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원수(兵馬元帥) 강이식(姜以式)은 국내성(國內城)에 있던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불러 함께 서북변의 방비태세를 살펴본 뒤 그를 데리고 궁궐에 들어갔다. 편전(便殿)에 들어가 영양태왕(嬰陽太王)을 알현한 강이식은 태왕에게 을지문덕을 소개했다.
“폐하, 여기 이 청년은 국내성에서 소형으로 재직하는 을지문덕이라고 합니다. 아직 젊은 나이지만 폭넓은 시야와 사물을 궤뚫어 보는 통찰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폐하께서 곁에 두시고 중용하신다면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울 만한 인재입니다.”
영양태왕이 을지문덕을 유심히 살펴보니 훤칠한 키에 번뜩이는 까만 눈이 인상적이었고, 긴 눈썹이 학자와 같은 인상을 풍기게 하는 훤칠한 미장부(美丈夫)였다. 태왕은 을지문덕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를 그윽히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많은 대신들이 여전히 수나라와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이에 을지문덕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소신이 이미 접수한 정보에 의하면 수국(隨國)은 이번에 우리 나라에 사신을 보내기 전에 이미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산동(山東)의 내주(來州)에서는 병선(兵船)의 건조가 마무리되었고, 장안(長安)과 탁현(琢縣)의 군기고(軍器庫)에는 신병기들이 가득 쌓여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한다 한들, 저들은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쳐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에 대한 대비를 소흘히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반드시 싸워 이겨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영양태왕의 곁에서 시립하고 있던 고건무(高建武)가 서슬 푸르게 을지문덕을 꾸짖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얕은 생각을 떠벌린단 말이냐? 아직 백제와 신라의 위협이 가시지 않은 마당에 수나라의 대군을 상대할 수는 없다. 먼저 수나라와 화친을 하여 서변을 안정시킨 다음에 남방을 제압하는 것이 상책이다.”
고건무는 태왕이 자신보다 강이식을 신임하는 것이 못마땅한 참이었기에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애송이가 나서서 잘난 체하는 꼴을 두고 보지 못했다.
하지만 고건무의 꾸지람을 듣고도 을지문덕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대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깨진 이후로 신라와 백제는 서로 반목하느라 미처 북방으로 눈을 돌릴 겨를이 없습니다. 신라는 예전 진흥왕(眞興王)이 통치하던 시절이나 흥(興)하였지, 지금은 간신히 명맥이나 유지하는 정도가 아닙니까? 백제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한쪽이 올라서려 하면 다른 쪽에서 다리를 잡아끌어 주저앉히고 있습니다. 사신을 보내어 경쟁을 부추긴다면 서로 견제하느라 우리 국경을 침입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수나라의 군사들은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지친 상태이며 주변 이민족들의 침입에도 대항해야 하므로 실제로 가용(可用)할 수 있는 병력은 그리 많지 않으니 우리가 정예병으로 적의 전진기지를 공격하여 기선을 제압하고, 서변의 굳건한 성에 의지하여 승부를 겨룬다면 우리가 승리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고건무는 을지문덕의 명철한 안목에 말문이 막혔다.
영양태왕은 이를 지켜보다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을지문덕을 가리키며 “마치 을파소(乙巴素)가 환생한 것 같구나” 하고 칭찬하였다.
서력 598년 정월(正月) 고구려(高句麗) 영양태왕(嬰陽太王)은 어영전대장(御營全隊長) 모달(模達) 유여(柳呂)와 소형(小兄)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대동하여 휘하에 근위병 삼백명만을 거느리고 요동 순행(巡幸)에 나섰다. 이때, 주위에는 변방 지역의 민심을 둘러보고 백성들을 위무하기 위한 출행이라 밝혔지만 실은 수국(隨國)이 은근슬쩍 차지하고 있는 영주(營州)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영양태왕은 수군(隨軍)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오골성(烏骨城)·건안성(建安城)·안시성(安市城)·요동성(遼東城)·백암성(白巖城) 등을 차례로 방문하여 군민(軍民)들을 격려하고 변경 방비의 상황을 직접 점검하였다. 태왕을 친견(親見)할 기회를 갖게 된 성민(城民)들은 영양태왕의 관심과 격려에 감복하여 태왕의 은덕을 찬양하고 충성을 맹세하였다.
