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 할 만한 과거가 아니라서 또 보는 사람들의 심기가 혹시나 상 할까 해서 쓰려 하지 않았던 이야기 지만 이런 인생도 있으니 난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자위의 기회도 될 수있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쓴다. 내가 태어난 곳은 하늘만 삐꼼 보이는 첩첩산중의 어느 깡촌이다. 동네라고 30여호 사는데 변변한 논뙤기 마저 없으니 화전 밭따라 이리저리 흩어져 살고 있었다. 당시의 화전민의 양곡 사정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이 어려운 때라 보리고개란 말 조차도 할 수가 없던 시절이니 그고생은 가히 짐작 하리라. 산속의 다람쥐나 토끼,이름 모를 새들도 우리 보다는 잘 먹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난 이런 시절에 이런 곳에 태어 났으니 나면서 고생을 지고 나온 셈이다. 내 태어나던 해 대지로 나가서 돈을 벌어 데릴러 오겠다는 말씀만 남기고 아버지는 훌쩍 집을 떠나셨단다. 그날 이후 젖먹이인 나를 키우시며 집안 살림을 도 맡아 사시는 어머님의 고생은 삶이 아니라 고행이었다 한다. 집 떠나시고 소식 한자 없던 아버지가 딱 오년 되던 해에 돌아 오셨다. 난 낮가리를 했고 이런 아들이 서운 하셨던지 눈길 한번 주시고는 다음날 다시 집을 떠나셨다. 우는 어머님이 왜 우는지는 몰라도 나도 덩달아 목 놓고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로 부터 10달 후 동생이 태어 났다. 남 동생이다. 그리고 또 5년이 흐를 즈음 아버지가 돌아 오셨는데 그때는 많이 아퍼서 오셨다. 집에 오셔서는 매일 누어 계시더니 몇달 후 돌아 가셨다. 그리고 얼마후 난 계집애 동생을 볼 수가 있었고 그 아이가 몸도 가누기 전 어머님이 돌아 가셨다. 부모님이 두 분 다 단신이시라서 일가 친척 하나 없는 나는 그때부터 막내 동생을 업고 젖 동냥을 다녀야 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나는 학교는 그만두고 때론 들로, 때론 이웃집으로 아주머니들 뒤를 종졸 따라 다니며 막내동생의 젖 동냥을 다녔는데 오직 동생 생각에 체면 없이 졸르는 통에 구박도 수도 없이 받았다. 난 다행이 나이에 비해 체격이 커서 금방 어른 일을 도울 수가 있었다. 어느날 옆집 아저씨가 일을 잘한다며 부탁이 있음 말 하라고 하시길래 병아리 두마리만 달라고 했더니 봄이 되면 두마리를 줄테니 열씸이 일하라고 해서 나무도 해오고 장작도 패서 드디어 이듬해 두마리를 받았다. 난 기뻐 나를 것 같았다. 이제 이 병아리를 잘 키우면 내 동생들에게 계란으로 반찬을 만들어 줄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벅차 한 숨을 못 잤다. 밤새 닭장을 만들고 동이 트기 무섭게 막내동생을 업고 병아리에게 모이를 주러 갔다. 그러나 이게 무슨 악운이란 말인가. 동생을 등에 업고 걷다보니 발걸음이 불안해서 그만 한마리를 밟아 죽이고 말았다. 동생들이 있어 울지는 못했으나 나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다. 한참을 망연자실하여 섰던 나는 "그래! 그래도 다행히 한 마리가 있으니 잘 키워서 새끼를 늘리면 될 꺼야." 하면서 처음 낳는 알을 부화시켜 새끼를 늘리고 담 것부터 멕이기로 맘을 먹었다. 그러고 여러달 후! 내 먹을 밥을 받아 먹고 자라던 병아리가 동네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먹어대더니 어느새 커다란 닭이 되어 버렸다. 알을 낳을 때가 된 것이다. 옆집 닭보다 더 큰 것 같았다. 매일 아침 눈 뜨면 쏜살 같이 닭장부터 달려 갔다. 그러나 훼치는 소리만 우렁찻지 내가 그리도 고대 하던 알은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그러기를 여러 날 옆집 아저씨에게 달려 갔다. 이윽고 우리집에 오셔서 닭장을 보시고 하신 한 말씀에 난 그만 쓰러졌다. "이놈아! 이건 숫닭이로구만! 숫닭은 알을 못낳지! 저런 쯧쯧쯔.... . . . . 이 얘기는 진짜로 거짓하나 안 썩인 내가 만들어 낸 실화다.
