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권리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시민이 가지는 권리의 경계는 무엇인가? 정부는 나의 자유를 어느 정도까지 보장해야 하는가? 이러한
의문들은 누구든지 한번쯤은 생각해볼 것이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권리에 대해서 명확한 선을 긋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그리고 그중 하나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밀고 당기는 힘의 조율일 것이다. 작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그 중 국가의 권력에
대해서, 그리고 시민이 주장해야만 하는 권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시민에게 부여된 권리와 권력자에게 부여된 권력,
‘시민의 불복종’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현안인 시민과 정부의 관계에 대해서 사색에 잠기면서 읽으면 좋은 고전 클래식 작품이다.
‘시민의 불복종’이 시사하는 것은 권력과 권리라는 것들에 대한 우리들의 계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우리 모두이고 따라서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우리 모두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정부라는 존재의
권력이다. 정부가 있음으로써 우리들은 법의 비호 아래 생활해 나가고 여러 가지 혜택들을 제공 받고 있다. 그리고 정부는 여러
가지 혜택을 부여한 대가로 시민에게 국가에 대한 의무라는 이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너무 비대해져
우리들의 자유를 해치고 권력을 남용한다면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시민의 불복종’은 작자가 살고 있었던 사회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 준다. 권력으로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키고 시민들은 그 폐해에 대하여 무관심한 태도를 보일 뿐 아무도 이견을 내놓지 않는
타락한 사회를 말이다. 작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우리사회에서 권리와 권력에 무관심한 현대인들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준다.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는 작자의 주장은 우리들의 양심에 일침을 가한다. ‘이래도 되는 것이냐’고 말이다.
작자가 주장하는 것은 ‘작은 정부’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은 그가 이 책을 출간했을 시기의 사회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아직 법과 제도가 제대로 정비되지 못하였고 권력의 남용과 시민의 무관심이 사회적으로 팽배한 상황이었다. 특히 노예 제도와
멕시코 전쟁이라는 정책은 권력의 남용을 드러내 준다. 정부가 비대해지고 시민들의 무관심이 지속되면서 악법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또한 정부는 악법에 대한 개선책을 내놓지 않고 잘못된 방향으로 권력을 사용하였다. 데이비드가 작은 정부를
주장하는 요지는 비대해진 정부 때문에 이러한 악법이 생긴다면 최소한의 간섭만을 행하는 작은 정부를 지지한다는 것이다.
‘시민의 불복종’에서 나타나는 작자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정부가 비대해짐으로써 악영향을 끼친다면 작은 정부로 돌아가 보는 것도
하나의 좋은 선택안이다.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우리나라의 4대강 사업에 대한 정부의 일관적인 방향성이 멕시코 전쟁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복지예산과 교육예산을 삭감하고 몇 십조에 이르는 국가적인 규모의 사업을 국민의 의견을 듣지 않고
정부가 주도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는 전쟁은 정부의 권력이 비대해지고 시민이 권리를 제대로 주장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예산이 아주 커다란 대규모 사업이나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전쟁은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진행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정부의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됨으로써 이러한 폐해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여당만의 인원으로 모든 정책을 수렴할 수 있어서
지금은 3년 째 의견 조율 없이 예산안이 통과했다. 이것은 권력의 집중이 야기한 폐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설을 읽으면서 감탄한 것은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과 과거의 미국이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는 것이다. 과거의 미국도 국민의
무관심이 잘못된 정책을 야기하였고 현재의 우리도 정치권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투표일이 되면 놀러
나가거나 아니면 방에서 쉬기만 할뿐 투표를 하는 사람이 과반수를 넘지 못하는 것이 현재의 추세이다. 투표라는 자신이 정치에 의견을
낼 수 있는 권리를 자신 스스로가 방치하는 것이다. 자신의 권리를 유기함으로써 생기는 피해는 자신이 입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권리는 타인이 지켜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고 거기에 마땅한 책임을
지고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때 비로소 우리들이 정당한 권리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바꿔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닌 자신 스스로가 말이다.
