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관(臨渝關)을 통과한 양제(煬帝)가 거느린 수국(隨國) 군사들은 진군을 거듭하여 3월 중순이 되어서 요하(遼河)에 도착했다. 양제 일행이 요하 어디에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려라에서 요동성(遼東城)으로 가는 길목 어디였던 것 같다. 이때에 대사자(大使者) 온준(溫俊)·대형(大兄) 해승유(解昇裕)·대모달(大模達) 재증협무(再曾協武) 등이 인솔하는 2만의 고구려군이 적군의 도강(渡江)을 막기 위해 유리한 지점에 진을 치고 있었다.
양제는 신하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고구려 군사들을 단숨에 제압하여야 한다. 손쉽게 강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는가?”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가 나서서 아뢰었다.
“군사 수대로 뗏목을 만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 부교(符橋)를 세워서 단숨에 강을 건너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양제는 즉석에서 우문개에게 세 개의 부교를 만들도록 했다.
우문개의 설계에 의해 만들어진 부교는 수군(隨軍) 공병(工兵)들에 의해 강변으로 운반되었다. 현재의 요하를 보면 의외로 그렇게 넓지 않다. 눈으로 보아서는 정확하지 않지만 서울에서 보는 한강의 절반 정도로 보인다. 그래도 다리를 놓기에는 역시 길이가 만만치 않다. 게다가 당시의 요하 유역은 2백리 정도가 사람이 살 수 없고, 통행하기도 힘든 진창이었다고 전한다.
이런 곳에 수군 공병들은 부교를 강에서 직접 설치한 것이 아니라 안전한 곳에서 만든 후 강으로 운반해 와 사다리 놓듯 걸쳤다. 양제는 부교가 완성되자 군사들에게 즉각 도강(渡江) 명령을 내렸다. 우둔위대장군(右屯衛大將軍) 맥철장(麥鐵杖)이 선봉장으로서 무분랑장(茂賁郎將) 전사웅(錢士雄)·호분랑장(虎賁郎將) 맹차(孟叉)와 더불어 군사들을 거느리고 부교 위를 달렸다. 그런데 수군에게는 불행하게도 측정이 조금 잘못되어서 다리가 3미터 가량 모자랐다. 그리하여 앞선 군사들이 뒤에서 달려드는 군사들에게 떠밀려 차가운 물로 떨어졌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강가 동안의 언덕 위에 궁시(弓矢)를 든 고구려 군사들이 나타나 부교 쪽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맥철장은 이대로 있다가는 몰살(沒殺)을 면키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적군에게 등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왼손에 원방패(圓防牌)를 들고 오른손에 쥔 장창(長槍)을 내두르며 날아오는 화살을 힘겹게 막아냈다. 그때 뭍에서는 고구려의 도부수(刀斧手)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강가로 올라오는 수병(隨兵)들을 무자비하게 도륙(屠戮)하고 있었다.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한 맥철장은 부하 장수인 전사웅·맹차를 데리고 부교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비처럼 쏟아지는 고구려군의 화살을 쳐내며 허리까지 차오르는 물살을 헤치고 강기슭으로 나아갔다.
한편 강 서안(西岸)에서는 부교가 짧아 군사들이 강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양제는 친히 보검(寶劍)을 빼들고 군사들을 독려해서 부교로 밀어 넣었다.
고구려의 군사들에게 둘러싸여 고군분투(孤軍奮鬪)하던 맥철장은 자신이 어느새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처지에 놓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를 호위하고 있던 수병들은 어느새 물속에 머리를 박은 채 강물의 들썩임에 따라 덩달아 춤을 추었다. 군마(軍馬)에 늠름하게 앉아 미첨도(眉尖刀)를 꼬나잡은 고구려의 장수(將帥)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맥철장에게 소리쳤다.
“나는 고구려의 대형 해승유라고 한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그러나 맥철장은 끝까지 무인(武人)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저항했다. 해승유는 말을 몰아 맥철장에게 접근하더니 미첨도를 높이 쳐들었다. 맥철장은 해승유의 공격을 막아내려고 원방패를 들어올렸으나 도보(徒步) 상태에서 마상(馬上)의 적을 맞아 제대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맥철장은 해승유의 미첨도에 정수리를 얻어맞고 그 자리에서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전사웅은 역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고구려 군사들에게 다가갔지만 의욕만 가지고는 태산처럼 버티고 서 있는 고구려 군사들의 장막을 뚫을 수 없었다. 고구려의 궁수대(弓手隊)를 이끄던 재증협무가 전사웅을 보고 궁시(弓矢)를 겨누어 화살을 날렸다. 목 언저리에 화살을 맞은 전사웅 역시 캄캄한 요하의 물속에 잠겼다.
