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B.N.Q20

농구왕김타자2011.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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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그래...... 야, 야 이제 나도 고참기수야. 신발, 누가 머라고 그래? 우리 내무반에선 내가 서열 몇번 짼줄 아냐? 다섯 번째야. 다섯 번째. 그래 임마. 낼모레면 병장 달잖냐...... 응?...... 킥, 맞아 맞아. 킬킬킬킬킬...... "

정문 1초소에서 근무를 서고 있는 상병은 아까부터 수화기를 붙들고 누군가와 통화중이었다. 한참을 뭐라고 속사포처럼 떠들어대다가 어느 순간 실성한 사람처럼 킬킬거리는 그의 모습은 언뜻 보아도 가관이었다.
그렇게 전화 통화에 한참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누군가가 정문으로 성큼성큼 들어서고 있었다. 그 실루엣이 초소 유리문에 어른거리자 그것을 눈치챈 상병은 수화기에다 대고 " 어 잠깐만, 누가 왔다...... " 라고 나직이 외치며 전화는 끊지 않은 채 초소 문을 열고 허겁지겁 나왔다. 표정은 좀 전과 180도 뒤바껴 아주 사무적이고 조금은 건방져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상병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K - 2 소총을 둘러메고 초소 문을 나서는데 까지는 길어야 4~5초였다. 어쩌면 그보다 1초 정도 더 짧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초소 문을 열고 나와 실루엣이 어른거렸던 정문 쪽을 바라보니 그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정문 앞으로 가로 놓인 바리케이드만이 비를 맞고 있을 뿐이었다.
흠칫 놀란 그가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자신이 좀 전에 보았던 그 실루엣......
그 실루엣의 실체가 초소로부터 전방 100미터는 족히 더 되어 보이는 위치에 우뚝 서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꽤 먼거리라 실루엣의 표정을 제대로 읽어낼 순 없었지만 적어도 상병이 느끼기엔 꽤나 무섭게 노려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상병은 왜 저러고 있나 싶어 한편으론 의아해 하면서도 한편으론 등줄기를 할퀴며 내려가는 싸늘한 한기를 똑똑히 느낄 수가 있었다.
바로 금방 전에 정문을 들어섰던 실루엣이 단 몇 초만에 저렇게 먼 곳가지 가 있다니...... 어떻게 그런 귀신같은 일이 눈앞에서 펼쳐진 것인가...... 그렇다. 일단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모리스 그린이라고 해도 그야말로 눈 깜박할 사이에 저렇게 먼 거리까지 달려가 있을 순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믿는 것. 전화통화에 신경쓰느라 초소 유리문에 비친 실루엣이 정문을 들어서고 있는 사람의 것이라고 착각했다고 믿는 수밖에.
상병은 계속해서 100미터 전방에서 꼼짝도 않고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그 실루엣을 한동안 이상스레 마주 쳐다보고 있다가 별안간 무시무시한 공포를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는 얼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돌아서 초소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실루엣도 다시 등을 보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B N Q 건물로 향하는 듯 했다. 상병은 초소 유리문 사이로 슬그머니 다시 그 실루엣을 훔쳐 보았다. 먼 거리였지만 걸어가는 뒷모습이 상당히 눈에 익었다. 그리고 좀 전에 밀려든 공포의 정체에 대해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답이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 똑똑히 본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
바로 사람이 아닌 그 무엇을......
수화기에서 삑삑거리는 신호음이 상병의 상념을 깨뜨렸다. 상병은 그제야 정신이 번뜩 들어 통화하다가 말았던 수화기를 다시 들었다.
전화는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

 

