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으로 돌아온 기린은 가만히 거울을 보았다. 아직 이마의 인(印)도 채 여물지 않았다. 벌써 열일곱인데. 조급해지는 마음은 아무리 다잡으려고 노력해도 잡히지가 않는다. 자신의 나이에 이미 대적할 존재가 없었다는 그를 생각하면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드는 자괴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역대 최강의 힘을 발휘한다는 그 사람. 신수를 지배하는 인간. 기린은 아픈 가슴위로 한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 놈. 답지 않게 으으득 이까지 갈아붙이며 기린은 한망어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잊혀지지 않는 기억. 그리고 절대로 잊어선 안 되는 그날의 정경이 어제 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바닥을 적시는 피. 그 끈끈한 불길함이 발치까지 왔을 때 그만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스러지는 엄마, 울부짖는 아빠… 지옥 같은 그 날의 기억 가운데서 그는 웃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 한 가운데를 가로지른 한 줄기의 핏방울이 요사스럽기 그지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깜짝 놀라 돌아본 곳에는 지금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부동심을 연마하는 사랍답게 표정이 얼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저 사람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늘 자신의 기분을 알아채곤 했으니 별무소용일테지만 말이다. “안 좋은 생각했나보네.” “남의 집을 방문하기는 좀 늦은 시간입니다. 그리고 오실 때는 대문을 이용하십사 부탁드렸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아아, 우리 사이에 딱딱하게 무슨. 괜찮아, 괜찮아.” “우리 사이라니요?” 싱긋,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화려한 외모의 남자는 그야말로 극상의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기린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좋아하는 사이.” 그리고 재빨리 덧붙였다. “내가.” “청룡님은 상당히 마음이 넓으신가봐요. 이런 쓸데없는 일에까지 힘을 빌려주시는군요.” 쌀쌀맞게 내뱉는 말과는 달리 차를 준비하는 손끝이 상냥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인가. 이렇게 무르게 구니 이 사람이 계속 멋대로 행동하는 거다. 내심 한숨을 쉬면서도 기린은 왜 냉정하게 뿌리치지 못하는 것인지 스스로를 잘 알 수 없었다. “이 녀석은 기린이 끓여주는 차를 좋아하거든.” “청룡님께 그런 말투는 실례 아닌가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에 날이 선다. 아직 신수와 대화도 나눠보지 못한 기린에게 있어 이런 이 사람의 태도는 늘 상처가 되었다. 그런 점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아, 괜찮아. 그리고 이 녀석 이름은 풍천(風泉)이야. 그렇게 불러줘.” 남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점은 정말로 그 청룡의 가문답다. 멋대로이고 자기 기분 위주인 남씨 일가는 대대로 용의 형을 가진 사람이 많이 출현했던 탓에 언젠가부터 청룡의 일족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것은 남씨 가문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었는데 얽메이기 싫어하는 성질이 청룡을 끄는 까닭이다. 덕분에 이렇게 신수를 애완동물이나 친구로 여기는 녀석까지도 청룡의 형이 될 수 있었던 거겠지. 기린은 전부터 이 사람의 무신경함과 뻔뻔함에 치를 떨어왔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아는 사이라지만 남의 방에, 한밤중에, 그것도 신수의 힘을 이용해서까지 쳐들어 올 정도다. 이건 정말 지나치지 않은가.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는 포기하고 마는 것도 지겨울 정도로 당해와서인지도 모른다. 뭐, 악의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라며 포기해버리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고 요즘에 와선 생각하고 있지만. “다 마셨으면 그만 돌아가시죠. 청룡님을 봐서 여기까지만, 입니다. 다음에 방문하실 때는 상식이 통할 시간과 방법을 이용해 주십시오.” “풍천. 이 녀석한테 청룡이라고 부르는 건 너한테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야.” “안녕히 가십시오. 풍천님.” “이런이런, 단단히 미움탔나보네.” 남규(南奎), 청룡의 일족이라고까지 불리는 천루(天樓)의 최강전사. 