맹차는 조금도 상황이 반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몸을 피해 달아나려고 했지만 양쪽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지 못해 대꼬챙이에 꽂힌 개구리처럼 물속에 쳐박혔다.
서전(緖戰)에서 장수(將帥) 셋이 전사하고 2만여명이 넘는 수병(隨兵)이 살상되는 피해를 입자 양제는 하는 수 없이 전군에 후퇴 명령을 내렸다. 이때는 이미 수병들의 시체가 요하 동쪽 기슭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양제는 첫 전투에서 패배의 쓴잔을 마셨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이튿날부터 매서운 공격을 퍼부었다. 우문개가 공병들을 재촉하여 이틀 만에 부교를 다시 만들자, 양제는 그동안 속속 집결한 후속부대들을 도강작전에 투입했다. 양제의 명을 받은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우문술(宇文述)과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우중문(于仲文)이 이끄는 대군이 일거에 부교를 넘어서자, 요하 동편을 지키던 온준·해승유·재증협무 등의 고구려군은 더는 버티어 내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죽여도 끝없이 몰려오는 수군을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
한동안 궁사전(弓射戰)을 벌이며 수군(隨軍)을 사살하던 고구려의 군사들은 적당한 때를 노려 강변을 내주고 요동성(遼東城)과 건안성(建安城) 방면으로 후퇴했다. 이 치열한 싸움에서 수군은 엄청나게 많은 사상자를 냈다. 하지만 백만이 넘는 대군이었으므로 양제에게는 그다지 큰 타격이라 여겨지지 않았다. 그는 어느 정도의 피해는 입었지만 요하 동안(東岸)을 점령했기에, 수군의 승리라고 자위하며 기고만장(氣高萬丈)했다.
고구려군으로서도 소기의 성과를 충분히 거둔 싸움이었다. 수나라의 군사들을 열흘이나 요하에 묶어둔 것만 해도 큰 성과였다.
을지문덕은 시시각각으로 전황을 보고받았다. 그는 예상했던 대로 일들이 진행되자, 다음 계획을 준비했다.
수(隨)의 대군은 요하를 건넌 후에 곧바로 요동성으로 향했다. 군사들의 행렬이 일으키는 흙먼지가 모래 폭풍을 연상시켰다.
이때 요동성에서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고구려 국경 방어의 중심인 요동성은 수백 년 간 이어진 수많은 외침(外侵)에도 성문을 열어 본 적이 없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였다.
요동성은 태자하(太子河)를 해자(垓字)로 활용하고, 평지성(平地城)으로서, 산성(山城)에 비해 떨어지는 방어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큰 돌을 써서 십여 장 높이의 거대한 성벽을 쌓았다. 방형(方形)을 취한 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외성의 네 귀퉁이에는 점장대(點將坮)를 세워 사방을 살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요동성은 성의 총길이가 이십여리에 이르는 큰 성이었다. 성벽 위는 말이 양 방향에서 달려와도 부딪치지 않을 정도로 넓었고, 궁수들을 보호하기 위한 엄호물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었다. 성문은 북쪽과 동쪽으로 나 있는데, 성문 주위로 치(雉)를 두름으로써 적군이 성문을 쉽게 뚫지 못하게 했다.
요동성은 북쪽으로 백암성(白巖城)과 개모성(蓋牟城) 남쪽으로 안시성(安市城), 건안성과 긴밀한 연락을 유지함으로써 방어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을지문덕의 지시를 받은 요동성주(遼東城主) 대형(大兄) 고연탁(高連卓)은 삼만에 이르는 정병(精兵)을 조련하는 한편, 군량미 오십만여 석을 비축하고 무기와 성벽을 수리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성문을 굳게 지키고 싸운다면 아무리 많은 수의 적군들이 공격해온다 할지라도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요하에서 돌아온 군사들로부터 수군의 전력에 대해 보고받았기에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고연탁은 성 곳곳을 순시하며 군사들을 독려하고 미진한 부분이 없는지를 살폈다.
