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동양 성곽의 백미 <관광명소>

정은희2011.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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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수원 화성¨ 동양 성곽의 백미 <관광명소>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 화성¨ 동양 성곽의 백미 <관광명소>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1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수원 화성¨ 동양 성곽의 백미 <관광명소>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수원 화성¨ 동양 성곽의 백미 <관광명소>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수원 화성¨ 동양 성곽의 백미 <관광명소>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 화성¨ 동양 성곽의 백미 <관광명소>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수원화성의 역사적 의의

 


¨수원 화성¨ 동양 성곽의 백미 <관광명소>

실학의도시 수원화성

 

새수원은 출발부터 실학과 연결된다. 반계 유형원의 실학 사상이 새수원의 길을 열었고,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여러 실학자들이 축성에 이바지하였다.
더구나 시대적인 흐름은 실학 정신을 현실에 투입하지 않고는 안될 상황에 처해 있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서양의 과학과 기술 문명이 청나라를 통해 조선에 들어왔다. 또한 상업과 농업의 발달로 인한 경제 구조의 재편성은, 그때까지 조선을 이끌어왔던 성리학을 지극히 공리공담적인 구학으로 여기게까지 되었다.

정조는 아마 수원화성을 조선 실학의 실습장으로 쓰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좋은 이념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국가의 통치 전반에 활용한다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다.
더구나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 부류의 반대 또한 지나칠 수 없는 걸림돌이다.
또 기득권층의 저항도 충분히 예상된다. 이 모두를 피해가면서 현실에 적응시키는 방법으로도 수원화성을 건설했을 것이다.

기계나 기구의 개발과 활용은 백성의 수고를 덜어주는 역할도 하지만, 경비를 절감하면서 공역 기간을 단축시키는 지름길이다.
이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백성을 위한 수원화성

 

수원화성에는 국왕의 애민정신이 가득 담겨 있다.

설계를 변경해가면서까지 주민들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것과 공역자들에게 인건비를 지급한 점, 그리고 척서단. 제중단 등의 환약을 내려주고, 무더위와 인건비 미지급으로 인한 공사의 일시 중지 등은 애민정신의 소산이다.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처음 새수원의 건설 계획에는 성의 축조가 포함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수원이 화성유수부로 승격되고 성을 쌓으려고 보니 많은 민가들이 성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축성의 책임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주저하고 있을 때, 정조는 성을 세 번 구부렸다 폈다 해서라도 모두 수용하라는 비답을 내린다.
성을 확장한다는 것은 국고의 손실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이는 곧 국고의 손실보다 수원 주민을 우선했다는 말이다.

무더위가 극성을 부릴 때 정조는 화성 성역에 참여하고 있는 공역자들의 노고를 생각해서 척서단을 지어 하사한다.
더위 먹은 데 먹는 환약을 특별히 지어 내려준 것이다. 약을 지급 받은 사람들은 약의 효능보다 국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 더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감동은 곧 최고의 성을 건설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수원화성시설의 특징

 

수원화성은 기존 성들이 안고 있었던 모든 문제점들을 해결하려는 마음에서 건설된다.
동서남북 사대문을 건설하면서 모두 옹성을 설치하였고, 적재적소에 치성을 두었으며, 여장의 높이를 높여 군사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이는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에서 밝힌 조선 성들의 취약점을 보완한 것이다. 요소요소에 암문을 설치하여 비상 사태에 대비하였고, 남북 수문을 두었는가 하면, 군사적인 위엄을 담은 장대를 동서에 건설했다.

치성(雉城)의 제도는 참으로 중요하다.


 

치성은 성벽을 중간중간 돌출시켜 쌓은 것을 말하는데 꿩이 제 몸은 감추고 남을 잘 공격하는 습성이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러한 치성이 없거나 적당한 장소에 있지 않으면 적군들이 성벽을 기어오르거나 파괴하기 쉽다. 과거의 성들에도 치성이 있지만 그 활용도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다.

수원화성에 건설된 치성들은 다각도로 모색되었다. 순수하게 치성의 역할만으로 건설되기도 하고, 대포를 장치하는 포루(砲樓)를 겸하거나, 치성 위에 집을 지어 군사를 보호하려고 한 포루(鋪樓)도 있다.

성의 동남쪽, 서남쪽, 서북쪽, 동북쪽에는 모두 각루(角樓)를 두었다. 이는 수원화성의 다섯 군영 체제를 보완하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화성행궁에 중영(中營)(신풍위;新風衛)을 두고 동에는 창룡위(蒼龍衛), 서에는 화서위(華西衛), 남에는 팔달위(八達衛), 북에는 장안위(長安衛)를 두었는데, 중간의 요소에 네 각루를 두어 각 위(衛)를 보충해주는 동시에 부장(副將)이 지휘하는 지휘소의 역할도 한다. 각 각루의 위치는 빼어난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 휴식 공간으로써의 역할도 컸다고 보여진다.

그 중 제일은 동북각루인데 용두각으로 불리기도 하는 방화수류정이다. 조선 후기에 건립된 정자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다고 할만한 정자인데 동북각루라는 집 이름이 말해주듯 군사적인 목적에 의해 세워진 시설이다. 적군이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이 빠져 있을 때, 마루 밑의 총구와 포구에서는 사정없이 불을 뿜을 것이다.

수원화성 봉돈(烽墩)은 단순한 봉수대의 역할을 뛰어넘은 요새다. 우선 봉돈 자체가 하나의 치성으로 쓰이며, 많은 총구를 뚫어 자체 방어력을 갖추었으며, 화성행궁과 서장대를 마주보며 국경과 해안의 정보를 전달할 수 있도록 했다.

수원화성의 건설에서 벽돌의 사용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북학파 실학자들의 의견에 따라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벽돌집의 제도를 조선에 이식시키는 과정이 수원화성에 담겨 있다. 성의 중요 시설물은 대개 벽돌을 활용하였고, 건축물의 일부분도 벽돌로 쌓았다. 그래서 수원화성을 축성 재료로 분류할 때 다른 곳에는 없는 석전교축(石塼交築)의 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수원화성의 평면은 나뭇잎을 닮았다. 땅의 생김새에 따라 순응하며 성을 쌓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조의 애민정신에 의한 성의 확장으로 인해 더욱 완벽하게 나뭇잎을 닮았다.

수원화성은 여러 기능들을 한 시설물에 복합적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자태를 지니고 있다. 이는 사실 어려운 일이다.
다기능을 강조하면 외형을 놓치게 되고, 외형을 강조하다 보면 기능성에 문제가 있게 된다. 이 배반적인 요소 둘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힘은 문화적인 능력이 탁월했을 때 가능하고, 탁월한 문화적 능력은 튼튼한 철학이 바탕에 깔려 있을 때라야 가능한 것이다. 수원화성은 이렇듯 조선의 정점에서 건설된 것이다.

 

 

 

 

 


공사실명제 구현

 

수원화성의 건설은 완벽한 실명제로 완성된다. 성역의 처음과 끝을 모두 기록한 공사보고서를 펴낸 것이다.
국가의 재정이 많이 들어갔고 백성의 피땀 어린 정성이 훌륭한 결과를 낳았으므로 보고서의 간행은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수원화성의 성역이 한창 진행되던 정조19년(1795) 윤 2월에 수원에서는 커다란 잔치가 열렸다.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가 열렸던 것이다.
수원화성에 대한 정조의 애착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라 하겠다.

 

이 잔치의 모든 것을 책으로 펴냈는데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라는 책이다.

이 책의 간행에 앞서 정조는 국가의 모든 행사를 낱낱이 정리해 놓을 요량으로 정리의궤청을 설치하였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간행은 화성성역 공사보고서의 간행에 본보기가 되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라고 제목을 단 이 책에는 공사의 논의 과정과 관청 사이에 주고 받은 공문서, 임금의 의견과 명령 등 진행 과정을 기록했고, 공사 참여자의 이름과 공역 일수, 각 시설물의 위치와 모습 및 비용들을 낱낱이 실었다.

글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은 그림을 그려서 이해를 돕기도 했다.
공사비에 대한 대목에서는 각 공역에 들어간 경비를 산출하였고, 인건비(일당)와 공사에 참여한 일수 등도 상세하게 기록해서 석공 아무개가 어느 고장의 출신이며, 어느 현장에서 몇 일을 일했으며 얼마의 돈을 품값을 받았는지 알 수 있게 했다.

어느 시설물이든지 건축 자재를 하나하나 기록했고, 그 비용을 산출했으며 성 안팎에서 본 그림을 따로 그려 이해를 도왔는데 부득이한 경우엔 실내의 그림을 그려놓기도 했다.
거중기(擧重機)와 같은 기계들은 부품까지 따로 그려서 설명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이 공사보고서가 형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반증인 것이다.
지난 70년대 수원화성은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부분적인 보수를 해오고 있다. 그럴 때마다 화성성역의궤가 교과서로 등장하는 것은 기본이다.
수원화성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데에도 화성성역의궤는 한몫을 톡톡히 했다. 200여년 전의 완벽한 공사보고서에 세계가 놀란 것이다.

화성성역의궤에 들어 있는 실명제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현장에서도 그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창룡문과 화서문, 그리고 팔달문에서 실명판을 볼 수 있는데 화서문 것은 마모가 심해서 눈을 씻고 들여다 봐야 볼 수 있지만, 창룡문과 팔달문의 실명판은 선명하게 보인다.
그중에서 팔달문 것은 마치 어제 새긴 듯 글씨가 살아 있다. 최근에 일어난 부실 공사들과 비교해보면 놀랄 수밖에 없다.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자신이 없으면 기록을 제대로 남길 수 없기 때문이다. 수원화성의 건설 과정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은 곧, 정조를 비롯한 당시 정치가들의 자신감 있는 국정 수행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러면 그 당당한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올까. 이는 당연히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기본으로 깔려 있을 때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성역관리와 공사경영

 

수원화성의 건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관리와 경영의 능력이다.

오백 칸이 넘는 화성행궁을 건설하면서 십리에 이르는 성을 축조했다는 것은, 더구나 28개월 만에 마무리 지었다는 것은 지금의 상식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국왕의 명령이 아무리 지엄하다 해도 공사를 수행할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당대의 기술력과 관리. 경영 능력이 최고조에 달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특히 금전 관리를 엄격히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당으로 인건비를 주는 경우와 일의 성과에 의해 돈을 주는 성과급제를 병행하였다.

혹시라도 빈틈으로 경비가 빠져나가는 것을 예방하고 작업을 독려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개인의 욕심이 배제된 경영과 관리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중요하게 취급된다.
또 개인의 욕심이 끼어 들 틈이 보이는 것은 체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깨끗한 경영과 엄격한 관리로 쌓았기 때문에 수원화성은 짧은 시간에 완벽하게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이다.

 

 

 

 

 

수원화성은 조선의 절정기에 탄생한다. 그 시작은 비운에 죽은 사도세자의 묘원을 옮기는 것으로 비롯되지만, 결과에 있어서는 세계인이 즐겨 찾는 문화유산이 되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발전, 심화, 절정, 쇠퇴라는 곡선을 그리면서 역사는 흐른다. 수원화성의 건설 이후로 보이는 조선의 정치적 문화적 쇠퇴는, 거꾸로 수원화성을 극점에 올려놓는 모순을 낳고 말았다.
그래서 수원화성은 조선의 꽃이요, 우리나라 성곽의 꽃이다. 그러나 꽃이 아무리 아름답고 향기가 그윽해도 제대로 가꾸고 보살피지 않으면 시들거나 죽어버린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은 그래서 자명해진다. 이 아름다운 수원화성을 어떻게 가꾸고 지킬 것인가. 수원화성에 서려 있는 소중한 정신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교훈으로 만들 것인가.