태왕의 행차는 평양성(平壤城)을 출발한 지 한 달이 넘어서야 개모성(蓋牟城)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개모성에는 말갈(靺鞨) 경기병을 거느린 막리지(莫離支) 연자유(淵子遊)와 평원태왕(平原太王) 재위기에 고구려 최고의 용장(勇將)으로 이름을 날렸던 온달(溫達)의 아들인 북군총병관(北軍總兵管) 대모달(大模達) 온준(溫俊), 그리고 모달(模達) 재증협무(再曾協武)와 말객(末客) 어사곤(於使困) 등 여러 장수들이 이미 도착해서 태왕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모성주(蓋牟城主) 모달(模達) 손자연(孫子然)의 영접을 받고 성 안으로 들어선 영양태왕은 성청(城廳)에 들어가자마자 자신의 충직한 심복인 연자유를 먼저 찾았다. 연자유는 그동안 태왕의 밀명을 받고 신성(新城)에서 말갈인(靺鞨人)들을 끌어모아 최강의 경기병으로 조련시키고 있었다. 말갈 경기병의 전력이 만족할 만한 수준에 올랐다는 보고를 전해들은 영양태왕은 연자유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였다.
이튿날에 국조(國祖)인 추모성왕(鄒牟聖王)에게 출정을 알리고 승리를 기원하는 천제(天祭)를 올린 영양태왕은 군사들을 사열한 후에 결의를 다졌다.
“이번 영주부에 대한 선제공격을 시작으로 우리는 수국과 전면전을 펼치게 된다. 저들의 오만한 태도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우리 조상들의 위업(偉業)에 누를 끼치는 부끄러운 일이다. 이번에야말로 고구려의 기상과 용맹을 드러내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는 진리를 알게 해주리라. 자랑스러운 용사들이여! 그대들에게 추모성왕의 가호가 있을지어다.”
군사들의 함성소리와 발 구르는 소리에 개모성이 들썩거렸다.
영양태왕은 연자유가 인솔하는 말갈 기병들을 선봉으로 삼아 영주부로 호호탕탕 쳐들어갔다. 본디 요하(遼河) 서쪽 일대는 고구려와 중원 왕조들 사이에 충돌이 잦았던 곳이었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대에 와서 고구려가 이곳을 평정했지만 북연(北燕)의 멸망 이후에는 중원 왕조가 잠시 대릉하(大陵河) 인근까지 세력을 뻗치기도 했다.
그 후, 고구려는 지속적인 서진정책(西進政策)을 펼침으로써 이들을 몰아냈다. 그런데 북주(北周)의 뒤를 이어 수국(隨國)이 들어서자 요서(遼西) 지역은 다시 양대 세력간 분쟁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문제(文帝)는 용성에 영주부(營州府)를 두고 군대를 주둔시켜 틈틈이 거란족을 포섭하려고 하였다. 영양태왕 입장에서는 요서 지역에서의 힘의 우위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수국이 점령하고 있는 용성을 제압해야 했다.
영주도독(營州都督) 위충(韋沖)은 고구려군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다. 고구려의 선제공격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영주부의 군사들은 수국의 동북방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군량창고를 건설하는 일을 담당했기에 제대로 전투 훈련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지 않았기에 군기가 흐트러져 있었다. 그로므로 병력은 7만여명 정도 되었지만 오합지졸(烏合之卒)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군인으로서 자국의 영토에 외국의 군대가 침범하는 것을 그대로 방관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위충은 부하들에게 출병을 명했다. 고구려군은 북소리에 맞추어 성(城)을 향해 조금씩 다가서고 있었다. 고구려의 선두에 선 장수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나는 대고구려의 막리지 연자유다! 이곳은 본디 우리의 땅이거늘, 어찌 무단으로 들어와 점거하였는가? 폐하께서 직접 이를 심문하고자 오셨으니 어서 성문을 열고 영접하도록 하라.”
