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록새록 나는데 너무너무 어른들이 어색하다. 훌쩍 커버리고 몰라보게 달라진 우리 세자매를 보며
어른들은 모두 "네가 첫째고, 네가 둘째고, 네가 셋째라?" 하며 저희 세자매에게
경상도 사투리로 말도 걸어주시고 음식 많이 먹으라며 오히려 우리를 위해주셨다.
장례식장에서 하루밤을 보내고 다음 날 화요일. 어른들이 깨워서 할 수 없이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밥을 부랴부랴 먹고 그렇게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짐을 챙기고 외할아버지 탈승할 시간.
전날 친척들이 손을 꼭 잡으며 "참 속상하시겠어.." 하면서 위로의 말을 건네줄때도
할머니는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 하면서 그렇게 오히려 당신이 위로를 해드렸지만
탈승할 시간이 가까워오고 할아버지 관을 보자마자 할머니는 울음을 터뜨리셨다.
이모들과 삼촌들, 그리고 나도 할머니의 그 울음을 모른척 눈감아 주고 바삐 움직였지만
영결식장에서 결국 모두 훌쩍이며 울음을 터뜨렸고, 나도 엄마의 눈물을 보자마자 결국 울어버렸다.
어릴때 겨우 몇 번 봤을까... 나보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별로 없는 동생들은
영결식장에서도 울지 않았다. 오히려 다리떨고있는 동생 내가 때리기까지.
그러다가 그 관은 할아버지의 밭에 묻히기로 했고, 다같이 차로 이동하던 도중
외할머니는 창밖을 보시며 가시는 내내 우셨다.
"영감 보고싶다 영감 미안하다 먹고 싶은거 많이 못사줘서 미안하다~ 나도 금방 따라갈게, 기다려라"
하시면서 이모들과 삼촌들, 손녀들의 가슴을 후벼팠고,
나도 막내이모 팔짱을 끼고 이모의 눈물을 닦아주며 또 옆에서 같이 울었다.
밭에 도착해서 할아버지를 땅에 묻을때 마음은 아프지만 애써 감추며 눈물을 감추던
할아버지의 일곱째 딸 우리 엄마와, 거의 쓰러질 지경으로 울며 다리 힘이 풀려가면서도
할아버지 묻는거 봤던 이모,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삼촌들.
입을 막고 추운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너무 우는 막내이모를 달래주다가 결국 나도
이모를 부둥켜 안고 엉엉 울었고, 영결식장에서도 울지 않았던 두명의 동생들도 그 슬픔을 알고는 고개 숙여 울었다.
추운 날씨 모닥불에 의존한 채 그렇게 탈승을 마치고 묘지까지 세워지는 것을 보고난 후
외갓집에 간 친척들은 할아버지에 관한 말은 아무도 하지 않았지만,
돌아가신 어르신의 부재를 가슴 깊이 숨기며 웃음으로, 술로 위로를 했다.
제일 많이 울었으면서도 조카들한테 달려와 말재주로 정말 많이 웃겨주었던 막내 이모도,
큰 소리 뻥뻥 쳐서 어릴때는 나도 맨날 무서워했던 막내 삼촌도, 늘 보기만해도 무서웠던 큰이모도,
어른들의 행동에 서운함을 느껴 울던 내게 다가와 위로해주던 형부도,
그리고 나 어릴때 나의 놀이기구나 다름없었던 큰 삼촌도, 그리고 그 외의 이모들과 이모부들, 그리고 삼촌들.
어린 우리 세자매가 가서 괜히 방해만 되고 그랬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내색없이 다 챙겨주셨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살아 생전에 커피를 사발로 드실만큼 커피를 굉장히 좋아하시는 분이셨고, 사탕을 이리저리 보따리로 가지고 계실만큼 단 것을 좋아하셨다. 늘 할머니에게 회초리로 건들며 장난을 걸어 다투기도 하시고, 어린 외손녀들 보는데도 할머니와 싸우시기도 하시고, 철없는 어린 손녀들 회초리로 다독이시는 엄한 할아버지기도 하셨다.
귀가 안들리셔서 뭐라 말하면 안들린다 하시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말씀을 드려야 그제서야 웃으시며 어~ 하셨던 할아버지.