수원화성을 건설한 사람들도 훌륭했지만 그것을 잘 지키고 가꾼 오늘날의 우리들도 훌륭했다고, 이백년 후의 후손들이 우리를 평가할 수 있도록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수원화성축성 이야기


역사적배경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인해, 폐해가 극심했던 구 정치체계의 개혁 을 위해, 그리고 은퇴 후 수원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해 수원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화성행궁을 신축했으며 화성을 쌓았다.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뒤주 속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마쳐야 했던 비운의 왕세자 사도세자의 유택(幽宅)인 영우원(永祐園)을 1789년(정조13) 풍수지리상 최길지(最吉地) 의 명당으로 지목된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부터 정조대왕은 수원 백성들을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먼저 수원의 새로운 읍치(邑治)를 팔달산 기슭(당시 지명은 신기리(新機里))으로 옮기면서 행정·치안기관인 관아와 교육기관인 향교, 교통기관인 역참(驛站), 상가, 도로, 교량 등 도시 기반 시설을 마련하고 민생 대책을 강구했다. 또 사도세자의 묘역이 조성된 구 읍치에 살던 백성들('수원하지초록(水原下旨抄錄)'에 따르면 244호-인구 677명)에게 넉넉한 보상금과 이사비용을 나 눠주었다.
아울러 수원부에 감금된 죄수 전원과 수원부 사람으로서 유배 중에 있는 이 들도 풀어 주고 수원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해주는 등 특별 조치를 베풀었다.

정조는 화성유수부와 인근 백성들의 지세(地稅)와 부역을 감면해 줬으며, 환곡과 군포를 탕감하거나 감축시켰다. 뿐만 아니라 임금이 주최하는 각종 연회에의 초대, 각종 공사에 대한 시상,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 하사, 문ㆍ무과 별도 과거를 통한 지역 인재 등용 등 각종 특혜와 민생 대책을 시행했다.

특별과거인 별시는 정조대왕의 능행차 때마다 실시됐는데 수원과 인근의 유 생, 한량, 군인, 무사 등이 응시하도록 특별 배려했다. 특히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 회갑연이 열렸던 해의 능행차 때에는 임 금이 친히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를 실시, 문과 5인, 무과 56인의 급제자를 선발하기도 했다.
그런데 1790년(정조 14)에 실시한 과거 때는 합격된 사람 들 중 3명이 수원 호적자가 아님이 밝혀져 합격이 취소되고, 이들을 징벌 해 군대에 보내야 한다는 신하들의 청이 있었으나, 정조대왕은 합격만 취소 시키는 관대한 처분을 내린 일도 있었다. 최홍규 교수에 따르면 "수원과 인근 지역민들은 매우 이례적으로 매년 실시 되는 이 문·무과 특별 과거시험을 통해 관계(官界)와 군(軍)에 진출할 수 있었고, 이 고장 백성들은 신도시 건설과 화성 축성 과정을 통해 사회적 신분상승의 기회도 그만큼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도시를 이전하고 행궁 등 관아 건물을 지을 때, 또 화성을 축성할 때 예전과는 달리 임금을 지급하면서 일꾼을 모집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예전에는 강제 징발된 부역군들이 공사를 맡았었다. 조정 대신들은 재정적 부담으로 인해 백성들을 부역시키거나 승려들을 동원 하자고 건의했지만 정조대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임금을 지불하라고 강력히 하교했다.

그 결과 수원은 물론 전국 각지의 백성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어 신도시 건설과 화성 축성을 차질 없이 진행 할 수 있었다. 오히려 공사가 끝난 뒤 조정에서는 8도의 백성들을 돌려보내는 데 크게 고심할 정도였다고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돼 있다.

정조대왕은 행정·군사·상업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갖춘 수원을 건설하기 위해 국비 6만5천냥이라는 거금을 수원 백성들에게 꾸어주면서 공업과 상업을 촉진, 18세기 말 대도회·상업 도시 수원의 번영을 가져오게 하는 기초를 마련했다. 이때 수원의 제지 수공업 발전을 위해 4천냥의 금융지원을 통해 북부면 지소동(현재 팔달구 연무동)에 제지공장을 차렸으며, 팔달구 우만동 봉녕사는 두부제조를 전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장은 팔달문 밖의 남시장(일명 성밖시장, 현 영동시장)과 북수동의 북시장(일명 성안시장)이 섰다. 이렇듯 정조대왕의 애정과 특혜 덕분에 수원에는 많은 외지인들이 이주를 해오는데 특히 해남에 거주하던 고산 윤선도의 후손들이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수원으로 이사를 해와 집을 마련해 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북부 보시동(현 북수동)에 형성된 8부자집은 전국에서 이주해 온 상공업자들이 상업활동을 벌인 곳이다. 이 때 서민과 소상인들에게 자본금을 대여해 줬다고 해서 보시동(普施洞)이 란 지명이 생겼다고 전한다.

정조대왕이 상공업 뿐만 아니라 농업 진흥 정책도 적극 추진하였다.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만석거, 축만제, 만년제 등 저수지를 만들고 둔전을 일굼으로써 오늘날 수원이 농업과학교육의 중심도시가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

 

'의궤(儀軌)'란 옛날에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났을 때 후세의 참고로 하기 위해 그 일의 경과 및 대책 따위를 상세하게 기록한 책을 말한다.
따라서 '화성성역의궤'는 화성 축성의 전말과 건축에 동원된 사람의 이름, 자재, 예산규모 등 세세한 것을 모두 기록해 놓은 화성의 공사보고서로서 세계문화유산 화성과 함께 조상들의 빛나는 업적인 것이다.

그런데 '화성성역의궤'만큼 귀중한 역사의 보물 창고가 또 있다. 다만 '화성성역의궤' 보다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따름이다.

정조대왕께서 모친 혜경궁 홍씨(사도세자비)의 회갑연을 위해 행차했던 을 묘년(1795) 8일 간의 일정을 상세히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정조대왕의 주도 하에 진행된 을묘년 수원행차의 모 든 것을 기록 한 것이다.

이 책이 담고 있는 풍부한 기록 내용은 왕실 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들 을 전해 줄 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과거의 문화유산 중 각종 음식과 옷, 그림, 조각, 기물, 용품, 노래, 춤, 의식 등 각 부 문별로 당시의 최고 수준을 반영하고 있던 궁중문화를 이 기록을 통해 생생 하게 만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이 기록은 과거 우리 조상들이 이루었던 최고 수준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보여 주는 유산이다.

 

 

정조대왕은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잔치를 위한 수원행차에 따른 예비 논의, 경비 준비, 진행 과정 등에 깊은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임했음이 이 책에 기록돼 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 역시 정조대왕의 깊은 관심과 배려 속에서 간행된 기 록물로서 수권 (首卷) 1책, 본책 5권 5책, 부편 4권2책 등 총 8책으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의 서적이다. 인쇄는 정리자(整理字) 금속활자를 사용했다. 1795년은 정조대왕에게 매우 뜻깊은 한해였다. 정조대왕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태어난 지 만60년이 되는 해(甲年)였으 며 동갑이었던 어 머니 혜경궁 홍씨 또한 회갑을 맞는 해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조 자신 이 즉위한 지 20 주년이 되기도 했다.

정조대왕이 심혈을 기울인 화성 축성 공사도 잘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정조대왕은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수원에 행차해 어머니의 회갑연을 대대적으로 열었 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버지를 향한 추모의 정과 어머니에 대한 효도의 정을 만 천하에 알린 것 이다. 이와 함께 왕실의 경사를 백성들과 함께 하기 위해 수원에서 양로연, 구호 미 배급, 문·무 과 과거 실시 등 갖가지 행사를 병행했다.

또 한강 노량진 주교(舟橋:배다리) 설치, 어사(御射:임금의 활쏘기) 등 부 대 행사도 다채롭 게 펼쳤다. 이 을묘년 행차가 단순한 왕실 행사의 의미만을 가졌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재임 중 정치적 개혁의 전진기지로 삼고자 했으며, 말년에 은퇴해 노후 를 보내고자 했던 수원땅 백성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한편 자신의 효심과 애민정신을 은연 중 각인시키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또 왕실의 근엄함과 막강한 정예군사의 통솔 능력을 과시해 정치적으로 반 대편에 서있었던 세력들을 심리적으로 압박, 자신의 이상을 원활하게 펼치려는 의도 역시 있 지 않았을까? 일종의 정치적 시위의 성격을 띄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수원시에서 매년 실시하고 있는 화성문화제의 하 이라이트 '정조 대 왕 능행차 연시'의 기본 그림인 반차도(班次圖:나라의 의식에서 문무백관 이 늘어서는 차례 를 그린 그림)가 수록돼 있다. 반차도는 수원으로 행차하는 정조대왕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 총리대신 채제공을 비롯한 조정대신, 경기감사. 문무백관, 나인, 총·창·칼·활을 든 군사, 말, 수레 등이 차례로 그려 져 있다. 이 그림은 당시 정치·군사제도·복식 등을 연구하는데 더없이 중요한 자료 이다. 뿐만 아니라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벌어진 국가적 이벤트인 봉수당진찬연 (奉壽堂進饌宴:혜 경궁 홍씨 회갑연)의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다음에 각 권별 내용을 소개할 때 자세하게 언급하겠지만 이 기록이 있음으 로 해서 화성문 화제 혜경궁 홍씨 회갑연의 무용과 음식, 상차림, 참석인사 배치, 복장, 기 물 등이 재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원행 행사가 모두 끝난 1795년 음력 윤2월27일에 정 조대왕의 명으 로 작업을 시작해 1797년(정조 21) 음력 3월24일에 완성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혜경궁 홍씨의 수원 화성행궁 회갑연에 관한 정조 대왕과 조정신료들간의 논의 과정, 행차의 세부적인 절차에서 물자 및 인원 의 동원과 같은 행정 체계를 비롯해 궁중 잔치, 궁중 음식, 긍중 음악, 궁 중 의식 등과 같은 궁중 문화, 그리고 군사훈련, 행차시의 국왕 호위, 국왕 의 의장행렬, 기물, 장신구, 물가, 인물 등 당시의 궁중문화 및 일반 생활 사의 면면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지난 호에서 밝혔듯이 ‘역사의 보물창고’로서 우리 조상들이 축적해왔던 문화의 최고 수준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원행을묘정리의궤 역시 화성성역의궤와 함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만할 귀중한 사료(史料)라고 믿는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규장각 도서로 15종이 소장돼 있으며 이밖에 국립도서 관 장서각, 국립박물관 등에도 소장돼 있다.

‘권수(卷首)’는 이 책의 첫 권으로서 택일(擇日)·좌목(座目)·도식(圖式) 으로 구성돼 있는데, 주된 내용인 도식은 행차시 중요 장면들을 판화로 정리 한 것. 화성행궁의 전경으로부터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후 서울 홍화문에서 백성들 에게 쌀을 나눠주는 광경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그림들이 수록돼 있어 해당 부문의 연구 및 복원을 위한 아주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수원에서는 매년 벌어지는 화성문화제나, 올해 열리는 월드컵 축구대 회 문화관광축제 행사에서 실시될 이벤트 정조대왕 능행차연시나 혜경궁 홍 씨 회갑연, 양로연 등의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것 이다.

도식 편에 수록된 그림들은 당시 화원(畵員)들이 근무하던 관청인 도화서(圖畵署)를 주도한 김홍도식 화풍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권1(卷一)’은 정조대왕의 명령과 대화인 전교·연설, 행차시 각종 행사 에 사용된 음악인 악장, 각종 행사에 이용된 글인 치사·어제, 활을 쏜 내 용인 어사, 정리사나 장용영 내·외사에 내린 훈령인 전령, 행사의 세부 내 용인 군령 등이 기록돼 있다.