고구려의 국왕이 친히 왕림(枉臨)했다는 말에 위충은 기겁을 했다. 고구려왕이 나섰다는 것은 최소한 오만 이상의 정예군이 움직였다는 의미였다. 예상했던 일 가운데 최악이었다. 그러나 영주부의 군사들도 만만치 않은 수효였기에 전의(戰意)만 상실하지 않는다면 해 볼 만한 싸움이라고 생각되었다. 위충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군사들을 인솔하여 성문을 열고 달려나갔다. 이제는 고구려 장수의 말이 허풍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때 고구려군 진영에서 다시 북소리가 울리며 오색의 깃발이 펄럭였다. 그러자 방진(方陳)을 취하고 있던 고구려의 군진이 다섯 대로 나누어 지더니 순식간에 다섯 개의 대열로 변했다. 성 밖으로 나가 군사들을 도열시킨 위충은 고구려군의 일사분란한 움직임을 보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살피니 고구려군은 대별로 각기 다른 색의 천을 허리에 두르고 있었다.
고구려군 진영의 중앙에서 흑색 깃발이 나부끼자 흑색 띠를 두른 선봉군이 일제히 말을 제쳐 수군의 진영으로 내달렸다. 연자유가 지휘하는 흑기군(黑旗軍)이 수군의 진영을 돌파하니, 순식간에 수군의 대열이 둘로 쪼개졌다. 다시 고구려군의 진영에서 백색 깃발과 청색 깃발이 동시에 흔들리자 좌군과 우군이 일시에 양쪽 측면에서 수군을 공격해 들어갔다. 고구려군의 빠른 공격이 계속되자 위충의 군사들은 아무런 대응조차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비록 수효는 수군이 월등히 많았지만 이미 사분오열(四分五裂)한 상태에서는 수적 우위가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뒤이어 홍색 깃발과 황색 깃발이 동시에 흔들리니 영양태왕이 직접 지휘하는 중군으 마치 태풍과 같은 기세로 돌격해왔다. 고구려의 기병들이 진영을 종횡무진(縱橫無盡) 누비는 가운데 수군(隨軍) 병사들은 점점 싸움에 자신감을 잃었다. 북소리가 그치고 겨우 정신을 수습한 위충은 자신이 이미 고구려의 군사들에게 포위되었음을 깨달았다. 마상(馬上)에서 궁시(弓矢)를 들고 수군(隨軍)을 에워싸고 있는 고구려의 군사들 사이로 영양태왕이 모습을 나타냈다.
“너희 수주(隨主)가 보낸 국서에 대한 우리의 답이다. 목숨은 살려 줄 테니 장안으로 돌아가 양견(楊堅)에게 ‘사직(社稷)을 보전하려거든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말라’고 전하라.”
위충은 오금이 저려서 간신히 고개만 숙였을 뿐 입 밖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다시 북소리가 울리며 고구려 군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위충은 마침내 큰 한숨을 토해 냈다. 사상자를 살펴보니 겨우 1백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철저히 농락당한 것이었다. 고구려군은 영주부를 함락시키러 온 것이 아니었다. 힘의 차이를 확인시켜 영주를 지키고 있는 수군들에게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해 왔을 뿐이었다. 전쟁에서는 공포심을 갖게 하는 것이 적군을 죽이는 것보다 효과적일 수 있었다.
영주에서 한바탕 무력시위(武力示威)가 끝난 후, 군사를 수습하여 도성으로 귀환길에 오른 영양태왕은 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을지문덕에게 북방의 동요에 대비하도록 하는 임무를 맡겼다. 태왕은 주변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에 을지문덕의 역할이 전쟁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었다.
“을지문덕을 제형(諸兄)의 관등으로 승급(昇級)시키고 부여성(扶餘城)의 성주로 임명할 것이니 수주가 말갈이나 실위(室韋)를 부추겨 우리의 후방을 교란하지 못하도록 하라.”
