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용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전기』4.구국운동에 나서다 ⑴

대모달2011.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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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일전쟁[露日戰爭] 와중에 한국 침탈한 일제(日帝)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정세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패배한 청국(淸國)은 열강에 의한 세계분할의 마지막 무대가 되고, 중국에서 이권을 얻으려는 국제적인 대립은 날로 격화되어 갔다. 러시아는 동청철도 부설권, 여순·대련 조차권을 차지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우위를 위협했다. 이로 인해 두 나라 사이에는 날카로운 대립이 벌어지게 되었다.



국제 정세는 영·미·일을 축으로 하는 해양 세력과 러시아, 프랑스를 축으로 하는 대륙 세력 간의 대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친러파[親露派]인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살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한국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격화되는 등 수세에 처하게 된 반면, 러시아는 친러정권[親露政權]을 성립시킨데 이어 만주에 출병해 청국과 비밀협약을 맺었다. 또 압록강 하류 용암포를 점령하여 포대를 쌓고 극동총독부(極東總督府)를 세워 남하정책을 추진했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1904년 2월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하고 선전포고도 없이 인천에 정박중인 러시아 군함을 격침시키는 한편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공격했다. 러일전쟁의 단초를 연 것이다.



러일전쟁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자 대한제국 정부는 국외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전쟁이 시작되자 서울에 군대를 진주시켜 일한의정서(日韓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했다. 일한의정서는 일본군의 한국내 전략 요충지 수용과 군사상의 편의 제공을 강요하는 내용이었다. 이 조약을 빌미로 일제는 광대한 토지를 군용지로 수용했으며, 각종 철도 부설권도 군용 명목으로 가로챘다.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은 이듬해 1월 여순(旅順)을 함락시키고 3월에는 봉천(奉天)에서 러시아군을 격퇴했다. 5월 대마도해전(對馬島海戰)에서는 러시아의 정예해군인 발틱함대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중장(中將) 휘하의 일본연합함대에게 참패하여 8척의 군함이 격침되고 6척의 군함이 나포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로써 일본은 전쟁의 승기를 잡게 된다. 1905년 1월 러시아는 자국내 군인들의 반란과 농민폭동으로 정국이 혼란에 빠졌고 일본도 전력이 고갈되었다. 그리고 8월에는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두 나라는 포츠머스에서 강화회의를 열고 휴전했다.



러일전쟁의 결과 일본은 남만주로 진출하고 러시아에게서 조선의 독점적 지배를 인정받는다. 여기에 1905년 10월, 러일전쟁 종전 직후 가쓰라 다로[桂太郞] 일본 수상과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미국 국무부 장관이 조선을 일본의 손아귀에 넘기는 내용의 비밀협약을 맺었다. 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이 인정한다는 내용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이 조선에 대한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며, 극동의 평화에 직접 공헌할 것으로 인정한다”면서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일본의 침략정책을 묵인·방조하였다. 이로써 한반도는 일제의 독무대가 되고, 1905년 11월 17일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을사늑약은 사실상 대한제국의 국권을 탈취하는 불법적인 조약이었다.



○ 일제(日帝)의 한국병탄(韓國倂呑)에 공헌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양녀(養女) 배정자(裵貞子)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은 을사늑약(乙巳勒約)은 일본의 특명전권대사(特命全權大使)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하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오적(五賊)이 협조하여 체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하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을사늑약 강압에 있었다. 하지만 일제의 배후에서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비밀정보를 일본 측에 알려주는 역할을 맡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본의 조선에 대한 병탄 과정을 도왔던 민족반역자(民族反逆者)가 있었으니, 바로 요화(妖花) 배정자(裵貞子)였다.



그녀의 어릴 적 이름은 분남(粉男)이었는데, 부친인 배지홍(裵祉洪)은 김해 고을에서 아전 노릇을 하다가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1873년에 대원군의 가병(家兵) 역할을 했다는 죄목을 쓰고 처형되었다. 이후 그녀는 모친과 함께 유랑생활을 하다가 밀양에서 관기(官妓)로 팔렸으나 도중에 뛰쳐나와 양산 통도사(通度寺)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우담(藕潭)이란 승명(僧名)으로 목탁을 두들기던 그녀는 2년 만에 다시 절을 뛰쳐나와 배회하다가 밀양관청에 체포되었는데, 그녀의 부친과 알고 지내던 사이였던 당시 밀양부사 정병하(鄭秉夏)는 그녀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일본으로 가서 살도록 주선해주었다.



