 있다”고? 신시 시대엔 능이나 묘를 쓰는 제도가 없었다.(태백일사 신시본기) 땅을 평평히 하고 장사지내는 자가 있고, 둘레에 박달나무, 버드나무, 소나무, 잣나무 등을 심어 표시했다. 자오지 한웅은 티벳고원의 공상(창도)과 탁록(라사)을 오가며 천하를 다스린 게 아니라, 삼청궁에서 짓고 천하를 다스렸다. 지도를 찾아봤더니, 산동성에 자오지 한웅의 능은 안보이고 가짜 공구묘는 표시되어 있었다.

진나라와 한나라 때 주민들이 10월이면 늘 산동성에 있는 자오지 한웅의 능에 제를 지냈다고? 진나라, 한나라 주민들은 티벳고원 북부에서도 동쪽에 살았다. 하기야 중국 남부에서도 살았다. 왜(倭)라고 해서.

“복희의 능은 지금 산동성 어대현 부산의 남쪽에 있다”고?(신시본기) 상국 배달에도 능과 묘가 없었거늘 어떻게 후진국 중국에 능과 묘가 있을 수 있는가. 복희는 자오지 한웅보다 800년이나 이전 사람이다. 배달 초기 사람인 것이다. 종이 위에서나마 복희의 능을 가지기 위해서는 티벳고원 북부에 표시해야 한다.

장안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당왕 이세민의 무덤이라고 날조한 소릉이 있다. 그러나 현장안은 고구려의 영토다. 소릉은 절대 이세민의 무덤이 될 수 없다. 이세민의 무덤은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겠지만, 이미 옛날에 저 북적대는 무수한 중노가 집을 짓느라 파헤쳐지고 사라졌을 것이다. 소릉은 고구려 황제의 능이다.

고구려 황제의 능을 이세민의 무덤으로 날조하는 거야 쉽다. 고구려 황제의 이름이 적힌 유물을 치우고, “당태종 이세민”이라 쓴 유물 몇 점만 갖다놔도 다들 이세민의 무덤이라 생각한다. 하긴 주원장이 역사를 바꾸면서 소릉을 이세민의 무덤이라 했겠지만. 유적에 조그만 유물 하나 날조해서 넣어두고, 유적 전체를 날조하는 것은 역사책을 날조하는 방법 다음으로 간단한 역사날조다.


환도산성 궁전터의 현존하는 건축 기초만 보아도 당시 고구려 건축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태왕릉에서 발굴된 금동제 유물들은 고구려인들의 빼어난 미의식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한위노의 말이다. 종놈이 종놈 신분에서 벌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것이다.

집안은 유리명제 이후로 백제 영토다. 온조가 백제 건국 당시부터 대흥안령산맥 이남을 떼어갔고, 대흥안령산맥 이북조차 고구려는 3, 4세기에 상실했다.

그런데 집안에서‘辛卯年 好太王’(신묘년 호태왕) 글자를 새긴 청동방울이 발굴될 수 있는가. 호우총 출토 유물에서도 호태왕(好太王)이라 새겨진 것으로 보아 이씨조선의 짓으로 의심되지만, 중노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다.

진시왕은 13세에 즉위하자마자 여산 기슭에 자신의 능묘를 만들기 시작해 죽을 무렵에 완성했다고? 정말 13세에 자신이 죽고 나서 묻힐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단 말인가. 이집트인 줄 아나. 더구나 즉위 후 9년 동안 여정의 생부 여불위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여정이 즉위할 때 진은 전국 시대의 일개 소국에 불과했다. 그런 나라가 8천의 병마용 및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에 이르는 거대 능을 만들 수 있는가. 여정은 북부여 단제 해모수를 알현할 능력조차 안돼 태산에 제사 드리는 것으로 단제의 신임을 받고자 한 보잘 것 없는 자다. 티벳고원 북부에도 여정의 무덤은 없을 것이다.