영민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모두들 근무, 또는 작전도로 배수로 작업을 하러 나갓기에 건물 안은 텅 비어있었다. 영민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너무 지독한 고요는 눈의 현실감마저 앗아가 버린듯, 순간순간 자신이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전투화는 계속해서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영민은 머리 속에 막연히 확인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만이 맴돌고 있었다.
무엇을? 바로 B N Q 4호실을......
영민은 어느새 3층 복도까지 와버렸다. 길게 늘어선 복도. 그 끝에 위치한 B N Q. 그리고 B N Q 4호실. 영민은 심호흡을 했다.
'저 안에 뭔가가 있는거야. 모든 사건의 시작은 저기서 부터였어.'
새삼 약간의 두려움이 몰려 왔지만 영민의 강한 호기심은 기필코 4호실의 비밀을 밝혀 내겠다는 굳은 의지로 이어지고 있었고 몸은 그것을 실천하고 있었다.
4호실로 다가가는 영민. 다가오는 B N Q 4호실. 4호실의 문고리가 보인다. 잠시 망설이다가 단숨에 손을 뻗어 문고리를 돌리는 영민.
그러나 다음 순간 영민은 적이 실망을 한다. 4호실의 문은 굳건히 잠겨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곳은 보급반 창고였고 별 일이 없을 시에는 항상 관건하는 것이 규칙이니까.
하지만 영민은 조금 아쉽고 기막힌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뭐야, 이거. 나 보란 듯이 툭하면 삐죽이 열려 있을 대는 언제고, 막상 마음먹고 들어가 보려니까......'
영민의 실망은 끝내 당혹스러움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문득 머리를 내저었다. 영민은 마치 잠에서 금방 깨어난 사람마냥 눈을 둥그렇게 뜨고선 사방을 휘이 둘러보았다.
텅 빈 복도, 적막한 B N Q 건물. 그리고 그 고요 속에 홀로 서 있는 자신. 그의 어깨엔 '안전순찰'이라는 완장이 걸려 있었고, 한 손엔 순찰 일지가 들려 있었다. 시간을 보니 운영계를 나온 지 어느덧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뭐야..... 내가 지금 무슨 실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순찰을 돌아야 하는데......'
영민은 얼른 돌아서려다가 다시 한번 B N Q 4호실의 문고리를 바라보았다.
'귀신? 쳇...... 정말 귀신 이야기를 믿었단 말인가 이영민? 참으로 어리석군. 어리석었어......'
좀 전까지 진지하게 4호실의 비밀을 밝히겠다던 자신의 굳은 의지가 순식간에 우습게까지 느껴졌다. 영민은 한심한 생각에 열중하며 여기까지 올라온 자신을 책망했다.
'정신차려라. 이영민. 전빈영 하사는 그저 괴상한 성격의 기인에 불과하고 김대명 하사는 약간 맛이 간 이중 인격자에 불과해. 그런 녀석들이 지들끼리 치고 받고 싸우던 말던 너완 아무 상관이 없는 거야. 아무리 쫄병 하사지만 정신 좀 차려, 이영민, 이 멍청아!'
굳게 닫힌 문고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영민은 지금까지 자신의 생각들을 모조리 부인해대고 있었다.
그리곤 드디어 자신만만히 돌아섰다.
뚜벅......
그런데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기는데......
'하지만 어제밤에 내가 본 건 뭐지?'
썩은 시체 같았던 김대명 하사의 끔찍한 몰골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다. 영민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다시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뭐긴 뭐야? 그게 바로 헛것이라는 거지. 넌 그 때 극도로 신경이 예민했었고 또 피곤했기 때문에 헛 것을 본 것 뿐야.'
그러면서 다시 한 걸음.
그런데......
영민의 머리 속으로 강렬한 이미지의 기억 하나가 또다시 뛰어들었다.
어머니의 관 위에 동그마니 앉아 있었던 그것! 영정 사진 속에서 튀어 나와 자신에게 다가오던 그것! 그 얼굴.
유난히 하얀 얼굴에 붉은 빛이 감도는 둥그런 눈동자. 거기다가 서서히 입언저리가 찢어 올라가며 싸늘한 미소를 짓던 그 냉기 가득한 모습!
영민은 갑자기 그 때로 되돌아가기라도 한 듯 환상에 젖어 식은 땀을 흘렸다. 하얗게 질린 얼굴은 멍하니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때 그것이 내 이름을 불렀었지......
영민아......
하고.
영민아...... 영민아...... 영민아......
그리고 그 때 자신은 이렇게 외쳤었지.
꺼져 귀, 신, 아!
귀신. 어머니. 어머니의 혼령. 어머니의 귀신. 어머니의 얼굴을 한 귀신.
어머니의 얼굴을 한 귀. 신.
김대명 하사의 얼굴을 한 귀. 신!