1885년에 조선에서 밀정 노릇을 하던 일본인 마쓰오[松尾彦之助]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배정자는 김옥균(金玉均)의 소개로 일본 정계의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게 되었다. 배정자의 빼어난 미모에 끌린 이토는 그녀를 양녀(養女)로 삼아 자기 집에 들여앉히고는 다야마 데이코[田山貞子]라는 일본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토는 그녀를 고급 밀정으로 키울 요량으로 승마·수영·사격술 등을 교육받게 했다.



1894년에 조선에 돌아온 배정자는 고종(高宗)의 총애를 받으며 궁궐을 제 집 드나들듯이 다녔다. 러일전쟁 직전 이용익(李容翊)·이범진(李範晉) 등 친러파[親露派] 정치인들은 고종의 신변안전을 위해 평양으로 천도(遷都)하거나 고종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는 계획을 추진하려고 하였으나 배정자가 사전에 이 계획에 대한 정보를 입수, 일본공사관에 알림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이토가 초대 한국통감으로 부임하자 그녀의 오빠인 배국태(裵國泰)가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으며, 배정자는 이토를 등에 업고 막후 권력자로 행세하였다. 1909년 이토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로 사망하자 배정자는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고 외출도 못한 채 앓아 누웠다고 전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일본의 군사력이 시베리아에 진출하자 배정자는 봉천(奉天) 주재 일본공사관의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만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들의 동향을 정탐하면서 귀순공작을 담당하였다. 1920년에는 만주 지역 최대의 친일단체인 보민회(保民會)에서 고문을 맡아 중국인과 조선인 사이의 갈등을 조장하는 이간책(離間策)을 펼쳐 민족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방해하였다.



이렇게 ‘친일파의 수괴급’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매국미녀(賣國美女) 배정자(裵貞子)는 빼어난 미모와 밀정으로서의 화려한 경력에다 연령·민족을 불문한 ‘남성편력’으로도 유명하다. 그녀의 인생에 있어 이토 히로부미라는 존재는 가장 친밀하면서도 중요했던 인물이었다. 이토는 배정자의 양부(養父)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섹스 파트너이기도 했다. 배정자는 이토의 성욕(性慾)을 해소하기 위해 평소 실오라기 한 올도 걸치지 않은 전라(全裸) 상태에서 시중을 들었고, 이토가 잠자리에 들 때는 입술과 혀로 이토의 음경(陰莖)을 애무하는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토와 불륜한 성(性) 생활을 하면서도 일본유학생인 전재식(田在植)과 부부관계를 맺어 전유화(田有和)라는 딸 하나를 두었다. 조선에서 밀정 생활을 할 때는 일본공사관의 통역을 하고 있는 현영운(玄暎運)과 재혼하였고,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15기 졸업생인 박영철(朴榮喆)과 통정(通情)하기도 하였다. 1년만에 현영운과 이혼한 뒤에는 일본인 기업주 오하시[大橋], 친일파 부호 최씨(崔氏) 등과도 끊임없이 성관계를 가졌다. 1924년에 57세의 나이로 밀정에서 은퇴한 후에는 25세의 일본인 순사와 동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 망국 위기에 계몽운동에 나서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국운이 기울어가는 국망지추에 안중근은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안중근은《황성신문(皇城新聞)》·《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제국신문(帝國新聞)》과 미국에서 출간되는《공립신문(共立新聞)》등의 논설을 통하여 내외정세의 변화를 예의주시하는 한편『태서신사(泰西新史)』를 비롯해 각국의 역사책을 탐독하면서 민족의 진로를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을 지켜보던 안중근의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신문과 세계 여러 나라의 사정이 담긴 책을 통해 국내외 정세의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고, 이 전쟁의 목적이 한국을 가운데 놓고 서로 먹겠다고 벌이는 쟁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청일전쟁 와중에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를 비롯한 부일배(附日輩)들이 일본의 승리를 위해 발벗고 나섰다. 이들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기대하며 일본군에 군수품 운송을 지원하는 등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일반인들에게 영향력이 컸던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등 유림계의 거두들도 일본을 지지하면서 러시아 세력을 물리쳐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중근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당시 러시아가 영토야욕을 보이면서 한반도를 위협하자 일반 민심이 일본이 승리하기를 바라는 쪽으로 기운 것이다.