날조사에 의하면, 진나라 때 남흉노만 오르도스로 남하해 있었다고 했다.(몽고연표) 그러나 이 당시 중토를 황하 이남이라고 했다. B.C. 215년경, 진나라는 흉노를 토벌하고 만리장성을 쌓았다. 선비족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1세기 초로 요하 상류인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유목을 하고 있었다. 거란은 5세기 이래 시라무렌 유역에서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거주했다. 예맥족은 한반도 이북에 있었다. 돌궐은 6세기 중엽부터 200년 동안 몽고고원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위구르는 744년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몽고고원에서 활약했다. 그러므로 날조사에 의하면, 진나라 때 황하 이남으로 침입은 해도 진출한 이민족은 없는 셈이다. 견이·백이·적이·현이·풍이·양이 등은 夷에서 보듯 우리민족 즉 동이족이다. 예맥족이 실체인 서융은 서방의 이민족이라 얼버무렸다.

실사에서는 기원전 19세기에 예맥족이 캐시미르를 통해 중토로 들어오고, 남흉노가 기원전 4백 년경에 역시 타림분지에서 중토로 남하했다. 하지만 이들은 침입자라서 진나라가 병사로 동원할 수 없었다. 한무왕 이후에나 이민족에게 이겼다고 나오는데, 그건 고구려가 독립하려는 이민족을 정복한 것을 중국사에 갖다 붙였기 때문이다.

날조사에서 진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의 나라였다. 몽고족이나 투르크족 등의 유목민은 모두 우리나라의 속민이었다. 진시왕의 무덤이라면, 병용들의 “그 얼굴로부터 당시 사람들이 속해 있던 민족이나 출신지 등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성립할 수 없다. 실사에서 504년 고구려는 중국 대륙을 재정복했다. 여산릉과 병마용갱을 만들 당시, 고구려는 중국 대륙에 있는 모든 이민족에게서 병력을 차출할 수 있었다.

화하족은 미개하기 짝이 없었다. 화하족의 일파 중국왜의 경우, 3세기까지도 “큰 천에 구멍을 뚫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쓰고 있었다.”고 문헌에 기록되어 있지만, 실은 송도 마찬가지였다. 송(960-1279년) 때까지도 “흙 침상에서 자며 토굴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에 누웠”던 한위노다. “유녀도 많고, 남녀가 들에서 함부로 야합”했던 한위노다.(중노는 고려의 풍속이라고 날조했지만, 예맥족의 나라 이씨조선조차 성풍속이 극히 폐쇄적이었다. 미개 예맥족이 아름다운 성풍속을 가졌을 것 같은가. 이씨조선은 중토를 제외하면 대한민국 다음으로 문란한 나라였다. 그런 이씨조선의 성풍속조차 극히 폐쇄적이라고 평가받는다.)

진시왕의 무덤이라 날조한 여산릉은 동연대인 북부여 단제의 능이라기보다는 고구려 황제의 능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에 이르러서는 능묘의 규격과 제도가 천하의 으뜸이 되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어느 황제의 능인가. 주몽성제는 티벳고원 북부와 중국 동남부를 제외한 동아시아 전체를 고구려 영토로 편입시켰지만, 졸본(장안)에서 눌현(낙양)으로 천도했다. 다시 장안(평양성)으로 천도한 황제는 장수홍제호태열제다. 부친 광개토경호태황이 동아시아를 정복했다 하나, 아직 요서도, 황산강 이남도 백제 영토였다. 여산릉과 8천의 병마용은 성인남자 3백만을 동원한 것으로 추산된다.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 요서와 황산강 이남을 차지한 문자호태열제 12년 이후 고구려는 최전성기를 누렸다. 문자호태열제 12년 이전에 고구려 인구는 2천만 명, 이후는 4천만 명 수준이다. 문자호태열제의 재위 기간은 27년이다. 백제 식민지 왜 후왕의 예에서 우리나라에 3년상의 전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대빈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백제는 고구려에서 나왔다. 3년상은 고구려, 백제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장례 전통으로 보여진다. 30년은 고구려가 여산릉과 병마용갱을 만드는데, 충분한 기간이다.