드디어 수국의 대군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요동성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납게 펄럭이는 기치(旗幟)가 하늘을 뒤덮고 색색의 갑옷이 대지를 끝없이 메웠다. 고연탁은 이전에 그처럼 많은 군사들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장수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맡은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단련이 되어 있었다. 고연탁은 금세 냉정을 되찾고 매와 같이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적군의 허실을 살폈다.
수군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성을 물샐틈없이 포위해 버렸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바다뿐이라는 말처럼 요동의 하늘 아래에는 온통 수국의 군사들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내일까지 말미를 주겠다. 굳이 목숨을 버릴 필요가 있느냐? 항복하면 각기 지위에 합당한 예우를 받게 되리라.”
공격에 들어가기 앞서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최홍승(崔弘昇)이 회유(懷柔)에 나섰다.
고연탁을 비롯한 요동성 수비군의 장수와 병사들은 이를 커다란 모욕으로 여겼다.
“칼을 들었으면 휘둘러라. 창을 들었으면 찔러라. 활을 들었으면 쏘아라. 전장에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느냐?”
그들의 의지는 요동성의 견고한 성곽만큼이나 굳건했다.
요동성에 대한 수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수군은 높고 견고한 고구려의 성들을 공략하기 위해 각종 공성구(攻城具)를 동원하였다. 투석기로 돌을 날려 성벽을 파괴하거나 성벽 위의 적군과 방어무기를 분쇄하는 발석차(發石車), 성벽이나 성문을 파괴하기 위해 끝을 뾰족하게 깎은 통나무를 밀고 가서 부딪치는 충차(衝車), 나무로 틀을 짜고 좌우에 각각 세개씩 도합 여섯개의 바퀴를 달아 굴려서 움직이며, 앞쪽에 굵직한 두개의 높은 기둥을 세우고 뒤쪽 바닥에서부터 비스듬하게 계단을 만들어 2단계의 사닥다리를 세우는 운제(雲梯)에다 성벽 가까이 접근해 땅을 팔 수 있도록 만든 장갑으로 된 전호피차(塡壕皮車), 이동식 망루 내부에 병사를 태운 다음 도르래를 이용해 망루를 올리고 성(城) 내부의 사정을 염탐하기 위한 소차(巢車) 등이 실전 배치되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기계들을 움직이기 위해서 따로 치중대(輜重隊)가 구성되었다.
양제는 이런 신무기들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 자신하고 있었다. 게다가 성을 지키는 군사들보다 수십 배나 많은 군사로 공격한다면 함락시키지 못할 성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전투가 벌어지자,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요동성주(遼東城主) 대형(大兄) 고연탁(高連卓)은 아장(亞將)인 모달(模達) 옥승인(玉承因)·말객(末客) 간상원(簡相原)을 대동하여 자신이 직접 남문에서 수성전(守城戰)을 지휘하였고, 요하(遼河)에서의 방어전(防禦戰)에 참전하였던 대사자(大使者) 온준(溫俊)과 대형(大兄) 해승유(解昇裕)에게는 동문에서 군사를 독려하도록 했으며, 요동성 수비군의 참좌(參佐)인 모달(模達) 모선각(牟先角)에게는 서문을 맡겼다.
수군(隨軍)은 어느새 장마철 무성하게 자라난 수풀처럼 벌판을 메우며 발석차를 도열시키고 족히 수백 근은 됨직한 바위를 날렸다. 요동성 수비군은 성벽 주변에 마름쇠를 뿌리고 포노(砲弩)와 강노(强弩)를 발사해 수군의 전진을 막았다. 쏘나기처럼 쏟아지는 돌과 화살 세례를 받자 진격하던 수군 병사들은 주춤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전열을 정비하여 여러번 무두질해 쇠뇌 공격조차 뚫지 못할 정도로 질겨진 가죽을 씌운 전호피차(塡壕皮車)들을 앞세우고 그 뒤에 장방패(長防牌)를 든 수군 보병들이 화살을 막으며 운제를 끌고 요동성의 성벽으로 접근해 갔다.