늘 진지만 드시면 방에 홀로 들어가 커피를 사발로 타서 드시고, 사탕을 후식으로 먹는 단것 좋아하시는 분이셨어도, 어린 손녀들 먹고 싶다고 하면 주저없이 사탕 봉지를 까서 하나씩 두개씩 꺼내주시던 분이셨다. 드라마를 그렇게 좋아하셔서 늘 진지만 드시고 오시면 tv에 열중해도 밭일과 자신의 할일은 끝까지 빠짐없이 하시던 그런 분이셨다.
오랜만에 놀러 온 어린 귀여운 외손녀들 집에 간다고 아침부터 분주하면 벌써 가냐며 핀잔을 주시면서도 그 서운함을 숨기지 못하셨고, 집에 간다고 들뜬 손녀들 신발 신고 현관을 나서면 방에서 나와 무릎 튀어나온 내복을 입고서도 가는 손녀들 바라보시던 분이셨다.
위독하다고, 할아버지 병원에 입원해 계셔서 엄마 문경에 와있다고 이런 말을 들어도 좀 어떠시냐고, 괜찮아지셨냐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던 아직도 어리고 철없는 아이에 불과했던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나서 왜 좀 더 연락 자주 할것을 하고 후회했을까.
왜 이제와서 또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지만 글씨쓰면서 울어보기는 또 처음이지만,
영정사진에 할아버지 얼굴은 볼때마다 늘 마음이 아팠다.
추운 날씨에 먼 곳까지 와서 그래도 할아버지 돌아가셨다고 3일동안 학교 빼먹고 와서
3일동안 고생하면서 있어준 손녀들이 고마우셨는지 또 3일밖에 못있어 못내 아쉬우셨는지
광주로 떠나는 수요일 날 아침 손녀들 쓰라며 용돈 9만원을 주셨다.
이제 고등학교 졸업하고 사회인 되는 조카 쓰라며 엄마 몰래 내 손에 5만원을 쥐어주시며
"너 혼자 쓰래이~" 하는 이모도, "엄마는 더 있다 갈거니까 너희들 먼저 광주 가 있어라"
하셨던 엄마도 딸들 나눠쓰라며 용돈을 쥐어주셨다.
터미널까지 눈길에 가야하는 아빠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차로 친히 데려다 주셨던 막내 삼촌.
터미널에서 버스 기다릴때 아빠 몰래 나한테 다가와 동생이랑 같이 쓰라며 3만원을 주셨다.
나 있는 3일동안 그렇게 잔소리만하고 어리다는 이유로 방구석에 쳐받아두고 나오지 말라해서
늘 미웠던 삼촌이었지만, 광주 간다고 떠난다는 그 전날 저녁부터 어린 조카들 있는 방에
들락날락 하시며 눈 한번씩 꼭 마주치고 가시고, 그 날 아침에도 밥먹는데 들어와 사진 찍고,
거의 4년만에 뵙는 외할아버지, 그리고 영정사진
안녕하세요~^^ 전 전라도 광주에 사는 이제 곧 스무살 되는 여자입니다~
늘 눈팅으로 재미있는 톡톡만 보다가
3일동안 외갓집에서 있었던 저의 안타까운 일과를 들려드리려구요^^..
별건 아니고 조금 우울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별거 아니네~ 하지 마시고
그냥 읽어주세요^^..
생각나는대로 적어서 무슨 말인지 이해 안되실 수도 있어요....ㅠㅠ
------------------------------------------**********************
2006년 2월,
이모 결혼식을 마지막으로 외갓집을 가지 않은지 4년 거의 다됐던 날
병상에 누워 계시다고, 위독하시다는 소리 소문을 엄마를 통해 들었어도
너무 멀어서, 시간이 안된다는 핑계같지도 않은 핑계로 외갓집 발도 안들이고
연락 한번 안하다가 2010년 12월 26일 외갓집에 홀로 계신 엄마에게 외할아버지
돌아가셨다는 엄마의 힘없는 연락을 받았고, 외갓집으로 오라는 엄마의 말에
알겠다고 말하고 바로 담임선생님께 연락을 드려 학교 빠지는 것을 허락을 받았으며,
아빠와 함께 터미널을 타고 눈길을 달려 경상도 문경을 갔을때는
외갓집이 아니라 문경 제일 병원이었으며, 간 곳은 장례식 장.