여산릉을 항우가 함양을 점령했을 때 파괴했다고? 고구려 황제의 능을 파괴한 것은 신라다. 항우가 아니라 문무제가 30만 명을 동원하여 30일 동안 능 안의 보물들을 날랐음에도 다 나르지 못했던 것이다. 진시왕이 다른 나라를 멸망시킬 때마다 그 나라의 궁전을 그림으로 그리게 한 다음, 수도 함양에 재현하게 했다고? 그래서 위수에 비친 궁전들의 그림자가 장관을 이루었다고? 위수에 비친 궁전들은 배달시대로부터 우리나라 역대 왕조가 줄줄이 만들어왔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나서 끌려간 고구려 지배층은 장안에 들어서기 전에 당왕 이세민의 무덤에 절을 해야 했다고? 금성에 들어서기 전에 신라 무열제의 무덤에 절을 해야 했다. 이치, 아니 무측천이야 신라를 피해 제 땅을 찾아오는 고구려인을 두 팔 벌이고 맞이했다. 그때부터 고구려인들에 의해 ‘천하고 작은 생선 선비족’ 당의 문화가 발전이라는 걸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장안성을 모방한 당의 왕성도 만들었다.

그러다 고구려인들이 티벳고원 북부의 땅 한쪽을 차지하고 제나라를 세웠다. 고구려 유민이 세운 제나라 영토가 18km²밖에 안되는 것도, 당이 워낙 작은 나라고, 당으로 간 고구려인이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진, 한시대의 남자복식을 보면, 포, 곤의 , 고, 관, 건, 책이 있고, 신발류는 리가 있다. 진, 한시기의 남자들은 포를 즐겨 입었다. 한 시대는 수구를 축소시켰는데 그것을 '거'라고 하였고 큰 옷소매는 '몌'라고 하였다. 곤의는 벼슬아치들이 평상시 한가로이 거할 때 입었으며 포의 양식과 비슷하다. 두식은 관, 건, 책이 있다. 신발양식인 이는 고두의 비단신으로 위에는 꽃무늬를 수놓았다. 여자복식의 종류로는 심의, 규의, 단의 유군이 있다.”(http://www.anseo.dankook.ac.kr/~ahns/cul-67.html, 중국의 복식사) 우리나라 역사책을 베낀 중노조차 한 시기에 다양한 복식이 있었고, 시대에 따라 복식이 달랐다고 날조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나라는 오직 한 시대에 한 가지 옷만 입었다고 주장하는지 모르겠다.

“중국은 예로부터 예악의 나라요, 의관의 나라로서, 한 이래로 역대의 복식제도가 모두 역대사서나 문헌 가운데서 발견되고 있다”고? 중국이 의관의 나라가 아니었기에 산해경은 우리나라보고 “군자국 사람들은 의관을 했다”고 한 것이다. 중국이 의관을 했다면, 의관한 우리나라를 설명하면서 의관을 했다는 말을 쓸 필요가 없다. “신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은 중노와는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에 기록할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명이 우리나라 역사를 모두 베껴 중노 왕조에 배당했기 때문에 “한 이래로 역대의 복식제도가 모두 역대사서나 문헌 가운데서 발견”(중국의 복식사)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기원전 2700년, 자오지 한웅 당시부터 갑옷을 만들어 입었다.


당시의 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함부로 활과 돌의 힘을 믿고 갑옷의 쓸모조차 알지 못했는데, ...... 싸울 때마다 매양 패했다. 운급헌원기라는 책에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라고 치우를 말한다”라고까지 썼으니, 역시 그 낭패한 모습이 대단했음을 상상해 알 것이다.(태백일사 신시본기)

뒤에 헌원은 여러 차례 싸웠으나 매양 졌으므로 원한은 더욱더 커졌다. 군대를 일으켜 우리 신시를 본 따 크게 병기와 갑옷을 만들었다.(태백일사 신시본기)


그런데 배달을 계승한 고구려는 갑옷도 입지 않고 출전한 반면, 우리나라를 따라 갑옷을 모방한 중노는 갑옷이 필수품이었단 말인가. 정복국가라는 말을 듣는 고구려가? 의관을 하고 말에 올라 행진하는 광경의 벽화는 화랑들의 사열하는 모습이다.