“저들은 분명 충차로 남문을 공략하는 동시에, 운제를 걸고 성벽을 타 오르려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수성전(守城戰)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으니 저들은 결코 목적을 이룰 수 없으리라. 그렇다고 절대 방심해서도 아니 된다. 전투에서 순간의 부주의는 곧 패배로 연결될 수 있다.”
성주인 고연탁은 부관들에게 주의를 주고는 성벽을 뛰어 다니며 군사들을 독려했다. 성벽 가까이로 접근해 온 수군의 강노에서 쏘아진 화살이 곳곳에서 날아오르고 있었다. 성벽으로 접근한 수군 병사들이 운제의 사다리를 뻗어 올렸다.수십 개의 운제가 앞을 다투어 성벽 위에 걸쳐졌다. 전호피차 밑에 숨어 있던 군사들과 방패를 들고 접근한 군사들이 일제히 운제를 타고 올랐다. 성벽 아래로 시선이 쏠린 틈을 타서 발석차가 성 가까이로 접근하여 거대한 바위를 날렸다. 성벽 곳곳에 바위가 떨어졌지만 성곽이 워낙 튼튼하여 크게 부서지거나 무너져 내리지는 않았다.
어지럽게 전개되는 수군의 공격 속에서도 요동성을 수비하는 고구려 군사들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요동성 수비군은 장방패(長防牌)를 이용하여 날아드는 수군의 화살을 막고 구창(鈎槍)으로 성벽에 걸친 운제를 밀어내거나 장창(長槍)으로 올라오는 적병을 찔러 떨어뜨렸다. 고구려의 궁수(弓手)들은 성가퀴 뒤에 몸을 숨긴 채 성벽으로 다가오는 적병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이에 성민(城民)들까지 합세하여 끓는 물이나 오물을 붓거나 바위와 통나무들을 던져 기어오르는 적병을 물리쳤다. 기합과 비명소리가 섞여서 울려 퍼지는 가운데 수병(隨兵)들의 시신(屍身)이 요동성 앞에 즐비하게 쌓여 갔다.
『고구려 병마대원수 을지문덕 전기』4. 제2차 여수전쟁(麗隨戰爭) (3)
● 요하(遼河)에서의 공방전(攻防戰)
임유관(臨渝關)을 통과한 양제(煬帝)가 거느린 수국(隨國) 군사들은 진군을 거듭하여 3월 중순이 되어서 요하(遼河)에 도착했다. 양제 일행이 요하 어디에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려라에서 요동성(遼東城)으로 가는 길목 어디였던 것 같다. 이때에 대사자(大使者) 온준(溫俊)·대형(大兄) 해승유(解昇裕)·대모달(大模達) 재증협무(再曾協武) 등이 인솔하는 2만의 고구려군이 적군의 도강(渡江)을 막기 위해 유리한 지점에 진을 치고 있었다.
양제는 신하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고구려 군사들을 단숨에 제압하여야 한다. 손쉽게 강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는가?”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가 나서서 아뢰었다.
“군사 수대로 뗏목을 만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 부교(符橋)를 세워서 단숨에 강을 건너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양제는 즉석에서 우문개에게 세 개의 부교를 만들도록 했다.
우문개의 설계에 의해 만들어진 부교는 수군(隨軍) 공병(工兵)들에 의해 강변으로 운반되었다. 현재의 요하를 보면 의외로 그렇게 넓지 않다. 눈으로 보아서는 정확하지 않지만 서울에서 보는 한강의 절반 정도로 보인다. 그래도 다리를 놓기에는 역시 길이가 만만치 않다. 게다가 당시의 요하 유역은 2백리 정도가 사람이 살 수 없고, 통행하기도 힘든 진창이었다고 전한다.
