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병마대원수 을지문덕 전기』4. 제2차 여수전쟁(麗隨戰爭) (2)

대모달2011.01.23
조회120

 

● 양제(煬帝)가 고구려 침략에 동원한 수(隨)의 병력은 무려 1백 13만명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준비하는 일이 차질 없이 진행되자, 을지문덕은 각 지역의 욕살을 비롯해 처려근지(處閭近支), 루초(婁肖) 등의 지방관들과 대모달(大模達)·모달(模達)·말객(末客) 등 주둔군을 이끄는 무관들을 모아 대책 회의를 열었다. 을지문덕은 이 회의에서 전국 5부의 욕살(褥薩)들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남부욕살은 백제와 신라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동부욕살은 유사시 백성들의 피난 대책과 기밀문서의 관리를 책임져야 했고, 서부욕살은 서변에 대한 지원 대책을 내놓아야 했다. 더불어 을지문덕은 만일의 경우 수의 군대가 고구려 영토 깊숙이 쳐들어 왔을 때 각 지방의 군대가 효과적으로 연계하여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

 

을지문덕은 지방의 방어체제를 정비한 후에 변방의 부족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수와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들이 어느 편에 서느냐가 큰 변수가 될 수 있었다. 을지문덕이 그동안 애쓴 덕분에 말갈과 실위는 고구려에 대한 지지를 밝히고 있었지만 정작 수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돌궐이나 거란의 여러 부족들은 아직 입장 표명을 분명히 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남방의 백제와 신라 역시 고구려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을지문덕은 영양태왕을 알현하고 이들 주변국들에 또 다시 사신을 보내 우호를 굳게 다져야 한다고 주청했다.

 

영양태왕 역시 철저한 대비만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을지문덕의 유비무환(有備無患) 정신에 공감했기에 적극 동조했다.

 

영양태왕(嬰陽太王)은 여수전쟁(麗隨戰爭)에 앞서 북으로는 말갈족(靺鞨族), 서쪽은 돌궐(突厥)과 실위(室韋)·거란(契丹)을 포용했다. 이제 남은 일은 남쪽의 백제(百濟)와 신라(新羅)를 눌러 후방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태왕은 백제와 신라를 군사력으로 압박하는 한편, 대대로(大對盧) 연태조(淵太祚)를 사신으로 파견해 백제를 달래는 강온정책(强溫政策)을 펼쳤다.

 

제1차 여수전쟁 때에 전사했던 연자유(淵子遊)의 외아들인 연태조는 태왕의 명을 받들어 백제의 사비성()에 당도했다.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고 잔뜩 화가 나 있던 무왕(武王) 부여장(扶餘璋)이 고구려의 사신을 반갑게 맞이할 리 없었다.

 

무왕은 연태조를 보자마자 큰소리로 따졌다.

 

“대고구려의 지체 높으신 국상(國相)께서 무슨 일로 우리 나라를 찾아왔소?”

 

연태조는 무왕의 냉대에 개의치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

 

“제가 찾아온 목적은 백제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함입니다.”

 

“친선이라니? 우리의 송산성(松山城)과 석두성(石頭城)을 공격해서 백성들을 잡아 갈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무슨 말씀이시오?”

 

고구려는 607년 5월에 군대를 파견하여 백제의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하고 3천명의 포로를 끌고 간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백제가 수국(隨國)과 통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수국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당에 동족(同族)인 백제가 이민족(異民族)인 수국의 편을 들었으니 어찌 가만있겠습니까? 이번에 변경의 두 성을 친 것은 단지 경고의 의미였을 뿐입니다. 우리 나라의 태왕께서는 백제와 화친하여 다시는 동족끼리 싸우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무왕이 연태조의 말을 듣고 보니 고구려 입장 또한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무왕은 인상을 펴며 말했다.

 

“고구려의 태왕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단지 화평뿐이오?”

 

“이미 다 짐작하고 계시는 듯하니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수와의 전쟁이 다시 벌어지면 신라의 도발을 막아주십시오.”

 

“신라를 막아달라?”

 

“그렇습니다. 이제껏 신라의 기를 꺾기 위해서 여러 차례 그들의 변경을 쳤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 청을 들어준다면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소?”

 

“예전에 사로잡았던 삼천 명의 백제 포로들을 돌려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향후 백제가 신라를 도모한다면 도와 드리겠습니다.”

 

무왕으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실상 바다 건너 수국과 통교해본들 거리가 멀어 국익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고구려는 문제(文帝)가 파견한 30만 대군을 일거에 섬멸할 정도로 막강한 국력을 지녔다. 무왕은 선대(先代) 아신왕(阿莘王)의 비극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무왕은 심계가 남달랐기에 쉽게 동의하지 않고 짐짓 연태조를 떠보았다.

 

“만일 우리가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할 것이오?”