본래 인당과 천루는 욱도문 내에서도 가까이 지내는 사이였을 뿐더러 현(現) 천루가주, 즉 규의 큰 형은 기린의 아버지와 망년의 친교를 맺은 의형이었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형을 따라 인당에 드나들던 규는 어려서부터 기린을 유난히 귀여워 했었다. 또래가 없는 기린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에 사람들은 서로 외로운 처지에 잘 되었다고 흐뭇해하며 규와 기린이 친하게 지내기를 바랬다. 정작 기린은 귀찮을 뿐이었지만 규는 무뚝뚝한 기린의 태도에도 전혀 개의치 않아 가끔 이렇게 불쑥 찾아오곤 했다.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규(奎)는 단단히 팔짱을 끼고 노려보는 기린의 방어적인 태도에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저 녀석이 기린과 교통하지 못한다는 소린 들었다. 뭐 대부분은 철이 들 무렵부터 신수와 소통을 하게 되지만, 어디까지나 대부분이다. 더구나 기린의 형은 출현 자체가 드무니 조금은 편하게 생각해도 좋으련만. 너무 고지식해서 손해보는 타입이다. 물론 그런 점이 좋지만. 규는 생긋 미소지었다. 이렇게 딱딱하게 굳어 삐치는 것이 못견디게 귀여우니까 자꾸 놀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오늘은 단단히 미운 털이 박힌 것 같으니 조금은 만회해야지. “기린은 원래 조금 괴팍한 데가 있어서 늘 아슬아슬하게 세잎이라니까, 너무 초조하게 생각하지 마. 그럼 난 이만. 차 잘 마셨다고 풍천이 전하래. 다음에 보자!” 푸르스름한 용의 형상이 밤하늘에 안개처럼 흩뿌려졌다가 사라졌다. 그 위에 올라탄 규는 크게 손을 흔들었다. 투명한 물막이 움직이는 듯 하늘을 가로지른 후 금세 사라졌다. 늘 봐도 아름다운 광경. 이럴 때의 풍천과 규는 정말로 잘 어울린다. 신수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저런 것일까. 하지만 그 사람은 조금 달랐지. 기린은 얼굴을 굳혔다. 신수의 형들은 제각각 신수와 독특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인간이 신수의 우위에 서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것이야말로 신수를 능가하는 능력이 필요하기에. 그리고 그 중에서도 그 사람은 특별하다. 하지만… 기린은 이왕이면 풍천과 규처럼 되었으면 좋겠다고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청룡이 사라진 밤하늘 가득 옅은 물냄새가 떠돌았다. 11
신수의 형(神獸之形) 3
방으로 돌아온 기린은 가만히 거울을 보았다.
아직 이마의 인(印)도 채 여물지 않았다.
벌써 열일곱인데.
조급해지는 마음은 아무리 다잡으려고 노력해도 잡히지가 않는다.
자신의 나이에 이미 대적할 존재가 없었다는 그를 생각하면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드는 자괴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역대 최강의 힘을 발휘한다는 그 사람.
신수를 지배하는 인간.
기린은 아픈 가슴위로 한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 놈.
답지 않게 으으득 이까지 갈아붙이며
기린은 한망어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잊혀지지 않는 기억.
그리고 절대로 잊어선 안 되는 그날의 정경이 어제 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바닥을 적시는 피.
그 끈끈한 불길함이 발치까지 왔을 때
그만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스러지는 엄마, 울부짖는 아빠…
지옥 같은 그 날의 기억 가운데서 그는 웃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 한 가운데를 가로지른 한 줄기의 핏방울이 요사스럽기 그지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깜짝 놀라 돌아본 곳에는 지금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부동심을 연마하는 사랍답게 표정이 얼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저 사람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늘 자신의 기분을 알아채곤 했으니 별무소용일테지만 말이다.
“안 좋은 생각했나보네.”
“남의 집을 방문하기는 좀 늦은 시간입니다.
그리고 오실 때는 대문을 이용하십사 부탁드렸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아아, 우리 사이에 딱딱하게 무슨. 괜찮아, 괜찮아.”
“우리 사이라니요?”
싱긋,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화려한 외모의 남자는
그야말로 극상의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기린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좋아하는 사이.”
그리고 재빨리 덧붙였다.
“내가.”
“청룡님은 상당히 마음이 넓으신가봐요.
이런 쓸데없는 일에까지 힘을 빌려주시는군요.”
쌀쌀맞게 내뱉는 말과는 달리
차를 준비하는 손끝이 상냥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인가.
이렇게 무르게 구니 이 사람이 계속 멋대로 행동하는 거다.
내심 한숨을 쉬면서도
기린은 왜 냉정하게 뿌리치지 못하는 것인지 스스로를 잘 알 수 없었다.
