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병마대원수 을지문덕 전기』3. 폭군의 등장 (6)

대모달2011.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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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궐 땅에서 양제와 논쟁을 벌인 을지문덕

 

『수서(隨書)』에는 수황(隨皇) 양제(煬帝) 양광(楊廣)이 돌궐(突厥) 땅을 순행(巡幸)하러 왔다가 계민가한(啓民可汗)을 만나러 왔던 고구려의 사신과 조우(遭遇)하여 “너희 나라로 돌아가거든 고구려의 국왕에게 이렇게 전해라. 당장 입조(入朝)하지 않으면 너희 나라를 칠 것이라고” 하고 위협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의 사신은 마치 양제의 경고에 아무 반박도 못한 채 쫓기듯이 돌궐 땅을 떠난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데,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에서 이때에 양제와 우연히 만난 고구려의 사신이 다름 아닌 을지문덕이며『비망열기(備忘烈記)』를 인용해 을지문덕이 양제와 논쟁을 벌였다고 서술했다. 만약 단재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을지문덕은 어떻게 돌궐 땅에서 양제와 만나게 되었던 것일까?

 

동돌궐(東突厥) 최고의 지도자인 계민가한(啓民可汗)은 실위(室韋)가 자신들을 배신하도록 조장했다는 이유로 607년에 좌현왕(左賢王) 처라(處羅)에게 3만 대군을 주어 고구려의 북변을 침공하도록 했다. 그러나 부여성주(扶餘城主) 겸 북부욕살(北部褥薩)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이미 실위의 부족들로부터 돌궐에 대한 정보를 받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방어전(防禦戰)을 준비하고 있던 터였다. 그는 자신이 고안해둔 검차(劒車)라는 병기(兵器)를 배치시킨 곳에 보병(步兵) 7천여명과 중장기병(重裝騎兵) 3천여명을 매복시킨 뒤 말객(末客) 효농(效濃)에게 이들의 인솔을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보병 3천여명과 기마궁수(騎馬弓手) 1천여명을 거느리고 적군에게 싸움을 걸어 침착하게 돌궐의 기병들을 함정으로 끌어들였다. 돌궐군은 을지문덕의 군대에 기병의 수효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업신여기고 유인전(誘引戰)에 말려들어 추격해오다 검차를 앞세운 고구려군의 공세에 무려 1만명 남짓한 사상자가 나오는 큰 타격을 받아 섬멸되었다.

 

좌현왕의 군대가 너무도 쉽게 대패하자, 돌궐의 군주 계민가한은 고구려의 막강한 군사력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구려와 싸우기보다는 우호 관계를 맺는 쪽을 택했다. 계민가한이 화평을 청해 오자, 영양태왕(嬰陽太王)은 을지문덕을 사신으로 보내 돌궐의 내정을 살피고 그들의 기를 꺾어놓게 했다. 태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을지문덕이 돌궐 칸의 장막에 당도하자, 계민가한이 몸소 나와 그를 맞이했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 많았소. 내 장군의 명성은 익히 듣고 있었소.”

 

계민가한은 애써 고구려 사신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을지문덕은 싸늘한 표정으로 힐난한다.

 

“돌궐의 군사들이 우리의 국경을 넘은 것은 명백한 도발 행위였소. 그런데 이제 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화평을 맺자는 것이오? 도대체 돌궐의 진심은 무엇이오?”

 

계민가한은 쩔쩔매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것은 일부 부족장들이 나의 뜻을 곡해해서 생긴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소. 그 일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오. 내가 이 자리에서 명백히 밝히겠는데, 우리는 결코 고구려와 싸울 뜻이 없소.”

 

계민가한이 이처럼 저자세로 나오자, 을지문덕도 낯을 펴고 어조를 부드럽게 했다.

 

“우리 고구려도 돌궐과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돌궐이 다시는 우리의 땅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조만 한다면 두 나라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내 당장 약조하리다. 그러니 고구려로 돌아가거든 태왕 폐하께 말씀 좀 잘 해주시구려.”

 

을지문덕은 이 정도에서 계민가한의 마음을 풀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다그치다가 자칫 계민가한이 모욕감을 느끼기라도 한다면 두 나라의 관계가 다시 적대시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었다. 수나라와의 전쟁이 언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돌궐을 끌어안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을지문덕은 적당히 계민가한의 기를 꺾어놓는 선에서 그와 타협을 보았다.