『고구려 병마대원수 을지문덕 전기』2. 제1차 여수전쟁의 개전 (2)
● 영주(營州) 공격
병마원수(兵馬元帥) 강이식(姜以式)은 국내성(國內城)에 있던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불러 함께 서북변의 방비태세를 살펴본 뒤 그를 데리고 궁궐에 들어갔다. 편전(便殿)에 들어가 영양태왕(嬰陽太王)을 알현한 강이식은 태왕에게 을지문덕을 소개했다.
“폐하, 여기 이 청년은 국내성에서 소형으로 재직하는 을지문덕이라고 합니다. 아직 젊은 나이지만 폭넓은 시야와 사물을 궤뚫어 보는 통찰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폐하께서 곁에 두시고 중용하신다면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울 만한 인재입니다.”
영양태왕이 을지문덕을 유심히 살펴보니 훤칠한 키에 번뜩이는 까만 눈이 인상적이었고, 긴 눈썹이 학자와 같은 인상을 풍기게 하는 훤칠한 미장부(美丈夫)였다. 태왕은 을지문덕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를 그윽히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많은 대신들이 여전히 수나라와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이에 을지문덕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소신이 이미 접수한 정보에 의하면 수국(隨國)은 이번에 우리 나라에 사신을 보내기 전에 이미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산동(山東)의 내주(來州)에서는 병선(兵船)의 건조가 마무리되었고, 장안(長安)과 탁현(琢縣)의 군기고(軍器庫)에는 신병기들이 가득 쌓여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한다 한들, 저들은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쳐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에 대한 대비를 소흘히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반드시 싸워 이겨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영양태왕의 곁에서 시립하고 있던 고건무(高建武)가 서슬 푸르게 을지문덕을 꾸짖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얕은 생각을 떠벌린단 말이냐? 아직 백제와 신라의 위협이 가시지 않은 마당에 수나라의 대군을 상대할 수는 없다. 먼저 수나라와 화친을 하여 서변을 안정시킨 다음에 남방을 제압하는 것이 상책이다.”
고건무는 태왕이 자신보다 강이식을 신임하는 것이 못마땅한 참이었기에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애송이가 나서서 잘난 체하는 꼴을 두고 보지 못했다.
하지만 고건무의 꾸지람을 듣고도 을지문덕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대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깨진 이후로 신라와 백제는 서로 반목하느라 미처 북방으로 눈을 돌릴 겨를이 없습니다. 신라는 예전 진흥왕(眞興王)이 통치하던 시절이나 흥(興)하였지, 지금은 간신히 명맥이나 유지하는 정도가 아닙니까? 백제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한쪽이 올라서려 하면 다른 쪽에서 다리를 잡아끌어 주저앉히고 있습니다. 사신을 보내어 경쟁을 부추긴다면 서로 견제하느라 우리 국경을 침입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수나라의 군사들은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지친 상태이며 주변 이민족들의 침입에도 대항해야 하므로 실제로 가용(可用)할 수 있는 병력은 그리 많지 않으니 우리가 정예병으로 적의 전진기지를 공격하여 기선을 제압하고, 서변의 굳건한 성에 의지하여 승부를 겨룬다면 우리가 승리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고건무는 을지문덕의 명철한 안목에 말문이 막혔다.
영양태왕은 이를 지켜보다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을지문덕을 가리키며 “마치 을파소(乙巴素)가 환생한 것 같구나” 하고 칭찬하였다.
서력 598년 정월(正月) 고구려(高句麗) 영양태왕(嬰陽太王)은 어영전대장(御營全隊長) 모달(模達) 유여(柳呂)와 소형(小兄)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대동하여 휘하에 근위병 삼백명만을 거느리고 요동 순행(巡幸)에 나섰다. 이때, 주위에는 변방 지역의 민심을 둘러보고 백성들을 위무하기 위한 출행이라 밝혔지만 실은 수국(隨國)이 은근슬쩍 차지하고 있는 영주(營州)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영양태왕은 수군(隨軍)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오골성(烏骨城)·건안성(建安城)·안시성(安市城)·요동성(遼東城)·백암성(白巖城) 등을 차례로 방문하여 군민(軍民)들을 격려하고 변경 방비의 상황을 직접 점검하였다. 태왕을 친견(親見)할 기회를 갖게 된 성민(城民)들은 영양태왕의 관심과 격려에 감복하여 태왕의 은덕을 찬양하고 충성을 맹세하였다.