‘권2(卷二)’는 출궁의식과 환궁의식의 절차를 기록한 의주(儀註)와, 부록 으로 의식의 업무 규식인 절목,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연·월·일별 로 정리한 계사 등이 수록돼 있다. ‘권3(卷三)’은 신하들의 보고서인 계목과 장계, 관공서 상호 간에 오고 간 문서인 이문과 내관, 직속상관에게 자필로 쓴 보고서인 수본, 상급관청에 서 내려온 공문인 감결로 구성돼 있다. ‘권4(卷四)’는 각종 식품의 내용과 조달에 관한 찬품(饌品), 봉수당 잔치 (진찬) 때의 소요물건과 준비에 관한 내용인 배설, 행차 때 사용할 각종 도구와 준비상황에 관한 내용인 의장, 행차 때 참가한 내·외빈과 각 부서의 수행관원 및 하급관리와 군병에 이르기까지 지급한 노자의 내용인 반전, 원행 때 정조대왕과 모친 혜경궁 홍씨가 타고 갈 가마를 준비하는 내용인 가 교, 강을 건널 배다리를 놓는데 필요한 여러가지 지시사항에 관한 내용인 주 교, 현륭원에 행차할 때 각 부서에서 거행할 사항에 관한 일반적인 규칙인 사복정례, 어가를 수행하는 수행원들이 패용하는 표신과 수행원 정수에 관한 내용인 장표 등이 기록돼 있다.

‘권5(卷五)’는 잔치 때 참여한 친·인척의 명단인 내외빈, 양로연에 참석한 15인의 대신과 374인의 수원부 선비·평민 등 노인의 명단을 기록한 참연노인, 임금을 호위하는 수행자 명 단인 배종, 서울에 남아 수비를 담당하는 관원의 명단과 임무인 유도, 연회 때 참석하는 악사(樂士)와 악공(樂工)·악생(樂生) 등 연주담당자와 복식을 기록한 공령, 왕의 화성행차 때문·무과 별시 합격자 명단인 방목, 화성 행 차에 참여한 관원과 군교·서리 등 모든 사람들에게 하사한 상의 내용인 상 전, 소요된 재정 일반에 관한 내용인 재용 등이 기록돼 있다. ‘부편(附篇)’은 모두 4편이 있다. 이는 화성 행차를 전후한 왕실의 중요행사에 대한 전교와 포상 등 제반 기록 을 담은 내용이다.

부편1 ‘탄신경하’는 1795년(정조19) 6월18일 수원의 화성행궁에 이어 서울 의 명정전(明政殿) 월대에서 열린 잔치의 의식에 관한 기록으로서, 전교· 연설·악장·치사·전문·의주·절목·계사·찬품·기용·배설·내외빈·상 전 등의 순서로 되어 있다. 부편2 ‘경모궁 전배’는 1795년 1월21일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아 정조대왕 이 사당에 참배한 기록으로서 전교·연설·의주·절목·계사·상전 등으로 되어있다.

부편3 ‘영흥본궁제향’은 태조의 아버지인 환조의 탄신 8회갑을 맞아 신하 를 보내 제를 올리게 한 내용을 중심으로 했다. 부편4 ‘온궁기적’은 1760년(영조20) 사도세자가 온양행궁에 행차하고 영 괴대비(靈槐臺碑)를 세운데 대한 기록이다. 한편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수원행차가 모두 끝난 1795년 윤2월27일에 의궤를 편찬하라는 어명에 따라 곧바로 주자소에 의궤청이 설치돼 업무를 시작했다.

의궤청 총리대신은 좌의정 채제공이 맡았을 정도로 정조대왕의 깊은 관심 속 에 작업이 진행되어 같은 해 8월15일 교정을 끝내고 인쇄를 시작, 1797년(정 조21) 3월24일에 완성했다.
완성 즉시 정조대왕과 혜경궁 홍씨에게 바치고 규장각 서고, 화성행궁, 규장 각, 외규장각, 다섯 사고(史庫)를 비롯한 각처에 소장하는 한편 각 관서 및 총리대신 채제공이하 관계인에게 배부했다. 왕실 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조선 후기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인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조선시대 수원의 행정체계, 방어체 계, 도로, 저수지 등을 연구하는 데도 필수적인 자료이다.

 

 

 


 

 

물자조달

 

조선왕조 창업 초 수도를 한양으로 정한 뒤 궁궐과 각종 관아,성곽을 조성 한 공사 이후, 화성 신도시 건설과 화성 축성은 조선시대 최대의 국가적 대 역사(大役事)였다.  따라서 화성을 축성할 때 각종 물자가 엄청나게 많이 쓰여졌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다.  

우선 성을 쌓을 때 돌과, 벽돌, 목재, 각종 철물은 물론, 일꾼들을 먹일 식량과 땔감, 자재를 나를 수레와 우마(牛馬), 공사를 기록할 지필묵으로부 터 단청, 가마니, 땔감, 숯, 노끈, 공구, 석회, 기름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다양한 물자들이 필요했다.

다행히 화성 축성의 종합 공사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는 위와 같은 물자들 외에 밥숟가락, 항아리, 사발, 됫박, 저울, 주걱, 싸리 비, 솥, 가마니 등 자질구레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자의 세세한 항목과 수량, 단가, 구입처 등이 모두 상세하게 기록돼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화성축성 공사에 들어간 총 공사비용은 물자와 인건비 등을 합쳐 모두 87만3천517냥7전9푼이 소요됐다.
`화성성역의궤' 제5~6권은 재용(財用)편으로서 여기에는 화성 성역에 사용 된 각종 물품의 종류와 수량, 성곽과 각 부대시설별로 소요된 물품의 내용 과 단가가 기록돼 있다. 참고로 이때 성인 잡부 하루치 품삯은 대략 2전5푼이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화성 축성 예정지에 있던 집들을 사들이면서 후한 값을 지불했는데 북리 지역에 살던 송복동이라는 사람의 5칸짜리 초가집을 수용하면서 15냥 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추가 지급액 10냥:추가 지급액은 보상비일 듯) 그렇다면 당시 5칸 짜리 초가집을 매입하려면, 집의 상태에 따라 차이는 있 겠지만 대략 2개월 정도 잡역을 하면 됐다는 계산이 나오므로 당시의 화폐가 치를 알 수 있다. 또 쌀 1섬(당시 1섬은 15말)은 5냥 정도였으며, 소는 1마리에 20.35냥, 무 명 1필이 2냥, 숯 1석이 6전3푼, 쇠고기 1근이 5전, 돼지 1마리가 5.34냥이 었다. 이는 화성을 쌓는데 투입된 경비는 물론 18세기말의 물품 상황과 물가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그럼 먼저 화성의 축조에 가장 많이 쓰인 석재는 어떻게 확보되었으며 어 떻게 운반되었는지 알아보자. 지난 11월24일 진단학회와 경기문화재단이 공동으로 개최한 `화성성역의궤 의 종합적 검토' 심포지엄에서 경기대 조병로 교수는 화성 축성에 사용된 석 재가 모두 20만1천403덩어리로서 이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13만6천960냥9전이 었다고 밝혔다. 이 돌들은 무게 때문에 멀리서 운반하지 못하고 인근의 △숙지산 △여기 산 △팔달산 △권동(서둔동 권동 방죽{*`한국지명총람'에는 서호의 옛 제방 이라고 기록. 그러나 `화성지'에는 `권동제언은 화성부 남쪽 5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한국지명총람의 기록이 맞는다면 권 동은 돌산이 있던 화서동 동말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이 있던 곳, 현재 는 건등이라고 불림)에서 채취해 사용했다.

 


숙지산(熟知山:옛지명은 孰知山)이 있는 곳의 옛 지명은 공석면(空石面)인 데 이곳에 돌이 많다는 채제공의 보고를 받은 정조대왕은 1796년 1월24일 수 원에서 환궁하는 길에 "오늘 갑자기 단단한 돌이 셀 수 없이 발견되어 성 쌓는 용도로 사용됨으로써 돌이 비워지게(空石)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孰知)? 암묵(暗默) 중에 미리 정함이 있으니 기이하지 아니한가?"라고 감탄하 게 된다.

공석면 숙지산은 지금의 영복여고 뒷산이니 화서동 숙지산을 일컫는 것이 다. 지금도 숙지산과 팔달산 곳곳에는 돌을 뜬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산들의 돌을 뜨는 자리를 부석소(浮石所)라고 했는데, 각 부석소에서 캐낸 양은 숙지산 8만1천100덩어리, 여기산 6만2천400덩어리, 권동 3만2천덩 어리, 팔달산 1만3천900덩어리 등 18만9천400덩어리였다.

화성 축성에 사용된 돌들을 거의 모두 이 네 군데에서 떠냈다고 해도 과 히 틀린 말은 아니다.
부석소에서 떠낸 돌은 치석소로 보내어 일정한 규격으로 다듬었는데 특히 성곽에 사용된 돌의 경우 일정한 규격에 의해 척수에 따라 대ㆍ중ㆍ소로 규격 화하였다. 이렇게 다듬은 돌은 축성현장으로 옮겨졌다. 돌을 옮기기 위해 우선 정조 대왕의 지시대로 `화살 같이 쭉 곧고 숫돌처럼 평평한' 도로를 개설했다. 돌은 소가 모는 대거(大車:소 40마리가 끄는 수레), 평거(平車:소 4~8마리 가 끄는 수레), 발거(發車:소 1마리가 끄는 수레)와, 사람이 끄는 동거(童車:장정 4인이 끄는 수레) 등 수레를 이용해 날랐으며 썰매(雪馬)를 사용하 기도 했다.

이때 유형거(遊衡車)라는 수레를 시범 제작해 사용한 바 있는데 이는 대거 와 썰매의 단점을 보완한 것이다.
수레를 끄는 소들은 몸집이 크고 다리 힘이 좋으며 체력이 건장해야 했는 데 이를 위해 패장(牌將)을 파견해 각 읍의 장교와 함께 사들이게 했다.

화성 성역에 필요한 수레소는 경기지방에서 309마리, 호서지방에서 50마 리, 관동지방에서 80마리, 해서지방에서 167마리로 모두 608마리였으며 그밖 에 소 80마리, 말 252마리가 소요됐다.

목재는 장안ㆍ팔달ㆍ화서ㆍ창룡문 등 사대문과 동ㆍ서장대, 각종 포루와 각루, 포사 등을 건축하는데 이용됐다.  

 

목재는 종류에 따라 모두 2 만6천206주가 소요됐다. 돈으로 환산하면 약 4천902냥5전5푼이었는데 석재 가 13만6천960냥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기둥과 서까래에 사용할 목재의 확보는 화성 축성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목재는 충청도의 안면도, 황해도의 장산곶, 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와 강 원도의 한강 인근 지방, 전라도 좌수영의 순천ㆍ광양ㆍ흥양ㆍ구례ㆍ방답진ㆍ사도 진, 전라우수영의 자주ㆍ진도ㆍ장흥ㆍ강진ㆍ무안ㆍ흥덕ㆍ김제ㆍ완도, 경기도의 광주 와 남양, 광평 등에서 베어 들였다. 이때 나무를 벤 산은 국가의 큰 공사에 사용할 나무를 보호하던 금양처(禁養處), 또는 봉산(封山)이라고 했다. 임금님의 허락 없이 봉산이나 금양처 의 나무를 벤 자는 국법으로 엄하게 다스렸다.

이들 목재의 운송은 배나 뗏목을 이용해 이루어졌는데, 충청도나 황해도, 호남의 목재는 각 수영에 딸린 병선(兵船)이나 개인의 어선을 이용했고, 경 기도나 강원도의 한강 주변에서 베어낸 목재는 뗏목을 엮어 운반하다가 바다 에서 배로 옮겨 실어 운반했다고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돼 있다.

