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安重根)은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했다. 2008년 봄에는 회령으로 홍범도(洪範圖)를 찾아가 만났다. 그러나 홍범도와 연합작전은 일시 포기하게 되었다. 홍범도를 만나본 결과 시세에 통하지 않고 무지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홍범도는 산포수들을 동원해 산악지대에서 일본군에 크게 타격을 준 대표적인 의병장이었다. 안중근은 다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설득하고 최재형(崔在亨)·이위종(李瑋鍾)과도 만났다.
이범진(李範晉)의 아들 이위종은 헤이그 특사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1907년 헤이그에서 활동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무렵 국경지대에서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이범윤도 본격적인 의병항쟁 준비에 나섰다. 그러던 중 이범윤은 의병항쟁을 준비한다는 이유로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았다. 이에 그는 훈춘의 산악지대에서 거병을 모색했다. 최재형과 이위종도 각각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있었다. 이범윤 세력과 최재형 세력은 한동안 깊은 갈등 관계에 있었다. 일종의 파벌 싸움이었다. 그러나 두 세력은 갈등을 뛰어넘어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국권을 침탈하는 적진 앞에서 사소한 이해관계로 언제까지나 분열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안중근의 서명도 포함된 ‘결의록’과 ‘동맹록’을 작성하고 총독에 김두성(金斗星), 총대장에 이범윤을 추대하는 창의회(彰義會) 의병 연합군이 창설되었다. 총독인 김두성이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숙제로 남아 있다. 의병 연합군의 첫 자리를 차지한 위치로 볼 때 유인석(柳麟錫)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때 결성한 의병부대의 숫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약 4천 8백여 명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다. 안중근이 속한 최재형 세력의 도영장(都營將)은 함북관찰부 경무관 출신인 전제익이 맡았고 참모장은 오내범, 참모에는 장봉한과 지운경이 각각 맡았다. 안중근은 우영장, 의형제를 맺은 엄인섭(嚴仁燮)은 좌영장이 되었다. 좌영과 우영에는 각각 3개 중대의 병력이 배치되었다. 소속 의병은 약 300여명에 이르렀다. 안중근은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 이후 자신의 공식 직함으로 내세운 ‘의군참모중장(義軍參謀中將)’에 선임되었다.
‘그때 김두성과 이범윤도 함께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들은 이미 총독과 대장으로 피임된 사람들이었고, 나는 의병부대의 참모중장에 피선되었다. 나는 의병과 병기들을 비밀리에 수송하여 두만강 근처에 모은 다음 그곳에서 큰 일을 의논하기로 하였다.’
의병 연합군이 결성되는 데는 최재형과 이범진의 많은 지원과 지역 한국인들의 모금 그리고 안중근이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모금한 약 4천원의 기금이 큰 도움이 되었다. 100여정의 총기(銃器)도 마련되었다.
안중근은 참모중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의병들의 훈련과 사상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의 기질이 완고하여, 첫째 권력이 있거나 돈이 많은 사람, 둘째 주먹이 센 사람, 셋째 관직이 높은 사람, 넷째 나이 많은 사람을 높이 여겨, 나 같이 네 가지 조건 중에서 한 가지도 갖추지 못한 사람의 말은 따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정신을 바꾸고 전투원으로 육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멈추지 않고 이들을 설득하고 훈련시켜 혁혁한 의병으로 만들었다. 안중근은 의병부대에 참여한 동포들에게 일장의 훈시를 했다.
“지금 우리의 병력은 2~3백 명 밖에 안된다.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니 적을 가벼히 여겨서는 안된다. 더구나 병법에 이르기를 "아무리 백 번 급한 일이 있다 하여도 반드시 만전의 방책을 세운 다음 큰일을 꾀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들이 한 번의 의거로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러나 한 번에 이루지 못하면 두 번, 두 번에 이루지 못하면 세 번, 그렇게 네 번, 열 번에 이르고, 백 번을 꺾여도 굴함이 없이 금년에 못 이루면 내년, 내년에 못이루면 후년, 그렇게 십년 백년이 가고, 또 만일 우리 대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아들 대, 손자 대에 가서라도 반드시 대한국의 독립권을 회복하고야 말리라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나고, 급히 나가고 천천히 나가고, 앞일을 준비하고 뒷일도 마련하여, 모든 것을 갖추면 반드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앞장 서서 나온 사람들은 병약하거나 나이 많은 사람이라도 상관이 없다. 그 다음에 청년들이 사회를 조직하고, 민심을 단합하고, 유년을 교육하여, 미리 앞 일에 대비하는 한편, 여러 가지 실업에 힘쓰고 실력을 양성한다면 그 때에는 큰 일도 기필코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 ‘처변삼사(處變三事)’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구한말에 유인석(柳麟錫)이란 선비가 있었다. 호를 의암(毅菴)이라 하고, 조선 철종(哲宗) 대의 거유 이항로(李恒老)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그의 학통을 이어받았다.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 체결될 때 반대 상소를 시작으로 김홍집 친일내각이 성립되자 의병장으로 나서 충주와 제천 등지에서 친일관료를 죽이고 일제에 항거하다가 만주와 러시아로 망명했다. 뒷날 블라디보스톡에서 13도의군 도총재에 추대되어 일제와 치열하게 싸웠다.