태왕의 행차는 평양성(平壤城)을 출발한 지 한 달이 넘어서야 개모성(蓋牟城)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개모성에는 말갈(靺鞨) 경기병을 거느린 막리지(莫離支) 연자유(淵子遊)와 평원태왕(平原太王) 재위기에 고구려 최고의 용장(勇將)으로 이름을 날렸던 온달(溫達)의 아들인 북군총병관(北軍總兵管) 대모달(大模達) 온준(溫俊), 그리고 모달(模達) 재증협무(再曾協武)와 말객(末客) 어사곤(於使困) 등 여러 장수들이 이미 도착해서 태왕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모성주(蓋牟城主) 모달(模達) 손자연(孫子然)의 영접을 받고 성 안으로 들어선 영양태왕은 성청(城廳)에 들어가자마자 자신의 충직한 심복인 연자유를 먼저 찾았다. 연자유는 그동안 태왕의 밀명을 받고 신성(新城)에서 말갈인(靺鞨人)들을 끌어모아 최강의 경기병으로 조련시키고 있었다. 말갈 경기병의 전력이 만족할 만한 수준에 올랐다는 보고를 전해들은 영양태왕은 연자유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였다.
이튿날에 국조(國祖)인 추모성왕(鄒牟聖王)에게 출정을 알리고 승리를 기원하는 천제(天祭)를 올린 영양태왕은 군사들을 사열한 후에 결의를 다졌다.
“이번 영주부에 대한 선제공격을 시작으로 우리는 수국과 전면전을 펼치게 된다. 저들의 오만한 태도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우리 조상들의 위업(偉業)에 누를 끼치는 부끄러운 일이다. 이번에야말로 고구려의 기상과 용맹을 드러내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는 진리를 알게 해주리라. 자랑스러운 용사들이여! 그대들에게 추모성왕의 가호가 있을지어다.”
군사들의 함성소리와 발 구르는 소리에 개모성이 들썩거렸다.
영양태왕은 연자유가 인솔하는 말갈 기병들을 선봉으로 삼아 영주부로 호호탕탕 쳐들어갔다. 본디 요하(遼河) 서쪽 일대는 고구려와 중원 왕조들 사이에 충돌이 잦았던 곳이었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대에 와서 고구려가 이곳을 평정했지만 북연(北燕)의 멸망 이후에는 중원 왕조가 잠시 대릉하(大陵河) 인근까지 세력을 뻗치기도 했다.
그 후, 고구려는 지속적인 서진정책(西進政策)을 펼침으로써 이들을 몰아냈다. 그런데 북주(北周)의 뒤를 이어 수국(隨國)이 들어서자 요서(遼西) 지역은 다시 양대 세력간 분쟁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문제(文帝)는 용성에 영주부(營州府)를 두고 군대를 주둔시켜 틈틈이 거란족을 포섭하려고 하였다. 영양태왕 입장에서는 요서 지역에서의 힘의 우위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수국이 점령하고 있는 용성을 제압해야 했다.
영주도독(營州都督) 위충(韋沖)은 고구려군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다. 고구려의 선제공격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영주부의 군사들은 수국의 동북방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군량창고를 건설하는 일을 담당했기에 제대로 전투 훈련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지 않았기에 군기가 흐트러져 있었다. 그로므로 병력은 7만여명 정도 되었지만 오합지졸(烏合之卒)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군인으로서 자국의 영토에 외국의 군대가 침범하는 것을 그대로 방관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위충은 부하들에게 출병을 명했다. 고구려군은 북소리에 맞추어 성(城)을 향해 조금씩 다가서고 있었다. 고구려의 선두에 선 장수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나는 대고구려의 막리지 연자유다! 이곳은 본디 우리의 땅이거늘, 어찌 무단으로 들어와 점거하였는가? 폐하께서 직접 이를 심문하고자 오셨으니 어서 성문을 열고 영접하도록 하라.”