바닷길을 이용해 운반된 목재는 구포(현재 화성시 시화호 연해에 있는 구 포리)에 치목소(治木所)를 설치해 다듬은 다음 수원의 화성 공사 현장으로 옮겨졌다.
구포의 치목소에는 감독과 목수를 파견해 나무를 용도에 맞게 다듬은 다 음 수레를 이용해 수원까지 날랐는데 이를 위해 도로를 고치는 등 목재 운송 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나무를 베거나 운반하고 다듬던 사람들에게도 노임이 지급됐는데, 특 히 나무를 베는 사람이나 이를 운반하는 사람에게는 나무 한 그루당 1전, 또 는 5전씩이 주어졌다.

화성을 축성할 때는 석재와 목재말고도 많은 양의 철재(鐵材)가 필요했다.

이 공사에 소요된 철재는 모두 55만9천31근9냥3전과 철엽(鐵葉:대문에 붙 이는 쇠 장식으로서 물고기 비늘모양으로 만들었다)2천860조각, 기타 연장 류 등이 소용되었는데 이를 금액으로 계산하면 모두 8만6천215냥7전1푼이었 다.

이 철물들도 목재와 마찬가지로 각 도별로 나누어 구입토록 했으며 일부 는 일반 상인들로부터 구입, 배를 통해 운송했다.

한편 벽돌 및 기와도 많이 소용됐다. 벽돌은 전국에서 벽돌장들을 수원으로 소집해 임금을 지불하면서 구웠으 며 의왕시 백운산 아래 왕륜(旺倫)의 가마〔와벽소:瓦쮱所〕에서 굽다가, 후 에 화성 북쪽 성(北城)밖, 화성시 정남면 서봉산의 서봉동(棲鳳洞) 등에 가 마를 새로 설치, 모두 3곳에서 제작했다.

축성에 사용된 벽돌을 제작하는데는 2만6천577냥1전5푼의 비용이 들었다.

기와 역시 왕륜과 서봉, 사관평(肆觀坪:사근평)의 가마〔번와소:燔瓦所〕 에서 제작했으며 제작비용은 6천198냥3전6푼이었다.

벽돌과 가마 굽는 데 사용한 땔나무는 인근 개인 소유 산에서 돈을 주고 구입했다.  기타 물자로는 숯과 석회, 단청, 지필묵, 기타 잡물 등이 있었다. 숯은 모두 6만9천56가마로 지평, 광주, 용인에서 사들였다.  석회는 경기도 파주와 풍덕, 수원의 어랑천, 충청도의 평신진에서 구웠으 며, 황해도 금천에서도 많은 양의 석회가 배를 통해 수원으로 수송됐다.

종이는 대부분 서울의 종이전에서 사들였으나 정조 19년(1795) 광교동 입 구(연무동)에 지소(紙所)를 설치하고 종이제조 기술이 있는 승려를 모아 제 작했다. 연무동 수원여객 버스 종점 부근을 지금도 `지소', `지쇄'라고 하 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밖의 잡물(雜物)은 지난 호에서 밝힌 것처럼 그 종류와 수량이 너무 다 양하고 많아 여기에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그 중 몇 가지를 보면 소가죽 1천870장, 가마니 5만9천600닢, 새끼 39만1 천986발, 동아줄용 삶은 마 6천75근, 돌 운반용 생칡 2천852동이49근, 땔나 무 10만8천432단, 볏짚 24만2천284단, 숫돌 74덩이, 크고 작은 솥 86개, 큰 독 71개 등 140여 종류로 잡물 총 구입비는 12만3천744냥 1전 4푼이었다. 물론 이 세세한 기록들은 모두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돼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새삼 우리 조상들의 철저한 기록 정신에 고개가 숙여진다.

 

 

 

임금지불

 

옛날 국가나 지방관청에서 시행하는 공사에는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했을 뿐 만 아니라 임금도 지불하지 않고 혹독하게 일을 부려먹어 많은 백성들의 원 성을 샀다.
특히 탐관오리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강제부역으로 가혹하게 착취 했기 때문에 민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론부터 얘기하자. 정조대왕이 명하여 공사에 들어간 화성 축성 때는 이런 일들이 결단코 없었다.
또박또박 임금을 지불했을 뿐 아니라 임금님의 인부들에 대한 관심이 각별 해 수시로 상품을 지급하고 잔치를 열어줬으며 더운 여름에는 몸을 보호하 는 척서단이란 약을 직접 조제해 내려주기까지 했다.
따라서 기록에 보면 화성 공사 및 수원 신도시 조성공사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전국의 백성들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이 수원에 오지 못하도록 하라는 임금의 특명이 각 지방관들에게 하달될 정도였다.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백성을 징발해 노동에 종사케 하는 것을 부역(賦役) 노동이라고 하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서서는 부역노동을 하는 대신 현물로 대납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화성 축성공사가 시작되면서 채제공 역시 지금까지의 관례를 들어 부역을 주장했다.

`정조실록' 권40, 정조18년 5월 조에 기록된 기사를 보자.
"성인인 공자 역시 `백성을 시기에 알맞게 부린다'고 했지 언제 백성을 부리지 말라고 한적이 있습니까? 이번 화성 성역(城役)은 국가의 대사이므 로 나라가 백성들에게 일을 맡기지 않을 수 없으며 백성의 도리로 나라를 위 하여 부역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성상께서 백성을 너무 아낀 나머지 한사람이라도 노역에 지치는 폐단이 있을까 싶어 아직까지 백성 을 적절히 부리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고 계시니, 사랑한다면 수고롭게 시켜 야 한다는 의리를 저버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승군(僧軍)의 경우 더욱 더 이런 곳에 쓰기에 합당합니다.

신의 생각은 백성과 승군으로 하여금 거리와 수효를 균등하게 하여 며칠동안 축성 공사에 부역하도록 징발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듯 합니다" 승군과 백성을 부역의 형태로 징발해 사역을 시키자는 것은 비단 채제공만 의 주장이 아니었다. 우의정 이병모도 성역에 투입할 일꾼들을 각 도에 분배 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이밖에 좌의정 김이소, 행판중추부사 김희, 행예조판서 정창순, 행사직 홍 양호, 전참의 윤행임, 좌참찬 홍수보, 판돈녕부사 김지묵 등 대부분의 신하 들도 부역론에 동조했다.

그러나 정조대왕은 강제부역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임금을 지불해 백성들 의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화성성역의궤'의 `화성기적비' 기록에 따르면 화성공사에 인부가 70여만 명이 투입됐는데, 정조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성왕(聖王) 정치이념을 바탕 으로 인부는 모두 노임을 주고 부리며, 백성들에게는 단 3일간의 의무적인 부역이라도 면하도록 했다. 모두 품삯〔고가:雇價〕을 주고 사역했고 백성들 의 강제적인 부역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화성을 축성하면서 석수와 목수, 단청공기와 및 벽돌장, 미장, 대 장장, 조각장 등 반드시 필요한 전문노동력들에 한해서 부역으로 징발했다.
그러나 이 역시 모두 품삯을 지급했을 뿐 더러 일반 단순노동자들보다도 더 많은 액수를 지급함으로써 전문 장인(匠人)에 대한 예우를 했다.
일반 인부의 경우 매일 돈 2전5푼 정도가 지급된 데 비해 목수와 미장이, 조각장, 화공, 수레장 등의 경우는 매일 돈 4전2푼씩이 지급됐다고 '화성성 역의궤'에 기록돼 있다. 당시 물가로 쌀1섬(15말)은 5냥 정도에 거래됐다.

석수는 보조 1명을 포함, 매일 돈 4전5푼과 쌀6되를 지급했다.
화성 축성에 동원된 장인들은 모두 1천821명으로서 연311만1천131일을 공사에 참여했다.

그리고 장인들에게 지급된 품삯 총액은 12만8천735냥4전3푼이었는데 이 가 운데 석수에게 지급된 금액이 7만3천164냥으로 52.3%를 차지했고, 미장이에 게 2만4천419냥7전(19%), 목수 1만3천381냥(10.4%), 대장장 1만745냥8전7푼 (8.3%) 등의 순이었다.

한편 전문 기술자들인 장인 외에 잡역부인 모군(募軍)에게는 11만7천520냥 8전7푼이, 목재나 돌을 운반하는 담군(擔軍)에게는 5만8천561냥5전7푼이 지 급되어 축성에 동원된 일꾼들에게 지급된 총 품삯의 액수는 30만4천817냥8전 4푼에 달했다.

화성 축성에 쓰인 목재 석재 등의 총액이 39만201냥1전1푼임을 감안하면 일꾼들에게 지급된 품삯의 비중을 알 수 있다.

한편 멀리서 온 일꾼들을 위해 팔달문과 장안문 등 축성 공사장 인근과 돌 뜨는 곳이었던 숙지산, 여기산과 목재 다듬는 곳이었던 구포(현재 화성 시 비봉면) 등지에 임시 가옥을 설치했다.
또 일꾼들이 질병에 걸릴 경우 성밖에 막사를 치고 진료해 주었으며 치료 기간 중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매일 쌀 1되, 돈 1전씩을 지급했다.

 

 

 

 

거중기

 

조선후기 정조시대에 왕의 명령아래, 수원화성을 쌓으려면 엄청난 길이에 과학기계를 이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동이 편리하고, 능률적이고, 효율적인 기기가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고안한 것이 거중기 이다.

그 당시의 토목기술 수준을 고려한다면, 이렇게 수려하고 견고하면서 비교적 적은 경비로 2년 반이란 짧은 기간에 성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계획 당시부터 실학자 반계 유형원과 다산 정약용등의 경륜과 지혜를 참작하고 지게에서 거중기 등 우리 고유의 각종 기구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외국 기술의 장점을 응용하였고, 거중기 같은 기계를 제작하여 사용하는 한편 다량의 석재를 가까이에서 채취하고 벽돌(전돌)을 구워서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특히, 정조는 축성기술을 얻기 위하여 중국 가는 사신에게 명하여 구하고자 했던 "사고전서"는 구하지 못했지만 "고금도서집성" 5,022권을 거금 2150양을 주고 들여와 이중 "기기도설"을 연구한 다산 정약용이 골차로 거중기를 만들어 40근의 힘으로 무려 625배나 되는 2만5000근이나 되는 돌을 들어올려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는 근대 실학 정신을 투영해 성벽중 특히, 주요 방어시설을 모두 벽돌로 쌓았을 뿐 아니라,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축성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손수 점검하고 결정하면서 무엇보다도 민폐가 없는 인화와 장인 솜씨를 발휘토록해 아름다운 벽돌성이자 조선시대 성곽의 꽃이라 불리우는 수원화성이 탄생하였다.

 

 

수원화성시설물 소개

 


 


 

팔달문(八達門)

 

조선 후기인 1794년에 세운 화성의 남쪽 문으로, 문의 이름은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화성의 4성문 중 동쪽문과 서쪽 문에 비해 북쪽문과 남쪽 문은 더 크고 화려하게 꾸몄다.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옹성은 우리 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서울성곽의 동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 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또한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남포루(南砲樓)

 

포루(砲樓)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치섬과 유사하게 축조하면서 내부를 공심돈과 같이 비워 그 안에 화포 등을 감추어 두었다가 위. 아래와 삼면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

성곽시설물중에서 가장 중무장된 시설이라 할 수있다.