" 꺼져 귀신아! "

머리 속에서 펼쳐지던 환상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리고 갑자기 튀어나온 자신의 목소리에 놀란 듯 멍하게 서 있는 영민.
그렇다. 그 때 영민은 분명 그렇게 외쳤었다. 귀신이라고...... 자신은 귀신을 보았다고 믿어 왔었다. 기억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 기억은 분명 '귀신'을 본 기억이었다.
급습하는 한기. 식은 땀.
영민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젠 정말로 여길 벗어나고만 싶었다. 어서 빨리......
비척비척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뒷걸음을 치며 걸음을 재촉하는 영민.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철커덕, 툭!
이미 늦었다는 듯 뒤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금속음. 전율하는 영민. 설마하는 마음으로 급히 뒤돌아보면......
삐이이익......
4호실의 문이 조금 열리며 영민의 방문을 뒤늦게 환영한다. 악마의 눈꺼풀이 열리듯, 훅, 강한 냉기를 내뿜으며......
영민은 그만 벼랑 끝에 선 듯한 아찔함을 느꼈다. 분명 금방까지만 해도 굳게 잠기어 있었던 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인가!
순간 영민의 머리 속으로 봇물이 터지듯 꾸역꾸역 밀려드는 수많은 상념들.

박기우 하사의 피로 바다를 이루었었던 1호실!
한밤중에 온통 피칠을 하곤 자신을 찾아왔던 김대명 하사!
그리고 이어서 뛰어든 전빈영 하사가 휘둘렀던 몽둥이!
천장에 달라붙어 있던 어머니의 얼굴을 한 귀신!
눈앞에서 피투성이가 되어가던 오창우 하사의 얼굴!
무표정하게 노려보던 악마같은 김대명 하사!
영정 속에서 튀어나오던 또 다른 어머니의 하얀 얼굴!
그리고 번개 치던 어제밤 4호실에서 보았던 충격적인 장면들!

모든 사실을 과감히 부인해대던 좀 전의 자신만만함은 더이상 영민에게서 볼 수가 없었다.
B N Q 4호실.
그것이 새삼 영민에게 질척거리는 지독한 공포가 되어 눈앞까지 바짝 다가온 것이었다.
삐이이이익......
영민을 재촉이라도 하듯이 4호실의 문이 조금 더 열렸다. 그러나 영민은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다시금 결심을 하며 뒷걸음질을 친다. 더 이상 여기 이 곳에 버티고 있을 용기조차도 바닥이 났는데 무슨 힘으로 저 안을 들어간단 말인가.
전빈영 하사도 작전도로 배수로 작업 현장에 투입되었었다. 지금 영민은 혼자다. 이 텅빈 건물에 오로지 혼자 있는 것이다. 만일 귀신이라던가 그 비슷한 것과 마주치게 되더라도 역시 혼자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영민은 이미 뻣뻣하게 굳어버린 몸을 억지로 비틀며 앞으로 나아갔다. 힘겹게 힘겹게 걸음을 떼고 있었다. 금새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호흡은 가빠졌다. 머리 속엔 오로지 이 저주받은 건물을 일 초라도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힘겹게 앞을 향해 나아가던 영민은 그만 포기를 해버린다. 영민의 전방 10미터 앞. 누군가가 꼿꼿이 선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김대명 하사!
그의 악마같은 무표정!
기겁을 하는 영민. 재빨리 방향을 틀어 중앙계단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급한 마음 만큼 경직된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자 그만 스텝이 엉켜 버린다. 그대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계단을 구르는 영민.