양복을 입은 아빠와 장례식장 분위기 차림같지도 않은 복장으로 가자마자
우릴 맞이해 준 엄마는 축 쳐져 있었다. 그래도 웃으면서 장례식장으로 들어가자마자
외할머니는 웃으며 반겨주시며 제일 먼저 달려간 나의 손을 꼭 잡으시며 "많이컸네~" 하며 웃으셨고,
9명의 이모들과 삼촌들, 그리고 이모부들도 모두 너희 왜 왔냐, 잘왔다~
가서 절하고 밥부터 먹으라며 우릴 반갑게 맞아주셨다.
4년의 공백은 너무나 잔인했다. 어릴때는 마냥 장난도 잘치고 했었던 어른들이었는데 얼굴들이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데 너무너무 어른들이 어색하다. 훌쩍 커버리고 몰라보게 달라진 우리 세자매를 보며
어른들은 모두 "네가 첫째고, 네가 둘째고, 네가 셋째라?" 하며 저희 세자매에게
경상도 사투리로 말도 걸어주시고 음식 많이 먹으라며 오히려 우리를 위해주셨다.
장례식장에서 하루밤을 보내고 다음 날 화요일. 어른들이 깨워서 할 수 없이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밥을 부랴부랴 먹고 그렇게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짐을 챙기고 외할아버지 탈승할 시간.
전날 친척들이 손을 꼭 잡으며 "참 속상하시겠어.." 하면서 위로의 말을 건네줄때도
할머니는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 하면서 그렇게 오히려 당신이 위로를 해드렸지만
탈승할 시간이 가까워오고 할아버지 관을 보자마자 할머니는 울음을 터뜨리셨다.
이모들과 삼촌들, 그리고 나도 할머니의 그 울음을 모른척 눈감아 주고 바삐 움직였지만
영결식장에서 결국 모두 훌쩍이며 울음을 터뜨렸고, 나도 엄마의 눈물을 보자마자 결국 울어버렸다.
어릴때 겨우 몇 번 봤을까... 나보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별로 없는 동생들은
영결식장에서도 울지 않았다. 오히려 다리떨고있는 동생 내가 때리기까지.
그러다가 그 관은 할아버지의 밭에 묻히기로 했고, 다같이 차로 이동하던 도중
외할머니는 창밖을 보시며 가시는 내내 우셨다.
"영감 보고싶다 영감 미안하다 먹고 싶은거 많이 못사줘서 미안하다~ 나도 금방 따라갈게, 기다려라"
하시면서 이모들과 삼촌들, 손녀들의 가슴을 후벼팠고,
나도 막내이모 팔짱을 끼고 이모의 눈물을 닦아주며 또 옆에서 같이 울었다.
밭에 도착해서 할아버지를 땅에 묻을때 마음은 아프지만 애써 감추며 눈물을 감추던
할아버지의 일곱째 딸 우리 엄마와, 거의 쓰러질 지경으로 울며 다리 힘이 풀려가면서도
할아버지 묻는거 봤던 이모,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삼촌들.
입을 막고 추운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너무 우는 막내이모를 달래주다가 결국 나도
이모를 부둥켜 안고 엉엉 울었고, 영결식장에서도 울지 않았던 두명의 동생들도 그 슬픔을 알고는 고개 숙여 울었다.
추운 날씨 모닥불에 의존한 채 그렇게 탈승을 마치고 묘지까지 세워지는 것을 보고난 후
외갓집에 간 친척들은 할아버지에 관한 말은 아무도 하지 않았지만,
돌아가신 어르신의 부재를 가슴 깊이 숨기며 웃음으로, 술로 위로를 했다.
제일 많이 울었으면서도 조카들한테 달려와 말재주로 정말 많이 웃겨주었던 막내 이모도,
큰 소리 뻥뻥 쳐서 어릴때는 나도 맨날 무서워했던 막내 삼촌도, 늘 보기만해도 무서웠던 큰이모도,
어른들의 행동에 서운함을 느껴 울던 내게 다가와 위로해주던 형부도,
그리고 나 어릴때 나의 놀이기구나 다름없었던 큰 삼촌도, 그리고 그 외의 이모들과 이모부들, 그리고 삼촌들.