이런 곳에 수군 공병들은 부교를 강에서 직접 설치한 것이 아니라 안전한 곳에서 만든 후 강으로 운반해 와 사다리 놓듯 걸쳤다. 양제는 부교가 완성되자 군사들에게 즉각 도강(渡江) 명령을 내렸다. 우둔위대장군(右屯衛大將軍) 맥철장(麥鐵杖)이 선봉장으로서 무분랑장(茂賁郎將) 전사웅(錢士雄)·호분랑장(虎賁郎將) 맹차(孟叉)와 더불어 군사들을 거느리고 부교 위를 달렸다. 그런데 수군에게는 불행하게도 측정이 조금 잘못되어서 다리가 3미터 가량 모자랐다. 그리하여 앞선 군사들이 뒤에서 달려드는 군사들에게 떠밀려 차가운 물로 떨어졌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강가 동안의 언덕 위에 궁시(弓矢)를 든 고구려 군사들이 나타나 부교 쪽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맥철장은 이대로 있다가는 몰살(沒殺)을 면키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적군에게 등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왼손에 원방패(圓防牌)를 들고 오른손에 쥔 장창(長槍)을 내두르며 날아오는 화살을 힘겹게 막아냈다. 그때 뭍에서는 고구려의 도부수(刀斧手)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강가로 올라오는 수병(隨兵)들을 무자비하게 도륙(屠戮)하고 있었다.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한 맥철장은 부하 장수인 전사웅·맹차를 데리고 부교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비처럼 쏟아지는 고구려군의 화살을 쳐내며 허리까지 차오르는 물살을 헤치고 강기슭으로 나아갔다.
한편 강 서안(西岸)에서는 부교가 짧아 군사들이 강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양제는 친히 보검(寶劍)을 빼들고 군사들을 독려해서 부교로 밀어 넣었다.
고구려의 군사들에게 둘러싸여 고군분투(孤軍奮鬪)하던 맥철장은 자신이 어느새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처지에 놓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를 호위하고 있던 수병들은 어느새 물속에 머리를 박은 채 강물의 들썩임에 따라 덩달아 춤을 추었다. 군마(軍馬)에 늠름하게 앉아 미첨도(眉尖刀)를 꼬나잡은 고구려의 장수(將帥)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맥철장에게 소리쳤다.
“나는 고구려의 대형 해승유라고 한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그러나 맥철장은 끝까지 무인(武人)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저항했다. 해승유는 말을 몰아 맥철장에게 접근하더니 미첨도를 높이 쳐들었다. 맥철장은 해승유의 공격을 막아내려고 원방패를 들어올렸으나 도보(徒步) 상태에서 마상(馬上)의 적을 맞아 제대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맥철장은 해승유의 미첨도에 정수리를 얻어맞고 그 자리에서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전사웅은 역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고구려 군사들에게 다가갔지만 의욕만 가지고는 태산처럼 버티고 서 있는 고구려 군사들의 장막을 뚫을 수 없었다. 고구려의 궁수대(弓手隊)를 이끄던 재증협무가 전사웅을 보고 궁시(弓矢)를 겨누어 화살을 날렸다. 목 언저리에 화살을 맞은 전사웅 역시 캄캄한 요하의 물속에 잠겼다.
맹차는 조금도 상황이 반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몸을 피해 달아나려고 했지만 양쪽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지 못해 대꼬챙이에 꽂힌 개구리처럼 물속에 쳐박혔다.
서전(緖戰)에서 장수(將帥) 셋이 전사하고 2만여명이 넘는 수병(隨兵)이 살상되는 피해를 입자 양제는 하는 수 없이 전군에 후퇴 명령을 내렸다. 이때는 이미 수병들의 시체가 요하 동쪽 기슭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양제는 첫 전투에서 패배의 쓴잔을 마셨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이튿날부터 매서운 공격을 퍼부었다. 우문개가 공병들을 재촉하여 이틀 만에 부교를 다시 만들자, 양제는 그동안 속속 집결한 후속부대들을 도강작전에 투입했다. 양제의 명을 받은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우문술(宇文述)과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우중문(于仲文)이 이끄는 대군이 일거에 부교를 넘어서자, 요하 동편을 지키던 온준·해승유·재증협무 등의 고구려군은 더는 버티어 내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죽여도 끝없이 몰려오는 수군을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
한동안 궁사전(弓射戰)을 벌이며 수군(隨軍)을 사살하던 고구려의 군사들은 적당한 때를 노려 강변을 내주고 요동성(遼東城)과 건안성(建安城) 방면으로 후퇴했다. 이 치열한 싸움에서 수군은 엄청나게 많은 사상자를 냈다. 하지만 백만이 넘는 대군이었으므로 양제에게는 그다지 큰 타격이라 여겨지지 않았다. 그는 어느 정도의 피해는 입었지만 요하 동안(東岸)을 점령했기에, 수군의 승리라고 자위하며 기고만장(氣高萬丈)했다.