" 으아악! "

고통에 찬 비명이 일순간 건물의 적막을 깨뜨린다. 그러나 이내 공허하게 사라지고 마는 그것은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영민도 알고 있었다.
계단 중턱까지 굴러 떨어진 영민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위를 바라본다. 김대명 하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는지라 계속해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나머지 계단을 마저 내려가는 영민.
그러나 계단을 몇 걸음 내려가던 영민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진다. 밑에서 누군가가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정수리. 상당히 낯이 익은 그 모습에 영민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어린다.
장하사였다. 장유정 하사.
구원자라도 만난 듯 힘이 난 영민은 장하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고함을 지른다.

" 장하사님! 장하사님! 도와주세요! "

건물이 떠나갈 만큼 큰 소리였다. 그러자 올라오던 장하사가 위를 쳐다본다. 희미하게 웃음을 짓는 영민과 눈이 마주친다.
장하사가 아니다! 다시금 경악하는 영민.
영민이 어제 4호실에서 보았던 김대명 하사의 끔찍한 앞모습. 올라오다가 고개를 치켜 든 얼굴은 바로 그 얼굴이었다. 시체처럼 썩어 너덜거리는 살가죽에 뻥 뚫린 눈자위. 그리고 그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빨간 눈동자!

" 으악! "

영민은 다시 몸을 틀어 계단을 올라간다.
다리에 점점 통증이 느껴진다. 뼈에 이상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온몸에 힘이 빠지며 정신이 몽롱해지는 영민.
너무도 절망스러웠다.
영민은 가까스로 다시 3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B N Q 반대쪽 복도로 뛰어가는 영민. 그러나 한참을 뛰어가다보니 그쪽은 반대쪽이 아니었다. 바로 B N Q로 향하는 복도였던 것이다.
눈앞에 B N Q가 보였다. 1, 2, 3,
그리고 4호실까지!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보는 영민. 반대쪽이다. 다시 뒤쪽으로 힘겹게 발걸음을 옮겨본다. 그러다가 문득 시선을 돌려보면 중앙 계단에서는 썩은 시체의 얼굴을 한 김대명 하사가 올라오고 있다.
어헉!
낮은 신음을 토하며 사력을 다해 앞으로 뛰는 영민.
그러나 그의 눈앞에 점점 다가서고 있는건 역시 B N Q !
B N Q다!
묵직한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 맞은 것만 같은 영민.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도무지 이런 상황에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몸 속을 뚫고 파고드는 엄청나게 싸늘한 공포의 기운에는 분명 강한 현실성이 배어나고 있었다.
다시 뒤를 돌아보면 이미 김대명 하사가 복도 중앙에 우뚝 서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그만 맥이 탁 풀려버리는 영민. 조금전과 상황이 같아져 버렸다. 다른 게 있다면 김대명 하사의 무표정했던 얼굴이 끔찍하게 변해버렸고, 자신의 발목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을 가까스로 참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빙판 위를 구르는 듯한 동작으로 김대명 하사가 소리없이 다가온다.
다급해지는 영민. 문득 옆을 바라보았다.
B N Q 1호실!
즉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영민.

" 으아악! "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영민의 기절할 듯한 비명이 다시 터져나온다. 1호실에는 피투성이의 박기우 하사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과 배에서 끊임없이 검붉은 피를 내뿜어대며 영민에게로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는 박기우 하사!
영민은 다시 문을 닫아버리곤 2호실로 향한다. 그러나 2호실 안에는 난생 처음 보는 이가 앉아있다. 그러나 영민은 곧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 부엉이 마냥 뚱그렇게 치켜 뜬 두 눈엔 흰자위만 가득했고 그 한가운덴 빨간 동자 하나가 박혀 있었대. 마치 두 눈 한 가운데를 가늘고 뾰족한 못으로 푹 찔러서 새빨간 핏방울이 살짝 맺혀 있는 것처럼 말야. 그리고 그 끔찍스런 두 눈과는 대조적으로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던 거야. 아니 어쩌면 그 섬뜩한 눈동자에 기묘하게 어울리는 미소였겠지.
그리고 두 손... 녀석은 두 손을 마치 똑똑히 보란 듯이 문 쪽으로 쫙 펴고 있었는데 그 손바닥은 시뻘건 피칠로 가득했어... "