하지만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작자는 정부의 폐해에 대한 개선책으로서 시민들에게 불복종을 호소하고 있다. 정부란 곧
시민들의 힘이 모여 권력을 형성한 집단일 뿐 그 구성원인 시민이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힘을 잃고 시민들의 요구에
귀기울여준다고 말이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대화와 타협이 없는 불복종은 사회에 불협화음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불복종이라는 것은 정부에 대한 마지막 대항책일 뿐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길 수 없다. 만약 누구든지 불복종을 외친다면 국력이
쇠퇴하고 그 영향이 시민들에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국가란 유기적인 관계이므로 그 속에서 불협화음이 생긴다면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미국은 건국 초기이므로 아직 체계가 완벽히 정립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우리나라처럼 민주화의 역사가
비교적 짧은 국가에서 모든 것이 완벽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이다. 나는 불복종으로 개혁을 이루기보다는 대화와 타협, 그리고
끝없는 조정을 통하여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부를 이룩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이것은 백 년, 이백 년으로 이룩하기는
힘들지만 조금씩 개선해 나간다면 확실히 진전을 보일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국민의 권리와 권력을 조율한 외국의 한 예를 들자면
스웨덴 국회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법과 제도를 정비하였고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투명하고 공정한 국회를
형성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우리 사회에 적용시킬 수 있는 대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의 폐쇄적인 국회가 아닌 개방적인 국회를
만들고 나와 우리 이웃들이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우리가 정치권에 의견을 낼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여 소통하는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대화와 타협을 할 수 있기에 비로소 인간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제도를 적용시키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하지만 한 번의 극단적인 개혁보다는 점진적인 타협이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에는 더 효율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화와
타협, 그리고 끝없는 협의가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정부를 적으로 보고 저항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생의
동반자로서, 그리고 소중한 가족으로서 소통을 함으로써 나의 의견을 반영시켜 나가는 것이다. 국가와 정부에 대한 무조건적인
불복종보다는 최후의 보루로서 남겨진 불복종만이 우리의 사회를 더 전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의 권리 추구와 불복종에 대하여 '시민의 불복종'을 읽고
자신의 권리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시민이 가지는 권리의 경계는 무엇인가? 정부는 나의 자유를 어느 정도까지 보장해야 하는가? 이러한 의문들은 누구든지 한번쯤은 생각해볼 것이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권리에 대해서 명확한 선을 긋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그리고 그중 하나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밀고 당기는 힘의 조율일 것이다. 작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그 중 국가의 권력에 대해서, 그리고 시민이 주장해야만 하는 권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시민에게 부여된 권리와 권력자에게 부여된 권력, ‘시민의 불복종’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현안인 시민과 정부의 관계에 대해서 사색에 잠기면서 읽으면 좋은 고전 클래식 작품이다.
‘시민의 불복종’이 시사하는 것은 권력과 권리라는 것들에 대한 우리들의 계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우리 모두이고 따라서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우리 모두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정부라는 존재의 권력이다. 정부가 있음으로써 우리들은 법의 비호 아래 생활해 나가고 여러 가지 혜택들을 제공 받고 있다. 그리고 정부는 여러 가지 혜택을 부여한 대가로 시민에게 국가에 대한 의무라는 이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너무 비대해져 우리들의 자유를 해치고 권력을 남용한다면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시민의 불복종’은 작자가 살고 있었던 사회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 준다. 권력으로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키고 시민들은 그 폐해에 대하여 무관심한 태도를 보일 뿐 아무도 이견을 내놓지 않는 타락한 사회를 말이다. 작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우리사회에서 권리와 권력에 무관심한 현대인들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준다.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는 작자의 주장은 우리들의 양심에 일침을 가한다. ‘이래도 되는 것이냐’고 말이다.