고구려의 국왕이 친히 왕림(枉臨)했다는 말에 위충은 기겁을 했다. 고구려왕이 나섰다는 것은 최소한 오만 이상의 정예군이 움직였다는 의미였다. 예상했던 일 가운데 최악이었다. 그러나 영주부의 군사들도 만만치 않은 수효였기에 전의(戰意)만 상실하지 않는다면 해 볼 만한 싸움이라고 생각되었다. 위충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군사들을 인솔하여 성문을 열고 달려나갔다. 이제는 고구려 장수의 말이 허풍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때 고구려군 진영에서 다시 북소리가 울리며 오색의 깃발이 펄럭였다. 그러자 방진(方陳)을 취하고 있던 고구려의 군진이 다섯 대로 나누어 지더니 순식간에 다섯 개의 대열로 변했다. 성 밖으로 나가 군사들을 도열시킨 위충은 고구려군의 일사분란한 움직임을 보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살피니 고구려군은 대별로 각기 다른 색의 천을 허리에 두르고 있었다.
고구려군 진영의 중앙에서 흑색 깃발이 나부끼자 흑색 띠를 두른 선봉군이 일제히 말을 제쳐 수군의 진영으로 내달렸다. 연자유가 지휘하는 흑기군(黑旗軍)이 수군의 진영을 돌파하니, 순식간에 수군의 대열이 둘로 쪼개졌다. 다시 고구려군의 진영에서 백색 깃발과 청색 깃발이 동시에 흔들리자 좌군과 우군이 일시에 양쪽 측면에서 수군을 공격해 들어갔다. 고구려군의 빠른 공격이 계속되자 위충의 군사들은 아무런 대응조차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비록 수효는 수군이 월등히 많았지만 이미 사분오열(四分五裂)한 상태에서는 수적 우위가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뒤이어 홍색 깃발과 황색 깃발이 동시에 흔들리니 영양태왕이 직접 지휘하는 중군으 마치 태풍과 같은 기세로 돌격해왔다. 고구려의 기병들이 진영을 종횡무진(縱橫無盡) 누비는 가운데 수군(隨軍) 병사들은 점점 싸움에 자신감을 잃었다. 북소리가 그치고 겨우 정신을 수습한 위충은 자신이 이미 고구려의 군사들에게 포위되었음을 깨달았다. 마상(馬上)에서 궁시(弓矢)를 들고 수군(隨軍)을 에워싸고 있는 고구려의 군사들 사이로 영양태왕이 모습을 나타냈다.
“너희 수주(隨主)가 보낸 국서에 대한 우리의 답이다. 목숨은 살려 줄 테니 장안으로 돌아가 양견(楊堅)에게 ‘사직(社稷)을 보전하려거든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말라’고 전하라.”
위충은 오금이 저려서 간신히 고개만 숙였을 뿐 입 밖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다시 북소리가 울리며 고구려 군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위충은 마침내 큰 한숨을 토해 냈다. 사상자를 살펴보니 겨우 1백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철저히 농락당한 것이었다. 고구려군은 영주부를 함락시키러 온 것이 아니었다. 힘의 차이를 확인시켜 영주를 지키고 있는 수군들에게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해 왔을 뿐이었다. 전쟁에서는 공포심을 갖게 하는 것이 적군을 죽이는 것보다 효과적일 수 있었다.
영주에서 한바탕 무력시위(武力示威)가 끝난 후, 군사를 수습하여 도성으로 귀환길에 오른 영양태왕은 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을지문덕에게 북방의 동요에 대비하도록 하는 임무를 맡겼다. 태왕은 주변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에 을지문덕의 역할이 전쟁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었다.
“을지문덕을 제형(諸兄)의 관등으로 승급(昇級)시키고 부여성(扶餘城)의 성주로 임명할 것이니 수주가 말갈이나 실위(室韋)를 부추겨 우리의 후방을 교란하지 못하도록 하라.”
을지문덕은 태왕의 명령을 받고 편전을 물러나와 그 즉시 부임지로 떠나려고 길을 재촉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