장하사가 자신에게 얘기해 주었던 4호실의 귀신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서 묘사되었던 그. 바로 그녀석이었다! 그 녀석이 지금 2호실 바닥 한 가운데 꼿꼿이 앉아 기다렸다는 듯 영민을 반기고 있다. 피맺힌 눈동자를 치켜 뜬 채로 끔찍한 미소를 지으며, 시뻘건 피가 가득 묻어있는 두 손을 똑똑히 보란 듯 영민을 향해 쫙 펼친 상태로......
영민은 다시 문을 닫아 버린다. 떨리는 손이 3호실 문고리로 향하는 순간, 영민의 머리속을 스치는 두가지 영상! 하나는 피투성이가 되어가던 오창우 하사의 얼굴이고 또 하나는 어머니의 모습을 한 하얀 얼굴의 귀신이었다. 그 어느 것이라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3호실로 향하던 영민의 손이 방향을 바꾸더니 4호실 문고리를 돌린다. 그리고 즉시 안으로 들어서는 영민.
B N Q 4호실!
그러나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곧바로 문을 잠궈 버리는 영민. 그리고는 문에 귀를 대고서 바깥의 동요를 감지해 본다. 바깥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얼른 뒤를 돌아서 다시 한번 4호실 안을 찬찬히 살피는 영민. 언제나처럼 가득 쌓여 있는 매트리스와 침구들, 그리고 전투장구들...... 인기척은 느낄 수 없었다. 분명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드디어 길고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영민. 일단 진정할 여유가 생겼다. 그러자 순식간에 온몸의 긴장감이 허물어지면서 잊고 있었던 발목의 통증이 머리를 쳐들었다.

" 우욱...... "

영민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으며 발목을 문질렀다. 통증은 정말 견디기 힘들만큼 컸다. 어떻게 이걸 참고 여기까지 왔나 싶을 정도였다.
영민은 4호실의 문앞에 주저앉아 머리를 기댄 채 밖의 동요를 계속해서 감지하는 한편 인상을 구기며 손으로는 발목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순간, 영민의 옆에 있던 매트리스 하나가 조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전혀 눈치를 못 채고서 계속 발목만 들여다보는 영민. 매트리스는 계속해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 속에서 기어나오는 듯 들썩거리고 있었다.
영민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이미 매트리스는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음을 확인한 영민의 고개가 다시 문 쪽으로 향할 때 움직임을 멈춘 매트리스 위로 천천히 손 하나가 올라온다. 손이 온전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자 다음에는 시커먼 머리가 올라왔다. 누군가가 매트리스 뒤에서 서서히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발목을 문지르던 영민의 손이 뚝 멈춘다. 이제서야 영민에게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 인기척은 아니지만 뭔가가 있다는 느낌. 중학교 때 자신의 집 앞, 계단을 오르며 느꼈던 바로 그 기운. 그것을 비로소 감지하게 된다. 영민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상황을 부인하고만 싶었기에. 그러나 그 사이 매트리스 뒤에서 누군가가 완전히 몸을 빠져 나왔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영민. 아무 것도 보고 싶지가 않았다.
잠시 후 영민의 귀를 자극하는 목소리. 영민의 어린 시절, 동네에 살던 입이 양쪽으로 찢어졌던 미친 사람이 내던 그 목소리. 마치 외계인의 목소리같은, 혹은 유령의 목소리같은, 끔찍하게 듣고 싶지 않았던 그 목소리...... 어제 밤 4호실에서 들었던 그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드디어 이렇게 여길 찾아줬구나 이영민. "

" ...... "

" B N Q 4호실로...... "

순간 휙, 몸을 일으킨 영민이 4호실 문고리를 힘껏 돌린다. 그러나 문은 굳게 잠기어 있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거칠게 문고리를 돌려대는 영민. 그렇게 자꾸만 돌려대면 문이 열리기라도 하듯이. 나중에는 주먹으로 문을 쾅쾅 쳐댄다. 그러나 소용 없는 짓이었다.