화성에는 벽돌을 사용하여 모두 5개의 포루(남포루, 서포루, 북서포루, 북동포루, 동포루)를 만들었는데, 서포루만 약간 작고 4개의 포루는 동일한 규격이다. 포루는 3층으로서 지대 위에 혈석(穴石: 대포발사를 위해 구멍을 뚫은 돌)을 전면 2개, 좌우 3개씩 놓았다. 그 위에 벽돌을 쌓았고 안쪽으로 판자를 잇대어 2층으로 구분하였으며, 총혈 15개를 만들었다. 지대 위에 뚫은 혈석은 포루(砲樓)에서만 볼 수 있는 시설이다. 상부에 문루 3칸을 만들어 총안과 전안을 뚫어 놓았고, 문루 바깥 면에는 짐승그림을 그렸다. 처마는 납도리 홀처마에 우진 각지붕이다.
남포루는 팔달문에서 화양루(서남각루)에 이르는 방어역할을 수행하였으며, 현재 팔달산 남쪽 중턱의 홍난파노래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남포루는 1796년 7월 9일에 완성되었으며, 만드는데 3,203냥의 비용이 들었다.

 

 



¨수원 화성¨ 동양 성곽의 백미 <관광명소>

 

동북각루(東北角樓)

 

동북각루는 벽성의 서북 19보 용연(龍淵)의 위에 있다.
광교산의 한 쪽 기슭이 남으로 벋어내려 선암산이 되었고, 다시 서쪽으로 감돌아 몇리를 내려가 용두(龍頭)에서 그치고서 북쪽을 향하여 활짝 열렸다. 용두란 것은 용연의 위에 불쑥 솟은 바위이다.
성이 이곳에 이르면 산과 들이 만나게 되고 물이 돌아서 아래로 흘러 대천에 이르게 되니, 여기야말로 실지로 동북 모퉁이의 요해처이다.

장안문을 잡아 당겨 화홍문과 이어지게 함으로써 앞뒤로 서로 마주 응하여 1면을 제압하고 있다. 그리고 절벽을 따라 성을 쌓고 바위에 누를 세우니 편액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 하였다. [전 참판 조윤형(曺允亨) 씀]
동서로 세 간인데 가운데는 온돌을 놓았고 북쪽으로 한 간을 붙이고 남쪽은 반 간(半間)을 물리었으며, 서쪽의 한 간은 또 길게 두 간을 늘리었다. 남쪽을 밖으로 물린 것은 마치 곡척(曲尺)처럼 생겨 있는데 평난간을 둘러쳤다. 그리고 위에 만(卍)자 쇄창(蔘)을 갖추었다. 온돌 4면에는 또 다시 만(卍)자 장자(障子)를 갖추었는데, 온돌의 면과 판자를 깐 면은 서로 판판하게 만들었다.

남쪽 동쪽 북쪽의 3모퉁이에는 5번 꺾인 팔각(八角)으로 각각 종횡의 짧은 대들보를 얹었다. 지붕 용마루의 네모진 서까래가 들쭉날쭉하여 처마를 번쩍 들고 있으며 지붕 용마루에는 망새[鷲頭]를 교착시켜 꽂았는데, 한 가운데에 3마디 절병통(節甁桶)이 까마득하게 솟아 있다.
동북쪽 평난간 밖에는 또 처마마다 판자를 깔아 성두(城頭)를 위압하고 있다. 2중으로 교란(交欄)을 설치하고 밖에는 전붕판문(戰棚板門) 16개를 설치하였는데, 만듦새는 마치 병풍을 포개어 친것 같다. 위에는 전안(箭眼) 각 1개씩을 내고, 아래에 총안 각 2개씩을 뚫었다.
단청은 5토를 사용하였으며, 대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내면에는 절지(折枝)를 그렸고, 정간(正間)의 조정(藻井)에는 연잎[荷葉]을 받쳤다.
동북 교란 아래의 성면 벽돌 높이 7척, 두께 4척 4촌, 위 아래에 총안 19개를 뚫고 널판지를 깔았다.

아래의 서남에도 벽돌을 돌려쌓아 담을 치고 담의 남쪽에 벽돌 홍예의 작은 문을 내었다.
동쪽의 물림난간 아래에도 판문을 내고 숨었던 적병의 발사에 대비하여, 포루의 제도와 같이 하였다. 정간 남쪽 처마와 층계로 누대를 만들되 돌을 깎아서 가장자리를 둘렀다. 누대의 높이 4척, 남북의 길이 13척 4촌, 동서의 너비 16척 4촌이다. 위에 방전을 깔아 우사(射)와 읍양(揖讓)의 예를 올릴 수 있을 정도의 면적을 유지시켰다. 대 위의 서북에 각각 고란층제(高欄層梯)를 놓아 정자의 위로 통하게 하였다. 대 아래의 동남 양면에도 4층 보석(步石)을 설치하고 그 남쪽 11보의 거리에 낮은 담을 쌓고 전문(箭門)을 내었다. 용연(龍淵)은 북성 밖에 있는데, 모양이 반달 처럼 생겼다. 둘레가 210보, 깊이 6척이고, 가운 데에 작은 섬이 있다.
못위 성모퉁이에 방화수류정이 있고, 정자 아래에 있는 바위는 옛날부터 용머리라 하여 낚시터로 삼을 만하다. 못의 서쪽에 석각 이두(石刻頭)를 설치하였는데, 물이 많이 차면 이 이두로 물을 화홍문 밖으로 뿜어 내게 되어 있다.

 

 

 



¨수원 화성¨ 동양 성곽의 백미 <관광명소>

동북심공돈(東北空心墩)

 

동북공심돈은 노대의 서쪽 60보쯤 되는 거리에 있다. 성탁(城托)의 위 성가퀴 안에, 요동(遼東)에 있는 계평돈(平墩)을 본떠서, 벽돌로 쌓아서 둥그렇게 돈(墩)을 만들었는데, 겹으로 둘렀다. 높이 17척 5촌, 바깥 원 둘레 122 척, 벽돌로 된 부분의 두께 4척, 안쪽 원 둘레 71척, 내원과 외원 사이에 가운데 4척 5촌의 공간을 비워두고, 2 층 덮개판으로 둘렀다. 아래 층 높이 7척 3촌, 가운데 층 높이 6척 5촌인데, 모두 군사들의 몸을 숨길 수 있게 하였다. 바깥 쪽으로 총안을 뚫어서 밝은 빛을 끌어들이는 구실을 겸하게 하였다. 위 구멍은 26개, 아래 구멍은 14개[사방 각각 1척]이다. 위 아래 덮개판 위는 진흙과 회를 섞어 쌓았다. 아래 층 공심에서 구불구불한 벽돌 사닥다리를 거쳐 위로 올라가면 위층에 이르게 되어 있다. 그 규모는 기둥 6개를 세웠는데 길이 12척이고 너비 10척이며,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다. 평평한 여장을 둘렀는데 높이 5척, 위 아래에 포혈 23개와 누혈 6개를 뚫어 놓았다. 아래 층 안 쪽에는 벽돌로 만든 홍예 모양의 작은 문을 설치하였다. 또 문 동쪽으로 공심을 막아서 온돌 한 간을 지어 놓았는데 방안(方眼)을 창으로 삼아 군사들이 출입하게 하였다.

 


동북노대(東北弩臺)

 

동북노대는 창룡문의 북쪽 96보의 거리에 있다.

치(雉) 위에 벽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었는데, 대 아래의 석축 높이 13척, 대의 높이 18척이다. 벽돌로 쌓는 방식은 사각형이지만 모서리를 깎아 벌의 허리처럼 만들어서 모를 죽인다. 안쪽 너비 17척 4촌, 바깥쪽 너비 19척, 성밖으로 나온 부분이 25척 5촌, 2개의 현안을 뚫었고, 위에 둥근 여장을 만들었다.

3면에 각각 1타씩이고, 바깥 쪽 2모퉁이에는 둥근 타구를 굽게 접히게 설치하였는데, 모두 방안(方眼) 3구멍을 뚫어 놓았으며, 타구마다 좌우에 凸모양의 여장을 끼고 있다.

안쪽 두 모퉁이는 평여장으로 굽게 접었는데, 모두 높이 6척 5촌, 가운데에 벽돌 계단을 돌계단과 이어지게 하였고 대 위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다. 담장 안의 남북의 너비는 14척, 동서 길이는 벽돌 계단까지 11척이다.

 

 

 

 

 


동북포루(東北鋪樓)

 

동북포루(東北鋪樓)는 각건대(角巾臺)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방화수류정 동쪽 135보 4척쯤 되는 거리에 있다. 지세가 별안간 높아져서 용두(龍頭)를 눌러 굽어보고 있다.

『성서(城書)』에 이르기를, "치성의 위에 지은 집을 포(鋪)라 한다"고 하였다. 치성에 있는 군사들을 가려 보호하려는 것이다.
치성이 성 밖으로 18척 5촌이 튀어 나왔는데, 외면의 너비는 24척이고, 현안(懸眼) 1구멍을 뚫었다. 5량으로 집을 지었는데, 판자를 깔아 누를 만들었다. 7영(七楹) 3간이고, 높이는 여장 위로 6척 8촌이 솟았는데, 전체 높이는 13척이다.
여장의 3면은 모두 벽돌을 사용하였고, 여장 안은 벽등()을 이중으로 쌓았는데, 아래 위에 네모난 총안 구멍 19개[사방 각 9촌], 누혈(漏穴) 11개[사방 각 4촌]을 뚫어 놓았다.
누의 위 4면에는 판문을 설치하고 외면과 좌우에는 사안(射眼)을 내어 놓았다. 내면에 벽돌 층계를 설치하여 오르내리게 하였다.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고, 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동암문(東暗門)

 

동암문은 동장대 서쪽 166보 되는 곳에 있다. 동쪽에 자리잡고 북쪽을 향하여 있으며 벽돌로 안과 밖의 홍예를 만들어 말 한필이 지나갈 수 있다. 안쪽 너비는 7척 높이는 8척이고 바깥은 너비가 6척, 높이가 7척 5촌이다. 문 위는 벽돌을 깔았고 누는 세우지 않았다. 다만 오성지와 한 개의 큰 둥근 여장을 설치하였는데 마치 나무로 만든 전붕(戰棚)의 제도와 같다. 좌우는 각각 비예를 갖추었고 안쪽은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다. 나머지는 남암문과 같다.

 

 

 

 


 

 

 

동일치(東一雉)

 

치(雉)는 8곳이지만, 실제로는 16곳이나 된다. 위에 집을 지은 것을 포(鋪)라고 하는데, 8곳 치 가운데 포가 5곳이나 된다. 가운데를 비우고 벽을 친 것을 돈(墩)이라고 하는데, 돈이 2곳이나 된다. 위에 노수(弩手)를 매복시키는 곳을 노대라고 하는데, 대가 곧 8개의 치 중 그 하나이다. 그러니, 위에 집을 얹지 않고 여장만 있는 것이 치성 본래의 제도이다. 지금 8군데의 치라고 하는 것은 대(臺)와 포(鋪) 사이에 있으며, 그 간격은 대략 비슷하다. 옛 법에는 50타() 만큼 씩 하나의 치를 둔다고 하였다. 꿩(雉)은 제 몸은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 하는 까닭에 이 모양에서 취한 것이다. 만약 적이 쳐들어와 성벽에 붙게 되면 우리로서는 화살이나 총탄을 쏠 수도 없게 되고, 상대편의 갈고리나 몽둥이가 이미 성의 밑바탕을 허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좌우로 마주하는 치에서 탄환과 화살촉[丸촉]이 번갈아 날아온다면 비루(飛樓)나 운제(雲梯)를 어찌 설치할 수 있겠는가? 치의 제도는 凸 모양을 성면(城面)에 붙인 것인데, 높이는 성과 같이 하고, 긴 쪽의 너비가 대체로 3장(丈)쯤 되며, 바깥 쪽으로 현안 구멍이 1개 있다. 그 둘레의 길고 짧음은 지세에 따라 각기 차이가 있다. 대체로 성은 굽고 꺾인 데가 많아서, 모퉁이와 마주치거나 문이 있는 곳에 이르면 스스로 치의 형상을 이루어 정성(正城)을 보호하게 마련이다. 이런 까닭에 타()를 따지고 봇수(步數)를 계산하는 방법이 옛날의 제도에 기준할 수 없다. 북동치는 북동적대의 동쪽에 있는데 적대와 서로 이어져 있다. 3면이 여장이고, 5개의 첩(堞) 으로 나누어 지었으며, 각각 방안 3구멍을 뚫어 놓았다.