“이 녀석은 기린이 끓여주는 차를 좋아하거든.”
“청룡님께 그런 말투는 실례 아닌가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에 날이 선다.
아직 신수와 대화도 나눠보지 못한 기린에게 있어
이런 이 사람의 태도는 늘 상처가 되었다.
그런 점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아, 괜찮아.
그리고 이 녀석 이름은 풍천(風泉)이야. 그렇게 불러줘.”
남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점은 정말로 그 청룡의 가문답다.
멋대로이고 자기 기분 위주인 남씨 일가는
대대로 용의 형을 가진 사람이 많이 출현했던 탓에
언젠가부터 청룡의 일족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것은 남씨 가문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었는데
얽메이기 싫어하는 성질이 청룡을 끄는 까닭이다.
덕분에 이렇게 신수를 애완동물이나 친구로 여기는 녀석까지도
청룡의 형이 될 수 있었던 거겠지.
기린은 전부터 이 사람의 무신경함과 뻔뻔함에 치를 떨어왔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아는 사이라지만
남의 방에, 한밤중에, 그것도 신수의 힘을 이용해서까지 쳐들어 올 정도다.
이건 정말 지나치지 않은가.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는 포기하고 마는 것도
지겨울 정도로 당해와서인지도 모른다.
뭐, 악의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라며 포기해버리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고 요즘에 와선 생각하고 있지만.
“다 마셨으면 그만 돌아가시죠.
청룡님을 봐서 여기까지만, 입니다.
다음에 방문하실 때는 상식이 통할 시간과 방법을 이용해 주십시오.”
“풍천. 이 녀석한테 청룡이라고 부르는 건
너한테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야.”
“안녕히 가십시오. 풍천님.”
“이런이런, 단단히 미움탔나보네.”
남규(南奎),
청룡의 일족이라고까지 불리는 천루(天樓)의 최강전사.
본래 인당과 천루는 욱도문 내에서도 가까이 지내는 사이였을 뿐더러
현(現) 천루가주, 즉 규의 큰 형은 기린의 아버지와 망년의 친교를 맺은 의형이었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형을 따라 인당에 드나들던 규는
어려서부터 기린을 유난히 귀여워 했었다.
또래가 없는 기린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에
사람들은 서로 외로운 처지에 잘 되었다고 흐뭇해하며
규와 기린이 친하게 지내기를 바랬다.
정작 기린은 귀찮을 뿐이었지만
규는 무뚝뚝한 기린의 태도에도 전혀 개의치 않아 가끔 이렇게 불쑥 찾아오곤 했다.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규(奎)는
단단히 팔짱을 끼고 노려보는 기린의 방어적인 태도에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저 녀석이 기린과 교통하지 못한다는 소린 들었다.
뭐 대부분은 철이 들 무렵부터 신수와 소통을 하게 되지만,
어디까지나 대부분이다.
더구나 기린의 형은 출현 자체가 드무니
조금은 편하게 생각해도 좋으련만.
너무 고지식해서 손해보는 타입이다.
물론 그런 점이 좋지만.
규는 생긋 미소지었다.
이렇게 딱딱하게 굳어 삐치는 것이 못견디게 귀여우니까
자꾸 놀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오늘은 단단히 미운 털이 박힌 것 같으니 조금은 만회해야지.
“기린은 원래 조금 괴팍한 데가 있어서
늘 아슬아슬하게 세잎이라니까, 너무 초조하게 생각하지 마.
그럼 난 이만.
차 잘 마셨다고 풍천이 전하래. 다음에 보자!”
푸르스름한 용의 형상이 밤하늘에 안개처럼 흩뿌려졌다가 사라졌다.
그 위에 올라탄 규는 크게 손을 흔들었다.
투명한 물막이 움직이는 듯 하늘을 가로지른 후 금세 사라졌다.
늘 봐도 아름다운 광경.
이럴 때의 풍천과 규는 정말로 잘 어울린다.
신수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저런 것일까.
하지만 그 사람은 조금 달랐지.
기린은 얼굴을 굳혔다.
신수의 형들은 제각각 신수와 독특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인간이 신수의 우위에 서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것이야말로 신수를 능가하는 능력이 필요하기에.
그리고 그 중에서도 그 사람은 특별하다.
하지만…
기린은 이왕이면 풍천과 규처럼 되었으면 좋겠다고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청룡이 사라진 밤하늘 가득 옅은 물냄새가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