" 소용없는 짓이다. 이영민! "

이윽고 영민의 주먹질이 멈추었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은 무서운 전율과 공포에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마침내 영민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 곳엔 조금 전까지 자신의 뒤를 쫓아오던 그 끔찍한 시체얼굴의 김대명 하사가 여유롭게 서 있었다. 예상을 했었지만 그래도 영민의 입에선 저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소용이 없는 비명이었다.

" 김...... 김하사님...... "

영민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직이 상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러나 상대는 여전히 냉기만 내뿜어댈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시한번 용기를 내어 입을 여는 영민.

" 김하사님! 정신 차리십시오. 예? 접니다. 저, 이하사라구요. "

그러자 허물어져가는 동굴같은 김대명 하사의 입이 열린다.

" 난 김대명이 아니다. 단지 김대명의 몸을 빌렸을 뿐이지. "

" ......! "

" 미안하지만 널 죽여야겠어...... 넌 나를 위해서 죽어줘야겠다. "

더 이상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 영민. 공포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마침내 궁지에 몰리자 갑자기 분노가 치솟았다. 그것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도망자의 마지막 발악 같은 것이었다. 영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 김대명 하사가 아니라면, 그럼 넌 뭐야? 어? "

한번 고함을 지르자 악이 받힌 영민의 분노는 멈출 수가 없었다.

" 넌 빌어먹을 악귀야. 그렇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씨팔 악귀새끼야! 왜 날 죽이려는 거야? 왜? 도대체 얼마나 더 사람들을 괴롭혀야 니 직성이 풀리는 거야? "

" 난 악귀가 아냐. "

" 닥쳐! 이 악귀야! "

영민은 옆에 있던 탄띠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그것을 휘두르며 시체 얼굴의 김대명 하사에게 뛰어들었다.

" 너 같은 악귀는 요절이 나야 해! "

하지만 영민의 행동은 역시 죽음을 앞둔 자의 최후의 발악에 불과했다. 영민이 휘두른 탄띠는 허공을 갈랐고, 대신에 영민은 뒷덜미에 예리한 통증을 느끼며 앞으로 쓰러졌다. 윽, 하는 신음과 함께 뒷목으로 손이 가는 영민. 축축했다.
손바닥에 시뻘건 피가 가득 묻어나온다. 기겁을 하며 돌아다보는 영민. 상대의 손아귀엔 어느샌가 날카로운 유리조각이 쥐어져 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깨어진 거울 조각이다. 저것이 박기우 하사를 피투성이로 만들었던 그것이란 말인가. 이제 곧 자신도 박기우 하사처럼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영민은 새삼 소름이 끼쳤다. 아니 그렇게 해서 박기우 하사처럼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완전하게 죽을 것이 분명했다.
영민은 다가오는 김대명 하사를 향해 다시 탄띠를 집어던졌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개의치 않고 영민의 피가 배어있는 거울 조각을 비스듬히 쥔 채 다가오는 김대명 하사.

" 걱정마. 기우처럼 피범벅으로 만들진 않을 테니까. 대신 그놈처럼 발광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이영민...... "

마치 영민의 생각을 훤히 읽고 있는 듯 이렇게 말하며 싸늘하게 미소를 짓는 김대명 하사. 영민은 치를 떨었다. 그러다가 조급한 마음으로 다시 입을 연다.

" 도대체 왜? 이유가 뭐야? 이유가......? 날 죽이려는 이유가 있을 것 아냐?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러는 거냐? 무슨 원한이 있다고...... "

어느새 영민의 바로 앞에 우뚝 선 김대명 하사. 날카로운 거울조각을 위로 치켜든다. 그리곤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원한이 있어서가 아냐! 나도 이젠 그만 떠돌고 싶어서지. "

" 뭐? 뭐야? 떠돌다니......? "

영민이 의아해하며 상대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대답 대신 거울조각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고 있었다.
영민은 그 순간 모든 것을 포기했다.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가는 박기우 하사의 모습이 순간 눈앞을 스쳤지만, 영민은 그러기는 싫었다. 죽을 것 같으면, 상황이 그렇게 되어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면 그저 단번에 깨끗이 죽고 싶었다.
역시 그런 영민의 마음을 제대로 읽은 듯 거울 조각은 정확히 영민의 목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왔다.
영민은 눈을 감았다.
'이젠 정말 죽는구나!'
위기의 순간......