“원화는 여랑을 말하고 남자는 화랑이라 하며 또 천왕랑이라고도 하니, 단제의 명령에 의하여 까마귀 깃털이 달린 모자를 하사받는다”(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화랑은 조선시대 이래로의 우리나라의 확고한 전통이었던 것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이 고구려 벽화라고 주장하는 그림에는 흰색 옷에 검은 관을 쓰고 있다. 화랑의 복식이 분명한데, 신이경에는 “동방에 사람들이 있는데, 남자들은 모두 붉은 옷에 흰 띠를 두르고 검은 관을 쓰고 있으며 여자들은 모두 채색한 옷을 입고 있다”고 했다. 화랑의 복식이 시대에 따라, 나라에 따라 옷 색깔을 달리한 것이다.

신이경은 한나라 때부터 황당무계한 문장을 동방삭(B.C. 154년~ B.C. 93년)의 이름을 빌려 쓰는 경우가 많다는 이유로 진(晉)나라 이후의 위작으로 알려져 있다. 진은 서진(265∼316)과 동진(317∼419)으로 나누어진다. 위작이라 한들, 중국의 25사만큼 위작이겠는가. 위작이라 한들, 저 구절까지 위작이겠는가. 신이경이 동방삭의 작품이면, 붉은 옷에 흰 띠를 두르고 검은 관을 쓰고 있던 남자들은 북부여인이고, 진나라 때의 작품이면, 고구려인이다.

화랑이나 화백제도는 신라의 제도가 아니다. 신라 역시 우리나라 땅에서 일어난 나라라, 조선의 제도를 계승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단제의 적자인 고구려에 화랑제도가 없었을까. 고구려가 계승한 북부여에도 화랑제도가 있었다. 그래서 해모수는 천왕랑이라 하고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용광의 칼을” 찼던 것이다. 원래 해모수는 약관 23세에 단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단제가 되어서도 예전 화랑의 복식을 그대로 입었던 것이다. 화랑과 화백제도는 우리나라 고유의 풍속이었던 것이다.

옛날에는 일국의 복식사가 어디에 나와 있는가. 그림이다. 그림은 책이나 벽화, 조상, 인물화가 전부다. 그런데 이성계가 중국 대륙을 화하와 예맥한테 주었다. 중국 대륙의 고분은 모두 우리나라 것이다. 그 고분에 있는 벽화 속의 인물들 역시 우리나라 사람이다. 이성계는 우리나라 역사와 중국사를 바꾸었다. 중국 역사책에 나오는 그림은 바로 우리나라 역사책의 그림이다. 중국이 역사를 바꾸면서 우리나라 왕조 대신 중국 왕조를 집어넣은 것이다. 진시왕의 병마용갱으로 도용당한 갑옷 입은 8천의 도용들은 고구려 전투병의 모습이다.

신이경에는 “동방에 사람들이 있는데, 남자들은 모두 붉은 옷에 흰 띠를 두르고 검은 관을 쓰고 있으며 여자들은 모두 채색한 옷을 입고 있다”고 했다. 북부여 혹은 열국 시대에 우리나라는 붉고 채색한 옷을 입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땅은 타림분지에서 흑룡강 너머까지다. 나라마다, 지방마다 복식이 똑같지는 않았다. 백제고분은 한반도와 그 이북의 복식일 뿐이다. “대저 구한의 족속은 나뉘어 5종이 되고 피부의 색깔과 모양을 가지고 구별을 짓게 되었다. 그 풍속은 모두다 실제에 임하여 이치를 찾고 일을 계획하여 그것이 옳음을 구함이 같았다.”(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구한의 강역은 대진국 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유적 발굴은 이성계의 날조 지명에 따라서 평양에 있으면 평양성, 개성에 있으면 고려의 궁궐 하는 식이다. 역사를 바꾼 이씨조선은 증거조작 차원에서 온갖 것을 다 바꾼 나라다. 평양성은 못 지어도 거대 성곽 유적을 두고 평양성이라 우기는 것은 이씨조선도 할 수 있다.

한백겸은 1607년에 평양성 외성을 조사해 그림까지 그렸다. 1607년에는 요수(서압록강)가 상건하였다. 청이 발해만의 장성을 차지하기 전이다. 이른바 병자호란, 정묘호란도 일어나기 전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가 동압록강을 중심으로 일어났다고 했으니까, 이씨조선은 처음부터 현평양을 평양이라 날조했다.