 

동포루(東砲樓)

 

동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쪽 동일치와 동이치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정조20) 7월 16일에 완공되었다. 포루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로 치성의 발전된 형태이다. 화성의 포루는 모두 벽돌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공심돈과 같이 안을 비워 적을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공격할 수 있게 하였다.

 

 

 

 

 


 

봉돈(逢墩)

 

봉돈은 일자문성(一字文星)의 위에, 동2포(東二鋪)와 동2치(東二稚)의 사이에 있는데 행궁을 안조(案照)한다.

4성을 쌓고 나서 파수(把守)를 설치하여 정찰할 임무를 맡긴 것은 척후(斥候)의 의미를 가진 것이니, 멀리 육지나 바다에 대한 경보를 알리는 것을 더욱이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드디어 철성(凸城)의 제도에 의거하여 비로소 봉돈을 설치하였다. 벽돌로 쌓아올려 성의 몸체 위에다가 벽돌로 다시 높게 쌓았으며, 성 밖으로 18척이나 튀어 나오게 하여 마치 치(雉)처럼 생겼으면서도 그 보다 크다. 외면의 돌로 쌓은 것이 5층, 벽돌로 쌓은 것이 62층으로 전체 높이 25척, 너비 54척, 현안 2구멍을 뚫었다.
내면은 굴곡이 지게 하여 3층으로 만들었는데, 제1층의 높이 4척, 두께 8척으로 5개의 화두(火竇)를 설치하였다. 화두의 밑둘레 각 17척 2촌, 위의 줄어든 둘레 11척 5촌, 높이 11척으로서, 성가퀴 위로 6척이나 올라갔다.
거구(炬口)는 허리 쯤 높이에 있는데, 길이 각각 3척 1촌, 너비 1척 5촌, 위로는 꼭대기까지 뚫어지게 하였는데, 꼭대기 부분 지름이 1척이다. 5화두의 사이에는 성가퀴를 붙였고, 양쪽 끝은 구부려 안으로 향하게 하였는데, 3면에 포혈 18개를 갖추었다.

아래 두 층의 벽돌 층계는 너비 각 1척 4촌이고 높이 3척 3촌인데, 이것도 또한 휘어 구부려 3면 벽성을 만들고, 총안 18개와 누혈 1개[사방 1척]를 내었다. 좌우의 구부러진 돌층계를 거쳐 위로 올라가서 거로(炬路)로 통하게 되었는데, 층계가 각 10층이다.
양쪽 가장자리의 층계 끝에는 벽돌로 지은 집이 이어졌고, 용마루 없이 기와로 덮었다. 남북에 각각 한 간씩 있는데, 남쪽에 있는 것은 온돌로서 지키는 군졸이 거처하는 곳이고, 북쪽 것은 판자를 깔았는데 기계 따위를 넣어둔다.
봉돈에서 성내로 들어가려면 이 2곳의 모퉁이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좌우 것이 모두 길이가 16척이다.

돌층계의 등에 기대어 하나의 네모진 성을 만들고, 층계 위에는 짧은 담을 3 층으로 만들었는데, 아래는 2집으로 이어지게 된다. 전면의 2간은 벽돌로 쌓은 담인데, 길이가 18척 6촌이고, 한 가운데에 작은 문을 홍예로 틀었다.

담의 높이 13척으로 높이가 집과 같다. 담의 안쪽 등()의 아래에 해당하는 곳은 남북이 32척이고 동서가 21척이다.
저녁마다 남쪽의 첫째 횃불 구멍에서 횃불 하나를 들면 동쪽으로 용인 석성산(石城山)의 육봉(陸烽)에서 봉화로 응하고, 서쪽이 없으면 횃불을 들지 못하게 되어 있다. 다만 흥천대의 바다 봉화는 너무 멀어서 곧 바로 전하기가 어려우며 또 다시 화성부의 서쪽 30리 서봉산(棲鳳山) 위에 새로이 간이 봉화를 두어 여기에서 오는 봉화를 이 곳에서 전담하도록 하였다. 서봉산 사이 봉화는 또한 다섯 개의 화두(火竇)를 잡석대(雜石臺)위에 설치 하였는데, 화두의 높이 11척이고, 아랫 둘레 13척인데, 돌로 쌓고 회를 발랐다.
그 꼭대기는 허리 쯤의 높이로 하였고, 모두 횃불 아가리가 있는데, 동쪽으로 화성부 봉돈의 봉화에 준하고 있다. 대 아래 산 허리에 4간의 곳간을 지어 군대 물품을 저장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수직청(守直廳)을 지었다.

 

 

 

 

 

 

북동적대(北東敵臺)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이다.
포루와 치성은 성곽밖으로 완전히 돌출된 반면 이 적대는 시설물의 반만 외부로 돌출되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되어 있다.
적대는 성곽보다 높게 만들어서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였으며 총안등을 만들어 유사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북동적대는 장안문에서 동쪽으로 관통하는 도로를 건너있으며 1969년에 보수한 바 있다.
적대의 돌출길이는 8.9m 이고 폭은 6.55m이며 높이는 6.7m에 여장은 옥개부 밑까지 1.24m 이고 두께는 80cm 이다.

남측면에 돌계단 3 단을 두고 사방에 전돌로 여장을 둘렀다.
여장의 중심간의 길이는 남북으로 12.1m, 동서로 5.75m이며 凸형 여장이다.
성벽 전면에는 현안 3 개소를 두었다.

 

 

 

 

 

북암문(北暗門)

 

북암문은 동북각루의 동쪽 40보 되는 벽돌로 쌓은 성 사이에 있다.
안과 밖의 홍예 역시 벽돌로 쌓았다. 안쪽은 너비가 4척 6촌 높이가 6척 5촌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4척 높이가 6척이다.

문위에는 둥근 여장을 설치했는데 제도는 동암문과 같다. 홍예 사이에는 돌계단을 설치하여 들어가는 곳은 높고 나오는 곳은 낮게 만들었는데, 지세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서남각루(西南角樓),화양루(華陽樓)

 

서남 각루는 화양루(華陽樓)라고도 하는데, 용도(甬道)의 남쪽으로 멀리 떨어지고 높은 지점 경치좋은 곳에 따로 우뚝 서있다.

누의 규모는 6간인데 남북 21척, 동서 14척, 남쪽으로 2간은 판자를 깔고 난간을 둘러치고, 삼면에 판문을 내었다. 그리고 북쪽에는 분합을 내고, 분합의 밖으로 4간에는 메모난 벽돌을 깔았다.

이 벽돌로부터 판자를 깐 데까지의 높이 1척 7촌 석체(石)에서 벽돌을 깐 데까지 높이 2척, 단청은 5토를 썼으며, 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옛날 제도에 따르면 용도(甬道)란 것은 군량을 운반하기 위하여 보이지 않게 낸 길이다.
지금의 남쪽 기슭 한 가닥은 성 밖으로 나와서 별안간 높이 솟아 사방의 들을 내려다 보게 되어 있다. 만약에 이 곳을 막아 지키지 않아서 적군이 먼저 올라가게 한다면 성의 허실을 모두 엿보이게된다.
비록 양식을 운반하는 길은 아니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가장 중요한 곳이다. 그러므로 산 위의 3면에 돌로 성가퀴를 쌓았으니, 두께가 4척이고 안의 높이 5척이며, 북쪽으로 서남암문의 바깥 쪽과 이어지게 하였다. 좌우의 길이 각각 177보, 성가퀴 안의 너비 6보이다.
암문에서 84보 되는, 동쪽에 하나의 치성(雉城)을 설치하였고, 또 10보쯤 서쪽에 하나의 치성을 설치하였다.
남쪽 끝에서 15보 떨어진 곳에서 두 번 구부려서 넓혔다. 위의 구부러진 곳의 너비 9보, 아래의 구부러진 곳의 너비 11보로서, 이것이 화양루의 터다. 3면의 둘레는 367보이다.

 

 

 

 

 


 

서남암문(西南暗門)

 

서남암문은 서암문의 남쪽 367보 되는 곳에 있는데 용도(甬道)가 실지로 시작되는 곳이고 화양루의 통로가 된다.
벽돌로 된 홍예는 안쪽의 너비가 7척 높이가 8척 5촌이고 바깥 너비 6척 높이 8척이다. 위에는 안팎으로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으며 그 안에다 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포사(鋪舍)이다. 서남포사는 암문 위에 있어 높은 곳에 의거해서 멀리까지 볼수 있기 때문에 군졸을 두어서 경보를 알리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집의 제도는 사방 1간이고 높이는 8척 5촌이다. 여기에 온돌 을 놓고 사면에 판문(板門)을 설치하고 그 바깥 쪽에 짐승의 얼굴을 그리었는데,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다.

 

 

 

 

 

 

 


 

서노대(西弩臺)

 

서노대는 장대의 뒤에 있는데, 『무비지(武備志)』에 이르기를, 노대는 위는 좁고 아래는 넓어야 하며, 대 위에 집을 짓되 모양이 전붕과 같이 하고, 안에 노수(弩手)가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 그 제도를 본떠서 짓되 약간 달리 하였으니, 집을 얹지 않고 대를 8면으로 하되 깎아지른 듯이 우뚝 서있게 지었다. 면마다 아래 너비 각 8척 5촌, 위의 줄어든 너비 각 각 6척 5촌, 높이 12척, 지대(地臺) 위에 체벽()으로 면을 만들고, 돌을 깎아 모서리를 만들었다. 위에는 장대(長臺)를 얹고 凸 모양의 여장을 7면에 설치하였다.
높이 4척 2촌, 각각 총안[사방 4촌]을 뚫었다. 정동향의 한 면을 틔어 아홉 층계의 돌계단을 설치하였다. 대 위에는 네모난 전()을 깔고, 한 가운데에 또 다시 방대(方臺)를 쌓았는데 높이는 1척이다.

 

 

 

 

 

 


 

서북각루(西北角樓)

 

서북각루는 화서문의 남쪽 146보쯤 되는 거리의 산 위의 휘어 굽은 곳에 있다. 5량(五樑) 4간으로 동서가 18척, 남북 22척, 동북 3간은 모두 판자를 깔고, 사면을 평난간으로 둘렀다. 위에는 판문을 설치하였고 외면에는 모두 짐승의 얼굴을 그리고 전안을 뚫어 놓았다. 내면에는 태극을 그리고, 그 서남 한 간은 비워서 층계를 설치하여 북쪽으로 누상에 이어지게 하였다. 동남 1간은 청판(廳板) 아래를 벽돌로 담을 둘러치고, 온돌을 설치하여 수직하는 군사가 있게 하였다. 평지에서 누의 바닥까지 5척 7촌, 누의 높이 7척 5촌이고,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으며, 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서북공심돈은 화서문 북치(北雉) 위에 있다.
성서(城書)에 이르기를 벽돌로 삼면을 쌓고 그 가운데를 비워둔다. 그 가운데를 2층으로 구분하여 널빤지로 누를 만들고 나무 사닥다리를 사용하며, 위아래에 공안(空眼)을 많이 뚫어서 바깥을 엿보는데 편리하게 한다. 불랑기(佛狼機) 백자총(百子銃)들을 발사하여도 적으로서는 화살이나 총탄이 어느 곳에서부터 날아오는지를 모르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지금 이 제도를 본떠서 치(雉)에다가 돈(墩)을 설치하였는데, 치의 높이 15척, 서북 이면(二面)에 각각 현안(縣眼) 2구멍을 내었고, 그 위에 벽돌로 쌓아서 그 속을 비게 하고, 위에다 가로 세로 2간의 집을 지었다.
벽돌로 쌓은 것이 높이 18척, 아래의 너비 사방 23척, 위의 줄어든 너비 사방 21척이다. 상청판(上廳板)과 하청판의 2판을 설치하여 누(樓)일 경우에는 2층으로 하고 포(鋪)일 경우에는 3층으로 하여 층마다 벽돌로 된 면에 불랑기를 쏘아댈 포혈(砲穴)[사방 1척]을 내었다.
상층의 벽돌로 된 면 위 쪽은 판자로 둘렀으며 문마다 각각 전안(箭眼)을 뚫었다.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고 대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중층과 상층에는 각각 청판(廳板)을 여는 사방 3척의 덮개판 하나를 만들어, 밀고 당겨서 열고 닫게 하여 나무 사닥다리로 된 오르 내리는 길과 통하게 하였다.
아래 층 안쪽에는 벽돌로 된 홍예 모양의 작은 문을 내었다.