작자가 주장하는 것은 ‘작은 정부’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은 그가 이 책을 출간했을 시기의 사회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아직 법과 제도가 제대로 정비되지 못하였고 권력의 남용과 시민의 무관심이 사회적으로 팽배한 상황이었다. 특히 노예 제도와 멕시코 전쟁이라는 정책은 권력의 남용을 드러내 준다. 정부가 비대해지고 시민들의 무관심이 지속되면서 악법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또한 정부는 악법에 대한 개선책을 내놓지 않고 잘못된 방향으로 권력을 사용하였다. 데이비드가 작은 정부를 주장하는 요지는 비대해진 정부 때문에 이러한 악법이 생긴다면 최소한의 간섭만을 행하는 작은 정부를 지지한다는 것이다.
‘시민의 불복종’에서 나타나는 작자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정부가 비대해짐으로써 악영향을 끼친다면 작은 정부로 돌아가 보는 것도 하나의 좋은 선택안이다.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우리나라의 4대강 사업에 대한 정부의 일관적인 방향성이 멕시코 전쟁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복지예산과 교육예산을 삭감하고 몇 십조에 이르는 국가적인 규모의 사업을 국민의 의견을 듣지 않고 정부가 주도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는 전쟁은 정부의 권력이 비대해지고 시민이 권리를 제대로 주장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예산이 아주 커다란 대규모 사업이나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전쟁은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진행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정부의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됨으로써 이러한 폐해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여당만의 인원으로 모든 정책을 수렴할 수 있어서 지금은 3년 째 의견 조율 없이 예산안이 통과했다. 이것은 권력의 집중이 야기한 폐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설을 읽으면서 감탄한 것은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과 과거의 미국이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는 것이다. 과거의 미국도 국민의 무관심이 잘못된 정책을 야기하였고 현재의 우리도 정치권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투표일이 되면 놀러 나가거나 아니면 방에서 쉬기만 할뿐 투표를 하는 사람이 과반수를 넘지 못하는 것이 현재의 추세이다. 투표라는 자신이 정치에 의견을 낼 수 있는 권리를 자신 스스로가 방치하는 것이다. 자신의 권리를 유기함으로써 생기는 피해는 자신이 입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권리는 타인이 지켜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고 거기에 마땅한 책임을 지고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때 비로소 우리들이 정당한 권리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바꿔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닌 자신 스스로가 말이다.
하지만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작자는 정부의 폐해에 대한 개선책으로서 시민들에게 불복종을 호소하고 있다. 정부란 곧 시민들의 힘이 모여 권력을 형성한 집단일 뿐 그 구성원인 시민이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힘을 잃고 시민들의 요구에 귀기울여준다고 말이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대화와 타협이 없는 불복종은 사회에 불협화음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불복종이라는 것은 정부에 대한 마지막 대항책일 뿐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길 수 없다. 만약 누구든지 불복종을 외친다면 국력이 쇠퇴하고 그 영향이 시민들에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국가란 유기적인 관계이므로 그 속에서 불협화음이 생긴다면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미국은 건국 초기이므로 아직 체계가 완벽히 정립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우리나라처럼 민주화의 역사가 비교적 짧은 국가에서 모든 것이 완벽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이다. 나는 불복종으로 개혁을 이루기보다는 대화와 타협, 그리고 끝없는 조정을 통하여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부를 이룩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이것은 백 년, 이백 년으로 이룩하기는 힘들지만 조금씩 개선해 나간다면 확실히 진전을 보일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국민의 권리와 권력을 조율한 외국의 한 예를 들자면 스웨덴 국회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법과 제도를 정비하였고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투명하고 공정한 국회를 형성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우리 사회에 적용시킬 수 있는 대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의 폐쇄적인 국회가 아닌 개방적인 국회를 만들고 나와 우리 이웃들이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우리가 정치권에 의견을 낼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여 소통하는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대화와 타협을 할 수 있기에 비로소 인간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제도를 적용시키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하지만 한 번의 극단적인 개혁보다는 점진적인 타협이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에는 더 효율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화와 타협, 그리고 끝없는 협의가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정부를 적으로 보고 저항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생의 동반자로서, 그리고 소중한 가족으로서 소통을 함으로써 나의 의견을 반영시켜 나가는 것이다. 국가와 정부에 대한 무조건적인 불복종보다는 최후의 보루로서 남겨진 불복종만이 우리의 사회를 더 전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