고구려군으로서도 소기의 성과를 충분히 거둔 싸움이었다. 수나라의 군사들을 열흘이나 요하에 묶어둔 것만 해도 큰 성과였다.
을지문덕은 시시각각으로 전황을 보고받았다. 그는 예상했던 대로 일들이 진행되자, 다음 계획을 준비했다.
수(隨)의 대군은 요하를 건넌 후에 곧바로 요동성으로 향했다. 군사들의 행렬이 일으키는 흙먼지가 모래 폭풍을 연상시켰다.
이때 요동성에서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고구려 국경 방어의 중심인 요동성은 수백 년 간 이어진 수많은 외침(外侵)에도 성문을 열어 본 적이 없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였다.
요동성은 태자하(太子河)를 해자(垓字)로 활용하고, 평지성(平地城)으로서, 산성(山城)에 비해 떨어지는 방어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큰 돌을 써서 십여 장 높이의 거대한 성벽을 쌓았다. 방형(方形)을 취한 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외성의 네 귀퉁이에는 점장대(點將坮)를 세워 사방을 살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요동성은 성의 총길이가 이십여리에 이르는 큰 성이었다. 성벽 위는 말이 양 방향에서 달려와도 부딪치지 않을 정도로 넓었고, 궁수들을 보호하기 위한 엄호물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었다. 성문은 북쪽과 동쪽으로 나 있는데, 성문 주위로 치(雉)를 두름으로써 적군이 성문을 쉽게 뚫지 못하게 했다.
요동성은 북쪽으로 백암성(白巖城)과 개모성(蓋牟城) 남쪽으로 안시성(安市城), 건안성과 긴밀한 연락을 유지함으로써 방어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을지문덕의 지시를 받은 요동성주(遼東城主) 대형(大兄) 고연탁(高連卓)은 삼만에 이르는 정병(精兵)을 조련하는 한편, 군량미 오십만여 석을 비축하고 무기와 성벽을 수리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성문을 굳게 지키고 싸운다면 아무리 많은 수의 적군들이 공격해온다 할지라도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요하에서 돌아온 군사들로부터 수군의 전력에 대해 보고받았기에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고연탁은 성 곳곳을 순시하며 군사들을 독려하고 미진한 부분이 없는지를 살폈다.
드디어 수국의 대군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요동성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납게 펄럭이는 기치(旗幟)가 하늘을 뒤덮고 색색의 갑옷이 대지를 끝없이 메웠다. 고연탁은 이전에 그처럼 많은 군사들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장수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맡은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단련이 되어 있었다. 고연탁은 금세 냉정을 되찾고 매와 같이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적군의 허실을 살폈다.
수군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성을 물샐틈없이 포위해 버렸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바다뿐이라는 말처럼 요동의 하늘 아래에는 온통 수국의 군사들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내일까지 말미를 주겠다. 굳이 목숨을 버릴 필요가 있느냐? 항복하면 각기 지위에 합당한 예우를 받게 되리라.”
공격에 들어가기 앞서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최홍승(崔弘昇)이 회유(懷柔)에 나섰다.
고연탁을 비롯한 요동성 수비군의 장수와 병사들은 이를 커다란 모욕으로 여겼다.
“칼을 들었으면 휘둘러라. 창을 들었으면 찔러라. 활을 들었으면 쏘아라. 전장에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느냐?”
그들의 의지는 요동성의 견고한 성곽만큼이나 굳건했다.
요동성에 대한 수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수군은 높고 견고한 고구려의 성들을 공략하기 위해 각종 공성구(攻城具)를 동원하였다. 투석기로 돌을 날려 성벽을 파괴하거나 성벽 위의 적군과 방어무기를 분쇄하는 발석차(發石車), 성벽이나 성문을 파괴하기 위해 끝을 뾰족하게 깎은 통나무를 밀고 가서 부딪치는 충차(衝車), 나무로 틀을 짜고 좌우에 각각 세개씩 도합 여섯개의 바퀴를 달아 굴려서 움직이며, 앞쪽에 굵직한 두개의 높은 기둥을 세우고 뒤쪽 바닥에서부터 비스듬하게 계단을 만들어 2단계의 사닥다리를 세우는 운제(雲梯)에다 성벽 가까이 접근해 땅을 팔 수 있도록 만든 장갑으로 된 전호피차(塡壕皮車), 이동식 망루 내부에 병사를 태운 다음 도르래를 이용해 망루를 올리고 성(城) 내부의 사정을 염탐하기 위한 소차(巢車) 등이 실전 배치되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기계들을 움직이기 위해서 따로 치중대(輜重隊)가 구성되었다.