 

 

 

 

 


 

서장대(西將臺)

 

서장대는 팔달산의 산마루에 있는데 유좌(酉坐) 묘향(卯向)이다.
위에 올라가서 굽어 보면 팔방으로 모두 통한다. 석성[석성산]의 봉화와 황교(皇橋)[대항교]의 물이 한 눈에 들어오고, 한 성의 완급과 사벽(四壁)의 허실은 마치 손바닥 위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 산 둘레 백리 안쪽의 모든 동정은 앉은 자리에서 변화를 다 통제할 수 있다.

그래서 돌을 쌓아서 대(臺)를 만들고 위에 층각(層閣)을 세웠다.
앞쪽 대석은 4층인데 전체 높이가 5척이다. 댓돌은 3개인데 층계는 4개이고 대의 너비는 98척이다.
대 아래의 동서로 42척의 거리를 두고 좌우에 크고 붉은 의간[杆][큰깃대] 한 쌍을 나누어 세웠다. 상대(上臺)의 너비 87척 높이 2척이고, 아래 층각의 규모는 9간인데 가운데 한간은 사방 13척 2촌이다.

밑에는 판자를 깔고, 연잎 평난간으로 둘렀으며, 뒤쪽에는 분합을 드리웠다. 문지방 위에 임금께서 쓰신 큰 글자[화성 장대(華城將臺)]로 편액을 붙였다.
사면에 각각 긴 시렁을 내물렸는데 길이가 6척 5촌이고, 네 모퉁이에 각각 시렁 하나 씩을 붙였는데, 역시 사방 6척 5촌이다.
모두 네모난 벽돌을 깔고 바깥에는 둥근 기둥 12개를 세웠는데 높이가 각각 7척이고, 이것을 여덟 모의 돌기둥으로 받치었는데 높이는 각각 3척 5촌이다. 위 층은 한 간인데 사면에 교창(交窓)을 내고 판자를 깔아 바닥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그대로 아래 층의 반자(盤子)가 되었으니 곧 조정(藻井)의 제도라는 것이다. 그 서북쪽 모퉁이에 층사다리(層梯)를 세워서 위층으로 통하게 하였다.
옥상(屋上)의 한 가운데에 절병통(節甁筒) 셋을 세웠는데 높이가 6척이다. 대 위에서 위층 대마루 대들보까지 전체 길이가 21척이다.
단청에 오토(五土)를 사용하였고, 대들보 위는 회로 발랐다. 대 뒤에는 팔면으로 된 노대를 쌓고 그 뒤에 후당(後堂) 3간을 지었는데, 군무를 보는 곳으로 쓰려는 것이다.
서쪽 두 간은 온돌이고, 동쪽 한 간은 판자를 깔았다. 모두 창과 분합을 설치하고, 단청을 하였다. 앞 기둥에는 평난간을 설치하고, 뒷담 동쪽 끄트머리에는 판자문을 내었다.

 

서포루(西砲樓)

 

서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砲樓) 중 서북각루와 서장대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년(정조 20)5월 30일 완공되었다.

포루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로 치성의 발전한 형태이다.
화성의 전투 지휘소인 서장대의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기에 5개의 포루중 가장 중무장한 포루이다.

 

 

 

 

 

 


 

서포루(西鋪樓)

 

포루는 성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 위에 작은 목조건물이며 초소나 군사대기소와 같은 곳이다.

서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중 하나로 1796년(정조 20) 8월 15일 완공되었으며, 서암문이 적에게 발견되어 공격받는것에 대비하여 설치되었다.

 

 

 

 

 

 


동장대[연무대](東將臺)

 

수원화성 동장대는 동문인 창룡문과 북수문인 화홍문 사이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장대이다.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가 화성 안밖을 감시하면서, 적과 화성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의 움직임을 조망하면서 지휘하는 장소라면, 서장대는 이 곳 수원화성에 주둔하는 병사를 모아놓고 훈련을 하거나 군사적인 집회가 이루어진 곳이다. 실제로 정조대왕 재위시절에 이 곳에서 많은 행사가 있었으며, 군사들을 모아놓고 무예를 수련하게 했었다고 하며, 그래서 연무대란 별칭이 붙어 있다.

 

 

 

 

 

 

 

 

영롱담(玲瓏墻)

기와로 꽃문양을 새겨놓은 담장, 마치 구슬이 울리는 소리가 날듯 한 꽃문양의 담이라는 뜻으로 '영롱담' 이라 하였다. 전체높이 165cm. 연무대의 왕을 보호하기 위해 뒷 담장 밑부분을 무늬가 있는 문석대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영롱담을 쌓아 아름다움을 더했다.



 

 

 

 

 

 

장안문(長安門)

 

장안문[편액은 전 참판 조윤형(曺允亨)이 썼다]은 성의 북문이다.
행궁의 왼쪽 편인데 동쪽으로 780보되는 곳에 사좌(巳坐) 해향(亥向)으로 앉았다. 문의 안과 밖은 홍예로 되어 있다. 안쪽 홍예는 높이 19척 너비 18척 2촌이고, 바깥 쪽 홍예는 높이 17척 5촌, 너비 16척 2 촌, 전체 두께는 40척이다.

안쪽의 좌우에 있는 무사(武砂)[성석이 크고 잘 다듬어진 것으로 문 옆의 석면(石面)이 된 것을 무사라 한다]는 각각 아래 너비가 67척 8촌, 높이가 23척 5촌, 왼쪽과 오른쪽의 와장대(臥長臺)는 각 32척 4촌, 섬돌은 각 23층 너비는 17척 2촌이다. 바깥 쪽의 좌우 무사는 각각 너비가 41척 높이가 23척 5촌이다. 안팎의 홍예문 사이에 있는 좌우 무사의 높이는 각 21척, 양쪽 선문(扇門) 안은 철엽(鐵葉)으로 하고 빗장을 설치하였다. 홍예의 덮개 판에는 구름 무늬를, 그리고 판 위에는 세 가지 물건[석회, 가는 모래, 황토]으로 쌓았는데, 두께는 4촌이다. 안팎의 홍예 위에는 장군 모양의 무사와 2층의 장대를 얹었으며 홈통[너비 1척 깊이 5촌]을 네 곳에 설치하였다.

안쪽의 평여장(平女墻)은 너비 88척 7촌, 높이 4척 3촌, 두께 2척 5촌이고 바깥 쪽 여장의 높이 두께도 같으나 너비는 동서장 밖으로 각각 7척 4촌이 나왔다. 이 부분에서는 높이가 6척이 되어 옹성 위의 작은 홍예와 연결되며 타구(口)는 10개[첩(堞)은 11개]를 벌여 놓았다. 그리고 네모진 총혈(銃穴) 12개[네모의 한 쪽 길이는 8촌이며, 첩마다 1 개를 뚫었고, 가운데에 있는 1개의 첩에는 2개의 총혈을 뚫었음]를 내었다. 동쪽과 서쪽의 여장은 너비 3척 5촌, 높이 5척 6촌, 중앙에 각각 작은 판자문을 두었는데 높이는 6척 5촌 너비는 6척이다. 장(墻) 안에는 2층의 누를 세웠는데 전체 높이는 32척 9촌, 아래 위 각각 10간(間), 가로 너비는 5간 세로 길이는 2간이다.
아래 층[안은 7포, 바깥은 5포] 정면 간의 너비는 22척 5촌인데, 바닥[높이 1척]에는 널판지를 깔았다. 오른쪽과 왼쪽 각각 둘 씩 협간(夾間)이 있는데 너비는 모두 12척이며, 세로 길이 2 간이고 전체 길이가 24척이다.
서쪽 협간의 첫째 간과 동쪽 협간의 두 번째 간에는 각각 곡란층계(曲欄層階)를 설치하여 위층으로 통하게 하였다. 서쪽 층계는 북쪽에서 올라가며 동쪽 층계는 남쪽에서 올라간다[서쪽 층계 아래에 살문[箭門]이 있는데 잠가두었다가 임금이 오실 때에는 연다].
위층[안팎 모두 7포]은 정면의 간과 좌우 협간은 너비가 모두 하층과 같고 두 번째 협간은 각각 너비가 9척이며, 그 세로가 2간 전체 길이는 18척인데 모두 널판지를 깔고, 사면에 널판지 문을 달았다. 그리고 3면에는 모두 짐승의 얼굴을 그려 호로전안(葫蘆箭眼)[널판지마다 구멍이 하나씩 있는데 경(經)이 3촌 직봉(直縫) 역시 3촌이다]을 뚫었는데 안 쪽에는 태극을 그렸다. 단확(丹)은 3토를 사용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으며 문 안 서쪽 가에는 수문청을 별도로 세웠다.[협도(夾刀) 넷을 세웠다]

북옹성은 장안문의 외성이다. 성서(城書)에는 옹성의 크기는 정성(正城)의 대소에 따르며 모양은 옹기를 반으로 나눈것과 같다고 하였다. 문위에 적루(敵樓)를 세우지 않는 것은 정성이 가로 세워져 있어 적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옹성은 정문 좌우의 무사에서 각각 7보 되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벽돌을 쌓아서 성을 만들었는데, 높이는 17척 안쪽 둘레는 159척 6촌 바깥 둘레는 209 척이고, 아래는 두께가 15척이고 위는 줄어 들어서 12척이다.

바깥 쪽에 현안(懸眼) 16개를 뚫었다[각각 길이 2척, 지름 2척 2촌]. 안 쪽에 벽돌로 된 홈통 8개[지름 각 5촌]를 설치하였다. 옛 제도에는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한쪽 문만을 열었으나 지금은 사방으로 열리고 팔방으로 통한다는 뜻을 취하여 중앙에 문을 설치하여 정문과 마주하게 하였다. 양문의 사이는 10보 3척이며 돌로서 안팎으로 홍예를 만들었다.

안쪽의 홍예는 너비가 18척, 높이 19척이고 바깥 홍예는 너비가 16척 높이가 17척 5촌이며 안팎 홍예의 사이는 좌우 높이가 21척이고 양 선문(扇門) 안에는 쇠로서 빗장이 설치 된 것이 정문과 같다. 홍예의 덮개판 위는 세 가지 물건으로 쌓고, 다시 여러 장의 벽돌로 쌓았다. 그 위에 오성지(五星池)[『실정기(實政記)』에 이르기를 오성지는 모양이 구유같고 5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크기는 되(升)만 하다. 적이 문을 불태우려 할때 물을 내려보낼 수 있다]를 설치하였는데, 오성지 전체 길이는 14척 너비는 5척 깊이는 2척이고, 각 구멍의 지름은 1척이다. 오성지 위에는 성가퀴 9첩을 설치하였는데, 전체 너비 38 척이고, 그 좌우는 1층을 낯추어서 凸 모양의 성가퀴 7첩을 설치하였다. 너비는 각각 10척 2촌이며 높이는 모두 5척이다.
성과 만나는 곳에서 다시 凸의 반쪽 모양으로 층을 만들었는데 높이는 9척으로 각기 총안을 1구멍씩 뚫었다. 안쪽은 둘레가 평평한 여장으로 높이는 3척 5촌, 두께는 모두 2척 6촌이다. 옹성 위는 모두 네모난 전()을 깔고 좌우 끝에는 벽돌로 된 홍예에 작은 판문을 설치하여 성의 위와 통하게 하였다. 문의 양 옆은 평여장을 설치하였는데 높이는 10척 7촌이다.