 

무왕이 의외로 강하게 나오자 연태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별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신라에 같은 제안을 할 수밖에요.”

 

무왕은 이 말을 듣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무왕은 예전에 신라의 진흥왕(眞興王)이 고구려와 손잡고 백제를 배신했던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백제의 성왕(聖王)은 한수(漢水) 유역을 신라에 빼앗기고 목숨마저 잃어야 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수국과 손잡고 고구려에 대적할 수도 없었다. 이전의 여수전쟁이 좋은 본보기였다. 누가 감히 고구려가 엄청난 수효를 자랑하는 수국의 침략군과 싸워 이길 수 있으리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무왕은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구려가 예전처럼 신라와 손을 잡는다면 백제는 사직조차 보존하기 어려웠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무왕은 짐짓 파안대소(破顔大笑)하며 말했다.

 

“아하하, 짐이 잠시 그대를 시험했소이다. 우리는 고구려와 피를 나눈 혈맹(血盟)인데 내 어찌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겠소? 짐 또한 고구려와 잘 지내기를 간절히 바라오.”

 

이리하여 백제는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다. 그후 백제는 고구려와 손을 잡은 사실을 숨기고 줄타기 외교로 수국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였다. 그리고 적절한 시점인 611년 10월에 신라의 가잠성(暇岑城)을 공격하여 성주 찬덕(讚德)이 전사하게 함으로써 신라가 고구려를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한편, 수황(隨皇) 양제(煬帝) 양광(楊廣)은 대운하 공사가 거의 끝나가자 대신들을 불러모아 고구려를 칠 뜻을 밝혔다.

 

“천하의 모든 나라들이 짐에게 고개를 숙이는데 오직 고구려만이 굴복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우리의 국경을 침범하니 어찌 이를 두고 볼 수 있겠는가?”

 

이 시기에 수나라는 북쪽의 근심거리였던 돌궐마저 굴복시키고 만방에 그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제 그들에게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은 고구려뿐이었다.

 

“하지만 지난 전쟁 이후로 고구려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도 더 이상의 충돌을 원하지 않으니 당분간은 지켜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양소(楊素)는 전쟁보다는 무리한 부역으로 인해 궁핍해진 백성들을 살피는 일이 먼저라 여겼다. 하지만 양제에게 있어 백성들은 물만 흐르게 해놓으면 언제든지 움직이는 물레방아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대는 지난날 돌궐(突厥)에서의 일을 잊었는가? 고구려는 앞으로는 사신을 보내어 우리를 섬기는 척하지만 뒤로는 북방의 오랑캐들을 결집하여 우리를 칠 준비를 하고 있다. 요 근래 들어서는 임유관(臨楡關) 앞에서도 고구려 군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 않느냐?”

 

양제는 양소가 말문이 막히자 모든 대신들을 둘러보며 자신이 결심한 바를 공표했다.

 

“고구려는 법령이 가혹하고, 부세가 무거우며, 권세를 잡은 자들은 붕당(朋黨)을 지어 싸움을 일삼을 뿐 아니라, 뇌물을 받고야 일을 처리하니 백성들은 억울함을 풀 길이 없다. 해마다 거듭된 재앙으로 인해 집집마다 기근에 시달리고, 끊임없이 전쟁을 치름으로써 요역(了役)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부역과 재해로 힘이 다해 죽은 시체가 도랑과 구덩이를 가득 메우니 백성들의 근심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처럼 고구려 영토 안에서 비탄과 울음이 끊일 날이 없으니 짐이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하늘의 뜻에 따라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일이 천하의 군주인 짐의 본분이 아니겠는가?”

 

신하들은 양제의 말을 듣다보니 마치 오늘날의 수국 현실을 얘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시 수국은 모진 부역 때문에 민심이 이반하고 여기저기에서는 반란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감히 나서서 간하는 자가 없었다. 신하들은 자신의 치부(恥部)는 모르고 남의 잘못을 들추려 하는 양제의 주장에 기가 막힐 뿐이었다.

 

622년 탁군(涿郡)에 집결한 수의 고구려 침략군은 총 1백 13만 3천 8백명. 전군을 24군으로 편성했는데 1군은 기병 40대와 보병 80대로 구성되었다. 1대가 1백명이었으므로 1군에 기병 4천명, 보병 8천명이었다. 이렇게 하면 전투병력은 28만 8천명밖에 되지 않지만 각군마다 치중대(輜重隊)가 전투병력 수만큼 편성되었다. 그 외에 중간에 보급기지도 두어야 하고, 이를 위한 경비병력과 병참부대도 있어야 하므로 총 113만이 된 것이다.