슬픈 과거
자랑 할 만한 과거가 아니라서
또 보는 사람들의 심기가 혹시나 상 할까 해서
쓰려 하지 않았던 이야기 지만 이런 인생도 있으니 난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자위의 기회도 될 수있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쓴다.
내가 태어난 곳은 하늘만 삐꼼 보이는 첩첩산중의 어느 깡촌이다.
동네라고 30여호 사는데
변변한 논뙤기 마저 없으니 화전 밭따라 이리저리 흩어져 살고 있었다.
당시의 화전민의 양곡 사정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이 어려운 때라
보리고개란 말 조차도 할 수가 없던 시절이니 그고생은 가히 짐작 하리라.
산속의 다람쥐나 토끼,이름 모를 새들도 우리 보다는 잘 먹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난 이런 시절에 이런 곳에 태어 났으니 나면서 고생을 지고 나온 셈이다.
내 태어나던 해 대지로 나가서 돈을 벌어 데릴러 오겠다는 말씀만 남기고
아버지는 훌쩍 집을 떠나셨단다. 그날 이후 젖먹이인 나를 키우시며
집안 살림을 도 맡아 사시는 어머님의 고생은 삶이 아니라 고행이었다 한다.
집 떠나시고 소식 한자 없던 아버지가 딱 오년 되던 해에 돌아 오셨다.
난 낮가리를 했고 이런 아들이 서운 하셨던지 눈길 한번 주시고는
다음날 다시 집을 떠나셨다.
우는 어머님이 왜 우는지는 몰라도 나도 덩달아 목 놓고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로 부터 10달 후 동생이 태어 났다. 남 동생이다.
그리고 또 5년이 흐를 즈음 아버지가 돌아 오셨는데
그때는 많이 아퍼서 오셨다.
집에 오셔서는 매일 누어 계시더니 몇달 후 돌아 가셨다.
그리고 얼마후 난 계집애 동생을 볼 수가 있었고 그 아이가 몸도 가누기 전
어머님이 돌아 가셨다.
부모님이 두 분 다 단신이시라서 일가 친척 하나 없는 나는
그때부터 막내 동생을 업고 젖 동냥을 다녀야 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나는 학교는 그만두고 때론 들로, 때론 이웃집으로
아주머니들 뒤를 종졸 따라 다니며 막내동생의 젖 동냥을 다녔는데 오직 동생 생각에
체면 없이 졸르는 통에 구박도 수도 없이 받았다.
난 다행이 나이에 비해 체격이 커서 금방 어른 일을 도울 수가 있었다.
어느날 옆집 아저씨가 일을 잘한다며 부탁이 있음 말 하라고 하시길래
병아리 두마리만 달라고 했더니 봄이 되면 두마리를 줄테니 열씸이
일하라고 해서 나무도 해오고 장작도 패서 드디어 이듬해 두마리를 받았다.
난 기뻐 나를 것 같았다.
이제 이 병아리를 잘 키우면 내 동생들에게 계란으로 반찬을 만들어 줄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벅차 한 숨을 못 잤다. 밤새 닭장을 만들고
동이 트기 무섭게 막내동생을 업고 병아리에게 모이를 주러 갔다.
그러나 이게 무슨 악운이란 말인가.
동생을 등에 업고 걷다보니 발걸음이 불안해서 그만 한마리를
밟아 죽이고 말았다.
동생들이 있어 울지는 못했으나 나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다.
한참을 망연자실하여 섰던 나는
"그래! 그래도 다행히 한 마리가 있으니 잘 키워서 새끼를 늘리면 될 꺼야."
하면서 처음 낳는 알을 부화시켜 새끼를 늘리고 담 것부터 멕이기로 맘을 먹었다.
그러고 여러달 후!
내 먹을 밥을 받아 먹고 자라던 병아리가 동네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먹어대더니
어느새 커다란 닭이 되어 버렸다.
알을 낳을 때가 된 것이다.
옆집 닭보다 더 큰 것 같았다.
매일 아침 눈 뜨면 쏜살 같이 닭장부터 달려 갔다.
그러나 훼치는 소리만 우렁찻지 내가 그리도 고대 하던 알은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그러기를 여러 날 옆집 아저씨에게 달려 갔다.
이윽고 우리집에 오셔서 닭장을 보시고 하신 한 말씀에 난 그만 쓰러졌다.
"이놈아! 이건 숫닭이로구만! 숫닭은 알을 못낳지! 저런 쯧쯧쯔....
.
.
.
.
이 얘기는 진짜로 거짓하나 안 썩인 내가 만들어 낸 실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