북성의 적대는 2개로서, 각각 장안문의 좌우 53보 되는 곳에 있다. 옛 제도에는 70보 되는 곳에 1대를 세우고, 활화살 화창(火槍)을 대 위에 갖추어 둔다고 하였다.

성서에는 지금의 성은 화살과 탄환이 필요 없다고 하였다. 비록 창이나 선()으로 위로 찌른다 해도 전체 높이가 여유가 있고, 대의 양쪽 가장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적이 곧 바로 성 아래로 다가오지 못할 것이다. 또 포물선으로 날아오는 화살이나 비스듬히 날아오는 탄환도 대위에 있는 사람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 했다.
대략 이 제도대로 하면 대의 높이는 2척으로, 원성의 성가퀴와 나란하고 반은 성 밖으로 나오고 반은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바깥 쪽의 아래 너비는 26척이고, 위로는 줄어들어 너비가 21척이다.
현안(懸眼)[각각 길이는 20척이고, 지름은 5촌이다]이 3개 있다.
좌우의 아래 너비는 각각 29척이고 위로는 줄어들어 너비가 24척이다. 凸 모양의 성가퀴로 둘렀는데, 바깥 3면은 11첩(堞)이 있는데 높이는 5척이고 두께는 2척 8촌으로 각각 총안[사방 6촌]을 뚫었다. 내면은 좌우 평평한 성가퀴에 각각 1첩씩인데 높이는 8척 이고 가운데 5척은 속이 비게 하여 돌계단을 설치하여 대 위와 통하게 하였다.

 

 

 

 

 


 

창룡문(蒼龍門)

 

창룡문[편액은 판부사 유언호(兪彦鎬)가 썼다]은 성의 동문이다.
서남으로 행궁과 1,040보 떨어져 있고, 유좌(酉坐) 묘향(卯向)이다.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 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각각 아래 너비가 30척 높이 18척 5촌이며, 좌우의 와장대(臥長臺)는 길이가 각각 20척이고 돌계단은 각각 14층이며 너비는 9척이다. 바깥쪽 좌우 무사의 너비는 각각 25척 높이는 18척이며, 안팎 홍예 사이의 좌우 무사는 높이가 각각 17척, 양쪽 선문 안은 쇠로써 빗장을 설치하였다.

홍예의 덮개판 위는 3물로 하였고 두께는 3촌이며, 거기에다 안팎으로 장대 각 2층 홈통 각 2개를 더하였다. 안 쪽은 평평한 여장으로 너비는 51척 높이가 4척 7촌 두께가 2척 1촌이다. 외면은 여장의 너비와 높이 두께는 모두 내면과 같다.

타구(口)는 6개[첩은 5개], 방안 총혈은 6개 [각각 사방 8촌 가운데 1첩은 구멍이 2개], 좌우의 여장은 각각 너비가 23척 높이가 5척 6촌 가운데에 작은 널판지 문을 설치하였는데 높이 6척 너비 5척 5촌이다.
장(墻)내에는 6간의 누를 세웠다[안팎 3포(三包)에 2익공(翼工)]. 정면의 간(間)은 너비가 16척 5촌인데 밑에 널판지를 깔았다[높이 1척]. 좌우의 협간은 각각 너비가 8척 5촌 모두 세로 2간이며 전체 길이는 16척이고 기둥의 높이는 7척 5촌이며 단확은 3토를 사용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으며 수문청은 3간으로 문안 북쪽 가장자리에 있다.

동쪽 옹성의 제도는 고제에서 한 쪽만을 연다는 뜻을 취하여 옹성을 쌓았다. 성문의 왼쪽에 이르러서는 원성과 연결되지 않고 외문을 설치하지 않아서 경성의 흥인문 옹성의 제도와 같게 하였다. 옹의 형태는 문의 오른쪽 6보 3척 되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문의 왼쪽 6 보 3 척 되는곳 에서 끝난다. 성과 이어지지 않는 곳은 그 사이가 4보 1척이다.
옹의 높이는 9척 6촌이고 내 면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7척이고 정문과 거리는 28척이다. 외면은 벽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1척이고 아래 두께는 11척 5촌이며 위의 두께는 줄어서 10척 5촌이다. 내면은 벽돌로 된 누조[각각 직경 5촌] 4개를 설치하였다. 평평한 여장으로 둘렀는데 높이는 3척 두께는 2척 5촌이다. 바깥 면은 현안[각각 길이 8척 5촌 직경 1척] 셋을 뚫었다. 여장 4첩을 설치하였는데 높이는 4척 5촌이고 원총안과 근총안[매 첩마다 3개의 구멍 또 북쪽 끝 가로 첩에는 2개의 구멍] 14기를 뚫었다.
옹성 위에는 회다짐을 하고[3물을 혼합하여], 그 남쪽 끝에는 돌 층계를 설치하여 위로 원성과 통하게 하였다.

 

 

 

 

 

 

 

 

 

화서문(華西門)

 

화서문[편액은 좌의정 채제공이 썼다]은 성의 서문이다.
동남으로 행궁과 460보 떨어졌으며 묘좌(卯坐) 유향(酉向)에 자리잡고 있다.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 계단을 꺽어지게 해서 층을 만들었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아래 너비가 각각 9척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각각 22척 2촌이다. 홍예문 사이 좌우의 무사는 높이가 각각 18척이고 수문청은 문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다[협도는 둘을 세웠다].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같은데 높이는 11척, 안쪽 둘레는 76척 정문에서 36척 떨어져 있 으며 바깥 쪽 둘레는 110척이다.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나머지는 모두 동옹성과 같다.

 

 

 

 

 

 

 



 

화홍문(華虹門)

 

북수문은 편액에 화홍문[사인(士人) 유한지(兪漢芝)가 썼다]이라 되어 있다. 방화수류정의 서쪽 44보 되는 곳에 있다.

광교(光敎) 언덕을 대천(大川)이 가로로 자르며 흐르고 있어, 여름 장마 때마다 범람하는 환난이 있었다. 그래서 성을 쌓기 시작할 때에 물길을 내는 일을 먼저 하였다. 넓혀서 소통을 시키고 7간의 홍예로 된 돌다리를 하천 위에 걸쳐서 설치하였다. 그 동서로 3간은 아래 너비가 8척 높이가 7척 8촌, 가운데 한 칸은 너비가 9척, 높이가 8척 3촌이다. 7개의 안팎 홍예 사이에는 각각 좌우에 돌기둥 4개를 세웠다. 홍예가 서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잠자리 무사를 붙였다. 중앙에는 장군형 무사를 덧붙였다. 거기에 다리 놓을 돌을 깔고 다리 위 바깥 쪽에는 장대석(長臺石)을 설치하였다.

아래의 전석에서부터 다리 밑까지 높이는 8척 7촌, 다리의 두께는 1척 9촌이다. 장대는 높이 1척이고 다리는 너비가 31척 길이 95척이다. 장대 위에는 누조(漏槽)[각각 너비 1척 깊이 5촌] 7개를 설치하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첩을 설치했으며, 타구는 설치하지 않았다. 높이는 5척 4촌 두께는 4척 8촌이고, 아래에는 방안 대포 구멍[사방 각 1척]을 뚫었다. 위에는 소포 구멍 14개[사방 각 7촌]를 뚫었다. 안쪽은 장대만을 두고 누혈(漏穴) 6개를 뚫었다.
동서 양끝에는 8면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이무기를 새겼다. 서쪽 기둥의 북쪽과 동쪽 기둥의 동쪽에는 짧은 담을 쌓고 전판문(箭板門)을 설치하여 동쪽 성의 길과 통하게 하였다. 다리 위 북쪽 편에 누각 6간을 지었는데, 동서로 가로 너비가 3간이고 남북으로 세로 길이가 2간이다. 모두 널빤지를 깔았는데 첩의 위로 높이 솟아나오게 하여 사면에 분합을 달고 동서남 삼면에는 연잎을 새긴 난간을 붙였다. 난간 아래에는 벽돌을 둘러서 담장을 만들고 남쪽 한 가운데 1간을 비워서 들고 나는데 편하게 하였다.

방사(放射)하는 제도는 포루와 같다. 다리 위에서 널판지 깐 데까지 높이가 6척 2촌이다. 북쪽 분합 밖으로 물려깐 널위에는 전붕(戰棚)을 설치하였고 판문 아래에는 벽돌로 된 첩과 이어지게 하였는데, 바깥 쪽에 짐승의 얼굴을 그리고 전총안(箭銃眼)을 뚫었다. 단확은 녹색을 바탕으로 하고 진채(眞彩)는 사용하지 않았다.

대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다. 누 남쪽 다리 위의 길은 너비가 5척이고 다리 아래 7개의 홍예에는 각각 쇠로 만든 전문(箭門)을 설치하였다. 줄로 양선(兩扇)을 걸어 당겨서 교면(橋面)의 석안(石眼)까지 꿰뚫고 지나가게 하였으며, 거기에다 고리를 설치하고 자물쇠를 달았다.

문 안의 양쪽 석축은 각각 길이가 6보 높이가 4척 5촌이고, 문 밖의 석축은 각각 길이가 5보 높이가 5척 5촌인데, 위로 성의 몸체와 이어져서 전체 높이는 16척이다. 이것이 실지로 내의 동쪽과 내의 서쪽이 서로 마주 서서 휘어 꺽여 원성(元城)이 되었다.
두 끄트머리는 전붕과는 좌우로 각각 29척이 떨어져 있는데, 여기에 또 좌우의 벽돌로 된 첩 위에 타구가 셋인 여장을 설치하여 담과 이어지게 하였다. 높이는 각각 4척 4촌이고 두께는 2척 2촌이다.

 

 

 

_  공연 안내

 


 

 

 

 

_  수원화성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은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의 중심부에 자리잡아 접근성이 용이하고 모형과 관련 유물의 전시를 통해 화성 축성에 대한 전반을 이해할 수 있게 건립되었습니다.
상설 전시공간으로 수원화성의 축성과정과 도시발전을 알려주는 화성축성실과 수원화성 축성에 참여한 인물과 정조의 8일간의 행차, 더불어 화성에 주둔하였던 장용영의 모습을 보여주는 화성문화실이 있습니다.

화성문화실은 특히 초대 화성유수이자 화성성역 총리대신이었던 문숙공 번암 채제공 선생님의 초상화(보물 1477호)를 비롯하여 정조대왕께서 하사하신 비밀어찰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는 채제공 선생님의 6대 후손이신 채호석 선생님의 기증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수원화성박물관은 기획전시실을 준비하여 매년 의미있는 특별기획전을 추진할 예정입니다. 수원화성을 보다 세밀하게 알려줄 수 있는 다양한 특별기획전은 수원화성박물관의 위상을 높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수원화성박물관은 상설체험실과 정기교육실을 마련하여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험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다양한 형태의 교육 공간을 조성하여 수원시민과 수원화성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과거 유물 전시위주의 박물관 운영을 뛰어넘어 전시·교육·체험이 어우러지는 박물관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수원화성박물관은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과 조선후기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알림으로서 지역의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쉬는 공간으로 만들어 이곳을 찾는 모든 분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박물관이 되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