‘사실 안중근은 러일전쟁 때까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실상과 본질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가 남하하여 만주일대를 점령하여 군사를 두고 또 여순항을 군항으로 삼아 한반도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자력으로 러시아의 침략을 막아내기 어렵다고 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러일전쟁을 일본이 한국을 대신하여 러시아와 싸운 것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외세의 침략 가운데 러시아를 가장 경계하였다. 그것은 그의 표현대로 '백색인종'에 대한 경계심이기도 하지만, 러시아가 한반도에 침략하게 되면 한국의 처지가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서유럽 제국주의 열강 가운데 유일하게 우리와 영토를 맞대고 있었으므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한국의 위협으로 직결되었던 것이다.’



안중근은 하얼빈의거 뒤 집필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에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러시아는 동양함대를 조직하고 프랑스, 독일과 연합하여 요코스카 해상에 진입하여, 일본이 청일전쟁의 댓가로 빼앗은 요동반도를 청국에 반환할 것과 배상금을 삭감할 것을 요구해왔다. 표면에 나타나고 있는 러시아의 움직임은 천하의 공법을 따르는 정의의 사도처럼 보이나 그 내면에는 사람의 심술보다 더한 것이 도사리고 있었다.

러시아는 몇 해도 못 가서 교활한 수단으로 여순구를 조차하여 군항을 확장하고 철도건설을 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인은 수십 년 이래 봉천 이남의 대련, 여순, 우장(牛莊) 등의 따뜻한 항구를 한 곳이라도 차지하려는 욕심이 불과 같았으나 감히 손을 뻗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청국이 영국, 프랑스 양국으로부터 천진을 침범당하고 관동의 각 요새에 신식 병기를 설치하고 경계를 강화한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때를 절호의 기회로 삼은 것이다.’



안중근은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특별히 배일사상(排日思想)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하얼빈의거 뒤의 신문조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실제 한국 인민은 일로전역(日露戰役) 전까지는 호개(好個)의 친우(親友)로 일본을 좋아했고, 한국의 행복으로 믿고 있었다. 우리들 따위도 결코 배일사상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라고 진술했다.



안중근의 배일사상은 러일전쟁 과정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 야욕을 꿰뚫어보면서 싹트기 시작하였다. 일본이 러일전쟁을 도발한 것이 결코 한국을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한국을 집어삼키고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것임을 간파한 것이다.



일제의 한국 침략 야욕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1904년 6월에 일본은 한국 정부에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였다. 한국에 온 일본인들의 횡포도 심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러시아의 침략을 우려해 일본에 우호적이던 여론이 반일(反日)로 돌아섰다. 이 무렵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일부 유지들이 보안회(輔安會)를 창립했다. 1904년 7월 13일 심상진(沈相振)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다.



안중근은 보안회의 취지에 찬동하고 입회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보안회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보안회 간부들에게 한국 침략의 선도자인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대리공사와 부일배를 처단할 것을 제안했다.



‘명치 38년(1905년) 신조약 체결시 경성으로 나가 유생 등이 창설한 보안회에 가서 그 회(會)의 수령을 찾아가 해회(該會)의 주의 방침을 따지고 그 부진함을 타매하고 또한 말하기를 "나에게 지금 결사의 부하 50명이 있다. 만약 보안회에서 결사대 20명을 모아 아(我)와 일을 같이 하게 된다면 경성에 있는 일한 관리를 도살하고 나아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당무자를 암살하여 그 압박을 면케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쉽다"고 말했으므로 동회 수령이 이를 질책하고 방축(放逐)한 일이 있다.’



안중근은 일본의 침략에 위기감을 느끼며 마침 뜻을 같이 할 것으로 보이는 보안회를 찾아가 ‘의거’를 제안했지만 보안회 수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부터 안중근은 혼자서라도 생명을 바쳐 부일배와 일제의 침략자들을 처단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뜻을 함께하는 ‘결사부하’ 50명도 거느리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항일의열투쟁(抗日義烈鬪爭)의 효시(嚆矢)다.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의열투쟁의 효시를 나철(羅喆) 등의 을사오적(乙巳五賊) 암살 시도로 잡고 있지만 이보다 약 2년 앞선 1904년 안중근의 하야시와 부일세력 처단 구상을 의열투쟁사의 효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얼빈의거도 바로 이러한 의열투쟁 구상의 연결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안중근은 국내에서 발행되는《대한매일신보》와《황성신문》등 우국지사들이 만든 신문을 읽고, 외국에서 들어온 각종 역사책을 읽으면서 내외의 정세변화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러나 큰 기대를 걸고 찾아갔던 보안회 수령들을 만나보고는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여기서 다시 한번 부일배와 일제의 침략자들을 처단하고자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결심은 이후 안중근 사상과 행동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