 

기병은 10대를 1단으로 하고, 보병은 20대를 1단으로 하여 군마다 4단을 두었는데 단마다 갑주와 깃발, 복장의 색깔이 달랐다. 이 엄청난 군대가 한 번에 출발할 수 없으므로 하루에 1군씩 출발시키되 군마다 40리씩 간격을 두게 했더니 전군의 길이는 9백 60리에 뻗쳤다. 이와는 별도로 양제를 호위하는 어영군 6군이 또 있었는데, 이들의 행렬한 80리였다고 한다. 이 광경은 과연 인산인해(人山人海)의 장관이라 칭할 만했으니 중국 역사상 초유의 병력이 고구려 정벌을 위해 동원되었던 것이다.

 

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할 대군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영양태왕은 수군원수(水軍元帥)인 태제(太弟) 고건무(高建武), 오늘날의 국방부장관 격인 막리지(莫離支)와 병마원수(兵馬元帥)를 겸직하는 을지문덕, 그리고 국무총리 격인 대대로(大對盧)에 있는 연태조와 더불어 이에 맞설 방책을 의논했다.

 

“도적들의 수효가 무려 백만을 헤아린다 한다. 이를 어떻게 격파하면 좋겠는가?”

 

강단이 있는 영양태왕조차도 수군의 엄청난 숫자를 전해듣고는 다소 근심스러웠다.

 

“도적들이 백만 대군이라고는 하나 군수품을 나르는 인부들을 제하면 실제는 오십만에서 육십만 정도입니다. 그것도 이곳저곳에서 긁어모은 오합지졸입니다. 더구나 수주(隨主)는 지금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사옵니다. 저들이 요하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빨라도 이개월 이상이 소요됩니다. 그들은 엄청난 병력을 투입했기에 분명 보급에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연태조가 상황을 정확히 짚어냈지만, 고건무가 그의 의견에 반박하고 나섰다.

 

“아무리 오합지졸이라 해도 숫자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탁군을 떠난 수의 대군이 임유관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국경은 지금 초비상 사태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요서에 군대를 파견해야 합니다.”

 

그러자 연태조가 다시 나섰다.

 

“우리는 먼저 이들을 대릉하(大凌河)에서 막을지, 아니면 요하(遼河)에서 막을지 여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연태조가 말을 마치자, 을지문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리하게 나아가서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성을 굳게 지키며 도적들이 지치기만을 기다리면 됩니다. 그러면 대군인 저들은 보급에 문제가 생길테니 자연 물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를 노려 친다면 어렵지 않게 섬멸할 수 있습니다.”

 

을지문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건무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나섰다.

 

“그렇다면 이대로 손놓고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우리는 들판에 낱알 하나, 병아리 한 마리도 남기지 않는 청야전술(淸野戰術)을 써야 합니다. 수군은 분명 많은 수효를 믿고 단번에 우리 성들을 함락시키려 할 것입니다. 군사의 숫자에서 열세인 우리 고구려가 저들과 정면으로 맞딱드려봤자 승산이 없습니다.”

 

을지문덕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고건무가 반박했다.

 

“저들이 우리 강토에 들어온다면 백성들의 피해가 막심할 것이오. 차라리 지난번처럼 요택에서 저들을 공격하여 섬멸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이야말로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이라 여겨지오.”

 

잠자코 듣고 있던 영양태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적군이 사오십만 정도의 군사라면 지난번처럼 오택으로 나아가 싸우겠지만, 저들은 도합 백만 대군이다. 요택에서 막아낼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을지문덕은 태왕의 말씀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이번 전쟁에서의 자신의 구상을 털어놓았다.

 

“지난 수국과의 전쟁 이후, 재침에 대비해 수백 명의 간자들을 수국 전역에 침투시켜 동향을 파악해 왔사옵니다. 또한 군사의 조련과 군비의 확충은 물론 변방의 성주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유사시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므로 도적들은 요하를 넘는 즉시 우리가 쳐 놓은 그물에 걸려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을지문덕은 자신감이 넘쳤다.

 

이때 연태조가 신중하게 말했다.

 

“우리가 요동 방어선에서 수군의 주력을 묶어 놓을 수만 있다면 막리지의 계책이 좀 더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동성의 병력으로 수의 대군을 막을 수 있을지 걱정스럽습니다.”

 

을지문덕은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요동성주(遼東城主) 고연탁(高連卓)은 침착하고 지략이 뛰어난 장수입니다. 그라면 아무리 백만 대군이라 해도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연탁 장군을 믿어보기로 하자.”

 

영양태왕은 결론을 짓고 나서 신하들을 둘러보며 명했다.

 

“막리지 겸 병마원수 을지문덕은 이번 전쟁에서 총 책임을 맡아 고구려 전군을 지휘토록 하라. 준비가 끝나는 대로 요동으로 떠나라.”

 

고건무는 가슴속에서 불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비록 을지문덕이 변방을 안정시킨 공로가 있다고는 하지만 전쟁에 있어서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자신이 그런 자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태왕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것은 태왕의 동생인 고건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쓰린 속을 달래며 명을 받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