신라가 석굴암을 중국 대륙에 만들었다면, 이씨조선은 석굴암도 파괴되었다고 날조했을 것이다. 황룡사도 옮겨올 수 없었기에 몽한의 침입으로 불탔다고 했다. 신라의 중심지는 대륙에 있었는데도 이 땅의 사학자들은 한반도에는 없던 신라의 유적들을 세세하게 잘 만들어낸다. 황룡사 및 9층탑 모형. 확실히 멋있었다. 그러나 황룡사가 아니다. 석굴암과 불국사는 한반도에 있었어도 황룡사 및 9층탑은 중국 대륙에 있었다.

공민왕릉(?)에는 왕릉임을 증명할 어떠한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씨조선의 종묘 건물 구조와 제례의식을 기록한 종묘지에 공민제가 나오는 걸 보면 이성계가 공민왕릉에 주목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공민제가 노국공주의 죽음을 슬퍼하고 정치를 방치해야 고려의 국운이 쇠퇴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평양에다 사기파편과 벽돌조각 몇 개 넣어두고 가짜 기자묘를 만든 이씨조선이 아닌가.

고분과 궁궐은 옮겨올 수 없었지만, 비를 날조하고 한반도의 석탑을 삼국사에 등장하는 석탑이라 날조하는 것은 간단하다. 멸실된 고려칙판대장경은 송이 만들었다고 날조하면서도 남아 있는 팔만대장경은 송에 주지 않고 애써 챙겨서 한양까지 가져왔다. 칙판대장경이 현존하지 않자 금한의 침입으로 사라졌다고 날조했다.

하남성에 동주시대의 곡물창고는 없었다. 진조선의 곡물창고다. 합비는 신라의 토산함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미개 화하족이 티벳고원 북부에서 나온 이후 삼국지의 무대로 둔갑시켜 동비와 서비가 합쳐진다며 합비라 붙였다. 신라가 만든 절은 조조가 군사훈련을 했다는 명교사로, 고려가 만든 절은 송의 포청천 사당이라고 날조한 포공사로 바뀌었다. 그냥 이름만 붙이면 서비, 동비, 합비가 되고, 명판만 갖다 붙이면 명교사가 되고, 포공사가 된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중구의 조상을 만들어 전각 내에 떡 하니 갖다 놓았다.

고려 때까지 우리나라는 수백 개의 절을 지었다는데, 한반도에는 절이 얼마 없다. 그래서 이 땅의 사학자들은 이씨조선이 유교를 국교로 내세운 나라라 절을 모두 부숴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런 이씨조선조차 임진왜란 때까지 불국사를 확장하느라 열성적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불국사가 소실되자, 즉각 복구와 중건을 하기 시작해 2백 년 동안 40여 차례에 걸쳐 이씨조선 정부가 나서 중수했다. 제 나라 유적을 때려 부수는 나라는 없다. 그 어떤 미개국이라 해도. 그래서 일본조차 백제와 신라가 만들어준 수많은 문화재를 소중히 여긴다.

고려청자? 중노는 청자 따윈 만들 줄도 몰랐다. 중국 대륙에서 만든 것도 다 고려청자다. 좁디좁은 한반도마저 지방마다 풍습이 다르고, 문화적 차이가 있듯, 동아시아 끝에서 끝까지를 영토로 가진 고려가 지방마다 문화적 차이가 있는 건 당연하다.

당은 거대한 능을 세울 능력조차 못됐다. 삼국의 전쟁에 끼어들어 전력만 극심하게 소모하고 땅도 한 줌 못 얻었다. 연남생(천남생)이 달려간 곳은 당이 아니라, 신라다. 망명자가 과연 티벳고원 북부의 오랑캐 당으로 가겠는가, 중국 동부 및 남부를 지배하는 고구려에 버금가는 황제국 신라로 가겠는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 연남생에게 고작 식읍 3천호? 우리나라를 소국으로 날조했기 때문에 줄인 것이다. 3만호는 주었다.

문무제는 왜 대왕암에 묻혔는가. 고구려인의 부흥운동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그 해에 대진국(후고구려)으로 건국됐다. 761년에는 평로치청까지 건국했다. 현재의 대왕암에는 유골 조각 하나 없다던데, 중국 동부에 있지 않을까. 의자제나 보장제가 끌려간 나라도 신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