유인석은 선비로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거병하면서 당시 조선의 처지에서 유학자들이 택해야 할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자신은 결연하게 실천에 나섰다.
‘무릇 우리 유학의 도가 지극히 위대하고 몸은 귀중하니, 도(道)가 끝나려 하는 데 몸이 도와 함께 같이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스스로 자결하여 뜻을 지킴(自靖遂志)이 정당하고, 도가 없어지려는 것을 참지 못해 몸이 도와 함께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떠나가서 옛 것을 지킴(去之守舊)을 말하는 것이니 이도 정당하며, 도는 동포와 함께 얻은 것이라서 몸이 도와 함께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거병(擧兵)하여 깨끗이 함(擧義掃淸)을 말함 또한 정당하다.’
유인석이 제시한 ‘처변삼사(處變三事)’는 유학자나 선비들의 몫만은 아니었다. 망천하망국가(亡天下亡國家)의 위기를 당하여 이 땅에 생을 부여받아 사는 모든 생령들에게 주어진 선택이고 한편으로는 의무기도 했다. 경술국치를 당하여 순국한 매천(梅泉) 황현(黃玹)은「절명시(絶命詩)」에서 “내가 여기 자결할 뿐 의병을 일으키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거병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은 “모두 죽으면 누가 나라를 위해 싸우겠는가”라고 탄식하며 노구를 이끌고 직접 의병항쟁에 나섰다.
『대한의용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전기』5.반일의병항쟁 ⑶
○ 창의회(彰義會) 의용군 참모중장으로 출전
안중근(安重根)은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했다. 2008년 봄에는 회령으로 홍범도(洪範圖)를 찾아가 만났다. 그러나 홍범도와 연합작전은 일시 포기하게 되었다. 홍범도를 만나본 결과 시세에 통하지 않고 무지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홍범도는 산포수들을 동원해 산악지대에서 일본군에 크게 타격을 준 대표적인 의병장이었다. 안중근은 다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설득하고 최재형(崔在亨)·이위종(李瑋鍾)과도 만났다.
이범진(李範晉)의 아들 이위종은 헤이그 특사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1907년 헤이그에서 활동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무렵 국경지대에서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이범윤도 본격적인 의병항쟁 준비에 나섰다. 그러던 중 이범윤은 의병항쟁을 준비한다는 이유로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았다. 이에 그는 훈춘의 산악지대에서 거병을 모색했다. 최재형과 이위종도 각각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있었다. 이범윤 세력과 최재형 세력은 한동안 깊은 갈등 관계에 있었다. 일종의 파벌 싸움이었다. 그러나 두 세력은 갈등을 뛰어넘어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국권을 침탈하는 적진 앞에서 사소한 이해관계로 언제까지나 분열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안중근의 서명도 포함된 ‘결의록’과 ‘동맹록’을 작성하고 총독에 김두성(金斗星), 총대장에 이범윤을 추대하는 창의회(彰義會) 의병 연합군이 창설되었다. 총독인 김두성이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숙제로 남아 있다. 의병 연합군의 첫 자리를 차지한 위치로 볼 때 유인석(柳麟錫)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때 결성한 의병부대의 숫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약 4천 8백여 명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다. 안중근이 속한 최재형 세력의 도영장(都營將)은 함북관찰부 경무관 출신인 전제익이 맡았고 참모장은 오내범, 참모에는 장봉한과 지운경이 각각 맡았다. 안중근은 우영장, 의형제를 맺은 엄인섭(嚴仁燮)은 좌영장이 되었다. 좌영과 우영에는 각각 3개 중대의 병력이 배치되었다. 소속 의병은 약 300여명에 이르렀다. 안중근은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 이후 자신의 공식 직함으로 내세운 ‘의군참모중장(義軍參謀中將)’에 선임되었다.
