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용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전기』5.반일의병항쟁 ⑴

대모달2011.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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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 해산 과정 목격



안중근은 회사를 정리하고 어느 정도 자금을 마련한 후 망명준비에 들어갔다. 교육계몽운동(敎育啓蒙運動)이나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수준으로는 일제의 침략 세력을 몰아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망명을 서두른 것이다.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는 등 한국 침략의 1등 공신인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1907년 7월 3일 고종(高宗) 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그리고 순종(純宗)을 등극시켜 정미7늑약(丁未七勒約)을 맺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고자 맺은 정미7늑약은 ‘한국 정부는 제반 시설개선에서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법률제정과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통감의 승인을 받을 것, 고등관리의 임명은 통감의 동의를 받고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할 것’ 등을 골자로 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의 내정에 대한 감독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정미7늑약의 시행규칙에 대한 비밀협정서에는 한국 군대의 해산, 사법권과 경찰권의 위임, 일본인 차관의 채용 따위가 들어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에 들어와 실권을 장악한 일본인 고위관리는 1907년 당시 경찰을 제외하고도 2080명에 이르렀다. 이들의 급료는 모두 한국 정부의 재정으로 충당되었다.



일제의 쇠사슬은 계속 이어졌다. 신문지법과 보안법을 공포해 언론출판에 족쇄를 채우고 집회·결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였다. 또 의병항쟁을 봉쇄하기 위해 총포 및 화약단속법을 만들었고 ‘한국주차 헌병에 관한 건’을 제정해 일본 헌병의 경찰권을 강화하고 병력을 크게 늘렸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버팀목인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당시 구한국 군대는 서울에 주둔한 시위대 5개 대대와 지방에 주둔한 8개 대대가 있었다.



한국 군대를 한꺼번에 해산하면 반발이 생길 것이라 우려한 일제는 먼저 서울의 5개 대대를 해산시켰다. 그 날이 1907년 8월 1일이었다. 일제는 2000명의 조선 병사들에게 맨손 훈련을 실시하고 공로금을 지급한다고 속여 무장을 해제시킨 채 소집한 다음,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한국 군인들은 많은 수의 중무장한 일본군에 포위되어 있는 상태였다. 군대를 해산하는 명분은 경비가 없어서 더 이상 한국 군대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참령(參領)이 39세의 나이로 군대 해산 소식을 듣고 자결하자 병사 700여명이 무장투쟁으로 일본군과 맞섰다. 한국 군인들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맞서 탄약도 얼마 없는 구식총기로 서울 남대문 등지에서 처절하게 싸웠다. 이날의 교전으로 남상덕(南相悳) 참위(參尉) 등 68명이 살해되고 100여 명 부상, 500여 명이 포박되었다. 서울의 군대 해산과 항일전(抗日戰) 소식을 전해 들은 지방 진위대의 군인들도 일본군과 싸웠다. 이들은 대부분 의병부대에 합류해 항전을 계속했다. 이것은 정미의병항쟁(丁未義兵抗爭)의 계기가 되었다. 안중근은 해외망명을 결심하고, 서울에 올라와 명동성당 근처에 머물고 있을 때여서 마침 한국군이 일본군과 싸우는 처절한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때 안중근은 평양에 있다가 국변이 있다 함을 듣고 급히 경성에 들어와 남문 밖 제중원(濟衆院)에 머물고 있었다. 이날 이 참상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포성이 약간 멎으니 즉시 안창호와 김필순 그리고 미국 의사 몇 명과 함께 적십자표를 달고 싸움터에 뛰어들었고, 부상자를 부축해 들고 입원치료시켰다. 무려 50명이었다.’



박은식(朴殷植)의《안중근전(安重根傳)》에 의하면, 당시 안중근은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한국군 장병들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그 현장을 목격하고 안창호 등과 더불어 싸움터에 뛰어들어 부상자를 입원시키는 등의 역할을 했다. 안중근은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이때 다시 한 번 굳힌다. 해산된 군인들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합세해 일본군을 습격했다.



1908년 유학자 이인영(李仁榮)을 총대장으로 한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 1만여명은 서울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총대장 이인영은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지휘권을 군사장 허위(許蔿)에게 맡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얼마 뒤 창의군은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의병들은 각지에서 독자적으로 유격전(遊擊戰)에 들어갔다. 전국 각지에서는 크고 작은 의병부대가 조직되었는데 1908년 당시 전국에는 의병장이 241명, 의병이 3만 1천여명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안중근은 교육계몽운동이나 국채보상운동에만 머무를 수 없었다. 계몽운동 수준으로는 국난을 극복하기 어렵다고 보고 의병항쟁을 통한 독립전쟁의 방략을 강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 현대식 무기와 활·죽창의 대결



안중근은 구한국군과 일본군이 싸운 모습과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의병항쟁을 지켜보면서 주변의 동지들에게 의병조직의 필요성과 국권수호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① 일본 제국주의는 팽창과정에서 3국(청·러시아·미국)과 전쟁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② 3국과의 전쟁이 발발하면 일본은 힘들겠지만 한국은 국권수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③ 한국 국민들의 준비가 없으면 일본이 패전해도 한국은 또 다른 외국 도적의 손아귀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④ 한민족은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 힘을 길러야 국권수호는 물론 독립을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⑤ 한민족은 스스로 힘을 길러 독립투쟁을 전개해야만 패전이라는 최악의 경우에도 세계 각국의 공론(公論)으로 독립을 보장받을 희망이 있다.’



일본군과 싸운 구한국군과 의병의 무기는 사정거리가 10보에 불과한 화승총(火繩銃)이었다. 그나마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사용이 불가능한 무용지물이 되고, 대부분은 활이나 창, 심지어 죽창으로 ‘무장’하였다. 반면 일본군은 이미 동학농민혁명군을 학살할 때 사용한 스나이더 소총과 무리타 소총, 여기에 대포까지 갖춘 신식군대였다. 무력으로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본 안중근의 가슴은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 무렵(1907년)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이동휘(李東輝)·신채호(申采浩) 등 민족운동진영 인사들이 국내에서 비밀결사단체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국권회복과 공화제 국민국가 수립을 궁극의 목표로 삼고 국민계몽, 인재양성, 경제적 실력양성을 추구하는 한편 해외에 독립군 기지 건설, 무관학교 설립 등을 실행하려고 하였다. 1910년에는 회원이 800여 명에 이르렀다.



신민회의 핵심인물이나 성격으로 볼 때 안중근도 참여할만했는데도 안중근의 이름은 명단에서 찾아보기 어렵고 구체적 활동상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자료에서는 안중근이 신민회의 회원이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분명한 사실을 밝힐 수 없다. 그러나 서북학회의 주요 인사들이 신민회에 망라되었고 또 신민회의 블라디보스톡 책임자인 이강(李剛)과 안중근이 그 후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점으로 미루어, 안중근과 서울에서 구국전략을 협의하던 동지들이 신민회 계열의 인사들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안중근의 신민회 참여 여부는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뒤 안창호·이동휘를 비롯한 신민회 간부들이 대거 구속되었던 점으로 볼 때 어떤 형태로든지 참여했을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