 

“좋습니다. 이번 협정이 앞으로 양국이 함께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리하여 돌궐과 고구려는 상호불가침을 포함한 우호 협정을 체결하기로 합의를 했다. 계민가한은 성대한 연회를 열어 고구려의 사신으로 온 을지문덕을 극진히 대접했다. 을지문덕은 돌궐의 내정을 살피는 임무를 띠고 있었기에 계민가한 및 그의 신하들과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담소를 나누었다. 을지문덕이 계민가한의 장막을 찾은 지 나흘째 되는 날에 계민가한을 호위하는 무사인 판찰소탁(辦察昭拓)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들어 오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수국(隨國)의 황제(皇帝)가 당도했습니다.”

 

계민가한이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기별도 없이 어쩐 일이란 말이냐?”

 

돌궐은 수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앙숙인 고구려 사신과 함께 있는 모습을 수황(隨皇)에게 들켜서 좋을 것이 없었다.

 

“대인께서는 아무래도 이곳을 피하시는 것이 좋겠소. 수주(隨主)를 만나봐야 그대의 신상에 이로울 게 없지 않겠소?”

 

계민가한이 초조한 모습으로 말했지만 을지문덕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진작부터 수주 양광을 만나보고 싶었는데, 잘 되었습니다. 저를 그에게 소개해 주십시오.”

 

계민가한은 난처했지만 을지문덕의 뜻을 꺾을 수 없어 그대로 장막 안에서 기다리게 했다.

 

계민가한은 장막 밖으로 나가 양제(煬帝)를 데리고 들어왔다. 양제의 뒤로 수행한 대신들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수국(隨國)에서 고위급 관직을 지내는 인물들이었다.

 

계민가한은 양제에게 손님에 대한 예를 취하여 상석을 권했다. 그 옆에 계민가한이 앉고 양국의 신하들이 좌우에 도열했다. 을지문덕은 돌궐의 대신들 틈에 섰다.

 

“짐은 돌궐의 군대가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말을 듣고 위로도 할 겸 이렇게 찾아왔소.”

 

양제는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운을 떼었다.

 

“뭐 대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국경에서 작은 분쟁이 있었을 뿐입니다.”

 

계민가한은 말하면서 을지문덕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았다. 을지문덕은 매서운 눈길로 양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 나라 역시 고구려로 인해 많은 피해를 보았소. 동쪽에 고구려가 도사리고 있는 한 우리의 국경은 한시도 편할 날이 없을 것이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서로 힘을 합쳐 고구려를 정벌해서 앞날의 근심을 더는 것이 어떻겠소?”

 

양제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의 눈빛은 오싹할 정도로 차가웠다. 만일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돌궐을 먼저 칠 수 있다는 무언의 협박과 다름없었다. 계민가한은 두 마리 호랑이 사이에 놓인 사슴처럼 어느 쪽을 선택할지 몰라 안절부절하였다. 그때였다. 돌궐 대신들 사이에 서 있던 을지문덕이 앞으로 나서며 양제를 보고 소리쳤다.

 

“말로는 화평을 주장하면서 뒤에서 흉계를 꾸미고 있으니 어찌 이를 올바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을지문덕에게 향했다. 계민가한은 눈이 휘둥그래지고 얼굴빛이 사색이 되어 금방 숨이 넘어갈 듯 했다. 그런데 양제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이 이 삼십대 초반의 당돌한 청년을 쳐다보았다.

 

이때 수국의 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裵矩)가 나서 을지문덕을 꾸짖었다.

 

“너는 누군데 건방지게 군주들의 대화에 끼어드느냐?”

 

을지문덕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는 고구려의 북부욕살인 을지문덕이라 하오.”

 

고구려의 관리란 말에 양제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는 힐난의 눈길로 계민을 쳐다봤다. 계민가한은 무척이나 당황했는지 애써 눈길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양제는 다시 을지문덕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고구려의 사신이 이곳에는 무슨 일로 왔는가?”

 

“태왕 폐하의 명을 받고 돌궐과 친선을 도모하고자 왔소.”

 

초원을 지배하는 돌궐의 지도자마저 수나라의 황제 앞에서 쩔쩔매는데, 이 고구려인은 당당한 기상을 드러내며 양제와 맞서고 있었다.

 

“사해 만국이 서로 화평을 도모하고 어려울 때 돕는 것은 아름다은 덕(德)이라 할 수 있다. 짐도 고구려와 돌궐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기를 바란다. 허나 고구려의 지난 행적으로 볼 때 어찌 이를 선의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양제는 스스로 지혜가 넘친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세상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유려한 말솜씨로는 자신을 당할 자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고구려의 사신을 변설로서 굴복시켜 보겠다고 마음먹었다.

 

“고구려의 지난 행적이라 함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오?”