‘그때 김두성과 이범윤도 함께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들은 이미 총독과 대장으로 피임된 사람들이었고, 나는 의병부대의 참모중장에 피선되었다. 나는 의병과 병기들을 비밀리에 수송하여 두만강 근처에 모은 다음 그곳에서 큰 일을 의논하기로 하였다.’
의병 연합군이 결성되는 데는 최재형과 이범진의 많은 지원과 지역 한국인들의 모금 그리고 안중근이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모금한 약 4천원의 기금이 큰 도움이 되었다. 100여정의 총기(銃器)도 마련되었다.
안중근은 참모중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의병들의 훈련과 사상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의 기질이 완고하여, 첫째 권력이 있거나 돈이 많은 사람, 둘째 주먹이 센 사람, 셋째 관직이 높은 사람, 넷째 나이 많은 사람을 높이 여겨, 나 같이 네 가지 조건 중에서 한 가지도 갖추지 못한 사람의 말은 따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정신을 바꾸고 전투원으로 육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멈추지 않고 이들을 설득하고 훈련시켜 혁혁한 의병으로 만들었다. 안중근은 의병부대에 참여한 동포들에게 일장의 훈시를 했다.
“지금 우리의 병력은 2~3백 명 밖에 안된다.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니 적을 가벼히 여겨서는 안된다. 더구나 병법에 이르기를 "아무리 백 번 급한 일이 있다 하여도 반드시 만전의 방책을 세운 다음 큰일을 꾀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들이 한 번의 의거로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러나 한 번에 이루지 못하면 두 번, 두 번에 이루지 못하면 세 번, 그렇게 네 번, 열 번에 이르고, 백 번을 꺾여도 굴함이 없이 금년에 못 이루면 내년, 내년에 못이루면 후년, 그렇게 십년 백년이 가고, 또 만일 우리 대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아들 대, 손자 대에 가서라도 반드시 대한국의 독립권을 회복하고야 말리라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나고, 급히 나가고 천천히 나가고, 앞일을 준비하고 뒷일도 마련하여, 모든 것을 갖추면 반드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앞장 서서 나온 사람들은 병약하거나 나이 많은 사람이라도 상관이 없다. 그 다음에 청년들이 사회를 조직하고, 민심을 단합하고, 유년을 교육하여, 미리 앞 일에 대비하는 한편, 여러 가지 실업에 힘쓰고 실력을 양성한다면 그 때에는 큰 일도 기필코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 ‘처변삼사(處變三事)’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구한말에 유인석(柳麟錫)이란 선비가 있었다. 호를 의암(毅菴)이라 하고, 조선 철종(哲宗) 대의 거유 이항로(李恒老)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그의 학통을 이어받았다.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 체결될 때 반대 상소를 시작으로 김홍집 친일내각이 성립되자 의병장으로 나서 충주와 제천 등지에서 친일관료를 죽이고 일제에 항거하다가 만주와 러시아로 망명했다. 뒷날 블라디보스톡에서 13도의군 도총재에 추대되어 일제와 치열하게 싸웠다.
유인석은 선비로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거병하면서 당시 조선의 처지에서 유학자들이 택해야 할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자신은 결연하게 실천에 나섰다.
‘무릇 우리 유학의 도가 지극히 위대하고 몸은 귀중하니, 도(道)가 끝나려 하는 데 몸이 도와 함께 같이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스스로 자결하여 뜻을 지킴(自靖遂志)이 정당하고, 도가 없어지려는 것을 참지 못해 몸이 도와 함께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떠나가서 옛 것을 지킴(去之守舊)을 말하는 것이니 이도 정당하며, 도는 동포와 함께 얻은 것이라서 몸이 도와 함께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거병(擧兵)하여 깨끗이 함(擧義掃淸)을 말함 또한 정당하다.’
유인석이 제시한 ‘처변삼사(處變三事)’는 유학자나 선비들의 몫만은 아니었다. 망천하망국가(亡天下亡國家)의 위기를 당하여 이 땅에 생을 부여받아 사는 모든 생령들에게 주어진 선택이고 한편으로는 의무기도 했다. 경술국치를 당하여 순국한 매천(梅泉) 황현(黃玹)은「절명시(絶命詩)」에서 “내가 여기 자결할 뿐 의병을 일으키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거병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은 “모두 죽으면 누가 나라를 위해 싸우겠는가”라고 탄식하며 노구를 이끌고 직접 의병항쟁에 나섰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