빠각!
둔탁한 마찰음이 들려왔고 영민의 목을 향해 날아오던 거울조각은 순식간에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기세 등등하던 김대명 하사는 머리에서 피를 내뿜으며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영민이 놀라 눈을 부릅뜨며 앞을 바라보면 그렇게 굳게 닫혀있던 B N Q 4호실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엔 언제 들어왔는지 축축히 비에 젖은 전투복 차림의 전빈영 하사가 무섭게 눈을 치켜 뜬 채 우뚝 서있다. 그의 한 손엔 예의 그 몽둥이가 쥐어져 있다.
귀신잡는 몽둥이가......
영민은 그만 실성한 사람마냥 힘없이 웃음을 터뜨린다. 목뒤로 피를 흘리며 웃음을 터뜨리는 그의 모습이 살벌한 지금의 분위기와는 너무도 대조적인지라 B N Q 4호실의 풍경이 너무도 그로테스크했다.
" 전, 하, 사, 님...... "
영민이 드디어 웃음을 거두고는 힘겹게 입을 연다. 그러나 그런 영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전빈영 하사. 그의 튀어나올 듯 맹렬한 눈빛은 쓰러진 김대명 하사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하고만 있었다.
김대명 하사는 좀 전의 그 일격에 제대로 맞은 모양이었다. 매트리스 위로 쓰러진 채 힘없이 꿈틀거리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나직이 토해나고 있는 김대명 하사. 그의 머리에서는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마도 죽어가는 모양이었다.
영민은 가까스로 기운을 차려 전빈영 하사쪽으로 기어갔다. 뒷목에선 여전히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거기에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전빈영 하사는 여전히 몽둥이를 단단히 거머쥔 채, 조심스레 김대명 하사 쪽으로 다가갔다. 한동안 힘겹게 꿈틀대던 김대명 하사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더니 어느 순간 완전 멈춘다. 시체처럼 미동도 없다.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는 전빈영 하사와 영민. 이윽고 영민이 입을 열었다.

" 죽은 겁니까? "

그러나 전빈영 하사는 아무런 대답도,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저 쓰러진 김대명 하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영민은 다행스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불안하기도 했다.
뒷목을 움켜쥐며 침상 위로 걸터앉는 영민.
그런데 순간, 갑자기 전빈영 하사가 벼락같은 고함을 친다.

" 어서 문닫아! "

영민은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에 흠칫 놀랐으나 반사적으로 몸을 튕겨 조금 열려진 4호실의 문을 닫아버렸다.

" 으악! "

문이 닫히는 순간 누군가가 영민을 확 밀어버린다. 뒤로 나자빠지며 놀라는 영민. 조금전까지 죽은 듯 매트리스 위에 쓰러져 있던 김대명 하사가 어느샌가 다가와 영민을 밀쳐내고 닫힌 문을 다시 열고 있었던 것이다.

" 잡아! "

전빈영 하사가 다시 고함을 내질렀고, 그와 거의 동시에 영민의 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와 김대명 하사의 두 다리를 붙잡아 비틀었다. 그러자 급히 밖으로 나가려던 김대명 하사의 상반신이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더니 그대로 옆으로 쓰러진다.
바로 그 순간, 영민의 두 눈엔 김대명 하사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휙 빠져나가는게 똑똑히 보였다. 영민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4호실 밖으로 빠져나가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와 동시에 다시 한번 문을 발로 걷어차 버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성큼 다가온 전빈영 하사의 몽둥이가 웅, 소리를 내며 바람을 가른다.

빠아악!

그 소리는 마치 그로키 상태의 복서에게 날리는 마지막 한방의 소리와도 같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놀랍게도 단 몇 초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