어린 우리 세자매가 가서 괜히 방해만 되고 그랬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내색없이 다 챙겨주셨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살아 생전에 커피를 사발로 드실만큼 커피를 굉장히 좋아하시는 분이셨고, 사탕을 이리저리 보따리로 가지고 계실만큼 단 것을 좋아하셨다. 늘 할머니에게 회초리로 건들며 장난을 걸어 다투기도 하시고, 어린 외손녀들 보는데도 할머니와 싸우시기도 하시고, 철없는 어린 손녀들 회초리로 다독이시는 엄한 할아버지기도 하셨다.
귀가 안들리셔서 뭐라 말하면 안들린다 하시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말씀을 드려야 그제서야 웃으시며 어~ 하셨던 할아버지.
늘 진지만 드시면 방에 홀로 들어가 커피를 사발로 타서 드시고, 사탕을 후식으로 먹는 단것 좋아하시는 분이셨어도, 어린 손녀들 먹고 싶다고 하면 주저없이 사탕 봉지를 까서 하나씩 두개씩 꺼내주시던 분이셨다. 드라마를 그렇게 좋아하셔서 늘 진지만 드시고 오시면 tv에 열중해도 밭일과 자신의 할일은 끝까지 빠짐없이 하시던 그런 분이셨다.
오랜만에 놀러 온 어린 귀여운 외손녀들 집에 간다고 아침부터 분주하면 벌써 가냐며 핀잔을 주시면서도 그 서운함을 숨기지 못하셨고, 집에 간다고 들뜬 손녀들 신발 신고 현관을 나서면 방에서 나와 무릎 튀어나온 내복을 입고서도 가는 손녀들 바라보시던 분이셨다.
위독하다고, 할아버지 병원에 입원해 계셔서 엄마 문경에 와있다고 이런 말을 들어도 좀 어떠시냐고, 괜찮아지셨냐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던 아직도 어리고 철없는 아이에 불과했던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나서 왜 좀 더 연락 자주 할것을 하고 후회했을까.
왜 이제와서 또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지만 글씨쓰면서 울어보기는 또 처음이지만,
영정사진에 할아버지 얼굴은 볼때마다 늘 마음이 아팠다.
추운 날씨에 먼 곳까지 와서 그래도 할아버지 돌아가셨다고 3일동안 학교 빼먹고 와서
3일동안 고생하면서 있어준 손녀들이 고마우셨는지 또 3일밖에 못있어 못내 아쉬우셨는지
광주로 떠나는 수요일 날 아침 손녀들 쓰라며 용돈 9만원을 주셨다.
이제 고등학교 졸업하고 사회인 되는 조카 쓰라며 엄마 몰래 내 손에 5만원을 쥐어주시며
"너 혼자 쓰래이~" 하는 이모도, "엄마는 더 있다 갈거니까 너희들 먼저 광주 가 있어라"
하셨던 엄마도 딸들 나눠쓰라며 용돈을 쥐어주셨다.
터미널까지 눈길에 가야하는 아빠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차로 친히 데려다 주셨던 막내 삼촌.
터미널에서 버스 기다릴때 아빠 몰래 나한테 다가와 동생이랑 같이 쓰라며 3만원을 주셨다.
나 있는 3일동안 그렇게 잔소리만하고 어리다는 이유로 방구석에 쳐받아두고 나오지 말라해서
늘 미웠던 삼촌이었지만, 광주 간다고 떠난다는 그 전날 저녁부터 어린 조카들 있는 방에
들락날락 하시며 눈 한번씩 꼭 마주치고 가시고, 그 날 아침에도 밥먹는데 들어와 사진 찍고,
"둘째는 예쁘게 생겼고~ 막내는 귀엽고~ 첫째는 의젓하게 생겼다~" (참고로 제가 첫째 입니다...)
하면서 말도 걸어준 삼촌이 고맙기도 했다.
오랜만에 온 조카들 어색할텐데도 말 걸어주고 장난 걸어 주었던 모든 분들.
그리고 이제 9명의 자식들만을 바라보고 의지해야 할 외할머니, 고맙고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개그끼로 어린 처제들이랑 놀아주느라 피곤하셨는지 아침까지 곤히 자고있어서
저 간다고 인사 드리지 못한 형부도 나중에 꼭 뵙고, 저를 알지만 저는 모르는 한나언니, 꼭 한번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들은 언니를 잊고 살았는데 언니는 저희를 기억하시고 저희가 누구냐는 형부에게 저희를 소개 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살아 생전 그 어린 날 같이 했던 기억들 잊지 않을거고 마지막까지 봤던 할아버지 얼굴 잊지 않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