양제는 이런 신무기들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 자신하고 있었다. 게다가 성을 지키는 군사들보다 수십 배나 많은 군사로 공격한다면 함락시키지 못할 성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전투가 벌어지자,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요동성주(遼東城主) 대형(大兄) 고연탁(高連卓)은 아장(亞將)인 모달(模達) 옥승인(玉承因)·말객(末客) 간상원(簡相原)을 대동하여 자신이 직접 남문에서 수성전(守城戰)을 지휘하였고, 요하(遼河)에서의 방어전(防禦戰)에 참전하였던 대사자(大使者) 온준(溫俊)과 대형(大兄) 해승유(解昇裕)에게는 동문에서 군사를 독려하도록 했으며, 요동성 수비군의 참좌(參佐)인 모달(模達) 모선각(牟先角)에게는 서문을 맡겼다.
수군(隨軍)은 어느새 장마철 무성하게 자라난 수풀처럼 벌판을 메우며 발석차를 도열시키고 족히 수백 근은 됨직한 바위를 날렸다. 요동성 수비군은 성벽 주변에 마름쇠를 뿌리고 포노(砲弩)와 강노(强弩)를 발사해 수군의 전진을 막았다. 쏘나기처럼 쏟아지는 돌과 화살 세례를 받자 진격하던 수군 병사들은 주춤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전열을 정비하여 여러번 무두질해 쇠뇌 공격조차 뚫지 못할 정도로 질겨진 가죽을 씌운 전호피차(塡壕皮車)들을 앞세우고 그 뒤에 장방패(長防牌)를 든 수군 보병들이 화살을 막으며 운제를 끌고 요동성의 성벽으로 접근해 갔다.
“저들은 분명 충차로 남문을 공략하는 동시에, 운제를 걸고 성벽을 타 오르려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수성전(守城戰)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으니 저들은 결코 목적을 이룰 수 없으리라. 그렇다고 절대 방심해서도 아니 된다. 전투에서 순간의 부주의는 곧 패배로 연결될 수 있다.”
성주인 고연탁은 부관들에게 주의를 주고는 성벽을 뛰어 다니며 군사들을 독려했다. 성벽 가까이로 접근해 온 수군의 강노에서 쏘아진 화살이 곳곳에서 날아오르고 있었다. 성벽으로 접근한 수군 병사들이 운제의 사다리를 뻗어 올렸다.수십 개의 운제가 앞을 다투어 성벽 위에 걸쳐졌다. 전호피차 밑에 숨어 있던 군사들과 방패를 들고 접근한 군사들이 일제히 운제를 타고 올랐다. 성벽 아래로 시선이 쏠린 틈을 타서 발석차가 성 가까이로 접근하여 거대한 바위를 날렸다. 성벽 곳곳에 바위가 떨어졌지만 성곽이 워낙 튼튼하여 크게 부서지거나 무너져 내리지는 않았다.
어지럽게 전개되는 수군의 공격 속에서도 요동성을 수비하는 고구려 군사들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요동성 수비군은 장방패(長防牌)를 이용하여 날아드는 수군의 화살을 막고 구창(鈎槍)으로 성벽에 걸친 운제를 밀어내거나 장창(長槍)으로 올라오는 적병을 찔러 떨어뜨렸다. 고구려의 궁수(弓手)들은 성가퀴 뒤에 몸을 숨긴 채 성벽으로 다가오는 적병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이에 성민(城民)들까지 합세하여 끓는 물이나 오물을 붓거나 바위와 통나무들을 던져 기어오르는 적병을 물리쳤다. 기합과 비명소리가 섞여서 울려 퍼지는 가운데 수병(隨兵)들의 시신(屍身)이 요동성 앞에 즐비하게 쌓여 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