 

양제는 목청을 가다듬고 포문을 열었다.

 

“고구려는 본시 비류수(沸流水)가의 작은 나라였는데, 담덕(談德)에 이르러 주변의 부족들을 무력으로 정벌하고 강제로 병합하면서 지금의 영토에 이른 것이 아닌가? 근래에 와서도 고구려는 형제나 다름없는 남방의 백제와 신라를 수시로 괴롭히고 하루도 손에서 창과 칼을 놓은 날이 없다고 하니 어찌 평화를 바란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번 돌궐과 화친을 도모하는 이유 역시 이들을 안심시킨 후에 불시에 치려는 의도일 것이다.”

 

을지문덕은 양제의 독설(毒舌)을 듣고 도리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대의 말은 하나도 맞는 게 없소. 우리 나라의 시조(始祖)이신 추모성왕(皺牟聖王)께서는 하늘의 뜻에 따라 조선(朝鮮)을 계승하는 고구려를 세우시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자 힘쓰셨소. 그 후 고구려의 역대 태왕들께서는 추모성왕의 뜻에 따라 백성들을 덕으로써 다스리고, 주변국들을 인의(仁義)로써 대하셨소. 그러다 보니 자연 이에 감복한 주변국들이 복속을 청해왔고, 고구려는 이를 매정하게 내칠 수 없어 받아들였던 것이오. 그리고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께서는 한 번도 대의(大義)에 어긋한 거병(擧兵)을 한 적이 없으시오. 단지 우리의 국경을 지키거나 소국의 간곡한 구원 요청을 뿌리치지 못해 군사를 내었을 뿐이오. 그때 그분의 기상과 고구려의 앞선 문화에 매료된 그 지역의 군민들이 고구려의 보호를 자청했기에 이를 받아들였을 뿐이오. 광개토태왕께서는 늘 사해(四海) 만민이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셨던 분이오.”

 

을지문덕은 잠시 말을 멈추고 양제의 안색을 살폈다. 양제는 눈에 띄게 여유를 잃어가고 있었다. 을지문덕은 마지막 숨통을 끊어 놓는 일격을 가했다.

 

“근래에 와서 고구려는 주변국들의 침입으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소. 최근 백제나 신라와 충돌했던 것도 그들의 도발을 참다못해 일어난 것이오. 그 가운데서도 수국의 탐욕은 도를 넘어서고 있소. 진국(陳國)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쥐새끼처럼 몰래 군사를 움직여 우리의 땅을 빼앗으려 하지 않았소? 우리의 천군(天軍)이 격노하여 물리치기는 했지만 앞으로 또 다른 도발이 없으리라 장담할 수 있겠소? 이렇게 볼 때 돌궐이 조심해야 하는 것은 우리 고구려가 아니라 바로 당신네 수국일 것이오.”

 

양제는 을지문덕의 정연한 논박이 할 말이 없었다. 이는 혹을 떼려다가 혹을 붙인 격이었다.

 

“내가 장담하건대, 만일 수국이 또 다시 고구려의 땅을 넘본다면 그때는 멸망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오.”

 

양제는 돌궐의 지도자와 많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을지문덕에게 논파당한 것이 창피했지만 달리 반박할 말이 없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을지문덕의 배포와 재주만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대와 같은 인재가 어찌 고구려와 같은 변방에서 썩고 있는가? 나와 함께 장안으로 간다면 천하를 호령할 수 있게 해주겠다.”

 

양제는 자신의 휘하에 을지문덕과 같이 담대한 인물만 있다면 온 천하를 제패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그를 회유했다.

 

이에 을지문덕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고구려는 신성한 나라요, 천하의 중심이오. 내가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천지신명(天地神明)께서 돌보아주셨기 때문이오. 수국의 친왕(親王)이 되느니 차라리 고구려의 개가 되겠소.”

 

양제는 부귀영화(富貴榮華)로도 을지문덕을 유혹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어느새 을지문덕에 대한 두려움이 싹트고 있었다.

 

“수국으로 돌아가면 전쟁에 대한 야욕을 버리고 백성들을 돌보는 일에 매진하시오. 백성들이 없고는 나라도 있을 수 없소. 그 점을 명심하면 수국은 오래도록 흥성할 것이오. 허나 만에 하나라도 잘못 마음을 먹고 고구려로 쳐들어온다면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당할 것이오. 내 충고를 가슴에 깊이 새기기를 바라오.”

 

을지문덕은 이제 할 말을 다 했다는 듯이 등을 돌리고 계민가한의 장막을 빠져 나갔다. 어느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양제는 사라지는 을지문덕의 뒷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